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를 밀고 들어오는 남자의 얼굴이 환하다. 공인중개사인 내 사무실에 그는 가끔 아이를 데리고 온다. 유모차에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이를 내려놓자, 아이는 탐색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손녀를 바라보듯이 웃었다. 가끔 보면서도 아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빠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숨는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더니 아랫입술이 삐죽이 나온다.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다. 나는 얼른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물기가 그렁한 눈도 잠시, 아이가 아빠의 품에서 내려선다. 우리 사이의 낯선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아이는 의자를 당기더니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올린다. 금방 시들해졌는지 의자에서 내려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걷는 걸음마다 노랑병아리 소리가 따라다닌다. 아이를 쫓아다니는 남자의 눈이 깊다. 그는 아이의 뺨에 제 얼굴을 갖다 대고는 붕어빵 같으냐고 묻는다. 그는 만날 때마다 그렇게 묻는다. 꼭 닮았다고 하자, 그가 웃었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덤프트럭 운전을 하는 그는 한쪽 다리를 약간씩 절었다. 늘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 차림이었고, 마흔 조금 넘었을 뿐인데 쉰도 더 되어 보였다. 혼자 오래 살아왔던 그가 일이 끝나고 불 켜진 집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아이를 갖는 게 소원이지만 나이가 열 몇 살이나 적은 필리핀 아내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더 욕심내다 이 순간마저 날아갈까 싶어 포기한다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의 집을 보러 갔을 때였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을 연 그녀는 재봉 일을 하고 있었다. 재봉질 해 놓은 천들이 작은 방 한 가득이었다. 바닥에는 일감과 먼지가 굴러다녔고, 2인용 식탁 위에는 빈 컵라면 그릇에 빵 봉지가 구겨진 채 있었다. 개수대에는 음식물이 말라붙은 냄비와 그릇들이 포개져 있고, 그 아래에는 빨래 바구니에 미처 담기지 못한 양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면 종일 재봉틀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손님인 나를 보지 않고 눈길이 자꾸만 재봉틀로 가는 그녀는 주인이 아니라 잠시 일 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가 언젠가는 자기 고향으로 가 버릴 것 같아 며칠을 고민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진 재산이 얼마쯤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전혀 거리낌 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내 옆에 앉아 미주알고주알 통장 내역을 털었다. 두꺼비같이 헌 집 주고 새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사 하는 날, 그녀에게 새 집에서 예쁜 아기 낳아서 잘 살라고 했다. 그녀는 그의 뒤로 숨으며 더듬거리는 말로 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같은 동네주민이 된 그들은 종종 우리 사무실에 들어와 직접 커피를 타 마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닐봉지에서 사과를 꺼내 내 손에 건네주며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고 했다. 축하한다는 달뜬 내 말에 그는 ‘남들 다 낳는 데요’ 라며 쑥스러워했다.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쉬는 날 없이 일을 해도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매화꽃이 막 필락 말락 하려던 날 저녁, 산책길에서 만난 그가 휴대폰을 쑥 내밀었다. 폰에는 아기 사진으로 가득 찼다. 나는 길가로 물러서서, 입을 오물거리는 갓난아기의 동영상까지 보고 또 보았다.
“다들 날 닮았다 그래요”
내 옆에 붙어 서서 아기사진을 보는 그의 눈이 빠져들 듯 했다. 그는 가끔 내게 또 다른 사진들을 보여주었고, 또 가끔은 아기를 보여주러 유모차를 끌고 왔다. 볼 때마다 아이는 부쩍 자랐다.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를 지켜보며, 그는 며칠 전에 필리핀에서 장인장모님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딸이 사는 걸 보고 기뻐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이제 둘째 낳아야지?’ 라고 하자, 그가 또 웃었다. 집사람이 얼마나 씻고 닦고 하는지 피곤하다는 말이 행복의 비명처럼 터져 나온다. 세월이 거꾸로 가고 있다. 그는 이제껏 보아 온 중에 오늘이 가장 젊어 보인다.
엄마가 기다리겠다는 그의 말에 아이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간다. 앞만 보고 걷던 아이가 뒤돌아서서, 내게 뽀얀 손을 흔든다. 햇살 같은 웃음을 보여주고는 종종 걸음을 이어간다. 빈 유모차가 바삐 따라간다. 나는 그들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 갈 때까지 마주 흔들던 손을 내리지 못하고 한참 서 있다. 딸을 앞세우고 가는 그의 등에 봄볕이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