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경 수필가
단조로운 하루다. 밤을 견딘 그들의 하루가 시작되면 어제와 같은 오늘, 큰 변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아침에 출근하면, 한 톤 올려 인사를 하고 혈압 맥박 체온을 재며 활력 징후를 확인한다. 식사를 위해 그들은 식당으로 이동한다. 걸어오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침상에 누운 어르신도 있고, 워커바를 밀고 오는 이도 있다. 걷는 것 하나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식사가 오면 요양보호사들이 배식을 돕는다. 식사 후 약 드시는 것을 챙기는 것은 내 임무다. 식후 하루 세 번.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다치면 연고를 바르고 드레싱을 해주며 불편한 부분을 살피며 타온 약을 드시게 하는 모든 일이 내 일과이다.
절반은 휠체어가 있어야 이동하고, 걸어도 건강한 걸음은 소수이다. 무엇엔가 의지하고 걷거나 그마저도 못 해 누운 채 하루가 가고 새날이 오기도 한다. 물리치료사와 재활치료를 하기도 하고, 일주일 두세 번 오락으로 즐겁게 해주는 분들이 와서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노래하고 악기로 재밌게 멈춰있던 그들의 공간에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 정해진 시간에 제공되는 식사, 반복되는 요양보호사의 발걸음. 그 속에서 노인들은 깊은 침묵과 마주하며, 시끄러운 음악과 큰 율동으로 즐거움을 주고자 애를 쓰는 그들을 통해 신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요양원은 어쩌면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 이들이 머무는 마지막 정거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있는 시간이 있다. 노인들은 그 시간 속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남은 인생을 잃어버리지 않길 기도한다. 그나마 기억창고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입원환자의 90%가 치매다. 삶이란 고통과 기쁨이 엮인 직조물 같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기쁨 속에서도 삶의 무게를 느낀다던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요양원의 노인들은 그 직조물의 한 가닥을 마무리 중이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찾고 병마로 인해 몸은 쇠약해지고, 아픈 기억들이 종종 그들을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낀다. 통증 속에서라도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가족의 방문이거나 삶이 끝날 때 찾아오는 평온일 수도 있다.
요양원의 한구석, 작은 창가에 앉아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음미하며, 소리 없는 기도를 드린다. 그녀의 기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남은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제 곧 만나게 될 형제들을 위한 기도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깃들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끝을 맞이하지만, 그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불경 구절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노인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다가오는 끝을 받아들이며, 남은 시간을 차분히 준비한다. 삶의 끝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전환점이며, 다음 세계로 향하는 문이기도 하다.
요양원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창문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쉰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그 무게는 이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함이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놓인 순간들을 살아간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세상을 향한 작은 빛이 남아 있으며 그 빛은 죽음이 아닌, 지금에 대한 감사다.
지금을 노래하는 마음, 지금을 살라는 말이다. 그것은 요양원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는 진정한 진리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느끼며, 그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는다. 기도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한 할아버지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손을 모은다. 그의 기도는 길지 않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기도는 그의 남은 시간을 더욱 값지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를 마친 그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2024-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