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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핑크와 춤을

등록일 2024-09-04 19:01 게재일 2024-09-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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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희 수필가
윤명희 수필가

그분은 블랙핑크의 팬이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K팝을 즐긴다. 걸 그룹 가수들의 얼굴도 구분하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노래 속에서 멤버 하나하나의 목소리 특성까지 찾아 이야기한다.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가르쳤던 그분은 정년퇴임 후에도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과 힙합가수 지코의 음악을 함께 즐기기도 한다.

처음 그분을 만난 곳은 방송대 국문학과 강의실이었다. 퇴직하자마자 우리와 함께 문학을 공부했다. 들쑥날쑥한 나이 차이에도 우리는 친구사이로 지내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혼자 사는 그분의 집을 방문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파마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엉성한 머리카락을 파마로 살짝 가리니 십년은 젊어 보였다. 갈수록 더 멋있어 진다는 우리의 합창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는 사람들마다 젊어 보인다는데 딱 한 사람, 딸은 모른 척 하더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옆구리까지 찔러 들은 말이 ‘괜찮네.’였단다. 우리는 그녀의 반응에 눈이 둥그레졌다.

집안을 둘러보니, 창가에 온갖 꽃이 핀 화분들이 있었다. 꽃잎마다 윤이 났다. 선반 위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하얀 시트로 정리된 호텔 같은 침실을 들여다본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집에 가면 대청소부터 해야겠다는 반성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뒤이어 그분이 직접 차린 밥상 앞에서 또다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물 무침에 생선찜까지 정갈했다.

주문을 하시지 번거롭게 직접 했느냐는 우리의 미안한 말에, 배달음식은 이 집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집안을 보니 건강한 몸이 더 돋보였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짬이 나면 친구들과 자주 여행을 한다고 했다. 마음을 글로 나타내기도 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주변을 아우를 줄 아는 그분의 생활은 내가 그리던 삶과 닮아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둘러앉아 와인을 마셨다. 내 머릿속엔 온통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그분의 딸 생각뿐이었다. 혼자서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아빠인데 왜 그런 반응이 나왔을까. 두어 잔의 술에, 취기와 함께 그 딸의 마음이 슬그머니 내 속으로 들어왔다. 내게도 엄마를 먼저 보내고 이십 여 년을 혼자 지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있었다.

혼자 된 아버지의 일상은 나의 염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월요일은 버스를 타고 가서 온천 목욕하러가는 날이라 했다. 세숫물을 코앞에 들이대던 엄마가 없어도 아버지는 홀아비 티 없이 말끔했다. 어느 날은 등산 가는 날이고, 다음 날은 오일장 가는 날이라고. 친구들과 포항 죽도시장에 회 먹으러 가는 날도 계획에 있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건강검진을 가는 날이었다. 분홍빛이 은은한 체크남방차림의 아버지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분홍 옷에 모자까지 갖추었다. 나는 운전석 룸 밀러로, 뒷자리에 앉아 모자를 고쳐 쓰는 아버지를 힐끔거렸다. 내 마음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바람이 지나갔다. 아버지 참 멋지다고 감탄하는 내 말 속에 빈정거림이 숨어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엄마의 빈자리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혼자 남을 아버지 걱정에 속옷과 양말 손수건까지 새로 챙겨 넣었었다. 혼자서 잘 적응하는 모습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엄마의 자리가 지워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분 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서운했던 그때의 내 마음과 그녀의 아쉬움을 견주어 함께 다독인다.

지금 나는 파마를 하고 블랙핑크의 음악을 즐기는 그분의 편이다. 아버지의 연분홍 체크 남방차림과, 고속버스를 타고 죽도시장까지 가곤 했던 일들이 생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었다는 것을 세월이 알게 했다. 그 힘은 자식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는 것도 안다.

와인이 바닥을 보이던 찰라, 그분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알람소리에 맞춰 거의 매일이다시피 저녁노을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창가로 다가갔다. 평소 사진으로 보았던 해 지는 모습을 오늘은 직접 보고 있다. 꼭대기 층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내게 스며들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이다. 해는 지고 그 뒤로 블랙핑크의 음악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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