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희 수필가
도마소리가 경쾌하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 아침밥을 준비하는 소리를 듣는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언니들의 말소리에 이불을 당긴다. 어젯밤에 불렀던, 기타와 어우러진 나직한 노랫가락이 꿈결인 듯하다.문지방(文知房). 글이 좋아 글을 제대로 알자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른 봄과 늦은 가을이면 한 이불 속에 발을 묻고 밤을 하얗게 보냈다.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어져 23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었다.휴전선 아랫동네에 사는 나보다 한 살 적은 남동생은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온다. 수녀님과 생활하는 김포언니는 여전히 멋쟁이고, 오빠들을 휘어잡는 대전동생은 나이가 들어도 해맑다.직업병으로 조사(助辭) 하나 차이의 무서움에 글을 쓰지 못한다는 김해오라버니는 더 젊어지고, 바람이 되고픈 부산오라버니는 이제 군인에서 벗어나 시급제 알바 중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대구오라버니는 오늘도 향긋한 커피 향을 내놓고, 공주꽃집 마산언니는 보라수국을 닮았다. 팔공 산자락에 사는 언니, 이젠 말하지 않아도 그냥 편하다.몇 년 만에 평창막둥이가 나타났다. 그동안 뭐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였냐고 채근하자 폐지 줍는다는 말로 일축한다. 더 묻고 답하지 않아도 생의 신산함을 헤아린다. 이십대였던 그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 쾡 하니 눈만 보이던 얼굴에 나잇살이라도 있어 보는 마음이 편하다. 넉살도 따라붙어 나이 많은 형, 누나들에게 엉겨 붙기도 한다. 12남매 속에 자랐으면서 세대 차이 나는 우리를 찾아 먼 거리를 오는 이유가 다시 궁금해졌다. 23년 전에 왜 왔냐는 말을 던지자 그냥이라며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고 한다.보이는 얼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얼굴들을 찾는다. 생업에 발이 묶여 마음만 와 있는 거제언니, 아들의 사고로 병원에 있는 대전동생이 가슴에 얹힌다. 별명이 네이버 검색대인 서울오라버니는 병마에 시력이 약해져 이제 길이 멀다. 경주오라버니까지 아프다는 소식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더 나이 들면 얼굴이나 보겠냐는 언니들의 푸념에 부산오라버니는 캠핑카에 태우고 한 바퀴 돌 테니 걱정마라고 했다.방문을 열자 거실 가운데 밥상이 차려졌다. 익숙한 풍경이다. 한 언니가 밥을, 또 한 언니가 쑥국을 뜬다. 숭늉 끓이는 냄새까지 곁들여진 상이 걸다. ‘명절 아침 같네.’ 한 오라버니의 말에 모두의 마음이 쑥국 향에 젖는다. 빙 둘러 앉아 누나들이, 언니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눈들이 뜨겁다.칠순을 눈앞에 둔 포항언니는 늘 그랬다. 23년 전 서울의 그날, 그녀의 양 손에는 대게 박스가 들려있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 환승까지 하며 왔지만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고 했다. 벚꽃이 떨어지던 날,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 언니는 그날부터 마음을 우리에게 주었나 보다. 자식을 맞이하는 엄마처럼 만나는 날이 다가오면 밑반찬을 만들고 새벽에 죽도시장에 나가 해물을 준비했다.그 동안 앉아먹은 입이 미안해 사 먹으면 되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하지만, 만날 때마다 눈이 먼저 언니 손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녀는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23년 만나게 한 힘이라는 것을 안다. 피보다 진한 것이 진심이라는 것도 안다.문지방(文知房) 식구들은 전국을 돌아가며 매번 다른 문지방(門地枋)을 넘어 만난다. 글을 알자고 모인 우리는 마음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사는 이야기로 밤을 보낸다.친정에 다녀가는 것처럼 큰언니가 싸준 음식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간다. 집 앞에 주차할 즈음이면, 이 봄에 새겨진 시간들이 아련해 질 때 쯤 다시 만나자는 언니의 마음이 문자로 뜬다. 벚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밤, 우리는 휴전선 아랫동네에 사는 동생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고서야 잠이 든다.
2023-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