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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할 줄 아나

등록일 2024-05-22 19:09 게재일 2024-05-2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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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만개한 포항 흥해 이팝나무 군락지에 들어선다. 우리 조상들은 이팝나무 아래에서 정성껏 치성을 드리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드문드문 피면 가뭄의 피해가 있으며, 꽃이 잘 피지 않으면 흉년이 온다고 믿었다. 밥은 우리네 삶의 축이다. 생명 유지를 위한 기반으로 식량은 중요했기에,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리라.

고봉처럼 피어난 이팝꽃에서 밥에 대한 추억을 읽는다. 눈보다 마음이 먼저 쉼 없이 훑어내려 간다. 먹먹하게 뭉쳐져 있던 기억이 머뭇거림 없이 시나브로 풀어헤쳐진다. 첫눈 내리던 날, 외할머니 장례식을 치렀다. 돌아가시기 두 주일 전쯤 할머니를 뵈러 갔다. 보름째 곡기를 끊고 마실 것만 겨우 드신다고 했다. 친정어머니가 내 이름을 말하며 할머니에게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다. 노환으로 고생하던 중에 눈까지 침침한데도 나를 알아보고는 말씀을 드문드문 건네셨다.

“니, 밥 할 줄 아나?”

느닷없는 말에 한순간 긴장이 풀렸다.

“할매는, 내 결혼한지가 언젠데…. 밥 굶고 살까봐 걱정하노.”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뼈만 앙상한 할머니의 두 손을 맞잡고 말끝을 흐렸다.

사람은 일생을 정리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가질까. 아마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일이나 마음 아팠던 일이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밥 먹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생의 소실점을 앞에 두고서도 밥 생각을 하셨나 보다.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친 고단한 세대였다. 너도나도 배곯던 시절, 식구들과 하얀 쌀밥을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궁핍한 살림에 밥은커녕 굶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당신 자녀 사남매와 고만고만한 친척아이까지 키웠으니, 먹거리는 늘 부족했다. 할머니의 꿈은 손수 마련한 몇 뙈기의 논에 벼농사를 지어 김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고봉으로 퍼 담아 자식들에게 먹여 보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끝내 논을 소유해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평생 밭에서 일하시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텃밭에 묻히셨다. 논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으니 손수 거둬들인 쌀로 밥을 짓는 것은 애당초 포기했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삶의 끄트머리에서조차 쌀밥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셨나 보다.

나는 어릴 적 외가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할머니 집에 잠시 맡겨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엄마를 찾으며 울었지만 생활에 차츰 적응하면서부터는 분주했다. 고양이를 쫓아다니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장독대 옆의 무궁화 꽃 그림자가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콩밭 매는 할머니 옆에서 실컷 흙장난을 하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흘러 밥때가 되었다.

할머니는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다. 향나무 아래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솥에 붓고, 청솔가지를 아궁이 속에 넣어 불을 지피셨다. 밥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다 지쳐 허기진 배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채우고 마당으로 나와 놀고 다시 부엌으로 가기를 두세 번 하면, “이제 밥 다 됐데이.”

할머니의 밥 먹으라는 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던 할머니! 나를 키웠던 그 무렵 생각이 나셨던 것일까. 손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가난했던 시절에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했다고 가슴 한편에 항상 애처로움으로 묻어두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삼오날 할머니 산소에 갔다. 옷가지를 태우고 외가 터를 둘러보다가 찌그러진 부엌문을 조심스럽게 밀쳤다. 검게 그을린 아궁이는 제 할 일을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괜스레 사금파리 한 조각을 집어 그 속에 던져 넣었다. 아궁이는 놀란 듯 먼지를 풀풀 날렸다.

바람이 불자, 이팝나무가 하얀 꽃비를 흩뿌린다. 그 모습이 꼭,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뽀얀 쌀밥을 내게 보내는 것 같아 두 손 가득 받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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