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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안의 잎이 시들기 전에

초등학교2학년인 지율이는 나에게 꼬마박사로 불린다. 나는 최근 들어 이 아이만큼 나를 붙잡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해 주는 학생을 만난 적이 없다. 오늘도 나를 보자마자 벌레잡이식물인 파리지옥에 대해 뜻밖의 질문을 건넸다. “선생님, 파리지옥은 파리 세 마리를 먹으면 죽는 거 알아요?” 내가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며,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해 보여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전혀 몰랐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지율이는 입을 크게 벌리더니 마치 세상의 비밀을 막 풀어낸 사람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예요. 욕심을 너무 부려서 죽는대요.” 나는 그 말투가 어찌나 도덕책 같던지 웃음이 났다. 그러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순간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찔렸다. 욕심을 부리다 죽는다니. 어쩐지 나의 이야기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몇 년 전, 나는 빈혈 수치가 높아서 고생했다. 아침과 점심을 습관처럼 자주 거르는 날이 많았고, 저녁마저 밤늦게 빵 한 조각과 커피로 때우기 일쑤였다. 잠을 자는 시간도 불규칙적이었다. 강의준비와, 읽어야 될 책, 맡은 일들이 온몸의 세포를 부유하며 나를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냈다. 밤이면해야 할 일들의 그림자가 자꾸만 늘어나 새벽이 깊도록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그 말은 어느새 내 안에 뿌리내린 주문처럼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버티다가 언제부터인가 어지럼증이 무시로 일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몸이 예전처럼 가볍지 않고 무거웠다. 하루를 힘없이 시작하기 일쑤였다. 나는 참을 만큼 참다가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진단은 빈혈이었다. 몸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의사는 나에게 체력이 바닥났으니 휴식이 필요하단다. 나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빙글빙글 끝없이 맴돌았다. ‘조금만 더, 하루만 더’라는 주문은 나를 갉아먹는 덫이 되어 있었다. 몸은 멈춰 섰는데, 마음은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바로 나였다. 지율이가 말해준 파리지옥이 떠올랐다. 파리 한 마리가 잎에 닿을 때마다 파리지옥은 한 번의 소화를 위해 온 에너지를 쓴다. 몇 번을 반복하면 그 잎은 기능을 상실해 더는 버티지 못해 시든다. 잎을 열어야 먹이가 들어올 텐데, 힘이 없어 더 열지 못한다. 그러나 식물 전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시든 잎 아래에서 새로운 잎이 조용히 돋아난다. 그렇다면 닫는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표시가 아닐까. 파리지옥은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에너지가 고갈되었음을 알아차리고 먹이를 더 이상 소화시킬 힘이 없을 때 잎을 다문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때 스스로 입을 닫는 것과 같다. 그 단순한 움직임은 생존의 방식이다. 돌이켜보면나는 그 지혜를 알지 못했다. 끝없이 삼키려고 욕심을 부렸다. 또한 파리지옥처럼 살아남기 위해 잎을 닫는 것이 아니라, 버티기 위해 ‘닫음’을 되풀이했다. 일에 치여 감정을 닫고관계 속에서 상처받기 두려워 마음을 닫았다. 속을 털어놓으면 약해질까 봐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그런데 닫음이 쌓일수록내 안의 잎이 하나둘씩 조용히 시들고 있었다. 시드는 순간은 언제나 소리가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파리지옥으로부터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내가 품을 수 있는 만큼만 품고그 이상은 놓아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생의 균형을 회복하는 첫 걸음일 것이다. 앞으로는 아무 감정이나 억지로 삼키지 말고일에도 욕심을 덜어내기로 했다. 이제 나는 일과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금씩 여백을 주기로 했다. 일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창문을 연다. 내 안의 잎이 시들기 전에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멈춤의 시간 속에서내 안의 새로운 잎이 자라는 것을 느낀다. 그 잎은 더 단단하고, 더 푸르다. /정미영 수필가

2025-11-19

간장종지

기분 좋았던 술자리가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조곤조곤 말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간다. 우리 앞에 서 있던, 나보다 열 살쯤은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른한 행복감으로 끝나야 할 술자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퇴근 시간, 남편이 술이 고프다며 데이트를 청했다. 데이트를 하자는 말에는 다른 곳에서는 내놓지 못한 뭔가가 있다. 마침 나도 할 말이 많은 터라 반가웠다. 집 앞에 새로 개업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비를 머금은 하늘이 어둠과 함께 낮게 깔렸다. 안주를 저녁삼아 술을 마셨다. 서로 소주잔을 채워주며 이런저런 일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채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안주가 떨어졌다. 오징어 튀김을 주문한 게 화근이 되었다. 푸짐하게 담긴 갓 튀겨온 오징어와 고추는 금방 새 옷을 갈아입은 듯 향긋했다. 튀김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연신 맛있다는 말을 하며 주고받은 술잔에 취기가 제 먼저 올라앉았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응석부리듯이 일러 바쳤다. 평소 인품 있어 보이던 그가 그렇게 밴댕이 소갈딱지인지 몰랐다느니 젊은 사람이 머리가 나빠서 그렇다며 고객의 험담을 주절주절 내뱉고 나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아직 튀김이 반은 더 남았는데 간장이 바닥을 보였다. 아주머니를 불러 간장종지를 내밀자, 그녀는 셀프라면서 간장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을 했다. 남편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지금까지 고추장 종지도 앞 접시도 두 개씩 가져다 줬으면서 왜 간장은 한 개만 가지고 왔냐고 물었다. 사람이 두 명이면 당연 간장도 두 개라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아주머니는 그것은 원래 하나 나오는 거라며 그 이상은 손님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며 잘라 말했다. 작은 눈을 부릅뜨는 남편을 달래고 나는 얼른 일어나 아주머니가 손짓한 곳으로 갔다. 손바닥에 작은 종지를 얹고 걷는 걸음걸이에 간장이 출렁거렸다. 조심조심 걸었는데도 두어 걸음을 앞두고 그만 간장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말았다. 얼른 휴지로 닦으며 고개를 들자, 남편의 더 구겨진 얼굴이 보였다. 그는 다시 아주머니를 불러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온갖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돋우는 그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닌 일로 분위기를 망치는 남편이 어이가 없었다. 허둥거리는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낮에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며칠 전부터 그는 몇 번이나 우리 사무실에 왔다. 필요한 서류와 은행 일처리 준비물을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확인했기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막상 일을 처리해야 하는 오늘, 그는 서류 하나를 빠트리고 왔다. 일이 꼬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모든 책임을 나한테 떠밀었다. 낮에 그 남자에게 당한 일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는데, 내 남편이 간장 한 종지 때문에 언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남편과 아주머니 사이에서 몇 마디만 잘하면 웃음으로 끝날 일이었지만, 내 발이 슬쩍 아주머니 쪽으로 기울었다. “이 식당은 원래 그렇게 한다잖아요.” 날이 선 내 말투에 남편은 ‘원래’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며 이야기는 점점 원론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작 남편이 내게 하고자 했던 말은 하나도 내놓지도 못하고 술자리가 파장이 되었다. 내게 밀린 남편은 자기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계산대에 서 있는 주인에게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밥벌이의 힘듦이 간장 한 종지로 터져 나온 듯 했다. 나는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 남편을 끌고 나왔다. 내가 남편에게 그 젊은 남자를 흉 봤듯이 아주머니는 퇴근 후 그녀의 남편에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지도 모른다. “산적같이 생긴 남자가 간장 한 종지 때문에 말이야.” 세상살이의 피곤한 마음을 간장 종지만큼 밖에 내보일 수 없는 소시민의 일상이 저물어 가고 있다. 종일 벼르기만 하던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윤명희 수필가

2025-11-12

감천마을, 읽다

부산을 찾았다. 부산문인협회가 주관한 시화전에 전국의 문인협회에서 작품을 보내고 참석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경주문협에서 보낸 시화가 전시실 입구에 걸려있었다. 늘 보던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다가온 부산 문협사람들의 감성에 마음 또한 달달해졌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시화전 공간은 가득 찼고 식순이 끝났다. 부산문협이 계획한 부산투어가 시작되었다. 오년 전 소문으로 찾았던 감천마을이 스케줄에 있어서 변화를 볼 좋은 기회를 갖게 되어 마음이 들떴다. 감천 문화 마을의 동남쪽에는 천마산이 있고, 북동쪽에는 아미산과 연결되는 아미 고개가 있다고 한다. 아미 고개를 지나면 화장골로 유명했던 아미동 골짜기로 이어진다는 설명을 들었다. 남쪽에는 감천항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구덕산이 솟아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지형이 그렇듯 산을 배경으로 도시가 형성되는데 감천마을은 어찌보면 산을 개간해 산의 아래에서 위로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마을이 수평과 수직을 이룬 큰 마을이다. 감천 문화 마을은 산기슭을 따라 밀집한 슬라브의 작은 집과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저소득층 밀집 지역이다. 2009년 예술 창작 단체인 ‘아트팩토리인다 대포’ 주도로 문화체육관광부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마을 곳곳에 조형물 10여 점을 설치하였다. 그들이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마을 곳곳에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인해 미관 개선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부산의 마추픽추’로 이탈리아의 ‘친퀘테레’를 닮은 마을, 또는 성냥갑 같은 집들이 레고를 쌓은 것 같다하여 ‘레고 마을’이라고도 불리고 있다니 사람의 힘이,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의 ‘2010 콘텐츠 융합형 관광 협력 사업’에 선정돼 문화 예술촌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고 여러 곳이 새로운 색으로 의미를 둔 계획이 변화를 주었다. 마을의 빈집을 예술 창작실 혹은 갤러리로 개조하거나 북카페, 식당, 민박집 등으로 만들고, 마을 공터와 옥상을 생태 정원으로 바꾸는 등 주민 생활환경 개선 사업이 추진되었다. 현재 이 지역에도 기존의 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어 편의시설과 일상이 이루어진다. 낯선 사람들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는 일도 있을 것이고 이익을 추구하며 그것이 번잡한 일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련만 찾아온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기웃거린다. 들어가 만지고 사기도 한다. 지역민에게 이익이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집 아래 집이 있고 또 그 아래 집이 있는 달동네라고 불리던 곳이지만 현재 보이는 대부분의 공간은 판매소가 되었다. 무엇인지를 꺼내놓고 상업을 시작한 곳이 살림살이만 하는 집들에 비해 무지 많다는 것이고 사람들의 눈길에 붙잡힌 곳은 사람들로 붐빈다. 색색의 건물과 지붕이 사람과 무관하게 커다란 도화지에 유채색을 입힌 화려한 인상을 주는 공간이 언제부터인가 기존의 사람들을 살리는 공간이 되었다. 감천마을은 1950년대 6·25 전쟁 피난민과 태극도 신도들이 모여 산비탈에 집단으로 형성된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태극도 마을’로 불렸으나 2009년과 2010년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와 같은 공공 미술 사업을 통해 현재와 같은 ‘감천 문화마을’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계단식으로 이어진 집들과 미로 같은 골목길이 특징이며, 작은 소품 하나에도 색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사람들로 인해 사람이 범람하는 공간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사람의 물결 속에서 함께 섞여 앞으로 나아갔다. 오년은 사람과 배경을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어린 왕자 캐릭터가 귀엽다. 그곁에서 인증 샷을 찍기 위해 즐비하게 줄을 선 젊은이들을 본다. 한 장의 추억사진을 찍는 포토 존이 되었고 지붕은 컬러로 덧칠되어 있고 곳곳이 간식거리로 가득하다.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온 곳이라고 적힌 작은 가게가 보이고 외국인이 좋아할 음식들이 가득하다. 구 할이 외국인이다. 넘실되는 이방인 속에 나도 이방인처럼 걸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사람이고 사람이 만든 새로운 공간이 또한 사람으로 가득하다. 단체 사진을 몇 컷 찍고 돌아서 나오며 그곳에 꽃이 피어 있듯이 낡은 건물들이 덧칠을 하고 다시 사람 사는 공간이 되어 우뚝 솟아 있었다. 추억 사진 한 장이 웃는다. /배문경 수필가

2025-11-05

마음이 익어가는 계절

가을은 모여듦의 계절이다. 추석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고 여러 지역 축제마다 사람들이 찾아든다. 오늘 아침에 지인이 농사일을 돕기 위해 가족이 모여 있는 고향에 갔다고 연락했다. 잠시 후, 그가 손전화로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들판에는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였고, 탈곡기가 돌아가자 쌀알이 좌르륵 쏟아져 나오는 장면도 있었다. 장독대 옆에는 크고 작은 호박들이 줄지어 앉아 가을볕을 쬐고 있는 정겨운 모습도 보였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내게 짙은 가을 향기가 무시로 전해졌다. 가을이란 단어는 ‘거두다’에서 왔다고 한다. 단어의 어원 속에는 이미 한 해의 눈길과 손길이 담겨 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 햇살과 바람 속에서 시간을 견뎌낸 뒤, 마침내 가을이 되어 열매를 거둔다. 사람의 그 행위는 이름을 얻었다. 단순히 계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의미를 얻는 순간이 바로 ‘가을’이 되는 것이리라. 봄이 초록빛 새싹을 틔워 우리의 눈을 열게 한다면, 가을은 손끝으로 알곡과 열매를 거두게 하여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가을이면 마을과 거리는 거둠의 손으로 가득 찬다. 들판에서 벼를 거두는 농부의 손끝, 밤송이를 주워 담는 아이의 손, 사과와 감을 바구니에 담는 아주머니의 손길까지. 그 손길이 모여 사람들의 축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을 축제에서 사람들은 송이버섯이나 풍기인삼, 사과를 사고, 전통 음식을 맛보며 다른 계절보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느낀다. 나는 가을 축제하면 언제나 학창 시절의 운동회가 떠오른다. 교문에서 들려오던 상인들의 외침,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장,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모래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기 전에 신발끈을 고쳐 묶던 순간들, 아이들과 어른들의 왁자한 웃음소리. 모든 긴장과 설렘이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 녹아 있었다. 그때의 운동회는 가족과 이웃이 모처럼 함께 어울리는 잔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이나 고모가 한마음으로 피붙이를 응원하고 이웃들도 구경삼아 왔다가 함께 경기에 참여했다.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드리면 색색의 종이처럼 쏟아지던 함성소리,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껏 외치던 응원소리가 푸른 가을 하늘을 흔들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돗자리가 펼쳐졌다. 김밥과 과일, 삶은 달걀과 밤, 통닭 한 마리가 놓인 자리마다 잔칫상처럼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그때만큼은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편을 가르지 않고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먹었다. 운동회의 열기가 쉽게 식지 않았기에 우리들은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월이 흘렀다. 요즘 도시의 운동회는 많이 달라졌다. 가족이 참여하지 않고 학생들끼리만 진행되는 곳도 있다. 그런 곳은 점심도 학교급식으로 대신한다. 학부모인 나는 지금도 가을이 되면 예전의 운동회가 그리워진다.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아래에 놓인 돗자리, 학년 단체로 부채춤을 추고 난 뒤에 내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주던 친구의 따뜻한 손길, 운동장 한복판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시던 할머니들, 운동회에 울려 퍼지던 북소리와 노랫소리가 이제는 모두 추억 저장소에 아련히 남아 있다. 가을(秋)이라는 글자는 곡식 ‘禾(벼 화)’와 불 ‘火(불 화)’가 합쳐진 것이다. 익음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타오름의 계절이다. 낙엽 한 장이 땅으로 내려앉는 순간조차 잎사귀는 스스로를 붉게 불태우며 마지막 언어를 남기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을이 되면 사람의 마음도 익는다고 생각한다. 오래 품어온 그리운 기억이 결실을 맺어 더욱 빛을 내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제는 내 곁을 떠난 이들을 자주 볼 수 없어도, 혹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더는 만날 수 없어도, 그들의 목소리를 추억 속에서 불러내기에 가을만큼 잘 어울리는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게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마음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가을비가 연일 내리고 있다. 비가 그치면, 가을 햇살을 만끽하러 축제에 다녀올 요량이다. 가을을 온전히 즐기면서 기억을 저장해 둔다면, 다가오는 매서운 겨울에 마음만이라도 따뜻하게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정미영 수필가

2025-10-29

가을 하늘

살다보면 흐린 날 속에 가끔 무지개가 뜨는 날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누군가에게라도 얘기하고 싶어 입이 저절로 달싹입니다. 얼마 전에 딸네에 다녀왔거든요. 현관문을 들어서자, 사위가 요리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가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을 음식을 해 주고 싶었다고 하네요. 외국여행지에서나 맛볼만한 음식입니다. 이름이 낯설어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마음이 담긴 그것은 특별했습니다. 와인까지 준비했더군요. 식사가 끝나자, 꼬맹이 손자가 피아노 실력을 보여주려 한껏 폼을 잡습니다. 음표에 몰두할수록 아이의 입이 자꾸만 벌어집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습니다. 박수소리에 한 살 터울의 형아가 일어나 태권도 시범을 보입니다. 제법 진지합니다. 쳇지피티와도 대화하는 아이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제 다 컸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옵니다. 집안을 둘러봅니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펜트리도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이젠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거실이 아닙니다. 딸의 마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연년생 아기를 끌어안고 울던 딸이 조금은 여유롭게 보여 안심입니다. 딸과 사위의 찌그럭거림도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 여겼지만, 그 과정을 보는 내 마음은 늘 무거웠거든요.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자연스럽게 딸네 다녀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위가 차려준 밥상 얘기가 나오다 목에 걸립니다. 사위가 실직해 걱정이라는 친구의 말이 퍼뜩 떠올라서입니다. 이야기가 설렁설렁 겉돕니다. 이제 조금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더라는 말로 얼버무립니다. 길에서 친한 언니를 만났습니다. 딸네 잘 다녀왔냐고 묻습니다. “손자들 많이 컸지?” 라는 언니에게 나는 장난기가 심할 나이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언니는 꽤나 잘 나가는 아들이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거든요. 지인들이 손자 얘기에 열을 올릴 때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던 언니입니다. 내 마음이 흐린 날, 눈물 콧물 닦으면서 풀어놓아도 좋을 친구와 언니들. 미주알고주알 내 놓으면 마음을 안아주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좋은 일은 내 놓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요즘 자주 느낍니다. 슬픔은 들어주면서 내 위안도 되기에 조금 더 쉬운 걸까요. 나 또한 자랑을 온전히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직장인이 된 아들이 용돈 주더라는 동생의 전화에 그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요. 그런데 그 화살이 제 살기에 급급한 아들 녀석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생의 자랑이 은근히 아들에게 비난의 잔소리가 되었던 거지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의 기쁨을 진심으로 받아주는 일도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요.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딸네의 얘기를 마음 놓고 얘기해도 되는 나의 대나무 숲은 누구일까. 문득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아이가 첫 걸음을 떼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백점 맞은 시험지도, 상장도 엄마 앞에서는 마음껏 떠들 수 있었습니다. 내 아이가 마치 천재 인 냥 자랑해도 엄마는 당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맞장구쳤습니다. 엄마는 나의 자랑꺼리가 더 있기를 바라셨지요. 그랬던 나의 대나무 숲은 이제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대나무 숲도 화를 낼 때가 있더라고요. 예전, 여동생이 아기를 업고 친정 왔을 때였습니다. 동생은 가끔 시어머니 얘기를 했습니다. 농사지은 것들을 챙겨주신답니다. 뒷손이 가지 않게 파를 다듬어서 신문지에 싸 아래 위를 노끈으로 묶어 한 가닥씩 빼 먹기 쉽게 해서요. 그 얘기를 몇 번 들었던가봅니다. 엄마가 벌컥 화를 내셨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요. 동생과 나는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왜 화를 내셨는지, 그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함이 화로 번질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압니다. 자식들의 무지개가 내 하늘입니다. 대나무 숲에 자랑하던 나는 이제 자식들의 대나무 숲입니다. 그들의 자랑으로 내 하늘은 무지개가 가득합니다. 주변인들의 무지개까지 다 품을 수 있는 나의 하늘을 가졌으면 합니다. 가을 하늘은 참 넓습니다. /윤명희 수필가

2025-10-22

끝과 시작 사이, 아홉 번째 파도

러시아 화가 아이바조프스키의 ‘아홉 번째 파도’를 들여다본다. 바다는 뒤집어질 듯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조각난 배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 부표처럼 남은 파편에 매달려 간신히 생을 붙들고 있다. 사람들은 거센 물결에 삼켜질 듯 위태롭지만 기묘하게 붉게 빛나는 하늘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스며들게 한다. 수평선 너머 붉게 번지는 태양빛은 죽음의 그림자와 더불어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을 동시에 일깨운다. 문득 로맹 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떠올린다.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홉 번째 파도’라는 표현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끝내 마주해야 하는 죽음과 맞닿은 고독의 절정을 상징한다. 죽음은 끝이면서 동시에 삶의 모든 고통이 멈추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고 우리는 첫 번째에서 아홉 번째에 이르는 물결을 견디며 살아간다. 소설 속 인물에게 파도에 휩쓸리고 싶은 충동과 끝내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공존하듯, 죽음은 두려움이면서도 해방의 욕망을 품은 여행일지 모른다. 아홉 번째 파도는 유럽 바다 문화에서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최후의 물결이자 신화에서는 가장 거세다고 전해진다. 서양에서 숫자 9는 완성을 뜻하고, 동양에서는 끝과 시작의 경계라 여겨진다. 그래서 아홉 번째 파도는 단순한 물결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이 완결되는 순간이자 새로운 시작을 품은 상징처럼 다가온다. 끝이면서도 시작이고 절망이면서도 희망이다. 아이바조프스키의 그림과 로맹 가리의 소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역설 속에 있다. 붉은빛으로 번져오는 하늘은 단순한 태양의 광휘가 아니다. 인간이 끝내 붙잡고 싶어 하는 마지막 빛줄기이자 소멸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다. 살아가며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파도를 맞는다. 때로는 예고 없이 덮쳐오는 고난의 물결 앞에서, 때로는 지독한 상실의 소용돌이 앞에서 흔들린다. 대부분의 파도는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고 우리는 다시 숨을 고르며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단 한 번은 피할 수 없는 아홉 번째 파도가 다가온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이 완결되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맞이하는 거대한 물결이다. 지인의 친정아버지는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았다. 처음에는 이름을 잊고 그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곁에서 돌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인의 얼굴에는 지친 그림자가 짙어졌다. 이제는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묻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무력감에 빠졌다. 그녀가 혼자서 슬픔을 삭인다고 생각하니 내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나는 지인의 어깨 위에 아홉 번째 파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보았다. 그녀 아버지의 육신은 살아있지만 기억이라는 바다는 이미 무너져 내린지 오래되었다. 지인은 무너져 내린 바다에서 작은 널빤지를 붙잡듯 아버지의 손을 애절하게 붙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언젠가 아홉 번째 파도를 건너갈 때, 그것이 두려움의 파도가 아니라 평화의 파도이기를 기원했다. 삶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파도의 연속이다. 내게 아홉 번째 파도는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은밀한 기다림처럼 다가온다. 그것이 종말이라면 나는 무엇을 놓아야 하고, 무엇을 끝내 붙들어야 할까. 파도의 거품 속으로 스러지는 순간 나는 과연 소멸하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나는 이제 파도를 두려움만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 아이바조프스키의 붉은 바다처럼, 로맹 가리가 새들의 죽음을 페루라는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 은유했듯이 죽음은 절망만이 아니라 희망의 길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홉 번째 파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 이전의 수많은 파도를 나는 정면으로 헤쳐 나가고자 한다. 그래서 언젠가 내게 다가올 아홉 번째 파도는 내 삶을 집어삼키는 어둠이 아니라, 나를 더 넒은 바다로 이끄는 빛의 물결이 되기를 바란다. /정미영 수필가

2025-10-15

배웅하는 길

몇 년 만에 온 지인의 문자다. 잘 지낸다는 것도 잘 지내느냐는 말도 아닌 단체에게 보낸 부고장이다. 나는 시아버지상이라는 글자를 다시 보았다. 그녀의 남편 얼굴도 모르는데 그 남편의 아버지라니. 나는 휴대폰을 닫으며 아버지의 그날을 떠올렸다. 코로나로 사람들이 문밖출입을 꺼려하던 때였다. 설 명절을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를 배웅할 친구는 남아있지 않았다. 설령 있었다 해도 소식을 전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부고장을 보낼 친척들과 형제들의 지인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코로나를 핑계 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소식을 궁금해 할 몇몇 친척들에게만 연락했다. 그날, 아이들에게는 설 명절을 앞당긴 것 같았다. 외사촌 이종사촌들이 한 자리에 다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둘러앉아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냈던 날들을 되새김질 했다. 맞아 맞아 그때 그랬어. 사진으로 남은 어린 시절 이야기가 웃음소리와 함께 퍼졌다. 나는 슬퍼하는 사람도 없고, 조문객도 없는 장례식장이 낯설었다. 오든 안 오든, 부고장이라도 다 보낼걸. 그동안 이리저리 낸 부조금이 얼만데. 이십 여 년 전 여름, 엄마의 장례식장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복도에는 꽃들이 줄을 서고, 조문객은 남편의 업무와 연관된 거래처부터 친구들까지 연줄에 연이 걸리듯 했다. 우리는 손님 맞이 하느라 엄마의 영정사진 한번 제대로 바라볼 틈이 없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여기저기 빈자리를 찾아 쓰러지곤 했다. 봉분 앞에 서고서야 비로소 엄마를 보냈다는 현실이 다가왔다. 그땐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자 연락하지 않아도 올 사람은 먼 길을 마다하고 찾아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반갑고 고마웠다. 아버지를 배웅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코로나보다 더 먼저인 것처럼 보였다. 형제들은 찾아온 조문객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나는 그들을 온 마음으로 눈에 담았다. 저녁 늦은 시간, 뒷정리를 하는데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낯선 얼굴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친구와 밀린 이야기를 하던 남동생이 그녀를 보자 당황해 했다.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묻더니 다짜고짜 하는 말이 “너, 우리 아버지 한 번도 뵌 적 없잖아”라고 한다. 얼굴도 모르면서 왜 왔느냐고 다그치듯 해서, 나는 얼른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하자, 동생은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했다. 듣는 내가 무안해 얼른 올케를 불렀다. 나는 쓰레기를 정리하며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흘낏 보았다. 내 뒤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깜짝 놀라 상갓집이라는 사실을 잊었냐고 주의를 주었다. 맥주잔을 소리 없이 부딪친 아이들은 자주 만나려면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둥, 아직은 어린 막냇동생의 휴대폰에 게임머니를 보내주는 선심을 쓰고 있었다. 남동생 내외가 그녀를 배웅하고 들어왔다. 나는 동생의 등을 치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야단쳤다. 너는 얼굴 아는 사람만 문상하느냐고 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조문이라는 게 돌아가시는 분을 배웅하는 것도 있지만, 상주를 위문하는 것도 있지 않느냐고 되받아쳤다. 동생이 되물었다. 오랜 노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위문 받아야 할 만큼 우리가 슬플까? 갑작스런 사고도 아닌, 그렇다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도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잘 아는 사람은 부고장이 안 와도 기꺼이 찾아가 마지막 길 잘 가시라고 인사한다는 말에 할 말을 잊었다. 옆에 섰던 올케가 변명하듯이 거들었다. 제자인 그녀가 이 늦은 시간에 진주에서 경주까지 혼자 운전해 와서 놀랐을 거라고 했다. 동생은 자리를 피해 슬며시 조카들 얘기 속에 끼어들었다. 마른세수를 한 나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동생의 말처럼 나는 위문을 받아야 할 만큼 슬플까. 고개가 저어졌다. 언젠가부터 이제 편안하게 가시길 기도하지 않았던가. 영정사진 속의 아버지는 손자 손녀들의 옛 이야기에 같이 웃지 않았을까. 곡은 제 설움에 한다는데, 형제 누구도 아버지 앞에서 곡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아버지를 편히 해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배웅일지도 모른다. /윤명희 수필가

2025-10-01

사탕부케

여자는 족히 칠십은 되어 보였다. 옷은 스키니에 반짝이 스팡클이 달린 치마를 입었고 구두는 현란한 빨강색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며 갈아 신은 실내화 사이로 보이는 발톱에도 빨강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정자”라고 하면 노인이 알 거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이 그녀를 만나자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예요. 정자” 라고 방문객이 큰소리로 말하자 어르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정자네. 우예 알고 왔노” 거의 이삼 십 분이 지나도록 호호 하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가 들고 온 사탕부케를 든 노인이 같이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오겠다며 외출을 신청했다. 날이 날인만큼 잘 다녀오시라는 말과 보호자가 어르신을 다시 잘 모시고 오셔야한다는 규칙을 설명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차에 올랐다. 서너 시간 후에 돌아온 노인은 신이 나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묻자 “옛날 내가 젤 좋아하던 동생인데 오랜만에 만나니 너무 좋네. 같이 맛난 밥도 묵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도 좀 풀어놓으니 이제 좀 살 것 같다.”라는 말을 던지고는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방으로 가볍게 걸어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조차 그 동생과 한참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날 온나, 같이 나가보자 하하하” 노인은 젊은 날 부동산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다고 했다. 건물과 땅들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고 며느리가 불편해 할까봐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요양원을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래도 남은 건물 하나에서 집세가 꼬박 꼬박 나오는 모양이었다. 칠년 전만 해도 그다지 상노인은 아니었기에 무료하고 지겨운 시간을 억지로 보내며 적응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TV를 켜두었다. 스케줄 따라 색종이로 무엇을 만들고 때론 떡을, 피자를 만들어도 그는 함께 하지 않았다. “머스마가 무슨 그런 일을 하냐” 고 도리어 짜증을 냈다. 다행히 하루 두 번 담배를 피우는 것이 그에게 큰 낙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탈출구였으나 젊은 날 핀 담배로 인해 폐의 기능이 이삼십 프로밖에 안 남았다는 닥터의 진단에 삶에 낙이 없다고 낙담했다. 이틀 후 다시 정자씨가 찾아왔다. 옷은 첫날보다 더 대담해져 있었다. 이후 그녀는 자주 요양원을 찾았고 일상이 지겨웠던 노인에게는 봄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겹고 지겨운 나날에 벚꽃엔딩 노래 같은. 주보호자께 외출 소식을 전하자 외출을 자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 여자 옛날부터 아버지랑 한때 어울렸는데 걱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거의 며칠이 멀다하고 둘은 땅을 본다며 외출했다. 자식들이 부탁한 사정을 이야기하자 버럭 화를 내며 “지그가 뭘 안다꼬. 내가 우째 지내는데 쓸데 없이. 내가 지그 살만큼 해줬으면 됐지” 그의 목소리는 노기로 가득했다. 오랜 시간 충족되지 않던 자유가 상황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인지 아프다거나 숨이 차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늘 ‘부동산을 보는데 내가 잘 보니까 데리고 가는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이 외출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어느 날부터 그들은 자주 만나지 않았다. 오라버니를 수시로 외치던 여인이 약속을 하고는 자꾸 어기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못 만나며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헛헛한 마음을 이해하기도 했지만 전화기를 붙들고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자 화를 내며 전화기를 침대에 던지기도 했다. 어느 날 어르신을 뵈며 “건물의 세는 잘 나오고 있지요?”라고 묻자 “그거 정자한테 이전했다” 그 말에 놀라서 “파셨어요?”라고 묻자 “그냥 정자 앞으로 서류를 이전만 하고 당장 돈이 없다고 해서 돈 받을 곳이 있는데 그때 준다고 하더라” 는 믿기지 않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돈을 받고 팔아야지, 이전부터 하면 어떡해요“ 라고 얘기하자 어르신은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믿을 만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뒤돌아서며 보니 자신의 머리를 치면서 “내가 미쳤지, 미쳤어” 라고 연신 같은 소리를 혼잣말로 하고 있었다. 걸어둔 사탕부케를 바라보는 노인을 슬쩍 지나치며 보았다. /배문경 수필가

2025-09-24

나의 소소한 여행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살아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였다. 나는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살아오면서 미루어 두었던 계획, 말로 꺼내기에는 조심스러워 지나쳐 버렸던 감정, 가지 못했던 여행이 생각났다. 어느새 그 모든 것이 가슴 밑바닥에 침잠되어 나의 침묵으로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라는 문장도 계속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이 머릿속을 흘러갔다. 갑자기 내 안에 억눌려 있거나 표현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 중 하나가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처럼 무작정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십을 넘긴 나이에 40년 지기 친구 셋과 우리만의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포르투갈 여행에서 리스본으로 향하기 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인 까보다로까에 도착했다. 뒤로 물러설 곳 없는 절벽 위에 서자, 대서양의 바람이 심장을 두드렸다. 땅끝마을을 상징하는 십자가 돌탑에는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카몽이스가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 칭송했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십자가 돌탑을 배경으로 친구 셋이 사진을 찍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실체를 얻는다면 아마 저 장면이리라. 바람에 흐트러진 서로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눈빛만으로 “괜찮아”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든든한 신뢰가 엿보였다. 친구들과 나의 환한 웃음소리가 바람에 버무려져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우정의 흔적을 남겨둔 채 우리는 리스본으로 출발했다. 벨렝탑을 보았다. 테주강 위에 세워진 탑인데 지금은 강물의 흐름 때문에 강물 위로 노출되었다고 한다. 외국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고 통관 절차를 밟던 곳으로, 대항해 시대에는 선원들이 왕을 알현하던 장소였다. 나는 친구들과 그 앞에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를 지켜보는 돌탑처럼, 우리도 긴 시간을 서로의 옆에 서서 침묵을 나눈 적이 많았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편한 친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여행 내내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매년 나이를 더끔더끔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곁에 오랫동안 고요하게 머물 줄 아는 능력이 보태진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발견자의 기념비 앞에 섰다. 대서양을 향해 돛을 펼친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왕자, 항해사, 지도 제작자, 시인 등 그들의 시선은 내가 서 있는 반대편을 향해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한때 품었을 꿈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저들을 바다로 향하게 만들었을까.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시작하려다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대항해를 시작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 없는 확신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을 품고도 떠나야 했던 용기였을까. 나는 기념비를 쓰다듬었다. 문득,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무언가 허락받은 기분이 들었다. 내 안에 여전히 망설이기만 했던 꿈을 실천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사고의 틀을 열어젖힌다면 꿈을 이룰 용기가 펼쳐질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고 마음속 울림에 귀 기울인다면 언젠가는 내 삶이 충만해질 수 있으리라. 나는 내가 이미 포르투갈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리스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현재보다 더 용기를 낼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 가슴속에서 변화의 기운이 꿈틀댔다. 알가르브 지방의 최남단 도시인 알부페이라로 이동했다. 해안으로 내려가 보트를 타고 석회암 바위절벽의 정취를 만끽하며 베나길 동굴로 향했다. 동굴의 뚫린 천장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출렁이는 물결 위에서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 영혼이 기댈 수 있는 문장 하나를 찾아 가슴에 품는 일이라고 인식했다. 포르투갈에서의 따뜻한 순간도 두고두고 문장으로 반추되겠지. 나와 친구들과의 소소(炤炤)한 여행도 문장으로 끊임없이 남겨질 것이다. *소소(炤炤): 밝고 환하다 /정미영 수필가

2025-09-17

꺼지지 않는 불

눈이 자꾸만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창으로 간다. 한 달도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전등불이 켜져 있다. 빤히 보이는 불빛 때문에 나의 여름밤이 더 덥다. 에어컨을 켜려면 실외기실 창을 열어야 한다. 아마 집 주인은 창을 열면서 전깃불 끄는 건 잊었나 보다. 가로등 불빛만이 아파트 마당을 밝히는 시간에 그 불빛은 마치 달처럼 떠 있다. 나는 빛 하나 없는 방에 누워 남의 집 전깃불 걱정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져야 꺼지려나. 실외기실 창을 닫아야 하니 그제야 불이 켜져 있었다는 것을 알겠지? 그때까지 눈 감아야 하나? 관리실에라도 얘기해야 하나. 생각의 꼬리를 물다, 필요하지 않은 전깃불에 내가 유독 예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원인을 따라가 보니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간다. 아버님 어머님과 형님네 식구들 시누이까지 대식구였다. 시끌벅적한 식구들 틈에서 나는 새로운 환경을 익히려고 온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그 많은 것 중에 전깃불 끄는 것이었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고 부엌을 나오기도 전에 잊지 않고 불을 껐다. 욕실에서 세수하다 방에 뭔가를 가지러 갔다 오면, 불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꺼져있었다. 마루의 작은 등이 꺼지는 날은 식구들이 일찍 다 들어온 날이었다. 방의 창마다 텔레비전 불빛만이 새어 나왔다. 여름날이었다. 안방에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땅거미가 방에도 내려앉았다. 컵을 들고 들어오다, 전원스위치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반찬이 보이지 않을 만큼은 어둡지 않았다. 아무도 어둡다고 하지 않아 나는 그냥 내 자리에 앉았다. 방 안은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 속에 어린 조카들의 말소리가 간간이 건너다녔다. 늦게 밥상머리에 앉은 나는 주위에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앞에 놓인 반찬만으로 밥을 먹기 바빴다. 고요 속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방안에 있는 스무 개도 넘는 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뭐지? 왜? 내가 뭘 잘못했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퍼뜩 남편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눈에 불이 켜진 것 같았다. 늑대의 눈빛이 그러했을까. 그 눈빛을 본 순간, 나는 마치 낯선 방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숙모, 불” 일곱 살배기 조카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내 뒤에 전원 스위치가 있어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 밤, 나는 숨죽여 울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어이없어했고, 나는 무엇보다 부드러운 말 대신 눈 화살을 쏜 남편이 야속했다. 불 켜라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모두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에 괜히 억울했다. 내 마음대로 불도 못 켜고, 세탁기를 두고도 뻣뻣한 청바지까지 손으로 빨아야 하는 날들이 서러웠다. 어머님의 눈을 피해 재바르게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울다 잠들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불을 끄고 다닌다. 얼마 전, 딸이 손자들을 데리고 왔다. 꼬맹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가 된다. 욕실에 들어갈 때면 전원스위치를 있는 대로 다 켠다. 변기 쪽과 환풍기만 켜면 된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 딸도 아들도 마찬가지다. 낮에도 식탁에 앉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등부터 켠다. 밤에도 등 하나만 켜곤 하는 거실에 낮에도 등이란 등은 다 켜 놓는다. 따라다니며 불을 끄다 내뱉는 내 말은 언제나 잔소리가 되고 만다. 어둠 속에 있어 본 사람만이 밝은 빛의 소중함을 안다. 호롱불 밑에서 자란 할머니가 아껴두었던 전기가 아쉬운 게 없는 아이들 손에서 흘러넘친다. 맞은편 창의 불빛처럼 꺼지지 않는 아이들의 전깃불. 지금 있다고 마냥 있는 것은 아니다. 끄지 않아 다시는 켜지지 않는 날이 올까 두렵다. 나도 한때는 전깃불 하나 켜는 일에도 눈치를 보며 살았으니, 아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날씨가 추워지면 창의 불도 꺼지고, 아이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스위치를 내리기를 기대한다. 나는 애써 맞은편 창을 보지 않으려고 안막 커튼을 친다. 내일 관리실에 얘기해야 하나 다시 고민하면서. /윤명희 수필가

2025-09-10

왕관보다 빛나는 마음

모나코 성곽 위에 서자, 붉게 물든 하늘과 반짝이는 바다가 맞닿았다. 성벽 너머에는 그레이스 켈리가 레니에 3세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당이 조용히 서 있었다. 영화 속 장면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공간은 시간을 담담히 품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녀의 선택과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움과 책임, 사랑과 의무가 얽힌 서사가 공간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저녁 빛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그녀의 삶을 닮은 깊은 빛으로 다가왔다. 성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왕비로서 그녀가 맞이했을 하루하루를 상상했다.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와는 다른, 무겁지만 고요한 시선이 성 안을 채웠으리라. 화려한 왕관 대신 마음으로 세상을 비추는 법을 배워야 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선택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길 위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아냈다.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테라스에 섰다. 모나코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작은 나라의 도시가 품은 위엄과 고요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켈리가 이 공간 속에서 느꼈을 떨림과 기대는, 바다 위 파도처럼 잠잠하지만 쉼 없이 흘렀을 것이다. 나는 계단을 걸으며 공간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흔적이지만, 성의 무게와 조명, 바닥의 반짝임이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했다. 성당 앞마당에 멈추었다. 결혼식 날의 장면이 마음속에 그려졌다. 하얀 드레스가 바람에 흩날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던 순간에 그녀는 단순히 아름다운 배우가 아니라 국가와 사랑, 선택 사이에서 마음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한 인간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린 뒤에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얼마나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걸어왔는지, 얼마나 나만의 길을 진정으로 지켜왔는지 물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견뎌낸 빛과 무게를 생각할 때, 나 또한 마음의 왕관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과 책임, 자유와 의무 사이에서 흔들리며 걸어야 하는 길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게, 선택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순간마다 마음속에서 반짝이는 빛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문득 그녀가 남긴 흔적은 단순히 영화나 왕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을 비추는 거울임을 깨달았다. 바닷바람에 섞인 파도 소리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영화 속 그녀는 스크린 안에서 빛났지만, 현실 속 그녀는 선택의 무게 안에서 빛났을 것이다. 행복이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발견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에서 바라본 도시와 항구, 반짝이는 배들이 그녀의 삶과 나의 감정을 포개어 주었다.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장면은 없었지만, 실제 공간은 시간과 사람의 흔적을 담아 내 마음을 울렸다. 자유와 책임, 사랑과 의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녀가 느꼈을 감정을 나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녁이 깊어져 갈수록 성벽 위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바다는 한층 더 어둡게 반짝였다. 그레이스 켈리의 삶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빛나던 순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택한 길은 끝없이 이어진 책임과 사랑의 연속이었다. 그 길 위에서 발견한 마음의 빛은 왕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깊게 반짝였을 것이다. 나는 성을 내려와 항구를 걸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길을 걸었을 때 느꼈을 설렘과 두려움, 기대와 희생이 오롯이 내 마음에 전해졌다.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 남아 조용히 내 마음을 흔들며 감동시키고 있었다. 모나코를 떠나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과 선택, 책임과 행복이 뒤섞인 삶 속에서 진정 빛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보여준 왕관보다 빛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화려함이 아니라 선택의 무게 속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밝히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오늘도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정미영 수필가

2025-09-03

뒤끝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이 핼쑥하다. 한 달 전, 시골에 혼자 지내던 시어머니가 일사병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전한 뒤였다. 그녀는 불볕더위 속에서 상을 치르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한 숙제가 남았다고 했다. “사람이 살다 간 자리에 이렇게 많은 게 남을 줄 몰랐어.” 그 말 속에는 지친 한숨이 섞여 있었다. 시어머니가 시집와서 평생 살아온 집은 자식들을 키우고, 조상 제사를 모시던 살림살이로 가득 했다. 벽장에는 자식들이 집을 떠나면서 나중에 가져가겠다며 놔둔 물건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딸들은 엄마가 서랍 밑바닥에 넣어둔 금반지와 통장에나 관심을 가질 뿐, 자기 물건은 고사하고 손때 묻은 살림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창고는 더 심각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녹 쓴 고추 건조기와 나무 자루가 갈라진 곡괭이, 속이 반쯤 남은 비료 포대들이 거미줄로 포장되어 있었다. 언젠가 필요한 날이 있을 거라며 쟁여두던 시어머니였다. 친구는 녹이 쓴 연장들을 발로 모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심정에 찬물을 두 컵이나 연거푸 마셔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올려다보시던 자식들과 손자 사진부터 벽에서 거두고, 개인정보가 담긴 종이들을 모아 불태웠다. 끄집어내면 낼수록 물건은 더 불어났다. 뒷방 한쪽, 이불덮개로 싸 놓은 솜이불을 보는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눅눅해진 이불에서 곰팡이 냄새가 올라와 목구멍을 막았다. 순간, 체한 듯 가슴이 답답했다. 정리 전문 업체를 불렀지만, 처리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시어머니의 손 때 묻은 것들이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오래전 아버지의 방을 정리하던 날을 떠올렸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겼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는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하기를 원했고, 집의 크기만큼 살림은 줄어들었다. 서너 번의 이사로 아버지의 물건들은 한눈에 다 보일만큼 남았다. 혼자 지내기 힘들어지자, 아버지는 요양원을 택했다.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겠다는 고집을 끝내 꺾지 못한 나는 필요한 것들로 가방을 챙겼다. 정장을 한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깨끗한 양복 한 벌과 구두를 함께 넣었다. 그리고 가족사진 액자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게 남은 것은 그 가방 하나뿐이었다. 닳아진 지갑 속에는 자식들의 전화번호와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내 뒤끝도 이렇게 깨끗할 수 있을까.’ 혼잣말처럼 내 뱉은 말에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살다 보면 추억으로 남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고 했다. 지난 번 이사 때를 떠올렸다. 이삿날을 앞두고 나는 옷장 문부터 열었다. 자주 입는 옷은 몇 벌 뿐이고, 나머지는 몇 년째 그대로 걸려있었다. 버려야지 하는 건 마음뿐, 손이 가지 않았다. 책을 정리하는 일은 더 어려웠다. 그 책을 살 때의 기억들이 손목을 잡았다. 책마다 버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시 원래 자리에 꽂았다. 대신 굽 높은 구두와 발이 불편하던 운동화를 과감히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싱크대 구석에서 오래 묵은 냉면 그릇이 나왔다. 몇 년 전에 이사 올 때 넣어둔 그대로다. 지난 이사 때도 버릴까 말까 망설였던 기억이 났다. 연꽃 모양의 그릇은 본래의 색을 잃어갔다. 행주로 닦자, 하얀빛이 살아나 한 번은 사용하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다시 집어넣었다가, 결국은 쓰레기장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자, 빈틈없이 채워진 뭉치들 속에 아이스 팩까지 들어 있었다. 국이라도 끓여서 소비하자는 생각에 데쳐서 넣어둔 얼갈이배추를 꺼내 녹였다. 국이 한 솥이다. 두 식구가 먹기에는 많다. 결국 통마다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몸에 밴 채우는 습관이 또 속을 꽉 채웠다. 체증(遞增)처럼 불어나는 물건 앞에서 체증(滯症)이 올라오는 날이다. 소유보다 비움에 무게를 두어야 할 나이임을 입으로만 말하고 있다. 욕심으로 채워진 것들이 결국은 짐이 되는 순간, 가방 하나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가 떠오른다. 내게 소중했던 것들이 자식들에게 쓰레기가 되게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쓰레기봉투를 옆에 두고, 책상 서랍부터 정리하기 시작한다. /윤명희 수필가

2025-08-27

공연을 마치고 난 후

오늘 정호승 시인의 문학강의가 있는 날이다. 나는 그의 시로 여는 시낭송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신경을 많이 썼다. 시인은 필요한 이것저것을 요구했으며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깐깐하다고 생각한 점은 시작하기 전부터 빔을 설치해서 화면을 보며 강연을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미술관에는 전혀 그런 것이 준비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이라는 고집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며칠 동안 멤버 중의 한 명이 고생해서 겨우 완성한 상태였다. 당일이 되어 강의가 시작되자 시인의 생각은 현실적으로 옳았다. 강의장에 도착한 정호승 시인을 마주했다. 7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어 보였다. 시인들이 대부분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맑고 깔끔한 이미지가 십 여 년 전에 봤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인사와 함께 추억을 남기고자 줄을 잇는 사람들 틈에 나도 끼여 한 장의 추억사진을 찍었다. 함께 시낭송을 하게 된 지인은 본인이 십 오년 전에 사무국장을 하면서 선생님과 찍은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세월은 언제 또 이렇게 흘러 여기까지 온 것일까. 정호승 시인의 특강은 프리젠테이션이었다. 그의 강의는 간결하면서 핵심을 사진과 함께 설명이 이루어지는 형태였다. 시는 은유다. 시는 개인의 창의성을 보여야함을 강조했다. 그의 시처럼 이해하기 쉽고 음악적 리듬을 살린 시어와 문장이 와 닿았다. 백여 명의 사람들이 고요히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경주에 외가가 있었고 대구 사람이고 외할머니의 추억을 얘기 할 때는 오래된 사진을 보는 느낌이었고 에밀레종 속에 들어간 개구쟁이고 정말 귀엽다는 생각과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기억과 추억과 그리고 사물의 독창성을 깨닫고 시어를 찾아내는 무한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정호승 시인이 낸 시집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를 쓰는 작가로 굳건한 이미지로 본다면 시인의 강의처럼 연기자로써 살아온 김혜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두 사람 다 정점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영화배우 김혜자는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할 때 했던 말들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책을 펴낼 만큼 작가의 기량을 갖고 있던 그녀는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두고두고 나는 그녀의 대사를 기억하려 한다. 놓친 기억의 일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가져온 구겨진 메모지를 꺼내 읽는 것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여든이 넘은 그녀가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란 작품을 통해 84세의 나이를 뛰어 넘는 연기력과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슴 뭉클했다. 자상한 어머니로 사랑스런 아내로써 치매를 앓는 노인의 역할까지 무수한 역할을 수없이 많이 하면서도 전혀 질리지 않는 그녀의 탄탄한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정호승 시인의 많은 저서를 통해 그의 탄탄한 시어들의 탄력성과도 유사하게 느낀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익히 하던 일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어제 같은 일상이더라도 살면서 우린 나 자신이란 몸에 에너지를 넣으며 하루를 비슷하지만 다른 연속된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생애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호승 시인이나 김혜자 배우처럼 자신의 길을 걸으며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 그것이 바로 참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통해 나 또한 잔잔하게 나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던 정호승 시인의 시 낭송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낭송 시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섬세한 내면을 잘 담고 있다. /배문경 수필가

2025-08-20

나는 두 항구 사이를 걸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물 위에 줄지어 앉아 있는 수많은 요트와 어선이 차가운 지중해 바람을 따라 출렁거렸다. 마르세유는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로의 관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새 지평을 열고자 희망에 부풀었을 누군가를 상상하며 마르세유 구 항구(Vieux-Port)를 걸었다. 부두를 걷다 보니, 마르세유의 대표적 상징 조형물인 파빌리온이 나왔다. 거대한 거울 지붕 구조로, 도시의 하늘을 반사하고 사람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움직이는 풍경화’로 유명한 공간이었다. 나는 주변 풍경이 빛과 어우러져 거울에 아름답게 반사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건너편 마르세유 광장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흘러와 눈송이처럼 내 어깨 위로 내려앉고 사람들의 노래가 축복처럼 광장을 맴돌았다. 나는 화려한 조명 불빛이 도시를 감싸 안은 그 순간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했다. 해마다 겨울이 돌아오면 마르세유 광장에서의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언덕 위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이 보였다. 어부들의 수호성인에게 바치는 기도처였다. 거센 파도 앞에서 두 손 모아 기원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같았으리라. 뱃사람들은 고깃배의 안전과 만선의 꿈, 무사히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한다. 그것은 바다를 향한 간절한 기도이자, 가족과의 약속이다. 내가 살고 있는 포항을 떠올렸다. 동빈내항에 정박해 있는 어선과 갈매기 울음, 생선 비린내에 묻은 소금기, 죽도시장 상인들의 입담이 들려오는 듯해 마르세유 구 항구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분명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걷고 있는데, 동빈내항의 시간과 냄새가 뒤따라오고 있어 정겨웠다.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다. 북아프리카 지역과 유럽의 피난민들이 건너와 발자국을 겹겹이 남겼다. 그래서인지 골목길에 머무르고 있으니, 어디선가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즐겨먹는 쿠스쿠스 냄새가 풍기고 아랍어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항구는 이방인들에게 처음은 낯선 곳이었지만, 결국에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생활의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세월이 흐르고 언어가 섞이면서 문화적 다양성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마르세유는 하나의 얼굴이 아닌 다채로운 얼굴로 살아가는 도시가 되었다. 포항과 마르세유는 닮은 듯했다. 동빈내항은 한국전쟁 직후 바다를 의지해 살아야 했던 이들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는 항구가 곧 생존이었다. 마르세유처럼 동빈내항도 고단한 삶의 이주자들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흘러 포항종합제철을 중심으로 생계를 찾아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이 정착했다. 용광로는 노동자를 불러 모았고 그의 가족들은 동빈내항 주변에서 생활했다. 고향 사람과 타 도시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억양과 습관이 모여 지금의 포항이 형성되었다. 본토박이들은 타지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으며 제 몸처럼 품었다. 사물의 이치는 한결같으리라. 바다는 경계를 가르지 않고 흘러들어온 강물과 뒤섞여 움직인다. 이처럼 항구 도시는 항해자들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마음을 연다. 마르세유와 포항이 외지인들과의 상생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온 것처럼, 앞으로도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결을 어루만지는 노력이 끊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공동체란 벽을 두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 함께 살아갈 집의 새로운 지붕을 같이 짓는 일이다. 지역에서 오래 뿌리내린 현지인과 이주민이 각자 개성이 넘치는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어우렁더우렁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면 더욱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성싶다. 그것이 항구를 품은 도시의 진정한 삶일 것이다. 바다는 항해하는 자들을 데려가고 다시 데려온다. 마르세유의 짙푸른 바닷바람을 느끼며 동빈내항으로 돌아올 날을 생각했다. 두 항구는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 둘 사이를 걸었다. 내 발걸음마다 그리움의 흔적을 남겼다. /정미영 수필가

2025-08-13

한 사람의 사랑이 바다를 건너왔다

초록바람이 살랑거리는 오후였다. 포항성모병원의 뒷마당에 조성된 ‘루이 델랑드 치유의 정원’을 거닐었다. 표지판에는 루이델랑드 신부님이 어린아이를 안고 계신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고아를 안고 계신 것만 같아 내 가슴이 감동으로 뭉클했다. 치유의 정원 안에서 나무들과 어우러진 조형물 ‘기도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조용히 하늘에 가 닿을 것 같았다. 그 따스한 분위기에 스며들어 나의 소망도 한 줄 기도문이 되어 내 안에 울려 퍼졌다. 환한 빛이 몸에 깃든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루이 델랑드 신부님의 묘소로 향했다. 이 땅에 뿌리 내린 한 영혼의 이야기를 더듬듯 떠올리기 시작하면서 걷는 언덕길은 성스러웠다. 신부님께서는 1895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바람 많은 연안에서 태어나셨다. 그가 수평선 너머에 있는 머나먼 나라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건 1923년이었다. 겨우 스물여덟의 나이에 부산에 도착하셨다. 조선은 식민지의 불안 속에 있었지만, 신부님께서 내딛은 소명의 발걸음은 분명했다. 그 후의 삶은 말보다 조용한 손길로 채워졌다. 다른 나라에서 종교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그 땅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1935년 여섯 명의 동정녀와 ‘삼덕당(三德堂)’이라 불리는 초가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소박한 집에서 싹튼 마음은 훗날 ‘예수성심시녀회’라는 이름으로 꽃피웠다. 기도보다 더한 기도는 삶이었고, 강론보다 더한 복음은 나눔이었다. 신부님은 이듬해 할머니 두 분과 두 명의 고아를 맞아들여 새로운 삶의 식탁을 꾸리셨다.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주고, 길 잃은 이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셨다. 그렇게 ‘성모자애원’이 세워졌다. 오직 사람을 품는 마음만으로 시작된 보금자리였다. 삶의 주변부에 있던 이들을 자애롭게 끌어안으셨다. 그리고 1950년 3월 포항으로 향하셨다. 보다 깊은 헌신을 향한 발걸음이셨다. 낯선 바닷바람 속에서 익숙한 사랑의 언어로 병든 이들을 어루만졌고, 흙먼지 나는 길 위에서도 사람들의 눈을 마주 보며 걸으셨다. 한국전쟁 뒤에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고아들을 품으셨다. 이름조차 없는 아이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울던 아이들, 신부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나는 루이 델랑드 신부님의 묘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신부님은 끝내 고향땅으로 돌아가지 않으셨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에 묻혀 흙이 되셨다. 신부님의 삶은 영웅적인 장면들로 채워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위대함은 반복된 하루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비우는 자세 속에 있었다. 누군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총을 들었지만, 신부님께서는 세상을 껴안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주셨다. 문득, 신부님께서 수십 년 전에 돌보았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그가 바라보았던 아이들의 눈빛, 노인의 주름진 손, 고요한 죽음 앞에서의 기도가 아직도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신부님을 떠올려 보면,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은 대단한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굶고 있는 자에게 한 끼를 나누는 일, 고통과 눈물 속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 등을 두드려 기운을 북돋아 주는 일, 자존감이 낮은 이에게 이름을 불러주며 관심의 목소리를 전하는 작은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나는 루이 델랑드 신부님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랐다. 내가 살고 있는 포항 지역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헌신하신 이분의 행적이 더 넓게, 더 깊게,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묘비에 새겨진 이름 위로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어쩌면 신부님께서는 지금도 이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묵념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종교를 증명하신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 사람의 사랑이 바다를 건너왔다. 그 뿌리는 이 땅에 내려져 영원히 꽃이 되었다. /정미영 수필가

2025-08-06

여름은 가고 또 여름이 가도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채근했지만, 엄마는 말이 없었다. 행여 한마디라도 할까 귀를 대고 지켜보았던 마지막 사흘이 지금도 명치에 앉아있다. 엄마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며 병원에 갔다. 의사는 위암이 초기라 수술만 하면 괜찮아 질 거라고 했다. 우리는 눈곱만큼의 의심도 없이 수술실 앞에서 기다렸다. 수술이 시작된 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나왔다. 속을 열어보니 암이 마치 밀가루를 흩뿌려놓은 것 같아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길어야 6개월이라는 말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원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집으로 가야했다. 허정거리는 걸음으로 차에 오른 나는 대성통곡 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이 울음을 삼켜버렸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남편이 운영하는 공장으로 출근했다. 대충 사무실 일을 마무리한 후, 친정으로 갔다. 아버지가 며칠 동안 병원에도 오지 않아서였다. 이제 괜찮아질 거라 믿고 있는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몇 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지신 적이 있어 두려웠다. 밥상을 차려 두고 나는 병원으로 가야 했다. 엄마 곁에서 살갑게 살아왔던 날들이 사라져간다. 갑자기 허물어져 가는 둥지를 붙잡고 허둥거린다. 엄마가 없는 세상이 나는 무서웠다. 닥치면 다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남편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표정과 행동은 평소처럼 했지만, 내 속은 떨고 있었다. 안타까움과 애살스러움은 처음 얼마간이었다. 병원 생활이 가면 갈수록 말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알아서 했다. 씻어주고 닦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는 점점 말이 없어져 갔다. 여동생이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들고 왔다. 한나절 동안 옆에 앉아 입에 넣어주고, 물수건으로 손도 발도 닦아주었다. 그녀 앞에서 엄마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종알종알 수다 속에 엄마가 웃었다. 그 시간에 나는 친정으로 갔다. 병원에서 대충 식사를 때우는 아버지의 생활이 궁기에 절은 듯했다. 가져간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집안 대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상을 차렸다. 엄마가 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속옷과 양말까지 챙겨두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여동생이 방금 간 듯 했다. 엄마가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숙이는 진정성이 있데이”라고. 나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었다. 그럼 나는? 이라고 그때 장난처럼 말했어야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점점 아기가 되어가던 엄마는 내가 당신에게 소홀하다고 여긴 것이었을까. 추석날 아침이었다. 시댁 주방에는 사촌동서까지 차례상에 낼 음식 준비로 바빴다. 온 집안 식구들이 시끌벅적한 틈 사이로 남편이 나를 찾았다. 엄마가 위독하다고 했다.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 차에 올랐다. 친척들의 걱정이 길게 따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널브러진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명절이라고 와 있던 삼촌과 숙모가 나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비빌 언덕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내가 결정해야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모두가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 가는 그 길이 서러웠다.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남동생 내외가 왔다. 며칠 머무는 동안 오롯이 엄마의 아들이 되게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고 엄마가 말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옆 침대에서 같이 잤다고. 모두가 잠든 밤에 엄마는 아들이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엄마 손에 떨어지더라고 했다. 엄마는 당신이 깨어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울음을 삼켰다. 아들이 잠들고, 엄마는 밤새 이불을 덮어주고 또 덮어 주었다고 했다. 의사가 말했던 6개월이 지나고 2년도 더 지난 여름날, 엄마가 눈을 감고 입도 다물었다. 먼 길 떠나기 전에 어떤 말이라도 해 보라고 졸랐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엄마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했을까. 말없이 사흘이 지나고 엄마의 맥박이 멈추었다. “희야, 아부지를 니한테 맡겨서 미안테이” 엄마는 그 말 한마디 하기가 그리 주저되었던가. 여름은 가고 또 여름이 가도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있는데. /윤명희 수필가

2025-07-30

그 해 여름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로 시작하는 20여 년 전 FM 영화음악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재생해서 그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해 여름, 텐트 안은 찜통 그 자체였다. 아스팔트가 진득진득하니 녹아내릴 무더위, 폭염이었다. 군용 텐트는 어디에서 났는지 노조위원장이 그곳에 누워있었다. 열흘을 넘기는 시점이 되자 그는 음료수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팔에 링거가 꽂히고 그는 쓰러진 채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누워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정오,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매미 소리가 도심의 가로수에서 울어댔다. 노조 사무실에서는 위원장의 목숨이 위험하다. 싸움을 여기서 중단할 것인지 힘들더라도 버틸 것인지 노조 집행부가 머리를 맞대며 갑론을박을 펼쳤다. 하지만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노조 탄압과 임금동결이라는 큰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노조의 대항이었다. 답 없는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위원장을 제외한 집행부는 하루에 밥 한 끼만을 먹으며 일을 하며 버티고 있었다. 일을 하니 그 정도라도 먹어야 한다는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환자의 식사를 하루 세끼 챙기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일하다 보면 현기증으로 간혹 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 것을. 응급실 앞에서 관리직원을 만났다. 그는 곁 눈질을 하며 노조위원장 때문에 병원 상황이 안 좋다며 노조가 문제라는 이야기를 어설프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날려 그를 넘어뜨리고 주먹다짐을 했다. “노조위원장이 죽게 생겼는데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노조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함부로 말하느냐” 라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조합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병원과 노조의 대립구조가 눈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끝장을 보아야했다. 여기서 지면 노조위원장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결론으로 나는 제대로 한 판 싸움을 시작했다. 열흘이 넘도록 병원 관리자가 나타나지 않다가 흥분한 노조원들의 상황을 보고받은 경영진에서 임금 테이블이 다시 만들어졌다. 다행히 노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동결은 풀렸고 노조는 전임자에게 임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리고 노조위원장의 단식투쟁도 당연히 끝으로 가고 있었다. 열이틀의 단식을 푸는 날, 부드러운 죽이라도 끓여주었어야 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다. 그 빠짝 마른 창자에 들어간 것은 김치찌개와 밥이었다. 배가 고픈 그가 밥 한 그릇을 마저 비우지 못하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 후 그는 건강 상태가 나빠져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그래서 밥이라도 물을 넣고 끓여서 죽으로 먹었더라면 위장병으로 평생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을. 이후 그는 병원을 관두었고 본향인 대구로 가서 일자리를 옮겨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구나 똑같은 경우의 수는 없다. 나는 그가 되어보지 못했기에 그의 힘듦을 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40도가 넘는 좁은 텐트 속에서 링거를 맞고 있던 그가 간혹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올 여름 폭염에 가로수는 축 쳐져있고 매미는 절규하듯이 목청을 높이고 있는데. 이미 고인이 된 그녀 정은임을 AI 기술로 재생한 목소리를 들으며 20여 년을 뛰어넘은 지금의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눈을 감는다.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그녀를 그때는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이 잠든 시간이었던 그리고 서슬이 퍼렇던 그 시대 그 시절에도 자기의 목소리를 냈던 용기 있는 프로그램의 제작자와 DJ에게 박수를 보낸다.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배문경 수필가

2025-07-23

세르반테스 생가 앞에 선 여행자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도시를 걸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칼라 데 에나레스의 조용한 거리 한복판이었다. 과거의 숨결이 배어 있는 건물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붉은 벽돌과 마당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는 가정집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16세기 중산층 집이었다. 하지만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인 세르반테스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세르반테스가 여기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틔웠고, 허구 속 진실을 추구하는 문학의 여정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벅찼다. 문학의 세계가 물리적 공간이 되어 나를 맞이할 것만 같은 이곳은 다른 어떤 박물관보다도 정적이 깊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세르반테스의 고된 삶의 무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레판토 해전에 참가해서 부상을 입었고, 해적에게 붙들려 5년 동안 알제리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그였다. 숱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돈키호테’를 출간해 인기를 얻었지만, 여전히 생활이 힘들었다. 병으로 사망한 뒤,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를 약 400년이 지난 2014년에 스페인 정부에서 찾았다고 한다. 생가 앞 도로에는 길게 뻗은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는 익숙한 두 동상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단정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로 팔을 벌려 정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이는 팔짱을 낀 채 푸근한 인상으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 같은 사내였다. 그들은 바로 세르반테스와 산초 판사였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아서 가만히 대화를 들었다. 내 따스한 눈길에 차가운 청동의 어깨 위로 문학이 스미는 듯했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웃음은 머금었지만, 마음속에는 웃음보다 더 오래 머문 질문이 있었다. ‘왜 그는 돈키호테를 써야만 했을까?’ 내가 갖고 있는 책 속의 서문을 보면 ‘기사도 이야기들이 세상과 대중 사이에서 떨치고 있는 세력과 권위를 부수어버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문구가 있다. 현실을 보지 못하고 과거에 사로잡힌 기사를 통해 무분별한 이상주의와 현실도피를 비판했다. 그러나 단지 풍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르반테스는 스스로도 가난했고, 투옥되었으며, 군인으로서 전쟁의 상처를 입었다. 그는 돈키호테를 통해 자신의 좌절과 꿈을 투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단지 회한으로 쓰지 않았다. 현실은 고달프지만 인간은 꿈을 꾸고 웃음을 잃지 않기에 아름답다. 그러니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도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리라. 그는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었고, 웃음 속에 눈물과 철학을 스며들게 했다. 돈키호테는 꿈을 좇고, 산초 판사는 땅을 딛는다. 이상과 현실, 허구와 사실을 표현한다. 이상은 허무가 아니다. 비록 이룰 수 없더라도, 꿈을 향해 걸어가는 행위 자체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든다. 세르반테스는 그것을 알았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세르반테스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 둘이 함께 길을 떠나야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되고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물관 앞의 동상도 서로 등을 맞대거나 외면하지 않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펜을 들었다. 너무 늦었다는 사람들의 말도, 삶의 거센 풍랑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이야기를 끝까지 써냈다. ‘돈키호테’ 1부는 58세였을 때, 2부는 68세가 되던 해에 세상에 나왔다. 그의 생가 박물관 앞에 선 여행자, 나는 문득 한 가지 바람을 품었다. 세르반테스로부터 실패를 견디는 자만이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배웠으니, 나만의 돈키호테와 나만의 산초, 그리고 나만의 풍차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담히 써내려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었다. 진심이 깃든 수필집 한 귀퉁이에 쓰인 내 문장이 세르반테스처럼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정미영 수필가

2025-07-16

재떨이 무덤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엄마는 갓난쟁이인 막내를 업고, 아버지와 함께 밤마실을 갔다. 다섯 살, 네 살인 두 동생을 잘 데리고 있으라고 내게 신신당부했지만, 잠이 눈꺼풀을 끌어내렸다. 눈이 말똥한 그들은 같이 놀자고 칭얼댔다. 달랠 재미난 일을 찾다보니 평소에는 손도 대 보지 못했던 성냥이 보였다. 깨끗이 씻어둔 재떨이를 방 한가운데에 놓고, 조심스레 성냥을 그어댔다. 길게 줄만 생길 뿐, 불이 붙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힘주어 탁 치자, 불꽃이 일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쳤다. 어둠 속 불꽃에 여섯 개의 눈동자가 넋을 잃었다.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은 잠깐이었다. 방안을 채우던 불빛이 서서히 사그라지자, 주변은 어둠 속에 갇히기 시작했다. 다시 성냥개비 하나를 던지다시피 올렸다. 까무러지던 불이 빨간 성냥개비 머리에 화르르 옮겨 붙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던 동생들이 손뼉을 치며 소리 질렀다. 나는 팔각 성냥 통이 반쯤 비워질 때까지 불을 붙이고 또 붙였다. “퍽!” 유리 재떨이가 두 동강이 났다. 순간, 우리는 얼어붙고 말았다. 두껍고 단단해 바닥에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았던 그것이 성냥개비 불에 쩍 벌어졌다. 아버지의 화난 얼굴이 확 다가왔다. 불장난보다 깨진 재떨이 때문에 더 혼날 것 같았다. 어린 동생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도 이미 깨진 그것을 다시 붙일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감추기로 했다. 타다만 성냥 꽁지들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자욱한 화약 냄새를 내 보내려 문이란 문은 다 열었다. 찬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엄마 아버지가 들어설 것 같았다. 삽을 찾아 뒤곁을 뒤졌다. 호미가 먼저 손에 잡혔다. 내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호미를 든 내 뒤로 재떨이 반쪽씩 든 동생들이 따라왔다. 매장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다. 평소 잘 다니지 않은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눈 쌓인 비탈에 달빛이 비쳐 주변이 환했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꽁꽁 언 땅에 호미가 튕겨져 나왔다. 보다 못했던지 동생이 재떨이를 땅에 놓더니 눈을 끌어다 덮기 시작했다. 나는 흙을 긁어모아 눈 위에 덮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재떨이 무덤을 돌아보았다. 동생들이 내 양손을 힘주어 잡았다. 후다닥 뛰어 들어간 방에 신발도 따라 들어왔다. 신발을 내던지고 방문을 닫자, 그제야 맨발들이 보였다. 코도 귀도 발갛게 얼어있었다. 언 손을 이불 밑에 넣으며 동생들에게 다짐을 받았다.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비밀이라고 손가락을 걸었다. 벌건 얼굴들이 주억거렸다. 그 이후, 아버지가 재떨이를 찾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는데, 그 밤은 꿈이었을까. 얼마 전, 막냇동생까지 모인 자리에서였다. 에어컨 바람 밑에서 수박을 먹으며 지난 흑백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빛이 고즈넉이 분위기까지 깔아주어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하늘을 쳐다보던 여동생이 그날도 달빛이 참 밝았다고 했다. “이제 엄마 아버지도 안 계시니 얘기해도 되지?” 그녀가 재떨이 무덤을 열었다. 그때 네 살이었던 동생이 자기도 공범이었다고 했다. 어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놀라웠다. 풀어 놓는 얘기가 내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우린 지금까지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을까. 엄마 등에 업혔던 남동생도 이야기에 빠져든다. 셋이서 완벽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남동생의 말에 여동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고도 말하지 않는 것도 공범이지 않느냐며 손이 창밖 하늘을 가리킨다. 반백년 넘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달이 구름 사이로 숨는다. 막냇동생이 공범자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기억하는 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제야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되뇌었다. 전 국민이 마음 졸였던 크나 큰 산불 기억이 퍼떡 떠올라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시커먼 무덤 같은 산을 보지 않으려 애써 눈을 감는다. /윤명희 수필가

2025-07-09

청보리 바람이 머무는 섬

바람결마저 푸르렀던 5월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사는 섬 중 가장 낮은 섬인 가파도에 다녀왔다. 가파도는 이름에 얽힌 설이 여럿 있었다. 파도가 섬을 덮었다고, 생긴 모양이 가오리를 닮았다고 해서, 물결이 더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가파도는 섬의 특성상 바람과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날씨가 화창해도 섬에 들어갈 수 없는 날이 많다고 한다. 나는 운 좋게도 모슬포 운진항에서 출발하는 그날의 마지막 연락선을 탈 수 있었다. 출렁이는 수면 위로 뱃머리가 천천히 나아갔다. 저 멀리 구름 아래 떠 있는 섬이 서서히 가까워지자 내 가슴은 기대감으로 설렜다. 상동포구에 다다라 배에서 내리자마자, 제주올레 10-1코스인 ‘가파도 올레’를 걸었다. 그러나 마음에 닿는 곳이 보이면 샛길로 빠져 해안도로를 걷기도 하고 마을길을 걷기도 했다. 오솔길 따라 쉬엄쉬엄 걷다가 숨이 멎을 듯한 청보리의 물결을 보았다. 푸름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밀려가며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풀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포항에서 살아온 나는 해마다 봄이 오면 구만리 보리밭에 간다. 언덕 위에서 바다를 향해 살랑살랑 나붓거리는 보리를 보며, 늘 겨울의 끝이자 봄의 시작을 체감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의 물결이 계절을 지나가게 하고, 보릿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어느 시절의 꿈처럼 다가오곤 했다. 나에게 들숨마다 봄의 향기를 실어 나르는 푸른 숨결인 보리를 섬에서도 만났다. 가파도를 뒤덮은 푸르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반가움이었다. 봄빛을 머금은 청보리는 바람 따라 쉼 없이 출렁였다. 마치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가 피어난 것 같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보리의 이마는 가볍게 눌렸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 질서 있고도 유연한 움직임을 바라보며, 나는 한흑구 선생님의 수필 「보리」를 떠올렸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한흑구 선생님께서는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 창작되어야 하고, 철학이 그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실제로 그의 수필집 ‘동해산문’을 읽어 보면, 시적인 명문장들이 빛을 발했다. 보리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내가 섬 안으로 스며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은 내 등을 떠밀지도 앞서 끌고 가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머물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소망전망대가 나왔다. 높은 곳이라 해도 해발 20.5m로 언덕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뜻밖에도 크고 넓었다. 보리와 바람, 낮고 둥근 지붕들, 그리고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제주 본섬과 한라산은 감동적이었다. 가장 낮은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을 본다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그 순간, 마치 땅끝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발밑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이 펼쳐지고, 시선 끝에는 구름을 이고 선 한라산이 조용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말없이 하나로 엮여 있는 섬은 오래된 시간처럼 존재했다. 바다와 바람 사이에 떠 있는 가파도에서, 나는 높이와 깊이의 감각을 동시에 느꼈다. 멀리 있는 산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고 나의 마음은 고요한 풍경 속으로 천천히 침잠했다. 가파도에서 만난 섬사람들은 말수가 적었다. 그들은 밭일을 하다가도 바다에 잠시 눈길을 주다가 곧바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보리처럼 허리를 숙이고 살아가는 강인한 눈빛의 사람들을 보니 내 가슴이 뭉클했다. 섬의 바람을 이겨내고 있는 것은 보리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도 함께였다. 섬사람과 청보리는 바람에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섬에 머무는 동안 나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더 머물고 싶었지만, 머무름의 끝이 곧 떠남이라는 것을 알았다. 돌아오는 배에서 뒤돌아보니, 섬은 점점 멀어지고 청보리는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남은 보리는 더 넓고 깊게 자라고 있었다. /정미영 수필가

202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