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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에 물들다

경북매일
등록일 2025-06-04 19:54 게재일 2025-06-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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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경 수필가

자신의 색깔을 찾아서 술래가 된 친구에게 간다. 쪽빛 바다를 감고 골짜기를 굽이도는 길에 설렘이 일렁인다. 푸른 산 기스락에 도착하자 어느새 서녘이 노을빛으로 물든다. 민낯으로 반기는 친구의 얼굴이 비 갠 하늘처럼 말갛다. 흙빛이며, 먹빛이며 밤 이슥하도록 나누는 이야기에 별빛이 반짝 내려앉는다.

별이 사그라진 무렵, 친구가 나를 깨운다. 눈 밑에 덕지덕지 붙은 잠을 새벽바람이 몰아낸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밤새 물을 빨아올린 쪽에 자줏빛이 촉촉이 올랐다. 연보라 꽃을 한 두 송이 물고 있는 쪽은 아침이슬까지 머금어 색깔이 절정에 이르렀다. 햇살이 꽃눈을 틔우는 봄부터 풀빛 바람이 산모롱이를 에도는 여름까지 오롯이 쪽에 담겼다. 친구가 두 계절을 낫으로 베어 내게 한 아름 안긴다. 풋풋한 풀냄새를 맡자 온몸에 쪽빛이 번지는 것 같다.

친구가 소매를 걷어붙인다. 쪽을 맑은 물로 헹군 다음 항아리에 반쯤 채운다.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 위를 돌로 지그시 눌러둔다. 비닐로 덮고 숨구멍을 뚫어주면 다음은 기다림이다.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간 쪽은 체액을 배출하고 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둘은 끊임없는 교감을 나눈다. 땅을 달구는 태양열에 쪽이 발효되면서 물은 그 빛을 온전히 수용한다. 어둠 속에서 쪽과 물이 하나가 되고 다시 빛이 들면 쪽은 색깔로 자신을 말할 것이다.

여유를 즐기는 것도 산골의 일상 가운데 하나다. 뜨거운 물을 다기에 부어 작년에 말려둔 국화차를 우려낸다. 친구가 산골에 들어와 해와 달의 주기에 맞추기까지 사계절이 세 번이나 순환했단다. 염료를 구하려면 때를 맞춰야 하고 그 색깔을 우려내려면 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도시에서 묻은 때를 씻어내면서 시나브로 자연에 물들었다. 국화차 한 모금 머금자 정겨운 담소에 노란 향기가 더해진다.

며칠 묵힌 항아리를 연다. 쪽잎에서 녹색 기운이 사라질 즈음 한 번 뒤집는다. 첨벙첨벙 물이 흔들리면서 쪽은 바깥공기로 숨을 쉰다. 어둠에 싸여있던 쪽은 그제야 한 줄기 빛을 받아 물에게 자신의 빛을 내놓는다. 마지막까지 제 몸을 우려낸 쪽을 건져 항아리 위의 횃대에 걸친다. 늙은 부모의 속살처럼, 쪽은 이제 알갱이는 물에 내어주고 쪼그라든 껍질만 남았다. 자신의 가치를 빛깔로 남기면서 할 일을 다 한 쪽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암녹색 물에서 풀냄새가 풍긴다. 패각회를 항아리에 넣고 대나무로 휘젓자 기포가 생긴다. 바가지로 퍼서 고운체에 거르자 찌꺼기가 물과 분리되면서 쪽빛은 본연의 색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심연의 색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듯 항아리 속의 물을 퍼 올린다. 잿물을 넣어 쪽 발을 세운 다음 미리 빨아놓은 천을 조금씩 담근다. 천으로 옮겨가는 물은 처음에는 녹색으로 보이다가 건져내면 청색으로 변하는 마법을 부린다. 적시고 말리기를 거듭할수록 쪽빛은 더욱 깊어진다.

둘이 마주서서 천을 길게 펼쳐든다. 친구와 나 사이에 쪽빛 길이 난다. 생명의 기원인 바다, 바다색에서 남색 그리고 감청색까지 점점이 깊어지는 색은 볼수록 신비롭다. 처음에는 하늘색이다가 바다색으로 변한다. 깊이를 더한 쪽빛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심연에 닿아 꿈의 색깔이 된다.

내 본연의 색깔은 무엇일까. 이십대를 지나면서 빛이 바래다가 엄마가 되면서 유년의 색깔은 흔적 밖에 남지 않았다.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보면 물색이기도 하다가 더러 사라진 꿈의 색깔이 희미하게 스치기도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쪽처럼 친구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색을 펼치고 있다. 자신을 다 내 놓고 영혼을 우려내야 완성되는 빛,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진 쪽빛은 내일이면 더욱 짙어질 것이다.

천을 펴서 빨랫줄에 널고 바지랑대를 높이 세워 바람을 부른다. 천이 만장처럼 펄럭이자 바람조차 푸른빛을 머금는다. 바람에 실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가면 나의 빛깔을 찾을 수 있을까. 바다로 뛰어들어 수면 아래로 유영하다가 심연에 닿으면 태곳적부터 내려온 그리움의 색을 만날 수 있으려나.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쪽빛이 아닐까. 오늘은 내 마음도 쪽빛으로 물든다.

/배문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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