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영 수필가
바다를 마주 대하면 마음은 쪽빛으로 물든다. 치열한 일상에서 만나는 내 감정은 뾰족한 선이 많아 마음이 무채색일 때가 잦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면 첨예한 선들이 마모되어 그 틈으로 유채색이 입혀지는 것을 체감한다.한흑구 수필집 복간 기념 릴레이 낭독회의 진행을 맡았던 탓일까. 행사를 마친 뒤, 한흑구 선생님께서 거의 매일 걸으셨던 송도 해변이 보고 싶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 이 순간, 윤슬이 리드미컬하게 출렁이는 해수면을 바라보며, 시간을 초월해 선생님의 발자취에 내 발자국을 얹어 본다는 심정으로 모래밭을 거닐고 있다.한흑구 수필집 ‘동해산문’의 ‘수필의 정신’이 떠오른다.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 창작되어야 하며 내용은 철학적이어야 된다.” 이 문장처럼 선생님의 작품은 시적이고 자연주의적 철학을 짙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출판사 대표와 편집자가 선생님의 책을 복간하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 앞에 ‘생생한 활자’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50여 년 만에 오늘날의 우리가 읽기 편하게 바꾸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아무리 충실하게 문장을 표현한다고 해도 원작자가 고인이라는 점에서, 작품 편집이 작가가 의도한 대로가 맞는지, 아닌지, 여쭤볼 수 없는 ‘불완전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리라.저 멀리 포항의 시조(市鳥)인 갈매기를 형상화한 송도 폴리를 발견한다. 선생님의 필명인 ‘흑구(黑鷗)’가 연상되며, 자연스레 필명의 유래가 생각난다. 한흑구 선생님께서는 105인 사건의 여파로 미국으로 망명하셨던 아버님 한승곤 목사님이 계신 곳으로 스무 살 때 건너가셨다.일본 요코하마항에서 대양환(大洋丸)을 타고 하와이로 가실 때였다. 검은 갈매기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 일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고 했다.조국을 잃어버리고 끝없이 방랑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투영되었던 탓에 검은 갈매기를 뜻하는 흑구를 필명으로 사용하셨단다.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예전의 파도소리가 아니듯, 흘러가는 구름도 예전의 구름이 아니련만, 내가 마치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선생님을 뵙고 이야기를 전해 듣는 듯 감상에 빠진다.바다에 한참을 머무르며, 선생님의 교우 관계를 떠올려본다. 유치환, 서정주, 조지훈 등과 교유하셨고 죽마고우 안익태와의 우정도 남다르셨다. 선생님께서 미국 음악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대학교 신문학과에서 공부하실 때였다. 영어에 서툴렀던 안익태를 템플대학교 기악과에 입학할 수 있도록 힘쓰시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나는 선생님께서 진실하게 사람들과 어울리셨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문득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한다고 하는 ‘인간 실격’을 쓴 일본의 유명한 작가다. 그는 선생님과 같은 해인 1909년에 태어났다.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 작가라 불리는 그는 1948년 39살의 나이로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선생님께서는 1948년 39살의 나이에 포항에 와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셨다. 이렇듯 두 작가의 삶을 비교해 봤을 때 나는 안타깝다. 주변에 문우들이 넘쳐났던 선생님처럼, 한 명이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어떠했을까.내가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것인가. 아마 부정적인 시각을 간직한 채, 앞날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품지 못한 채, 생활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순수한 영혼을 지니셨던 것 같다. 아마도 삶의 밑바탕에 문학이 존재했기 때문이리라.“나는 늘 모래밭에, 또는 바다 물결 위에 시를 써보았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어느덧 내 가슴에 공명된다.모래밭에 시심(詩心)과 수필을 써 놓고 무심히 고개를 든다.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으셨던, 한흑구 선생님의 화신일까. 어느 결에 나타났는지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위로 힘차게 비상하고 있다.
2023-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