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왕관보다 빛나는 마음

등록일 2025-09-03 19:33 게재일 2025-09-04 17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정미영 수필가

모나코 성곽 위에 서자, 붉게 물든 하늘과 반짝이는 바다가 맞닿았다. 성벽 너머에는 그레이스 켈리가 레니에 3세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당이 조용히 서 있었다. 영화 속 장면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공간은 시간을 담담히 품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녀의 선택과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움과 책임, 사랑과 의무가 얽힌 서사가 공간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저녁 빛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그녀의 삶을 닮은 깊은 빛으로 다가왔다.

성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왕비로서 그녀가 맞이했을 하루하루를 상상했다.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와는 다른, 무겁지만 고요한 시선이 성 안을 채웠으리라. 화려한 왕관 대신 마음으로 세상을 비추는 법을 배워야 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선택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길 위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아냈다.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테라스에 섰다. 모나코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작은 나라의 도시가 품은 위엄과 고요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켈리가 이 공간 속에서 느꼈을 떨림과 기대는, 바다 위 파도처럼 잠잠하지만 쉼 없이 흘렀을 것이다. 나는 계단을 걸으며 공간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흔적이지만, 성의 무게와 조명, 바닥의 반짝임이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했다.

성당 앞마당에 멈추었다. 결혼식 날의 장면이 마음속에 그려졌다. 하얀 드레스가 바람에 흩날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던 순간에 그녀는 단순히 아름다운 배우가 아니라 국가와 사랑, 선택 사이에서 마음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한 인간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린 뒤에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얼마나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걸어왔는지, 얼마나 나만의 길을 진정으로 지켜왔는지 물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견뎌낸 빛과 무게를 생각할 때, 나 또한 마음의 왕관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과 책임, 자유와 의무 사이에서 흔들리며 걸어야 하는 길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게, 선택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순간마다 마음속에서 반짝이는 빛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문득 그녀가 남긴 흔적은 단순히 영화나 왕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을 비추는 거울임을 깨달았다.

바닷바람에 섞인 파도 소리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영화 속 그녀는 스크린 안에서 빛났지만, 현실 속 그녀는 선택의 무게 안에서 빛났을 것이다. 행복이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발견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에서 바라본 도시와 항구, 반짝이는 배들이 그녀의 삶과 나의 감정을 포개어 주었다.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장면은 없었지만, 실제 공간은 시간과 사람의 흔적을 담아 내 마음을 울렸다. 자유와 책임, 사랑과 의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녀가 느꼈을 감정을 나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녁이 깊어져 갈수록 성벽 위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바다는 한층 더 어둡게 반짝였다. 그레이스 켈리의 삶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빛나던 순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택한 길은 끝없이 이어진 책임과 사랑의 연속이었다. 그 길 위에서 발견한 마음의 빛은 왕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깊게 반짝였을 것이다.

나는 성을 내려와 항구를 걸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길을 걸었을 때 느꼈을 설렘과 두려움, 기대와 희생이 오롯이 내 마음에 전해졌다.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 남아 조용히 내 마음을 흔들며 감동시키고 있었다.

모나코를 떠나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과 선택, 책임과 행복이 뒤섞인 삶 속에서 진정 빛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보여준 왕관보다 빛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화려함이 아니라 선택의 무게 속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밝히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오늘도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정미영 수필가 

Essay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