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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다

등록일 2024-09-11 18:31 게재일 2024-09-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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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경 수필가
배문경 수필가

나뭇잎에 튕긴 햇빛이 비처럼 쏟아진다. 저만치 계단 위를 올려다보니 빛 속에 세상이 놓여있다. 기와지붕 끝이 맞닿는 곳에 백일홍이 붉게 웃는다. 순간, 모든 것이 희고 환해서 도무지 이 세상이 아닌 듯 몽롱하다.

스물 계단 앞에 섰을 때 세상은 혼돈이었다.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쓸려 새로운 길을 만드는 물살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를 요구했다. 내가 살던 작은 도시에서도 골목골목에서 나온 사람들이 어깨를 서로 걸쳤다.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목소리는 하나가 되었고 의기는 투합 되었다.

그때는 어디를 가든 친구와 함께였다. 침낭과 먹을 것을 배낭에 나누어 넣고, 지리산과 설악산을 올랐다. 고단함도 잠시 텐트를 펼치고 쏟아지는 별을 노래했고 나날이 만들던 추억은 우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패기는 희망의 노래뿐만 아니라 절망의 노래를 부를 때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친구와 손을 잡고 오르면 어떤 계단에서도 숨이 차지 않았다.

서른 계단에서 결혼 후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가을 길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돌담길을 걷자 쨍쨍한 가을 햇살에 땀이 났다. 능으로 가는 길,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나는 막내의 손을 잡고 걸었다. 계단 앞에 서서 큰아이는 동생을 위로 올라서게 한 후 나에게 올라서 보라고 재촉했다. 미소가 번지는 얼굴은 언덕배기를 하얗게 물들이던 구절초처럼 환했다. 아이들과 오르던 서른 계단은 웃음이 번지던 시간이었다.

마흔 계단을 오를 때는 사는 일에 스스로 지쳐 기진맥진할 때가 많았다.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감천마을을 살폈다. 낡은 집들의 틈새를 메우는 계단은 미로 같았다. 오르락내리락하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집은 이어졌다. 집도 사람도 서로를 보듬으며 견디고 있었다. 낡은 계단은 빗물을 흘려보내고 세월을 흘려보내느라 사람의 발길질에 삭을 대로 삭아 납작하고 보잘 것 없었다. 어둡고 칙칙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오르며 이 계단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쉰 계단은 나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과 함께 계단을 오른다. 라일락이나 들꽃처럼 짙은 보라의 향기가 번지는 시간이다. 운명을 찾아 연어처럼 자신을 찾는 회귀형도 있고, 파도에 적당히 몸을 맞기며 즐길 줄 아는 사람들도 본다. 그래서 그들 나름의 향기는 진하고 감미롭다. 나는 무슨 향기일까.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는 시간, 나의 향기를 덧입혀본다.

지금, 잠시 멈추어 서서 계단 아래로 눈길을 준다. 낮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들꽃이 어느 날 눈길을 끌던 것처럼 사소하게 넘긴 것들이 목의 가시처럼 걸렸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마음은 세심함을 잃은 행동이었다. 당연할 줄 알았다. 지금에서야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따뜻한 시선을 담아 보낸다.

어제 같은 계단이 내일도 이어진다. 무수히 뻗어있던 길과 계단에서 달리고 걷고 혹은 뛰어넘기를 하며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가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다 가더라도 가야하는 길이다. 나이를 먹을 때마다 더 나아지리란 달콤한 희망은 좌절될지라도 삶은 또한 살아지는 것. 그 끝이 당장 정갈한 나무숲의 빛 내림처럼 황홀한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다른 영산암 작은 마당에 햇살이 소복히 내려앉았다. 영산암(靈山庵)은 석가모니불이 경전을 통해 설법하셨던 영취산에서 유래했는데 보통 줄여서 영산이라 부른다. 어디에도 없던 평화와 안정이 마당에 들어찼다. 염불소리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니 더 이상의 계단은 없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계단은 기도와 다르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 그 끝에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그마한 절 한 채가 있다. 그 도량을 거닐다보면 깨달음의 향기가 온 몸을 적신다. 절집 마당에 피어난 백일홍이 유난히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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