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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검은 갈매기의 삶을 반추하다

정미영 수필가 바다를 마주 대하면 마음은 쪽빛으로 물든다. 치열한 일상에서 만나는 내 감정은 뾰족한 선이 많아 마음이 무채색일 때가 잦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면 첨예한 선들이 마모되어 그 틈으로 유채색이 입혀지는 것을 체감한다.한흑구 수필집 복간 기념 릴레이 낭독회의 진행을 맡았던 탓일까. 행사를 마친 뒤, 한흑구 선생님께서 거의 매일 걸으셨던 송도 해변이 보고 싶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 이 순간, 윤슬이 리드미컬하게 출렁이는 해수면을 바라보며, 시간을 초월해 선생님의 발자취에 내 발자국을 얹어 본다는 심정으로 모래밭을 거닐고 있다.한흑구 수필집 ‘동해산문’의 ‘수필의 정신’이 떠오른다.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 창작되어야 하며 내용은 철학적이어야 된다.” 이 문장처럼 선생님의 작품은 시적이고 자연주의적 철학을 짙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출판사 대표와 편집자가 선생님의 책을 복간하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 앞에 ‘생생한 활자’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50여 년 만에 오늘날의 우리가 읽기 편하게 바꾸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아무리 충실하게 문장을 표현한다고 해도 원작자가 고인이라는 점에서, 작품 편집이 작가가 의도한 대로가 맞는지, 아닌지, 여쭤볼 수 없는 ‘불완전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리라.저 멀리 포항의 시조(市鳥)인 갈매기를 형상화한 송도 폴리를 발견한다. 선생님의 필명인 ‘흑구(黑鷗)’가 연상되며, 자연스레 필명의 유래가 생각난다. 한흑구 선생님께서는 105인 사건의 여파로 미국으로 망명하셨던 아버님 한승곤 목사님이 계신 곳으로 스무 살 때 건너가셨다.일본 요코하마항에서 대양환(大洋丸)을 타고 하와이로 가실 때였다. 검은 갈매기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 일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고 했다.조국을 잃어버리고 끝없이 방랑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투영되었던 탓에 검은 갈매기를 뜻하는 흑구를 필명으로 사용하셨단다.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예전의 파도소리가 아니듯, 흘러가는 구름도 예전의 구름이 아니련만, 내가 마치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선생님을 뵙고 이야기를 전해 듣는 듯 감상에 빠진다.바다에 한참을 머무르며, 선생님의 교우 관계를 떠올려본다. 유치환, 서정주, 조지훈 등과 교유하셨고 죽마고우 안익태와의 우정도 남다르셨다. 선생님께서 미국 음악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대학교 신문학과에서 공부하실 때였다. 영어에 서툴렀던 안익태를 템플대학교 기악과에 입학할 수 있도록 힘쓰시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나는 선생님께서 진실하게 사람들과 어울리셨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문득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한다고 하는 ‘인간 실격’을 쓴 일본의 유명한 작가다. 그는 선생님과 같은 해인 1909년에 태어났다.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 작가라 불리는 그는 1948년 39살의 나이로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선생님께서는 1948년 39살의 나이에 포항에 와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셨다. 이렇듯 두 작가의 삶을 비교해 봤을 때 나는 안타깝다. 주변에 문우들이 넘쳐났던 선생님처럼, 한 명이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어떠했을까.내가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것인가. 아마 부정적인 시각을 간직한 채, 앞날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품지 못한 채, 생활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순수한 영혼을 지니셨던 것 같다. 아마도 삶의 밑바탕에 문학이 존재했기 때문이리라.“나는 늘 모래밭에, 또는 바다 물결 위에 시를 써보았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어느덧 내 가슴에 공명된다.모래밭에 시심(詩心)과 수필을 써 놓고 무심히 고개를 든다.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으셨던, 한흑구 선생님의 화신일까. 어느 결에 나타났는지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위로 힘차게 비상하고 있다.

2023-08-02

거머리

윤명희 수필가 검은 하늘이 내려앉는다. 곧 비가 내리꽂을 태세다. 퇴근을 망설이는데 사무실 문이 열린다. 얼굴이 파리한 여자가 엉거주춤하니 들어선다. 상가를 내 놓겠다느니, 상담을 좀 해 달라느니 말의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차근하게 얘기해 보라고 하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그 남자가 내 명의로 가게를 하거든요?”“무슨? 어떤 남자가요?”얼마 전까지 애인이었던 남자가 그녀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이름만 사장인 그녀는 직원이 다섯 명이나 되는 가게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카드까지 사용하는 남자와는 이제 헤어진 사이다. 헤어지고도 카드는 남자가 쥐고 있다. 남자는 카드대금을 내야 하는 날짜를 넘기고, 카드를 정지시킨 그녀는 남자에게 가게에 들어간 돈을 돌려주고 명의를 가져가라고 했단다.남자는 그녀의 말을 단칼에 난도질하고 콧방귀까지 뀌었다. 콧방귀에 이어 쌍욕을 바가지로 하더라며 어이없다는 듯이 실실 웃는다. 갚아야 할 카드 대금이 불어서 7천만 원이라는 말에 듣는 내가 억장이 무너진다. 왜 그 남자에게 가게를 내줬냐고 물었다. 묻는 나도 그녀처럼 갈팡질팡 한다.그녀는 남들이 자고 일어날 때마다 돈 벌었다는 말에 비트코인을 시작했다. 빚을 내 시작한 비트코인은 3천만 원의 빚으로 남았다. 그 빚을 남자가 장사해서 갚아주겠노라 했다. 빚을 갚아준다는 말에 또 카드빚을 내 가게를 차려주면서 4살 연하의 남자와 연인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뱃속에 욕심을 품고 맺은 인연이 맞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서로의 목소리만 들어도 욕이 나오는 원수가 되었다. 그녀는 남의 손으로 코를 풀려다 코가 꿰었다.팔에 큰 문신이 있고 성질이 난폭하기까지 하다는 그 남자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쫒아 들이닥칠 것 같다. 나는 흘낏 바깥을 내다 봤다. 어둠이 내린다. 가게 내 주고, 카드 주고 쌍욕까지 듣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카드빚이 오롯이 그녀의 몫이 되는 건 보나마나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녀를 그냥 보내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주변에 얼마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내 사무실까지 찾아왔을까. 오지랖이 발동된다.그녀가 폰에 적어 둔 것을 보여주었다. 그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은 것 같은데 요점이 없다. 뭘 말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폐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빚이 더 늘기 전에 그 남자에게 폐업하겠다는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자 그녀의 표정이 잠시 밝아진다. 그녀가 써 놓은 글자를 조합해서 말하고 싶은 문장으로 만들어주었다.듣다듣다 하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하려고 여기까지 왔느냐는 말이 막냇동생 나무라듯이 나왔다. 가게부터 정리하고 나서 파산신청을 하면 그만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말로만 듣던 파산신청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보증금을 받아서 그거나마 먼저 갚고 벌어서 차근차근 갚겠다는 말을 기대한 내 귀에, 이젠 나랏돈으로 자기의 잘못을 처리하겠다고? 순간, 힘든 가운데도 꼬박꼬박 세금내고 있는 내 등에 그녀가 빨대를 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묵은 얘기들을 꺼내며 감정에 받혀 눈물을 찍어내기를 반복했다. 벌써 파산을 말한 그녀를 위해 내가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뜨거운 커피를 그녀 앞에 두고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 줄 뿐이었다. 상담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음에 올 때는 커피라도 사 오겠다고 한다. 손사래를 치며 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 잘하라고 당부했다.그녀가 나가고,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비가 내린다. 우산을 펴고 보니 저만치 그녀가 빗속을 걸어가고 있다. 사무실에 있는 우산이라도 가져가라고 소리쳤다. 하얀 원피스가 손을 흔들며 뛰어간다. 거머리의 등에 더 큰 거머리가 달라붙어 덜렁거린다. 그녀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저렇게 큰 게 쉽게 떨어질까. 나는 신호등 불빛이 바뀔 때까지 바라보았다.

2023-07-26

눈(雪), 위에 길을 내다

배문경 수필가 “처지가 떳떳했으면 날이라도 좀 밝은 다음에 길을 나설 수 있었으련만, 그땐 어찌 그리 처지가 부끄럽고 저주스럽기만 했던지. 그래 할 수 없이 새벽눈길을 둘이서 나섰다. 시오리나 되는 장터차부까지 산길이 멀기는 또 얼마나 멀더라냐.”-이청준의 소설 ‘눈길’부분큰아들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마지막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갔을 때 집주인에게 부탁해서 막내아들이 돌아오면 마지막으로 밥을 먹이고 살던 집에서 잠을 재우려고 어머니는 아들 오는 날까지 쓸고 닦았다. 모든 재산을 다 잃고도 아들의 가슴에 남겨둔 자신의 집 한 채를, 기억 속에 심어둔 어머님의 심정을 알기에 사는 일이 척박할 때는 ‘눈길’을 떠올리곤 했다.친정어머니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수완이 좋아 돈을 벌고 집을 사고 논을 샀다. 만물상회도 하고 곰탕집도 하고 방앗간도 했지만 화재로 전 재산을 잃고는 촌의 허름한 집으로 밀려와 온 식구가 같이 살았다. 그곳에서도 방을 만들어 세를 받았고 도랑에는 오리를 길러 중풍에 좋다는 오리 알을 팔았다. 자식들이 객지에서 미용실을 한다며, 양재학원을 한다며, 오토바이센터를 한다며 어머니의 돈을 계속 가져갔다. 돈이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어 보냈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막내인 내 학자금을 대줄 여건이 아니었다.투자된 돈은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집은 점점 빈곤해져갔다.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요란했다. 어머니의 삶은 객지에서 성공하고 올 자식을 기다리는 망부석이셨다.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유년을 보내야 했다.나또한 낯선 식당업을 시작했다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때 피붙이도 아닌 사람이 빈집을 내주었다. 그냥 집이 팔릴 때까지라는 단서만 붙은 상태였다.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던 아이들과 시어머니와 부부가 같이 한 집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았다. 결국 몇 년 후에 아파트가 팔리고 우린 급작스럽게 같은 아파트에 있는 다른 집에 세 들어 살았다.지상에 많고 많은 집 중에 ‘나의 집’이 갖는 의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한 채의 집을 갖는다는 것은 지구상에 나의 몸을 뉠 완전한 공간이 생기는 일이다. 자식이 자라는 만큼 집을 사고 그곳에서 성장을 바라보는 뿌듯함은 부족한 집을 좋은 집으로 바꾸리라는 염원은 커져갔다. 작은 아파트 두 개를 사서 살게 되었다. 고부간의 갈등도 다소 사라지고 여아와 남아를 따로 키울 수 있으니 좋은 점도 있었다.‘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가 있듯이 보금자리가 따뜻하고 안전해야 모든 것이 안정적이다. 아이들이 자라며 독립하게 되자 원룸을 빌리게 되고 매달 집값으로 나가는 금액이 수월치 않았다. 생각한 것이 아이들을 위해 집을 사서 조금씩 갚아나가자, 아이들은 스스로의 돈으로 원룸보다 넓은 공간을 활용하게 될 일이다. 내가 사는 집보다 넓은 공간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뿌듯하다.이사에 대한 생각은 늘 해오던 것이지만 막상 저지르기까지 갈등은 깊었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날뛰고 젊은이들이 이생에서 집 한 채 장만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즈음 집값이 폭락했던가. 마음을 내어 덤벼도 집값은 만만하지 않다. 아파트가격은 단단한 양파 속처럼 켜켜이 돈으로 뭉쳐져 여전히 부담되었다. 비어진 공간에 흰색 페인트로 곳곳을 칠했다. 벽지와 장판에 페인트자국이 묻어있어도 개의치 않아도 된다. 벽지와 장판이 새로 붙여지고 깔릴 테니까. 이전의 역사는 종이 뒤에 장판 뒤에 묻혀 질 테니 깨끗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살아온 날들의 힘듦과 절망과 눈물도 새 벽지나 새 장판처럼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즐거워진 삶으로 연결되면 좋겠다. 삶의 뒤안길에서 울먹임도 이젠 안녕하며 만사형통이 되면 좋겠다. 씻고 닦으면서 뭉클하니 기쁨이 묻어난다.어머니도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듯 좋은 곳에서 우리형제를 키우고 싶었으리라. 이젠 어머니 나이가 된 내가 아이들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지상의 작은 집 한 채, 눈길 속으로 뽀드득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앞서 길을 내주는 일이다.

2023-07-19

호두 맛 아이스크림

윤명희 수필가 장 뜨기 좋은 날이다. 이른 아침, 복실이네 대문 앞에 차를 세우자 햇살바라기를 하던 강아지가 먼저 뛰어나온다. 그녀는 벌써 내 항아리의 장까지 뜨고 있다. 나는 서둘러 고무장갑을 끼고 소금물에 푹 절은 메주를 주물렀다. 같이 하게 좀 기다리지 왜 혼자 하느냐며 눈을 흘기자 날씨가 좋아서라 한다. 두 개의 항아리를 된장으로 채웠다. 언저리에 붙은 것을 찍어 입에 넣었다. 누런 된장이 봄 햇살을 품었다.항아리를 닦고 장독대를 정리하는 일이라도 그녀의 손이 덜 가게 서둘렀다. 수돗가까지 말갛게 치우고는 고무장갑을 벗어 빨래집게로 걸었다. 그녀를 식탁에 앉히고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한 입 베어 문 그녀가 호두 맛이라 한다. 편의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사온 나는 찢어진 봉지를 확인하며 어떻게 단 번에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얼마나 먹었는데 그 맛을 모르겠느냐고 한다.그녀는 직업군인인 아버지의 복무지인 연천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예비군 중대장이었다. 어린 복실이가 그의 등에 붙어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가로지르면 여기저기서 인사를 하곤 했다. 그는 학교 행사 때면 마을 유지들과 함께 천막이 쳐진 단상에 앉아 있었다. 가끔 연단에도 오르는 각 잡힌 군복의 모습이 학교 다니는 내내 자랑스러웠다.초등학교 졸업식 날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녀는 중학교 교복 대신 지금까지 다녔던 학교의 급사가 되어있었다. 교장실에서 담소중인 아버지 앞에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놓았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그저 급사 아이였을 뿐이었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무쇠종이 그녀 대신 길게 우는 날이었다.엄마는 매일이다시피 남의 집 품팔이를 나갔다. 복실이는 일요일 새벽이면 엄마를 따라 모내기를 하러 가야했다. 일꾼이 모자라 어른들처럼 머릿수건을 하고 작업복을 입으면 한 사람 품삯을 받을 수 있었다. 못줄이 넘어가도록 딸이 다 심지 못한 빈자리를 엄마는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채워야 했다. 엄마와 그녀는 아버지의 화투장이 만들어 내는 구멍을 막기에 바빴지만 역부족이었다.일자리를 구해 부산으로 갔다. 그녀는 신발공장의 일이 힘에 버거워 밤마다 눈물바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별빛 하나 없는 길을 걸어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손가락질이 방문을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아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있었다.어느 날 저녁, 아버지 손에 아이스크림 한통이 들려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동생들은 돌아가며 제비새끼처럼 한 입씩 받아먹었다. 숟가락이 몇 번 드나들자 아이스크림은 바닥을 드러냈다. 통까지 혀로 핥은 동생들은 말갛도록 빤 숟가락을 입에 물고 놓지 못했다.다시 일자리를 찾아 기차를 탔다. 영등포구에 있는 방직공장이었다. 밤이면 야학에서 못다 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동생이 중학생이 되기 위해 짐 보따리를 들고 왔다. 새벽이면 연탄불에 냄비 밥을 지어 동생을 학교에 보냈다. 종일 미싱을 밟고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졸았다. 부모님은 여동생까지 얹어주었다. 주머니는 늘 월급날이 되기도 전에 비었다.월급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게 앞에서 발이 멈췄다. 아이스크림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얄팍한 월급봉투를 만지고 또 만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들고 온 것보다 더 큰 것으로 샀다. 혼자 어둑해진 둑방에 올라갔다. 한 숟가락 푹 떠서 고봉이 된 달콤함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가득 차는 호두 맛이 다른 세상을 꿈꾸게 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두 동생도 생각나지 않은 밤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월급날을 기다리며 또 한 달을 버텼다. 혼자 둑방에 올라 퍼 먹고 또 퍼먹으며 어른이 되어갔다.참 오랜만에 먹어본다는 말에 나는 그녀의 손을 말없이 잡았다. 그녀가 웃었다. 오늘 아침에 끓인 된장찌개가 맛있던데 좀 가져갈래? 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닿은 건 다 맛있다고 했다. 언니처럼 챙겨 준 반찬꾸러미를 받아들고 마당에 내려섰다. 마당 가득한 꽃들이 주인을 닮았다.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그녀가 손을 흔든다. 된장이 익어가고, 담장에 장미넝쿨이 어깨동무하는 전원주택에 복실이가 산다.

2023-07-12

달빛이 환한 밤

정미영 수필가 달빛이 환한 밤이다. 철길숲을 산책하다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무궁화호 객차를 찬찬히 바라본다. 내 시간의 퇴적층에 기적 소리가 아스라이 얹혀 지는 것 같다. 문득, 처음 기차를 탔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바람결에 풀썩거리며 뛰쳐나온다.그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동대구역에서 화본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나의 부모님은 서둘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친할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한동안 나를 외가에 보내야만 했다. 혼자 외가에 남겨진다는 속상함 때문에 기차를 탔다는 설렘은 잠시였다.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내 손에 가족사진 한 장을 들려주었다. 낡고 빛바랜 흑백 사진이었다. 내 손을 잡고 손가락을 꼽아 보이며, 딱 요만큼만 참고 있으면 데리러 오마, 약속했다.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한테 가자고 떼를 쓰며 울었다.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아버지의 등은 넓고 따뜻했다. 산길을 따라 아늑한 외가에 도착했을 때, 외할머니는 향나무 아래에 있는 샘물을 긷고 계셨다. 그러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달려오면서 그만 넘어지셨다. 아버지가 급히 일으켜 드렸으나, 외할머니는 자신의 상처를 돌보기에 앞서 나를 끌어안으셨다. 물에 젖은 치맛자락으로 내 얼굴의 땀을 연신 훔치며, 나를 안아 주셨다.외할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 앞에 앉았다. 외할머니는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솔가지를 아궁이 속에 넣어 불을 지피셨다.“영아, 맛난 밥상 차려주마. 정서방은 얼릉 밥상 받고 밤늦기 전에 내려가야제.”아버지는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외가를 나섰다. 나는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했고, 그런 나를 아버지는 애써 외면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따라가겠다는 나대신 이번에는 달빛이 아버지의 등에 업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외할머니 곁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차츰 내 울음은 그쳐졌다. 생각 밖으로 하루하루 내 생활은 분주했다. 외양간 송아지를 보러 일찍 일어났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쫓아다니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장독대 옆의 무궁화꽃 그림자가 마당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콩밭 매는 외할머니 옆에서 실컷 흙장난을 했다. 고추밭 고랑 사이사이를 호미로 헤집고 다니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흘러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다 잠이 들고는 했다.그렇게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씩 산 아래에서 사람이 올라오면 내 아버지가 왔나 싶어 냅다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아닌 것에 실망하여 눈물을 글썽였다. 부모님이 보고 싶고, 집에 가고 싶을 때는 외할머니와 달에게 소원을 빌었다. 아버지가 지금 당장 나를 데리러오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아버지가 빨리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달에게 두손 모아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언젠가는 외할머니에게 달이 뜰 때까지 기차역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달빛이 내 몸을 환하게 물들일 때까지 플랫폼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기차가 도착해 플랫폼에 사람들이 내려도, 그토록 보고 싶은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면 외할머니는 “오냐. 불쌍한 내 강아지. 너그 아비 곧 올끼라.” 내 눈물을 닦아주며 등을 쓸어주었다.철길숲의 철로 주변 꽃들이 바람결에 한들거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겨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편린이 모기작모기작 꽃잎을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어린 자식의 눈물 젖은 얼굴을 바라봐야 했던 아버지의 가슴은 오죽 답답했을까? 세월이 흘러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며칠간 자식들을 보지 못하면 걱정이 되었다. 기약 없이 자식을 떼어놓아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 헤아려보니, 내 가슴이 먹먹하다.오늘은 달빛이 환한 밤이다. 유년 시절의 추억들이 달빛에 흐벅지게 물든다.

2023-07-05

뜨거운 여자가 좋다

배문경수필가 42도의 자스민 탕에 몸을 담근다.처음에는 앗! 뜨거워하다가도 어느 사이 뜨거운 물은 심신을 가둔 빗장을 벗겨 자유롭게 몸을 덥힌다. 사지를 쭉 뻗고 머리를 탕의 턱 위에 대고 눈을 감는다. 전신으로 열기가 번져나가며 온몸이 나른하고 편안해진다.코로나로 인해 자주 목욕탕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목욕은 어쩌다 가게 되는 드문 일이 되었다. 더러 쥐가 났고 목덜미가 뻐근할 때가 많았다. 무리한 날은 온몸이 아팠다. 지인이 사정을 알고 “목욕하면 좋겠다.”는 문자를 보냈고 그것은 빛처럼 환하게 답이 되었다.평소 냉한 편인 내겐 한겨울에 만나도 손이 따뜻한 친구가 있다. 태생이 열이 많다는 친구를 늘 부러워한다. 간혹 몸살이 났거나 감기기운이 있다고 해도 잠시였다. 늘 건강하게 생활한다. 몸이 따뜻해서 인지 마음도 훈훈하다.코로나시기에 학교 방과 후 수업을 하려고 등록을 한 상태에서 예상 밖의 일이 생긴 지인이 있다. 체온계에는 계속 37.2도가 뜨고 있었다. 하루 이틀 체크하다가 학교에서 도저히 수업진행을 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누구는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 체온이라고 얘기하라고 했지만 이미 속이 상한 지인은 그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뜨거운 여자가 속상하게 된 일이다.‘낮은 체온’은 만병의 근원이랄 수 있다.‘체온 1도가 떨어지면 면역력은 무려 30%가 저하되고 체온1도가 올라가면 면역력은 5배 높아진다’는 이시하라 유미의 책에 실린 내용이다. 고로 몸이 따뜻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이 된다. 암과 당뇨, 고혈압, 알레르기, 비만과 우울증을 이기는 체온 면역 요법이 있다.소식(小食) 또한 체온을 올리는데 도움이 되고 따뜻한 성질의 음식을 섭취하고 차가운 음식을 자제한다. 반신욕과 족욕, 온몸을 탕에 담근 채 그 열기를 가늠해 보며 지인을 만나 조곤조곤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재미다. 예전에는 상대의 등을 서로 밀어주는 것이 친밀감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제는 목욕탕에서 잘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지만.머리에 타올을 터번처럼 감은 여배우가 욕조에 앉아 와인을 들고 있는 모습은 온 세계여성들이 열광하던 장면이다. 신혼여행지에서 욕조에 양난의 꽃잎을 물위에 띄우고 와인을 마시는 모습을 연출한 사람들의 사진이 연예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인증 샷으로 SNS에 올리곤 한다. 때론 요염하고 때론 매력적이며 도발적이다.서양의 중세인들도 목욕을 했다.공중목욕탕이 있었고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에 고국으로 돌아온 전사들은 튀르키예식 목욕을 전파하여 발전시켰다. 공중목욕탕에는 한증탕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씻기 전에 먼저 몸에 증기를 쐬었고, 나무로 만든 욕조에 몸을 담갔다. 공중목욕탕은 혼탕이었는데 남자와 여자는 벌거벗은 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쥘 이슐레가 저술했다.우리나라 최초의 목욕은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담쟁이덩굴로 덮힌 우물가에서 태어나 동천(東川)에서 목욕 후 광채를 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죄수에게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목욕벌’을 내렸다고도 한다. 목욕재계(沐浴齋戒)는 제사나 기원하는 일에 앞서서 부정을 타지 않도록 몸을 깨끗이 씻고 몸가짐을 다듬는 일이다. ‘고려도경’에 고려인은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강에서는 남녀가 혼욕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이처럼 목욕의 역사와 나의 오늘은 연결되어 있었던 모양이다.월(月)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목욕탕에 가는 일은 즐겁다. 큰 탕은 김이 오르고 있고 아무도 밟지 않은 미지의 땅처럼 깨끗한 탕에 몸을 누인다. 여왕이 부럽지 않은 호사며 즐거움이다. 온몸이 나른하며 관절 하나하나가 부드러워지고 피부는 촉촉하다.1도가 높아진 몸으로 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출발한다. 마음도 덩달아 날아오른다.

2023-06-28

붉은 눈(目)

윤명희 수필가 모처럼만에 들린 당숙 댁이다.골목에 들어서자 지붕 밑에 빨간 불빛이 깜빡거린다. 마당에도 낯선 불빛이 여기저기서 노려보고 있다.두 노인네가 사는 시골 농가주택에 CCTV를? 요즘은 멀리 있는 자식들이 부모의 상황을 살피려 설치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 댁에 아직은 그런 게 필요할 리가 없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과상 앞에 앉았던 당숙과 집안 시동생들이 반색을 한다. 종조모의 제사를 핑계로 모였다.늦게 도착한 나는 싱크대 앞으로 먼저 갔다. 반백이신 당숙모가 제사 준비 다 됐으니 그냥 앉아서 떡이라도 먹으라며 등을 민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며 밖에 왠 CCTV냐고 물었다.아이고, 말도 마라. 우리 동네에 잡범이 있데이. 비닐하우스 안에 고추 말리는 것도 가져가고, 감 말린다고 걸어 둔 것도 한 줄 없어지고, 연장은 물론이고 뭐가 자꾸 없어지는 거라. 가져가면 한 자루를 가져가지 한 됫박씩, 몇 개씩 없어지는 거 보이 동네 사람 같어. 잃어버리고 남 의심하는 내가 죄인이지 누구를 탓하겠나 싶어서 갈무리를 잘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제 딴에는 표시 안 나게 하느라고 조금씩 훔쳐가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매일 보고 만지는 건데 그걸 모르겠나. 촌 살림살이가 아파트처럼 자물쇠를 채울 수가 있나 말이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데 뭐라 하겠노. 한 번은 노인정에 가서 들으라는 듯이 우리 동네에 도둑년 있다고 소리를 질러댔지. 그랬더니만 여기저기서 잃어버린 얘기를 하더라고. 우리 집만 그런 게 아이라. 누구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까지 없어졌다고 하는데 기가 막히재.더 어이가 없는 건 된장 담아 놓은 장 단지까지 손을 대네. 매 해마다 농사지은 콩으로 내 손으로 메주 만들어서 장담아 놨는데 메주 몇 장인지 모르겠나. 장 뜨려고 단지 뚜껑 열어보이 쑥 들어간 기라.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어 꺼내보이 딱 2장이 비더라고. 가져간 메주야 어쩌겠나 만서도 손을 깨끗하게 씻고 물기 없이 잘 닦고 건져갔겠나 싶은 게 찝찝해서 장을 못 먹겠더라고.속이 상해서 친구한테 하소연을 했더만 CCTV 달아라하데. 가짜 달면 안 된다, 누굴 바보로 아나. 빨간 불 봤재? CCTV가 낮에는 가짠지 진짠지 모르는데 밤에 보마 다 안다 아이가. 하나는 장독대 비추고 하나는 비닐하우스, 현관, 마당, 창고 집 구석구석 다 보이라고 달아 놨디라. 밭일 끝내고 들어오면 먼저 누가 왔다 갔는지 확인하는기 일이라. 이상하재 우째 알고 그 다음부터는 한 번도 안 없어지더라고. 심증 가는 그 사람이 한 번은 올 줄 알았거든.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당숙모가 박장대소를 한다.아이고, 그게 말이다. 도둑을 잡는 게 아이라 나를 잡는다 잡아. 밭에 일하고 오다보마 소변이 급할 때가 있재. 요실금기도 있는데 언제 장화 벗고 수돗가에서 발 씻고 잠가 놓은 현관문 열고 화장실까지 가노 말이다. 마당에 호미 던져놓고 퍼뜩 저기 텃밭 옆에 궁디 까고 앉았재. 오줌 누다 돌아보이 저 눈이 내를 보고 있는 기라. 엄머야 싶어 엉거주춤 바지 끌어올리고 일어서기는 했는데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모르겠더라. 아무리 돌아봐도 숨을 데라고는 현관문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더라고. 뻘건 눈이 내를 따라 들어오는 것 같아 얼른 문을 닫았지. 그 다음부터는 우리 집 마당이 자유롭지가 않네.사촌동서가 CCTV 확인은 아재와 아지매가 하는데 뭔 상관이냐고 물었다.그게 두 아들 휴대폰에 연결되어 있으이 문제 아이라. 우리가 몇 시에 밭에 나가서 언제 집에 오는지 다 보고 있다는 걸 아는데.우리는 육촌시동생들의 옆구리를 찌르며 엄마 궁디 봤냐고 개구지게 물었다. 확인을 매일 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는 당숙모의 작은 아들이 폰을 귀에 대고 바깥으로 나가고, 큰 아들은 TV 볼륨을 높인다.

2023-06-21

커피, 아침을 열다

정미영 수필가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가져다 드릴게요.”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대사다. 내 나이 20대 초반에 주인공 마리아가 로버트 조던에게 이 말을 속삭이며,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한동안 눈에 선했다.커피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인스턴트커피, 프림, 설탕을 티스푼으로 덜어서 아껴 먹던 때였다. 그런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건네주는 커피 한 잔으로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였다.요즈음은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 어렵지 않다. 1999년 스타벅스 1호점이 문을 연 이후 원두커피가 본격적으로 퍼졌기에, 드립커피를 직접 내리는 집도 늘었다. 편의점이나 아침에 문을 여는 카페도 있어 부지런히 움직이면 모닝커피는 손쉽게 마실 수 있다.그러나 나는 이제 누군가가 건네는 모닝커피의 여유를 기대하지 않는다. 영화처럼 낭만적으로 살고 싶었지만, 현실은 강퍅한 드라마일 때가 많다는 것을 자각해 버렸다. 그렇다고 커피 마시는 일을 생활에서 지울 수는 없기에, 스스로 커피를 챙겨 마시며 새맑은 하루를 기대한다.커피를 음미하는 것은 삶에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아로마가 풍부한 최상급의 커피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동안 시간의 눈금에 편승해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온 나였다. 방향을 잃은 채 속도에만 치중했던 일도 부려놓고, 마음에 쉼표를 찍으며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다. 마음을 채우기보다 비워서 여백을 만드는 시간이 커피를 마시는 순간이다.그렇지만 비우고 싶다고 마음이 어디 내 뜻대로 비워진 적이 있던가. 오늘도 베토벤을 따라해 본다. 그는 아침마다 60알의 원두를 분쇄해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나는 글감이 막막할 때면 그의 예술적 영감이 시공간을 초월해 나에게 전해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그를 흉내 내어 종종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아직까지 성공한 적이 없어 애석할 따름이다.알맞은 굵기로 커피를 갈기 위해 그라인더 버튼을 조절한다. 그라인딩 정도와 추출 도구에 따라 같은 커피콩이라도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추출 시간이 길수록 커피를 거칠게 갈아야 하고, 추출 시간이 짧을수록 곱게 갈아야 한다.분쇄된 가루를 추출한 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쓴맛과 신맛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입안에 가득 퍼진다. 모든 커피가 부드럽고 감칠맛이 나는 게 아니므로, 커피 봉지에 적힌 블렌딩 비율을 훑어본다. 복숭아의 달콤새콤한 맛과 은은한 꽃향기가 어우러진 화려한 커피, 라는 문구와 커피잔에 담긴 커피를 번갈아 눈에 담는다. 커피원두는 품종마다 서로 다른 맛과 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 가지만으로는 종합적인 맛을 즐길 수 없다. 원두가 지닌 특성을 균형 있게 배합하여 깊은 향미와 풍미를 지닐 수 있게 섞는 과정을 블렌딩이라고 하는데, 내가 마시는 커피는 배합 공정이 잘된 것 같다.문득, 우리네 사람살이와 닮은 듯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질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려면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야 할 때도 있지만,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순간도 필요하다.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가끔은 부족한 부분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줄 수 있어야 한다. 블렌딩이 잘된 커피가 부담이 없듯이.커피에 취하면 마주앉은 상대도 다정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실제로 미국에서 부부 1만 쌍을 대상으로 “처음 두 사람을 사랑에 빠뜨린 때는 언제인가요?”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커피 한잔 하실래요?”라고 말한 순간이었다고 한다.나는 내 주변이 정(情)으로 가득 넘치기를 바란다. 애정이든, 우정이든. 오늘 아침, 가까운 이와 새뜻한 하루를 시작해야겠다.‘커피 한잔 하실래요?’

2023-06-14

눈이 부시게

배문경 수필가 얼마 전 응급실로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 왔다. 쓰러진 채 삼일을 꼼짝도 못한 채 견뎠다고 했다. 대퇴부 골절이었고 딸이 집에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자 집으로 찾아가서 발견되었다. 움직이지 못한 며칠은 지옥이었으리라. 물 한 모금, 휴대폰을 할 수도, 살려달라고 해도 들리지 않을 암흑의 밤낮을 보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사월 초파일 백률사를 딸아이와 찾았다. 날이 날인만큼 사람들로 북적였고 대웅전까지 등을 달 생각으로 이름표가 없는 등만을 쫓아 가파른 길을 올랐다. 그때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고 70대쯤으로 보이는 노인이 고함을 지르며 뒷걸음으로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황급히 나는 환자의 의식 상태를 체크했고 주위사람들에게 119를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뇌출혈과 경추손상이 걱정되었지만 목을 조금 움직이는 상태였고 두통을 호소했다. 외출혈은 없었지만 뇌출혈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환자는 두부(頭部) 밑 통증을 계속 호소해서 옆 사람에게서 손수건을 얻어 밑에 깔아주고 상태를 체크하며 안정을 유도했다. 119 구급차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아, 이제 거의 다 되었다는 생각에 걱정 말라는 말로 계속 도닥였다. 구급대원이 구급차에서 내려 환자이송을 준비할 때 맥박과 호흡, 경추 손상 없음, 뇌출혈이 우려된다는 소견을 119대원에게 전했다. 신경외과가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줄 것을 요청했다. 환자는 들것에 의해 구급차에 옮겨져 사이렌소리를 내며 사라져 갔다.나는 다행이란 생각에 흙이 잔뜩 묻은 치마를 툭툭 털며 일어나 대웅전을 향해 걸었다.곁에 있던 딸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엄마, 난 엄마처럼 못했을 것 같아. 119부르세요” 이 정도는 했겠지만 침착하게 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쳐다보는데 약간 기분이 좋았다. “할 수 있어. 너도, 이제 봤으니까.” 나는 웃었다. 사고를 지켜보며 서있던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비슷한 일이 생각난다. 작년 지인이 하는 세계적인 행사에 의무실을 담당했다. 이틀의 일정이었고 날이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정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부르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달려갔더니 참가자 한 사람이 빗길에 미끄러져 옆으로 쓰러져있었다. 전체적인 상황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목이 옆으로 비틀려 있었고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의식을 확인하고 움직이지 말라는 말과 함께 119를 불러달라고 주위에 요청했다.곁에 본인이 갖고 있던 옷가지가 있어 몸을 고정시키고 맥박과 의식을 체크했다. 귀에 피가 나는 것이 걱정이었다. 병원에 이비인후과 의사가 없을 수도 있고 뇌에 문제가 심각한지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다. 환자를 다독이며 구급차를 기다렸고 경추손상 우려가 있으니 조심히 이동시켜달라고 얘기하고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구급대원은 함께 병원에 가서 상태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근처에 있던 자가용으로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 직원들에게 상황과 상태설명을 다시 진행했다.뇌CT에서 뇌출혈 소인은 없다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귀에서 피가 나는 것은 알 수가 없다며 연휴기간이라 닥터가 없으니 이비인후과가 있는 병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집이 울산인 환자와 친구가 울산에 있는 병원을 연결했고 나는 사설 구급차를 연결해서 급하게 환자를 다시 이송시켰다.며칠이 지나고 그 환자는 고맙다며 전화로 안부를 전해왔다. 다행히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은 것 같다며 다음에 찾아뵙고 식사 대접하겠다는 말을 덤으로 주었다.작년의 사고와 올해의 사고를 통해 정말 작고 사소한 행동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119구급대가 있어 너무 감사했다.나는 늘 죽음 가까이에 선 간호사다. 오늘처럼 삶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진 역량으로 최선을 다해 삶에 더 머무르도록 돕는다. 희미해져 가던 그들의 삶이 조금 더 눈부시게 빛나도록 거든다. 내 직업의 힘이다. 딸도 눈부신 직업인이 될 것이라고 믿어본다.

2023-06-07

봄비 내리던 날에

윤명희 수필가 새벽부터 내린 비가 종일 갈 것 같다. 주말에 겹벚꽃 보러 우리 동네에 온다고 했는데 비에 다 떨어져 버리면 어쩌나. 연거푸 터져 나오는 기침을 팔뚝으로 막는다. 까똑 소리에 폰을 확인하니 꽃 볼 생각에 벌써 마음이 들뜬다는 영숙씨가 톡에 음악을 올렸다. 클릭하자 바이올린에 실린 이문세의 목소리가 빗속에 스며든다. 기침이 음악을 덮친다.지난 주말에 딸네에 갔다. 기껏해야 일 년에 두어 번 가는 길이 기차의 연착으로 더 멀었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하더니 온 집안이 아직도 감기 중이었다. 오전에 수액까지 맞았다는 딸은 목안이 부어 반가움조차 손짓으로 했다. 손자들의 기침 소리만이 온 집안을 콩콩 뛰어다니고, 먼저 기운을 차렸다는 사위가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며칠 손이 가지 않은 욕실에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고 싱크대에는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비스듬히 벽을 기대고 있다.나는 모과차를 끓여 널브러진 딸에게 건넸다. 뜨거움이 목을 적시자 기침이 잠시 멈추는 것 같더니 다시 쇠 긁는 소리를 냈다. 잠시나마 편히 쉬게 방문을 닫아주었다. 열기가 다 식은 건조기에서 마른빨래를 꺼내 갰다. 도시의 공기가 매캐하다. 방과 거실에 있는 공기청정기를 분해해 씻고 청소기를 돌렸다. 손자는 내 꽁무니에 붙어 서서 아주 옛날에는 다섯 살이었는데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내 입은 웃는데 눈은 자꾸만 딸의 방에 들어갔다.“서울 가니 딸이 감기 중이더라고. 나는 그걸 또 좋다고 가져왔네.”한동안 꼼짝없이 아파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에둘러 단체 톡에 툭 던졌다. 폐를 쥐어짜며 나오는 기침이 목을 할퀸다. 내가 아픈데 겹벚꽃이 뭔 대수라고.“그게 진정한 딸바보. 지금 우리 가족 전체도 일주일째 감기로 엄청 힘든데 나만 멀쩡, 코로나 때도 그랬고. 아빤 늘 말로만 딸바보지? 이땐 뭐라 해야 할까요? ”P선생님이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를 딸바보로 만든다. 나는 자식 바보와는 거리가 멀다. 밥벌이에 매여, 대학입학과 동시에 타지로 떨어져 나간 딸에게 반찬 한 번 보내지 못했다. 멀리 있다는 이유로 직장생활의 고단함도 결혼 준비도 딸이 알아서 해야 했다. 아들 연년생을 낳아 힘들어할 때 친정엄마라는 체면치레를 위해 겨우 시간을 냈을 뿐이다.음악을 올린 영숙씨의 답 톡이 올라온다.“아빤 늘 말로만 딸바보지? 저도 우리 아빠한테 이런 말 한 적이 있는데~ 깜놀~ 그때마다 우리 아빠는 방금 우리 딸내미 뭐 하는지 생각했는데 라고 하셨어요.”톡 방이 한참 조용하더니 다시 그녀의 얘기가 뜬다.“에고고~ 딸바보 이야기하시는 통에 아빠 생각이 나서 찔끔찔끔 울다가 통곡합니다. 아침에 할 일도 많은데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이런…. 그래서 적당한 게 좋은 듯요. 저도 우리 딸이 너무 예쁜데 나중에 저 없으면 마음 아플까 봐 혼자만 좋아하고 적당히 하고 무심한 듯 넘어가네요. 딸은 섭섭하겠지만.”그녀가 지금 비와 함께 울고 있다. 다른 이들의 눈물 이모티콘이 여기저기 올라오고, 저마다의 부모 얘기가 한마디씩 뜬다. 가슴을 푹 찌른다. 나는 다시 음악을 클릭한다. 조금 전에 듣던 것과는 음색이 다르다. 물 먹은 이문세의 목소리가 눈을 찌른다.“한없이 사랑하고 그래서 한없이 그리워하고, 또 펑펑 울고. 모든 게 다 아름답습니다.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다 표현하며 삽시다. 나중은 또 그 때 가서 감당이 되겠지요.역시 어른이신 P선생님이 달랜다. 음악은 흐르고 우리는 말이 없다.딸에게 전화가 왔다. 잠긴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엄마가 내꺼 가지고 갔구나, 그래서 내가 괜찮아졌나보네”그래, 내가 그거라도 해 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니. 잠시, 나도 딸바보가 되는 순간이다. 기침이 딸에게 다시 갈까봐 얼른 폰을 끈다. 톡 방은 눈물 이모티콘 사이로 비가 내려 고요하다. 겹벚꽃이 떨어져도 괜찮겠다. 꽃은 벌써 우리들 마음에 앉았으니.

2023-05-31

더 이상 문은 녹슬지 않는다

정미영 수필가 세상으로 향한 모든 인생길의 시작과 끝은 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자궁문을 열고 세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한평생 온갖 종류의 문을 여닫기 반복하다가 마침내 삶의 종착지에는 장례식장에서 생의 문을 닫는다.인생 시계의 가을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지나왔던 무수한 문을 생각해 본다. 자동문처럼 쉽게 열린 적도 있었고, 굳게 닫힌 문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 겨우 열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건데 내가 건너왔던 문들은 모두 나의 내력을 지녔다. 가끔은 추억의 빗장을 열고 그 문들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차마 잊지 못하고 머뭇대며 찾아가기를 별렀던 문을 보러 길을 나선다.학창 시절에 살았던 집 앞에 선다. 문간을 넘나드는 이들의 들숨과 날숨이 대문에 스며든 것만 같아 여기저기 시선을 옮겨본다.내 눈길 끝에 예전의 문소리가 끼익 달려 나온다. 그 당시 우리 식구가 대문을 열고 닫을 때는 유달리 삐걱대는 소리가 잦았다.친정아버지의 평온을 유지하지 못했던 마음이 대문에 옮겨져 그 아픔의 무게에 짓눌렸던 연유 때문인지 돌쩌귀가 빠져 슬픈 울음소리를 냈다.사람 좋기로 소문난 아버지는 크든 작든 보증서는 일을 도맡았다. 어느 해,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어릴 적 친구를 위해 또 보증을 섰다. 신발 가게를 몇 군데나 크게 하던 소꿉친구였다. 일이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잘못됐다. 그는 끝내 부도를 내고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이 사실을 들은 어머니가 수소문해서 신발 가게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단다.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고 그 즈음 힘들게 겨우 장만했던 집을 내놓을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자식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집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는 동안, 아버지의 직장 동료들은 우리 집 형편을 마음 아파했다. 그들의 배려 덕분에 관사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가 빛바랜 문 앞에서 선뜻 집으로 들어오지 못한 적이 많았던 때문이었을까.아버지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한다고 문고리를 붙잡고 미안해할수록 철문은 무시로 아버지의 울분을 받아들였나 보다. 문은 군데군데 녹이 슬고 주저앉을 것처럼 점차 위태롭게 보였다. 낡을 대로 낡은 문은 바람만 불어도 쩔걱거리며 사위스러운 소리를 냈다. 삭막한 아버지의 흐느낌과 문의 차가운 금속성 소리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아 내 불안은 커져만 갔다. 내 가슴에도 붉은 녹과 쇳소리가 선명하게 새겨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그런데 걱정의 종말이 보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파란 페인트를 사가지고 왔다. 비지땀을 흘리며 문고리와 문설주의 돌쩌귀까지 세심하게 덧칠했다. 아버지가 문을 페인트로 단장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무성한 마른 풀로 버석거렸을 아버지의 가슴에 새롭게 푸른 물이 돌았을 것이다. 생기가 돋아나는가 싶더니, 활기가 넘치는 날도 점차 늘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사람에게서 받은 상심과 삶의 고단함을 페인트칠하면서 부려놓으려 애썼던 것 같다.사람과 마찬가지로 문도 상처를 방치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데 힘썼듯이 내세울 것 없던 허름한 문도 녹슨 곳을 사포로 정성껏 문질러 매끈하게 만들자, 공간의 소중한 일부로 재탄생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때의 경험을 발맘발맘 따라왔더니, 가끔 생활에 드리워진 어둠이 걷어지고 환한 희망의 등불 하나 소담스럽게 문에 내걸 수 있었다.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비워줘야 했다. 아버지는 공무수행을 떠난 길 위에서 돌아가셨다. 가량없이 날선 세상에서 가족들을 지키려고 했던 아버지는 나에게 문(門)이었다.대문을 쓰다듬어 본다. 삶이 버거울 때 비바람 막아 주고 등을 기댈 수 있었던 문(門)과의 추억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이제 아버지는 내 마음속에 푸른 문으로 각인되어 있다. 내가 그리워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형상은 오롯이 기억될 것이다. 더 이상 문은 녹슬지 않는다.

2023-05-24

변기뚜껑

윤명희 수필가 이제 그의 흙 묻은 작업복이 어색하지 않다. 대충 쓸어 넘긴 흰 머리카락도 여유롭다. 이사 하는 소감을 말 하라고 재촉하자 소주 두어 잔을 연거푸 비운 그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변기뚜껑?”뜬금없는 말에 우리는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도로 탁자에 놓았다.처음 그를 만난 건 5년 전 쯤이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우리는 시골 살이 해보겠다는 포부로, 늦은 나이에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나는 하는 일마다 서툴고, 연장 또한 호미 두어 자루가 전부였다.농업기술센터에서 사귄 새 친구에게 농기구를 빌리러 갔을 때였다. 친구 대신 그녀의 남편이 농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열쇠를 들고 서있는 그의 양복차림이 반듯하다. 나는 흙먼지가 묻은 남편의 낡은 운동화와 그의 까만 구두를 번갈아 보며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냐고 물었다. 집에서 오는 길이라는 그의 말에 우리는 의아한 눈빛을 감추기 위해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대기업 간부였다는 그가 경주에 온건 사업을 위해서라 했다. 갑자기 이사해야 했던 탓도 있었지만, 아파트 생활에 신물이 난 마누라의 소망이 더해 낡은 한옥 마을에 집을 구했다. 사업기간이 끝나면 다시 도시에 두고 온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건 두 말 할 나위가 없었다.그가 마지막 이삿짐을 정리하는데 주먹만 한 하얀 강아지를 안은 여자가 마당에 들어섰다.그녀는 채 정리하지 못한 짐들을 훑어보며 구시렁거렸다. 집 주인인 것을 눈치 채고는 초면의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이후, 뾰족 슬리퍼를 신은 그녀가 집을 둘러보는 일이 잦았다. 집의 여기 저기 둘러보며 던지는 소리에 그는 은근히 치솟는 부아를 꾹꾹 눌렀다. 침을 두어 번 넘긴 후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이 보쇼, 내 집이 없어서 이러고 있으면 서러워서 살겠나. 우리 집 변기뚜껑 하나만 팔아도 살 수 있는 이런 집을 가지고 무슨 유세를 그렇게 합니까, 하기를?”순간, 강아지 등을 만지던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할 듯이 입을 달싹거리더니 휑하니 돌아서 나갔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추진했던 그의 사업이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농촌 생활에 몸을 익히는 친구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양복쟁이 그의 구둣발은 도시를 향해 있었다. 친구는 그런 남편이 못마땅해 혼자 가라며 어깃장을 놓았다. 그녀는 화물차에 과일상자를 싣고, 그녀의 남편인 그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게 까만 승용차를 닦았다.시골 살이 하러 온 연배가 비슷한 몇몇이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핑계거리만 생기면 그를 불러댔다. 낚시 하는 이가 물고기를 잡아오고 누군가 텃밭에서 상추를 뽑아오면 또 누구는 막걸리를 들고 왔다. 점차 서로 일을 거들어 주는 날이 많아졌고 해가 산 뒤로 내려앉으면 슬리퍼를 끌고 비닐하우스에 모이는 일이 잦았다.대문만 열면 예전에 살던 도시로 돌아갈 것만 같던 그가 우리 집 근처에 집을 계약했다. 집을 산다는 것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집주인에게 이제 이사할 거라고 기별을 했다.술 한 잔 하자며 손을 끄는 집주인 남자를 따라나섰다. 축하 인사에 이어 남자가 변기뚜껑 이야기를 꺼내며 미안하다고 했다. 순간, 그는 잊고 있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처음 이사 왔던 그날, 그는 구겨진 자존심을 변기 물과 함께 내려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모두들 그 집 똥통은 황금으로 만들었냐며 놀렸다. 왁자한 웃음소리에 비닐하우스가 들썩거린다. 우리는 자기만의 변기뚜껑은 과거 속에 묻고, 이제는 남은 시간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만남과 함께 하고 있다. 세상은 바삐 달려가지만 우리는 숨고르기를 하며 새로운 시간 속으로 걸어간다.

2023-05-17

곰소에서

배문경 수필가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강렬한 소금밭의 묘사로 시작되는 박범신 소설가의 ‘소금’을 떠올린다. 나는 3일간의 일정을 잡아 휴가 중이다. 태안반도의 채석강과 적벽강, 내소사는 꿈에서조차 나를 유혹한 곳이었다.나는 지금 곰소다. 곰소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졌으며, 전라북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규모가 큰 어항(漁港)이었다.이미 소문난 슬지제빵소로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들고 있다. 후배에게 찐빵과 커피를 사달라고 부탁하고 도로에서 벗어나 염전을 살핀다. 소금부족으로 염전에서 죽은 염부인 그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주인공. 소설처럼 나도 검은 타일이 박혀있는 염전의 바닥과 소금을 나르는 레일을 훑어본다. 그리고 소금창고를 본다. 비가 내리고 있다. 염전의 휴일이다.한국의 중요 문화유산인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들여 전통기술과 소금장인의 노하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바람과 햇볕만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소금을 생산하는 전통어업활동이다. 곰소의 소금은 국내 생산되는 소금 중에 으뜸이라고 했다. 소금이 서로 붙지 않고 맛이 최고라며 시어머님께서는 가는 김에 소금을 꼭 사오라고 당부하셨다.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그 맛을 낸다는 것을. 류시화 시인의 ‘소금’이란 시다.바닷물이 짜듯이 세상사 인생살이에 상처와 아픔과 눈물이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그래서 삶에 참맛이 있다는 뜻은 아닐는지. 혼자 비에 젖은 염전을 보며 생각에 잠겨본다.양수는 바닷물과 같은 염도다. 사람의 혈액 속에는 0.9%의 나트륨이 있고 출혈이나 전해질의 발란스가 깨지면 생리식염수를 공급한다. 우리의 시조는 바다에서 왔으리라는 정황이 조금은 설득력이 있다. 바다가 썩지 않고 버티는 것도 소금 때문이리라. 성경에서 조차 세상에 소금이 되라는 말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음식에 소금이 없으면 맛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최후의 만찬’이란 작품에서 유다 앞에 소금그릇이 넘어져있는 상황은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며 신뢰를 깨뜨릴 것을 암시했다. 그리고 소금은 부의 상징이었다. 서양에서는 소금을 대접할 때 은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그릇을 내놓았다고 한다. 벤베누토 첼리니(미켈란젤로의 제자)가 금으로 만든 그릇작품(16c 소금통 살리에라)이 600억을 호가했다고 한다.친정어머니는 장독대에 놓인 항아리에 소금을 담아두면 간수가 빠지고 단맛도 난다며 내게 보여주셨다. 소금 독은 그 아래 네모진 나무를 두 개 놓아 보이지 않는 수분증발을 도왔다. 결국 김치며 찌개에 맛난 간이 되었다. 그 뿐이랴 된장위에 벌레가 혹여 들어가 상할까봐 소금을 가득 흩뿌려두고 촘촘한 흰 천으로 독의 목에 고무줄로 단단히 묶어두었다.햇빛이 맑고 좋은 날 항아리들의 뚜껑이 걷히고 흰 천들이 걷어지면 위가 꾸들꾸들 말라있었다. 늘 장맛이 좋아 된장찌개는 숟가락 전쟁이었다. 윗집에서는 간혹 된장을 얻어가곤 했다. 메주가 된장이 되고 간장이 될 때 소금은 새로운 탄생을 돕는 착한 역할을 했다.시어머니는 현관 앞에 둔 달항아리에 소금을 한 가득 담아 두었다. 액운은 모두 사라지고 좋은 복만 들어오란 뜻이리라. 사람의 몸도 정신도 세월에 늙어가지만 정신만큼은 혈액에 담긴 소금의 영향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인류의 역사보다 장대한 채석강의 단층을 보며 세월의 단면에 감동한다. 바위사이로 파도가 치자 어린 소라와 고동, 조개가 생명을 지켜나간다. 산 것들은 늘 신비롭고 아름답다. 소금이 오늘도 신비한 뭇 생명을 키우고 있다.

2023-05-10

문지방

윤명희 수필가 도마소리가 경쾌하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 아침밥을 준비하는 소리를 듣는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언니들의 말소리에 이불을 당긴다. 어젯밤에 불렀던, 기타와 어우러진 나직한 노랫가락이 꿈결인 듯하다.문지방(文知房). 글이 좋아 글을 제대로 알자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른 봄과 늦은 가을이면 한 이불 속에 발을 묻고 밤을 하얗게 보냈다.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어져 23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었다.휴전선 아랫동네에 사는 나보다 한 살 적은 남동생은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온다. 수녀님과 생활하는 김포언니는 여전히 멋쟁이고, 오빠들을 휘어잡는 대전동생은 나이가 들어도 해맑다.직업병으로 조사(助辭) 하나 차이의 무서움에 글을 쓰지 못한다는 김해오라버니는 더 젊어지고, 바람이 되고픈 부산오라버니는 이제 군인에서 벗어나 시급제 알바 중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대구오라버니는 오늘도 향긋한 커피 향을 내놓고, 공주꽃집 마산언니는 보라수국을 닮았다. 팔공 산자락에 사는 언니, 이젠 말하지 않아도 그냥 편하다.몇 년 만에 평창막둥이가 나타났다. 그동안 뭐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였냐고 채근하자 폐지 줍는다는 말로 일축한다. 더 묻고 답하지 않아도 생의 신산함을 헤아린다. 이십대였던 그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 쾡 하니 눈만 보이던 얼굴에 나잇살이라도 있어 보는 마음이 편하다. 넉살도 따라붙어 나이 많은 형, 누나들에게 엉겨 붙기도 한다. 12남매 속에 자랐으면서 세대 차이 나는 우리를 찾아 먼 거리를 오는 이유가 다시 궁금해졌다. 23년 전에 왜 왔냐는 말을 던지자 그냥이라며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고 한다.보이는 얼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얼굴들을 찾는다. 생업에 발이 묶여 마음만 와 있는 거제언니, 아들의 사고로 병원에 있는 대전동생이 가슴에 얹힌다. 별명이 네이버 검색대인 서울오라버니는 병마에 시력이 약해져 이제 길이 멀다. 경주오라버니까지 아프다는 소식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더 나이 들면 얼굴이나 보겠냐는 언니들의 푸념에 부산오라버니는 캠핑카에 태우고 한 바퀴 돌 테니 걱정마라고 했다.방문을 열자 거실 가운데 밥상이 차려졌다. 익숙한 풍경이다. 한 언니가 밥을, 또 한 언니가 쑥국을 뜬다. 숭늉 끓이는 냄새까지 곁들여진 상이 걸다. ‘명절 아침 같네.’ 한 오라버니의 말에 모두의 마음이 쑥국 향에 젖는다. 빙 둘러 앉아 누나들이, 언니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눈들이 뜨겁다.칠순을 눈앞에 둔 포항언니는 늘 그랬다. 23년 전 서울의 그날, 그녀의 양 손에는 대게 박스가 들려있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 환승까지 하며 왔지만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고 했다. 벚꽃이 떨어지던 날,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 언니는 그날부터 마음을 우리에게 주었나 보다. 자식을 맞이하는 엄마처럼 만나는 날이 다가오면 밑반찬을 만들고 새벽에 죽도시장에 나가 해물을 준비했다.그 동안 앉아먹은 입이 미안해 사 먹으면 되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하지만, 만날 때마다 눈이 먼저 언니 손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녀는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23년 만나게 한 힘이라는 것을 안다. 피보다 진한 것이 진심이라는 것도 안다.문지방(文知房) 식구들은 전국을 돌아가며 매번 다른 문지방(門地枋)을 넘어 만난다. 글을 알자고 모인 우리는 마음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사는 이야기로 밤을 보낸다.친정에 다녀가는 것처럼 큰언니가 싸준 음식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간다. 집 앞에 주차할 즈음이면, 이 봄에 새겨진 시간들이 아련해 질 때 쯤 다시 만나자는 언니의 마음이 문자로 뜬다. 벚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밤, 우리는 휴전선 아랫동네에 사는 동생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고서야 잠이 든다.

2023-05-03

철쭉

정미영 수필가 매년 우리 집 철쭉은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피어났다. 그런데 올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였는데, 물기 없는 수피가 까칠하고 버석거렸다. 말라 헐거워진 흙 아래에 묻혀 있는 뿌리에도 물이 사라졌을까, 걱정되었다.꽃이 피었다가 이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때 푸른 물 정기를 맘껏 받아들여 연초록 잎을 돋우고 꽃불을 환히 밝혔던 시절을 떠올리니 괜스레 측은했다. 서둘러 화분에 물을 주었다. 몸피 가득 물을 머금어 회생하면 좋으련만.내가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아픔을 살폈어야 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웃자란 부분은 가지를 쳐줬어야 했는데, 한 동안 마음을 쓰지 못했다. 더군다나 다른 화분은 거실에 놓았는데 홀로 햇빛이 들지 않는 현관에 두었다. 나는 혹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환하게 밝혀진 꽃등을 보고 감탄하면 신나게 철쭉을 자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꽃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수척한 철쭉의 모습에서 예전에 가르쳤던 제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며칠 전, 부모님과 상의를 하지 않고 대학교를 휴학했단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선배나 동창들과 부대끼면서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상을 해보았다고 했다. 나는 제자의 속사정을 들어보기 위해 만났다. 제자의 안색이 밝지 않았다. 철쭉이 제자리에 놓이지 못해 야윈 것처럼 제자도 사회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느라 나날이 메말라갔나 보다.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갈듯이 흔들리면서 중심을 잃을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제자를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다. 제자의 어머니가 많이 속상하다고 내게 토로했다. 대학 합격만을 바라보며 앞만 보고 성실하게 공부해 왔던 제자가 아니었던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했으니 순리대로 학과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순조로울 것 같던 대학 생활이 삐걱거리자, 그의 어머니는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나는 제자의 어머니 마음도 헤아려졌다.늦게까지 강의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군 입대 신청을 했다는 제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결정을 했느냐, 부모님과 상의를 하고 내린 결정이었냐, 제자를 향한 내 질문이 쏟아졌다.현재로서는 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 자신이 원하는 학과에 들어갔어도, 선배들의 전공 취업률이 낮다는 점에서 좌절을 맛보았다고 했다. 불안감이 여러 날에 걸쳐 제자의 온몸을 휘감고 점점 농도 짙게 물들인 탓인지, 자신감이 점차 약해졌나 보다.어디 제자만의 문제일까?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청년들의 취업 고민이 더욱 가중되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이 늘수록 그들의 몸안 깊숙이 외로움이 자리 잡았을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아프다.얼마 전부터 철쭉이 새순을 피웠다. 가지 끝에서 손톱만한 연두색 잎들이 돋더니, 어느새 줄기를 다시 내고 꽃대를 밀어 올렸다. 물기 머금은 줄기는 생기가 넘쳤고, 꽃대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애써 담담한 척했으나 철쭉이 끝내 살아나지 못할까봐 그 동안 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힘을 내어 꽃까지 피우라고, 오며가며 말했더니 기특하게도 꽃망울을 맺었다. 하루아침에 꽃불이 일지는 않겠지만 군데군데 꽃망울이 귀엽게 돋아났다.생명 있는 것은 누군가의 관심이 있어야 기운을 낸다. 철쭉의 마음을 헤아려 물을 적당히 주고 볕도 알맞게 쬐어주었더니, 화사함을 유지했다. 우리네 인생에서도 상대방의 관심은 무엇보다 긴요하다. 그것은 삶에서 부단히 만나게 되는 가시밭길을 잘 건너가게 도움을 주는 고갱이가 될 수 있으리라.앞으로는 제자가 소울(疏鬱)할 수 있도록 자주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2023-04-26

불씨와 풀씨

배문경 수필가 헤스티아는 불의 신이다. 근래 부쩍 늘어난 산불이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있다. 제우스는 그녀에게 순결을 지킬 권리를 인정하고,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 제물이 산불로 희생된 산과 나무, 사람과 동물을 결코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식목일 가까이 전국에서 30여 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수십 년, 수백 년간 숲을 지키고 자란 수목들이 산불로 잿더미가 되었다. 산불의 원인으로는 실화(失火)가 25%로 가장 많고 쓰레기소각, 건축물화재, 논·밭두렁 소각, 성묘객 실화 등의 순서다. 지난해에는 740여 건의 산불이 발생해 20년간 가장 많았다고 한다. 곳곳에 산불감시원이 있지만 여전히 산불은 발생되고 있다.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월남전에서 살아온 해병대 아저씨가 선물한 아오자이를 입은 인형을 품에 안고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대들보며 기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불길은 무녀의 춤사위를 보는 듯이 현란했다. 자다 뛰쳐나온 나의 맨발에 닿던 냉기를 아직도 기억한다.그 화재로 평생 고통 받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가족 모두 입을 다물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잿더미로 변했고 어머니는 화병(火病)을 얻어 약을 끊임없이 드셨다. 늘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다며 고통스러워했다. 가족 모두가 길거리로 내몰렸다. 다행히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둔 농막이 결국 가족의 터전이 되었지만 남루하고 슬픈 가족사를 만들었다.몇 해 전 영주 부석사를 구경하고 늦은 시간 돌아오다 산불을 만났다. 차들은 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해 긴 줄을 만들었고 먼 곳에서 회색 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아닌지 불안에 떨었다. 어릴 적 화재도 떠오르고 영화에서 본 화재가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벗어나지 못한다면 차를 포기하고 공룡을 피해 달아나던 사람들처럼 뒤돌아서 뛰어야하나 고민을 했다.그때 신호봉을 든 경찰과 공무원이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그 상황에서 다행스럽게 벗어날 수 있었지만 늦은 밤까지 안내하는 사람들이 걱정될 정도였다. 그제서야 뉴스를 보면서 며칠 만에 잡힌 불길의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또 다시 영주 박달산과 영지산 산불현장에 헬기 20대가 투입되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끊이지 않는 산불에 잃게 될 인명과 재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소설가 김훈은 소방차가 지나가면 안도한다고 했다. 소방관을 존경한다고도 했다. 오늘도 소방관이 없다면 화재현장에서 목숨 걸고 우리를 살려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식목일에 나무를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은 나무를 잘 건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기념할 날이 많다. 삼일절, 광복절, 추석과 설날처럼 이제 소방관의 날이 하루 더 생겼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재산을 객관적으로 지켜줄 사람은 소방관밖에 없지 않을까. 얼마 전 결혼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화재에 투입된 젊은 소방관의 사망소식은 안타까움을 넘어 슬펐다. 너무나 중요한 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었다.산불이 지나간 자리로 숲은 다시 생명을 키운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싹이 트고 나무가 자라기 시작한다. 황량하던 벌판에도 한해살이풀들이 자라나고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아주 천천히 조금씩 숲이 만들어진다. 오랜 시간 후에 여러 조건에 따라서 숲을 구성하는 식물들이 바뀌어 가는 것을 숲의 천이(遷移)라고 한다. 그리고 숲을 구성하는 식물이 변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는 숲을 극상림(極相林)이라고 한다. 수종의 크기가 작고 수명이 짧은 종에서 크기가 큰 다년생(多年生)종으로 바뀐다. 이 과정은 백년에서 이백년이 걸린다.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영원히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큰 구원의 손길과 행운이 따라오지 않는다면.오늘도 풀씨 하나가 곱게 싹틔운다. 불씨가 태운 대지 위로.

2023-04-19

카바이드 등

윤명희 수필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의 표정이 여느 날과는 달랐다. 할머니는 의자에 앉기 무섭게 하소연을 쏟아낸다.내 말 한 번 들어봐라, 그게 그렇게도 힘드나? 매번 내가 속이 상해. 먼저 태어난 아들이 선수고 뒤따라 나온 게 차수거든. 얼굴은 고사하고 걷는 뒤태도 둘이 똑 같어. 지 식구들이야 알아보겠지만 동네사람들은 지금도 볼 때마다 헷갈리재. 하기야 선수는 눈가에 흉터가 있으니 자세히 보면 알거라. 에이그 그 상처가 참…큰아들 선수는 말이다, 가끔씩 어디 갔다 오는 길이라면서 옥수수를 한 망태씩 사오거든. 그 많은 걸 누가 다 먹나. 그래도 어미 애비 생각해서 사오는 게 고마워서 내가 돈 십만 원을 주머니에 찔러줘. 그러면 길게도 말 안 해 ‘에이 뭘.’ 그러고는 두말 않고 받아. 걔는 뻥튀기도 잘 사오는데 한 비닐포대 갖다 놓으면 심심풀이로 요긴하지. 그러면 나는 또 집에 갈 때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가라고 찔러 줘.뱃속에서 열 달을 붙어 있다 나왔는데 성질 하나는 어째 그리 다른지. 차수도 가끔 고기를 사와. 장보러 갔다가 생각났던 모양이라. 늙을수록 단백질을 많이 먹어야 한다나. 생각하는 마음이 참해서 슬쩍 지폐 한 장 주머니에 찔러 넣어 줬더니 괜찮다면서 그걸 식탁 위에 그냥 두고 가네.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말이라. 엄마가 뭔 돈이 있냐고 매번 그래.그 것 하나 가지고 내가 이러지는 않는다고. 한 날은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사람은 없고 보따리만 현관문 앞에 있더라고. 뭔고 싶어 조심해서 풀어봤지. 작은며느리가 반찬을 조목조목해서 아들 편으로 보냈네. 아이고, 그것이 코빼기도 안보이고 줄행랑을 친 거라. 들어와 물이라도 한잔하고 가면 될 것을. 섭섭한 마음에 죄 없는 며느리한테 전화해서 쟤는 왜 그러냐고 쉰 소리를 해댔어. 며느리가 그러대. ‘엄니랑 산 세월이나 저랑 산 세월이 비슷한데 엄니가 못 고친 거, 저라고 고칠 수 있겠어요’ 참 할 말이 없데.어제는 말이야, 늙은이 생일이라고 다섯 자식에 손자들까지 다 모였어. 받은 봉투가 두둑했지. 환갑이 다 돼 가는 쌍둥이 생일이 이틀 뒤인데 어미가 되어서 받고 그냥 있을 수가 있나. 봉투를 두 개 만들었디라. 밥을 먹다, 둘한테 똑 같이 봉투를 내밀었지. 내 선물이라면서 말이야. 그래, 할마이가 손자들 앞에서 폼도 좀 잡고 싶었다. 선수는 여느 때처럼 고맙다면서 쓱 지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차수는 또 그냥 쓰지 뭘 주느냐며 몇 번이나 손사래를 치는 거라. 내민 손을 도로 집어넣을 수가 있나. 지 마누라가 내 표정을 보고는 받으라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라고. 마지못해 받아서는 어쩌는지 알어? 바로 옆에 앉은 지 아부지 주머니에 구겨 넣네.나는 한숨을 푹 내쉬는 할머니에게 안 받으려는 돈을 왜 주느냐고 물었다.걔들이 클 때 못해준 게 생각나서 그렇지. 그 시절, 사람 사는 게 다들 빤했지.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라 노상 아껴 쓰라는 말은 기본이고 돈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니라. 시어른 모시고 다섯이나 되는 자식 건사하자니 그렇게 안 하고는 살 수가 없었거든.살다보니 그것마저 다 떨어 먹고 걔들이 초등학생 때 서부동으로 이사를 갔디라. 그 동네는 전깃불 없는 집이 태반이었거든. 밤만 되면 암흑천지라. 쌍둥이 아니랄까봐 맨 날 천 날 둘이 붙어 돌아다니더니만 어디서 카바이드 등을 구해 온 거라. 카바이드라고 아나? 예전에 포장마차 같은데서 많이 했디라. 그걸 어린 것들이 뭘 잘못 만졌는지 고마 폭발을 하고 말았재. 선수는 눈알이 빠진 거 같고 차수는 머리 한 귀퉁이가 날아간 것같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나자빠졌는데 아이고,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린다. 어미한테 주고 싶었다는구먼. 그 날이 아직도 내 눈에서 나가질 않네. 차수 지 흉터는 머리카락으로 감추면 내 눈에 안 보이는 줄 아는 모양이재. 그 때 카바이드 등만 켜졌어도…한숨이 삼킨 마지막 말이 할머니 눈에 얼비췄다.

2023-04-12

살구나무에 재미가 열리고

양태순 수필가 텃밭에 갔다. 겨울 동안 뜸했던 발길에 밭이 엉망이다. 펄럭이는 비닐 쪼가리와 도착지를 잃은 종이와 떠나기 싫어 뭉그적거린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수없이 굴러다닌 자국이 지천이었다.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혼자서 적적했을 밭에게 무심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옷을 갈아입고 호미를 들었다.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을 긁어모으니 큰 더미가 되었다. 나중에 분류를 해야겠지만 우선은 모아 두고 흙을 살폈다. 호미질을 해보니 흙이 부슬부슬하다. 아마도 얼었던 흙이 봄기운을 받아 살을 풀어헤치고 있었던가 보다. 무너진 두둑을 새로 흙을 돋우어 다듬고 물고랑을 만들고 흙 뒤집기를 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라 한나절 호미질로 그럭저럭 태가 났다. 다음 주에 상추를 비롯한 채소를 심기로 하고 호미를 놓았다.봄나물을 캐러 들에 갔다. 밭이 많아서 냉이나 달래, 쑥이 있을 것 같아 조금만 캐서 봄을 먹으리라 생각했다. 밭둑을 살피며 쭉 갔는데 냉이만 보였다. 시력이 나쁜지 봄나물이 살길을 찾아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봉지 안에 든 냉이가 한 끼는 될 것 같아 그만하고 들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묵정밭 둑에 두어 그루 나무에 튀밥 같은 꽃이 피어 있었다. 벌들이 잉잉 꿀을 빨고 있다. 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나는 무슨 꽃인지 몰라 곁에 있던 이에게 물었다. 살구꽃이란다. 살구꽃, 입 안을 맴도는 아릿한 향기가 찌르르 운다.어릴 적, 살구나무는 친구였다. 흔히 마당 귀퉁이나 대문 주위에 있었건만 친구집 살구나무는 대밭에 있었다. 시누대로 울을 겸한 것인데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에는 배꼽마당이 있어 우리는 자주 나무에 오르곤 했다. 좁은 마당에서 숨바꼭질, 딱지치기가 지루해지면 나무에 매달려 시시거리며 놀았다. 살구를 따준다, 매미를 잡는다, 너보다 높은데 올랐다는 둥 갖가지 이유로 나무를 오르내렸다. 나무와 어울려 노는 어린 날은 여물어갔고 나무는 쑥쑥 품을 넓혔다.그런 어느 날, 나는 나무에서 미끄러져 발바닥이 대꼬챙이에 찔렸다. 이쑤시개만 한 것이 살에 박혔다. 절름거리면서도 야단맞을까 두려워 울지도 못했다. 부모님은 꾸중 한마디하고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 앞에서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엉엉 울었다.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서러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이사를 했고 그곳에는 살구나무가 없었다. 그렇게 살구나무는 내 놀이 테두리 밖으로 밀려났고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그 살구나무는 어땠을까. 우리가 수피가 맨들맨들하도록 못살게 구는 것이 싫었을까, 찾아와서 놀아주는 것이 좋았을까. 우리 때문에 괴로웠다면 시들시들했을 텐데. 매해 잎을 무성하게 피우고 튼실한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보아 우리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반가웠던 듯싶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눈앞의 살구나무를 들여다본다. 가지마다 매달린 옅은 분홍 꽃이 보러 와 달라 부르는 손짓 같다. 나무를 만지며 손끝에 감각을 모은다. 우둘투둘 무늬가 꿈틀거린다. 꽃과 잎을 통해 자유로이 숨을 쉬던 통로를 일제히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흔적이다. 온몸으로 겨울을 건너 봄을 피웠다. 홀로 거친 시간을 견뎌내고 이토록 환하게 웃어주니 애썼다, 꼬옥 안아주고 싶다.사람도 혼자 걸어가야 하는 삶이고 나무도 홀로 커가는 생이다. 그렇더라도 가끔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는 손이 의지가 되듯이 숲에 사는 나무는 뿌리나 가지, 잎이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외진 곳에 터를 잡은 나무는 바람도 우박도 빗줄기도 고스란히 혼자의 몫이다. 살구나무가 만개한 꽃으로 가지를 살랑거리는데 짠한 마음이 든다. 나무가 쓸쓸해서 더욱 열심히 꽃을 빚었을까 싶어서, 한때 나무를 찾았던 소년 소녀를 기다렸을까 싶어서.먼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살구나무를 불러온다. 너를 생각하면 가지마다 조롱박처럼 열렸던 친구들의 얼굴과 재미를 찾아 못살게 굴었던 어린 날의 시간이 참 그립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행복했던 시절이 살구나무에 재미나게 매달려 있다.

2023-04-05

벚꽃, 그리움

정미영 수필가 경주 보문단지에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나뭇가지마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산들바람을 따라 꽃잎이 날아오른다. 나비떼를 보는 것 같은 황홀감에 한참을 서 있었더니, 앞서가던 일행이 내 이름을 부른다.일행은 꽃나무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런 연유로 기어이 산책로 가운데로 진입했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는 것보다 양지바른 한쪽에서 전체 풍경을 내 눈에 가득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돗자리를 깔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벚나무에게도 꽃봉오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나는 나무가 기특해 쓰다듬었다. 그 순간 뚝, 하고 봉인되었던 그리움 하나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대학시절,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 위치한 보육원에 방문했다. 자원봉사를 해보자는 친구의 말에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던 한때가 나에게는 존재했었다. 더군다나 어린이들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더더욱 책임감이 느껴졌다.그러나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던 친구의 말에 용기를 냈다. 어린이들에게 말벗이 되어 주는 일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야지, 머릿속으로 너무 오래 고민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육원에는 외로움을 느끼는 어린이가 있기에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것이었다. 숙련된 손길로 세탁을 하고 청소를 해주는 것도 좋지만, 서툴러도 진심으로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주말에 몇몇 친구들과 보육원을 방문했다. 먼저 설거지를 하고 방 청소를 도운 뒤, 어린이들과 산책을 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갔다. 가장자리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바라보는 이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동행할 어린이를 찾다가,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던 소녀에게 다가갔다.아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틈을 두고 앉았다. 소녀는 나를 의식하지 못했는지 얼굴을 들지 않았다. 자신이 하던 일에 묵묵히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그냥저냥 너무 귀여워 같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동안 꽃잎을 줍던 아이가 어느 순간 나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나하고 산책할래?” 머뭇거리지도 않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제야 나도 일어서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내 손에 꽃잎들을 쥐어주며 책갈피를 만들면 예쁠 것이라고 했다. 꽃잎에 아이의 선한 마음이 담겨 내게로 건너왔나 보다.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며 나도 모처럼 순수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그즈음 나는 취업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현실에서 겪는 내 심리적 압박과 우울한 기분을 조교에게 토로하는 일이 잦았다. 숱한 번뇌와 좌절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푸를 것 같던 젊음이 점점 시들해지고, 마음은 흔들다리 위를 건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그런데 아이의 앙증맞은 손을 잡고 산책하는 동안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우울했던 기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보육원을 방문했던 것은 어린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다니.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나는, 처음에 보육원을 찾아오기 망설였던 내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 아이와 재방문을 약속하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를 면면히 만나러 갔다. 우리는 꽃잎을 주워 색지에 붙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낱말을 써서 책갈피를 만들며 놀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와 그 아이의 만남은 두 계절 동안이었다. 내가 다른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벚나무 꽃잎들이 리드미컬하게 춤사위를 이어간다. 그 끝자락을 소녀에 대한 내 그리움이 바투 잡고 따라간다.

2023-03-29

버려진 사진

윤명희 수필가 친구가 운영하는 고물상에 들렀다. 부탁해 둔 주물난로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은 그 날은 겨울 추위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친구는 화물차에서 묵은 짐들을 내렸다. 요양원에 간 이웃 할머니의 살림을 정리 중이라 했다. 냉장고에서 나온 계란 몇 알이 소쿠리에 담겨 있고 그 옆에는 미숫가루가 반쯤 담긴 통과 고춧가루 통이 발치에 차였다. 냉동실에서 나온 고등어와 얼어붙은 시루떡 몇 뭉치에 지난 가을에 넣어 둔 홍시까지 혼자 살아 온 할머니의 생활이 다 보이는 듯했다.바닥에 떨어진 수주(數珠)를 줍는데 발밑에 사진이 있었다. 남의 얼굴을 밟고 있는 것 같아 발이 화들짝 놀라 뛰었다. 고물상의 흙먼지를 덮어쓴 여러 장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에는 할머니와 단발머리의 소녀가 있었고 친구인지 형제인지 모를 동년배의 모습도 있었다.짐을 내리던 고물상 친구는 할머니의 자식들이 이런 걸 왜 챙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넘어진 박스를 세웠다. 박스에는 효자손을 비롯한 잡동사니와 많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여러 짐들이 분류되어 고철더미 위로 던져지고 잡동사니들은 대형 쓰레기봉투로 들어갔다. 친구는 안이 훤히 보이는 쓰레기봉투에 사진을 넣기가 뭣한지 한쪽으로 모았다. 할머니는 자기 얼굴이 고물상 바닥에서 남의 발에 밟히고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해 봤을까.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손때 묻은 살림들을 정리하고 남은 것이 앨범이었다. 동생들과 둘러앉아 앨범을 펼쳤다. 엄마가 살아 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대청마루에 앉은 외할머니 흑백사진부터 자식들의 결혼사진, 손자의 돌 사진까지 찰나의 순간들이 영원으로 남았다. 사모관대를 한 아버지와 족두리를 쓴 엄마의 흑백사진은 손이 빠른 첫째 동생이 챙겼다. 자기가 주인공이었던 결혼사진은 제 각각 가방에 넣었다. 손자들과 함께 웃는 사진을 보며 그때의 이야기로 눈물을 찍어냈다.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엄마만의 사람들이었다. 연분홍 저고리가 진달래 꽃밭에 숨어있는 친구들은 내 나이보다 더 젊었다. 장구 장단이 흥에 겨운 동네 분들의 사진에서는 내 어릴 적 친구들의 부모들도 있었다. 동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행적은 아무도 챙기지 않았다. 그 인연들은 우리에게 그리 소중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기억하고 싶어 찍어 둔 관광지의 사진들은 길바닥에 버려지는 광고 전단지나 별다르지 않았다. 남은 사진들을 모으니 앨범 한 권이 되었다. 맏이인 내가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가져왔다. 그 후로 나는 카메라 앵글에서 멀어져갔다.기회만 되면 태우겠다는 약속은 빈말이 되어갔다. 그 앨범은 이사할 때마다 창고에서 창고로 옮겨졌고, 이삿짐 속에 묻혀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아스라한데, 한 번도 뵌 적 없는 동네할머니의 사진 앞에서 뒤늦게 그 앨범을 떠올리고 있다.고물상 마당에 있는 주물난로에 불을 붙였다. 할머니의 자식들을 대신 해 사진을 한 장 한 장 집어넣었다. 삶의 조각들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멍청히 듣고 있다. 할머니의 모습이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창고를 뒤졌다. 먼지 앉은 보자기를 푸는 손이 바빠졌다. 앨범은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힘을 주자 오랫동안 잠을 잤던 사진의 한 귀퉁이가 찢겨나갔다. 한 장 한 장 빼며 사람들 속에 묻힌 엄마와 마주했다.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당신의 지난 시간들이 누구도 보지 않는 사진으로 남았다.당신의 소중했던 순간들을 가져가시라고 불을 붙였다. 사라지는 불꽃을 보며 휴대폰에 저장된 내 사진들을 넘겨보았다.메모처럼 넣어둔 오래된 것부터 하나하나 삭제했다. 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일어서는데 sns에 올려놓은 흔적들이 딴죽을 걸었다. 만인이 보는 앨범에 내 생활을 펼쳐 놓고는 열쇠마저 감춘 나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 인터넷 계정의 비밀번호는 oooo이라고.

202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