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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날에 블루로드를 걷다

등록일 2026-04-15 15:27 게재일 2026-04-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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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영덕에 강의하러 갈 때면 해안가를 걷는 이들을 자주 보았다. 바쁘게 일하러 가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여유가 있었다. 윤슬에 반짝이는 푸른 물결을 곁에 둔 채 느리게 걷는 모습에서는 삶의 또 다른 리듬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나는 차창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나도 저 길을 걸어야겠다고 한 번씩 다짐했다.  
 

봄이 되었다. 겨우내 접어두었던 다짐이 어느 날 문득 스스로를 두드렸다. 드디어 지난 주말에 블루로드 출발점을 알려 주는 조형물 앞에 섰다. 햇살은 글자 위로 쏟아져 눈부신 파편처럼 흩어졌고 바닷바람은 겨울의 거친 숨결을 지우고 한층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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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블루로드 출발점을 알려 주는 조형물. /정미영 수필가

봄날의 길은 쪽빛으로 열려 있었다. 나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이며 오늘만큼은 서두르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그러고는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규칙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바람의 숨결에 흔들릴 때마다 내 안의 문장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배경을 묘사할 단어가 미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현되지 못한 언어가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흩어지는 듯했다.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에 떠 있는 배 한 척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풍경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쫓기듯 살아왔던 일상이 풀어지며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가슴에 얹어 놓았던 묵직한 근심과 오래 묵은 생각들도 바다 빛깔에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드넓은 바다는 잔잔했다. 먼 바다에서 밀려온 파도는 크지 않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해안을 두드리며 세월의 퇴적층을 쌓고 있었다. 나는 바다의 시간에 맞추어 느슨하게 걸어 들어갔다. 급할 이유가 없었고 서둘러 도착해야 할 목적지도 없었다. 오히려 걸음이 늦어질수록 평소보다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걸을 때라야 비로소 시야가 넓어졌다.
나를 되돌아보았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여전히 허둥거리며 바삐 달려가고 있는 내가 눈에 밟혔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라는 이름의 짐을 등에 업고 조금이라도 늦을까봐 매번 두려워하며 앞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는 사이에 가족과 나눌 수 있는 기억이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추억 하나 제대로 쌓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급히 봉합하듯 살아온 날들이었다.
 

도저히 짬을 낼 수 없다고 어쩌면 간단없이 자기최면을 걸어왔는지 모른다.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목 주변이 쉽게 뭉치고 어깨가 결렸다. 통증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멈추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가족들은 운동을 해야 한다며 수시로 닦달했다. 허약해진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산책을 권유하며 체력을 키우란다. 그 말이 나의 곁을 맴돌다가 마침내 나를 블루로드로 이끌었다.
 

꽃피는 봄날에 블루로드를 걸었다. 바닷가로 내려갔더니 조약돌이 눈에 들어왔다. 뾰족한 모서리가 파도에 닳아 사라진 채 매끈한 곡선만 남아 있었다. 햇볕에 데워진 동글동글한 돌멩이를 손바닥에 올려보았더니 따뜻함이 전해졌다. 앞으로의 내 삶은 푸른 바다를 제 안에 품고 있는 조약돌처럼 모나지 않게 둥그러지기를 바랐다.  
 

/정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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