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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확

등록일 2023-09-13 18:00 게재일 2023-09-1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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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희 수필가
윤명희 수필가

주말이면 농막에 간다. 산이 둘러쳐진 그곳에는 이제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잎만 무성한 수국은 아직 꽃대를 밀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에는 대신 쥐똥나무 꽃이 하얗게 내려앉아 있다. 나는 옮겨 심은 꽃들을 살피며 물을 준다. 그 꽃들은 그녀와 함께 남편의 친구인 K씨의 고향집에서 왔다.

고향집 골목에 들어서자 빈집 냄새가 났다. 첫 집을 시작으로 옆집도 앞집도 비어있었다. 귀퉁이가 내려앉은 흙 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담쟁이가 눈치도 없이 새순을 틔웠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문 옆에 먼지 앉은 유모차가 오지 못하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붉게 핀 목단 옆에는 작약이 꽃망울을 달고 둥굴레와 금낭화가 작은 등을 켜고 있다. 물기를 흠뻑 채운 장미가 지붕위로 발돋움 하고, 큰 화분에는 수국이 난초와 세력다툼을 하고 있다. 봄이면 다시 채워질 거라 기대했던 빈 화분들이 풀쑥 쓰러진다.

마지막까지 고향집을 지키던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자 빈집들이 흉물처럼 남았다. 곧 허물 거라는 말에 남편과 나는 꽃나무를 가지러 먼 길을 갔다.

우리는 하나도 남기지 않을 요량으로 괭이와 삽질을 해댔다. 지렛대를 이용해 수국이 든 큰 화분을 대문 밖까지 가져가는 일에 온 힘을 실었다. 아래채 뜰에 남보랏빛 꽃이 한 송이 피어있었다. 실금이 간 시멘 바닥 사이에 가냘프게 앉아있는 그것이 허물어지는 빈집을 홀로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괭이로 바닥을 깨 조심스레 뿌리를 거두었다.

쉬었다 하자는 소리에 나는 돌확이 가까이 있는 뜰에 앉아 장갑을 벗었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눈이 갔지만 관심 없는 척 했던 것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돌확에서 장례식장 영정 사진으로 뵈었던 K씨 어머니가 어른거렸다.

이른 아침, 어머니는 장독대를 반질하게 닦고, 돌확에 들깨를 갈아 국을 끓였을 것이다. 학교에 늦겠다는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 문을 두드린다. 서너 번의 재촉에 잠이 깬 아들이 눈을 부비며 방문을 연다. 머릿수건을 한 어머니는 텃밭에 나가고, 차려놓은 밥상이 기다린다. 마당 가운데 있는 살평상에 누워 못다 깬 잠을 떨친 아들은 엄마의 밥상 앞에 앉는다. 따뜻한 쑥국 향을 배에 채운 그는 책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선다. 어스름 해가 지면 된장국 냄새가 풍기는 대문을 들어선다.

시집 와 평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집을 허물 수밖에 없는 아들의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나는 가져갈 것만 욕심내고 있다. 나는 친정엄마가 남긴 물건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일찍 돌아가신 탓이라 해보지만, 결국은 손때 묻은 물건의 의미를 챙기지 못한 까닭이다. 이제 남의 집 처마 끝에 매달아둔 치자에도 눈이 가고 벽에 걸어둔 둥근 채까지 손이 간다. 이것도 아깝고 저것도 아깝지만 눈이 자꾸만 말없이 앉아 있는 돌확에 머문다. 차마 달라고 하기가 뭣해 에둘러 던졌다.

“저건 어디 갖다 두려고?”

가져가라는 말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나는 벌써 놓을 자리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내 속을 들여다 본 듯 했다.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어둑해서야 농막에 도착했다. 내려놓고 보니 배불뚝이 큰 항아리가 일곱 개나 된다. 옆집에서 버려둔 것까지 욕심낸 게 다 모였다. 나는 농장에 갈 때마다 돌확이 먼저 보이라고 입구에 있는 쥐똥나무 아래에 내려놓았다. 외롭지 않게 부레옥잠을 안겨주고, 함께 집을 떠나온 꽃들을 둘레둘레 심어주었다. 따라온 이웃집 항아리도 서로 마주보게 놓고 그 위에 화분을 올려두었다.

보름달이 은은한 밤, 농막에 누워 전깃불을 끈다. 주중의 피곤함이 노곤히 내려앉는다.

달빛 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주앉은 항아리들이 맞장구를 치고 먼저 이사 온 쥐똥나무가 넌지시 돌확의 어깨너머로 끼어든다. 나도 모로 누워 바깥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얘기가 자장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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