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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갈치 뼈 바르는 남자

윤명희 수필가 늦은 가을이 따뜻하다. 단풍 구경하고 오는 길에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시골 식당은 평소에는 농사일을 하는 외국인으로 줄을 잇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은 휴일이어서인지 한산했다. 나는 주문한 산채비빔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벽에 걸린 TV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래 앉은뱅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젊은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얼굴색이 까무잡잡한 젊은 남자는 스물 두어 살 쯤 되어 보였고, 자그마한 체구의 할아버지는 등이 굽어 코가 비빔밥 그릇에 빠질 듯 했다. 식당아저씨가 갈치찌개가 담긴 양은냄비를 그들 앞에 놓았다. 젊은 남자가 얼른 가장 굵은 갈치 토막을 골라 제 앞으로 가져갔다. 젓가락으로 능숙하게 뼈를 바르기 시작했다. 나는 갈치에는 관심 없이 비빔밥만 먹고 있는 할아버지와 뼈 바르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그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외국노동자와의 인연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가 가져간 굵은 갈치에 눈이 꽂혔다. 예전, 남편이 공장을 운영할 때였다. 용접한 구조물을 매끈하게 다듬는 일이 힘이 들어 직원들이 오래 견디지 못했다. 채용공고를 내자 베트남 청년이 왔다. 그는 어눌한 말로 숙소를 제공해 주어야 하고 인터넷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오래 함께 하고픈 마음으로 흔쾌히 약속했다. 발음하기 힘든 그의 이름을 꾸웽이라 불렀다. 꾸웽을 사무실 위층에서 거주하게 했다. 그의 요구대로 컴퓨터를 주문해 인터넷을 연결해 주었다. 3층은 넓어 방이 4개 있지만, 하나만 사용하라고 했다. 나는 청소할 빗자루와 밀대를 새로 장만해 건네주었다. 생활비나마 아끼라고 선물로 들어온 물품들을 따로 챙겨주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평소보다 일찍 출근 한 날이었다. 사무실 문을 여는 등 뒤로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떠들썩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애들이 몇 명 내려오다 우리를 보고는 멈칫했다. 멋쩍은 인사를 한 그들이 부리나케 공장 밖으로 나갔다. 남편과 나는 모른 척 눈을 감았다. 퇴근시간이 좀 늦은 날은 나이가 많은 남자들까지 대문 밖에서 쭈뼛거리는 게 보였다. 남편이 꾸웽을 불러 외부 사람을 공장으로 불러들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일요일 저녁,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다. 아침 일찍 방문하라는 말에 남편과 나는 서류를 챙기러 공장으로 갔다. 3층 거실의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창으로 많은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무실로 가는 입구 문을 열자 음악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3층을 바라보며 한참 서 있었다. 다음날, 남편은 꾸웽을 사무실로 불렀다. 더 이상 같이 일 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이야기하자, 그는 돈부터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가방을 챙겨 공장 문을 나서는 그를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3층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 바닥에 옷가지와 술병이 널려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기름 흔적과 음식 쓰레기가 너저분하고, 방마다 이불이 널려있었다. 3층을 대청소하면서 다시는 외국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생선의 가장 큰 토막을 제 앞으로 챙기는 남자가 꾸웽을 떠올리게 해서 씁쓸했다. 그런데 뼈를 바른 젊은 남자가 갈치 살을 할아버지 밥 위에 올려놓았다. ‘너나 먹어’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들렸다. 그 남자는 비빔밥을 퍼 먹으면서도 눈은 할아버지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밥을 떠 입에 넣자, 그는 다시 살을 집어 할아버지 숟가락에 올렸다. 할아버지는 그 갈치 살을 젊은 남자의 밥 위에 올려주고는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다. 다문화 가정의 손자인가 생각해봐도 젊은 남자의 피부는 완연한 동남아 태생으로 보였다. 도회지로 떠난 자식들 대신 할아버지를 돌보는 도우미인가?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농사를 놓지 못했던 건 아닐까. 농사로 이어진 인연이 갈치 뼈를 발라주고, 할아버지의 컵에 물을 따르는 사이가 되었을까. 할아버지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자, 젊은 남자가 호위하듯 바짝 붙는다. 식당 문을 열어주고, 신발까지 챙겨주는 그를 보고 또 보았다. 낡은 화물차에 오른 그들이 식당마당을 나서자, 신작로의 노란 은행잎이 그들 뒤를 따라간다. 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다.

2024-12-11

늠내

피귀자 수필가 조용한 수런거림이 물처럼 흐르다가 불처럼 타오른다. 설악산 단풍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월 말경이면 새로운 지도가 태어난다. 잠긴 수문을 풀듯 흘러내리며 금빛계절을 알리는 단풍지도. 남쪽을 향하여 달리다가 제주도를 거쳐 무등산까지 이십 여일이면 한반도를 점령해버린다. 단풍의 달리기를 바라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뻗어가는 땅이란 뜻의 ‘늠내’라는 단어다. 넓어지는 땅이라면 먼저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땅따먹기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공깃돌을 두 번 튕겨서 한 뼘의 기본 땅 속으로 되돌아 들어오면 그 영역은 모두 내 땅이 되던 기억이. 가진 땅이 빠르게 넓어지듯, 안개가 퍼지듯이 단풍은 이제 동네까지 내려왔다.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제각각 종을 울린다. 길 떠날 준비를 하는 생명들의 두런거림이 세를 불리며 환청처럼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낸다. 바야흐로 단풍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단풍 중개 소식에 따라 구경꾼은 점점 늘어간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톨스토이 단편은 생각하게 하는 바가 크다.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가지게 된 가난한 농사꾼 바흠은 그 후 욕심이 생겨, 어떤 곳에서 땅을 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의 판매 방법은 독특하였다. 하루 종일 걸어서 해가 지기 전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면 그 둘레의 땅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들판을 달렸다. 해가 질 때 겨우 출발했던 지점에 약속대로 돌아왔지만, 욕심이 컸다. 너무 먼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그만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죽은 뒤에 넓은 땅이 무슨 소용이랴. 그 농부가 묻힌 땅은 겨우 사방 7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작은 구덩이에 묻히면서, 죽어버린 몸이기에 후회도 원망도 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이렇듯, 사람은 한 평생을 달려도 누구나 70센티미터 정도의 땅 속에 묻힐 따름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 우리는 누가 시키든 안 시키든 달려야 한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힘껏 달린다. 온갖 힘과 지혜를 짜내고 그래도 모자라면 남을 속이고 밀어내며 좀 더 나은 땅,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하려고 달리고 달리는 이들도 있다.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애쓰고, 힘을 기르는 이유는 더 좋은 땅을 많이 차지하려는 달리기 내기가 아닐까. 땅따먹기 놀이도 마찬가지였다. 욕심을 내어 공깃돌을 너무 멀리 튕긴 후 좁은 본부로 다시 튕겨 넣으려면 밖으로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기회는 날아가 버리므로 욕심내지 말라는 뜻이 담긴 놀이가 아닌가 한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일찍 깨달은 탓일까. 아직도 땅에는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생존 경쟁, 삶은 전쟁이 아닌가.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한 평화는 쉽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나무의 생존경쟁은 다르다. 다른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다.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요. 내려놓기이며 물러서기다. 나무는 제자리에서 세월을 맞으며 맡은 책임을 다하려 모진 풍상을 견뎌내느라 잎은 벌레에 파 먹히고 바람에 쓸리며 피멍으로 에둘러 있다. 그것이 바로 단풍인 것을. 쓰라림 없는 결실이 어디 있으랴만 아픔을 이기며 내려놓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것. 역경 속에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만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나뭇잎은 내년을 기약하며 한걸음 물러서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바로 사유의 급전환이다. 사유의 전환을 거쳐야 비로소 더 높은 곳에 설 수 있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색으로 이어지고, 그 색 따라 피고 지고, 지고 피며 사람도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단풍처럼, 내려놓을 때를 아는 나무처럼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들. 경쟁하며 넓혀온 땅을 한순간에 내려놓으며 욕심을 버린 사람들이 존경받는 이유다. 내려놓기 위해 세를 넓혀가는 단풍처럼 사람도 물욕이 아닌 인류를 위한, 또는 자기발전을 위한 소양의 늠내는 넓힐수록 좋으리라. 다가오는 새해에도.

2024-12-04

흔적은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되고

정미영 수필가 길을 걷다가 강아지가 단풍잎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단풍잎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강아지 주변을 맴돌았고, 강아지는 잎사귀가 장난감인 듯, 꼬리를 흔들며 뛰어올랐다. 그 작은 생명이 온 마음을 다해 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미소가 번졌다. 그것도 잠시,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인이 키우던 개가 생각났다. 개의 이름은 나미로 11살이었는데 사람 나이로는 78세였다. 나미는 지인이 키우던 두 번째 개였다. 한 번 상실의 아픔을 겪고는 두 번 다시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들어온, 작은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미는 그녀의 친척이 키우던 개였다. 친척이 병에 걸려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녀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다시 반려견과 살게 되어 너무 좋았단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이가 많은 나미와 얼마 못 가서 이별하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생을 마감할 것이므로, 자신의 품에 있을 때 많이 사랑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말로 나미를 정성껏 돌봐주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해 주었다. 나미도 진심을 느꼈는지, 그녀의 곁에서 한없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세상에 지쳐 돌아오면 조용히 다가와 손을 핥아 주었고, 그녀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믿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그녀 집에 온지 2년 하고 반년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나미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했는데, 수의사 선생님께서 나미가 구강암에 걸렸다고 했단다. 친척도 몰랐던 이야기여서 그녀는 많이 놀라고 당황스럽고 슬펐다. 병원에서는 나미가 항암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기적을 바라며 항암 주사를 맞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나미가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안타깝게도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생겼다. 항암 주사를 맞는 개들에게는 2개에서 3개씩 부작용이 올 수 있단다. 그런데 나미에게는 개가 걸릴 수 있는 모든 부작용이 와버렸던 것이다. 나미는 점점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잘 먹던 사료도 안 먹고 좋아하던 소시지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나미를 지켜보던 그녀의 시간은 외로움과 아픔의 순간들로 가득 차올랐다. 그 작은 몸이 항암 치료의 부작용에 힘겨워하던 모습은 그녀를 절망감에 물들게 했다. 나미의 삶이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그녀는 눈물로 하루를 적셨다. 나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날,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단다. 이제 그만 고통 없는 곳으로 가라고, 먼저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말을 마치자마자 나미는 눈을 감았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 안 구석구석에는 나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미가 좋아하던 담요는 아직 소파 위에 있었고, 간식 그릇은 부엌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쉽게 흔적을 지울 수가 없단다. 아니, 지우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추억들이 햇살처럼 쏟아져 내릴 때가 있단다. 기뻤던 순간, 슬펐던 순간이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선택할 여지가 없이, 무방비로 떠오르는 순간이 있기에 아직은 흔적을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나미를 돌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흔적들은 그녀에게 단순한 기억 이상의 것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 나름대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이 내 옆에 머무르는 시간이 아니라, 그 존재가 내 삶에 남긴 흔적과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미가 남긴 흔적들은 지금도 그녀의 삶을 감싸고 있다. 그녀의 인생길에 허방이 많을지라도 추억이 응축된 사랑의 흔적들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녀가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되어 주리라.

2024-11-27

왕릉에서

배문경수필가 진평왕릉은 밤새 내린 서리와 안개에 젖어 천 년 전 역사조차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 같다. 실제의 사물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처럼 이곳은 신이 아니고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다. 밤새 호위무사 한 명 없이 저 큰 능에서 벗어나 달밤에 홀로 느티나무와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眞平王)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으며 지혜롭고 의지가 굳고 밝고 활달했다.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天柱寺)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러지기도 했다고 하니 대단한 풍채를 지닌 왕이었나 보다. 그러니 무엇이 두려웠을까. 멀리 개 짖는 소리 컹컹 들린다. 늠름했을 그의 위엄이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을 터, 맞은편 낮은 산 와상부처가 지켜주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며 들이 울리게 웃음소리 요란했겠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은 뒤에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진평이 왕위에 올랐다. 진평왕은 행정조직을 정비해 왕권을 강화했다. 능을 바라보며 서리 내린 잔디를 밟고 서서 왕릉을 바라보는 사이 후배가 도착했다. 함께 선덕여왕길을 걷는다. 경주 숲 머리 길이라고도 부르는 이 길은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까지 이어진다. 봄이면 겹벚꽃이 풍성한 길이고, 가을은 단풍이 아름답다. 맨발 걷기를 하도록 길을 조성해 산책로로 그저 그만이다. 우리도 잠시 선덕여왕이 되어 걸어본다. 누가 비질을 했는지 걷는 길은 낙엽이 쓸려 있다. 늦가을 정취와 초겨울이 맞닿아 차고 신선하다. 힘들던 시간이 박하사탕처럼 싸하니 입속이 맑아진다. 한동안 안부를 묻지 못했으니 이야기는 많고 길다. 각자 짧든 길든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였고 힘들고 벅찬 일들이며 즐거운 개인의 나날이 걸음의 보폭만큼 넓게 좁게 이어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래서 고마운 것. 나날이 보태져 오늘을 있게 했으니. 앞선 사람들이 먼저 명활산성에 도착했다.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 등과 함께 신라 경주의 동쪽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왜구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성곽이고, 유사시 왕성의 역할을 했다. 선덕여왕 때에는 비담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고 한다. 돌무더기를 보며 과거의 흔적 일부를 보며 끄덕끄덕 수긍한다. 역사 속 그들은 그 시절의 주인공이다. 이제는 낮은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이 최선이었으리라. 이미 흩어진 이름들의 공허와 삶의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우리는 돌아서서 진평왕릉으로 다시 왔다. 차에 싣고 온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는 커피 믹스를 종이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붓고는 접이식 의자와 테이블을 꺼내 간단한 브런치와 커피를 즐긴다. 왕릉을 바라보는 오늘과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왕릉의 고요와 두런두런 삶의 이야기가 하모니를 이룬다. 진평왕릉은 다른 신라왕릉과 달리 산이 아니라 논밭에 둘러싸였다. 산에 자리한 능이 둘레에 소나무가 섰다면 이곳은 물길을 둘렀다. 시냇물 같은 해자가 논과 능을 구분한다. 그래서 경주의 가을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에 오면 남산을 넘어오는 아침노을을 감상할 수 있고, 저녁이면 해의 긴 그림자가 능 주변을 붉게 서성인다.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나는 유적지가 아니라 조용히 가족 단위로 피크닉 바구니를 펼쳐 소소한 소풍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왕과 여왕의 이야기들이 풍성한 이곳, 왕릉을 곁에 두고 사는 경주 사람의 복이다. 역사가 가득한 유적지 곁에서 우리는 오늘의 나의 역사를 쌓아가면 된다. 커피가 식는 사이 안개는 걷히고 햇살이 눈부시게 얼굴을 비친다. 오늘 우리의 소풍이 끝나가고 있다. 다시 올 때는 조금 더 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그는 정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오래전 일이라 더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들릴 것이다.

2024-11-20

어린 고래의 눈물

윤명희 수필가 잔디를 비집고 올라온 잡초를 뽑는다. 남편은 말없이 포와 과일로 간단한 상을 차린다. 오늘은 아버지의 봉분을 흠뻑 적실 술을 두병이나 준비했다. 잔을 채운 술이 넘쳐흐른다. 어릴 적 나는 제삿날만 되면 불안했다. 그날이 오면 일부러 바깥에서 오래 시간을 보냈다. 어스름한 시간에 대문을 들어서면, 마루 끝에 술 취한 아버지가 먼저 보였다. 제사음식 준비를 끝낸 엄마는 부엌에서 서성거렸고, 동생들은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숨죽였다. 나는 저녁밥도 거른 채 아버지의 눈을 피해 내 방으로 들어갔다. 열시가 넘어가자, 제주(祭酒)를 든 삼촌이 들어섰다. 삼촌을 본 아버지의 코끝이 실룩거렸다. 동경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이다. 형이 둘이 있었고 맨 위로 누나가 있다. 아버지가 아홉 살 되던 해, 해방이 되었다. 공부하는 두 형을 동경에 남겨둔 채, 할아버지는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대구 칠성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현해탄 길에서 열감기로 아래동생을 잃고, 막냇동생만 남았다. 낯선 곳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누나가 멀리 시집을 가고, 어린 아버지는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다. 이별은 급물살로 휘몰아쳤다. 어머니를 잃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다고 한다. 세 살 박이 막내의 엄마 찾는 소리만이 집안을 떠돌았다. 장례 치르러 온 큰형은 해야 할 공부가 남았다며 작은 형과 동생들을 남기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아버지는 작은 형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온 식구가 동경에 살았을 때, 형들은 언제나 든든한 파수꾼이었다. 합기도를 잘하는 형들이 있어 조센징이라고 놀리는 일본 아이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마지막 버팀목인 작은형마저 떠날까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밤, 어린 아버지는 대문 흔드는 소리에 잠이 깼다. 마당이 달빛으로 환했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버지는 문턱에 서서 파자마와 흰 러닝셔츠차림인 작은형의 뒷모습을 내다보았다. 대문 여는 소리와 동시에 형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건장한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형을 보았다. 대문 앞에 떨어진 형의 신발 한 짝을 손에 든 아버지의 우는 소리가 골목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깨어난 막내의 울음소리가 마당까지 따라 나왔다. 작은형은 그렇게 꿈처럼 사라졌다. 이별의 무게에 눌려 숨도 쉴 수 없었다. 갑자기 홀로 남겨진 아이는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이 혼자서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일곱 살 무렵이었다. 우리 집에 소포꾸러미가 배달되었다. 아버지의 큰형, 한 번도 보지 못한 나의 큰아버지 이름이었다. 꾸러미에는 옷, 양말, 생필품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에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큰형이 사진으로 왔다. 사진 속 큰형의 가족은 아이까지 모두 정장차림이었다. 그들이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쓰레기장에 처박아 버렸다. 세파를 혼자 헤쳐 나온 아버지는 그 사진에서 버려진 자신을 본 것은 아닐까. 돌아가시는 날까지 형의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제사 모시는 시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본에 사는 형 집에 가기 전에 먼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밤 11시가 되면, 벽에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급하게 일어섰다. 제사상을 차리고 지방까지 써 붙였다. 나는 얼른 빨랫줄을 걷고 대문을 열었다. 삼촌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을 켰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선 아버지의 얼굴이 곧 울음이 터질 기세였다. 절을 할 때마다 이마를 손등에 댄 아버지는 일어서지 못했다. 일어서던 삼촌이 다시 엎드려 곁눈질로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를 살폈다. 아버지의 등이 한참동안 들썩거렸다. 아버지는 해마다 제삿날이 되면 종일 술에 취해있었다. 눈물로 할아버지 할머니께 어린 동생들을 유기한 큰형을 일러바치던 그 날은 막냇삼촌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내가 큰아버지의 가족조차 뵐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세 살짜리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험난하고 외로운 항해를 해야 했던 어린고래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제야 뒤늦게 아홉 살의 아버지를 가슴으로 깊이 껴안는다. 남은 술을 병째로 봉분에 부어드린다. 오늘은 실컷 드시고 취해도 괜찮다. 봉분에 볼을 대고 가만히 쓸어안는다. 볼에 닿는 잔디가 아버지 수염처럼 깔끄럽다.

2024-11-13

찹쌀새알미역국

정미영 수필가 어제부터 세찬 바람을 동반한 가을비가 내린다. 나무가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불자, 그 결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낙엽 때문인지 거리가 온통 가을로 꽉 찬 느낌이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린다. 갑자기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어 냉장고 속 음식 재료를 살펴본다. 냉동실에 얼려 둔 새알이 눈에 띄어 미역국을 끓이기로 마음을 정한다. 황태채와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볶는다. 물을 부어 한참을 뭉근하게 끓이면서 찹쌀로 빚은 새알과 들깨가루를 넉넉하게 넣는다. 나는 새알이 퍼지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에 쫀득해졌다 싶을 때를 기다렸다가 가스레인지 불을 끈다. 알맞게 끓여진 국을 대접 한가득 담아낸다. 그런 뒤에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는다. 맛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친정어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끓여보아도 매번 친정에서 먹던 그 진한 국물 맛은 아닌 것 같아, 왠지 야속하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감기에 걸리면 ‘찹쌀새알미역국’을 끓여주셨다. 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 먹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러면 감기약을 먹지 않아도 몸이 낫는 것 같았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근심이 버무려져 음식에 담겼기 때문이리라. 나는 아직도 몸이 아프거나 입맛이 없을 때면 ‘엄마표’ 음식이 생각난다. 대학을 졸업한 큰아들이 있는 데도, 내 나이에 상관없이 친정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엄마, 하고 나지막하게 불러보면 결혼 전의 내가 떠오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면서 위로가 된다. 지난여름,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서문시장에 갔다. 나는 요즘 대형마트에 가면 온갖 생필품과 음식 재료가 많아 재래시장을 찾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모처럼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면서 장터를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 했다. 내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동네 골목시장이 아닌 서문시장 정도의 큰 시장에 가야,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할 수 있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빨리 흘렀다니, 새삼스러웠다. 볼일을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보리밥집으로 가서 등받이 없는 긴 벤치 모양의 의자에 앉았다. 자리가 나면 순서대로 앉아야 할 만큼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메뉴를 보던 친정어머니께서 새알미역국을 주문하셨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친정어머니는 “너희 외할머니는 내가 기운이 없으면 찹쌀새알미역국을 끓여주셨는데.”라고 말씀 끝을 흐리셨다. 그 순간 내 가슴에 찌르르 전율이 흐르며 아렸다. 살면서 생활에 지치거나 힘이 드는 순간이면 나만 엄마가 필요한 줄 알았다. 그런데 팔순을 앞두고 있는 친정어머니께도 돌아가신 ‘엄마’가 필요한 모양이다. 엄마라는 낱말이 갖고 있는 대단한 힘인 것 같다. 실존하지 않는 분이라도 호명하자마자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온몸의 감각 세포를 일깨우는 것임에랴. 예전에 친정어머니가 내 외할머니를 찾아뵈러 갈 때면 손수 미역국을 끓여주셨다고 했다. 국물에 들깨가루를 듬뿍 넣어 주셨다던 외할머니 손맛의 미역국! 첫아이를 유산하고 몸조리를 제대로 못한 채 일상 생활해야 했던 나의 어머니를 한평생 가엽게 여기셨던 외할머니셨다. 친정어머니가 몸져누울 때마다 “그때 미역국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어서 그렇제.”라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면서 찹쌀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나면 근기가 있어 속이 든든하다고, 일부러 찹쌀로 새알을 빚어 미역국을 끓여주셨단다. 그래서인가. 친정어머니는 내가 삼 남매를 출산할 때마다 미역국은 잘 챙겨 먹었는지부터 물어보셨다. 외할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건강을 챙기라는 당부의 말씀이었다. 아프고 기운이 없을수록 끼니를 든든하게 챙겨먹어야 한다는, 당신들이 체득한 금언 속에는 찹쌀새알미역국이 포함된다. 그것은 우리 집에서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세대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매개체다. 나는 찹쌀새알미역국을 먹을 때면 그분들의 사랑을 느낀다.

2024-11-06

초대하지 않은 손님

피귀자 수필가 텔레비전에 흐르는 자막처럼 황금 들판이 지나간다. 풍성한 차창 밖의 풍경에 저절로 자동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네모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논 속의 벼들이 옹골차게 익어가는 모습은 농부가 아니더라도 배가 부르다. 오래보아도 질리지 않는 따뜻한 풍경. 저리 윤나게 가꾸자면 농부의 다리는 더 가늘어지고 손은 더 거칠어졌을 게다. 한집의 논인 냥 고르게 익어가는 들판에 유독 삐죽 올라온 식물이 눈에 띄었다. 고개 숙인 벼보다 한 뼘씩은 높이 고개를 바짝 쳐든 것은 바로 농민들의 골칫거리, 벼의 천적 ‘피’였다. 꽃보다 더한 열정으로 꽃밭을 점령하는 풀처럼 위세가 당당했다. 서로 다른 목소리로 합창이 되지 못하는 논. 피가 벼보다 키가 큰 이유는 햇빛을 많이 받으려고 경쟁하듯 키를 키운다는 것이다. 가을이 익으면 우수수 몸부림치며 흘러내릴 저 몸, 내년을 더 걱정하며 어떻게 저 논에만 피가 저리 많을까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농부가 게으른 탓인가, 약을 치지 않고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게 아닐까, 설전이 이어졌다. 딸의 긴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있는 흰 머리카락이 벼논의 피처럼 바짝 고개를 들었다. 아직 흰머리가 생기기엔 젊은 나이인데 임신을 하고 해산달이 가까워 몸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가 되니 더 도드라졌다. 오죽 힘들면 저리 되었을까 눈이 아리다. 골고루 챙겨 먹지 않으면서 영양분을 나누느라 머리카락까지 저리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소화가 되지 않았다. 저릿한 마음을 사위 앞이라 내색도 못하고 자꾸 딸의 머리만 쓸었다. 큰 외손자가 아홉 살이 되도록 동생을 보지 않아 무던히 애를 태웠었다. 아이 하나도 제대로 키우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라며 둘째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아, 그래도 둘은 되어야 한다고 타일러 보았지만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돈댁에서도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고 남편도 본인은 뒷전에 있으면서 나를 통해 채근을 하는 세월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라는 더딘 처방, 완화 처방이 효과를 보아 모두 감사하고 기뻐했는데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은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해산일이 가까워지자 앉기조차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써 봐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대신 해줄 수 있는 집안일과 큰손자 보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둘째 손자를 안자 힘들었던 시간은 사라지고 웃음이 떠나지 않고 활짝 핀 꽃이 되어 켜를 이룬다.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 끝나고 걸어온 길에 흔적 하나를 더 보탠 딸네 가족의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셋보다 넷의 조화가 뿌듯하다. 딸이나 사위도 참 잘한 선택임을 뒤늦게 기뻐하고 있다. 갓난아기가 뿜어내는 기쁨의 파동이 온가족을, 친척들까지 들뜨게 한다. 연일 소리 없이 봄이 핀다. 봄바람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연한 살결의 손자는 쌔근쌔근 잘 자고 엄마 젖도 잘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란다. 하지만 수유 때문에 염색도 못하니 한숨을 먹으며 자란 흰 머리카락은 얼굴이 점점 더 커져간다. 드디어 딸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해산 후 어느 정도 지나면 일어나는 현상이라지만 쓸어낼수록 늘어나는 긴 머리카락이 애잔한데 빠지는 건 검은 머리카락뿐이다. 흰색은 뻣뻣이 나 여기 있소, 기세가 더욱 등등하다. 익어가는 벼논의 불청객 피를 보는 농부의 마음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날마다 빠지는 검은 긴 머리카락을 치우며 흰 머리카락이나 빠지길 바라지만 어쩌랴. 그 흰 머리카락마저 귀해질 때가 오리니. 검고 희고를 떠나 빠지는 자체가 애석해질 때가. 벼논의 제초제처럼 흰머리에는 염색약이 있지 않은가. 먹을 것이 귀한 시절엔 요긴한 먹을거리가 되기도 했던 피(陂). 하지만 요즘은 천덕꾸러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된 지 오래다. 농부가 얄미운 피를 뽑듯 뽑아버리고 싶었던 딸의 흰 머리카락. 하지만 한 때는 찬 가슴 데워준 열정의 몸, 나이가 부피를 키워갈수록 염색할 수 있는 그 흰 머리카락마저도 소중해진다지 않은가. 부풀렸던 마음속 미운 풍선을 터트리기로 했다.

2024-10-30

블랙박스

퇴근을 하던 남편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저녁상은 본 척 만 척하고 노트북을 찾았다. 회사에 주차해 놓은 차의 앞 범퍼를 누군가 세게 긁어 놓고 갔다며 범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밥도 먹지 않고 메모리 칩을 넣은 노트북에 눈을 주었다. 차에도 남편의 마음에도 꽤나 흠집이 났나보다. 며칠 전 내 차에 문제가 있어 수리를 맡기면서 남편 차를 며칠 타고 다녔다. 혹이나 내가 긁은 건 아닌지 괜히 조마했다. 남편은 회사에 있었던 시간부터 전 날 주차장 영상까지 찾기 시작했다. 범인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지 그 전 영상까지 뒤지고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기다리던 나는 배가 고파 먼저 밥을 몇 숟갈 떴다. 그 순간 노트북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였다. 주차 되어 있던 영상만 보던 남편이 주행하면서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나의 목소리를 틀어 놓고 듣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꿀맛 같던 밥알이 돌처럼 딱딱해져 왔다. 까먹고 있었던 전화 내용이 기억났던 것이다. 친구와의 수다는 운전 중 계속 이어졌다. 내 귀에도 들리는 내용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남편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져 갔다. 얼마 전 시아버님이 쓸개 수술을 했다. 공직에 계셨던 아버님은 평소에도 말이 없으셨고 편찮아도 자식들 걱정할까봐 표현도 안 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갑자기 새벽부터 배가 아파 감당을 못하셨고 응급실을 갔는데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했단다. 겁이 났는지 장남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과 새벽에 병원에 가보니 아버님은 혼자 계셨다. 당연히 같이 계실 줄 알았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이 그렇게 아파 병원을 가는 걸 알았으면서 그 새벽에 혼자 응급실을 보냈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나는 친구와의 통화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열심히 주고받았다. 남편은 그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성대모사까지 해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 말했던 내용을 다시 듣게 되니 내가 들어도 좀 불편한 부분이 많았다. 전화 내용을 듣고 있는 우리의 표정은 굳어 있는데 전화 속은 남의 이야기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고 있었다. 블루투스로 통화를 하다 보니 함께 공감해주며 장단을 쳐 준 친구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불편한 드라마 한 편을 라디오로 듣고 있는 듯 했다. “아줌마들 모이면 늘 시어머니 욕이구나” 김경아 작가 처음에는 남편도 이해하는 듯 웃으며 넘기는 듯 했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 뿐 아니라 자기 집의 흑역사까지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일러바치듯 끝까지 말하고 있는 아내를 이해해 주기는 힘들었나보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범인도 찾지 못했는데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평소에는 거의 보지도 않던 블랙박스를 갑자기 들고 오리란 걸 상상하지 못했다. 또한 남편의 차라는 생각을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남편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친구와 나누었던 뒷이야기들이 다 옳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유쾌하지 않을 터인데 어머니 흉내까지 내 가면서 깔깔대는 소리를 직접 다 들었으니 배신감마저 들었을 것 같다. 남편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함께 동참한 친구는 또한 무슨 죄란 말인가. 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안개가 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온 과거의 잘못까지 다 드러나는 요즘이다. 비밀이란 수줍은 소녀의 얼굴처럼 숨길 수 없는 단어인 것 같다. 시기는 언제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다 드러나고 곤욕을 치르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을 안 하고 살려니 어딘가가 간지러워 비밀스럽게 나눈 우리들의 대화 덕분에 나는 며칠을 남편 비위를 맞추느라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남편이 진짜 찾고 싶었던 범인은 나였을까.

2024-10-27

어두워질 때

배문경 수필가 단조로운 하루다. 밤을 견딘 그들의 하루가 시작되면 어제와 같은 오늘, 큰 변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아침에 출근하면, 한 톤 올려 인사를 하고 혈압 맥박 체온을 재며 활력 징후를 확인한다. 식사를 위해 그들은 식당으로 이동한다. 걸어오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침상에 누운 어르신도 있고, 워커바를 밀고 오는 이도 있다. 걷는 것 하나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식사가 오면 요양보호사들이 배식을 돕는다. 식사 후 약 드시는 것을 챙기는 것은 내 임무다. 식후 하루 세 번.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다치면 연고를 바르고 드레싱을 해주며 불편한 부분을 살피며 타온 약을 드시게 하는 모든 일이 내 일과이다. 절반은 휠체어가 있어야 이동하고, 걸어도 건강한 걸음은 소수이다. 무엇엔가 의지하고 걷거나 그마저도 못 해 누운 채 하루가 가고 새날이 오기도 한다. 물리치료사와 재활치료를 하기도 하고, 일주일 두세 번 오락으로 즐겁게 해주는 분들이 와서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노래하고 악기로 재밌게 멈춰있던 그들의 공간에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 정해진 시간에 제공되는 식사, 반복되는 요양보호사의 발걸음. 그 속에서 노인들은 깊은 침묵과 마주하며, 시끄러운 음악과 큰 율동으로 즐거움을 주고자 애를 쓰는 그들을 통해 신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요양원은 어쩌면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 이들이 머무는 마지막 정거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있는 시간이 있다. 노인들은 그 시간 속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남은 인생을 잃어버리지 않길 기도한다. 그나마 기억창고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입원환자의 90%가 치매다. 삶이란 고통과 기쁨이 엮인 직조물 같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기쁨 속에서도 삶의 무게를 느낀다던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요양원의 노인들은 그 직조물의 한 가닥을 마무리 중이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찾고 병마로 인해 몸은 쇠약해지고, 아픈 기억들이 종종 그들을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낀다. 통증 속에서라도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가족의 방문이거나 삶이 끝날 때 찾아오는 평온일 수도 있다. 요양원의 한구석, 작은 창가에 앉아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음미하며, 소리 없는 기도를 드린다. 그녀의 기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남은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제 곧 만나게 될 형제들을 위한 기도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깃들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끝을 맞이하지만, 그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불경 구절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노인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다가오는 끝을 받아들이며, 남은 시간을 차분히 준비한다. 삶의 끝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전환점이며, 다음 세계로 향하는 문이기도 하다. 요양원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창문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쉰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그 무게는 이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함이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놓인 순간들을 살아간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세상을 향한 작은 빛이 남아 있으며 그 빛은 죽음이 아닌, 지금에 대한 감사다. 지금을 노래하는 마음, 지금을 살라는 말이다. 그것은 요양원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는 진정한 진리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느끼며, 그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는다. 기도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한 할아버지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손을 모은다. 그의 기도는 길지 않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기도는 그의 남은 시간을 더욱 값지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를 마친 그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2024-10-23

도서관 앞에서

윤명희 수필가 도서관 유리문을 밀고 나오다 멈췄다. 책 한권 빌려서 나오는 사이에 온 세상이 비에 젖었다. 우산은 차에 있고, 차는 주차장 끄트머리 나무 밑에 있다.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굵다. 양철지붕 위를 우다닥 뛰어다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던 옛 시간들이 지나간다. 내 나이 열두 살 즈음 우리 집에는 교과서 외에는 책이 없었다. 읽을거리가 있는 만화방 앞을 기웃거리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생기는 용돈으로 1편을 보고, 또 기다려 겨우 2편을 보고나면 그 다음 편이 보고 싶어 갈급증이 났다. 나는 직접 노트에 다음 편 만화를 이어 그리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만화를 그리다 선생님께 들켰다. 노트도 뺏기고, 손바닥까지 맞았다. 세상 무너진 표정을 한 내게 친구가 자기 집에 가서 같이 숙제하자고 했다. 친구네는 서부정류장 옆에 큰 식당을 했다. 식당은 늘 손님으로 북적여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같이 공부할 거라는 친구의 말에 그녀의 엄마가 간식을 챙겨 주었다. 간식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가던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방의 한 벽면이 소공녀, 홍당무, 빨강머리 앤 등으로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친구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친구네로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식당 문틈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친구야! 학교가자” 한참 후, 잠옷 바람으로 나오는 그녀 뒤로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이 따라 나왔다.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방에 들어갔다. 그녀가 씻고 밥 먹을 동안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빠르게 책을 읽어내려 갔다. 학교 가야 할 시간은 여지없이 다가왔다. 미처 다 읽지 못한 빨강머리 앤을 빌려 가방에 넣었다. 방을 나서기 전, 내일 읽을 ‘소공녀’를 눈으로 찜했다. 다음날, 읽은 책을 꽂아두고 어제 찜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한 몸이 되어 책 속을 돌아다녔다. 가방을 챙기던 친구가 내게 재밌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 장이라도 더 읽을 욕심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매일 매일이 즐거운 나와는 달리 그녀는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져갔다. 그녀가 나 때문에 엄마에게 혼나는 일이 잦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모른 척 하려했다. 숙제를 끝내자, 친구가 내일부터는 따로 학교 가자고 했다. 마저 읽지 못한 책들을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했다. 다시 만화방 앞을 기웃거리다, 만화책을 한 아름 빌려 가는 이웃집 오빠를 보았다. 그는 옆집 아저씨의 먼 친척뻘 되는 조카인데,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저씨를 도와 목재소에서 잡일을 했다. 그가 내게 슬쩍 다가와 저녁밥 먹고 오면 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목재소 쪽문으로 사라지는 만화책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식구들 몰래 대문을 나섰다. 목재소 쪽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책을 달라고 손을 내밀자, 그가 사무실 옆에 있는 쪽방을 눈짓했다. 책을 다 가져가라는 말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방에 들어가 한 아름 안고 나왔다. 방문을 나서자, 그가 가쁜 숨을 쉬며 다가왔다. 놀란 나는 책을 그의 얼굴을 향해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온 몸에 열을 뿜어냈다. 밤새 앓았다. 열이 내리면서 만화방으로 가던 길이 내겐 없어졌다. 늘 허기졌던 책에 대한 열망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봇물이 터졌다. 방과 후,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2층 도서관으로 갔다. 책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은 후, 마치 조갈증 환자처럼 활자를 마시듯이 읽었다. 데미안을 읽으며 알에서 깨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폭풍의 언덕에서 히디클리프의 사랑에 매료되었다. 집에서 학교 가는 길이 전부였던 내 시각이 책 속을 헤매고 다녔다.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어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느꼈다. 내 안의 출렁거림을 가라앉히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도 언제나 책 속의 길에서 가능했다. 사는 일에 치이는 가운데서도 나는 활자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인연을 따라 걷고 걸어, 지금 도서관 앞에 서 있다.

2024-10-16

당신의 풍차는 무엇인가

정미영 수필가 국립발레단만의 버전으로 재해석되었다는 ‘돈키호테’ 공연을 보러 갔다. 모처럼 발레를 감상한다는 생각에 설렘이란 낱말이, 내 머릿속을 온통 나비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발레리나들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나는 대사가 아닌 춤으로 표현하는 무용극에 숨을 죽이며 집중했다. 발레 동작은 우아하고 깃털처럼 가벼웠다. 매력적인 키트리와 멋진 바질의 사랑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발레란 단순히 몸의 테크닉으로만 연출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공연의 성공 요인은 훌륭한 안무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이 ‘돈키호테’라는 서사를 품고 있기에 더 감동적이었다. 내게 있어 발레 공연의 묘미는 단연 피루엣(pirouette)이다.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팽이처럼 도는 동작을 피루엣이라고 한다. 나는 바질 역을 맡은 발레리노가 몇 번을 도는지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떠올렸다. 그는 ‘백야’라는 영화에서 11번을 돌고 또 돌았다. 보통 무용수들은 5~6번 정도가 평균이라고 하는데 ‘일레븐 피루엣’이라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학창 시절, 시험을 치고 나면 ‘문화교실’을 갔다. 문화교실이란 학년별로 또는 전교생이 단체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수백 명이 소풍을 가듯 영화관으로 향했으니, 가끔은 영화 내용보다 친구들과 손잡고 걸었던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때 본 영화 가운데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주인공이었던 ‘백야(1986년)’와 ‘지젤(1988년)’이 있었다. 그는 구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두 편 모두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그가 실제로 발레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어 가슴이 벅찼다. 그 당시 나는 영화를 먼저 본 선배로부터 “미하일이 11번을 팽팽 도니까, 한 눈 팔지 말고 보거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연유로 미하일이 발레 하던 중 ‘턴’을 하기 시작하자, 손가락을 꼽아 가며 수를 헤아렸다. 돈키호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사도 문학을 탐독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아름답고 고결한 여인 둘시네아를 만났지만, 그녀는 괴물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잠에서 깨어난 돈키호테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산초 판자와 바르셀로나 광장으로 향했다. 돈키호테는 기사도를 이상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살던 세계는 이미 그런 가치가 사라진 사회였다. 자신의 신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 나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돈키호테를 보며, 우리네 인간사를 엿보았다.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대부분 살아가면서 자주 돈키호테처럼 자신만의 풍차를 마주한다. 스스로 정해놓은 이상과 충돌하며 심리적으로 버거워할 때도 종종 있다. 사회는, 직장은, 때때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 발을 딛고 땅만을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다그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해 꿈과 이상을 따라가지 않고 정체된 생활을 한다면, 더 이상 개인의 발전과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발레 공연이 막을 내렸다. 돈키호테의 행동을 반추해 보았다.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은 호기롭게 느껴졌다. 그의 무기는 녹슨 창과 낡은 방패였다. 하지만 어쩌면, 삶을 지탱해 준 것은 ‘용기’가 아니었을까. “당신의 풍차는 무엇인가?” 돈키호테가, 아니,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작품으로 썼던 대문호 세르반테스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돈키호테처럼 용기를 가슴에 품어볼 일이다. 내 눈앞에 놓인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어도 보고, 손으로 힘껏 밀어도 봐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풍차 너머를 바라보며, 현실을 넘어, 삶의 목표를 곧추세우고 당당하게 살아가야겠다. 소중한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2024-10-09

무릎을 꿇다

피귀자 수필가 우윳빛 융단 위의 솜이불처럼 포근하고, 금방 낳은 달걀처럼 따스하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랑하는 이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모습은. 빛을 향해 뻗어가는 새순처럼 풋풋한 두 사람 사이는 종달새의 밀어로 흐르는 시냇물 같다. 타닥!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일었고 사정없이 패대기쳐지는 사지를 수습할 여가가 없었다. 쫙 미끄러지면서 얼굴이라도 들어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운동화 끈이 풀어진 줄 모르고, 앞서 가던 친구들을 급히 뒤따르다가 반대쪽 발이 늘어진 다른 쪽 끈을 밟고 말았던 것이다. 스텝이 꼬인 발의 순간적인 위력은 엄청났다. 고속도로 휴게소 아스팔트를 찧은 턱의 쓰라림과 놀람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피가 나는 턱 주변과 터진 입술이 금방 부풀어 엉망이 된 모습을 본 친구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팔을 뻗으며 엎어지는 순간을 본 친구의 이야기로는 사람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그렇게 위력적으로 엎어질 수가 있는지, 마치 땅바닥이 끌어 당기기라도한 듯, 처음 본 모습이라고 했다. 흉해진 얼굴과 무릎이 까진 아픔에 이은 창피함과 자괴감에, 마른 나뭇잎 버석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지만 잠에서 깨어난 아침은 부스스했다. 집안에 갇혀 일상은 물기를 잃어갔고 안착한 것 같으면서 겉돌기 일쑤였다. 한자리에 눌러앉은 마음을 달래려 애썼지만 자꾸 발을 거는 머릿속도 쉼표가 필요했다. 잠시 나를 내려놓으면 여유가 생길 텐데. 별은 이미 늘 그 자리에 떠 있고 내 몸의 움직임과 환경, 내 시선에 따라 보였다 말았다 하는 것임에도 조급증이 마음 안에 바람을 부추겼다. 하루에도 수차례 수선한 마음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후 속으로 핀 꽃이 켜가 되어 신발 끈이 풀린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알려주게 된다.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웬 오지랖이냐는 듯 시큰둥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인사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일은, 알려주는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앳된 소녀가 친구 앞에 말없이 살폿 앉으며 운동화 끈을 얌전히 묶어주던 모습이다. 말간 모습처럼 다소곳하게 앉던 소녀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동작은 누가 해도 하나 같이 해맑고 순한 모습일 것이다. 두 친구의 마음도 꼬투리 속의 콩알처럼 탱탱하게 익고 있었으리라. 지인의 아들은 남미의 여행지 순례 길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얻었다. 아가씨의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진 건실한 청년이 결혼을 하지 않아 부모 속을 무던히 끓이게 하던 중의 일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어주는 남자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아가씨가 있으랴. 퍼져나가는 순금 햇살 같은 마법의 시간 속, 한국 사람이라곤 단 둘 밖에 없었던 머나먼 남미의 여행지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이 싹텄던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여행자의 가슴에 쉼표 하나 던져주어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눈짓, 봄이 눈처럼 하얗게 내렸던 것이다. 신발 끈을 조이듯 나이 따라 느슨해진 순발력과 이해력, 해이해진 마음을 조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리학에는 ‘15’초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감정이 치솟아 정점을 찍는 데 15초가 걸린다는 것이다. 화가 나면 화의 갈래로, 기쁨이 일면 기쁨의 갈래로 접어드는 데 3초가 걸리고, 그 감정의 정점은 15초면 도달한다나. 그러고 나면 이내 다른 감정으로 변한다고 한다. 고작해야 15초에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에랴. 오늘도 반성문 한 장 쓴다. 문제를 해학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매너리즘에 빠졌을 땐, 해이해진 감정의 끈을 다시 조이기 위하여, 토라진 감정에게 신발 끈을 묶어주듯 그때마다 순하게 무릎을 꿇어야 하리.

2024-09-25

계단을 오르다

배문경 수필가 나뭇잎에 튕긴 햇빛이 비처럼 쏟아진다. 저만치 계단 위를 올려다보니 빛 속에 세상이 놓여있다. 기와지붕 끝이 맞닿는 곳에 백일홍이 붉게 웃는다. 순간, 모든 것이 희고 환해서 도무지 이 세상이 아닌 듯 몽롱하다. 스물 계단 앞에 섰을 때 세상은 혼돈이었다.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쓸려 새로운 길을 만드는 물살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를 요구했다. 내가 살던 작은 도시에서도 골목골목에서 나온 사람들이 어깨를 서로 걸쳤다.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목소리는 하나가 되었고 의기는 투합 되었다. 그때는 어디를 가든 친구와 함께였다. 침낭과 먹을 것을 배낭에 나누어 넣고, 지리산과 설악산을 올랐다. 고단함도 잠시 텐트를 펼치고 쏟아지는 별을 노래했고 나날이 만들던 추억은 우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패기는 희망의 노래뿐만 아니라 절망의 노래를 부를 때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친구와 손을 잡고 오르면 어떤 계단에서도 숨이 차지 않았다. 서른 계단에서 결혼 후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가을 길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돌담길을 걷자 쨍쨍한 가을 햇살에 땀이 났다. 능으로 가는 길,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나는 막내의 손을 잡고 걸었다. 계단 앞에 서서 큰아이는 동생을 위로 올라서게 한 후 나에게 올라서 보라고 재촉했다. 미소가 번지는 얼굴은 언덕배기를 하얗게 물들이던 구절초처럼 환했다. 아이들과 오르던 서른 계단은 웃음이 번지던 시간이었다. 마흔 계단을 오를 때는 사는 일에 스스로 지쳐 기진맥진할 때가 많았다.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감천마을을 살폈다. 낡은 집들의 틈새를 메우는 계단은 미로 같았다. 오르락내리락하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집은 이어졌다. 집도 사람도 서로를 보듬으며 견디고 있었다. 낡은 계단은 빗물을 흘려보내고 세월을 흘려보내느라 사람의 발길질에 삭을 대로 삭아 납작하고 보잘 것 없었다. 어둡고 칙칙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오르며 이 계단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쉰 계단은 나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과 함께 계단을 오른다. 라일락이나 들꽃처럼 짙은 보라의 향기가 번지는 시간이다. 운명을 찾아 연어처럼 자신을 찾는 회귀형도 있고, 파도에 적당히 몸을 맞기며 즐길 줄 아는 사람들도 본다. 그래서 그들 나름의 향기는 진하고 감미롭다. 나는 무슨 향기일까.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는 시간, 나의 향기를 덧입혀본다. 지금, 잠시 멈추어 서서 계단 아래로 눈길을 준다. 낮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들꽃이 어느 날 눈길을 끌던 것처럼 사소하게 넘긴 것들이 목의 가시처럼 걸렸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마음은 세심함을 잃은 행동이었다. 당연할 줄 알았다. 지금에서야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따뜻한 시선을 담아 보낸다. 어제 같은 계단이 내일도 이어진다. 무수히 뻗어있던 길과 계단에서 달리고 걷고 혹은 뛰어넘기를 하며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가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다 가더라도 가야하는 길이다. 나이를 먹을 때마다 더 나아지리란 달콤한 희망은 좌절될지라도 삶은 또한 살아지는 것. 그 끝이 당장 정갈한 나무숲의 빛 내림처럼 황홀한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다른 영산암 작은 마당에 햇살이 소복히 내려앉았다. 영산암(靈山庵)은 석가모니불이 경전을 통해 설법하셨던 영취산에서 유래했는데 보통 줄여서 영산이라 부른다. 어디에도 없던 평화와 안정이 마당에 들어찼다. 염불소리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니 더 이상의 계단은 없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계단은 기도와 다르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 그 끝에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그마한 절 한 채가 있다. 그 도량을 거닐다보면 깨달음의 향기가 온 몸을 적신다. 절집 마당에 피어난 백일홍이 유난히 붉다.

2024-09-11

블랙핑크와 춤을

윤명희 수필가 그분은 블랙핑크의 팬이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K팝을 즐긴다. 걸 그룹 가수들의 얼굴도 구분하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노래 속에서 멤버 하나하나의 목소리 특성까지 찾아 이야기한다.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가르쳤던 그분은 정년퇴임 후에도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과 힙합가수 지코의 음악을 함께 즐기기도 한다. 처음 그분을 만난 곳은 방송대 국문학과 강의실이었다. 퇴직하자마자 우리와 함께 문학을 공부했다. 들쑥날쑥한 나이 차이에도 우리는 친구사이로 지내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혼자 사는 그분의 집을 방문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파마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엉성한 머리카락을 파마로 살짝 가리니 십년은 젊어 보였다. 갈수록 더 멋있어 진다는 우리의 합창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는 사람들마다 젊어 보인다는데 딱 한 사람, 딸은 모른 척 하더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옆구리까지 찔러 들은 말이 ‘괜찮네.’였단다. 우리는 그녀의 반응에 눈이 둥그레졌다. 집안을 둘러보니, 창가에 온갖 꽃이 핀 화분들이 있었다. 꽃잎마다 윤이 났다. 선반 위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하얀 시트로 정리된 호텔 같은 침실을 들여다본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집에 가면 대청소부터 해야겠다는 반성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뒤이어 그분이 직접 차린 밥상 앞에서 또다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물 무침에 생선찜까지 정갈했다. 주문을 하시지 번거롭게 직접 했느냐는 우리의 미안한 말에, 배달음식은 이 집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집안을 보니 건강한 몸이 더 돋보였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짬이 나면 친구들과 자주 여행을 한다고 했다. 마음을 글로 나타내기도 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주변을 아우를 줄 아는 그분의 생활은 내가 그리던 삶과 닮아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둘러앉아 와인을 마셨다. 내 머릿속엔 온통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그분의 딸 생각뿐이었다. 혼자서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아빠인데 왜 그런 반응이 나왔을까. 두어 잔의 술에, 취기와 함께 그 딸의 마음이 슬그머니 내 속으로 들어왔다. 내게도 엄마를 먼저 보내고 이십 여 년을 혼자 지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있었다. 혼자 된 아버지의 일상은 나의 염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월요일은 버스를 타고 가서 온천 목욕하러가는 날이라 했다. 세숫물을 코앞에 들이대던 엄마가 없어도 아버지는 홀아비 티 없이 말끔했다. 어느 날은 등산 가는 날이고, 다음 날은 오일장 가는 날이라고. 친구들과 포항 죽도시장에 회 먹으러 가는 날도 계획에 있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건강검진을 가는 날이었다. 분홍빛이 은은한 체크남방차림의 아버지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분홍 옷에 모자까지 갖추었다. 나는 운전석 룸 밀러로, 뒷자리에 앉아 모자를 고쳐 쓰는 아버지를 힐끔거렸다. 내 마음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바람이 지나갔다. 아버지 참 멋지다고 감탄하는 내 말 속에 빈정거림이 숨어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엄마의 빈자리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혼자 남을 아버지 걱정에 속옷과 양말 손수건까지 새로 챙겨 넣었었다. 혼자서 잘 적응하는 모습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엄마의 자리가 지워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분 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서운했던 그때의 내 마음과 그녀의 아쉬움을 견주어 함께 다독인다. 지금 나는 파마를 하고 블랙핑크의 음악을 즐기는 그분의 편이다. 아버지의 연분홍 체크 남방차림과, 고속버스를 타고 죽도시장까지 가곤 했던 일들이 생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었다는 것을 세월이 알게 했다. 그 힘은 자식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는 것도 안다. 와인이 바닥을 보이던 찰라, 그분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알람소리에 맞춰 거의 매일이다시피 저녁노을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창가로 다가갔다. 평소 사진으로 보았던 해 지는 모습을 오늘은 직접 보고 있다. 꼭대기 층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내게 스며들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이다. 해는 지고 그 뒤로 블랙핑크의 음악이 흐른다.

2024-09-04

달달한 자궁

피귀자 수필가 칼 맛을 보더니 더 독해진 걸까. 날 선 칼을 튕기며 길을 내주지 않는 단 호박. 남반구의 강렬한 햇빛이 키운 완강한 근육을 진작부터 알아봤지만 이리 돌 같을 줄이야. 칼의 길을 더 이상 용납 않는 호박과의 씨름이 낭패스러웠다.겉가죽이 검푸른 단 호박 한 덩이를 샀다. 작은 크기에 비해 묵직한 뉴질랜드산 호박이다. 깨끗한 공기와 끝없이 푸른 들판을 머금은 환경은 직접 보기도 했지만 숨긴 속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먼 길을 돌았어도 상처 하나 없이 암팡지게 내려앉은 모습이 유장하기까지 하다.말쑥하게 목욕시키고 식초 단장까지 마친 후 자르려고 칼을 넣었다. 처음부터 이가 약한 세라믹 칼을 들고 설친 게 실수였다. 칼끝을 날리고서야 겨우 빼낸 후 무쇠 칼로 바꾸었다. 쇠 칼날을 물고도 완강하게 버티는 호박을 도마에 대고 탕탕 치며 이리 돌리고 저리 흔들다 보니 겨우 한쪽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철옹성 같은 짙푸른 초록의 속이 샛노랗다 못해 주황빛이다. 드러난 속살에 옛 추억이 소환된다. 낡은 창고 지붕이 위태로울 정도로 큼지막하게 자리 잡았던, 늙은 호박 속과 닮았기 때문이다.할머니의 칼 아래 누르스름하게 골진 단단한 껍질이 벗겨지고 쫙 갈라지던 거대한 호박 속. 처음으로 자세히 본 호박 속은 어린 마음에 금화 가득한 흥부의 박 속처럼 신기했다. 늙은 호박은 겉도 누런 색깔로 골이 깊게 패이고 높이보다 옆으로 넓게 자리 잡은 모습과 달리 단 호박은 작고 껍질이 검푸른 탓일까 늙은 호박 속보다 더욱 붉게 보이니.환한 빛 내뿜는 단 호박 구멍 속에 손을 넣었다.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호박씨를 손가락에 힘을 주어 긁어내자, 미끌미끌한 실끈에 달린 호박씨들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근육을 키운 자양분 주황 물이 끈끈한 피 마냥 손을 적신다.오글오글 모여 있는 호박씨들이 곧 깨어날 개구리알 같다. 코끝에서 싱싱한 야생의 기운을 내뿜는 입김이 달착지근하다. 달달한 향이 솔솔 흘러나온다. 잘 익은 과일의 농익은 달콤함과 제철 과일의 싱싱함까지 품은 호박 향이 저절로 가을 들판을 달리게 한다.씨가 빠져나가자 움푹한 구덩이가 드러났다. 입김 달달한 경이로운 동굴이 옹골차다. 완강한 근육 속 고백, 단단한 몸이 만든 샛노란 자궁이다. 몸 전체가 자궁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으니 몸의 크기에 비한다면 아마 가장 큰 자궁이리라. 산도를 따라 피어난 저토록 야무진 둥근 방, 눈부시도록 환한 속은 계절을 삭힌 여백일까. 한 발 한 발 넓혀나가느라 운 울음의 깊이일까.반백년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자궁을 잃어버렸다.정확히는 수술대 위에서 의사의 시술로 어쩔 수 없이 빈 궁마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헛꽃 물혹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비록 생산의 소임을 다했다지만 여성으로서의 상징 같은 자궁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여성성을 도려내는 듯 상실감도 밀려왔지만 겉으론 쿨 한 척 이 또한 가볍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알알이 영근 씨를 가득 품은 호박 속을 보며 되살아났다.그 일로 수혈을 많이 한 까닭인지 수족냉증이 와서 겨울마다 오랫동안 고생했던 일도 이젠 추억이 되었다. 원래 피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수혈 양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있던 피가 텃세를 한 탓일까. 들어온 피와의 화합이 그리 어려웠던 것인지. 아무튼 찬물에 넣으면 손과 발이 빨개지고 따가울 정도여서 괴로웠는데 세월이 약이었다.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듯, 모진 비바람과 땡볕과 가뭄을 이겨내고 익어서 제 소임을 다하는 호박 앞에서, 지금 이 시점이 내 인생의 어디쯤인가도 다시 가늠해 보게 된다. 언젠가 해는 서산으로 넘어갈 것이고, 나도 저물어 갈 것이니까. 지금은 품을 자궁이 없는 나, 저 달달한 자궁의 농익은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저리 붉게 활활 토하는 저 문장을.

2024-08-28

송도, 그리다

정미영 수필가 포항 송도 거리의 풍경을 마음에 그리려고 길을 나섰다. 구부정한 골목의 등허리를 밟으며 사잇길로 빠져 내려갔다.그 곳은 바닷길로 이어져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갈매기들이 내 기척에 놀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를 눈으로 훑어보니 무수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제각각 존재의 무게만큼 깊고 얕은 흔적을 남겨둔 채 떠나간 새떼를 주시하며, 내 삶은 어떤 무늬의 흔적을 남기게 될지, 궁금했다.송도해수욕장을 걸으면 도시의 소음이 점차 멀어지고 파도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파도 소리는 때때로 내 마음의 울림 같았다. 내면까지 파문을 일으키는 짙푸른 물결을 보며 지나온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가늠해 보기도 했다. 잔잔한 물결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헤치다 보면, 바다를 배경으로 나만의 서사시가 한 편 완성되는 듯 했다.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을 넘어 하얀 포말 속에 수많은 생각의 파편을 담아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그림으로 완성될 때도 있었다.오늘처럼 송도의 길을 이리저리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멈춰 설 때가 있다.마치 영화 ‘일 포스티노’에 등장하는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인 마리오처럼 “아름다워요.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어요!”라고 외치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난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풍경들을 보며 감동을 받는 것이다.결혼해서 포항에 정착한지 30년이 되어 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서 생활할 때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가 바닷가 근처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건물 숲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실이 사막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순간이 많았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를 보면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일 것만 같았다.그런 내가 결혼을 하면서 바닷가 근처에 살고 있다. 이른 새벽, 돋을볕이 떠오를 때 바닷가에 서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가 많았다.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다독여준 것은 구룡포나 칠포, 여남 등에서 만난 바닷바람이었다. 파도 소리 실은 바닷바람의 따스한 손길이 내 피부에 닿으면 가슴이 충만해지며 위로가 되었다.포항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대구와 비교했을 때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지명에 도(島)가 들어가 있는 곳은 예전에 섬이었다는 것이다.해도, 상도, 송도, 죽도, 대도가 섬이었는데, 지금은 다리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송도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염전이 유명했다고 한다. 우리 전통 소금인 ‘자염’을 생산했는데, 나라에 진상할 정도로 특산물이었단다.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송도에 위치한 ‘동성조선소’였다. 뜨거운 햇살 줄기를 등에 업고 여름날 송도해수욕장에 핀 갯메꽃과 참질경이꽃을 눈에 담은 뒤 솔밭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동성조선소가 나온다. 열린 문 사이로 조선소 안을 바라보면 거대한 크레인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선박의 몸체를 들어 올려 수리를 받게 하는 모습은 마치 철의 거인이 일하고 있는 것 같다.동성조선소는 한때 지역의 경제와 산업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축이었다.초기에는 소형선박을 건조하는데 주력했으나, 점차 규모를 키워 대형선박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소를 바라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사람들은 배를 만들며 개인과 가족에 대한 꿈과 의지, 삶에의 희망을 쏟아 부었으리라.다시 걸음을 옮겨 솔밭을 거닐었다. 솔향기 가득한 숲속에서 숨을 들이마셨더니 푸른 생명력이 느껴졌다. 햇살 조각이 솔잎에 매달리면 작은 그림자가 춤추듯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눈부신 햇살 그림자의 향연들을 잘 갈무리하여 내 마음 속 화폭으로 옮겨 그렸다.나는 지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내가 그린 마음 속 광활한 송도 그림을 펼쳐놓으며 나 혼자 향유한다.

2024-08-21

AI

윤명희 수필가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영화제목이 그녀라는데 She가 아니고 Her이다. 나는 그녀라는 제목이 주격이 아닌 것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주인공 테오도르는 손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하는 섬세한 남자다. 편지를 부탁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사연을 듣고 글로써 상대를 감동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아내로부터 이혼 재촉을 받고 있다. 그는 사랑했던 둘의 관계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전혀 모른다.그는 새로운 인공지능 광고를 물끄러미 보다가, 18만개 중에 그가 원하는 맞춤형 운영체제를 클릭한다. 순간, Hi~ 반갑게 인사하는 아름다운 여자 사만다가 나타난다. 당황한 테오도르는 멋쩍은 웃음을 보인다. 그가 구입한 여자가 휴대폰에 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말을 건다. 그는 어쭙잖은 표정으로 그녀가 묻는 말에 대답한다.그가 이혼문제로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자, 사만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가온다. 무슨 고민이 있느냐는 말로 그의 속엣 말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들을 거리낌 없이 내 놓는다. 공감하는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는 그녀는 그가 모든 것을 내놓도록 기다려준다. 눈물 가득한 목소리로 위로하는 그녀 앞에서 그는 깊은 잠에 든다. 다음날 아침, 어젯밤 대화에서 찾아낸 그의 별명을 그녀는 한껏 밝은 목소리로 부르며 깨운다. 여느 날과는 다른 굿모닝이다. 그녀는 그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밤새 온 메일을 차례대로 읽어주고, 그가 놓치는 일정을 관리해 준다. 대필한 편지를 교정해주며 더 달콤한 낱말을 찾아서 문장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녀는 그가 쓴 글귀에 마치 자기가 받은 손 편지인 냥 과하게 감동까지 해준다.그들은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가 휴대폰 카메라로 세상을 보여주면 그녀는 그를 위해 노래를 지어 불러준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 해 주고, 같이 울어주는 존재를 가진 그는 잊고 살았던 연애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의 글들을 모아 교정을 보고 편집해 출판사로 메일을 보내는 일을 혼자서 단숨에 처리한다.그의 뇌세포 하나까지도 다 들여다보는 사만다는 세상에 대해 주어진 프로그램보다 더 진화하게 된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생각 전부를 읽고, 인간의 감정까지 다 알게 된 그녀는 그의 기분을 살펴주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밤새 서로의 살갗 감정까지 나눈 그들은 이미 오감도 함께 하고 있다. 그녀는 그와 육체적 사랑까지 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단계에 이른다.테오도르는 이제 밝은 표정으로 아내를 만난다. 이혼 서류에 마지막 사인을 하는 그는 그녀에게 사만다라는 OS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사만다를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한다는 남편에게 그녀는 당신은 순종적인 아내를 찾은 거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하나의 인격체가 되어 가는 사만다는 주어진 인공지능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신의 재발견까지 꿈꾸게 된다. 사람의 상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해 가는 사만다는 이제 Her가 아니라 She가 되어가고 있다. Her와 She는 같은 그녀가 아니다. 소유와 목적에서 머물고 있던 테오도르는 흔들린다.인간관계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정에는 언제나 변화가 있다. 무한정 업그레이드되는 사만다를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녀를 OS체계라 생각하지 않는 그는 그녀가 몇 천 명과 대화를 나누고, 몇 백 명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크게 흔들린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나는 매번 빠른 시대변화에 멈칫거린다. 사만다는 딱 내 남자가 원하는 타입의 여자다. 데면데면한 성격의 나는 몇 십 년을 같이 살아도 그의 속을 잘 알지 못한다. 알라딘의 램프 속 여자인 지니에게 텔레비전 켜 달라고 하는 말도 버벅거리는 남편은 아직 OS와 기본적인 대화조차 나눌 줄 모른다. 그녀의 사용법을 모르는 그도 언젠가 영화의 주인공처럼 고지능의 OS(operating system)가 곁에 있지는 않을까하는 신경이 일어선다. OS가 내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는데 나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신문화에 한발 늦은 남편까지도 사만다라는 애인이 생길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남편에게 슬쩍 물어보니 그가 씨익 웃는다.

2024-08-07

미안한 무게

피귀자 수필가 결 고운 순수가 가득한 곳, 품 넓은 수더분한 사람을 닮은 강원도 인제에서 온 화분(花粉) 한 병. 벌이 완성한 보석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황갈색과 암갈색, 노르스름한 빛을 띤 가벼운 알갱이들이 사르르 녹는다. 엄나무 피나무 도토리 꽃 다녀온 족적의 흔적이다, 일벌들이 온몸을 바쳐 모은 화분, 인제의 흔들리는 꽃가루가 목을 간질여주는 맛 달콤 쌉싸름하다.하루 종일 팔랑팔랑 이리저리 꽃 피는 식물을 찾아 꽃가루를 수집하는 일벌들. 화분은 일벌이 자신의 타액과 미세한 꽃가루를 뭉쳐서 만드는 것으로 타액에서 분비되는 소화 효소와 섞어 벌화분(beepollen)으로 알려진 화합물을 발가락에 묻혀 벌집으로 가지고 온다. 이 물질은 꽃가루와 꿀, 효소, 밀랍 등이 혼합된 천연 성분이라고 한다. 꽃가루의 성분은 꿀벌이 모은 식물에 따라 달라지지만 달콤한 꽃 맛이 들어 있다. 또 화분에는 아미노산과 무기질, 비타민과 미네랄, 항산화제를 포함하여 250개 이상의 활성물질이 함유되어 있다니 신비할 뿐이다.꿀벌은 꽃에서 꿀을 모으는 동안 그들이 방문하는 식물의 남성 생식 기관에서 꽃가루를 묻힌다. 꽃 속을 누비다 몸의 털에 달라붙은 이 꽃가루를 한 꽃에서 다른 꽃으로 건너뛰면서 주변에 퍼뜨려 다양한 식물의 암술이 수정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이런 벌들의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벌에게 치명적이라고 하는 살충제의 남용과 밀원의 감소와 월동 실패 등으로. 한 마리 한 마리가 내는 작은 기쁨의 파동이 자연을 살찌게 하고 생태계를 건강하게 하는 거룩한 일이 아닌가.앉아있는 사람보다는 서있는 사람이, 서있는 사람보다는 걷는 사람이 더 건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풍겨 나오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듯, 일벌에게 더 마음이 가고 움직인 만큼 건강은 보장되리라.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듯이. 꿀과 화분을 모아 아이 키우고 집안정비는 물론 여왕벌을 받들며 쉴 새 없이 움직여야하니 일벌은 웬만한 사람보다 더 바쁜 것 같다.이 시대 우리들의 뇌는 지나친 자극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많은 정보들이 끊임없이 뇌를 움직이게 만든다. 쉴 새 없이 나오는 정보를 받아들여 분류저장 처리하느라 뇌는 쉴 여유가 없다. 뇌도 쉼표가 필요한 때, 벌이 만든 화분의 생리활성 물질이 뇌건강과 면역력을 키우고 혈액의 흐름을 좋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분을 주문했던 것이다.아름다운 여백이 존재하는 맑은 곳, 인제의 화분을 받고 보니 이렇게 신비한 화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졌다. 검색을 하다가 벌이 화분을 수확할 수 있는 날은 연중 며칠 되지 않고 비가 오거나 기온이 낮으면 수확량도 줄어드는 귀한 것이라는 내용에 이어, 생각도 하지 못했던 화분 채취기 방식에 가슴이 오그라들었다.권위에 복종하고 억울해도 참아야 하는 많은 사회적 약자들처럼 다리에 묻혀온 화분을 채취기에 털리고 마는 을의 처지 벌. 애써 모은 화분을 다리에 붙여 집으로 돌아오는 지친 벌 앞에 화분 채취기라니. 벌은 통 앞에 둔 자신의 몸 크기만 한 구멍이 뚫린 채취기를 통과해야만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그때 애써 모은 화분이 자동으로 탈탈 털리도록 만든 구조라는 것이다. 벌통 아래에 화분을 모으는 서랍이 있어 그곳에 화분이 자동으로 모인 것, 그것이 우리가 먹는 화분이라는 것이다.꽃피는 봄이 오면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지만 꿀벌은 아주 바빠지는 시기다. 꽃이 핀 곳이면 어디든 날아가서 서로 힘을 모아 꿀을 따고 화분을 만들고 로얄젤리를 만들어 여왕벌을 섬기고 양식을 만드는 그 작은 벌들. 벌의 성장에 꼭 필요한 고단위 영양제, 그들의 양식이라는 용도에서 의도치 않게 변경되어 내게로 온 화분. 벌의 족적이 기록된 알알 화분 1kg, 그것은 일벌에게서 강제로 뺏은 미안한 무게. 한 발 한 발 끌어 모은 벌을 생각하는 감정이 수북해져서 입안이 더 쌉싸름하다.

2024-07-31

월하정인

정미영 수필가 아파트 숲 우듬지 위로 교교한 달빛 조각이 소담스럽게 쏟아져 내린다. 넋 놓고 달을 바라보다가, 간송미술전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공책을 꺼낸다. 신윤복의 ‘월하정인’이 표지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달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 많다. ‘월야밀회’ ‘야금모행’ 등이 있는데, 달은 문학이나 회화에서 중요한 오브제임을 다시 한 번 환기해 본다.달밤에 두 연인이 담 모퉁이에 서 있다. ‘달은 침침해 밤 3경이 되었는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그림 속에 쓰인 글귀는 조선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시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초롱불을 든 남자와 쓰개치마를 둘러 쓴 여인이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진다.나에게도 월하정인이 있다.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분에 넘칠 만큼 여럿이다. 새로 사귄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오랜 기간을 달밤에 만났으니, 정분이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남편보다 오래 붙어 있고, 때로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그의 편을 들 때도 있다.그들은 바로 책을 쓴 작가이거나 책 속 등장인물이다. 나는 독서를 할 때면 가끔 너무 감정 이입을 하거나 상황에 몰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눈 앞에서 작가나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작가라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오늘처럼 달빛이 밝은 날에는 누구를 만날까? 달밤의 서정과 서사가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 떠오른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는 달밤의 묘사가 인물들의 격정적인 감정과 자연의 거친 아름다움을 강조하는데 쓰였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달밤의 분위기가 인물들의 상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윤후명의 ‘달의 모양’에서는 달빛 아래에서의 사랑과 상처, 치유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는 달밤에 등장인물이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나는 지금, 고요한 달밤에 어울리는 윤오영 선생님의 수필을 음미하고 있다. 내가 처음 선생님의 작품을 접한 것은 교과서에 실린 ‘방망이 깎던 노인’이었다. 글을 곱씹어 정독할수록 마음속에 울림의 파장이 넓게 퍼져나갔다. 그때의 밀도 높은 감동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달밤’의 문장에 취한다.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가겠습니다”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윤오영 작가는 마치 한 폭의 정물화를 보듯 시골의 달밤 풍경을 수필로 그렸다. 우연히 노인을 만나 따뜻한 인정을 체험하는 묘사가 아주 뛰어나며, 도화지 위의 사물 사이 공간에 여백의 미를 표현하듯 많은 이야기를 함축해서 더욱 시적인 아름다운 글이 되었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향기로운 문자향이 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아 황홀하다.세상은 변해도 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리라. 일상에서 문득 느끼는 군중 속의 외로움과 좁은 시야에 갇혀 거시적 안목으로 주변을 보지 못했을 때의 불안감이 독서를 통해 희미해지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월하정인들 덕분이다. 내가 타성에 젖지 않고 지적 편식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항상 나를 주시해 준다. 나는 나를 일깨워주는 그들의 말에 오늘도 귀를 기울인다.

2024-07-24

기림의 달

길섶이 고즈넉하다. 오늘만큼은 바람도 나무들의 참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정갈한 마음을 준비하라고 함월산(含月山)에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을 씻고 간간이 날아오는 새소리가 귀를 맑게 한다. 부처님 생전에 제자들과 하안거하며 수행했다는 기원정사의 숲이 이랬을까.어머니의 사십구재 막재에 이르러 나는 초재 때의 마음을 내려놓았다. 부모와 자식사이의 정이 아무리 질기다 해도 하늘이 내린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도 애틋함도 지나고 나니 모두 바람이었다. 연(緣)의 끈을 놓아야 어머니도 홀가분히 떠나리라는 생각에 애써 마음을 비우려 밤길을 떠난다. 갑사 치마저고리에 허리띠를 질끈 동여 맨 어머니가 하얀 고무신을 신고 휘적휘적 오르던 길이었다.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났다. 나라 잃은 설움과 차별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돌아오던 현해탄의 차디찬 바람에 돌배기 첫 아들을 잃었다. 그 후 아들 셋을 더 잃고 나서야 ‘붙들이’라는 이름으로 딸을 살렸다. 또 다시 자식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부모님은 야심한 시간에 대웅전 부처님을 들어 올리고 방석을 바꾸기까지 했다. 나름의 방술(方術)까지 하며 자식을 지키고자했으니 어머니에게 자식보다 더 간절한 존재는 없었다.살다보면 한줄기 빛이 간절할 때가 한 두 번인가. 세속을 향해 은은히 빛을 발하는 삼신불(三身佛) 앞에 옷깃을 여민 어머니는 마음가짐부터 남달랐을 것이다. 남편이 징용의 후유증에 시달려 가정을 소홀히 했기에 어머니는 자식의 앞길도 평탄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가뜩이나 가난으로 먹고 살 길이 지난한데 전쟁으로 다시 한 번 마음까지 폐허가 된 시절이었다. 자식의 앞길을 밝힐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을 열 개라도 사르리란 생각에 어머니는 부처님 전에 촛불을 밝히지 않았을까.어머니는 내게 삼배(三拜) 올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 내가 번뇌를 알기나 했을까. 절을 따라하면서도 어머니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동자승이라도 있으면 함께 마당에서 뛰어놀 수 있을 텐데 심심해진 나는 어머니 곁을 살그머니 떠나 배롱나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대적광전을 바라보았다. 색동저고리 같은 단청은 바라볼수록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화려한 꽃살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꽃물이 밴 것 같아 내 옷을 바라보기도 했다.하얀 버선이 새카맣게 될 때까지 절은 끝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지고서야 삼천배가 끝이 났고 어머니의 갑사 저고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산사를 벗어날 즈음 둥근 달이 어머니와 나를 비추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길은 달빛으로 온통 하얀 꽃밭이었다. 배문경 수필가 열 달 동안 자식을 품었다가 세상에 내놓는 첫 심정은 경이였다. 자식과 탯줄로 이어진 운명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럴진데, 어머니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품고 얼마나 울었을까. 한겨울 언 땅에 자식을 묻고 와서 가슴을 얼마나 쥐어뜯었을까.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죄책감으로 먼저 간 자식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절을 하며 속울음을 삼켰으리라.나도 어느새 어머니가 되어 기림사(祇林寺)를 찾는다. 달이 차고 기울듯 인생도 부침을 거듭하며 희로애락의 꽃을 피운다. 나 또한 어머니의 길을 따르며 부처님 전에 엎디어보니 삶이란 가슴에서 피어나는 송이송이 아프고 시린 꽃을 불전에 올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비켜갈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모두 꽃으로 피워볼 일이다.함월산(含月山)은 달을 품고 토함산(吐含山)은 달을 토한다. 주어진 만큼의 무게를 지고 가다가 마지막에 다 내려놓는 것이 삶이다. 어머니도 모든 짐을 홀가분하게 벗고 숱한 번뇌에서 해탈했을까. 어머니가 이제는 업장을 다 소멸하고 더 좋은 세상에서 환생하길 기원하며 절을 올린다.순례를 마치고 세속으로 돌아가는 길, 토함산이 달을 하늘로 밀어올린다. 온 천지가 여광처럼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난다. 달이 만상을 비추는 해인(海印)의 밤, 등에 비치는 달빛이 따뜻하다.

2024-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