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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프로젝트

등록일 2023-08-09 17:58 게재일 2023-08-1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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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경수필가
배문경수필가

시작은 오천 원이었다. 시립도서관 앞에 서서 폰을 하고 있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맞으시죠”, “네” 얘기는 짧고 물건을 본 그녀는 좋다며 돈을 나의 계좌로 입금시켰다. 물건은 내손을 벗어났다.

집안 청소를 하다보면 먼지만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필요했지만 지나고 보면 처치 곤란한 물건들로 방이 빼곡히 차곤 한다. 언제 시간을 내서 정리를 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마음먹은 날 이것저것을 들춘다. 내게 필요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필요할 것 같은 물건부터 어쩌다 보니 잊어버리고 겹쳐 산 물건들이다. 말도 되지 않은 가격으로 내놓고 기다려보는 것도 잠시 흥미로운 일이다.

물건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사람이 주는 기쁨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관리가 필요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도 나무와 나무사이처럼 적절한 햇빛과 바람이 필요하다.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팔면서 또 많은 전화번호를 지웠다. 사람 숲에 가려 하늘을 못 보거나 잊혀 진 그도 나도 그녀도 나도 모르는 관계인 경우도 있다.

누구시죠? 이런 관계로 당황스럽지 않기 위해 정리하자. 당근마켓에 내놓을 것은 아니지만 정리해서 전화번호부도 가볍고 통풍이 되어야할 듯했다.

원피스를 좋아하는 내게 안 입는 원피스가 서 너 벌이 있었다. 살 때는 비싸게 줬지만 시간이 지나니 짧아서 약간 유행이 지나서 라는 핑계로 물건을 당근마켓에 내놓았다. 가격은 각각 오천원이었다. 올리자 말자 입질이 시작되었다. 어떤 분은 택배를 부탁하며 택배비까지 덜렁 보냈다. 같은 편의점끼리는 택배비가 저렴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점심시간에 직장근처 같은 편의점에 갔지만 택배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몇 군데를 갔지만 허사였다. 어찌어찌하여 찾아간 편의점이 얼마나 고맙든지 택배를 보내고 나니 점심시간도 끝나가고 등엔 땀이 고여 있었다. 오천원짜리 원피스가 결국 나의 점심시간 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신뢰를 지킬 수 있었으니.

점심시간에 직장 앞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두 시간 후 연락을 취했더니 죄송하다며 갑자기 ‘자녀가 아파서 급히 병원에 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팔아도 된다며 미안한 마음을 비추었다.‘일 잘 처리 잘하고 오실 때까지 옷은 기다리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라’는 위로의 문자를 날렸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소식은 없다.

타지에서 온다는 고객은 퇴근 후 40분 뒤에 도서관 앞에서 보기로 약속한 경우다. 낯설지만 잘 입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만원이란 돈이 생겼다. 그리고 가벼움이란 기쁨도 같이 얻었다. 많은 것이 좋고 행복할 수 있지만 적정선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행복을 만든다.

빽빽하게 장롱에 들어차 있던 옷걸이의 옷들이 조금씩 빠져나가자 장롱도 통풍이 되는지 환해졌다.

휴대폰 전화번호 목록이 차고 넘친다. 작은 인연조차 소중히 여긴 탓에 저장해 둔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이름만 보고서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옷장정리를 끝내고 전화번호 목록도 하나씩 지웠다. 카톡방에 쌓인 사진과 동영상도 지웠다. 폰의 데이터 공간에 여유가 생겼다. 어떤 공간이든지 여유가 있어야 새로운 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 수천 개의 전화번호가 차 있던 휴대폰도 여름의 바닷바람이 일듯이 시원해졌다. 비우는 것이 채우는 일에 첫걸음이다.

오늘 아침 내려놓았던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몇 년 연락이 안 되던 사람이 직장으로 전화를 해서 나를 찾는다. 잊혔던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가온다. 이건 새로운 행운이란 생각으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는 모양이다.

그토록 극악스럽던 올 여름 더위가 아침 선선한 바람으로 바뀌었다.

8월 8일이 입추(立秋)고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말복이 8월 10일이다.

눈부신 오늘이 기다리고 있다. 가볍게 출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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