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이 고즈넉하다. 오늘만큼은 바람도 나무들의 참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정갈한 마음을 준비하라고 함월산(含月山)에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을 씻고 간간이 날아오는 새소리가 귀를 맑게 한다. 부처님 생전에 제자들과 하안거하며 수행했다는 기원정사의 숲이 이랬을까.
어머니의 사십구재 막재에 이르러 나는 초재 때의 마음을 내려놓았다. 부모와 자식사이의 정이 아무리 질기다 해도 하늘이 내린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도 애틋함도 지나고 나니 모두 바람이었다. 연(緣)의 끈을 놓아야 어머니도 홀가분히 떠나리라는 생각에 애써 마음을 비우려 밤길을 떠난다. 갑사 치마저고리에 허리띠를 질끈 동여 맨 어머니가 하얀 고무신을 신고 휘적휘적 오르던 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났다. 나라 잃은 설움과 차별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돌아오던 현해탄의 차디찬 바람에 돌배기 첫 아들을 잃었다. 그 후 아들 셋을 더 잃고 나서야 ‘붙들이’라는 이름으로 딸을 살렸다. 또 다시 자식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부모님은 야심한 시간에 대웅전 부처님을 들어 올리고 방석을 바꾸기까지 했다. 나름의 방술(方術)까지 하며 자식을 지키고자했으니 어머니에게 자식보다 더 간절한 존재는 없었다.
살다보면 한줄기 빛이 간절할 때가 한 두 번인가. 세속을 향해 은은히 빛을 발하는 삼신불(三身佛) 앞에 옷깃을 여민 어머니는 마음가짐부터 남달랐을 것이다. 남편이 징용의 후유증에 시달려 가정을 소홀히 했기에 어머니는 자식의 앞길도 평탄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가뜩이나 가난으로 먹고 살 길이 지난한데 전쟁으로 다시 한 번 마음까지 폐허가 된 시절이었다. 자식의 앞길을 밝힐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을 열 개라도 사르리란 생각에 어머니는 부처님 전에 촛불을 밝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내게 삼배(三拜) 올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 내가 번뇌를 알기나 했을까. 절을 따라하면서도 어머니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동자승이라도 있으면 함께 마당에서 뛰어놀 수 있을 텐데 심심해진 나는 어머니 곁을 살그머니 떠나 배롱나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대적광전을 바라보았다. 색동저고리 같은 단청은 바라볼수록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화려한 꽃살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꽃물이 밴 것 같아 내 옷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얀 버선이 새카맣게 될 때까지 절은 끝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지고서야 삼천배가 끝이 났고 어머니의 갑사 저고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산사를 벗어날 즈음 둥근 달이 어머니와 나를 비추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길은 달빛으로 온통 하얀 꽃밭이었다.
열 달 동안 자식을 품었다가 세상에 내놓는 첫 심정은 경이였다. 자식과 탯줄로 이어진 운명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럴진데, 어머니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품고 얼마나 울었을까. 한겨울 언 땅에 자식을 묻고 와서 가슴을 얼마나 쥐어뜯었을까.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죄책감으로 먼저 간 자식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절을 하며 속울음을 삼켰으리라.
나도 어느새 어머니가 되어 기림사(祇林寺)를 찾는다. 달이 차고 기울듯 인생도 부침을 거듭하며 희로애락의 꽃을 피운다. 나 또한 어머니의 길을 따르며 부처님 전에 엎디어보니 삶이란 가슴에서 피어나는 송이송이 아프고 시린 꽃을 불전에 올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비켜갈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모두 꽃으로 피워볼 일이다.
함월산(含月山)은 달을 품고 토함산(吐含山)은 달을 토한다. 주어진 만큼의 무게를 지고 가다가 마지막에 다 내려놓는 것이 삶이다. 어머니도 모든 짐을 홀가분하게 벗고 숱한 번뇌에서 해탈했을까. 어머니가 이제는 업장을 다 소멸하고 더 좋은 세상에서 환생하길 기원하며 절을 올린다.
순례를 마치고 세속으로 돌아가는 길, 토함산이 달을 하늘로 밀어올린다. 온 천지가 여광처럼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난다. 달이 만상을 비추는 해인(海印)의 밤, 등에 비치는 달빛이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