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쩍’ 배추의 단말마. 배추를 가르던 손이 멈칫한다. 칼날아래 꽉 찬 속살이 환하다. 뽀얀 줄기 끝에 오글오글 노란 잎들이 아기손가락처럼 꼬물거린다.
자른 배추를 씻긴다. 갓난아기를 다루듯 연한 잎사귀가 부서지지 않도록 살살 달랜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지르고 다리와 발가락까지 꼼꼼히 헹군다. 흐르는 수돗물에 샤워를 하듯 여러 번 헹구자 반짝반짝 빛이 난다. 속살이 달작지근한 통배추는 어디에서 자라다가 우리 집까지 오게 되었을까. 어느 하늘 아래의 정겨운 바람과 따뜻한 대지의 숨결을 마셨을까.
부모님 보호아래 곱게 자라다가 시집온 새댁처럼 뿌리가 뽑힐 때의 아픔 또한 다르지 않았으리. 옮겨 앉은 자리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살이 찢기는 해산의 고통을 맞이한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땅에서 한번 뽑힐 때 까무러치고 속이 갈라질 때 두 번째 기절한 것까지도.
커다란 다라에 물을 받고 굵은 소금을 녹인다. 음식에 간을 맞추듯 조심조심 휘저어 간을 본다. 너무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배추가 세 번째 기절할 순간이다. 갈라놓은 배추를 소금물에 풍덩 넣었다가 한 잎씩 들춰가며 굵은 소금을 뿌린다. 소금물에 빠져서 재채기에 콧물까지 정신이 없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얀 소금을 뒤집어쓰니 닿는 자리마다 속살이 따끔거린다. 시댁 식구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소금을 뒤집어 쓰 듯 불편했던 새댁처럼. 소금이 들어앉은 켜켜이 퍼덕거리던 교만이 고개를 떨군다.
소금 세례를 마친 배추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지그시 누른다. 원망과 불평이 함께 소금물 속에 잠긴다. 절인 배추는 하룻밤을 자고나면 알맞게 숨이 죽을 것이다. 소금을 더 뒤집어쓰기 싫으면 욱하는 성질을 죽이고 외고집도 줄여야하리. 외롭지 않으려면 옆 지기와 살갑게 지내고 내편도 만들어야 할 게다.
되직하게 쑨 찹쌀 풀에 멸치액젓과 고추 가루를 함께 섞는다. 걸쭉한 빨간 옷이 마련되었다. 무채를 썰고 갈아놓은 마늘과 생강도 함께 섞어 준다. 바싹 마른 청각은 따뜻한 물에 불려 종종 썰고 싱싱한 보리새우로 옷맵시를 가다듬는다. 매실 액기스로 분단장도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알맞게 숨죽은 배추를 말간 물에 헹구어 엎어 놓는다. 얌전히 엎드려 있어야 물기가 잘 빠진다. 네 번째 기절할 순간을 기다리며 약간의 체념도 배운다. 드디어 뽀얀 속살에 빨간 옷을 입힌다. 고명도 사이사이 배부르게 넣어준다. 빨간 양념이 고루 베지 않으면 김치가 제대로 맛을 낼 수 없으니 새 옷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리. 화목한 가정을 위하여!
개성마저 잃어버리면 고유의 맛이 사라질지니 이성의 눈을 말갛게 뜨고 감성을 다스리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정신 줄을 굳게 잡고. 짠 젓갈과 매운 고추 양념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고 터지는 기침에 콧물까지 범벅이 되더라도.
양념이 골고루 베인 배추를 사각의 김치 통에 꼭꼭 눌러 담는다. 겉잎으로 치마를 두르듯 감싸 안은 자태가 얌전하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거짓 없이 진실 된 마음으로 침묵에 익숙해지면 서서히 성숙해지리라. 자칫 게으름을 피우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이 되리니 성실하게 기다리면 금상첨화일 터.
아버지는 신 김치를 싫어하셨다. 가장의 영향인지 식구모두 신 김치를 꺼려 김치가 시어지면 어머니는 옆집으로 퍼 나르셨다. 아버지는 우리가 먹지 않는 걸 남에게 준다고 역정을 내시고 좋아하는 집에 보내는 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며 엷은 다툼을 벌이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배추 한 쪽으로서는 감칠맛을 낼 수가 없다. 여러 쪽이 함께 손잡고 환경의 변화에도 부화뇌동하지 않고 김치 냉장고에서 얌전히 기다린다면 숙성된 인격으로 완성되리라. 모두가 입맛 다실 김치로. 제 맛을 내려면 배추는 다섯 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로 태어나는 법. 여러 번 기절했던 새댁도 잘 익은 김치처럼 서서히 동화되어 배추김치처럼 푹 익어 가리라. 우리네 인생처럼 시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