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인 지율이는 나에게 꼬마박사로 불린다. 나는 최근 들어 이 아이만큼 나를 붙잡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해 주는 학생을 만난 적이 없다. 오늘도 나를 보자마자 벌레잡이식물인 파리지옥에 대해 뜻밖의 질문을 건넸다.
“선생님, 파리지옥은 파리 세 마리를 먹으면 죽는 거 알아요?”
내가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며,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해 보여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전혀 몰랐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지율이는 입을 크게 벌리더니 마치 세상의 비밀을 막 풀어낸 사람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예요. 욕심을 너무 부려서 죽는대요.”
나는 그 말투가 어찌나 도덕책 같던지 웃음이 났다. 그러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순간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찔렸다. 욕심을 부리다 죽는다니. 어쩐지 나의 이야기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몇 년 전, 나는 빈혈 수치가 높아서 고생했다. 아침과 점심을 습관처럼 자주 거르는 날이 많았고, 저녁마저 밤늦게 빵 한 조각과 커피로 때우기 일쑤였다. 잠을 자는 시간도 불규칙적이었다. 강의 준비와, 읽어야 될 책, 맡은 일들이 온몸의 세포를 부유하며 나를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냈다. 밤이면 해야 할 일들의 그림자가 자꾸만 늘어나 새벽이 깊도록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그 말은 어느새 내 안에 뿌리내린 주문처럼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버티다가 언제부터인가 어지럼증이 무시로 일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몸이 예전처럼 가볍지 않고 무거웠다. 하루를 힘없이 시작하기 일쑤였다. 나는 참을 만큼 참다가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진단은 빈혈이었다. 몸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의사는 나에게 체력이 바닥났으니 휴식이 필요하단다.
나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빙글빙글 끝없이 맴돌았다. ‘조금만 더, 하루만 더’라는 주문은 나를 갉아먹는 덫이 되어 있었다. 몸은 멈춰 섰는데, 마음은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바로 나였다.
지율이가 말해준 파리지옥이 떠올랐다. 파리 한 마리가 잎에 닿을 때마다 파리지옥은 한 번의 소화를 위해 온 에너지를 쓴다. 몇 번을 반복하면 그 잎은 기능을 상실해 더는 버티지 못해 시든다. 잎을 열어야 먹이가 들어올 텐데, 힘이 없어 더 열지 못한다. 그러나 식물 전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시든 잎 아래에서 새로운 잎이 조용히 돋아난다.
그렇다면 닫는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표시가 아닐까. 파리지옥은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에너지가 고갈되었음을 알아차리고 먹이를 더 이상 소화시킬 힘이 없을 때 잎을 다문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때 스스로 입을 닫는 것과 같다. 그 단순한 움직임은 생존의 방식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지혜를 알지 못했다.
끝없이 삼키려고 욕심을 부렸다. 또한 파리지옥처럼 살아남기 위해 잎을 닫는 것이 아니라, 버티기 위해 ‘닫음’을 되풀이했다. 일에 치여 감정을 닫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기 두려워 마음을 닫았다. 속을 털어놓으면 약해질까 봐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그런데 닫음이 쌓일수록 내 안의 잎이 하나둘씩 조용히 시들고 있었다. 시드는 순간은 언제나 소리가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파리지옥으로부터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내가 품을 수 있는 만큼만 품고 그 이상은 놓아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생의 균형을 회복하는 첫 걸음일 것이다. 앞으로는 아무 감정이나 억지로 삼키지 말고 일에도 욕심을 덜어내기로 했다. 이제 나는 일과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금씩 여백을 주기로 했다.
일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창문을 연다. 내 안의 잎이 시들기 전에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멈춤의 시간 속에서 내 안의 새로운 잎이 자라는 것을 느낀다. 그 잎은 더 단단하고, 더 푸르다.
/정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