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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를 읽다

등록일 2023-11-01 18:15 게재일 2023-11-0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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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경 수필가
배문경 수필가

“햇살이 사라질 때 그 불빛은 거친 파도를 좀 더 밝은 은색으로 물들였고, 푸른색이 바다에서 밀려나가고 순수한 레몬색 불빛이 밀려들어 곡선을 그리면서 부풀어 오르다가 해안에서 부서질 때 그녀의 눈은 황홀에 빠졌고,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서도 순수한 기쁨의 파도가 출렁거렸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중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등대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 있으니 작고 앙증스러워 보이는 빨간 등대다. 어쩌면 파도 그리고 바다와 저렇게 잘 어울릴까. 그 주위를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갈매기 떼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지금 나는 구룡포 대보 호미곶 등대박물관에 와 있다. 등대박물관이 큰 규모로 새로 지어졌다. 들어서자 맞은편 유리창으로 펼쳐지는 바다가 푸르게 다가온다. 천정에서 내려온 디지털 화면에는 일몰부터 일출까지의 풍경과 바다와 선박을 이어주는 역동하는 등대를 표현했다. 생명의 빛으로 만들어진 육각형 화면은 수시로 변화해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분수를 뒤집어 놓은 듯이 생긴 조명나무 밑에 서자 전구가 켜지고 뿌연 물방울이 떨어진다. 보물선 조타체험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페달을 밟자 시원하게 대포가 발사되어 문어괴물을 물리쳤다. 빛의 마을 캐릭터와 함께 기념사진도 찍다보니 어릴 적의 나와 조우하는 느낌이다. 그때는 이렇게 좋은 세상도 아니었다. 슬리퍼를 신고 바다의 모래사장을 헤매다보면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모래알들이 간지럽고 즐거웠다. 바다는 늘 푸른빛으로 나를 유혹했다.

등대는 항로표지의 한 종류다. 빛으로 배를 안내하는 광파표지다. 바다에서 튀어나온 곳이나 섬과 같이 배가 목표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곳에 설치한다. 그래서 해안의 긴 선착장 끝에는 육지에서 차와 사람을 조절하는 신호등처럼 등대가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빛나듯이 어둠이 짙어진 바다를 향해 불빛을 쏘는 등대야말로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내 삶의 수호신은 무엇일까. 어릴 적, 연로하신 부모님과의 소통되지 않는 우울한 유년을 위로해주던 사람은 큰 오빠였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길에서 나는 오빠에게 작은 한 송이 꽃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빠는 막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학을 다닐 때는 교수님께서 나를 지지해주셨다. 인생의 선배인 그 분은 힘든 일도 가볍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셨고 삶의 애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소통을 함께 나누었다. 세상의 풍파에 흔들릴 때마다 등대 같은 그들이 있어 나는 난파되지 않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1세기에 만들어진 스페인 라코루냐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다. 세계 수많은 나라의 유명한 등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팔미도 등대다. 크고 작은 등대가 이제는 불빛을 쏘아대며 배를 순항하도록 하는 것 외에도 자연 암초로 인해 스노쿨링으로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감포항 인근의 송대말등대처럼 친근한 것도 있다.

등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배를 돕는다. 캄캄한 밤, 빛을 이용해 육지를 알려주는 광파표지와 먼 바다에서 위치확인이 어렵거나 배들이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없을 때 도움을 주는 전파표지, 안개나 비, 눈 등으로 시야가 흐릴 때 음파표지, 보이지 않는 바다 속의 위험지역을 모양과 색을 이용해 알려주는 형상표지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의 등대이거나 누군가는 나의 등대일 수도 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더라도 가슴속에 십자가처럼 빛나는 무엇 하나.

우리 삶에 등대와 같이 어둠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아닐까. 잘 들여다보면 삶을 통해 남보다 조금 더 앞서가며 역사에 오래토록 남을 발자국의 주인인 그들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등대가 아닐까. 불빛처럼 빨간색등대는 오른쪽에 장애물이 있으니 왼쪽으로 다니라는 뜻이고 흰색등대는 왼쪽은 암초가 있으니 가면 안 된다는 위험신호를 보낸다. 우왕좌왕 갈팡질팡 삶이 흔들릴 때 그들이 남긴 삶의 발자국에 슬며시 발을 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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