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 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 겸허히 서게 해주소서.” -김시천의 ‘아이들을 위한 기도’ 중에서
‘행복육아’란 주제로 공모전이 있었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백 여 편이 넘는 에세이와 동영상이 그 정도의 숫자로 전달되었다. 나도 자식을 키웠는데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의 일부분은 교집합이었고 때론 개성이 있고 대부분의 내용은 유사했다. 단지 내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다 키운 사람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엄마가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렵게 임신을 해도 유산이 되거나 임신이 안 되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공수정을 선택한 모성(母性)이 눈물겨웠다. 엄마가 되고 싶은데 주어지지 않는 한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부부가 좌절할 것인가.
오래전 난소가 하나 밖에 없는 친구가 임신이 안 되어 병원을 찾았고 여러 번의 실패에 병원을 다녀와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눈물 흘리던 친구가 생각난다. 서너 명의 여자들이 얼마나 기뻤는지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 아이가 이제는 대학을 다니고 있다. 이처럼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기도는 읽는 내내 나 자신을 낮은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 생명을 잉태해서 열 달이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나 아닌 타자를 몸속에서 키우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더더욱 쌍둥이 엄마가 겪을 힘듦이 글을 통해 잘 나타나 있었다. 하나도 힘들다는데 다둥이인 경우 배수(倍數)로 고난한 시간을 경험했으리라. 워킹맘들의 힘듦 또한 시간의 배분과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제 낮 시간 국가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키워준다니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 숫자가 적어진다.
어느 순간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기 힘들어지고 아이들의 재롱이 사라져감을 느낀다.
지금 한국은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로 가장 빨리 국민이 사라질 나라 1위다. 임신과 육아 그리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큰 책임 앞에서 삶의 사래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신과 육아 그리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큰 책임 앞에서 회피한다. 많은 미혼과 기혼의 남녀가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
전대미문의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득을 보겠노라고 얼른 임신을 선택하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모성의 힘듦 뿐만아니라 아빠들의 절반의 노력들이 돋보였다. 아내와 아이를 케어하는 내용이 신선하기조차하다. 아내를 위해 본인이 아침을 만들고 아이를 위해 과일을 썰어 둔다는 아빠. 손녀손자를 위해 유치원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마칠 때 차를 기다리며 느끼는 감회는 따뜻했다. 자녀를 키울 때는 몰랐던 애틋함이 묻어났다.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충분히 바쁘다. 그래도 내 자녀를 위해서 손자손녀를 위해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을 배려하는 경우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아이를 키울 때는 바빴고 정신없이 보낸 세월이었다. 이제 다 커서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자식을 보는 것은 흐뭇하다. 자식들이 힘들어 할 때 내리사랑으로 손자손녀를 돌봐주는 것도 큰 기쁨이 아닐까. 유명한 음악가이자 시인인 한 분은 외국에 있는 딸을 위해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를 돌봤다. 그 아이를 위해 시집을 냈을 정도이다. 그 사랑의 깊이를 보는 듯하다.
에세이와 동영상에서 돌발적이고 신선한 많은 이야기들, 사랑의 문집이었다.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 일인가. 좀 더 아이들이 세상을 밝힐 아름다운 씨앗이 되도록 배려할 일이다. 오늘 아침 출근 길에 어린 소녀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공원에 나와서 함께 운동을 하고 있었다. 눈을 비비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고맙구나. 고맙구나.
우리에게 내일은 바로 아이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우리들의 미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