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화가 아이바조프스키의 ‘아홉 번째 파도’를 들여다본다. 바다는 뒤집어질 듯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조각난 배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 부표처럼 남은 파편에 매달려 간신히 생을 붙들고 있다. 사람들은 거센 물결에 삼켜질 듯 위태롭지만 기묘하게 붉게 빛나는 하늘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스며들게 한다. 수평선 너머 붉게 번지는 태양빛은 죽음의 그림자와 더불어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을 동시에 일깨운다.
문득 로맹 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떠올린다.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홉 번째 파도’라는 표현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끝내 마주해야 하는 죽음과 맞닿은 고독의 절정을 상징한다. 죽음은 끝이면서 동시에 삶의 모든 고통이 멈추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고 우리는 첫 번째에서 아홉 번째에 이르는 물결을 견디며 살아간다. 소설 속 인물에게 파도에 휩쓸리고 싶은 충동과 끝내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공존하듯, 죽음은 두려움이면서도 해방의 욕망을 품은 여행일지 모른다.
아홉 번째 파도는 유럽 바다 문화에서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최후의 물결이자 신화에서는 가장 거세다고 전해진다. 서양에서 숫자 9는 완성을 뜻하고, 동양에서는 끝과 시작의 경계라 여겨진다. 그래서 아홉 번째 파도는 단순한 물결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이 완결되는 순간이자 새로운 시작을 품은 상징처럼 다가온다.
끝이면서도 시작이고 절망이면서도 희망이다. 아이바조프스키의 그림과 로맹 가리의 소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역설 속에 있다. 붉은빛으로 번져오는 하늘은 단순한 태양의 광휘가 아니다. 인간이 끝내 붙잡고 싶어 하는 마지막 빛줄기이자 소멸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다.
살아가며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파도를 맞는다. 때로는 예고 없이 덮쳐오는 고난의 물결 앞에서, 때로는 지독한 상실의 소용돌이 앞에서 흔들린다. 대부분의 파도는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고 우리는 다시 숨을 고르며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단 한 번은 피할 수 없는 아홉 번째 파도가 다가온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이 완결되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맞이하는 거대한 물결이다.
지인의 친정아버지는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았다. 처음에는 이름을 잊고 그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곁에서 돌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인의 얼굴에는 지친 그림자가 짙어졌다. 이제는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묻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무력감에 빠졌다. 그녀가 혼자서 슬픔을 삭인다고 생각하니 내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나는 지인의 어깨 위에 아홉 번째 파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보았다. 그녀 아버지의 육신은 살아있지만 기억이라는 바다는 이미 무너져 내린지 오래되었다. 지인은 무너져 내린 바다에서 작은 널빤지를 붙잡듯 아버지의 손을 애절하게 붙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언젠가 아홉 번째 파도를 건너갈 때, 그것이 두려움의 파도가 아니라 평화의 파도이기를 기원했다.
삶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파도의 연속이다. 내게 아홉 번째 파도는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은밀한 기다림처럼 다가온다. 그것이 종말이라면 나는 무엇을 놓아야 하고, 무엇을 끝내 붙들어야 할까. 파도의 거품 속으로 스러지는 순간 나는 과연 소멸하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나는 이제 파도를 두려움만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 아이바조프스키의 붉은 바다처럼, 로맹 가리가 새들의 죽음을 페루라는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 은유했듯이 죽음은 절망만이 아니라 희망의 길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홉 번째 파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 이전의 수많은 파도를 나는 정면으로 헤쳐 나가고자 한다. 그래서 언젠가 내게 다가올 아홉 번째 파도는 내 삶을 집어삼키는 어둠이 아니라, 나를 더 넒은 바다로 이끄는 빛의 물결이 되기를 바란다.
/정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