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하늘이 내려앉는다. 곧 비가 내리꽂을 태세다. 퇴근을 망설이는데 사무실 문이 열린다. 얼굴이 파리한 여자가 엉거주춤하니 들어선다. 상가를 내 놓겠다느니, 상담을 좀 해 달라느니 말의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차근하게 얘기해 보라고 하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 남자가 내 명의로 가게를 하거든요?”
“무슨? 어떤 남자가요?”
얼마 전까지 애인이었던 남자가 그녀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이름만 사장인 그녀는 직원이 다섯 명이나 되는 가게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카드까지 사용하는 남자와는 이제 헤어진 사이다. 헤어지고도 카드는 남자가 쥐고 있다. 남자는 카드대금을 내야 하는 날짜를 넘기고, 카드를 정지시킨 그녀는 남자에게 가게에 들어간 돈을 돌려주고 명의를 가져가라고 했단다.
남자는 그녀의 말을 단칼에 난도질하고 콧방귀까지 뀌었다. 콧방귀에 이어 쌍욕을 바가지로 하더라며 어이없다는 듯이 실실 웃는다. 갚아야 할 카드 대금이 불어서 7천만 원이라는 말에 듣는 내가 억장이 무너진다. 왜 그 남자에게 가게를 내줬냐고 물었다. 묻는 나도 그녀처럼 갈팡질팡 한다.
그녀는 남들이 자고 일어날 때마다 돈 벌었다는 말에 비트코인을 시작했다. 빚을 내 시작한 비트코인은 3천만 원의 빚으로 남았다. 그 빚을 남자가 장사해서 갚아주겠노라 했다. 빚을 갚아준다는 말에 또 카드빚을 내 가게를 차려주면서 4살 연하의 남자와 연인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뱃속에 욕심을 품고 맺은 인연이 맞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서로의 목소리만 들어도 욕이 나오는 원수가 되었다. 그녀는 남의 손으로 코를 풀려다 코가 꿰었다.
팔에 큰 문신이 있고 성질이 난폭하기까지 하다는 그 남자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쫒아 들이닥칠 것 같다. 나는 흘낏 바깥을 내다 봤다. 어둠이 내린다. 가게 내 주고, 카드 주고 쌍욕까지 듣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카드빚이 오롯이 그녀의 몫이 되는 건 보나마나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녀를 그냥 보내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주변에 얼마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내 사무실까지 찾아왔을까. 오지랖이 발동된다.
그녀가 폰에 적어 둔 것을 보여주었다. 그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은 것 같은데 요점이 없다. 뭘 말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폐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빚이 더 늘기 전에 그 남자에게 폐업하겠다는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자 그녀의 표정이 잠시 밝아진다. 그녀가 써 놓은 글자를 조합해서 말하고 싶은 문장으로 만들어주었다.
듣다듣다 하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하려고 여기까지 왔느냐는 말이 막냇동생 나무라듯이 나왔다. 가게부터 정리하고 나서 파산신청을 하면 그만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말로만 듣던 파산신청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보증금을 받아서 그거나마 먼저 갚고 벌어서 차근차근 갚겠다는 말을 기대한 내 귀에, 이젠 나랏돈으로 자기의 잘못을 처리하겠다고? 순간, 힘든 가운데도 꼬박꼬박 세금내고 있는 내 등에 그녀가 빨대를 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묵은 얘기들을 꺼내며 감정에 받혀 눈물을 찍어내기를 반복했다. 벌써 파산을 말한 그녀를 위해 내가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뜨거운 커피를 그녀 앞에 두고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 줄 뿐이었다. 상담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음에 올 때는 커피라도 사 오겠다고 한다. 손사래를 치며 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 잘하라고 당부했다.
그녀가 나가고,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비가 내린다. 우산을 펴고 보니 저만치 그녀가 빗속을 걸어가고 있다. 사무실에 있는 우산이라도 가져가라고 소리쳤다. 하얀 원피스가 손을 흔들며 뛰어간다. 거머리의 등에 더 큰 거머리가 달라붙어 덜렁거린다. 그녀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저렇게 큰 게 쉽게 떨어질까. 나는 신호등 불빛이 바뀔 때까지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