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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목수

윤명희 수필가 조카뻘 나이의 그는 가끔 우리 사무실에 와서 얘기를 나누는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말이 별로 없고 덩치도 크지 않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대화 분위기에 맞춰 가끔 옅은 미소를 짓는 그가 내 눈을 끈 이유는 닉네임이 목수기 때문이다.목수라면 어릴 적 동네 아저씨를 떠올리게 되어 젊은 그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취미가 목공예일 거라 여기며 요즘 만들고 있을 소품들이 어떤 게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얼마 전, 친구가 오래된 작은 아파트를 샀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살다 간 그 집은 누렇게 뜬 꽃무늬 벽지에 창문이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렸고, 보일러는 녹물에 얼룩져 있었다. 친구는 타일이 깨진 욕실을 보자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했다.계단을 내려가다 1층에 리모델링하는 집이 눈에 띄었다. 저 집은 어떻게 수리하고 있는지 구경이나 하자며 가는데 아는 얼굴이 보였다. 목수? 내가 아는 그 목수? 그가 손을 흔들었다. 복도를 따라 공사 현장으로 갔다.그의 먼지 묻은 작업복이 먼저 눈에 들었다. 자초지종 내 얘기를 들은 그는 들어와 보라고 했다. 싱크대는 물론 문짝에 문틀까지 떼어낸 집 안은 살점이 뜯어져 나간 생선 가시처럼 앙상했다. 머릿속으로 그려보아도 이 집이 어떤 집으로 되살아날지 감이 오지 않았다.3층 친구의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우리를 따라온 그는 바깥으로 된 욕실 문을 여닫으며, 욕실 문은 안으로 달아야 물방울이 바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단순한 이치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는 우리 집 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보며 신경 써서 챙겨야 할 부분들을 체크해 주었다. 눈에 띄지 않은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는 사실에 친구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그가 해 준다면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헌집을 주고 새집을 받고 싶은 두꺼비처럼 나는 맡아서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약속해 놓은 일만도 줄을 서, 도저히 날짜 맞춰서 해낼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이 시기에 일을 마다할 수 있다는 게 의아했다. 맵짠 그의 손재주가 젊음과 어우러져 공사 현장을 잡고 있었다. 그는 취미로 하는 목수가 아니라 젊은 나이에 이미 선수가 되어 있었다.몇 번의 들락거림과 우여곡절 끝에 공사가 끝났다. 새로 칠해진 현관문을 열고 스위치를 올리자, 은은한 조명 아래 신혼집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집 안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스치고 지나간 손길의 위대함을 느꼈다. 목수가 수리한 1층 집이 그려졌다. 그 집은 새로 도배한 벽의 풀냄새와 새로 칠한 하얀 페인트 냄새에 분명 목수의 나무 향이 날 것 같았다.요즘 들어 가끔 그가 사는 집 창을 올려다볼 때가 있다. 창에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의 웃음이 담긴 불빛이 비친다.그 불빛을 만들어 낸 작업복과 눌러쓴 모자의 힘을 바라본다. 새집을 그려 낼 몽당연필을 오늘도 귀에 꽂고 다니는 그에게 지긋한 마음의 눈길이 가는 것은, 어젯밤에 받은 전화로 더 한 것인지 모른다.친구는 몇 해 동안 취직 시험을 준비하던 아들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며 책을 집어 던져 속상하다고 했다.두어 해 전에, 공부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겠다는 아들에게 지금까지 한 게 아까우니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사정했던 그녀다.아들이 번듯한 곳에 취직만 되면 장가부터 보낼 생각에 아파트까지 장만해 뒀는데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의지로 책상 앞에 앉아있을 친구의 아들이 떠올랐다. 그녀가 움켜잡은 손만 놓아준다면 아들은 목수처럼 자기만의 집을 스스로 짓지 않을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2022-12-14

구부러진 길을 보다

양태순 수필가 댓잎이 사그락거린다. 대나무가 여린 바람에 구불구불 몸을 흔들며 고요를 털어낸다. 적막에 들었던 시간을 깨워 일제히 허리를 구부려 나를 끌어당긴다. 발보다 귀가 먼저 닿는다. 대와 대 사이를 지나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서 있으면 맑은 기운이 마음을 차지한 무거운 기운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 느껴진다. 내쉬는 숨이 텁텁하지 않다.대숲을 뒤로하고 걸음을 뗀다. 사박사박 소리를 달고 흙길을 걸으며 옛 생각에 젖는다. 몇백 년 전 유배지에서 우암과 다산이 걸었을 길, 그 길에서 복잡했을 마음을 짐작해보는 ‘사색의 길’에서 잠시 그들의 생각을 엿보려 한다. 걸음마다 발뒤축에서 분가루 같은 먼지가 날린다. 마치 뿌옇게 산란하는 안개처럼 자신들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을 보는 듯하다. 길을 걸으며 갑갑하고 답답한 날에 한숨을 얹기도 하고 새로 깨달은 학문을 정리하기도 했으리라. 길이란 때로 어디로 향하는 목적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과 자유롭게 드나드는 생각을 펼치고 나름의 이론으로 정립하기 좋은 장소기도 하다.‘사색의 길’을 내려와 다리를 건너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에 들렀다. 먼저 105인 기록 이야기 벽으로 갔다. 다산과 우암이야 워낙 유명인이고 알려진 것들이 많으니 뒤로 미루고 어떤 인물들이 왔는지 기록을 읽어 나갔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사이로 몇몇 아는 이름이 보인다. 박팽년과 관련 인물, 이시애의 난 관련 가족, 남이 역모 사건 관련, 이인좌의 난 관련 인물들이다. 조선시대는 역모가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음을 다시 확인한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여인들도 왔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연좌제가 있어 부인과 며느리도 당연히 있었을 터인데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방송에서 유배 생활을 보여줄 때 주로 남자만 나왔기 때문이지 싶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 사고를 확립하는지 경계해야 할 일임을 새긴다.이름 석 자도 없는 그녀들이 눈에 밟혔다. 누구의 처, 누구의 첩, 누구의 며느리로 기록된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나는 짐작조차 어렵다. 주로 여자는 관노로 일한다고 들었는데 곱게 자라 양반가에 시집을 가서 궂은일 하지 않고 아랫것들 단속하고 부리는 일에 익숙했던 이들이 어떻게 견뎠을까. 관청의 관리나 포졸들, 마을 양반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희롱하거나 인간의 선을 넘었으면 그들은 자신을 포기했을 것이다. 참담한 심정이 오롯이 전해진다.되돌아보는 지난날은 누구나 아쉬움의 연속이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부질없는 후회와 되새기는 시간은 비애와 고뇌를 번갈아 버무려선 매콤하게 심장을 찔렀다. 다시 되돌린들 상황과 사람과 이념이 서로 아귀를 맞추어 돌아가는데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인생은 직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요 분기점마다 찍힌 점들이 오르락내리락 곡선을 그리다 바닥을 찍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바닥이 있어 배우는 것들이 있다. 진정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고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삶과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딱딱한 잣대가 아니라 알파라는 미지수를 더할 줄 아는 품이 커진다. 걸어오면서 겪은 온갖 감정을 꿰매 우툴두툴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무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가치를 드러내기 마련이다.유배지의 밤은 파랗다. 밤은 사색의 문을 열어두어 사념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고 달려온다.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듯 작은 꼬투리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입히고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고, 과거의 어느 날을 당겨오고 밀어내느라 생각의 방에는 밤새 불이 켜져 있다. 나무들이 모조리 깨어나 방을 둘러싸고 뭇별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각자의 서사는 덧대어졌다. 그들의 삶에서 유배 생활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마냥 억울하고 화나는 시간만은 아니었지 싶다. 조용히 사색하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인간사 근본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을 터다. 이 땅의 선비이자 학자의 신분으로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햇살이 바다를 건너고 들을 건너와 발밑에 눕는다. 세상이 갖가지 사건들로 떠들썩하더라도 내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 먼저이기를. 따스함에 물든다.

2022-12-07

태고의 공원을 만나다

정미영 수필가 포항에 있는 다섯 곳의 국가지질공원을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먼저, 천연기념물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는 발산리를 찾았다. 예전부터 모감주나무 열매는 알알이 꿰어 염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무 앞에서 기도했던 수많은 이들의 절실한 말이 열매 속에 응집되어 있다가 염주가 되는 것이리라.대동배 해변을 따라 걸었다. 땅과 바다의 경계선 중간에 바다계단이 거대하게 존재했다. 해안가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면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계단모양의 해안단구를 명확히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바다계단을 수호하는 독수리 바위와 악어 바위를 찾았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궁궐과 사찰에는 돌계단을 수호하는 사자, 해태, 해치가 있었다. 그들처럼 바다계단을 독수리와 악어가 지키는 것 같아 정겨웠다.구룡소에 도착했다. 용이 살았던 연못은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오늘날에는 해안형 돌개구멍이라고 부른다. 해안형 돌개구멍은 파도를 따라 자갈이 움직이면서 집괴암을 깎아 만든 접시 모양의 구조이며, 이곳에 바닷물이 채워지면서 연못처럼 보인다는 것이다.구룡소 9개의 굴 중에는 5리가량의 깊은 굴이 있다. 파도가 칠 때 굴 입구로 흰 거품과 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마치 용이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듯하다. 파도에 의해 육지가 깎여 평평하게 만들어진 파식대지와 타포니 옆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작은 돌탑이 드문드문 보였다. 설령 너울에 휩쓸려간다고 해도 절박한 염원의 편린들은 바다를 떠돌면서 영속성을 유지할 것 같았기에 나도 한 켠에 돌을 포개어 탑을 쌓아보았다.바다에서의 오전 일정을 마치고, 내연산 12폭포에 도착했다. 약 14km에 이르는 계곡을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가진 폭포가 발달한 곳으로 하나의 계곡에 이처럼 여러 개의 폭포가 발달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무풍, 관음, 연산폭포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선 곳에 웅장하게 발달하고 있으며, 겸재 정선이 그린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의 배경이 되었다.정선의 그림은 내연산 세 군데 폭포를 그렸다. 맨 위에 연산폭포, 가운데가 관음폭포, 가장 아래는 잠룡폭포다. 선열대 아래 깊은 계곡에 잠겨 있어서 잠룡이다. 공자는 잠룡의 의미를 ‘용의 덕성을 지니면서도 숨어있는 자, 세상을 은둔하고 살아도 마음에 언짢음이 없으며, 옳음을 인정받지 못해도 억울해 함이 없이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가 흔들리지 아니 하는 자’라고 했다.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이겨야만 안심이 되는 곳으로 변했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세상을 떠도는 약한 바람에도 자존감이 뿌리 채 흔들려 휘청대기 일쑤다. 자기 스스로를 격려하는 이가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부터 잠룡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연일읍 달전리 주상절리로 향했다.달전리 주상절리에 도착했다. 육각기둥 척추를 우뚝 세우고 오늘도 산허리에서 중심을 옴팡지게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직한 골격 안에는 포항의 오랜 내력이 담겨 있으리라. 주상절리의 미학은 삶의 여유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광을 마음속에 옮겨 놓고 걷다 보면 누구나 위대한 대자연의 형상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 또한 일상에서 가졌던 날선 방어 기제들이 한결 누그러지고 편안해졌다.마지막 행선지인 두호동 화석산지는 환호공원 해안도로 옆의 이암사면에 분포한다. 고래부터 메타세쿼이아 잎, 게, 소라 등 다양한 육지와 바다 생물화석이 산출되는 곳이다. 화석을 바라본다는 것은 과거를 등에 업고 현재를 인식한다는 것임에랴. 생물학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내 기억의 퇴적층에는 어떤 흔적들이 쌓여 있는지, 자분자분 회상해 보았다.박물관에서 만나는 자연사(自然史)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 보다 태고의 신비가 곰비임비 쌓여 있고, 오래된 전설과 설화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국가지질공원을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보는 것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나는 오늘 태고의 공원을 만났다.

2022-11-30

소설(小雪)즈음에

배문경 수필가 차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간다. 단풍을 보려고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먼저 들어앉는다. 가을인가 했더니 십일월이 벌써 겨울이다. 바람에 내려앉은 낙엽이 차바퀴 바람에 춤을 춘다. 따라나서는 은행잎이며 가로수 잎이 버석하다.김동길은 나이만큼 세월은 가속도가 붙는다고 했던가. 흔하고 흔한 이야기로 모를 사람이 없지만 세월이 내달리는 속도에 현기증이 난다. 하루하루가 활시위를 떠난 화살촉처럼 저 끝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그 화살은 계속 날아가지만 불혹을 넘기고서야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진다. 집착과 안달하던 시간이 조금씩 미풍처럼 부드러워진다. 사람도 사랑도 그리움도 한 발씩만 벗어나면 편안해지는 것을 놓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늘 앵앵거렸다. 그 마음이 엉덩이를 깔고 앉으니 그 만큼 편해진다.친구들과 함께 한겨울 대관령을 갔었다. 언덕을 오르자 때 묻은 양떼들이 마른 짚을 먹으려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림에만 보던 양들이었다. 중년의 여자들이 양털이 정말 옷에 사용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얼굴에 와 닿던 찬 기운 때문에 웃음꽃이 피었다.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여고 친구들은 쟁여놓은 이야기보따리로 2박3일이 늘 모자란다. 더 늙기 전에 제주도로 일본이든 중국이든 외국여행을 떠나자며 호들갑을 떨었다.오래전, 한여름 바닷가에 아이들을 풀어놓으면 밀려오던 파도와 달리고 모래성을 쌓으며 시간을 보내고 와서는 배가 고프다했다. 수다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아이들을 건사하고 푸른 바다 앞에서 마시던 한 잔의 커피는 어쩌면 힘들게 낳은 아이들로부터 잠시잠깐의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이제는 현관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면 대견하다. 조바심 내던 시간들이 안정적이고 등두드릴만큼 커줘서 고맙기까지 하다.나이 들고 나이를 먹고 나이가 차는 일이 늘고 지치고 힘들지 만은 않다. 먹고 사는 일로 바쁜 일상을 살다 문인협회 일을 보조하다보니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행사를 한다. 눈부신 햇살 아래 넉넉한 날, 백일장에서 환하게 웃음 짓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노고가 절로 녹는다. 뿌듯하고 감사하다. 넉넉해진 마음자리를 느낄 때가 많다.혼자 토함산 등산을 하고 내려왔다. 주말이라 제법 사람들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강장이 붐볐다. 버스를 기다리는 또래의 여자에게 다가가서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대구에서 왔단다. 남산 산행 후 토함산을 다시 오르고 내려온 상황이었다. 등산을 좋아한다는 것과 또래라는 것에 버스손잡이를 붙잡고 흔들리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쉬 나를 털어놓고 타인의 삶에 공감할 나이란 얼마나 편안한가.소설가 박경리는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했고 노년의 박완서 또한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데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라고 했다.수레가 달려봐야 얼마나 달릴 수 있었을까. 기차가 생기고 나서 인상파 화가가 생겼다는 일설이 있다. 기차가 속도를 내며 달리자 들판의 나무며 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속도감은 낱낱이 상세히 보이던 정밀을 놓치는 대신 커다란 시각적 변화를 가져왔다. 흐리게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시야와 마음의 부피도 커진 만큼 풍요롭고 편안해질 수 있다. 시야가 넉넉해지는 것이 화풍(畵風)의 변화만은 아닐 것이다. 바삐 내달리는 인생 후반전이 더 많은 것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이 된다. 살아온 만큼 쌓아둔 곳간의 곡식처럼 이제 마음의 양식으로 넉넉해지면 좋겠다.따뜻한 겨울 준비로 소설(小雪)에 김장을 챙긴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씻고 물을 빼고 양념에 버무려 통에 담으며 늘 해 오던 일이 주는 감사를 손으로 느낀다. 익어 식탁에 오르는 김치처럼 일상이 잘 버무려져 풍미를 더해갈 일이다. 익어감에 감사하며.

2022-11-23

미술관 나들이

양태순 수필가 허기,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늘 있는 것. 배고픔이야 지난 일이 되었지만 또 다른 허기가 찾아왔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가 있다면 비켜 가기 어려운 자질 적인 문제에 목이 마르다. 내 그릇의 크기를 못내 아쉬워하며 자책하는 허허로움이 정신을 파먹는다. 그럴 때면 가슴이 텅 비어있는 듯한 허기를 느낀다.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책을 읽어 무릎을 치는 문장 안에서 위로를 얻는 이도 있고,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작은 깨우침을 얻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덮어서 미뤄둔다. 예술에 소양이 모자라는 나는 그림으로 채워보려 마음 먹었다.미술관 나들이에 나섰다. 마침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전시회가 있었다. 88 서울 올림픽 기간에 펼쳐진 세계현대미술제의 작품 중 일부가 전시되는 기간이었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려 했지만 교육 기간이라 들을 수 없었다. 입구에 눈길을 사로잡는 붉은 새가 보였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을 가르며 날개로 균형을 잡은 채 위도 아래도 아닌 멈추어서 사방을 주시하는 듯했다. 참으로 멋진 새라 여겨 다가가서 제목을 보고는 웃고 말았다. 스위스 작가 피터 크나프의 ‘동풍IVA+동풍IVB’이었다. QR코드로 설명을 들으니 스위스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표현한 것이란다. 역시 내 안목은 수준 미달인 것이 분명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그저 즐기자는 마음으로 감상을 시작했다.제목 맞추기 게임을 시작했다. 맞추는 게 없었다. 그림에서 인간이 느끼는 어떤 아픔이나 슬픔이 느껴져서 제목이 이런 것을 포함하지 않을까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미술가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세계는 높기만 했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것이라지만 그림에 녹아 있는 숨결이 따뜻하다와 어둡다 정도가 한계였다. 발길을 멈추게 했던 몇 작품은 사진으로 남겼다.사진을 남기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한다.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뭉클한 감동이나 색채가 주는 신비로운 힘이 경이롭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에스앤에스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앨범에 수록되고 나면 먼지와 함께 잠들어버릴 줄 알면서도 진행형인 행동이다. 가는 곳마다 남기는 사진들은 그날의 즐거움과 감동, 동행한 이들과의 사교적인 친목에 힘입어 얼마간은 살아있다. 그리고 바쁜 일상에 밀려 추억의 서랍에서 낡아간다. 그 며칠을 위해 끊임없이 누르는 셔터의 의미가 다일까. 언젠가 뒤돌아보는 날이 많아질 때 이름의 뒤에 따라붙는 내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은 아닐까.미술가가 작품을 남기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능력이나 재능을 갈고닦은 실력은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에 힘입어 빛을 발한다. 사물을 보는 데 있어서나 사람을 관찰하는 행위를 통해 세상의 온갖 감정이나 감동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를 때면 표출해야만 할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싶다. 보이는 대로의 모습이기보다는 생각이라는 회로를 거쳐 작품이 형상화된다. 그 속에는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혼을 쏟아부은 정신적인 부분이 있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다. 자신을 위한 것이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세계를 향한 눈을 비틀어 주어 정확하게 인지하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추측해본다.미술이란 내게는 늘 어려운 분야다. 그림, 조각, 건축, 공예, 서예 등. 오늘 제목 맞추기 게임에서 하나도 맞추지 못한 실력이니 알만하리라. 그래서 하지 못한 숙제에 걱정이 달라붙듯 전시회 일정을 알아도 선선히 관람하기가 쉽지 않다. 어렵다고 뒤로 미룰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조금씩 다가가려 한다.알지 못하는 분야에 관심을 주는 일은 열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관람하는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면 편리와 빨리 글자를 멀리해야 할 것이다. 묵묵히 눈으로 마음으로 보고 또 보는 것만이 이해의 길로 들어선다고 믿으며 애정을 쏟아야 하는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풍경화를 시작으로 한 발짝 내디딘다.무엇인가를 채우는 일은 부푸는 만월이다. 지적인 허기와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과정에서 만나는 깨달음은 빗방울 같은 두드림으로 가슴을 넓혀준다. 만월의 그득함이 내게로 옮겨 앉는 일이다.

2022-11-16

단풍잎 손

정미영 수필가 쌀쌀한 가을비가 쏟아졌다. 한 차례 내린 비로 아파트 화단에 단풍잎이 떨어져 소복이 쌓였다. 비 그친 뒤에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단풍잎을 두 손 가득 머리 위로 던지고는 환하게 웃었다. 흩어지는 웃음 방울을 따라 옛 추억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아들이 어렸을 때, 집 근처 해맞이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옆에는 키 큰 은행나무가 빼곡하게 서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에 달라붙던 은행잎, 그 한 잎을 손에 들고 신이 난 아들을 보니 내 기분마저 상쾌했다.멀리 인공폭포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렸다. 쏴아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물소리를 듣자, 아들은 단숨에 달음박질하여 폭포수 앞에 다다랐다. 거친 숨을 고를 틈 없이 아들이 돌에 엎드려 물속에 손을 담갔다. 손가락에 물을 묻혀 연못가 돌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려 놓고 ‘엄마 얼굴’이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사람 얼굴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를 그렸다니 기뻤다.정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폭포를 뒤로하고 난간에 걸터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노래하듯 소리치며 이리저리 뛰어 놀던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참을 찾았는데, 어느 순간 저만치 나무 뒤에서 아들이 활짝 웃으며 나타났다.“엄마, 선물.”불쑥 내민 손에 이름 모를 풀이랑, 단풍잎이랑, 나뭇가지가 한 움큼 들려 있었다. 예쁜 그 손!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아들이 선물한 아기단풍 잎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쫙 펼친 아들의 조그만 손을 닮았다. 갈바람과 뒹굴며 놀았던 탓에 잘 마른 단풍잎은 조금 까칠까칠했다. 문득 내 아이의 손을 만져 보았다. 부드러웠다. 엄마 손의 감촉을 느꼈는지 아이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법 세게 잡으며 ‘엄마’하고 불렀다.그 날 우리는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큰방에서 이불을 개키며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외마디소리가 들렸다.“앗, 뜨거워.”부엌으로 달려가니 아들이 싱크대 앞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다.“주전자가 뜨겁다는 것 몰랐어? 괜찮아? 큰일 날 뻔했잖아.”“소리가 나서….”엄마의 걱정 반 다그침 반 외침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사리 같은 왼손으로 오른 손의 둘째, 셋째 손가락을 가리키며 아프다고 했다.아들의 손을 얼음물에 재빨리 담갔다. 주전자를 짚었던 탓에 발갛게 부풀었던 손가락 끝이 다행히 가라앉았다. 조금 전에 불을 끈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에서 보리를 담은 망이 ‘딸그락딸그락’ 소리를 낸 것이 원인이었다. 과연 호기심 왕성한 네 살이었다. 소리가 궁금해 뜨거운 주전자를 만졌다니….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였다. 안아달라고 칭얼대며 품에 안겼다. 저도 놀랐을 터이고, 하루 종일 공원에서 뛰어다니며 논다고 피곤했을 터라, 안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침대에 눕히고 난 뒤 새삼스레 아들의 손을 만져 보았다. 가슴이 찡했다. 이렇게 작을 수가!아들이 처음 세상에 얼굴을 내밀 때였다. 빛을 만난 순간에 두려워할까 봐, 안심하라고, 건강하게 태어나서 기쁘다고, 태어나자마자 손을 잡고 인사했었다. 그 사랑스럽고 귀엽던 아기 손이 해를 거듭할수록 장난이 심해졌다. 때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궁금증에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 미울 때도 있었다.해마다 이맘때쯤이다. 찬바람이 불어와 단풍잎들이 흩날릴 때면 지나온 일들이 떠올라 그립다. 아들이 엄마의 손길을 믿고 잘 자라주었듯이, 앞으로도 나는 아들이 살아가면서 삶의 고비를 겪을 때면 그의 손을 꼭 잡아 줄 것이다. 초록에서 빨강, 노랑으로 곱게 변하는 잎사귀처럼 때론 고맙기도, 때론 밉기도 했던 아들의 손을 기억하며, 나는 지금, 단풍잎 한 잎을 내 손바닥에 올려본다. 가을이 담겨 있다.

2022-11-09

솜사탕과 풍선

배문경 수필가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다. 그 아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십여 미터씩 줄지어 서 있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나는 표정이다. 어른들도 옛 생각에 젖어 있다.신라문화제의 일환으로 각 기관이 행사를 진행했다. 경주문인협회에서는 향가 시 낭송대회와 독서삼품과 백일장을 개최했다. 가을이라 여기저기 놀이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 보니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할 행사로 성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솜사탕과 풍선아트였다. 무료라는 배너를 설치하고 두 사람이 열심히 솜사탕 부스에서 분홍 설탕, 노랑 설탕, 보라 설탕을 넣고 동그란 솜사탕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엄마 손을 이끌고 와서는 하나씩 손에 쥐고는 달콤한 세상을 맛본다. 연인들의 표정도 달짝지근하다.하늘은 푸르고 아이들의 싱싱한 웃음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여기저기 장난치며 뛰노는 아이들이 있으니 대회는 사람들로 붐볐다. 긴 풍선에 기계로 바람을 넣자 길게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귀여운 푸들이 되고 해맑은 해바라기가 되었다. 천막 곳곳에 붙어있는 여러 모양의 풍선 모양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선물을 받으려고 긴 줄이다.어릴 적 운동회가 생각난다.나는 달리기 선수였다. 파란색 체육복을 입고 만국기가 휘날리는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면 축제 분위기였다. 학교 입구 쪽은 커다란 가마솥에서 벌건 기름기가 도는 육개장이 김을 내며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낮술에 찌든 동네 아저씨 서넛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만국기가 운동장의 담장과 건물 기둥에 대각선으로 연결되어 펄럭였다. 나는 공책 서너 권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단거리 육상과 멀리뛰기 선수였기에 운동회 날은 휘파람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특히 바통을 이어받아 운동장을 반 바퀴 도는 릴레이 경기에서 운동회의 승부가 결정되곤 했다. 지고 있을 때 그것을 승리로 이끄는 사람이 결국 그날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을 이기고 바통을 넘겨줄 때 숨은 턱에 차고 응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울렸다. 여자아이들보다는 남자아이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 때가 많았다.그때도 운동장 한쪽에는 솜사탕을 만들어 팔던 아저씨가 있었다. 설탕을 한 숟가락 넣으면 빙빙 돌아가던 기계는 거미줄 같은 설탕 줄을 대신 내놓았다. 그러면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나무젓가락 끝에 감기 시작했다. 그러면 하얀 솜사탕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서로 기계 옆에 붙어 서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나 사서 베어 물던 아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한쪽을 떼서 입에 넣으며 약을 올렸다.내가 솜사탕을 먹었을 때는 달라붙던 설탕의 눅진함이 입과 손가락에 쩍쩍 붙었다. 설탕의 달달함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지나간 시간은 늘 기억에 풍선처럼 부풀려져 있다. 갖가지 색깔의 풍선에는 상상의 바람이 가득했다. 작게 불면 볼품이 없고 크게 아주 크게 불다 보면 제 부피를 넘어서서 ‘펑’하며 터져 조각나 버리던 풍선, 각각의 인생처럼 다양한 색으로 하늘을 수놓듯이 다양한 삶이 인생길을 만든다.부풀어 터질듯했던 유년의 기억 속 편린들이다. 다양한 색의 솜사탕처럼 갖가지 꿈들이 세상에 무지개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지금의 저 아이들처럼 한껏 아름다운 꿈을 지니고 내달릴 힘들이 넘쳤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나이가 있다면 초등학교 때가 아니었을까.그러고 보니 어느 사이 풍선은 힘이 빠져 탄력 없이 손아귀에 쉽게 잡힌다. 솜사탕은 부풀었던 설탕의 꿈들이 녹아 혓바닥과 손가락에서 달짝지근한 맛으로 스며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점차 부피가 줄어드는 것인지 모른다.한때 부풀고 달아올라 뭔가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슴 벅차던 시절을 지나오니 이젠 바람이 빠져 말랑하다. 편안한 중년의 오후다.

2022-11-02

노을풍경

양태순수필가 지난해부터 노을이 보고 싶어 올여름 꽃지해수욕장을 찾았다. 노을 명소로 가는 내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어 숨조차 참아가며 지켜보았다. 노을꽃이 막 만개하려는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회색으로 덮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수평선을 물들이는 장관을 볼 수 있겠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동행한 이들은 이미 해가 꼴깍 넘어갔다고 돌아서자는데 먼 길 달려온 아쉬움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노을맞이는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짧은 시간에 찬란함이 스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온과 바람, 대기의 맑은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섰다 사라지게 하는 노을, 그런 노을이 보고 싶었다. 사는 동안 겪은 숱한 감정을 색으로 보여주는 이력서 위의 잔잔한 위로가 느껴지는 노을 말이다. 짬을 내어 노을맞이를 나섰다. 도심의 가로수에는 가을이 도착하고 있었다. 지난달 시퍼렇던 잎들이 쏟아지는 햇살에 붉은빛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무 그늘이 적시는 보도블록도 흰색에서 좀 깊어진 회백색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골길로 방향을 잡았다.창문을 내리고 달렸다. 간들바람이 지나며 머리카락을 사라락 흔들자 달큼한 향기가 달려들었다, 곧 들이 다양한 노랑으로 펼쳐졌다. 벼가 노랗고, 누렇고, 황금빛으로 익어서 바람을 따라 물결쳤다. 어쩔 수 없는 농부의 딸인지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오래된 기억들이 먼지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가을 들녘은 언제나 흥겨웠다. 주고받는 막걸리 사발이 넘치고 자식들에게 약속을 남발하는 부모님의 어깨가 펴지는 때였다. 그에 비해 일거리는 곳곳에 넘쳐났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어둠이 처마를 지나 마당에 내려앉을 때쯤 손을 털고 저녁상에 앉았다. 저 들 어딘가에 있을 보고픈 이들을 쫓느라 눈길을 멀리까지 보냈다. 경적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볕내를 맡으며 넓은 들을 지나 한적한 카페에 들렀다. 유자를 머금은 향긋한 차를 마시며 카페를 기웃거리는 가을 풍경을 즐겼다. 카페 주변은 밭과 논이 었다. 창밖으로 계절을 건너가고 있는 억새의 흰 미소와 붉은 감이 만들어내는 등롱이 햇살 아래 느긋하다. 일바지를 입고 막바지 고추를 따는 아주머니의 굽어진 허리,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어깨에도 가을이 또랑또랑 익어가고 있었다. 참 푼푼한 가을이다.오후의 해는 짧았다. 카페를 나설 때 유리문에 빛이 고이고 있었다. 저무는 기운이 스멀스멀 들을 가로질러 오고, 계단을 내려오듯 태양이 성큼성큼 서산을 향했다. 해가 가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천천히 속도를 맞추며 따라갔다. 산그림자 길어지는 산굽이를 지나고 물그림자 어룽지는 저수지를 지나 사과밭을 지났다. 옅은 그늘이 점점 진해지며 길게 내 뒤를 따라왔다. 어느 순간 파랗던 하늘에 색이 섞이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여유를 버리고 달려 산마루에 차를 세웠다.능선 너머가 물들기 시작했다. 붉은 해가 산마루 위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듯 하늘 자락이 붉으스름해지면서 하늘과 땅의 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땅의 색이 조금씩 짙어지다 경계를 지우듯 한가지 색으로 넓이를 키운다. 산들이 검푸르게 변하는 동안 하늘 모퉁이는 파랑에 은색, 금색, 주황, 빨강이 겹쳐졌다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다른 색깔의 고무찰흙을 주물러 섞었을 때처럼 오묘한 색으로 물들고 있다. 거기에 지나가는 흰구름이 포개지니 남보라색이 스며들듯 피어났다. 마치 작은 산들 허리를 감싸 안고 계곡물이 찰랑거리는 듯하다. 황홀한 빛깔, 사람의 마음을 벅찬 감동으로 가득 채운다.노을맞이가 끝나고 머릿속 파노라마가 이어졌다. 마음만 부자였던 시절, 단골가게에서 주전자에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를 베이스로 두런두런 일과를 풀어놓았던 무싯날의 말랑했던 시간들에 풍덩 빠졌다.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받았던 따뜻한 기억들이 가득했다. 지나간 날의 어느 페이지든 색색의 감정이 흘렀겠지만 훈훈한 정은 노을빛이었다. 어느덧 인생시계가 가을에 접어들었다. 생각의 갈래를 정리하여 단순화 시키는 작업이 아직은 길을 헤매는 중이다. 그러나 오늘의 노을맞이에 덧그리는 붓질이 살아갈 가을에 고운 노을풍경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2022-10-26

‘지란지교를 꿈꾸며’

정미영 수필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편지를 자주 썼다. 우리 집이 멀리 이사를 했던 탓에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늘 함께 했던 친구들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1명도 없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니 낯가림이 심했던 나로서는 섬에 고립된 것처럼 막막했다.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집 전화가 소통의 매개체였지만, 밤 9시까지 야간 학습을 하고 난 뒤에 통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 아버지들이 퇴근하셨던 저녁 6시를 지나 남의 집에 전화를 건다는 것은 예의범절에 어긋난다고 부모님들에게 가르침을 받던 때였다.소소한 일상을 편지지에 옮겨 쓰고 나면 내 마음에 만족감이 꽃물 스며들 듯 번졌다.그 때 내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편지였다.편지에는 습관처럼 우정에 관한 글귀를 적어 보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했던 것이 유안진 교수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였다.참된 우정에 대한 작가 개인의 소망을 진솔하게 나열했는데, 나와 친구들도 그러자고, 무수히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의 사귐처럼 맑고 깨끗하고, 변치 않은 우정을 꿈꿨다.그 덕분이었을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더니 단짝 4명 중 1명의 친구와 마주보며 살고 있다. 결혼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방에 정착했는데, 친구 또한 같은 이유로 지금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40년 가깝게 이어지는 인연이 필연처럼 감사하다.시인의 작품에 드러나는 소망을 나는 적잖이 경험하고 있다. 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친구는 내가 아무 때나 찾아가 커피 한 잔을 달라고 해도 귀찮아하지 않는다. 끼니를 거르고 찾아가도 싫어하지 않고 집밥을 차려주며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봐 준다.나는 취미가 많지 않은 사람이다. 아날로그 유형이라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 능숙하지 않고, 음치라 노래를 못하고 몸치라 댄스를 못해, 문화센터에서 배울 생각은 아예 엄두를 못 낸다. 운동 신경이 둔해 시작하고 싶은 운동 또한 마뜩찮다.그런데 재주 없는 나에게도 관심이 가는 것이 하나 있다. 수필쓰기다. 내 친구는 내가 사유의 문장이나 감동적인 문장, 창의적으로 돋보이는 글을 쓰지 않더라도 타박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하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도록 응원한다. 잘하지 못해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다 보면, 훗날 성실성에 따른 예술적 성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살아온 경험으로 터득했으리라.‘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책에서 작가는 성현처럼 생활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나 또한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무조건 인내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내 안의 감성을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라 생각되며, 우리 사이에 더욱 신뢰가 쌓일 것이다.‘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다.’ 나는 내 친구가 나 외에 다른 특별한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질투하지 않겠다. 친구가 좋아하는 보랏빛 수국 속에서, 따뜻한 허브 차 속에서, 나를 가끔 떠올려 준다면 기쁘겠다.나는 우리가 수의를 입게 되는 날까지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빛이 흐려지고 기운이 쇠약해 져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더더욱 없기를 기도한다. 남편이나 자식보다 더 오랫동안 나를 지켜본 내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녀 또한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가슴 무너지는 일인가. 이것만 약속된다면 나는 세월 가는 것에 결코 초조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세월이 흘러 묻힌 자리에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났으면.’ 나와 친구도 꼭 그랬으면, 참 좋겠다.

2022-10-19

스마일치즈김치

배문경 수필가 천년의 미소라고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본다. 천 년 전의 미소가 저랬을까. 넉넉하고 평화롭다. 일부분이 달아나고 없어도 미소는 온화한 할머니 같다.지난 7일은 세계 미소의 날이었다.‘세계 미소의 날’은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과 사람들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와 친절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자는 뜻에서 제정되었다. 매년 10월 첫 번 째 금요일이다.재즈보컬가수 넷킹콜의 ‘Smile’을 카카오 톡으로 지인에게 아침인사로 보냈다. 몇 해 전 아카데미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Joker)’ 예고편에 사용된 곡이다. 그러고 보니 이모티콘에 다양한 미소가 있다. 하나 혹은 두세 개를 인사말과 함께 보냈다. 우리 일상이 미소로 시작된다면 좋지 않을까싶은 마음에서였다.어느 순간 자고 일어나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휴대폰 알람소리에 일어나 씻고 거울을 보고 다듬고 옷을 입고 출근하는 일이 그렇다. 그래서 사는 일이 지겹고 행복하지 않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매일 매일, 일상의 지겨움에 지칠 때 즈음해서 주말이 있고 명절이 있고 국공일이 있다. 미소 짓는 날이라고 하니 웃음이라도 한 번 날려본다. 실없다싶어도 세상은 나비효과라는 것도 있으니 하루가 즐거울 수도 있지 않을까.얼마 전, 리어카에 뻥튀기를 담아서 끌고 다니며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리어카의 전부를 팔아도 삼사만원이 될 듯 말 듯 했다. 간호사회에서 나오는 연말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할머니는 “나는 이렇게 살아도 자식들이 객지에서 먹고 살만하고 집에서 무료하게 있기 싫어서 리어카를 끌고 나온 사람이다. 날 도와주기 보다는 다른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고 얘기했다. 치아가 다 썩어 내려앉아 앞니가 몇 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큰돈은 아니지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서서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미안함과 민망함을 느꼈다.가끔 주머니에 있는 몇 천원으로 뻥튀기를 사드리곤 했는데 그 후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리어카에 뻥튀기를 파는 그분이 나보다 마음부자였다. 미소부자였다. 뻥튀기를 살 때 그분의 행복도 함께 샀어야했는데 어설픈 눈으로 내가 더 미소가 많다고 착각했다. 뵐 때마다 웃으며 담소라도 나눴더라면, 하시는 일이 값진 일이라 여겼다면 발길이 이어졌을텐데 후회가 밀려온다.‘세계 미소의 날’을 제안한 인물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마일 아이콘을 고안한 미국의 디자이너 하비 볼(Harvey Ball)이다.그는 그가 1963년 고안한 스마일 아이콘의 본질적인 의미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기념일을 만들어 진정한 미소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비 볼의 고향 우스터에서 매년 세계 미소의 날 기념행사가 진행된다. 기념행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의 웃는 얼굴 풍선, 길바닥 그림, 아카펠라 콘서트, 서커스 공연, 파이 먹기 대회 등이 펼쳐진다.하지만 세계 미소의 날이 있는지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많으리라. 아직 코로나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하다보면 상대로 저절로 웃음을 띠게 된다. 리어카를 끌며 뻥튀기를 팔던 할머니도 리어카에 폐휴지를 담아 끌고 가시는 노인도 오늘 하루는 편안했으면 좋겠다. 노을 지는 하늘 보며 편안하게 허리를 펴며, 살아있어 행복하다고 주름진 얼굴에 웃음 가득했으면 좋겠다.그 날 이후 서툰 동정을 보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짓지 못하고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가난에 대한 무시는 혹여 없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할머니는 어쩌면 미소가 가난한 나를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행동을 반성하며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나 염화미소를 떠올리며 연습했다. 간혹 사진을 찍을 때처럼 ‘스마일, 치즈, 김치’를 반복했다.덕택일까. 방송에서 세계 미소의 날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2022-10-12

고구마를 캐며

양태순 수필가 가을볕이 흐뭇한 미소를 흩뿌리는 오후다. 나는 찐 옥수수를 들고 고구마 밭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저 혼자 깨춤을 추던 발이 조붓한 둑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남우세스럽게 고꾸라지지는 않았지만 생채기가 난 발가락이 시원한 것이 운동화가 달아났나 보다. 신발을 찾으려고 풀숲을 헤치자 놀란 풀무치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날갯짓에 빠져든다.눈에 익은 느낌은 과거로 이어지는 때가 많다. 열두 살 무렵의 나는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캐는 대신 메뚜기 잡느라 바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한 고랑씩 맡아 줄기를 걷어내고 고구마 수확하느라 열심이었지만 뒤처져 따라가는 내 호미질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 밭에는 굼벵이가 더러 있었다. 어머니가 땅심을 키운다고 수시로 퇴비를 내고 분뇨를 뿌린 탓이었다. 크고 잘 생긴 고구마를 캐서 손에 들고 자랑하려고 하면 굼벵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인물 훤한 고구마에만 흠집을 내놓기 일쑤였다.우리 집은 물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그 때는 대부분 물고구마를 심었다. 모양과 색깔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크고 많이 생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굵기는 해도 모양이 볼품없고 굼벵이가 파먹어 얽은 고구마가 많았다. 지나치게 굵은 것보다 배가 살짝 나오고 아담하면서 몸매가 매끈한 것이 상품 가치가 좋은데 말이다. 형제들이 먹은 것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려난 것들이었다. 별다른 요리법이 없던 때라 삶아 먹는 것이 다였지만 그 맛을 어디에 비할까.우연히 텃밭이 생겼다. 농사는 질색인 나지만 집과 가까워 텃밭을 가꾸어볼 마음을 내었다. 어머니의 훈수로 밭을 갈고 고구마를 심었다. 유기농 거름도 사서 주고, 잡초를 뽑고, 때맞춰 물을 주며 정성을 들였다. 그 덕인지 줄기가 곧잘 뻗어나가며 잎이 진녹색을 띄어 땅 속에서 알이 쑥쑥 자라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형제들과 같이 먹을 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가을을 기다렸다.오늘은 형제들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한 고랑씩 맡아서 캐기 시작했다. 호미가 흙 속을 부드럽게 파고들어야 하는데 텅텅 튕겨져 나오는 듯 한 소리가 났다. 그래도 묻혀 있는 고구마에 대한 기대로 팔에 힘을 주어 호미질을 했다. 처음 드러난 실체는 엄지손가락 굵기였다. 낙심하지 않고 반 고랑을 캐어 봐도 씨알은 형편없다. 거의가 손가락 크기이고 간혹 먹을 만한 크기가 있었다. 게다가 땅 깊은 것만 안 고구마 때문에 다들 손에 물집이 생겼다. 형제들은 캐낸 고구마를 들고 난리다. 이걸 어떻게 먹느냐고. 아무래도 내년 농사 위해 빡시게 일 하는 것 같으니 저녁은 격하게 차려야 한단다.나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누어 먹을 생각에 몹시 설렜다. 이토록 부실한 놈을 숨기느라 잎들이 그리 무성한 줄 상상도 못했다. 나는 민망한 속내를 숨기고 내가 지은 것이니 가져가서 잘 먹으라고 했다. 밭둑에 앉아있는 어머니는 우리가 하는 양을 보며 웃으시지만 아쉬운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는지 고랑에 둔 눈길을 차마 거두지 못한다.이번에도 겉모습에 속은 듯하다. 무성한 줄기 아래에 토실한 고구마가 있으려니 믿었는데 헛꿈이었다. 겉이 번드르르할수록 실속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주 속는다. 거침없는 입담에 속아 물건을 사기도 하고 꼼꼼히 살펴보고 들어야 하는 보험도 상대의 말솜씨에 넘어가 후회하기도 했다. 아마도 마음보다 눈이 먼저 반응하는 모양이다.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데는 다양한 요소가 있다. 외적인 것에는 빼어난 말솜씨와 다양한 표정, 몸에 배어있는 움직임이 있고 내적인 것에는 스며 나오는 인품과 말투, 상대를 향한 따뜻한 시선,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다. 한 면만을 보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는다.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고구마를 캐면서 또 배운다. 눈만 믿지 말고 여러 요소를 두루 참작하여야 한다는 것을.언제쯤이면 마음창이 맑아질까. 한 꺼풀 아래에 숨어있는 보석을 알아보려면 구름과 바람을 부지런히 키질하여 깜깜한 하늘에서 빛이 나는 별, 그 별의 키질을 배우면 될까.

2022-10-05

식혜

정미영 수필가 식혜를 만들기 위해 무명 자루를 꺼냈다. 엿기름을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주둥이를 꽉 조여 맸다. 따뜻한 물에 담가 조물조물 만져 보니 감촉이 좋았다. 우러나온 물이 뽀얀 젖빛이었다.나는 아기를 낳으면 모유를 먹이고 싶었다. 아기를 보듬어 안고 눈을 맞추는 엄마의 모습, 실컷 먹고 활짝 웃는 아기의 얼굴, 얼마나 행복할까 기대했다. 아기의 작은 몸짓조차 흘려버리지 않으려면 엄마와 아기가 교감해야 된다고 믿었다. 그 첫걸음이 모유를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첫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했다. 환경이 낯설었는지 입맛이 없었다. 산모가 잘 먹어야 젖이 나온다고 했지만 미역국조차 먹기 힘들었다. 결국 초유마저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배고파 보채는 게 안타까워 분유를 먹였다.조리원에 있던 산모 중에 나만 모유를 먹이지 못했다. 첫 출산이라 내가 유독 예민했는지, 아니면 체질 때문이었는지, 모유를 먹이는 엄마들이 부러웠다. 때때로 나 자신에게 서운했다. 다른 엄마들의 모유 먹이는 모습은 왜 그리도 당당하고 쉬워 보였는지. 남들은 잘도 젖을 물리는데 나는 왜 내 아이에게 못해 줄까. 안타깝고 미안했다. 모유를 못 먹이는 것이 마치 자식 사랑이 부족해 그런 것만 같아 자꾸만 스스로를 괴롭혔다.미안함 때문일까? 엿기름을 물에 담가 우리다보면 젖먹이를 둔 엄마처럼 가슴이 찌르르해진다. 뽀얀 엿기름물이 마치 모유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엿기름물을 받아 식혜를 만들어 내 아이에게 먹이는 일이 즐겁다. 엄마 젖을 먹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처음 식혜를 만든 것은 아이의 돌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이가 고열에 시달렸다. 마침 시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나에게 식혜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엿기름의 찬 성질이 열을 금방 떨어뜨린다며 만드는 법을 대강 알려 주셨다.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곧바로 엿기름을 사다가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해 보았다. 아이가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다음 날 아침, 밥솥을 열었다. 여섯 시간 정도 지나면 밥알이 서너 개 떠오른다고 했는데 밥알과 함께 엿기름이 빼곡히 떠 있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어머니, 밥알 아닌 것도 많이 떠있어요!”“밥알 말고 떠 있는 게 뭐꼬, 밥솥에 엿질금 물만 넣었제?”“엿질금도 깨끗이 씻어서 같이 넣었는데요.”어머니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아차, 싶었다. 나는 어머니의 설명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깨끗이 씻은 엿기름을 버리기가 아까워 쌀 안치듯이 물과 함께 밥통에 넣었다. 곡진하게 삭을 줄 알았다.결국 다시 식혜를 만들었다. 두 번째는 성공이었다. 그 걸 먹고 아이의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나을 때가 되어서 그랬는지, 엄마의 서툰 솜씨가 안쓰러웠는지, 아무튼 나았으니 다행이었다. 그 때 맛을 본 탓인지 아들은 음료 중에 식혜를 가장 좋아한다.아이가 식혜를 좋아하니 자주 만든다. 시장에 갈 때면 아예 엿기름을 서너 봉지씩 사다 놓는다. 아이에게 먹일 것이므로 엿기름을 사면서 꼼꼼히 따져본다. 어디에서 만들었는지, 제조일자는 최근인지. 요즈음은 봉지에 만든 사람의 얼굴 사진까지 박아 놓는 경우도 있다. 믿고 사라는 말일 테다.예전에는 집집마다 엿기름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엿기름을 만들 때 싹을 내기 위해 시루에 보리를 넣고 물을 주며 길렀는데, 기른다고 해서 ‘기름’이라 불렀단다. 집집마다 만들었으니 장맛이 다르듯 엿기름에 따라 식혜 맛도 달랐으리라. 그래서 이왕이면 엿기름 봉지를 고를 때 손맛 좋게 보이고 연륜이 묻어나는, 할머니 사진이 찍힌 것으로 고른다. 식혜 맛을 내기 위한 나름의 묘책이다.식혜가 알맞게 식었다. 단내가 은은하다. 아들이 연신 입술을 달싹인다. 엿기름으로 빚은 내 마음의 모유, 한 그릇 넘치게 퍼 담는다.

2022-09-28

그 후

배문경수필가 녀석의 눈이 훑고 지나갔다. 덩치가 커서 드리운 그늘도 넓다. 팔을 사방으로 펼치고 지나면 큰 나무도 쓰러지고 다 지어놓은 과실도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칼날같이 매서운 입김으로 집을 삼키고 강의 너비를 넓혀놓는다. 지나간 자리마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있던 길은 사라진다.방에서 자던 오빠도 처음엔 빗물이 방으로 들어오자 걸레로 슬슬 닦았다고 했다. 불어난 개울물이 안방으로 들어올 때도 이 정도야 뭐라고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둔 여수로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촌집의 앞뒤가 포위당했다. 낮은 곳에 있는 논들은 벼들이 고스란히 물속에 갇힌 수생식물이 되었다. 마당으로 내려서자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단다. 오빠는 어둠 속에서 겁이 덜컹 났다고 했다.그래도 추석 차례상을 차렸다. 집을 떠나 가까운 거처에서 밤 대추 곶감 잘 구워진 생선과 삼색 나물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매와 탕이 오를 즈음 바깥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 햇살이 서서히 빛을 발한다. 술을 한 순배 돌리고 다시 모두 절을 했다.친정이 있는 곳으로 향할 때까지도 이렇게 난리가 나 있을 줄은 몰랐다. 세간은 육이오전쟁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물건들이 길바닥에 나와 구정물에 절여졌다. 냉장고며 주방용품, 옷장과 옷들이 흙탕물과 섞여 널브러져 있었다. 오빠는 연신 호스를 연결해서 흙탕물을 씻었지만, 밖에 설치된 수도 하수구가 막혀 애를 먹었다.옛 기록을 보면 ‘태풍’이란 단어 대신 ‘영풍폭우(獰風暴雨·거센 바람과 거친 비), 대풍우(大風雨·큰 바람과 비), 구풍(98B6風·회오리치는 세찬 바람) 등으로 기록했다. 자연재해를 온전히 겪은 당시 선조들에게 바다는 더욱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닷길로 떠난 중국 명나라 사행길 기록을 담은 ‘죽천이공행적록(竹泉李公行蹟錄)’도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한 사명감과 숭고한 업적을 위해 떠났을 것이다.“회오리바람이 급히 일어나 산 같은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배가 물결에 휩쓸려 백 척 물결에 올라갔다가 다시 만 길 못에 떨어지니 어찌할 방책이 없어 하늘에 축원할 뿐이라. 밤이 깊은 후 바람의 기세 더욱 심하여 배 무수히 출몰함에 지탱하지 못하네. 부사가 탄 배가 가장 험한 곳에 정박해 배 밑 널빤지가 부러져 바닷물이 솟아 역류하여 배 안으로 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 부사가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뱃머리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축문을 지어 깨끗한 비단에 싸 바다에 넣고 군관과 노졸로 하여금 옷을 벗어 틈을 막고 또 막게 하더라.”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자연현상은 두려운 존재이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곳곳에 기후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국지성 폭우가 유럽의 도시를 휩쓸고 태풍도 점점 강해진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머지않아 사라지고 북반구 빙하도 사라진다. 그러면 해수면이 올라가 해안은 물에 잠기게 된다. 그 두려운 존재는 점점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누런 벼가 가득하던 곳이 태풍이 지나자 돌밭으로 변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손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어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이 답을 하듯 곳곳에서 사람들을 보내왔다.돌이 덮인 논밭에는 세상의 포클레인은 다 이곳에 집결한 것처럼 돌을 밀어내고 있다. 길거리에 덮인 진흙을 씻어내려고 다른 지역의 이름표를 단 소방차들이 달려와 물을 뿌렸다. 자원봉사자들이 건네는 도시락으로 속을 채운다. 물이 쓸고 간 자리에 사람들의 훈기가 들어앉았다.정신을 차리고 집을 돌아보니 그나마 이가 나가지 않은 밥공기와 국그릇이 의지하듯 포개져 있다. 접시들도 흙탕물을 씻고 겹겹이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눌러 앉아있다. 어제의 좌절을 벗고 씻고 닦은 바닥과 높은 곳에서 잘 버틴 몇 벌 옷을 까슬한 바람에 옷걸이에 걸어 말린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바람에 온몸이 한 점씩 꾸덕꾸덕해지고 있다. 물에 젖어 쓸 수 없게 된 삶터를 사람들이 일으켜준다.

2022-09-21

삶의 종점을 내려다보며

정미영 수필가 비바람이 하릴없이 들이치는 날이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국화원이 소슬히 떨고 있다. 오늘 떠나는 망자의 삶에도 비바람이 많았는지, 국화원이 슬픔을 응축한 채 웅크리고 있다.작년, 신축 아파트 담장 너머에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세련된 외벽에 국화꽃 한 송이와 국화원이라는 글자만 간판으로 걸려있어 몇몇 사람들은 미술관인줄 착각하지만,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례식장이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와 부재의 형체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서로 껴안고 이별하는 공간이다.나는 조문객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가늠해 본다. 가까운 이와의 별리가 주는 슬픔의 깊이를.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사람,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 울음을 삼킨 채 눈물을 훔치는 사람 등 죽음 앞에서는 같은 상실의 무게를 지닌 것 같아도, 톺아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농도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공무원이셨던 친정아버지는 출장을 떠난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비보를 접하고 황망히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보았던 안내판에 쓰인 망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내 아버지지만, 더는 부를 수 없는,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는 공허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영정사진을 쳐다보면 짙은 슬픔의 농도로 무거워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그 날의 장면들이 오버랩 될 때면 장맛비에 봇물 터지듯 가슴속에 눈물이 쏟아져 차오른다. 먹먹하게 온몸을 짓누르는 강렬한 슬픔이 상실감으로 변주되어 내 마음속으로 재빨리 휘감아 흘러 들어온다.며칠 전,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무겁고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고인은 삼 년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다. 죽음의 유예기간 동안 아흔여섯 살의 고인과 가족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고, 서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간이 많았단다. 그런 연유로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지인은 평온하게 전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서아프리카 가나에서는 댄싱 장례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상여꾼들이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로 장례식장을 흥겹게 축제 분위기로 이끈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추모하는 엄숙하고 차분한 진행이 아니라 템포 빠른 음악과 경쾌한 춤을 통해 고인과 작별하고 유가족과 조문객을 위로한다고 한다.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고인의 생전 삶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은 좋은 의미인 것 같다.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준비가 필요한 일은 각자의 죽음을 잘 대비하는 일임에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현재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서로가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별 연습을 미리 해보면 좋을 성 싶다.웰다잉(Well-Dying)! 가족들이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훈훈한 내 장례식 풍경을 만들려면 평소에 자주 떠올려야 될 단어다.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금기(禁忌)를 상기(想起)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 성찰을 통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각인된 의미 있는 장례에 대한 나만의 인식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어느덧 나도 계절을 알리는 인생시계의 시침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오늘, 나의 장례식 장면을 두 눈 감고 상상해 본다.향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듯하더니 울컥, 미세한 애잔함이 눈물로 변해 뚝뚝 흘러내린다. 장례식장의 차가운 공기, 껴안고 흐느끼는 가족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삶의 종점, 먼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내가 닿을 곳이다.나는 지금, 나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국화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2022-09-14

맞이하다, 슈룹(우산의 옛말) 아래서

양태순 수필가 곧 추석이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태풍이 지나간다. 늘 탈이 없이 지나가길 바라지만 올해는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추석맞이를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슈룹이 간절하다.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자리는 끔찍하다. 시간당 쏟아부은 폭우로 포항의 일상이 마비되었다. 뉴스 화면에서 확인하는 곳곳의 침수 지역과 하천 범람, 정전 상태 등이 놀랍고 무섭다. 이맘때면 수확 직전인 과일, 막바지 힘을 내는 벼농사와 고추 농사가 재해 앞에 속수무책 당했으리라. 떨어지고 잠기고 무너진 처참한 모습에 망연자실도 잠시 모두가 원상복구에 손을 보탤 것이다.어감의 차이가 미묘한 말이 있다. 사전에 찾아보면 어떻게 다른지 차이를 모르겠는 단어가 있다. 평안과 안녕처럼 맞이하다와 맞다가 그렇다. 맞이하다는 오는 것을 맞다, 맞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오는 어떤 때를 대하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엇비슷한 경우 둘 다 사용 가능하다고 한다. 태풍을 맞이하다와 태풍을 맞다가 아리송하다. 지금껏 맞이하다는 기쁘고 좋은 일에만 써왔는데 말이다.그래서 맞이하는 일에는 가벼운 설렘이 따라온다. 손님을 맞이하려면 집을 깨끗이 하고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중에도 기분이 좋다. 새해를 맞이할 때면 지난해를 돌아보고 반성할 것은 하고 잘한 것은 뿌듯해하며 새날을 향한 다짐으로 희망에 부풀기도 한다. 생일이나 승진, 기념일에는 마음껏 축하하기 위해 작은 선물과 꽃을 준비하며 대상자보다 준비하는 사람이 더욱 설레게 된다. 일련의 과정이 번거롭긴 하지만 함께 하는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에 기꺼이 행한다.맞다는 불시에 찾아오는 불청객인줄 알았다. 예정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맞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한 상황을 만든다고 믿었다.이번 태풍이 그런 상황이었다. 며칠간 뉴스에서 태풍 ‘힌남노’를 대비해야 한다, 어마무시한 초강력 태풍이라는 둥 엄청 열심히 홍보했다. 어디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당황하면서도 나름 대비를 했다. 일 층에 가게가 있는 사람들은 모래주머니를 쌓고 중요한 것은 높은 곳에 올렸고 집에는 창문 테이핑을 하고 자동차를 지하 주차장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태풍은 상상하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악질인 태풍을 맞다고 해야만 할 것 같다.인생에서 맞아야 할 것은 많다. 자연재해가 일부이긴 하지만 더 많은 경제적 감정적 문제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 사고로 인한 정신과 신체의 어려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한 불안, 좌절, 사회생활에서 맞는 관계의 복잡성이 맞서 싸워야 할 문제다. 이럴 때마다 최선을 다해 견디다 보면 지나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혹독한 태풍이 지나고 파란 하늘에 건재한 태양처럼.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으면 씁쓸하다. 사실 우산을 쓴다고 비를 다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신발이나 종아리는 축축하게 젖기 십상이다. 덩치가 큰 사람은 어깨도 젖는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은 우산이 걷는데 방해가 되는 듯해도 쉽게 우산을 접지 못하고 살대가 부러지거나 찢어져야 포기가 된다. 아마도 붙잡은 우산이 미약하지만 의지가 되는 든든함이지 싶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부모님은 우산같은 존재다. 아주 어릴 때는 친구와 싸웠을 때 무조건 내편이 되어 우는 나를 어르고 달랬다. 친구를 혼내주지 않아도 힘이 되고 든든했다. 살면서 궂은일, 험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뒷배가 되어주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나보다 더 기뻐하는 바보다.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어도 내리사랑은 변함없이 비를 맞지 않도록 기꺼이 우산이 되어준다. 언제나 자식을 향한 마음길을 열어두고 눈비 걱정하며 그 그늘로 몸을 들여 쉬어가라 무언의 눈길로 어루만진다. 슈룹, 이름 안에 사랑을 내주고 가없는 사랑을 품는 뜨거움이 묻어난다.올 추석에도 보름달이 뜰 것이다. 어깨가 젖을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이 쓰기도 하는 우산이다. 그것은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함이다. 사랑이 가득한 우산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상처를 보듬으며 오순도순 맞이하는 추석을 그려본다.

2022-09-07

낭산(狼山)의 말(言)

배문경수필가 말이 씨가 된다. 바닥에 떨어진 말 한마디가 뿌리를 내리고 잎을 무성히 달아 꽃을 피우기도 한다. 말의 힘을 느끼며 나는 낭산(狼山)을 오른다. 도리천(忉利天)으로 가는 길에 여름 웃자란 소나무와 나무 백일홍이 길을 연다. 어디서 후드득 날아오르는 새들이 낯선 이의 방문에 저들끼리의 언어로 숙덕인다.413년 8월에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났다. 형상이 누각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졌다. 실성왕이 ‘지금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놀고 있다. 복 받은 땅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낭산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다. 훗날 고승 명랑법사는 ‘신들이 노니는 숲’이라 해서 낭산의 남쪽을 ‘신유림(神遊林)’이라고 말했다.낭산은 높지도 깊지도 않다. 사람이 오르며 하늘을 보기 좋은 곳이다. 더위에 숨을 헐떡이며 닿은 곳에는 푸른 잔디로 곱게 단장된 큰 봉분이 있다. 아귀가 맞는 돌을 능을 쌓기 위해서 주위에 일 이단으로 둘렀다. 단지 비석에 선덕여왕릉이라고 하니 이곳이 내가 찾던 그 곳이다. 항공사진으로 찍힌 선덕여왕의 능은 신비하고 신성했다. 이곳에 신라의 여왕이 자리 잡고 환생을 꿈꾸며 누워계실지도 모르겠다. 숱하게 본 영화, 드라마에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들어도 질리지 않는 묘한 내용들이다. 왕(王)과 왕(王)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고 만들고야 만 대단한 여왕이 아닌가.“아무날 내가 죽을 것이니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라”삼국유사에 따르면 그곳은 낭산의 남쪽이라 했다. 그날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니 낭산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 30여년 후 문무왕이 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 四天王寺)를 지었다. 사천왕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니 선덕여왕의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지혜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여왕이 죽음을 예견하고 사천왕이 떠받칠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심금(心琴)을 아련히 울려줄 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은 아닐까.말은 말하는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듣는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더 큰 의미나 가치가 된다.후배가 소원을 말했다. 그녀는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정확히 3년 뒤에 스페인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순할 순順에 여자 희姬자를 쓴다. 본인은 까칠한 성격이지만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니 순하게 살아진다고 말했다.나는 글월 문(文) 서울 경(京)의 이름을 쓴다.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에서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의 힘이란 상상 이상일 수도 있겠다. 자꾸 불러주고 들려주면 알게 모르게 그리 된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글밭으로 한 걸음씩 가고 있었던 셈이다.선덕(先德)은 대방등무상경의 선덕바라문에서 유래하였고, 도리천의 왕이 되길 바라서 선덕이란 이름을 썼다.진평왕릉과 선덕왕릉이 낭산 일원에 들어서면서 낭산은 왕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신들이 머무는 공간에 왕이 다른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신라인들이 평안을 빌던 낭산이 이제 염원을 이루게 해줄 기도처로 자리매김한다.‘이리 낭(狼)’자를 쓴 ‘낭산(狼山)’이다.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동쪽의 큰 별을 ‘랑(狼)’이라 한다”. 그래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란 다른 설도 있다. ‘남산’의 오자가 아닌 ‘낭산’은 분명 경주 시내에 있는 해발 100m의 구릉이다. 짐승의 형상이든 큰 별을 의미하든 낭산은 그곳에서 선덕여왕의 능이 세상의 중심에 있게 한 산이다.선덕여왕도 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신라의 튼튼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분황사며 영묘사, 황룡사 9층 목탑 등의 사찰을 지었다. 첨성대를 올리고 반월성을 거닐며 신라의 백성을 위해, 국가의 안전을 부처님께 빌었을 일이다. 영험한 여왕의 기도가 곳곳에 남아있을 법하다.낭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산새가 길을 열고 솔솔 바람 한 점 시원하게 아미(蛾眉)를 훑고 지나간다.

2022-08-31

동반자

정미영 수필가 시간의 곡선을 따라 흐르던 푸른 바람 줄기가 소나무에 부딪쳐 태고적 소리를 내는 오후다. 토함산 숲, 햇살로 잘 엮은 빗살문을 열어젖힌다. 수천 년 쌓여진 바람층의 느낌표를 음미하며, 불국사 주차장을 지나 동리목월문학관을 찾아간다. 바람결에 문인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가만히 느낌표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다.문학관은 김동리 소설가와 박목월 시인의 문학과 삶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다. 동리문학관에는 작가의 대표작인 ‘황토기’가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되고, ‘무녀도’의 내용이 담긴 모형들이 있다. 목월문학관에는 테마 공간을 목실과 월실로 구분하여,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구성해 놓았다.저마다 공간에는 작가들의 서사가 넘쳐흐른다. 두 분의 문학적 성취를 천천히 음미하며 박목월 시인의 문학 동반자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향한다. 시인이 문학의 길로 나아가는 데 김동리 선생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글귀를 읽고 또 읽는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고독감을 달래고 문학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단다. 또한 조지훈 시인과 박두진 시인을 만나면서 문학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는 전시 글을 읽으니 내 가슴에 짙은 여운으로 남는다.나에게도 문학의 동반자가 있다. 포항수필사랑 동인들이다. 십칠 년을 만났으니, 정분이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남편보다 오래 붙어 있고, 취미가 같으니 사춘기 딸보다 소통이 더 잘 된다. 수필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을 열었기에, 때로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나의 편이다.우리는 격주로 만나 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모임에 성실하게 참석하기 위해서 모두가 잠든 새벽에 수필을 쓰려고 깨어 있을 때가 많다. 고요함 속에서 촉촉한 안개 속살 더듬거리듯 나 자신 안에 고인 언어들을 탐닉한다. 내 안의 수많은 느낌표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린다. 꽃잎이 떨어져 날리면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그런 탓에 꾸준히 수필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부여잡아 초고를 쓰고 퇴고를 거치면, 한 편의 잘 다듬어진 글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렘 가득 안고 글을 챙겨 길을 나선다. 문학의 동반자인 나의 정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다.조지훈 선생님도 박목월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1942년 봄비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날, 경주로 찾아왔던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박목월 작가는 한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건천역에서 조지훈 작가를 기다렸고, 그런 그를 조지훈 시인이 알아보고 플랫폼에서 내리자마자 얼싸 안았다는 장면은 유명하다. 그 후로 두 작가는 열흘 동안 매일 문학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분이 문학적 동반자로 거듭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고향인 영양으로 돌아간 조지훈 시인은 목월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거기에는 ‘목월(木月)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완화삼(玩化衫)’ 시가 적혀 있었다.“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조지훈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감격한 목월 시인도 밤새 화답시 ‘나그네’를 준비했다.“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시를 써서 마음을 주고받았던 두 작가는 대단히 낭만적이다.나도 수필로써 동인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다. 내 문학적 동반자들의 글을 가슴으로 읽고, 정독하며, 경청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달콤한 수필 향기가 오랫동안 널리 퍼지기를 기원해 본다. 문학관의 존재가 새삼 고맙다. 이곳을 방문한 덕분에 오랫동안 수필 주위를 맴돌고 싶은 나에게, 글 쓰는 실력만큼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지 깨닫게 해준 날이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감해야 한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동리목월문학관에서 깨닫는다.

2022-08-24

조계사의 연꽃 향기

전재영 동국대 출강 최근 장맛비가 세차게 쏟아붓던 시간대에 불교의 총본산인 조계사를 몇 번 찾았다. 빗줄기가 더위를 식혀주듯 내 마음속 번뇌를 조금이나마 씻기 위해서였다.자비로운 표정으로 온 세상을 끌어안은 부처님 앞에서 들려오는 고매한 스님의 청아한 목탁 소리, 겸허히 빗물을 받아내는 사리탑의 경건함을 기대하며 조계사 앞에 다다랐다.그러나 사찰 일주문 앞에 펼쳐진 색다른 풍경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곳에는 고성을 지르며 종교단체를 비방하는 시위꾼들로 북적였다. 신성한 기도 시간, 지나가는 행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유로움을 방해하는 모습으로 보여서인지 영 민망했다. 당연, 그 시위가 비록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보일 리 없었다.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과 반대 의견은 늘 있어 왔다. 또 다양하고 균형 잡힌 시각은 사회 발전을 견인한다. 그러나 도처의 시위현장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물리력을 동원한 무질서한 시위나 인격살인에 가까운 비방 및 모욕행위, 고성방가 수준의 배려 없는 행위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목이 터져라 남을 물러가라며 누군가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그들을 보면 팍팍한 삶의 애수와 고초가 느껴져 간혹 애처로운 마음이 든 적도 있다. 하지만 모든 문제나 갈등은 단지 목소리만으로 해결되기란 어렵다. 문제의 원인과 현재의 상황을 면밀하게 바라보고 건설적인 견해를 합리적이고 성숙한 방법으로 표현할 때 다른 이들의 공감을 더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번뇌를 잊고자 사찰을 찾은 중생의 번뇌와 시름이 쉽사리 사그라지지는 않지만, 세찬 빗줄기를 말없이 받아내는 연꽃잎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비를 베풀어 타인을 포용하라는 듯 작은 깨달음을 준다.불교는 연(蓮)꽃과 깊은 연(緣)을 가졌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 피어나는 꽃이면서도 그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청정과 깨달음, 성스러운 진리를 상징한다.연뿌리에는 질펀한 늪 바닥에 처해 있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본성을 간직하여 세상을 정화한다. 중생들의 몸은 비록 어지러운 사바에 있지만 정(淨)하게 지녀 세상을 구제해야 한다는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연꽃잎은 잎사귀에 흙탕물 한 점이 없다.쟁반 같은 뽀송한 연잎은 물방울을 동그랗게 말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한 점도 취함이 없이 그대로 떨어뜨린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신성하게 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한다.또한, 연꽃은 꽃을 피우면서 동시에 씨를 품는다고 하여 꽃과 씨가 동시에 탄생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모든 결과는 이미 원인을 품고 있음에 비유하며,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을 지니게 됨을 상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꽃은 성스럽고 아름답지만 아무리 만개해도 결코 요염하지 않으며 향도 자극이 없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 향기는 멀어질수록 그윽하기만 하다.퇴계 이황 선생은 만년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서당 동쪽에 네모진 조그만 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했다.‘정우’란 ‘깨끗한 벗’이란 뜻으로 곧 연을 가리킨 말이다. 이러하니 연(蓮)은 화중군자(花中君子·꽃의 군자)로 불린다. 송 주돈이(周敦履)는 그의‘애련설’(愛蓮設)에서 연을 “꽃 가운데의 군자로다”라고 칭송하기도 하였고,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연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었다.해가 중천을 지나면 하루의 노고를 연지(蓮池)에 부리고 정하게 꽃잎을 오므리면 연대 밑으로는 개구리밥과 생이가 방석처럼 깔고 앉아있으니 연지불국(蓮池佛國)이 아닐 수 없다.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아무리 시끄럽게 울어도 연꽃이 피는 사찰경내의 염불 소리는 극락음이다. 물론 조계사 앞 일주문을 지나면서 본 집회 시위 현장 또한 그 나름의 이유는 있을 터다. 다만, 그곳이 한국 불교의 중심이니 연꽃이 주는 깊은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길 권한다.

2022-08-17

다리, 잇다

양태순수필가 여름을 이고 가는 여행이다. 집을 떠나면서 잡다한 생각을 구겨 넣고 문을 잠갔다. 따라오지 못하게 빗장까지 질렀다. 태양이 조각조각 쏟아져 대지를 굽는 열기에 코끝이 후끈해도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은 기분 탓일 거다. 잠시 일상으로부터 비켜서는 홀가분함에 마음이 부푼다.목적지는 신안 퍼플섬이다. 가고 오는 길이 멀지만 더 늦기 전에 다녀오자는 말에 친구들이 기껍게 찬성했다.차가 출발하자마자 수다가 폭발했다. 학교 때의 친구라 서로의 친구가 겹치기도 해 이야기의 소재는 풍성했다. 때로는 서로의 수다가 허공에서 얽혀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샘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과거에서 현재를 넘나드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흥미진진했다. 간간이 튀어나오는 고향 사투리가 이야기를 더 찰지게 녹여냈다. 이야기의 대상이 들으면 언짢을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사는 것이 이 맛이라는 듯 웃으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훌쩍 지나 천사대교에 이르렀다.천사대교는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신안군이 천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입구에서 본 다리는 장관이었다. 다리의 주탑에 연결된 케이블은 은실로 짠 주렴처럼 아른거리고 바다와 하늘 사이로 천천히 달리는 차가 천사 날개를 지날 때는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듯했다. 파란 물을 잔뜩 머금은 하늘을 콕 찔러보고 싶은 아찔한 설렘이었다.몇 개의 짧은 다리를 더 지나 퍼플섬에 도착했다. 안좌도, 만월도, 박지도로 연결된 다리는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보라색 일색인 집과 건물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신비스러웠다.보이는 곳마다 포토존이어서 그곳에서 만난 여행팀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추억을 쌓았다. 전동차를 타고 반월도를 둘러보는 내내 길가에는 버들 마편초가 한들거리며 반겨주었다. 원래는 자생하는 도라지꽃이 많아서 퍼플이었지만 지금은 오래 볼 수 있는 버들 마편초로 바꾸었다고 한다.비탈진 밭에는 고구마와 참깨가 많았다. 참깨를 보며 꺼낸 친구 이야기가 대박 사건이었다.들어보니 참깨를 받은 사돈이 전화를 해서 ‘사돈, 방앗간에서 중국산이 섞였다는데 아니지요?’ 했더니 ‘사돈이라서 중국산을 쪼매만 섞었니더’ 했단다. 솔직한 사돈 때문에 우리는 기막혀하면서도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퍼플교를 걷는 내내 포즈 잡으며 시시한 이야기로 깔깔거렸다. 그러는 동안 서로를 향한 다리는 더 단단해졌다.다리는 사이를 이어준다. 뭍과 섬, 섬과 섬, 길과 길,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게 한다. 이미 열린 길을 거리는 더 가깝게 마음은 더 두텁게 해주는 역할이다. 다리가 오래도록 튼튼하려면 오가는 이의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이번 여행은 새 다리를 놓기도 했다. 내 마음에서 신안으로 퍼플섬으로 다리를 놓았다. 많은 다리를 지나며 쌓은 이야기들이 기억 저장고에서 반짝이고 있을 게다. 언제든 꺼내면 2022년 여름과 함께 아련한 시간으로 피어날 것이다. 방송에서 또는 다른 사람의 여행 경험담에서 희미해진 다리가 다시 진해지기도 할 테지만 말이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는 자칫 끊어지기 쉽다. 사소한 실수가 쌓이거나 친하다고 번번이 예의를 무시하면 그 틈으로 의심의 물이 스며든다. 추억으로 이어진 줄에 어느덧 구린내가 날 때면 위험한 순간이다. 재빨리 귀를 세우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만에 빠져 눈치코치 모른다면 자기도 모르는 새 다리는 없어지고 만다.아름다운 다리를 건넌 친구들과의 다리는 더욱 견고해졌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서로의 마음을 잇는 다리를 덧대고 삐걱대지 않도록 속마음 헤아리기와 배려란 기름칠을 꼼꼼하게 했다. 같이한 세월만큼 우정도 추억도 돈독해지는 너와 나, 우리의 다리가 오래 이어질 것을 믿는다.친구들, 참깨에 중국산 참깨는 섞으면 안 된다. 그것만 명심하자.

2022-08-10

다시 간호법으로

배문경 수필가 대한간호협회에서 발간한 ‘코로나 영웅, 대한민국을 간호하다’라는 책을 읽는다.전북이 고향인 김성덕 간호사는 대구동산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의료지원을 했다.그가 집을 떠날 때 가족을 설득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세 자녀와 남편이 꼭 가야하느냐는 말에 “지금 아니면 언제 가느냐? 나는 간호사(registered nurse·RN)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라고 당당하게 가족을 설득시켰다. 코로나 현장 파견을 마치고 자가격리에 들어갔던 그녀가 촌집에서 혼자 기거했던 것도 다시 떠오른다.나는 왜 그녀처럼 모든 것을 훌훌 벗고 그 당시 코로나로 힘들어했던 그 곳에 지원서를 내지 못했을까. 아마 전국의 RN들이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미안하고 안타깝고 그래서 오랜 시간 자책하며 병원에서 조금 더 코로나로 힘든 직원과 환자를 도우려고 노력했다.그 당시 4대 일간지 1면에는 코에 반창고를 붙인 간호장교의 사진과 유사한 사진들이 실렸다. RN들이 이마에 길게 패인 주름과 콧등에 반창고를 붙인 채 기쁜 모습으로 훈장처럼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그들은 3킬로나 되는 방호복을 입고 15시간 환자들을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강행군을 했다. 어떤 시민은 봉투에 비누 두 개와 “의료진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메모를 같이 보냈기에 받는 사람들이 눈물이 났다고 했다.올 가을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예견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4차 접종을 하느라 병원은 분주하다.얼마 전 경주간호사회 주관으로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서른한 살, 간호사가 되었습니다’를 쓴 배윤경 작가 겸 간호사인 그녀와 북토크를 진행하였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전공해서 취업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혼자 다녀왔다. 그리고 간호대학을 다시 도전해 취업까지 한 아주 똑똑하고 열정적인 여성이다. 그녀의 글에서 보여지듯 RN의 길은 멀고 험하다.RN은 삼교대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환자의 질환으로 인해 나타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인수, 인계받는 과정이 릴레이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신규RN이 질환과 환자를 이해하고 습득할 시간이 1달에서 3달이다. 미국의 경우 1년 과정이 주어진다. 신입RN의 많은 수가 일 년을 못 넘기고 자리를 떠난다. 신규RN에게 주어지는 환자의 목숨은 커다란 부담이며 두려움이다.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 예민하고 날카롭다.이미 이 과정을 겪은 RN은 다시 신규간호사의 교육까지 맡아야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병원은 환경의 처우개선과 RN의 인원을 늘여야하다. RN이 일 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이미 많은 논문에서 발표되듯이 칠년에서 십여 년의 숙련된 RN이 환자를 간호할 경우 질환 치유율(治癒率)이 훨씬 높다. 그래서 경력RN의 중요성은 배제될 수 없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갖가지 요구를 들어주는 과정은 지난(至難)하다.이런 상황 속에서도 많은 RN들이 환자를 위한 봉사를 진행했다. 순천향대학병원 간호부는 10월 4일 ‘천사 데이’를 맞아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봉사활동은 ‘건강한 삶은 간호사와 함께, 건강한 100세를 위한 혈압관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이어졌다.환자와 보호자들이 오가는 곳에서 RN들은 혈압과 혈당, 체지방 등 검사를 진행했다. 건강 상담을 통해 혈압관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내용을 접했다. 더 많은 병원들이 서비스를 늘일 수도 있으리라.초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복합적 질병을 간호하며 치매와 만성질환으로 건강에 대한 서비스는 더욱 필요하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의료법이 시행되고 있다. 경력RN이 현장에서 다양한 질환을 간호할 수 있는 ‘간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국민들에게 안정적인 간호가 실천되어야 한다.양질의 의료서비스가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도록 ‘간호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참간호의 아름다운 현장을 꿈꾼다.

2022-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