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맞아 가족과 친척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이 어색하지 않게 신경을 쓰며 안부를 물었다. 근황을 묻는 분위기가 한소끔 지나고 나면 어른의 훈계에 아이들의 농담이 겹쳐지고 웃음이 덧씌워졌다. 그런 다음 세배를 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모처럼 윷놀이를 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편을 나눠 떠들썩하게 윷놀이에 몰입하고 나면 배가 출출했다.
설날의 기쁨 중 하나는 떡국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이다. 서로서로 도와가며 식사 준비를 했다. 부엌에서는 기름이 달궈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번졌고 반찬을 꺼내 담는 손길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도 버무려 넣었다. 큰 상에 접시마다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이 놓였다. 나는 각각 고유한 빛깔로 담겨 있던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 등을 대접에 담아 밥상으로 날랐다.
섞기 전의 비빔밥은 명절을 맞이하는 가족과 닮았다. 시어머님은 시어머님의 자리에서, 아주버님과 형님은 두 분의 자리에서, 조카와 아이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생활하다가 밥상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모여 앉았다. 각자의 집에서 보냈던 일상 이야기도 덤으로 놓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이 같은 시공간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평소에 ‘나다움’을 지키려 애쓴다. 내 생각, 내 방식, 내 취향을 존중받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들어오면 내가 지녔던 단단한 모서리들이 조금씩 둥글어진다. 나 혼자일 때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표정이 가족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피어난다. 학교나 직장,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군가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았던 마음도 여기서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함박웃음이 먼저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충분히 비벼진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밥과 반찬을 따로 먹어도 맛있겠지만 나물과 고기가 잘 섞여 어우러진 맛은 무척 깊고 넉넉했다. 비빔밥으로 섞이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완성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각각의 맛이 또렷했지만 이내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맛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서로의 경계가 무너질 때 생기는 선명함이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시간을 나눴다. 누군가는 새로 시작할 일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지나온 한 해를 조용히 털어놓았다. 나를 염려해 주는 이들의 마음이 내 영혼 속으로 들어와 올해 계획이 조금 수정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또 다른 식구들의 마음도 어느 틈에 우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고 앉았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밥이 거의 비워질 무렵이었다. 비빔밥 그릇에 담겨진 나물과 고기의 처음 또렷한 색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 그릇의 따뜻함만 남아 있었다. 방 안 가득 퍼진 온기와 비슷한 빛깔이었다.
설날의 비빔밥처럼 섞여야 비로소 내가 된다. 혼자 있을 때의 나는 한 가지 맛에 머물러 있지만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있을 때의 나는 조금 더 깊은 맛으로 숙성되는 것 같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뭉쳐진 우리는 서로를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로 인해 완성된다. 그래서 명절은 지나가도 따뜻한 감정은 오래 남는다. 나는 가족과 섞여야 비로소 하나의 문장으로 남는다.
글·사진/정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