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뜨기 좋은 날이다. 이른 아침, 복실이네 대문 앞에 차를 세우자 햇살바라기를 하던 강아지가 먼저 뛰어나온다. 그녀는 벌써 내 항아리의 장까지 뜨고 있다. 나는 서둘러 고무장갑을 끼고 소금물에 푹 절은 메주를 주물렀다. 같이 하게 좀 기다리지 왜 혼자 하느냐며 눈을 흘기자 날씨가 좋아서라 한다. 두 개의 항아리를 된장으로 채웠다. 언저리에 붙은 것을 찍어 입에 넣었다. 누런 된장이 봄 햇살을 품었다.
항아리를 닦고 장독대를 정리하는 일이라도 그녀의 손이 덜 가게 서둘렀다. 수돗가까지 말갛게 치우고는 고무장갑을 벗어 빨래집게로 걸었다. 그녀를 식탁에 앉히고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한 입 베어 문 그녀가 호두 맛이라 한다. 편의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사온 나는 찢어진 봉지를 확인하며 어떻게 단 번에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얼마나 먹었는데 그 맛을 모르겠느냐고 한다.
그녀는 직업군인인 아버지의 복무지인 연천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예비군 중대장이었다. 어린 복실이가 그의 등에 붙어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가로지르면 여기저기서 인사를 하곤 했다. 그는 학교 행사 때면 마을 유지들과 함께 천막이 쳐진 단상에 앉아 있었다. 가끔 연단에도 오르는 각 잡힌 군복의 모습이 학교 다니는 내내 자랑스러웠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녀는 중학교 교복 대신 지금까지 다녔던 학교의 급사가 되어있었다. 교장실에서 담소중인 아버지 앞에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놓았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그저 급사 아이였을 뿐이었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무쇠종이 그녀 대신 길게 우는 날이었다.
엄마는 매일이다시피 남의 집 품팔이를 나갔다. 복실이는 일요일 새벽이면 엄마를 따라 모내기를 하러 가야했다. 일꾼이 모자라 어른들처럼 머릿수건을 하고 작업복을 입으면 한 사람 품삯을 받을 수 있었다. 못줄이 넘어가도록 딸이 다 심지 못한 빈자리를 엄마는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채워야 했다. 엄마와 그녀는 아버지의 화투장이 만들어 내는 구멍을 막기에 바빴지만 역부족이었다.
일자리를 구해 부산으로 갔다. 그녀는 신발공장의 일이 힘에 버거워 밤마다 눈물바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별빛 하나 없는 길을 걸어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손가락질이 방문을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아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 손에 아이스크림 한통이 들려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동생들은 돌아가며 제비새끼처럼 한 입씩 받아먹었다. 숟가락이 몇 번 드나들자 아이스크림은 바닥을 드러냈다. 통까지 혀로 핥은 동생들은 말갛도록 빤 숟가락을 입에 물고 놓지 못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 기차를 탔다. 영등포구에 있는 방직공장이었다. 밤이면 야학에서 못다 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동생이 중학생이 되기 위해 짐 보따리를 들고 왔다. 새벽이면 연탄불에 냄비 밥을 지어 동생을 학교에 보냈다. 종일 미싱을 밟고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졸았다. 부모님은 여동생까지 얹어주었다. 주머니는 늘 월급날이 되기도 전에 비었다.
월급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게 앞에서 발이 멈췄다. 아이스크림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얄팍한 월급봉투를 만지고 또 만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들고 온 것보다 더 큰 것으로 샀다. 혼자 어둑해진 둑방에 올라갔다. 한 숟가락 푹 떠서 고봉이 된 달콤함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가득 차는 호두 맛이 다른 세상을 꿈꾸게 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두 동생도 생각나지 않은 밤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월급날을 기다리며 또 한 달을 버텼다. 혼자 둑방에 올라 퍼 먹고 또 퍼먹으며 어른이 되어갔다.
참 오랜만에 먹어본다는 말에 나는 그녀의 손을 말없이 잡았다. 그녀가 웃었다. 오늘 아침에 끓인 된장찌개가 맛있던데 좀 가져갈래? 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닿은 건 다 맛있다고 했다. 언니처럼 챙겨 준 반찬꾸러미를 받아들고 마당에 내려섰다. 마당 가득한 꽃들이 주인을 닮았다.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그녀가 손을 흔든다. 된장이 익어가고, 담장에 장미넝쿨이 어깨동무하는 전원주택에 복실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