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아기 엉덩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릅니다. 푸른 물을 머금은 나무들을 보면 마음부터 바빠집니다. 팝콘 터지듯 하는 꽃보다 연초록의 새잎에 마음을 뺏깁니다. 꿈틀거리는 새순의 옹알거림에 귀가 간지러운 날입니다.
스물 두어 살 즈음 4월의 그날, 내 눈에 비쳤던 그 연두 빛을 잊지 못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찾는 구내식당 밥이 싫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밥 대신 빵과 우유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뒷마당으로 가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봄 햇살이 초록물감보다 노랑물감을 약간 더 섞어서 잔디밭에 훅 뿌린 것 같았습니다. 풋내가 확 덮쳤습니다. 새순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눈부심 속에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입이 먼저 엄마를 기억합니다. 가죽나무 순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친정 텃밭 한 귀퉁이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가죽나무 순으로 김치를 담았습니다. 식구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봄 내내 엄마의 냄새를 즐겼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의 봄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십여 년 동안 그 맛을 지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경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잠시 시골집에 살 때였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엄나무 순을 한 소쿠리 가져오셨습니다. 도시에서 온 우리가 먹을 줄 아느냐며 먹는 방법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던 나는 가장 쉽다는 방법을 택해, 끓는 물에 살짝 데쳤습니다. 초고추장을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엄나무 새순이 내 입맛을 홀렸습니다. 그동안 최고의 봄나물인 줄만 알았던 두릅이 엄나무 순에 밀려났습니다.
올해도 텃밭 한 귀퉁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핍니다. 논둑에 냉이 꽃이 피고, 달래가 지천입니다. 텃밭에는 하얗게 완두콩 꽃이 피고, 부추와 쪽파가 자리를 잡습니다. 된장찌개 끓일 때마다 넣을 냉이와 달래까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쑥에 생콩가루를 묻혀 봄을 저장합니다. 비 내리는 초 여름날 저녁, 쑥국으로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모양이 비슷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분류합니다. 씀바귀를 무치고, 고들빼기김치를 담습니다. 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맴돕니다.
나는 이제 봄나물을 만지고 먹어야 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첫물인 부추로 김치를 담급니다. 양념 묻힌 쪽파를 통에 가지런히 담습니다. 김치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살짝 데친 머위를 김치 담그듯 양념에 무쳐봅니다. 된장으로 맛을 낸 것과는 또 다른 맛입니다.
시골 장에서 가죽나무 순과 초피나무 순을 샀습니다. 초피나무 순으로 장아찌를 만들고, 가죽나무 순을 만집니다. 인터넷을 뒤져 엄마의 맛을 내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또 해 봅니다. 어지간히 따라간 것 같은데 엄마 냄새는 없습니다. 김치 통 하나 채우려면 얼마만큼의 가죽나무 순이 필요하고, 고추장 단지가 움푹 비어버린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나도 엄마처럼 김치 통에 가죽나무 한 그루 담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반찬 한 번 변변히 보내지 못했습니다. 가죽 나물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르는데, 내 자식들은 언제 내가 생각날까. 이제야 애들을 생각합니다. 쑥을 한 움큼 보내겠다고 하자, 전화기 너머 딸애의 목소리가 뜨악합니다. ‘어떻게 하라고’가 말끝에 들려옵니다. 조금이라도 먹여 볼 요량으로 저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봄나물을 나열합니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보내겠다고 해도 손사래 치는 딸이 보입니다.
봄나물은 긴 겨울을 이겨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맛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도 그냥 지나온 게 아니 듯이요. 세파를 헤쳐 온 내 안의 세월이 봄나물을 끌어당깁니다. 겨우내 무뎌졌던 감각을 새순의 향기로 깨웁니다. 겨울을 이겨낸 쌉싸래한 맛으로 또 한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돌나물 물김치까지 곁들여 식탁 가득 차립니다. 새순의 향연을 함께 즐길 엄마가 없어 서러운 봄날이지만, 나는 새순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윤명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