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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푼 고리

등록일 2023-10-25 18:17 게재일 2023-10-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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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희 수필가
윤명희 수필가

눈빛들이 진지하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런 웃음기는 사라지고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통팥시루떡까지 수북이 쌓아올린 고사 상이 제법 구색을 갖췄다. 두어 시간 전에 급조한 축문을 회장인 金이 맛있게 읽는다. 막걸리를 잔에 붓고 절을 한다. 지갑을 열어 복전까지 내 놓는다. 뻗정다리가 된 남편까지 절을 하자 뭘 저렇게까지 할 게 있나 싶은데, 뒤이어 깁스를 한 鄭까지 목발을 옆에 세워두고 절을 한다. 퇴주잔에 막걸리를 붓고 다시 잔을 채우는 張까지 엄숙하다. 고사를 핑계로 모여 놀자는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먼저 사건의 발단이 된 건 남편이다. 화물차에서 밧줄로 물건을 묶다 떨어졌다. 평소의 실력으로 봐서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격이다. 어이없어 하는 남편을 돌아가며 놀려댔다. 칠푼 고리가 그렇지 뭐. 어느 밤, 鄭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놀림이 날렵하기로는 모자람이 없는 그가 한자 남짓한 빈 페인트 통 위에서 넘어져 발뒤꿈치가 어그러졌다는 것이다. 남편의 목발을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작은 金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낮에 힘들게 일했노라 보여주기 식의 엄살은 사양한다는 우리의 타박에 그는 사다리에서 두 번 떨어지면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법이라 했다. 누구처럼 깁스를 하면 표시라도 날 텐데 겉은 멀쩡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어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회장 金이 칠푼 고리 이름이 아까운 인간들이라며 한심해 했다.

큰소리치던 그가 갈비뼈가 두 대나 나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비가 억세게 온 다음날 농장에서 미끄러졌다나. 농사일이 가장 바쁜 철에 일은 고사하고 숨도 크게 못 쉬는 형편이 되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말이 없는 新까지 전립선 치료로 병원을 드나들고 있다.

돌아보니 아직 張이 남았다. 나는 그의 아내에게 다친 이들을 위로하는 술자리를 만들자는 말을, 액막이 고사라도 지내야 하지 않겠냐는 말로 대신했다. 그녀는 흔쾌히 통팥시루떡을 두 대 해오겠다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날이 잡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기를 삶고 수박을 들고 왔다. 내게 떨어진 건 축문이었다. 한 번도 고사를 지내 본 적이 없는 나는 인터넷을 뒤져 동냥을 했다. 늦게 만난 좋은 인연 100세 후 가는 그날까지 함께 할 수 있게 보살펴달라는 청탁을 천지신명께 고하는 축문을 만들었다.

우리는 몇 년 전 귀촌으로 만난 인연들이다. 도시에서 살 때 얼마나 잘 나갔노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느지막한 나이에 시작한 농사일에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팔을 걷어붙였다. 내가 가진 농기구가 필요하다면 빌려주고, 내 힘까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섰다.

그들이 칠푼 고리가 된 것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남편과 金, 鄭이 경운기 앞에 섰다. 나와 金의 아내는 나무 그늘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녹이 반쯤 얹힌 경운기의 시동이 당체 걸릴 생각이 없다. 밑바닥까지 훑어보는 그들의 표정이 심각했다. 방금 고쳐왔는데 뭐가 또 문제고? 이것저것 다 열어보고 돌려봐도 끄덕도 않는다. 고쳐준 사람을 원망하며 다시 고치러 가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나던 동네할아버지가 무슨 일이냐며 거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한 번 까딱 하자 경운기가 힘차게 돌아갔다. 나는 세 남자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경운기 사건으로 그들은 스스로 칠푼 고리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셋이 모이던 비닐하우스에 농사실력이 팔 푼도 안 되는 칠푼오리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그들도 칠푼 고리라는 이름에 토를 달지 않았다.

고사가 끝난 자리, 음복 상을 차리고 막걸리가 한 순배 돌았다. 몇 달 사이에 연이어 이런 사단이 난 것은 칠푼 고리 이름 때문이라며 개명을 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좋은 뜻을 담은 새 이름이 하나 둘 나오더니 잔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남은 생이 칠푼오리로만 끝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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