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사는 딸네 식구가 간만에 집에 온다. 누나가 온다는 소식에 아들도 오겠다고 한다.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묻자, 망설이지 않고 하나같이 “엄마가 손수 끓인 순두부찌개”라고 했다. 때마침 길 건너에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다행이다. 장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두부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로 향했다. 김이 나는 두부 모판 옆에 봉지 두 개가 서 있다. 두붓물에 잠긴 순두부의 따뜻함과 몽글한 순도가 마음에 든다.
냉장고를 뒤져 양파를 다듬고 당근을 깎는다. 파와 고추 곁에 잘게 썬 애호박을 담는다. 조갯살을 넣을까 하다가 딸과 아들의 입이 기억하는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를 꺼낸다. 고추기름을 만들고 고기부터 볶기 시작했다. 빨간 국물을 보는 순간, 차고 방에서 만났던 그녀가 떠오른다. 손이 저절로 옛 기억의 맛을 쫓아가고 있다.
30년 전, 남편의 첫 사업 부도로 나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유치원생인 딸과 어린이집 다니는 아들의 오후를 미술학원에 맡기며 내가 간 곳은 수학 학습지 사무실이었다. 오전에 전화로 학부모를 먼저 설득해야 했고, 오후에는 학생의 학습 수준에 맞게 수업 단계를 정해 선생님을 배치해 주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던 그날, 아들 녀석이 눈 뜨자마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칭얼거렸다. 기어코 눈물 콧물이 범벅된 녀석을 선생님 손에 넘기고 돌아섰다. 아이는 얼굴을 창문에 붙이고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단계별 학습지가 담긴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왔다. 빗속을 걸어 미리 약속한 주소를 찾아 골목을 헤맸다.
주소지를 들고 간 곳은 가정집 차고지를 개조해 만든 단칸방이었다. 집 안이 훤히 보이는 곳에 학생의 엄마가 홀치기 틀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일에 방해될까 봐 한참 비속에 서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서자, 그녀가 반갑게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라던 그녀는 재바르게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학습지 가방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허둥거렸다. 내 등 뒤로 학교에서 돌아온 남자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빗물에 젖은 발을 씻고 들어오는 아이와 함께 얼떨결에 나도 둘레 밥상 앞에 앉았다. 갓 지은 밥을 세 그릇 올린 그녀는 가운데에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찌개 냄비를 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그녀는 매일 아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새 밥을 짓는다고 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따뜻하게 배부터 채워야 한다며 웃었다. 고추기름에 어우러진 찌개를 보자, 아침도 먹다 만 내 배에서 소리가 났다. 내 숟가락은 염치도 없이 들락거렸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허기진 마음까지 몽글해졌다.
상을 물리고, 학습지를 풀던 아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동글납작한 아이를 보자, 유리창에 코를 문대며 울던 아들이 생각났다. 나는 애써 웃으며 문제 푸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막힌 곳을 뚫어주자, 아이는 거침없이 풀어나갔다. 그녀는 멀찌감치 앉아 홀치기를 하며 웃었다. 학습지 하는 아이를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순두부찌개 요리법이 적힌 종이를 받아왔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그녀가 말한 순두부를 샀다. 나는 그녀의 솜씨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 밥상에 올렸다. 찌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남편과 아이들이 이내 밥 한 그릇과 찌개 그릇을 비우고도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국물까지 마신 아들이 나를 보며 웃었다. 어스름 속에 비가 그치고 있었다.
그 후로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순두부찌개를 끓인다. 고추기름을 내면, 오랜 기억 속으로 들어가 갓 지은 밥 냄새를 맡고, 돼지비계가 뜬 순두부찌개를 떠먹는다. 세월이 흠씬 지나버린 지금도 그 둘레밥상을 기억한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인 밥상이 시끌벅적하다. 딸과 아들의 숟가락이 찌개냄비에 먼저 간다. “바로 이 맛이야.” 조미료를 넣지 않은 자리에 뭔지 모를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아들의 말에 딸이 “정성”이라며 맞장구친다. 정성보다 허기진 내 마음을 채워주었던 그녀가 함께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순두부찌개가 맛있는 밤이다.
/윤명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