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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불 켜진 창

윤명희 수필가 안막커튼까지 쳤다. 옅은 빛마저 사라지자, 시간의 소리도 멈추었는지 고요하다. 새벽 2시가 지나갔는데도 감은 눈이 아프다 못해 시릴 뿐이다. 잠이 들어야 할 자리에 뜬금없이 그녀가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프로필에서 만났던 앳된 모습도, 그녀가 쓴 소설의 제목 또한 기억에 없다. 단지 조금은 특이했던, 아니 내 취향과는 다른 디자인의 책 표지만 생각날 뿐이다.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불을 켜자 싸늘한 기운이 덮친다. 겨우내 난방을 하지 않은 그 방은 서재라기보다 창고에 가깝다. 책장 앞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그 표지를 찾아 책 사이를 더듬었다. 그녀는 30년도 더 전, 대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의 동기생이었다. 얼굴 한 번 마주 한 적이 없었지만, 동생이 건네준 책의 저자라는 이유로 꽂아두었다. 다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그녀의 열정이었던가 보다. 대학생이 장편소설책을 낼 만큼 뜨거웠던 그녀를 내 마음만큼이나 차가운 방에서 찾고 있다. 찾는 것은 보이지 않고, 손끝에 낡은 책 세권이 걸린다. 여고 때, 해마다 받아 둔 문예지다. 표지가 세월에 끌려 다니느라 나달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책을 펼쳤다. 빛바랜 책장이 누렇다 못해 짙은 갈색으로 가고 있다. 간신히 붙어있는 책갈피가 흩어질까 조심스레 넘기다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걔가 문예부였던가. 갈래머리 여고생이었던 우리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가을 산은 나무마다 꽃불이 난 것 같았다. 온 산을 뒤덮은 붉은 색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쏟아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이 단풍을 타고 산을 올라갔다. 나의 언어는 너무나 빈약했다. “아!”라는 단발마적인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 다른 어떤 표현도 하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눈물을 퍽 쏟았다. 나는 발까지 동동 구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은 곳에 있던 감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보다도 더 명확한 감정 표현이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설악산과는 뗄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 책 세권을 다 훑어봐도 그녀의 이름이 없다. 그녀가 문예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소설책이나마 꼭 찾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한 귀퉁이에 기억속의 표지가 보였다. 프로필의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인터넷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헤맸다.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지, 단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 외에 더 이상의 책은 없었다. 내가 이 시간에 그들을 찾는 이유를 생각했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봄이 올해는 유난히 더 어지럽기 때문일까. 이 밤, 훅 치고 들어오는 봄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게 이유였을까. 나이 든다는 게 익어간다고들 하지만, 내겐 그 홍시 같은 말랑함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다. 설악산에서 울었던 그녀가 생각나는 건 내 속에서 꺼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서일까.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 퇴근하면 소파에 누워 자반뒤집기나 하는 내게 무슨 열정이 찾아들겠는가. 그나마 있었던 것도 시나브로 빠져나가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된 것 같다. 지금 나는 그 동그라미로 세상을 참 힘겹게 굴러가고 있다. 책장 앞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 걸레를 빨아 책장을 닦는다. 엎드려 방을 닦다 문득 그녀들도 나처럼 사그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멈췄다. 감성과 열정의 그녀들을 나와 동격화 시켜 놓으니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책상을 닦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밤, 불이 오래 켜져 있었다. 짙은 어둠이 골목 사이로 물러날 때까지.

2025-03-26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정미영 수필가 어둠을 가르며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소리의 서막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압지처럼 사이렌 소리가 빌딩숲 주변을 맴돌던 소음을 흡수해 버린다. 도시는 순식간에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는 곳과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나뉜다. 거리를 휘적휘적 헤쳐 나오는 사이렌 소리를 눈으로 살핀다. 마치 소리를 ‘보는 것’처럼 차창에 바싹 얼굴을 갖다 대기도 하고, 백미러로 후방을 주시하다가, 급히 달려오는 119 구급차를 발견한다. 나는 이런 경우에 갖게 되는 당혹감이 아니라 신중함을 가지고, 최대한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동차를 한편으로 옮긴다. 다행이다. 이 순간만큼은 운전자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이타심을 발현한다. 서둘러 구급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 다음,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다들 제 갈 길로 간다.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환자에게 쏠린다. 얼마나 위중한 상태일까, 환자는 의식이 있을까, 사위스러움이 내 머릿속을 온통 부유한다. 몇 년 전, 스무 살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 군에 입대했다. 선발 시험에 통과해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앙소방학교에 입교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시험을 치고 땀 흘리며 노력한 끝에 얻게 된 제복이라 그런지, 아들의 모습이 늠름하고 대견스러웠다. 강도 높은 교육을 마치고 무사히 수료식을 거쳐 소방서에 배치되었다. 아들이 소방서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그러자 내 온몸의 세포가 두 귀에 집중되어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소방차나 구급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나의 신경줄이 팽팽해지며 아들에 대한 걱정이 배가되었다. 혹시나 아들도 화재 현장이나 산악 구조 현장에 출동을 나가지는 않았는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사명감과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무사안일과 안전을 기원했다. 그렇게 소리는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기도 했다. 휴가를 나온 아들이 소방 공무원들과 동행해 산불 현장에 갔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즈음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내 눈앞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만 같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또한 아들이 구급차를 타고 나갔다고 하면 죽음의 그늘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역 특성상 노인들이 많이 계셔서 사고사보다는 심정지를 당하시는 분들이 많단다. 119에 접수된 응급환자의 심정지, 노인의 마지막 숨결을 손에 쥐며 슬픔에 잠겼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인 나는 아들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일상으로 접한다고 하니 가량없이 애가 탔다. 아들은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이 마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같아서,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자, 임종을 대하는 태도에도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하는 사람’만큼은 진짜 주체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타인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서의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찾는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소방관의 삶은 끝없는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은 사이렌 소리가 전하는 희망과 함께 사람들에게 안전을 선사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마주했을 때 현명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구급차는 병이 위중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라도, 살릴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이렌을 울리며 최선을 다해 달린다. 소리에도 ‘경중’의 미덕이 있다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는 밀도가 높은 진중함으로 구현되는 것이리라.

2025-03-19

대릉원 뒷골목

윤명희 수필가 오가는 관광객들 사이로 황남파출소가 눈에 띈다. 예전에 놀란 가슴으로 파출소 문을 열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친구와 황리단길을 걷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파출소에서 보호자 찾는 전화가 왔었다. 아버지가 뙤약볕 아래 종일 헤맨 것 같다고 했다. 경찰에게 파출소 위치를 물은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그곳으로 내달렸다. 백발노인의 지친 몸이 소파에 처져있었다. 대릉원 뒷골목에서 발견했다는 말에 의아했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몇 번이나 더 그 곳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러 갈 때마다 왜 연고도 없는 여기서 길을 헤매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 없었다. 오래된 그날, 속이 더부룩하다고 병원에 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엄마만 두고 우리는 집으로 왔다. 병원에 가져갈 생필품을 챙기는 내 뒤로 아버지는 안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작은 방으로 옮겼다. 울음을 삼키는 아버지 뒤로 효자손도 물병과 컵도 따라갔다. 말리는 내 손을 내치는 아버지를 바라만 보았다. 닫힌 안방은 가족사진이 대신 지키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누웠던 병원 침대마저 내 놓았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엄마의 흔적을 못 견뎌 했다. 아버지는 집을 버린 듯 했다. 아들의 학사모를 쓰고 웃는 엄마의 사진을 거실 벽에서 떼어 내렸다. 남은 사진들을 자식들에게 나눠주며, 엄마가 아끼느라 넣어 둔 것들을 다 가져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집을 팔고, 당신이 누우면 세간이 다 보이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멀리서 자식들이 와도 자고 갈 공간이 없었다. 이젠 집이 아니라 아버지만의 거처였다. 줄어든 살림만큼 아버지의 뒷모습은 작아져갔다. 경주로 이사 오던 날, 아버지를 혼자 두고 올 수 없었다. 함께 이사하자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아버지는 어디에 가서 살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저 아버지가 부르시면 한달음에 내가 찾아 올 수 있는 거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도 아버지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일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찾아뵐 때마다, 겨우 얼굴만 봤을 뿐인데도 빨리 집에 가라고 등 떠미는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자꾸만 밖으로 도는 아버지는 집이 없는 듯 했다. 눈만 뜨면 하릴없는 사람처럼 여명의 산길을 따라 김유신 장군 묘에 올랐다. 다음날엔 첨성대를 한 바퀴 돌고, 그 다음 날에는 중앙시장을 찾아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종일 어딘가를 다니다 해거름해지면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집 대신 우리 집에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 많았다. 즐거운 시간도 잠시, 하룻밤만 지나면 당신의 거처로 돌아가려했다. 아직 남아있는 형제들이 조금만 더 있다 가시라고 붙잡아도 막무가내였다. 자식들의 집이 당신의 집은 아니라는 것을 매번 보여주는데 은근히 화가 났다. 그 빈 마음은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의 팔순 생신날, 대릉원 근처에 숙소를 빌렸다. 기와지붕이 반듯한 한옥 독채에 형제들이 모였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안방에는 음식상이 푸짐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혼자서 집 둘레를 몇 바퀴나 돌아보았다. 나는 창 너머로 한참동안 나무 기둥을 쓰다듬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제 아버지도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몇 년 만에 황남 파출소 앞에 서 있는 나는 당신이 왜 매번 그 골목을 헤매고 다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하룻밤을 보냈던 그 집이 아버지에게는 엄마와 함께 잃어버린 옛집으로 보였나보다. 나도 쉽게 다시 찾아가지 못하는 그 집을 흐린 눈으로 찾아 다녔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들이 날아다니는, 아버지가 찾아 헤맸던 기억의 집. 대릉원 뒷골목은 아버지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파출소 창문 너머에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자꾸 눈앞이 침침해 고개 숙인다.

2025-03-12

화양연화(花樣年華)

배문경 수필가 어둠이 삽시간에 창으로 깊게 들어왔다. 불빛과 노인 가족들의 대화가 교차하며 밤은 깊어 갔다. 이제 퇴근 시간이다. 덜 끝낸 숙제를 남겨둔 것 같은 마음으로 노인이 누운 침대 주위로 가족이 함께 있는 방을 걸어 나왔다. 매일 보는 일이지만 볼 때마다 삶이란 얼마나 가여운 것인지. 앰뷸런스에 실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달리던 그 안에서도 삶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꽃진 자리에 눈꽃이 피었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자 양로원의 방들은 온도를 높여도 서늘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창밖은 어둠에 휩싸여 있어도 쌓인 눈으로 인해 창백해 보였다. 노인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가족들이 이 방에서 노인을 중심으로 심각한 대화가 오갔다. 작년에도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노인은 실오라기 같은 생명줄을 놓지 않았다. 가족들은 임종을 못 본 채 조금은 어정쩡하게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가 된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을까. 그래도 그들은 임종을 못 보는 일이 불효라고 여기는 듯했다. 둘러앉아 의식이 가물가물한 노인 머리맡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호흡을 살피면서 그렇게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소중한 한 생명이 죽음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노인은 고왔다. 젊은 날 동네에서 미인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말씀도 나긋나긋 곱게 하셨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혈압을 재고 나면 괜찮으냐는 질문을 하셨다. 혈압수치가 삶의 연장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인지, 의미 없이 고맙다는 뜻에서 그냥 하시는 말씀인지 헷갈리곤 했다.‘좋습니다.’라고 대답하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서랍에는 작은 앨범이 들어 있었다. 자녀들이 어머니를 위해 놓아둔 사진 서너 장이다. 맑은 가을,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기와집을 배경으로 부부가 앉았고, 그 뒤를 자녀들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기와집은 제법 기품이 있었고 동네 부녀회장을 하셨다는 할머니는 아름답고 의젓했다. 아니 의기양양했다. 자녀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사진 밖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식당에서 식탁에 앉아 자신의 숟가락을 들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이었다. 그 숟가락의 무게를 지탱할 힘이 없으면 죽으로 바뀌고 갈아진 음료가 대신 들어가야 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그냥 밥이 아니라 삶이다. 젊은 시절은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밥숟가락만 봐도 행복하다는 부모의 마음, 그 부모님이 이젠 자신의 입에 들어갈 밥을 떠 넣을 수 없고 삼킬 수가 없다. 점점 희미해지는 숨결이 거칠어지다가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밥심이 없어서일까? 자녀들의 이야기는 옛 추억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동네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에서는 함께 웃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어르신의 초상을 치를 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지금의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듯했다. 살아 있는 동안 혈압을 재고 맥박을 확인하며 산소포화도까지 살핀다. 밤새 병실을 오가며 듣는 이야기가 오래전 창호지 밖으로 새어 나오던 부모님의 이야기 같아 내 마음은 아련하게 시골 동네 어귀를 거닌다. 노인이 요양원으로 들어오실 때만 해도 가족들은 모실 여건이 안 되었다고 했다. 자녀들의 바쁜 직장생활로 인해 부모님을 간병할 사람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언니는 부모님을 거의 십 년 정도 수발했다. 결혼하지 않고 우선 부모님을 보살피고 싶었다고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모님을 오래도록 모시고 두 분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니 언니는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시력은 안 좋아졌고 몸은 여기저기 아픈 소리를 내 허무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사람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간병에 딸의 인생은 홀연히 부모님의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부모님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른 자식이란 속담이 없는 이유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일이 유배당하는 것 같아 대부분 노인이 질색한다. 자식의 화양연화 시절을 간병으로 보낸다면 그것이 부모가 바라는 효도일까? 병원을 나서며 어르신께 “내일 또 뵈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 밤도 그녀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화양연화이길 바라며.

2025-03-05

서로의 문장을 해독하는 중

정미영 수필가 딸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늘 소파 한쪽에 기대어 책을 읽었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글자를 삐뚤빼뚤 따라 적는 모습도 앙증맞았다. 아이가 자라서 이제는 두꺼운 책도 제법 막힘없이 읽는다. 나는 그런 딸을 보면 흐뭇했다. 딸은 책 속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잘 이해했기에, 학교생활에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아 안심이 되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소통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학교가 아닌, 나와의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완전 짜증나는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 “아, 말해도 몰라.” 딸의 대답은 짧았고, 표정은 쉽게 변했다. 웃다가도 갑자기 화를 냈고, 어떤 날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며 침묵을 지켰다. 엄마인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지만, 딸은 나를 밀어내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읽히기를 거부하는 책처럼. 나도 갱년기라는 변화무쌍한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게 나도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에는 딸의 마음이 또렷하게 읽혔다. 목소리를 듣거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딸은 사춘기가 되었고, 나는 갱년기가 되었다. 우리의 대화는 암호문을 해독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딸의 말은 나에게 난해한 시처럼 다가와 해석되지 않았고, 나의 말은 딸에게 낡은 서체의 흐릿한 활자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엄마, 왜 이렇게 예민해?” 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엄마인 나의 감정 문장이 고리타분한 글처럼 느껴졌는지 읽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한숨을 쉬어도 딸은 그저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나의 마음을 딸이 읽지 못하는 게 서운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도 딸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서체를 사용하면 읽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명조체를 고딕체로 바꾸면 문장이 선명해진단다. 한 글자 안에서 초성-중성-종성의 간격과 줄 간격, 글자 간의 간격이 모두 넓으면 읽기가 수월하다. 나도 딸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먼저 딸의 말에 쉼표를 두기로 했다. “왜 그래?” 하고 다그치듯 묻는 대신에 “괜찮아?” 하고 기다려 보았다. 질문의 형태를 조금 바꾸었을 뿐인데도 딸은 훨씬 덜 부담스러운 듯했다. 가끔 딸이 좋아하는 소설을 슬쩍 펼쳐 보았다. 어떤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지 살펴보며,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기도 했다. 내가 변하기 시작하자 딸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몰라도 돼.”라고 말했던 아이가, “엄마, 내가 좀 예민한 거 같아.”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는 그럴 때 가만히 듣기만 했다. 활자의 간격을 넓히듯 딸의 말을 서두르지 않고 읽어 내려가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딸의 마음을 완벽히 읽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딸의 마음을 읽고 싶어 노력한다는 점이다. 딸도 아직은 내 감정을 쉽게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 내 옆에 앉아 “엄마, 오늘은 괜히 피곤해 보여.” 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 속에서 딸이 나를 읽으려 애쓰는 모습을 엿본다. 오늘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는 중이다. 어쩌면 우리의 글씨체는 평생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조급해 하지 말고 활자의 간격을 넓혀 문맥을 살피리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두 사람의 마음을 또렷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같은 문장을, 같은 속도로, 읽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희망한다. 그때까지 서로의 책장을 계속해서 넘길 것이다.

2025-02-26

어머님의 막걸리

윤명희 수필가 구순의 어머님이 차례 준비로 비좁은 주방을 이리 저리 뒤지신다.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뭘 찾으시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형님이 다용도실에서 막걸리를 들고 나온다. 어제 어머님이 직접 사오셨다고 한다. 당신 걸음으로는 한참 가야 할 거리다. 빈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조카와 떡국의 꾸미를 챙기던 나는 아침부터 술을 찾는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설한 차례 상은 떡국만 올리면 된다. 제주로 올릴 청주병도 상 앞에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막걸리를 들고 나오시는 통에 식구들의 눈이 그곳에 모였다. 한복을 곱게 입은 터라 행여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질까 불안한 눈치들이다. ‘음복주 마실 텐데 막걸리는 왜 들고 오시지?’ 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한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엉거주춤 바닥에 앉아, 손수 청주를 비우고 막걸리를 붓는다.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하시는 것을 아는 손자가 곁에 섰다. 침대에서 소파로 식탁의자로 옮겨 앉는 일이 전부인 어머님이 손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두 번 하고 일어섰다. “어매 아배요, 우리 장손 장가 좀 보내주소. 영감은 거기서 뭐 하니껴” 참았던 소원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올리는 막걸리가 효험이 있을 거라 믿으시는 듯 했다. 차례 상 앞이 조용해졌다. 나는 곁눈질로 장본인인 조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같은 처지인 우리 아들을 끌어넣는다. 사촌형이 던진 장가라는 공을 얼떨결에 받은 아들이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조상님, 할매가 부탁까지 했는데 손자들이 장가 못가면 조상님 탓입니데이” 아들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으로 계면쩍은 순간을 넘겼다. 차례 상을 물리고 세배를 한다. 절을 한 손자들이 할머니께 증손자 대신 얇은 봉투를 내민다. 떡국을 앞에 놓고 둘러앉았다. 이제는 두 집 식구 모여 봐야 예전 큰댁 식구보다 적다. 시집간 딸네들의 빈자리는 떡국 먹는 소리만이 채우고 있다. 그때의 설날은 집안이 아이들로 왁자했다. 가래떡을 썰고, 강정을 만들었다. 조카들의 손까지 빌려 한 광주리나 되는 콩나물을 다듬고, 몇 시간동안 전을 부쳤다. 친척들을 맞이하는 인사가 연이었고, 방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만큼 주방은 상차리기에 바빴다. 차례상 앞은 흰 두루마기 차림의 어른들과 양복차림의 젊은이들로 그득했다. 맨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은 잠시 후에 받을 세뱃돈 생각에 마냥 신났다. 거실에 빙 둘러 앉아 윷놀이 판을 벌렸다. 바닥에 발을 구르며 도야, 도야 호부랑 도야를 외치며 흥을 돋우는 팀과, 모가 나오기를 두 손 모아 염원하는 팀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공중을 휘돌아 치며 바닥에 떨어지는 윷가락이 판세를 뒤집으면, 와아 함성 소리와 함께 시아버님의 어깨가 들썩였고 큰며느리인 형님도 춤을 추었다. 서른 명도 넘는 친척들과 함께 했던 그날들이 꿈결인 듯 아스라하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 식구는 설날 아침에 큰댁에 간다.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는다. 상을 마주하고 앉아 하는 이야기가 길지 않다. 설거지를 끝내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소파에 앉는다. 차를 마시며 멀거니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몇 번이나 재방송한 드라마의 대사까지 외우다시피 하는 어머님은 장면마다 설명을 덧붙인다. 사촌형과 몇 마디 나누던 아들은 할머니 방에서 자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졸고 있다. 형님이 윷가락을 가지고 나온다. 해 지난 달력의 뒷면에 윷판을 그리지만, 아무도 다가앉는 이가 없다. 나는 슬그머니 그 앞에 앉아 윷가락을 만져본다. 아버님이 만드신 싸리 윷이 손안에 착 붙는다. 어깨위로 높이 던져본다. 바닥에 먼저 떨어진 세 가락이 엎어지고, 뒤늦게 떨어진 한 개가 흰 배를 내 보인다. 한 귀퉁이가 배꼽마냥 까맣게 칠해져 있다. 왔던 길로 뒤돌아 가라는 뒷도다. 오래 묵은 윷가락도 어머님의 화양연화였던 그때가 그리운가 보다. 졸던 남편이 집에 가자며 옷을 주섬주섬 걸친다. 나는 형님이 챙겨 주는 음식들을 받아들고 마지못한 듯이 뒤를 따라 나선다. 설날 하루가 길다. 우리는 남은 시간 앞에서 잠시 허둥거린다.

2025-02-19

꿈, 현실이 되다

정미영 수필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고 습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식어를 쓰지 않고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즐겨 썼던 그였다. 하드보일드 문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대한 신념이었다. 소설가는 이야기에 살을 붙일 수 있지만,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그의 가치관은 내게 신선했다. 그는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은 ‘무기여 잘 있거라’, 아프리카의 사냥 경험은 ‘킬리만자로의 눈’으로 발간되었다. 경험으로 배우는 것이 많아질수록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고 작가 지망생들에게 자주 언급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유달리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을 때면 소설의 배경 장소와 집필 공간이 궁금했다. 언젠가는 문학 기행으로 꼭 가보고 싶었다. 내 꿈은 현실이 되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영감을 주고, ‘오후의 죽음’을 집필했던 장소가 남아 있는 론다에 갔다. 해발 739미터에 위치한 론다는 강원도 평창과 비슷한 위치라고 한다. 주변의 낮은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암석 고원이라는 설명이 막연했는데, 우리나라 지형과 비교를 하니 쉽게 이해가 되었다. 론다는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고 현대 투우 방식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이 고장 출신의 전설적인 투우사 로메로가 경기 방식을 바꾼 덕분이었다. 로메로는 투우 관람을 즐겼던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소설에 그의 이름을 그대로 썼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론다에는 ‘헤밍웨이 산책로’가 존재한다. 나는 헤밍웨이의 흉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는 곧장 그 옛날 그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내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마을”이라고 했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절벽을 도화지 삼아 누군가 그림 한 폭을 그려놓은 듯한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헤밍웨이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누에보 다리로 갔다. 120미터 깊이의 엘 타호 협곡 위에 놓인 아치형의 다리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양쪽으로 절벽이 계속 이어지고 한가운데에는 과달레빈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찔하면서도 황홀했다. 주변의 경치를 내 마음에 담으면서 한편으로는 다리를 만든 사람들이 떠올랐다. 절벽 위에 선 론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앞에서 오랫동안 한숨을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절망은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변했고 꿈은 현실이 되었다. 변화를 위한 갈망과 화합을 위한 노력은 결실이 되었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었던 삶이 연결되었다. 42년간의 공사를 거쳐 1793년에 새로운 다리를 뜻하는 누에보 다리가 완공되면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원활하게 소통되었다. 다리를 건설했던 노동자에게는 고단하고 아슬아슬한 생의 단면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두 지역을 연결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협곡 아래로 스며들었지만, 꿈은 다리로 남아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는 다리 전체를 온전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측면이 아닌 정면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다리 아래 협곡으로 내려가는 입장권을 사야 했다. 표를 끊고 안전모를 쓴 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었다. 누에보 다리 전체 모습이 내 두 눈에 담긴 그 순간이었다. ‘노인과 바다’ 책 속의 주인공인 산티아고의 독백이 떠올랐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고 바다를 헤맸다. 그러나 고기를 잡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기에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청새치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뼈만 남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로 나갈 용기와 희망을 다시 얻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은, 현실이 되리라.

2025-02-12

겨울에도 꽃은 핀다

배문경 수필가 올겨울 젤 추운 날 겹겹의 마음이 모였다. 차에서 내리자 저편에서 S가 손을 흔든다. 추운데 얼른 차를 옮겨타라고 손짓한다. 배낭을 차에서 꺼내 친구 차로 옮기자 데워둔 차 안이 따뜻하다. 오랜만에 봐도 어제 본 듯 반갑다. 그새 좀 수척해진 걸까. 희고 눈부신 피부는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밝게 빛나는 화이트 리시안 같다. 가까이 살아도 이렇게 모임을 따로 갖지 않고는 얼굴 보기가 힘드니 핸드폰으로 일상을 묻고 답을 하며 미루어둔 만남이 오늘이다. 이번 만남을 주체적으로 만들고 스케줄을 엮은 친구이기도 하다. 오랜 교직생활을 명예퇴직했다. 그의 집 뜨락에 푸르게 빛나던 화초처럼 나날이 빛난다. 날마다 포항 북부 해수욕장 근처에서 운동할 그녀가 반갑다며 손을 내민다. 곧이어 K가 차 문을 열고 앉자마자 대구까지는 본인이 운전을 하겠다며 나선다. 나는 속으로 안심이 되었다. 대구에서 운전하다 신호등이 헷갈려 사고 날 뻔한 경험이 있어 흔쾌히 고맙다고 했다. 제제벨 스프레이 장미처럼 화려한 그녀다. 선글래스가 언제나 잘 어울리고 어디서든 걸림이 없는 당당함과 거침없는 입담은 매력 만점이다. 스무 살에 그녀 손에 있던 카메라는 삶이 되었다. 웨딩 촬영 사진과 우리가 그녀의 손에서 재탄생되곤 했다.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온전히 사진 속에서 시작되고 사진으로 연결된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걸려있던 무수한 사진들이 그녀의 삶이다. 근래는 십여 년을 추구해온 요가로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제 셋이 출발해서 동대구역으로 올 친구를 만나러 간다. 도착시간에 맞춰 그녀를 픽업해서 목적지로 향해가리라. 함께 하기로 했던 두 명의 친구 중에 한 명은 참석이 어렵다는 전화를 먼저 했던 모양이다. 다섯 명이 모여 가기로 한 여행이기에 미리 알았다면 나는 참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프지 말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던하고 고요한 L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돋보이게 한다. 누구보다 배려심이 많은 그녀를 보기 위해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이 겨울 더 추워졌을 평창에서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다. 아프지 마라. 다섯이 아니라 넷이지만 옆자리 하나는 그녀의 몫으로 비워두었다. 그리움은 두 배가 되어 다음 만남에서 온전히 손을 잡고 기쁨을 노래하리라. 이전에 꼭 참석하겠다던 말이 떠 올라 마음이 짠하다. 작은 나비 같은 A가 환한 얼굴로 다가온다. 역으로 간 우리의 마중으로 함께 모닝커피와 도넛을 한입 베어 문다. 달콤쌉사름한 쵸코도넛과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우리의 아침을 맛나게 만든다. KTX를 타고 오느라 애썼을 그녀의 얼굴이 볼그레하다. 오늘 일정과 내일 일정을 공유하며 우린 떠났다. 겨울 구례 쌍계사의 옛 추억을 더듬었고 화계장터를 구경하며 생강청을 사고 옛 장터같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아점을 먹었다. 바로 앞 강에서 잡았다는 재첩이 든 부추전과 재첩국과 빙어 튀김으로 모두 만삭이 되었다. 그곳에서 먼 경남 산청으로 어둠을 뚫고 달려 동의 한방촌에서 구들목 같은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물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새벽의 신선한 기운은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가벼운 세상의 나로 태어나길 기대했다. S가 삶의 고마움으로 일인 오만 원이 넘는 한정식을 예약 주문했다. 약선으로 만들어진 소갈비찜과 하나하나 공들인 음식을 우리에게 건강으로 선물했다. 덮개를 한 나무 터널을 지나며 사는 이야기들로 꽃을 피웠다. 엄청나게 큰 기가 센 바위 앞에서 각자의 안녕과 삶을 위해 기도했다. 보이지 않는 큰 힘이 우리를 소원하는 곳으로 이끌어 주리란 마음 한 자락을 바위 구석구석에 새겼다, 빠듯한 일정으로 지치자 K가 족욕과 십전대보탕으로 짧고도 좋았던 이번 여행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두 손을 모았다. 어둠 같은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다발처럼 함께 아름답게 뭉쳐 피어나자꾸나. 환갑이란 나이가 우리를 노을처럼 무르익게 만들지만, 아프지 마라, 그리고 다시 뭉칠 그날을 기약하며.

2025-02-05

15층에서 내려다본 지구

윤명희 수필가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허둥거린다. 지나는 길에 잠시 들리겠다고 하자, 조심해서 오라는 말과 함께 천천히 오라는 말이 길게 따라붙는다. 혼자 사는 아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 뒤로 미처 치우지 못한 베란다를 떠올렸나 보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쓰레기를 양손에 들고 계단을 내려갈 것이다. 지난 여름, 휴가라고 모처럼 집에 온 아들과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았다. 영화를 한 편 보고, 막 리모컨을 돌리는데 잡다한 물건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누울 자리도 없어 앉아 자야 할 만큼 온 집을 물건으로 가득 채웠다. 그녀가 주워 온 것들은 쌓이고 쌓여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른 프로 보자는 아들의 말을 자르며 잘 보란 듯이 볼륨까지 높였다. 화면에 비치는 것들의 썩은 냄새가 내 코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들끓는 파리에 바퀴벌레까지 눈앞을 어른거렸다. 아들은 할머니가 저장강박증 환자 같다고 했다. 아픈 기억으로 생긴 마음의 빈 공간을 물건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끌어 모은 물건들은 누가 봐도 쓰레기로 보일 것들이었다. “너도 아픈 기억이 있니?”라고 묻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베란다에 분리해 둔 재활용은 다 버리고 왔느냐, 생활쓰레기통은 깨끗이 다 비웠느냐는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이 뜨거운 여름, 온 집안에 퀴퀴한 향수가 피어오르겠다고 하자, 아들이 기겁했다. 쓰레기까지 껴안고 살려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해야겠다는 내 말에, 그는 눈만 끔뻑끔뻑한다. 나는 집의 평수에 예민하다. 거주할 곳 한 평을 늘리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가. 아침에 눈 뜨기 바쁘게 일하러 가고,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대충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주말이면 밀린 잠을 자고, 겨우 일어나 빨래한다. 그 또한 일이 덜 바쁠 때 말이지, 주말 없이 일 할 때는 빈 택배상자와 배달음식 통들로 베란다가 점점 좁아진다. 쉬는 날 큰마음 먹어야 치운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할머니를 핑계로 아들에게 제때 버리라고 각인시키려했다. 할머니 집에 도움을 주려는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쓰레기들을 끌어내 차에 싣는다. 화물차가 몇 대나 줄을 지어 실어낸다. 저렇게나 많다고? 끝없이 나오는 것들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할머니 걱정보다 끌어내는 쓰레기에 눈이 꽂혔다. 온갖 병균이 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몇 대의 차가 나가고 나자, 조금씩 집안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볼일을 마치고, 아들의 아파트에 들어섰다. 주차장 한 귀퉁이에 경비아저씨가 플라스틱 더미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오물이 묻은 배달 음식 통들을 건져 포대 옆으로 던졌다. 달라붙었던 음식 찌꺼기가 바닥에 흩어졌다. 분리수거장을 넘어 주차선까지 몇 개나 침범한 것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 몇 바퀴나 돌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았다. 누가 붙잡아 둔 건가, 짜증이 살짝 올라왔다. 나는 버튼을 누르고 또 눌렀다. 한참 만에 숫자가 천천히 내려오고 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쓰레기 더미 속에 서 있다. 손가락에는 플라스틱이 든 커다란 봉지와 일반쓰레기 봉지가 걸려있고 발치에는 종이상자가 가득이다. 한 번 만에 다 버리고 싶은 그의 마음이 줄줄이 그것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다. 종이상자에 얹힌 크고 작은 택배 상자가 바닥에 떨어진다. 아들을 보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거들어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에게 목례하고 아들 집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음악이 먼저 마중한다. 아들은 보란 듯이 베란다 문까지 열어두었다. 나는 빈 쓰레기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베란다 문을 닫으려다 바깥을 내다보았다. 잎들을 놓아버린 겨울나무의 앙상함 사이로 큰 포대들이 보였다. 조금 전에 봤던 것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재활용 포대들이 더 많은 차선을 물고 있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첩첩이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였다. 그들도 똑같이 쏟아내고 있겠지. 곧 쓰레기가 15층까지도 금방 차고 오를 것 같다. 할머니는 남들이 만든 쓰레기를 집에다 모으고, 나는 내가 만든 것들을 집 밖에 버리고 있다. 집안이 깨끗하지 않으냐고 묻는 아들에게 나는 할 말이 없어, 애초부터 만들지를 말라며 등짝을 후려친다.

2025-01-22

계단을 오르는 여자

정미영 수필가 매서운 겨울비가 아파트 단지를 역동적인 빗물체로 풀어헤친다. 빗방울이 굼뜨게 내리는 틈을 타 집을 나선다. 퇴원한 후,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누워 지내는 것보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한참이나 기다린다. 무리한 운동보다는 걷기부터 시작해야지. 동 입구에 다다른다. 그칠 줄 알았던 빗줄기가 더 굵어져 땅 위로 곤두박질을 거듭하고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나왔는데 집으로 돌아가려니 아쉽다. 그 순간 열린 비상문 사이로 계단이 보인다. 16층에 있는 나의 집으로 이어진 길을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밟는다. 신음을 토하고 숨 고르기를 반복했지만 계단 오르기를 멈출 수는 없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중에 ‘계단을 오르는 여인’이 있다. 그는 여인이 오르는 계단을 통해 삶의 여정과 노력,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을 담아내고 내면적인 탐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고 한다. 나는 오늘, 마치 고흐 그림의 모델이 된 듯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내 삶의 여정을 나타내며, 오르는 과정은 인생을 건너가는 나의 노력과 도전을 나타내는 것만 같다. 남편이 심장 시술을 하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수필가로 등단을 했고 논술 선생님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몸져누운 남편을 바라본 뒤, 집에 있는 컴퓨터로 ‘논술생 모집’이라는 광고 전단지를 만들었다. 나에게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대용량 프린트기를 구입해서는 용지를 출력했다. 그러고는 어린 두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몇 날 며칠 계단을 오르내렸다. 전단지를 1500세대 현관문에 일일이 붙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요령이 없던 탓에 다리가 붓고 팔이 무척이나 아팠다. 운동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던 내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면 운동이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한 푼이라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어렵고 힘든 순간이었다. 계단은 내가 성장하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의 용기와 의지를 자주 시험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여기, 계단 위가 맞는지, 현실적으로 자각할 때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찾아들었다. 한번은 복도 창문으로 감빛 노을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따뜻한 저녁밥을 해놓고 아이들을 기다려야 하는 시각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더욱 급해져서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다녔다. 눈앞에 펼쳐진 계단은 나에게 긴 여정을 거쳐야만 휴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때론 두려웠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남편과 두 아들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 보았다. 가족은 항상 내 곁에서 위안을 주는 존재고 나를 앞으로 계속 걸어가라고 힘이 되어 주었다. 가족의 사랑은 마치 그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넘어지지 않게 나를 비춰주던 빛과 같았다. 그 빛을 따라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며 성장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정의 막바지에는 가족의 사랑이 깃든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단지를 붙인 것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자 용기의 발현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이전에 전업주부로서 살던 내가 더 이상 아니었다. 한 명의 학생과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선생님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드디어 시작했다. 나는 지금, 쉬엄쉬엄 아파트 계단을 오르고 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다양한 형상의 계단을 무수히 마주할 것이다. 그 가파른 여정은 끝이 없겠지만 어려움과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나 자신이 허방을 딛지 않도록 서두르지 말고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가야겠다.

2025-01-15

장갑 한 짝

윤명희 수필가 오늘은 버스타고 출근한다. 어젯밤, 퇴근 후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즐긴 탓이다. 이미 출근시간은 늦었고, 버스는 한산하다. 내 차로 십오 분이면 도착할 사무실이 삼십 분이 지나도 아직 한참 더 가야 할 것 같다. 버스가 중앙시장에 정차했다. 시장의 아침은 번잡한데 버스에 오르는 이가 없다. 바쁜 내 마음과는 달리 운전기사는 문을 열어둔 채 정류장을 내다보고 있다. 검정비닐봉지를 든 백발의 할머니가 힘겹게 버스에 오른다. 한 발 오르고 다시 또 다른 발을 올린다. 걷는 걸음마다 바라보는 내가 숨이 찬다. “잠시만 잠시만요, 기사양반 내가 앉거든 출발 하세이” 손잡이를 꽉 움켜잡은 할머니가 당부한다. 계단에 발을 올리면서부터 운전석 바로 뒤의 의자까지 한 발자국씩 내 딛는 걸음걸이가 빙판길을 걷는 것 같다. 서너 발자국이면 닿을 거리가 멀기만 하다. 겨우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손에 든 검정비닐봉지를 발치에 놓는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할머니가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란 운전기사가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손가방이 없어졌다며 빈손을 들어 허둥거렸다. 운전기사가 황급히 핸드브레이크를 당겼다. 그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말을 연거푸 내뱉으며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정류장 의자 밑까지 가방을 찾아보는 그를 내다보았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있었다며 검정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헤쳐 보았다. 작은 손가방을 발견한 그녀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했다. 나는 못 본 척 눈을 반쯤 감고 있는데, 내 뒷좌석에 앉은 남자가 쥐어박을 듯이 혀를 찼다. 할머니가 차에 오를 때부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연신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혀를 찼던 남자다. 마지막 ‘에잉!’까지 따라붙는 남자의 말투에 속이 뒤틀렸지만, 어떤 사람인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 할머니의 모습이 나의 내일인 것 같은데 혀까지 찰 일인가. 얼마 전, 친구와 시골길을 걸었다. 추수를 끝낸 들판은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햇볕이 모인 논둑 밑에 한 무더기의 들국화가 보였다. 소담스러운 모습을 지나칠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내려보다가, 서리라도 내리면 시들어버릴 들국화에 욕심이 생겼다. 치맛자락을 모아 움켜쥐고 조심스레 내려가려 하자, 친구가 나잇값을 하라고 했다. 괜히 엎어지는 불상사를 만들지 말라는 말에 나는 바지만 입었다면 폴짝 뛰어내릴 수도 있다고 장담했다. 큼지막한 돌을 밟고 내려가면 될 것 같아 살짝 왼발을 내렸다. 몸의 무게가 오른 다리에 실리자 무릎이 시큰거렸다. 삼십 몇 년 전에 다쳤던 무릎이 요즘 말썽이다. 불편한 발을 먼저 내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오른 발끝이 돌에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논바닥에 가오리 엎어놓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의 경로는 기억에 없다. 왜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천천히 가고 있었다. 논바닥에 뺨을 붙인 채 일어서지를 못했다. 친구의 부축에 겨우 일어난 나는 비틀어진 안경보다 얼얼한 오른쪽 광대뼈에 먼저 손이 갔다. 얼굴에 상처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긁힌 무릎에 붙은 흙을 쓸어내리며 논둑을 쳐다보았다. 저 높이에 내가? 허방을 짚은 것도 아닌데? 치맛자락에 도깨비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친구는 가시를 떼어내며 걱정스레 살폈다. 바위를 이리 저리 뛰어넘으며 산을 오르던 순발력은 이미 나를 떠나고 없었다. 몸은 세월의 눈금만큼 정확하게 가고 있는데, 내 마음은 그 몸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젠 우리 나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유리조각이 되어 가슴에 빗금을 그은 날이었다. 버스가 서자, 혀를 차던 남자가 일어섰다. 나는 눈을 지그시 뜨고 그 남자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정수리가 휑한 그도 한발 내리고 또 한 발 옮긴다. 창밖을 내다보니 굽은 등이 허정거리며 가고 있다. 내 눈길이 따라간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하자, 갑자기 그가 돌아서서 허우적거리며 뛰어왔다. 장갑 한 짝을 든 손을 휘휘 저으며 ‘장갑, 장갑’이라고 외쳤다. 뒤돌아보니 그가 앉았던 자리에 한 짝이 놓여있다. 던져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버스가 천천히 달렸다.

2025-01-08

벼랑에 서다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울어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는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나 뵈옵기를 기우리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오.”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차출된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추모하여 읊은 모죽지랑가다. 한 때는 역사의 정점에 있었을 그들이다. 오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나무숲 사이 부산산성의 잔해는 겹겹이 쌓인 돌무더기로 남아있다. 옛날 군창지(軍倉址)며 우물과 연병장의 흔적으로 관문성(關門城)처럼 할석(割石)으로 쌓아도 세월의 풍화 속에 대부분 붕괴되고 일부분이 남아있다. 의상대사가 지은 주사암은 죽어나간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불사처라 불리기도 한다. 옛날 어느 왕녀가 밤마다 나갔다 돌아오니 왕은 수상히 여겨 그녀의 손에 붉은 주사를 칠해 놓았다. 이튿날 주사암 언저리의 암벽에 붉은 주사를 발견하고 승려를 급박한다. 그러나 승려는 많은 군사를 일으켜 봉변을 면하고 왕은 부처님의 보호를 받는 큰 승려라 여겨 국사의 자리에 앉힌다. 전설은 이름을 주고 오봉산 정상에 큰 바위 두 개가 사천왕상처럼 입구를 지키는 절하나 우뚝하다. 직사각형 네모진 바위가 벼랑 끝에 버티고 있다. 기암절벽은 산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낙랑장송과 떡갈나무 사이에 앉을 자리 좁은 산의 정상에 놀랍도록 펼쳐져 있다. 한때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사극 두어 편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며 이정표처럼 꽂혀있다. 말로만 듣던 바위에 서보니 세상이 눈 아래 보인다. 어깨를 서로 걸친 산들이 바위를 비호하며 바위를 향해 모두 올려다보는 느낌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명불허전의 마당바위에서 김유신은 보리로 술을 담았다. 천길단애의 위태한 곳에서 하필이면 수백 명의 화랑을 집결시키고 회의를 연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백 미터 아득한 벼랑이 아닌가. 보여주었으리라. 죽기로 마음먹은 자만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먹지 않으면 적의 칼에 희생될 터 눈을 부릅뜨고 벼랑을 대하듯 적을 베라는 강건한 마음을 전달한 것은 아닐까. 보리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마음에 진정한 신뢰와 우의를 다졌을 일이다. 배문경수필가 언제부터였을까. 마당바위 한 귀퉁이 촘촘히 돌들을 쌓아올린 공덕탑이 있다. 한 개 한개 쌓아올리며 그만큼의 소원도 함께 쌓았으리라. 정상으로 부는 바람에도 끄떡없이 소원은 빛을 발한다. 누군가 금줄을 쳐두었다. 천년 전 이곳에서 화랑의 도를 설한 자리 옆, 귀 밝은 돌이 그래 그래하며 침묵 속 동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풍월을 읊지는 않아도 속세의 시린 속마저 다 버리고 절벽과 마주한 사람들의 등을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산바람이 능선을 에돌고 장송의 솔잎사이를 비집고 나와 마당바위 귀퉁이에 정좌한다. 마당바위에 서니 세월 속 탁류가 그냥 지나가지는 않은 것 같다. 백성과 왕 그리고 장군이 나라의 하나 됨을 간절히 원했던 신라를 읽어본다. 마당바위에서 세상에 대한 갈급함이 만든 하나의 목적, 당시 시대를 지탱하는 화랑의 힘이었다. 우리에게 이 시대를 유지할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높은 산봉우리가 다섯 개라 오봉산이다. 다섯 봉우리에는 넓은 주름치마 같은 능선과 계곡사이로 여근곡(女根谷)이니 부산성(富山城)이니 주사산(朱砂山)과 유학사 등이 담겨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당바위에 올라 세상사를 내려다보고 민초들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는 긍휼은 마당처럼 넓고 넓음에서 온 것이리라. 산세가 수려한 이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노라니 조급증도 내려놓고 욕망도 내려놓은 채 젊은 유신이 따라주는 보리술 한 잔이 그리울 뿐이다. 마당바위에 서 보라. 삶이 절벽이라 돌아설 자리가 없는 이 곳에서 다시 한 번 더 시작을 각오하게 되리라. 정상의 바람이 푸른 기운으로 가득하다.

2024-12-25

서유당기(書遊堂記)

정미영 수필가 새뜻한 돋을볕이 어둠을 사르며 적막한 공간에 들어선다. 밤사이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소리도 없던 곳을 지배하던 절대 고요도 서둘러 아침에 자리를 양보하며 길을 떠난다. 여기는 어린이 도서관이다. 나는 ‘책과 노니는 집’ 즉 서유당(書遊堂)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어린이 도서관은 1979년 사직공원에 처음으로 생겼다. 1906년 평양에서 문을 연 최초의 공공도서관 ‘대동서관’이 지어진 뒤, 73년 만에 생겨났다. 어린이 도서관이라고 이름을 붙였어도 그때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종이로 된 출판물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교과서나 참고서, 동화책 등을 깨끗하게 읽고 선배가 후배에게, 형이나 누나가 동생에게 물려주던 때였다. 아마도 조용히 독서하고 공부하려고 이용했던 일반 공공도서관처럼 정적(靜的)인 이미지가 강했을 것 같다. 그에 비해 요즘 어린이 도서관은 동적(動的)이다. 책과 연계해 인형극을 보여주거나 작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영화를 보는 시청각실,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동아리방도 있다. 유아실에는 책을 가지고 도미노를 쌓는 아기들도 눈에 띄고, 소리 내어 읽어 주는 부모님도 있다. 모두 따사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책과 노니는 집이 아닐는지. 인생시계의 가을 중턱을 숨이 가쁘게 넘고 있는 나도 어린이 도서관에 자주 방문한다. 그곳에서 내가 책을 바라보는 마음은 별빛을 응시하는 것과 같다. 어두운 밤하늘을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바라보는 어린이들처럼 나의 눈동자도 책장 앞에서 지식의 환향(還向)을 꿈꾼다. 책들은 나에게 끝없는 발견의 여정을 약속하며, 상상력의 날개를 펴주는 비밀의 문으로 느껴진다. 나의 항로가 되고 책 속의 각 페이지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나침반과 같다. 호미곶을 마주하고 있다. 유달리 소금기 실린 바람의 인자들이 몸에 들러붙는 것만 같아 내 마음이 세차게 흔들린다. 땅 속 뿌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줄기를 찾듯, 독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도서관을 찾는다. 구룡포에 있는 폐교를 새로 단장해 개관한 바닷가 도서관이다. 운동장 벽면에 해초를 입에 물고 있는 거대한 고래 벽화가 있다. 바다가 아닌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요동친다.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는 나도 다시 자유를 되찾고 싶다는 열망이 고조된다. 나는 열람실을 향해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긴다. 서가 사이에 들어서자마자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 갈대를 엮어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파피루스를 떠올린다. 파피루스의 후예들인 종이책과 눈인사를 나눈다. 정갈하게 정리된 서가 사이를 오가며 서너 권의 책을 꺼내 들면, 작가의 소중한 글을 제각각의 공법으로 알차게 꾸민 출판사의 노력이 표지부터 물씬 전해진다. 책을 펼치면 주옥같은 언어의 황홀경이 펼쳐진다. 인생의 세밀한 구석들을 명증하게 들추어내는 책을 들여다볼 때면, 글을 쓰고 싶은 나로서는 자극을 받는다. 나도 우리네 인생사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깊은 울림을 주는 문체를 사용해 진솔한 작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내 글 속 청신한 문장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날아가 선명하게 돋을새김 되어 빛나면 좋으련만. 큰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잠시나마 무념무상 바라본다. 그러다가 ‘독서는 마음의 창문을 넓히는 여정이다.’라고 했던 노자의 말을 떠올린다. 그 창문을 열고 들어온 지식과 경험은 나의 내면을 더 넓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비결이리라. 나는 지금, 내면을 넓히고 삶을 풍요롭게 하려고, 서유당(書遊堂)을 거니는 중이다. 한 손에는 책이라는 나침반을 들고서, 내 생의 지도에 나만의 항로를 그려 넣는다. ※기(記)는 한문 산문 양식으로 성현의 말씀을 인용하고, 사실을 그대로 적는 글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록 문학이나 수필에 속한다.

2024-12-18

갈치 뼈 바르는 남자

윤명희 수필가 늦은 가을이 따뜻하다. 단풍 구경하고 오는 길에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시골 식당은 평소에는 농사일을 하는 외국인으로 줄을 잇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은 휴일이어서인지 한산했다. 나는 주문한 산채비빔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벽에 걸린 TV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래 앉은뱅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젊은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얼굴색이 까무잡잡한 젊은 남자는 스물 두어 살 쯤 되어 보였고, 자그마한 체구의 할아버지는 등이 굽어 코가 비빔밥 그릇에 빠질 듯 했다. 식당아저씨가 갈치찌개가 담긴 양은냄비를 그들 앞에 놓았다. 젊은 남자가 얼른 가장 굵은 갈치 토막을 골라 제 앞으로 가져갔다. 젓가락으로 능숙하게 뼈를 바르기 시작했다. 나는 갈치에는 관심 없이 비빔밥만 먹고 있는 할아버지와 뼈 바르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그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외국노동자와의 인연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가 가져간 굵은 갈치에 눈이 꽂혔다. 예전, 남편이 공장을 운영할 때였다. 용접한 구조물을 매끈하게 다듬는 일이 힘이 들어 직원들이 오래 견디지 못했다. 채용공고를 내자 베트남 청년이 왔다. 그는 어눌한 말로 숙소를 제공해 주어야 하고 인터넷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오래 함께 하고픈 마음으로 흔쾌히 약속했다. 발음하기 힘든 그의 이름을 꾸웽이라 불렀다. 꾸웽을 사무실 위층에서 거주하게 했다. 그의 요구대로 컴퓨터를 주문해 인터넷을 연결해 주었다. 3층은 넓어 방이 4개 있지만, 하나만 사용하라고 했다. 나는 청소할 빗자루와 밀대를 새로 장만해 건네주었다. 생활비나마 아끼라고 선물로 들어온 물품들을 따로 챙겨주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평소보다 일찍 출근 한 날이었다. 사무실 문을 여는 등 뒤로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떠들썩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애들이 몇 명 내려오다 우리를 보고는 멈칫했다. 멋쩍은 인사를 한 그들이 부리나케 공장 밖으로 나갔다. 남편과 나는 모른 척 눈을 감았다. 퇴근시간이 좀 늦은 날은 나이가 많은 남자들까지 대문 밖에서 쭈뼛거리는 게 보였다. 남편이 꾸웽을 불러 외부 사람을 공장으로 불러들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일요일 저녁,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다. 아침 일찍 방문하라는 말에 남편과 나는 서류를 챙기러 공장으로 갔다. 3층 거실의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창으로 많은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무실로 가는 입구 문을 열자 음악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3층을 바라보며 한참 서 있었다. 다음날, 남편은 꾸웽을 사무실로 불렀다. 더 이상 같이 일 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이야기하자, 그는 돈부터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가방을 챙겨 공장 문을 나서는 그를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3층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 바닥에 옷가지와 술병이 널려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기름 흔적과 음식 쓰레기가 너저분하고, 방마다 이불이 널려있었다. 3층을 대청소하면서 다시는 외국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생선의 가장 큰 토막을 제 앞으로 챙기는 남자가 꾸웽을 떠올리게 해서 씁쓸했다. 그런데 뼈를 바른 젊은 남자가 갈치 살을 할아버지 밥 위에 올려놓았다. ‘너나 먹어’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들렸다. 그 남자는 비빔밥을 퍼 먹으면서도 눈은 할아버지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밥을 떠 입에 넣자, 그는 다시 살을 집어 할아버지 숟가락에 올렸다. 할아버지는 그 갈치 살을 젊은 남자의 밥 위에 올려주고는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다. 다문화 가정의 손자인가 생각해봐도 젊은 남자의 피부는 완연한 동남아 태생으로 보였다. 도회지로 떠난 자식들 대신 할아버지를 돌보는 도우미인가?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농사를 놓지 못했던 건 아닐까. 농사로 이어진 인연이 갈치 뼈를 발라주고, 할아버지의 컵에 물을 따르는 사이가 되었을까. 할아버지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자, 젊은 남자가 호위하듯 바짝 붙는다. 식당 문을 열어주고, 신발까지 챙겨주는 그를 보고 또 보았다. 낡은 화물차에 오른 그들이 식당마당을 나서자, 신작로의 노란 은행잎이 그들 뒤를 따라간다. 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다.

2024-12-11

늠내

피귀자 수필가 조용한 수런거림이 물처럼 흐르다가 불처럼 타오른다. 설악산 단풍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월 말경이면 새로운 지도가 태어난다. 잠긴 수문을 풀듯 흘러내리며 금빛계절을 알리는 단풍지도. 남쪽을 향하여 달리다가 제주도를 거쳐 무등산까지 이십 여일이면 한반도를 점령해버린다. 단풍의 달리기를 바라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뻗어가는 땅이란 뜻의 ‘늠내’라는 단어다. 넓어지는 땅이라면 먼저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땅따먹기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공깃돌을 두 번 튕겨서 한 뼘의 기본 땅 속으로 되돌아 들어오면 그 영역은 모두 내 땅이 되던 기억이. 가진 땅이 빠르게 넓어지듯, 안개가 퍼지듯이 단풍은 이제 동네까지 내려왔다.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제각각 종을 울린다. 길 떠날 준비를 하는 생명들의 두런거림이 세를 불리며 환청처럼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낸다. 바야흐로 단풍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단풍 중개 소식에 따라 구경꾼은 점점 늘어간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톨스토이 단편은 생각하게 하는 바가 크다.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가지게 된 가난한 농사꾼 바흠은 그 후 욕심이 생겨, 어떤 곳에서 땅을 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의 판매 방법은 독특하였다. 하루 종일 걸어서 해가 지기 전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면 그 둘레의 땅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들판을 달렸다. 해가 질 때 겨우 출발했던 지점에 약속대로 돌아왔지만, 욕심이 컸다. 너무 먼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그만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죽은 뒤에 넓은 땅이 무슨 소용이랴. 그 농부가 묻힌 땅은 겨우 사방 7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작은 구덩이에 묻히면서, 죽어버린 몸이기에 후회도 원망도 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이렇듯, 사람은 한 평생을 달려도 누구나 70센티미터 정도의 땅 속에 묻힐 따름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 우리는 누가 시키든 안 시키든 달려야 한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힘껏 달린다. 온갖 힘과 지혜를 짜내고 그래도 모자라면 남을 속이고 밀어내며 좀 더 나은 땅,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하려고 달리고 달리는 이들도 있다.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애쓰고, 힘을 기르는 이유는 더 좋은 땅을 많이 차지하려는 달리기 내기가 아닐까. 땅따먹기 놀이도 마찬가지였다. 욕심을 내어 공깃돌을 너무 멀리 튕긴 후 좁은 본부로 다시 튕겨 넣으려면 밖으로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기회는 날아가 버리므로 욕심내지 말라는 뜻이 담긴 놀이가 아닌가 한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일찍 깨달은 탓일까. 아직도 땅에는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생존 경쟁, 삶은 전쟁이 아닌가.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한 평화는 쉽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나무의 생존경쟁은 다르다. 다른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다.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요. 내려놓기이며 물러서기다. 나무는 제자리에서 세월을 맞으며 맡은 책임을 다하려 모진 풍상을 견뎌내느라 잎은 벌레에 파 먹히고 바람에 쓸리며 피멍으로 에둘러 있다. 그것이 바로 단풍인 것을. 쓰라림 없는 결실이 어디 있으랴만 아픔을 이기며 내려놓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것. 역경 속에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만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나뭇잎은 내년을 기약하며 한걸음 물러서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바로 사유의 급전환이다. 사유의 전환을 거쳐야 비로소 더 높은 곳에 설 수 있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색으로 이어지고, 그 색 따라 피고 지고, 지고 피며 사람도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단풍처럼, 내려놓을 때를 아는 나무처럼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들. 경쟁하며 넓혀온 땅을 한순간에 내려놓으며 욕심을 버린 사람들이 존경받는 이유다. 내려놓기 위해 세를 넓혀가는 단풍처럼 사람도 물욕이 아닌 인류를 위한, 또는 자기발전을 위한 소양의 늠내는 넓힐수록 좋으리라. 다가오는 새해에도.

2024-12-04

흔적은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되고

정미영 수필가 길을 걷다가 강아지가 단풍잎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단풍잎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강아지 주변을 맴돌았고, 강아지는 잎사귀가 장난감인 듯, 꼬리를 흔들며 뛰어올랐다. 그 작은 생명이 온 마음을 다해 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미소가 번졌다. 그것도 잠시,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인이 키우던 개가 생각났다. 개의 이름은 나미로 11살이었는데 사람 나이로는 78세였다. 나미는 지인이 키우던 두 번째 개였다. 한 번 상실의 아픔을 겪고는 두 번 다시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들어온, 작은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미는 그녀의 친척이 키우던 개였다. 친척이 병에 걸려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녀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다시 반려견과 살게 되어 너무 좋았단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이가 많은 나미와 얼마 못 가서 이별하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생을 마감할 것이므로, 자신의 품에 있을 때 많이 사랑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말로 나미를 정성껏 돌봐주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해 주었다. 나미도 진심을 느꼈는지, 그녀의 곁에서 한없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세상에 지쳐 돌아오면 조용히 다가와 손을 핥아 주었고, 그녀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믿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그녀 집에 온지 2년 하고 반년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나미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했는데, 수의사 선생님께서 나미가 구강암에 걸렸다고 했단다. 친척도 몰랐던 이야기여서 그녀는 많이 놀라고 당황스럽고 슬펐다. 병원에서는 나미가 항암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기적을 바라며 항암 주사를 맞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나미가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안타깝게도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생겼다. 항암 주사를 맞는 개들에게는 2개에서 3개씩 부작용이 올 수 있단다. 그런데 나미에게는 개가 걸릴 수 있는 모든 부작용이 와버렸던 것이다. 나미는 점점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잘 먹던 사료도 안 먹고 좋아하던 소시지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나미를 지켜보던 그녀의 시간은 외로움과 아픔의 순간들로 가득 차올랐다. 그 작은 몸이 항암 치료의 부작용에 힘겨워하던 모습은 그녀를 절망감에 물들게 했다. 나미의 삶이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그녀는 눈물로 하루를 적셨다. 나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날,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단다. 이제 그만 고통 없는 곳으로 가라고, 먼저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말을 마치자마자 나미는 눈을 감았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 안 구석구석에는 나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미가 좋아하던 담요는 아직 소파 위에 있었고, 간식 그릇은 부엌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쉽게 흔적을 지울 수가 없단다. 아니, 지우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추억들이 햇살처럼 쏟아져 내릴 때가 있단다. 기뻤던 순간, 슬펐던 순간이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선택할 여지가 없이, 무방비로 떠오르는 순간이 있기에 아직은 흔적을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나미를 돌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흔적들은 그녀에게 단순한 기억 이상의 것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 나름대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이 내 옆에 머무르는 시간이 아니라, 그 존재가 내 삶에 남긴 흔적과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미가 남긴 흔적들은 지금도 그녀의 삶을 감싸고 있다. 그녀의 인생길에 허방이 많을지라도 추억이 응축된 사랑의 흔적들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녀가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되어 주리라.

2024-11-27

왕릉에서

배문경수필가 진평왕릉은 밤새 내린 서리와 안개에 젖어 천 년 전 역사조차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 같다. 실제의 사물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처럼 이곳은 신이 아니고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다. 밤새 호위무사 한 명 없이 저 큰 능에서 벗어나 달밤에 홀로 느티나무와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眞平王)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으며 지혜롭고 의지가 굳고 밝고 활달했다.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天柱寺)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러지기도 했다고 하니 대단한 풍채를 지닌 왕이었나 보다. 그러니 무엇이 두려웠을까. 멀리 개 짖는 소리 컹컹 들린다. 늠름했을 그의 위엄이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을 터, 맞은편 낮은 산 와상부처가 지켜주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며 들이 울리게 웃음소리 요란했겠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은 뒤에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진평이 왕위에 올랐다. 진평왕은 행정조직을 정비해 왕권을 강화했다. 능을 바라보며 서리 내린 잔디를 밟고 서서 왕릉을 바라보는 사이 후배가 도착했다. 함께 선덕여왕길을 걷는다. 경주 숲 머리 길이라고도 부르는 이 길은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까지 이어진다. 봄이면 겹벚꽃이 풍성한 길이고, 가을은 단풍이 아름답다. 맨발 걷기를 하도록 길을 조성해 산책로로 그저 그만이다. 우리도 잠시 선덕여왕이 되어 걸어본다. 누가 비질을 했는지 걷는 길은 낙엽이 쓸려 있다. 늦가을 정취와 초겨울이 맞닿아 차고 신선하다. 힘들던 시간이 박하사탕처럼 싸하니 입속이 맑아진다. 한동안 안부를 묻지 못했으니 이야기는 많고 길다. 각자 짧든 길든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였고 힘들고 벅찬 일들이며 즐거운 개인의 나날이 걸음의 보폭만큼 넓게 좁게 이어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래서 고마운 것. 나날이 보태져 오늘을 있게 했으니. 앞선 사람들이 먼저 명활산성에 도착했다.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 등과 함께 신라 경주의 동쪽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왜구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성곽이고, 유사시 왕성의 역할을 했다. 선덕여왕 때에는 비담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고 한다. 돌무더기를 보며 과거의 흔적 일부를 보며 끄덕끄덕 수긍한다. 역사 속 그들은 그 시절의 주인공이다. 이제는 낮은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이 최선이었으리라. 이미 흩어진 이름들의 공허와 삶의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우리는 돌아서서 진평왕릉으로 다시 왔다. 차에 싣고 온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는 커피 믹스를 종이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붓고는 접이식 의자와 테이블을 꺼내 간단한 브런치와 커피를 즐긴다. 왕릉을 바라보는 오늘과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왕릉의 고요와 두런두런 삶의 이야기가 하모니를 이룬다. 진평왕릉은 다른 신라왕릉과 달리 산이 아니라 논밭에 둘러싸였다. 산에 자리한 능이 둘레에 소나무가 섰다면 이곳은 물길을 둘렀다. 시냇물 같은 해자가 논과 능을 구분한다. 그래서 경주의 가을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에 오면 남산을 넘어오는 아침노을을 감상할 수 있고, 저녁이면 해의 긴 그림자가 능 주변을 붉게 서성인다.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나는 유적지가 아니라 조용히 가족 단위로 피크닉 바구니를 펼쳐 소소한 소풍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왕과 여왕의 이야기들이 풍성한 이곳, 왕릉을 곁에 두고 사는 경주 사람의 복이다. 역사가 가득한 유적지 곁에서 우리는 오늘의 나의 역사를 쌓아가면 된다. 커피가 식는 사이 안개는 걷히고 햇살이 눈부시게 얼굴을 비친다. 오늘 우리의 소풍이 끝나가고 있다. 다시 올 때는 조금 더 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그는 정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오래전 일이라 더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들릴 것이다.

2024-11-20

어린 고래의 눈물

윤명희 수필가 잔디를 비집고 올라온 잡초를 뽑는다. 남편은 말없이 포와 과일로 간단한 상을 차린다. 오늘은 아버지의 봉분을 흠뻑 적실 술을 두병이나 준비했다. 잔을 채운 술이 넘쳐흐른다. 어릴 적 나는 제삿날만 되면 불안했다. 그날이 오면 일부러 바깥에서 오래 시간을 보냈다. 어스름한 시간에 대문을 들어서면, 마루 끝에 술 취한 아버지가 먼저 보였다. 제사음식 준비를 끝낸 엄마는 부엌에서 서성거렸고, 동생들은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숨죽였다. 나는 저녁밥도 거른 채 아버지의 눈을 피해 내 방으로 들어갔다. 열시가 넘어가자, 제주(祭酒)를 든 삼촌이 들어섰다. 삼촌을 본 아버지의 코끝이 실룩거렸다. 동경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이다. 형이 둘이 있었고 맨 위로 누나가 있다. 아버지가 아홉 살 되던 해, 해방이 되었다. 공부하는 두 형을 동경에 남겨둔 채, 할아버지는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대구 칠성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현해탄 길에서 열감기로 아래동생을 잃고, 막냇동생만 남았다. 낯선 곳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누나가 멀리 시집을 가고, 어린 아버지는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다. 이별은 급물살로 휘몰아쳤다. 어머니를 잃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다고 한다. 세 살 박이 막내의 엄마 찾는 소리만이 집안을 떠돌았다. 장례 치르러 온 큰형은 해야 할 공부가 남았다며 작은 형과 동생들을 남기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아버지는 작은 형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온 식구가 동경에 살았을 때, 형들은 언제나 든든한 파수꾼이었다. 합기도를 잘하는 형들이 있어 조센징이라고 놀리는 일본 아이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마지막 버팀목인 작은형마저 떠날까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밤, 어린 아버지는 대문 흔드는 소리에 잠이 깼다. 마당이 달빛으로 환했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버지는 문턱에 서서 파자마와 흰 러닝셔츠차림인 작은형의 뒷모습을 내다보았다. 대문 여는 소리와 동시에 형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건장한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형을 보았다. 대문 앞에 떨어진 형의 신발 한 짝을 손에 든 아버지의 우는 소리가 골목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깨어난 막내의 울음소리가 마당까지 따라 나왔다. 작은형은 그렇게 꿈처럼 사라졌다. 이별의 무게에 눌려 숨도 쉴 수 없었다. 갑자기 홀로 남겨진 아이는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이 혼자서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일곱 살 무렵이었다. 우리 집에 소포꾸러미가 배달되었다. 아버지의 큰형, 한 번도 보지 못한 나의 큰아버지 이름이었다. 꾸러미에는 옷, 양말, 생필품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에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큰형이 사진으로 왔다. 사진 속 큰형의 가족은 아이까지 모두 정장차림이었다. 그들이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쓰레기장에 처박아 버렸다. 세파를 혼자 헤쳐 나온 아버지는 그 사진에서 버려진 자신을 본 것은 아닐까. 돌아가시는 날까지 형의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제사 모시는 시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본에 사는 형 집에 가기 전에 먼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밤 11시가 되면, 벽에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급하게 일어섰다. 제사상을 차리고 지방까지 써 붙였다. 나는 얼른 빨랫줄을 걷고 대문을 열었다. 삼촌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을 켰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선 아버지의 얼굴이 곧 울음이 터질 기세였다. 절을 할 때마다 이마를 손등에 댄 아버지는 일어서지 못했다. 일어서던 삼촌이 다시 엎드려 곁눈질로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를 살폈다. 아버지의 등이 한참동안 들썩거렸다. 아버지는 해마다 제삿날이 되면 종일 술에 취해있었다. 눈물로 할아버지 할머니께 어린 동생들을 유기한 큰형을 일러바치던 그 날은 막냇삼촌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내가 큰아버지의 가족조차 뵐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세 살짜리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험난하고 외로운 항해를 해야 했던 어린고래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제야 뒤늦게 아홉 살의 아버지를 가슴으로 깊이 껴안는다. 남은 술을 병째로 봉분에 부어드린다. 오늘은 실컷 드시고 취해도 괜찮다. 봉분에 볼을 대고 가만히 쓸어안는다. 볼에 닿는 잔디가 아버지 수염처럼 깔끄럽다.

2024-11-13

찹쌀새알미역국

정미영 수필가 어제부터 세찬 바람을 동반한 가을비가 내린다. 나무가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불자, 그 결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낙엽 때문인지 거리가 온통 가을로 꽉 찬 느낌이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린다. 갑자기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어 냉장고 속 음식 재료를 살펴본다. 냉동실에 얼려 둔 새알이 눈에 띄어 미역국을 끓이기로 마음을 정한다. 황태채와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볶는다. 물을 부어 한참을 뭉근하게 끓이면서 찹쌀로 빚은 새알과 들깨가루를 넉넉하게 넣는다. 나는 새알이 퍼지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에 쫀득해졌다 싶을 때를 기다렸다가 가스레인지 불을 끈다. 알맞게 끓여진 국을 대접 한가득 담아낸다. 그런 뒤에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는다. 맛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친정어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끓여보아도 매번 친정에서 먹던 그 진한 국물 맛은 아닌 것 같아, 왠지 야속하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감기에 걸리면 ‘찹쌀새알미역국’을 끓여주셨다. 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 먹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젖었다. 그러면 감기약을 먹지 않아도 몸이 낫는 것 같았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근심이 버무려져 음식에 담겼기 때문이리라. 나는 아직도 몸이 아프거나 입맛이 없을 때면 ‘엄마표’ 음식이 생각난다. 대학을 졸업한 큰아들이 있는 데도, 내 나이에 상관없이 친정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엄마, 하고 나지막하게 불러보면 결혼 전의 내가 떠오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면서 위로가 된다. 지난여름,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서문시장에 갔다. 나는 요즘 대형마트에 가면 온갖 생필품과 음식 재료가 많아 재래시장을 찾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모처럼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면서 장터를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 했다. 내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동네 골목시장이 아닌 서문시장 정도의 큰 시장에 가야,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할 수 있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빨리 흘렀다니, 새삼스러웠다. 볼일을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보리밥집으로 가서 등받이 없는 긴 벤치 모양의 의자에 앉았다. 자리가 나면 순서대로 앉아야 할 만큼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메뉴를 보던 친정어머니께서 새알미역국을 주문하셨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친정어머니는 “너희 외할머니는 내가 기운이 없으면 찹쌀새알미역국을 끓여주셨는데.”라고 말씀 끝을 흐리셨다. 그 순간 내 가슴에 찌르르 전율이 흐르며 아렸다. 살면서 생활에 지치거나 힘이 드는 순간이면 나만 엄마가 필요한 줄 알았다. 그런데 팔순을 앞두고 있는 친정어머니께도 돌아가신 ‘엄마’가 필요한 모양이다. 엄마라는 낱말이 갖고 있는 대단한 힘인 것 같다. 실존하지 않는 분이라도 호명하자마자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온몸의 감각 세포를 일깨우는 것임에랴. 예전에 친정어머니가 내 외할머니를 찾아뵈러 갈 때면 손수 미역국을 끓여주셨다고 했다. 국물에 들깨가루를 듬뿍 넣어 주셨다던 외할머니 손맛의 미역국! 첫아이를 유산하고 몸조리를 제대로 못한 채 일상 생활해야 했던 나의 어머니를 한평생 가엽게 여기셨던 외할머니셨다. 친정어머니가 몸져누울 때마다 “그때 미역국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어서 그렇제.”라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면서 찹쌀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나면 근기가 있어 속이 든든하다고, 일부러 찹쌀로 새알을 빚어 미역국을 끓여주셨단다. 그래서인가. 친정어머니는 내가 삼 남매를 출산할 때마다 미역국은 잘 챙겨 먹었는지부터 물어보셨다. 외할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건강을 챙기라는 당부의 말씀이었다. 아프고 기운이 없을수록 끼니를 든든하게 챙겨먹어야 한다는, 당신들이 체득한 금언 속에는 찹쌀새알미역국이 포함된다. 그것은 우리 집에서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세대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매개체다. 나는 찹쌀새알미역국을 먹을 때면 그분들의 사랑을 느낀다.

2024-11-06

초대하지 않은 손님

피귀자 수필가 텔레비전에 흐르는 자막처럼 황금 들판이 지나간다. 풍성한 차창 밖의 풍경에 저절로 자동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네모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논 속의 벼들이 옹골차게 익어가는 모습은 농부가 아니더라도 배가 부르다. 오래보아도 질리지 않는 따뜻한 풍경. 저리 윤나게 가꾸자면 농부의 다리는 더 가늘어지고 손은 더 거칠어졌을 게다. 한집의 논인 냥 고르게 익어가는 들판에 유독 삐죽 올라온 식물이 눈에 띄었다. 고개 숙인 벼보다 한 뼘씩은 높이 고개를 바짝 쳐든 것은 바로 농민들의 골칫거리, 벼의 천적 ‘피’였다. 꽃보다 더한 열정으로 꽃밭을 점령하는 풀처럼 위세가 당당했다. 서로 다른 목소리로 합창이 되지 못하는 논. 피가 벼보다 키가 큰 이유는 햇빛을 많이 받으려고 경쟁하듯 키를 키운다는 것이다. 가을이 익으면 우수수 몸부림치며 흘러내릴 저 몸, 내년을 더 걱정하며 어떻게 저 논에만 피가 저리 많을까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농부가 게으른 탓인가, 약을 치지 않고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게 아닐까, 설전이 이어졌다. 딸의 긴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있는 흰 머리카락이 벼논의 피처럼 바짝 고개를 들었다. 아직 흰머리가 생기기엔 젊은 나이인데 임신을 하고 해산달이 가까워 몸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가 되니 더 도드라졌다. 오죽 힘들면 저리 되었을까 눈이 아리다. 골고루 챙겨 먹지 않으면서 영양분을 나누느라 머리카락까지 저리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소화가 되지 않았다. 저릿한 마음을 사위 앞이라 내색도 못하고 자꾸 딸의 머리만 쓸었다. 큰 외손자가 아홉 살이 되도록 동생을 보지 않아 무던히 애를 태웠었다. 아이 하나도 제대로 키우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라며 둘째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아, 그래도 둘은 되어야 한다고 타일러 보았지만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돈댁에서도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고 남편도 본인은 뒷전에 있으면서 나를 통해 채근을 하는 세월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라는 더딘 처방, 완화 처방이 효과를 보아 모두 감사하고 기뻐했는데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은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해산일이 가까워지자 앉기조차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써 봐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대신 해줄 수 있는 집안일과 큰손자 보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둘째 손자를 안자 힘들었던 시간은 사라지고 웃음이 떠나지 않고 활짝 핀 꽃이 되어 켜를 이룬다.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 끝나고 걸어온 길에 흔적 하나를 더 보탠 딸네 가족의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셋보다 넷의 조화가 뿌듯하다. 딸이나 사위도 참 잘한 선택임을 뒤늦게 기뻐하고 있다. 갓난아기가 뿜어내는 기쁨의 파동이 온가족을, 친척들까지 들뜨게 한다. 연일 소리 없이 봄이 핀다. 봄바람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연한 살결의 손자는 쌔근쌔근 잘 자고 엄마 젖도 잘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란다. 하지만 수유 때문에 염색도 못하니 한숨을 먹으며 자란 흰 머리카락은 얼굴이 점점 더 커져간다. 드디어 딸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해산 후 어느 정도 지나면 일어나는 현상이라지만 쓸어낼수록 늘어나는 긴 머리카락이 애잔한데 빠지는 건 검은 머리카락뿐이다. 흰색은 뻣뻣이 나 여기 있소, 기세가 더욱 등등하다. 익어가는 벼논의 불청객 피를 보는 농부의 마음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날마다 빠지는 검은 긴 머리카락을 치우며 흰 머리카락이나 빠지길 바라지만 어쩌랴. 그 흰 머리카락마저 귀해질 때가 오리니. 검고 희고를 떠나 빠지는 자체가 애석해질 때가. 벼논의 제초제처럼 흰머리에는 염색약이 있지 않은가. 먹을 것이 귀한 시절엔 요긴한 먹을거리가 되기도 했던 피(陂). 하지만 요즘은 천덕꾸러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된 지 오래다. 농부가 얄미운 피를 뽑듯 뽑아버리고 싶었던 딸의 흰 머리카락. 하지만 한 때는 찬 가슴 데워준 열정의 몸, 나이가 부피를 키워갈수록 염색할 수 있는 그 흰 머리카락마저도 소중해진다지 않은가. 부풀렸던 마음속 미운 풍선을 터트리기로 했다.

202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