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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익어가는 계절

등록일 2025-10-29 16:01 게재일 2025-10-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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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가을은 모여듦의 계절이다. 추석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고 여러 지역 축제마다 사람들이 찾아든다. 오늘 아침에 지인이 농사일을 돕기 위해 가족이 모여 있는 고향에 갔다고 연락했다.

잠시 후, 그가 손전화로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들판에는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였고, 탈곡기가 돌아가자 쌀알이 좌르륵 쏟아져 나오는 장면도 있었다. 장독대 옆에는 크고 작은 호박들이 줄지어 앉아 가을볕을 쬐고 있는 정겨운 모습도 보였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내게 짙은 가을 향기가 무시로 전해졌다.

가을이란 단어는 ‘거두다’에서 왔다고 한다. 단어의 어원 속에는 이미 한 해의 눈길과 손길이 담겨 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 햇살과 바람 속에서 시간을 견뎌낸 뒤, 마침내 가을이 되어 열매를 거둔다. 사람의 그 행위는 이름을 얻었다. 단순히 계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의미를 얻는 순간이 바로 ‘가을’이 되는 것이리라. 봄이 초록빛 새싹을 틔워 우리의 눈을 열게 한다면, 가을은 손끝으로 알곡과 열매를 거두게 하여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가을이면 마을과 거리는 거둠의 손으로 가득 찬다. 들판에서 벼를 거두는 농부의 손끝, 밤송이를 주워 담는 아이의 손, 사과와 감을 바구니에 담는 아주머니의 손길까지. 그 손길이 모여 사람들의 축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을 축제에서 사람들은 송이버섯이나 풍기인삼, 사과를 사고, 전통 음식을 맛보며 다른 계절보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느낀다.

나는 가을 축제하면 언제나 학창 시절의 운동회가 떠오른다. 교문에서 들려오던 상인들의 외침,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장,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모래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기 전에 신발끈을 고쳐 묶던 순간들, 아이들과 어른들의 왁자한 웃음소리. 모든 긴장과 설렘이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 녹아 있었다.

그때의 운동회는 가족과 이웃이 모처럼 함께 어울리는 잔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이나 고모가 한마음으로 피붙이를 응원하고 이웃들도 구경삼아 왔다가 함께 경기에 참여했다.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드리면 색색의 종이처럼 쏟아지던 함성소리,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껏 외치던 응원소리가 푸른 가을 하늘을 흔들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돗자리가 펼쳐졌다. 김밥과 과일, 삶은 달걀과 밤, 통닭 한 마리가 놓인 자리마다 잔칫상처럼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그때만큼은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편을 가르지 않고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먹었다. 운동회의 열기가 쉽게 식지 않았기에 우리들은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월이 흘렀다. 요즘 도시의 운동회는 많이 달라졌다. 가족이 참여하지 않고 학생들끼리만 진행되는 곳도 있다. 그런 곳은 점심도 학교급식으로 대신한다. 학부모인 나는 지금도 가을이 되면 예전의 운동회가 그리워진다.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아래에 놓인 돗자리, 학년 단체로 부채춤을 추고 난 뒤에 내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주던 친구의 따뜻한 손길, 운동장 한복판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시던 할머니들, 운동회에 울려 퍼지던 북소리와 노랫소리가 이제는 모두 추억 저장소에 아련히 남아 있다.

가을(秋)이라는 글자는 곡식 ‘禾(벼 화)’와 불 ‘火(불 화)’가 합쳐진 것이다. 익음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타오름의 계절이다. 낙엽 한 장이 땅으로 내려앉는 순간조차 잎사귀는 스스로를 붉게 불태우며 마지막 언어를 남기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을이 되면 사람의 마음도 익는다고 생각한다. 오래 품어온 그리운 기억이 결실을 맺어 더욱 빛을 내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제는 내 곁을 떠난 이들을 자주 볼 수 없어도, 혹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더는 만날 수 없어도, 그들의 목소리를 추억 속에서 불러내기에 가을만큼 잘 어울리는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게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마음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가을비가 연일 내리고 있다. 비가 그치면, 가을 햇살을 만끽하러 축제에 다녀올 요량이다. 가을을 온전히 즐기면서 기억을 저장해 둔다면, 다가오는 매서운 겨울에 마음만이라도 따뜻하게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정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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