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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지금 포항은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철강산업의 침체로 산업 현장이 흔들리고 있고, 그 여파는 도심 상권과 시민의 삶 전반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앙상가 700여 개 점포 가운데 약 30%가 비어 있는 현실은 단순한 경기 부진을 넘어 도시 전체의 체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다. 일부 공장은 문을 닫거나 가동 규모를 축소했고,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 역시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럴수록 경계해야 할 말이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오래된 경고다. 위기일수록 준비되지 않은 판단과 경험 없는 대응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2017년 포항 지진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포항 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뒤흔든 대형 위기였다. 수많은 시민이 주거와 생계의 불안을 겪었고, 많은 피해 시민들은 오랜 시간 정신적 고통 속에서 일상을 견뎌야 했다. 초기에는 일반 재난 기준에 따라 소파 약 5만 세대에 세대당 평균 100~200만 원 수준의 지원이 이뤄졌지만, 실질적인 회복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에도 말만 앞서는 해법과 즉흥적 대응은 오히려 혼란을 키울 수 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전환점은 지진특별법이었다. 특별법 제정을 통해 지원 범위가 대폭 확대되면서 약 11만 세대에 총 4900여억 원 규모의 보상과 지원이 이뤄졌다. 이는 지진 피해를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겠다는 제도적 선언이었다. 종교시설을 포함한 다수의 공공·생활 시설이 추가 지원을 받았고, 보건소 신축과 체육·수영장·도서관 등 생활 인프라 확충, 각종 안전·편의 시설 개선 사업도 함께 추진됐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는 포항이 ‘지진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구호가 아니라 경험과 책임에 기반한 판단, 다시 말해 선무당식 대응을 배제한 결과였다. 다만 지진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 보상 문제는 아직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피해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책임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시민과 정치, 행정이 다시 한 번 단합하는 일이다. 위기는 선언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끝까지 관리할 수 없는 말과 약속은 또 다른 ‘선무당’을 낳을 뿐이다. 지금 포항이 마주한 철강 위기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철강 위기는 곧 기업의 위기이며, 기업의 위기는 노동 현장과 지역 경제 전체의 위기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책상 위에서 만든 이론보다 기업과 산업 현장의 경험,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결국 기업이 살아야 포항이 산다는 말은 감정적 구호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 판단이다. 위기 앞에서 선무당식 처방은 가장 위험하다. 포항은 지진이라는 한 차례 대형 위기를 시민의 힘과 제도적 대응으로 관리해 본 도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말이 아니라, 검증된 경험과 책임 있는 리더십이다. 철강 위기와 지진 극복의 교훈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모아진다. 선무당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공원식 전 포항11.15촉발지진 범시민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2-03

한동훈, 대구에서 정치할까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당원 게시판’ 논란에 발목이 잡혀 당적을 잃었지만, 그의 향후 행보에 관심을 가지는 대구시민이 많다. 대구에서 6월 국회의원 보궐선거 자리가 생기면 무소속으로 출마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친한계인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은 최근 “대구 국회의원 중에서 대구시장에 출마하는 분이 있으면 의석이 비게 된다. 그 자리에 한 전 대표가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고, 신지호 전 의원도 3일 오전 KBS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한 전 대표가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진짜 보수가 누구인지를 가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24년 4월 치러진 22대 총선 때도 한 전 대표의 대구 출마설이 나돈 적이 있다. 법무부장관으로 재직하던 2023년 11월 그가 업무 차 대구를 방문했을 때, 그를 가까이서 보려는 시민들이 몰려들면서 마치 총선 유세 현장을 방불케 했었다. 그는 이날 대구시민들의 사진 촬영 요구에 응하느라 미리 예약해 둔 저녁 7시 표를 취소하고 세 시간이나 늦게 열차를 타기도 했다. 당시 한 장관이 “대구는 처참한 6·25 전쟁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적에게 이 도시를 내주지 않았고, 전쟁의 폐허 이후 산업화를 처음 시작했다”면서 “평소 대구시민을 깊이 존경해왔다”고 한 말을 기억하는 시민이 많다. 지금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배신자 프레임에 얽혀 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지만, 그 당시 대구시민은 대구의 정체성을 높게 평가해준 그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 전 대표의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설에 대해 찬반 여론이 팽팽한 것 같다. 그가 당선돼서 대구의 정치적 색채를 ‘보수꼴통’에서 ‘합리적 보수’로 바꿔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배신자 이미지’로는 당선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친한계 인사들 중에서도 그가 대구에 출마해 낙선하고 대신 민주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면 정치 은퇴까지 해야 될 정도의 충격파가 올 수 있다며 출마를 말리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호사가(好事家)들 사이에서는 한 전 대표가 대구에 출마할 경우 국민의힘에서 이진숙 전 방통위원장을 공천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모양이다. 이른바 ‘자객공천’이다. 이 전 위원장이 그동안 꾸준히 대구시장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데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이 전 위원장이 오는 9일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북콘서트를 여는 것을 보면, 그의 출마설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 보수 성향 유튜버 전한길씨와 고성국씨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 전 위원장이 대구에 출마할 것을 공개적으로 권유한 적이 있다. 대구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 자리가 생길지는 지방선거 공직자 사퇴시한인 3월 5일까지 기다려봐야 알 수 있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 한 전 대표에게 어떤 정치적 변수가 생길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당무감사위·윤리위를 통해 정치생명을 끊으려 한 한동훈의 정치적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2-03

입춘대길

입춘방은 입춘을 맞아 대문이나 기둥, 문설주 등에 붙이는 좋은 글귀를 이르는 말이다. 입춘첩이라고도 한다. 우리 민족이 오래 지켜온 민속풍속 중 하나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 대표적 글귀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햇빛이 세워지니 경사가 많다는 뜻이다.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을 맞아 올 한해 모두가 무사하길 바라는 축원이 담겼다. 조선 중기 선조실록에도 입춘대길을 행궁 내 붙이라는 전교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이 풍속이 오래됐음을 짐작케 한다.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도 봄에 붙이는 입춘방의 내용 중 하나다.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청결한 마음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넉넉한 마음을 갖추면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은 입춘방이지만 나라의 평안을 기도하는 내용이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하며 집집마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은 이처럼 개인과 나라의 평안함을 입춘시기를 맞아 소망했다. 봄은 희망의 계절이다. 겨울 추위가 멀어지고 따뜻한 햇살이 찾아오면서 만물이 소생한다. 파릇한 새싹만큼 우리의 마음도 새로운 각오로 다짐을 하게 된다. 올 한해도 뜻한바 이뤄지기를 바라며 입춘방을 집안 곳곳에 붙여놓는다. 예전의 조상이나 현시대를 사는 우리나 다르지 않다. 오늘이 입춘이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으나 마음만은 벌써 봄곁에 와 있다. 우리 속담에는 입춘 추위는 꿔다가도 한다고 했다. 입춘 추위라고 방심말라는 뜻이다. 올 한해는 집집마다 건강하고 좋은 일로 가득하였으면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2-03

‘우물 안 개구리’

언젠가 공식 석상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 동네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나왔습니다.”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났다. 속으로 혀를 찼다. 경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더욱이 그 안의 작은 동네에서 평생을 보낸 것을 남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겸손하고 온유한 자세로 삶을 살다가 ‘큰 바위 얼굴’로도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 자체를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문제가 좀 다르다. 그 자랑에 담긴 배타적 우월의식에서는 썩은 냄새가 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공자가 그토록 경멸하며 ‘덕의 적’(德之賊也)이라고 한 ‘향원’(鄕愿)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올해 70의 나이를 맞았다. 제대로 뭐 하나 이룬 것 없이 실패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또 역마살이 뻗쳐 평생 이리저리 옮겨가며 살았다. 그런 중에 허리가 휘청거리면서도 세 아이가 딸린 가족을 힘들게 부양해 왔다는 점은 좀 뿌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미국, 중국, 일본의 세 나라에서 장기체제를 하며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약간은 자랑스러워한다. 또 끊임없이 외국어를 손에서 떠나가지 않게 노력해 왔다. 수십 년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아침 저녁 두 차례 미국의 공영방송인 NPR을 꼭 시청한다. 이런 수행적 공부를 통해 세상을 내다보는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2019년에 소위 ‘조국 사태’가 터졌다. 나는 당시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커다란 역화가 나와 내 가족을 덮쳐왔다. 소위 ‘문빠’라고 하는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 아내는 이를 견디다 못해 공황장애로 덜컥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공격 중에서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는 어떤 모습이 있다. 그는 지방에서 변호사를 하는 이였다. 그는 우리나라 사법에 ‘배심원 제도’를 도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 제도를 열심히 들여보았다. 이에 관한 번역서도 하나 낸 것으로 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페이스북 댓글난을 통해 장문으로 나를 심하게 모욕하였다. 그러고선 나를 차단하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 글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는 채 그 모욕을 일방적으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못된 성미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헌법학자로서 ‘사법개혁’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수다한 논문을 쓰고 책도 저술하였다. 내 입장에서 말하건대, 배심제도 하나를 도입한다고 해서 한국 사법제도의 폐해가 모두 수습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심오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그 안에 숨어있다. 지금 여권(與圈)에서 추진하는 소위 ‘사법개혁’안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변호사나 처음에 언급한 지역 유지(有志)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물 안 개구리’인 것이다. 자신이 보는 좁은 세계가 전부인 양 멋대로 뻐기고 남을 업신여기며 또 별 근거 없이 남을 못살게 굴기도 한다. 이러한 공공의 적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은 것 같다. /신평 (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변호사

2026-02-03

AGI시대, 시민생활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는 인간의 특정 지적 능력(인식, 예측, 생성 등)을 한정된 목적 안에서 수행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을 말한다. 챗GPT, 번역기, 자율주행 기능 등 목적이 정해져 있고, 학습 범위가 제한적이고, 인간의 감독이 필요하다.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범용인공지능)는 인간처럼 다양한 문제를 이해하고, 스스로 학습하며, 맥락을 넘나들어 추론, 판단, 계획 등 다양한 인지 과제를 사람 수준으로 처리하고, ‘사람처럼 생각하고 적응하고 행동하는 지능’을 의미한다. AI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전문가들은 AGI를 똑똑한 기계를 넘어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 AGI시대가 오면, 우리 시민 생활은 어떻게 달라질까? 필자는 지난 1월 30일, ‘AI SEOUL 2026’ 콘퍼런스에 참여했다. 서울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이날에는 서울시장, 학계와 글로벌 AI 연구 개발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국내 관련 조직과 연구원, 생활의 변화가 궁금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수천여 명이 참여한 한마당이었다. AGI 시대의 최적 조건을 갖춘 서울은 양재에 에이아이 브레인(AI Brain), 기술 공급 클러스터를 만들어 로봇의 시각, 판단, 제어 기술을 공급하고, 수서에는 로봇 바디(Robot Body), 기술 개발한 것을 실증, 적용하는 로봇 클러스터를 조성 할 계획이다. AI시대의 서울은 10년 이내에 역사상 가장 큰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되고,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고령시민에게 AI는 ‘편의’ 그 이상이다. 병원 예약, 건강 모니터링, 응급 대응까지 AI는 노년의 가장 큰 불안인 고립과 건강 리스크를 줄여준다. 돌봄은 가족의 부담에서 사회의 책임으로 확장된다. 청년에게는 AI는 기회이자 압박이다. 단순 업무는 빠르게 사라지고, 질문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청년의 불안은 커지지만 동시에 기회의 문도 넓어진다. 자영업자에게 AI는 생존의 도구이다. 수요 예측, 재고 관리, 고객 분석까지 AI는 감에 의존하던 장사를 데이터 기반 경영으로 바꾼다. AI를 쓰는 가게와 쓰지않는 가게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시민의 생활 변화는, SNS와 커뮤니티의 비정형 데이터를 분석해 시민의 숨은 니즈를 발굴하고 해결한다. 교통, 안전 등 도시 문제를 감지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단순 인식을 넘어, 쓰러짐, 폭행 등 상황 맥락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지능형 CCTV가 사람의 눈이 되어, 위험 발생 시 실시간 포착하고 구조한다. ‘도시의 마음을 읽는 AI, 시민의 목소리가 정책이 된다’는 논리보다 ‘느낌·맥락·분위기’를 잘 읽고 맞춰주는 바이브에이아이(vibeAI)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SF 영화에서 본 ‘상상이 현실이 되고, 일상은 자유가 된다.’ 단순 상담을 넘어 결재, 취소, 환불 등 실무를 직접 수행하는 ‘사장이 잠든 시간, AI 점장이 환불까지 해결한다’는 완전 무인화, 소상공인에게 진정한 휴식이 제공된다. AGI시대 시민 생활은 ‘생각·결정·책임은 인간이 하고, 속도·계산·확장은 AI’가 한다.’ 민원·세금·복지 상담과 예산·건강·일정까지 AI 비서가 하는 세상이 온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6-02-03

겨울의 잔해를 넘어

독감은 예고 없이 찾아온 침략자였다. 처음엔 그저 목구멍 뒤편이 가늘게 떨리고 가벼운 오한이 있어 감기인 줄 알았으나 이내 고열은 육신의 성벽을 허물고 점령군처럼 들이닥쳤다. 자려고 누우면 기침은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물처럼 길어 올렸고 달아오른 이마는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렸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나의 세계는 오직 통증이라는 좁은 감옥 속에 유폐되었다. 열이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지독하게도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었다. 고열로 인해 시야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였으나 그 뒤편에 선명하게 각인된 아이들과의 수업 약속, 마감이 다가오는 원고들, 내가 부재함으로 인해 생겨날 공동체의 작은 균열들은 나를 잠시도 침대에 온전히 뉘어두지 못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기꺼이 아플 자유조차 반납해야 하는 일이었던가. 육신은 비명을 지르며 모든 기능의 정지를 선언하고 휴식을 갈구했지만 책임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나를 억지로 생의 현장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쉼 없이 나를 소진한 대가는 더딘 치료였다. 약은 잠시의 아픔을 유예시킬 뿐, 근본적인 치유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낫는 속도가 이토록 더딘 것은 단순히 면역력의 저하 때문만은 아니라 나의 영혼이 쉴 틈을 찾지 못해 스스로 치유의 동력을 꺼뜨려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픈 육신을 정신력이라는 가느다란 끈으로 억누르며 버티는 동안, 나의 회복은 정체되고 아픔의 유통기한은 지루하게 늘어만 갔다. 어른의 치유란 이토록 고단한 것인가. 자신의 상처를 돌보기에 앞서 타인의 기대를 먼저 수선해야 하는 삶은 마치 밑 빠진 독에 생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 느린 회복의 지체(遲滯)는 역설적으로 내가 삶을 얼마나 성실히 지탱해왔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정직한 통증의 기록이기도 했다. 문득 아이들이 부러워졌다. 아프면 그저 목놓아 울 수 있고, 차려주는 따뜻한 죽 한 그릇에서 세상을 다 얻은 듯 잠들어도 괜찮고,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오롯이 의탁하며 떼를 쓸 수 있는 그 투명한 권리가 부러웠다. 홀로 약봉지를 뜯고 스스로 물을 데우고 또 기침으로 보내는 어른의 밤은 차갑고 적막했다. 기침이 조금씩 멈춰갈 즈음, 거울 속의 수척해진 얼굴을 마주하며 또 깨닫는다. 내가 지켜내야 할 약속들은 나를 짓누르는 하중이 아니라 어쩌면 나를 생의 현장에 붙들어 매어주는 단단한 닻이었다는 것을.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담길 나의 존재를 생각한다. 내가 아픔을 이기고 수업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 그들은 지식을 배우는 것에서 ‘삶을 책임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나의 고통은 타인에게 나누어줄 사랑의 부피를 가늠하는 성찰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이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내 안의 겨울이 저물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대지는 혹독한 냉기를 온몸으로 품어내야 비로소 봄의 현(絃)을 울릴 자격을 얻는다. 지금 나의 이 무딘 회복세와 더딘 걸음은 결코 쇠락의 징후가 아니다. 오히려 생의 박동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고귀한 지체(遲滯)이자 어른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온전히 감내하며 얻어낸 시간의 훈장이다. 오랫동안 나를 유폐했던 방을 나와 다시 익숙한 일상의 소음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 때마다 가벼운 기침이 배어 나오지만 그것은 생의 엔진이 다시 가동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이들을 맞기 위해 다시 책상을 정리하고 해킹으로 자료가 몽땅 날아가 버린 노트북을 펴 다시 수업 자료를 만든다. 정갈하게 다시 문장을 다듬고 아이들의 눈을 비로소 맞출 때 나의 혈관 속에는 약 기운이 아닌 삶의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나의 몫을 다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치유란 걸 또 알아간다. 내가 앓았던 겨울의 잔해가 저 산 너머에서 파릇한 새순으로 돋아나는 기적을 나는 믿는다. 비록 떼를 쓰며 쉴 수 있는 내 유년의 안온함은 멀어졌을지라도 나의 아픔을 숭고한 책임으로 치환해낼 수 있는 지금의 내가 더 충만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독했던 통증이 잦아든 자리마다 성숙이라는 이름의 깊은 향기가 배어날 것이다. 나는 이 길고 긴 독감의 끝에서 조우할 맑은 아침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김경아 작가

2026-02-03

‘돈로주의’와 각자도생의 세계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국제정치는 규범보다는 힘, 명분보다는 국익이 지배하고 있다. 트럼프의 ‘돈로(Donroe=Donald+Monroe)주의’ 외교는 미국의 힘으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다. 그는 이상주의자들이 중시하는 유엔과 국제법을 무시하고 어떤 나라든 “까불면 죽는다(FAFO)”라고 협박하면서 약육강식의 정글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 변화가 세계에 주는 충격이 크다. 트럼프는 국익을 위해 군사력 사용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베네수엘라 침공과 마두로 대통령 체포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침략의 명분은 미국에 대한 ‘마약테러’였지만, 실상은 석유통제권을 확보하고 중·러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에 비우호적인 쿠바와 콜롬비아에도 경고를 보내는 한편, 국가안보를 위해서 그린란드 합병이 필요하다면서 노골적으로 영토야욕까지 드러내고 있다. 물론 힘의 외교는 오늘의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로마제국, 나폴레옹제국, 대영제국은 모두 강력한 힘으로 제국을 건설했고, 지금도 러시아는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전쟁 중이며, 중국은 남중국해 도서들을 강제점령하고 대만에 대한 군사위협을 증대시키고 있다.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정책으로 국익을 획득·유지·확대해나간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국제정치의 본질적 속성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국제환경과 국익의 비중에 따라 무력행사의 노골성과 그 강도가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존전략은 무엇인가?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익을 위한 실용외교’이다. 힘으로 국제정치를 주도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외교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이념외교’가 아니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실용외교’가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이재명 정부가 실용외교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과 전략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실용외교가 원칙 없는 임기응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도 셰셰, 대만에도 셰셰하면 된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으로서는 복잡한 실용외교를 추진할 수 없다. 게다가 외교정책에 정권의 이념이 개입되면 다각적 대안 모색이 어려워진다. ‘영원한 우방이 없는 국제정치’에서는 동맹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체약국의 국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NATO 동맹국인 미국과 유럽이 ‘그린란드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듯이, 최근 발표된 미국의 ‘2026 국방전략(NDS)’은 한미동맹 역시 중대한 변곡점에 직면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냉혹한 국제정치에 대처하려면 내적 결속력 강화가 시급하다. 분열과 갈등은 외세개입을 불러온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진정성 있게 여야협치와 국민통합을 추진해야 국력을 결집시킬 수 있고, 결집된 힘이 있어야 강대국의 압력에 대처할 수 있다. 실용외교의 성패(成敗)는 국론통합을 바탕으로 한 정교한 전략에 달려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6-02-02

빌어먹을 이 한마디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그렇다면 사랑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할지 모른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기에. 사랑의 완성이 있을까. 아마도 그런 건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평생의 동반자로 맞이하는 의식을 치를 때, 우리는 이를 ‘결혼식’이라 부른다. 결혼식은, 결혼이라는 배가 ‘사랑의 실천’이라는 짐을 선적하고 이제 막 항구를 출발할 때 울리는 뱃고동 소리다. 현대의 결혼식은 늘 같은 장면으로 시작된다. 같은 음악, 같은 걸음걸이, 같은 색의 옷, 같은 멘트···. 사회자는 외친다. “오늘부터 신랑, 신부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정겨운 이 외침에 우리는 단 한 줌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한다. 그래 맞아! 결혼은 두 사람이 비로소 하나 되는 것이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이 진정한 결혼의 의미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결혼 생활들이 침묵 속에서 흔들리는 것일까. 하나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식이 끝나면, 조명은 꺼지고 하객들은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남겨진 두 사람은 이제부터 ‘결혼이라는 집’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새로운 하루하루를 산다. 생각의 방향도, 피로를 느끼는지 지점도, 침묵을 견디는 방식도 다르다. 연애의 시기에는 이러한 ‘다름’들이 매력이 되었지만, 결혼의 집에 들어서면 불편함으로 바뀐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냐고, 뭐가 그렇게 피곤 하냐고 따져보지만, 결국은 각자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침묵한다. 하나 되어야 할 두 사람은 여전히 각자이다. 결혼의 집이 안락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그 빌어먹을 사회자의 멘트 때문일지 모른다. ‘오늘부터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말 한마디 이후로 두 사람은 하나를 향하여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아직도 하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하나 된다는 이 말이 진실일까. 거짓일까. 그 답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안다. 그 누구도 둘이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지구상 80억의 인간은 그저 다른 사람들일 뿐이다.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지는 숭고한 결혼식장의 신혼부부에게 가장 축복된 말이 ‘하나 되었다’라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결혼에 대한 최고의 찬사 그 이상이 되면 안 된다. 식장에서 터지는 축포처럼 ‘한 번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축포 소리와 함께 사라져야 한다. 이 말이 결혼이라는 집속까지 숨어들면, 신전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혼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겠다는 언약이다. 결혼이란 집은, 서로 다른 얼굴의 사람까지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도 괜찮고, 설명하지 않아도 쉴 수 있으며, 무방비 상태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공간. 두 사람이 지은 신전. 그곳이 결혼이라는 집이다, 그 집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 선생은 ‘예언자’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함께 서 있으십시오. 단,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신전의 기둥은 제각각 떨어져 서 있는 법. 떡갈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까요.”라고. 신혼집에 들어서는 신혼부부는, 이 빌어먹을 말이 신혼여행 가방 속에 숨겨져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공봉학 변호사

2026-02-02

죽음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가게 마련이다. 지구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온갖 생명체들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려면 생명을 가진 개체들의 죽음은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체도 생태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진대, 삶과 죽음은 존재의 양면으로 동일한 비중과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는 특별한 측면이 있다. 지구 생태계의 일부로 살고 죽는 생물학적인 조건은 여느 생물과 다를 바 없지만, 자신의 삶과 죽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별난 존재다. 그런 인식능력 때문에 사람은 위기상황에 직면하지 않아도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를 느끼게 된다. 불치병에 걸리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아니라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이다. 인류의 인지발달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일면이기도 하다. 인간이 안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으로는, 먼저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꼽을 수가 있다. 이는 동물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다음으로는 자아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괴로움, 평생 쌓아온 모든 것들과 함께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절망감 등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따른 고통과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도 인간만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일 터이다. 인류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는 일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다음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과제였다.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사상과 종교, 문학, 예술 등 모든 문화적 축적은 바로 그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그래서 완전한 해결책을 찾아낸 것은 아닐지라도, 80억이 넘는 인구로 번성하고 찬란한 문명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것은 상당한 성과라 할 것이다. 불안과 공포가 오히려 삶을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은 아무래도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도 종교만큼 확실하게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물론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조언도 동서고금에 수없이 많다. 우선은 삶과 죽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 공통된 가르침이다. 인간은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존재가 아닌 무궁무진한 우주의 일부, 즉 우주적인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소멸에 대한 공포심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덜기 위해서 경제적 기반이나 건강관리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탐구해보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죽음을 절망과 공포로만 인식하는 폐쇄된 자아를 벗어나서 마음을 열면 불안과 공포가 한결 희석될 뿐 아니라, 내가 처한 오늘의 삶에 의미와 보람, 감사와 기쁨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6-02-02

다시 ‘입춘’은 왔고

이른바 ‘북극 한파’가 맹위를 떨치며 2주 가까이 사람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날들이 지나갔다. 어느새 성큼 2월이 왔고 바람이 덜 차갑게 느껴진다. 입춘(立春)도 코앞으로 닥쳤다. 말 그대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은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다. ‘국조오례의’ 등의 고문헌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은 입춘을 설과 한식, 추석과 정월대보름처럼 명절로 쇠기도 했다고 한다. 돌아보면 이번 겨울은 날씨만 추운 게 아니었다. 마음까지 얼어붙었다. “손님은 없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소상공인들의 한숨 소리가 깊었고, 12·3 비상계엄과 관련된 재판을 보며 적지 않은 국민들이 허탈하게 혀를 찼다. 가슴 따스해지는 소식은 적었고 냉혹한 정치·경제적 현실을 확인하게 되는 뉴스는 많았다. 툭하면 ‘관세’를 들고 나와 한국을 압박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탓에 수출 기업들도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예전부터 혹한의 겨울은 수난과 고통의 은유로 곧잘 사용됐다. 시인과 소설가의 문장에 등장하는 ‘겨울’이란 어두움과 우울함, 막막함과 절망감을 의미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일까? 독자들은 문학 속에서도 봄을 그리워했고, 어서 빨리 입춘이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겨울’이 차가운 잿빛 세상의 메타포라면, ‘봄’은 새로운 시작과 희망에 어울리는 단어다. 땅 속에 웅크렸던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노랗고 붉은 화사한 꽃들이 앞을 다퉈 모습을 드러내는 시절이 바로 봄일 터이니. 올해 입춘은 매서운 겨울바람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걱정과 근심까지 훈풍 속에 멀리 데려가는 날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2-02

나도 포모 우울증?

포모(FOMO)는 어떤 대상에 대해 자신이 제외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심리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영어로 ‘Fear Of Missing Out’로 고립 공포증으로 풀이 된다. 처음에는 경제학 유통 용어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사회적 현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소셜 미디어 사용이 일상화된 요즘은 “남들과 다르지 않아야 되고” 혹은 “남들이 하는 것에 뒤지지 않게 쫓아가야 되는” 강박감을 느끼는 현상을 두고도 포모라고 부른다. “포모 마렵다” “포모가 온다” 등 SNS에 등장하는 이런 표현은 이제 자연스럽다. 비트코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 이런 표현을 쓰는 데, 가격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미리 사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감 내지 박탈감을 표현한 용어다. 한국인에게는 별난 중독소비 성향이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명품 줄서기, TV나 SNS 등에 소개된 맛집에 줄서는 문화, 특정 브랜드의 신상품이 나오면 오픈런을 해서라도 기어이 물건을 사고야 마는 행위 등도 일종의 포모스런 행위다. 포모 우울증은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증상이다. 특히 국내 증시가 급등하면서 이런 증상을 느끼는 사람이 늘고 있다. 주식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하지 않은 대로 주식에 투자했으나 돈을 벌지 못한 사람까지 포모 우울증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증시 급등이 불러온 심리적 불안감이 원인이다. SNS상에서 다른 사람의 수익률을 보며 “지금이라도 나도 뛰어들까” 하는 강박감에 시달린다면 이도 일종의 포모 우울증에 포함된다. 국내 증시가 지수 5000을 돌파하면서 세상 사람 모두 부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면 나도 포모 우울증에 갇힌 사람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2-01

꼰대의 입, 어른의 귀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다채로워졌다. 예전엔 노인 정도로 통용됐는데, 요즘엔 어르신, 시니어, 노인, 꼰대처럼 다양하다. 나이 드는 일은 자연적인 현상인데, 세태풍속이 일변(一變)하는 시기여서 마음이 편치 않다. 생명 가진 모든 것에는 생로병사가 필연인데, 그것을 거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오늘도 꺾일 줄 모른다. 데이비드 싱클레어 하버드 의대 유전학 교수는 ‘노화의 종말’(2020)에서 노화는 질병이고,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심장병, 치매, 암 같은 것은 질병이 아니라, 노화의 증상이라고 규정하면서, 노화 자체가 질병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나아가 노화는 질병일 뿐만 아니라, 만병의 어머니라고 단언하면서 노화는 늦추거나 멈추거나 심지어 되돌릴 수 있다고 확언한다. 나는 그의 주장에 일면 동의하지만, 노화를 역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이 문제는 짧은 지면에서 다루기에는 방대한 영역과 맞닿아 있기에 여기서 논의하는 일은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요즘 불거지는 ‘특이점(特異點)’ 논란처럼 그냥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유해야 할 주제다. 각설하고, ‘꼰대의 입, 어른의 귀’라는 표현에 담긴 불편한 소회(所懷)를 잠시 풀어놓고자 한다. 나이 든 축이 조금 길게 입을 떼면 그는 꼰대로 격하되고, 인내심을 갖고 경청하면 어른이라는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생각한다. ‘노파심(老婆心)’으로 젊은이들에게 충고하려는 말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바람에 말이 길어지는 것은 다반사(茶飯事) 아닌가. 어떤 노인의 영혼과 정신은 청춘보다 시퍼렇게 살아서 대쪽보다 단단하고, 강철보다 견고하다. 어떤 청년의 심성에는 100세 영감의 편벽고루와 이기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런 놀라운 대비를 수없이 보았다. 그들을 낳고 기른 부모와 사회-정치-문화적 환경에 순치된 애늙은이들이 설레발치는 이른바 ‘TK 정서’가 그런 본보기다. 공자는 제자들과 나눈 문답에서 ‘회인불권(誨人不倦)’을 강조한다. 사람을 가르침에 지쳐서는 아니 된다는 얘기다. 여기서 ‘회(誨)’를 파자(破子)하면, 매번 말한다는 뜻이다.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잘못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거슬리는 대로, 마음에 어긋날 때마다 말로써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몹시 번거롭고, 배우는 자는 또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반면에 노자는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설파한다. 말로써 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는 의미다. 말로써 인간을 교화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함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나이 먹은 자들의 솔선수범과 언행일치가 말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다. 그래선지 ‘논어’는 1만6000자 정도인데, ‘도덕경’은 5273자로 소략(疏略)한 편이다. 듣기에 장황해도 필요한 말은 경청함이 옳은데도, 말 때문에 꼰대로 몰고 감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허황한 말을 인내심 있게 듣는 노인을 어른으로 떠받드는 일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지경에 이른 나이 든 자들의 증가를 희망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2-01

포항시 남·북구 균형 발전의 골든타임

포항시의회 제328회 임시회가 지난주 목요일부터 시작됐다. 2026년 첫 임시회인 만큼, 지난 금요일 남·북구청 업무 보고를 시작으로 각 국별 새해 주요 업무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필자는 이번 구청 업무 보고 자리에서 ‘남북구 균형 발전을 위한 구청 차원의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양 구청의 일반현황을 살펴보면 남구와 북구의 인구 편차는 이미 포항시 전체 인구 대비 약 10% 수준까지 벌어져 있다. 2025년 12월 말 기준 포항시 전체 인구는 49만7510명으로 50만 선이 무너졌다. 이 가운데 북구는 27만3501명(54%), 남구는 21만5816명(44%)으로 남구 인구가 북구보다 약 10% 적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추세다. 남구 인구는 전년 대비 4700여 명이 감소해 1% 가까이 줄었고, 그만큼 격차는 더 확대됐다. 예산에서도 차이는 분명하다. 2026년 북구청 예산은 587억원, 남구청은 471억원으로 약 116억 원의 차이를 보인다. 인구 규모에 따른 배분이라 하더라도, 최근 흐름을 보면 이 격차는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단순한 수치상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적 불균형이다. 북구에는 신규 아파트 분양과 입주가 집중되면서 주택 물량이 급증하고 있지만, 거래 부진과 미분양 증가로 지역 부동산 시장 전반이 영향을 받고 있다. 주거단지가 북구로 편중되면서 출퇴근 시간대 교통 혼잡도 심화하고 있다. 반면 남구의 인구 감소에는 철강 경기 위축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역 주력 산업의 둔화는 곧 일자리 축소로 이어지고, 이는 인구 유출과 생활권 위축으로 연결된다. 학교와 학생 수 감소, 상권침체, 생활 인프라의 공동화 현상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산업과 주거 기능이 결합한 남구의 특성상 철강 경기 침체는 도시 활력 저하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표로 확인되는 불균형이 분명함에도, 포항시의 2026년 주요 업무에는 남·북구 균형 발전 관련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이제 포항시 정책은 개발의 총량 확대가 아니라 배분의 균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주택공급, 산업배치, 교통망, 교육·문화 인프라를 남·북구 균형지표에 맞춰 재조정해야 할 시점이다. 남구에는 산업 다변화와 일자리 회복, 정주 여건 개선을 위한 집중 투자가 필요하고, 북구에는 주택공급 속도 조절과 기반시설 확충이 병행돼야 한다. 같은 도시 안에서 서로 다른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면, 처방 또한 달라야 한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격차는 구조로 굳어질 수 있다. 포항의 지속가능성은 남북의 균형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 업무 보고에서 양 구청장께도 ‘구청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 개발 및 예산 편성’을 당부했고,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 약속이 현장에서 실제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무엇보다 포항시가 남·북구 균형 발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식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실력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길 바란다. 지금이 바로 남·북구 균형발전의 골든타임이다. /김은주 포항시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026-02-01

랜드마크는 도시의 의지다

나는 ‘랜드마크’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느낀다. 도시는 랜드마크를 통해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기대가 너무 쉽게 정치적 수사로 소비되는 장면 또한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랜드마크의 영향력을 부정하긴 어렵다. 도시재생에서 랜드마크의 효용을 말할 때 흔히 ‘빌바오 효과’가 언급된다. 철강·조선·항만물류에 의존하던 스페인의 산업도시 빌바오는 1970~80년대 산업구조 변화로 실업과 도시 쇠퇴가 심화된, 이른바 망해가던 공업도시였다. 그러나 1997년 강변의 낡은 항만 부지에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가 들어서며 도시 이미지는 관광과 문화로 전환되었고, 빌바오는 ‘문화로 재탄생한 도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의 랜드마크가 만들어낸 이 강력한 파급력은 이후 수많은 도시에서 랜드마크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작동해왔다. 하지만 빌바오가 남긴 진짜 교훈은 “유명한 건물 하나면 된다”가 아니다. 랜드마크는 해답이 아니라 촉매이며, 촉매가 작동하려면 접근성·동선·주변 공간·프로그램·운영까지 도시 전체의 준비가 필요하다. 외형만 모방한 랜드마크가 반복해서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동대문 DDP설계로 잘 알려진 런던의 자하 하디드 건축사무소에서 12년 동안 일하며 여러 나라의 랜드마크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형태’지만, 실제로 더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도시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였다. 랜드마크는 멋진 조형물을 넘어, 사람들이 실제로 걷고 머물고 다시 찾게 만드는 경험의 장치여야 한다. 운영이 빈약하면 사진 배경으로 끝나고, 주변과 단절되면 섬이 되며, 도시의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상징은 금방 낡는다. 최근 포항시가 영일대해수욕장 공영주차장 부지에 노보텔 브랜드의 26층 규모 특급호텔을 건립해 체류형 관광과 MICE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본궤도에 올린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포항이 어떤 도시로 전환하려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나 관광도시는 “좋은 호텔을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랜드마크가 되려면 “특급”이라는 등급이나 외관의 화려함이 아니라, 포항만의 다름과 가치를 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누가 이 건축을 설계했는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가, 이 프로젝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건축가의 정체성과 설계의 방향, 공공과 민간이 어떤 비전을 공유했는지까지 모두 도시 브랜딩의 일부가 된다. 결국 사람들은 호텔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호텔이 대표하는 포항의 세계관을 경험하러 온다. 랜드마크는 차이와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물리적 증거여야한다. 그때 비로소 이 프로젝트는 미래 세대를 위한 유산이 될 수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건물이 아니라, 여기만의 건물이어야 한다. 결국 랜드마크는 도시의 자존심이 아니라 도시의 의지를 스스로 공간과 형태로 증명한다. 포항의 새로운 특급호텔이 “건물 하나”가 아니라, “도시의 시스템”을 바꾸는 촉매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2-01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실전편 - AI 답변을 내 손으로 다듬는 법

지난주에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네 가지 기법을 알아봤다. 예시로 가르치기, 단계별로 생각하게 만들기, 역할 맡기기, 제약 조건 명확히 하기 등 이들, 기법들로 AI의 답변 품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이번 주에는 나머지 여섯 가지 기법을 마저 익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기법 활용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기법: 출력 형식 구조화(Output Format Structuring) 인공지능(AI)에게 “어떤 형태로 답해달라”고 프롬프트를 제시해야 결과물의 활용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을 확인해 보자. 중소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이 대리는 채용 공고문을 작성할 때 AI를 자주 활용한다. 처음엔 “마케팅 담당자 채용 공고 써 줘”라고 물었다. AI는 긴 문장으로 자격 요건, 우대 사항, 복리후생을 나열했는데, 채용 사이트에 올리기엔 형식이 맞지 않았다. 이 대리는 채용 공고 형식을 지정해서 다시 물었다. “마케팅 담당자 채용 공고를 다음 형식으로 작성해 줘. [회사 소개]: 2~3문장 [담당 업무]: 글머리 기호로 5개 [자격 요건]: 필수/우대 구분하여 각 3개씩 [근무 조건]: 표 형식(항목, 내용) [지원 방법]: 1문장“ 결과는 바로 채용 사이트에 복사해서 붙여 넣을 수 있는 형태로 나왔다. 표, 글머리 기호, 섹션(Section) 구분이 명확해 가독성도 좋아짐을 확인 할 수 있다. 출력 형식 지정은 보고서, 이메일, 기획안 등 정해진 양식이 있는 문서 작업에서 특히 유용하니 독자분들이 활용해 보시기를 권한다. 여섯 번째 기법: 반복 개선(Iterative Refinement) 한 번에 완벽한 답을 기대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점점 다듬어 가는 방법이다. 결혼식 축사를 준비하던 어느 신랑 친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처음 “친구 결혼식 축사 써줘”라고 물었더니 AI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로 시작하는 천편일률적인 축사를 내놓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AI와 질문과 대화를 이어갔다. “너무 형식적이야. 우리가 대학 때 같이 밤새 과제를 했던 에피소드를 넣어줘.” AI가 수정했다. “근데 좀 길어. 3분 안에 끝낼 수 있게 줄여줘.” 다시 수정됐다. “마지막 문장이 뻔해. 신랑 별명인 ‘곰돌이’를 활용한 재치 있는 마무리로 바꿔줘.“ 세 번의 피드백 끝에 박씨만의 개성이 담긴 축사가 완성됐다. 반복 개선의 핵심은 ‘무엇이 아쉬운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다시 써줘”보다 “톤을 더 유머러스하게”, “분량을 절반으로”, “이 부분을 더 자세히”처럼 방향을 제시하면 AI는 빠르게 개선해 나간다. 일곱 번째 기법: 생각 과정 보여주기(Think Step by Step) “Think Step by Step”이라는 간단한 문구를 추가하면 AI의 추론 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 특히 수학 혹은 논리적 분석이 필요한 경우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풀이 과정을 설명할 때 AI를 보조 도구로 쓴다고 가정하자. “한 상자에 사과 12개가 들어있고, 5상자에서 매일 3개씩 일주일간 판매하면 남는 사과는?” 이 문제를 AI에게 그냥 물으면 그냥 39개하고 답만 나온다. 하지만 “Think Step by Step으로 풀어줘”라고 하면 AI는 이렇게 답한다. “1단계: 전체 사과 수 = 12개 × 5상자 = 60개. 2단계: 일주일 판매량 = 3개 × 7일 = 21개. 3단계: 남은 사과 = 60개 - 21개 = 39개.“ 이 기법은 AI가 중간 과정에서 실수하는 것을 줄여준다. 복잡한 계산, 논리 문제, 의사결정 분석 등에서 “단계별로 생각해 줘”라는 한 마디가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AI 기능을 함께 활용한다면, 수학 선생은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풀어가는 멋진 교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덟 번째 기법: 컨텍스트 레이어링(Context Layering) 대화가 길어질수록 AI는 앞서 나눈 대화의 맥락을 활용한다. 이를 전략적으로 쌓아가면 점점 정교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소설 쓰기에 도전 중인 어느 대학생 사례를 확인해 보자. 첫 대화에서 학생은 이 소설의 시대 상황을 설명했다. “2050년 한국, 기후변화로 여름이 6개월이 된 세상이야.” 두 번째 대화에서 주인공을 설정했다. “주인공은 28세 기상청 연구원 서연이야. 낙천적이지만 가족을 기후 재난으로 잃은 트라우마가 있어.” 세 번째에서 갈등 구조를 잡았다. “서연이 발견한 데이터가 정부의 은폐와 관련 있다는 걸 알게 돼.” 이렇게 맥락(Context)을 쌓아놓고 “1장 오프닝 써줘”라고 하면, AI는 앞서 설정한 시대 상황, 캐릭터, 갈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글을 쓸 것이다. 소설뿐만이 복잡한 작업을 수행할 때 이 방법을 활용해 보기를 권한다. AI와 대화를 나누며 맥락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홉 번째 기법: 창의성 조절하기(Temperature Concept) AI에게 “창의적으로” 또는 “정확하게”라고 요청하면 답변 스타일이 달라진다. 이것이 Temperature 개념의 실용적 활용이다. 어느 광고 카피라이터가 제품에 대해 두 가지 버전을 받아보는 내용을 살펴보자. “친환경 텀블러 광고 문구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써줘.” 결과: “스테인리스 304 소재, 12시간 보온, 500ml 용량의 친환경 텀블러입니다.” 같은 제품에 “창의적이고 파격적으로 써줘”라고 하면? “지구가 당신의 커피잔을 기억합니다. 매일 아침, 작은 혁명이 시작됩니다.” 전자는 제품 상세 페이지에, 후자는 SNS 광고에 적합하다. 정보 전달이 중요한 작업에는 “사실에 기반해서”, “정확하게”를, 아이디어가 필요한 작업에는 “자유롭게”, “창의적으로”를 붙이면 원하는 결과에 가깝게 AI가 결과를 제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열 번째 기법: 메타 프롬프팅(Meta Prompting) “이 질문을 어떻게 물어야 좋은 답을 얻을 수 있을까?”를 AI에게 묻는 방법이다. 질문하는 법을 질문하는 것이다. 창업을 준비 중인 한 젊은이는 사업계획서 작성이 막막했다. “사업계획서 써줘”라고 바로 물어봐야 너무 뻔한 답이 나올 거라 예상한 젊은이는 먼저 이렇게 물었다. “좋은 사업계획서를 AI에게 요청하려면 어떤 정보를 제공해야 해? 내가 준비해야 할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 줘.“ AI는 사업계획서 준비에 적합한 프롬프트를 아래와 같이 만들어 줄 것이다. “1. 해결하려는 문제와 핵심고객 2. 기존 경쟁사 대비 차별점 3. 수익 모델과 가격 전략 4. 초기 자금 규모와 사용 계획 5. 창업자의 관련 경험이나 강점 등“ 이 자료를 준비한 젊은이는 리스트에 맞춰 정보를 정리한 후 다시 질문했다. 그 결과는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업계획서였다. 메타 프롬프팅은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를 때’ 특히 유용하다. 어떻게 보면, AI를 접하는 독자들이 초급이든 고급이든 이 방식만 알고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기법들의 조합(Combining Techniques) 지난주 네 가지와 이번 주 여섯 가지, 모두 열 가지 기법을 알아봤다. 중요한 건 이것들을 상황에 맞게 조합해서 활용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업 제안서를 작성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은 VC 투자 심사역 출신 컨설턴트야(역할). 다음 형식으로 작성해 줘: 요약-문제정의-해결 방안-시장 규모-경쟁분석-재무계획-팀 구성 계획 순서로(출력 형식). 실현성 있는 숫자만 사용하고 과장된 표현은 배제해 줘(제약). 먼저 이 사업 아이템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Think Step by Step), SWOT 분석도 부탁해 그 분석을 바탕으로 제안서를 작성해 줘.“ 한 문장에 여러 기법이 녹아있다. 이것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진짜 힘이다. 지난주와 이번 주에 걸쳐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핵심 기법 열 가지를 모두 다뤘다. “AI에게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셈이다. 다음 주에는 AI기술과 방대한 데이터의 활용으로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발생하는 AI의 거짓말 현상, 이른바 ‘환각(Hallucination)’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AI를 믿고 활용하되, 확인하는 법을 알고 있으면 유용할 것이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2-01

신발장의 경제

몇 년 전부터 발 앞부분에 통증이 가끔 왔다. 앞부리가 조금 뾰족한 신발을 신으면 증상이 더 심해졌다. 걷다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에 한참을 멈춰 선 적도 있었다. 앞코가 좁은 신발은 하나씩 신기 편한 것으로 대체되어 신발장 안은 대부분 운동화가 차지하고 있다. 원피스를 입고 나갈 생각이어서 구두를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색의 스팽클이 촘촘히 박힌 흰색 구두가 눈에 들어온다. 모양이 예뻐서 버리지 못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 옆 한구석에 몸통을 덩굴로 묶어 놓은 운동화가 놓여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조금은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인들과 가까운 산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자주 신지는 않았지만 버리기 아까워 가지고 있던 운동화가 있었다. 그것을 신고 가기로 했다. 출발은 산뜻했다. 산길을 즐겁게 대화하며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발밑의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가벼워진 듯 했다. 모처럼 산에 온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걸었다. 뒤에서 오던 분이 신발 밑창 좀 보세요 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아뿔사. 운동화의 밑창이 양쪽 다 벌어진 것이었다. 부끄러움은 다음 일이고 당장의 조치가 필요했다. 주변에 인가가 없는 산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한 분이 근처에서 덩굴을 주워 왔다. 단단해서 묶으면 괜찮을 것이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운동화를 묶었다. 생각보다 편했고 매듭도 풀리지 않아서 하루 종일 그것을 신고 다녔다. 때때로 우리 사이의 화제가 사라졌을 때 그 이야기로 웃을 수 있었다. 그 운동화를 버리지 않고 신발장에 둔 것이다. 눈길을 보내면서도 흰색 구두를 집어 들었다. 그 날 행사에 참석한 내내 수시로 통증이 나타나서 집중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걷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경제학에 매몰 비용의 오류라는 말이 있다. 이미 지출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이 매몰 비용이다. 이것은 어떤 선택을 해도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들어간 돈이나 쓴 시간이 아까워 손해인 줄 알면서도 비합리적으로 계속 붙들고 있는 판단 실수를 매몰 비용의 오류라고 한다. 중도에 단념하지 못한 경험이 제법 있다. 끝까지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이런 오류는 일상의 가벼운 문제에서도 나타나지만 크게는 기업이나 국책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손실을 피하고 싶은 성향과 함께 자기 합리화나 책임 회피와 같은 마음들이 있다고 한다. 미래의 수익과 비용을 생각해서 과감한 결정을 해야 함에도 손실로 인한 고통을 더 크게 느껴 그런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몸통이 덩굴로 묶인 운동화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깝다거나 버리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을 보면서 보냈던 시간이나 좋은 기억 때문에 필요 없고 사용할 일이 적은 것들을 붙들고 있지 말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순간 잊어버리고 옷에 어울리는 구두에 혹한 것이었다. 구두를 신고 나가면 발에 통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었다. 늘 후회는 일을 당하고 나서야 나타나는 후발 주자이다. 매몰 비용 때문에 현재나 미래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포기를 하지 못했던 나를 되돌아본다. 추억이라는 것, 함께 한 시간이라는 것은 실물로 붙들고 지키려고 할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를 지키는 게 아니라 현재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더구나 잊지 않기 위해 버려야 할 신발 하나를 신발장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같은 실수. 작은 것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때로는 버려야 하는 것에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신발장을 열었다. 아직도 아까워 버리지 못한 신발들이 눈에 띄었다. 한 번도 제대로 신지 못한 샛노란 구두 한 켤레가 나를 빤히 보는 듯 하다. 큰 종이봉투를 가져와 신지 않을 신발들을 담았다. 신발을 담는 손길이 부쩍 바빠진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6-02-01

2026년을 ‘리셋 포항’의 원년으로 삼자

지난해부터 지역의 성장한계를 절감하며 ‘리셋 포항’(Reset Pohang)을 꾸준하게 주장해 왔다. ‘리셋 포항’은 산업 구조의 편중, 청년 유출과 인구 감소 등 복합적 문제에 직면한 포항의 도시 구조·산업·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짜자는 것이다. ‘리셋 포항’은 과거의 성과를 부정한다는 정책이 아니라 포항이 가진 소중한 자산들을 재설계·재배치·재조합해 지속 가능한 미래 100년을 열어나가는 성장 전략이며, 선택이 아니라 포항의 생존과 지속 성장을 위한 필수 추진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왜 ‘리셋 포항’인가. 이유는 이렇다. 먼저 산업 구조의 취약성이다. 포항은 지금까지 포스코라는 강력한 엔진에 의존해 오면서 산업 다각화는 미미했고, 신산업 유입·육성도 제한적이었다. 이는 지금의 산업 구조로는 미래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다음은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이다. 청년층은 수도권과 대도시 등으로 떠나고, 고령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인구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활력을 저하하고, 소비·문화·교육 등에도 동반 약화를 촉진한다. 이는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점점 ‘조용한 도시’로 전락한다는 신호일 것이다. 그리고 도시 이미지의 고착을 들 수 있다. 포항은 여전히 산업 도시 이미지에다 일자리가 있어도 살고 싶은 곳은 아니라는 인식이 많은 편이다. 이는 도시의 이미지와 브랜드를 바꾸지 않으면 사람도, 기업도 유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진과 홍수 등을 경험하면서 ‘안전한 도시인가’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이는 도시 설계와 생활 시스템을 다시 짜야 한다는 주문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리셋 포항’은 지금이 바로 적기가 아닐 수 없다. 포항은 지금, 이대로 계속 정체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변화와 성장의 길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갈림길에 있다. 한 도시가 쇠퇴를 시작하면 이를 되살리는데 몇 배의 비용과 시간이 든다. 포항은 회복 가능한 마지막 지점에 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래서 2026년을 ‘리셋 포항’의 원년으로 삼자고 제안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산업 구조 리셋이 필요하다. 산업 구조를 철강 중심에서 에너지·바이오·신약·신소재 등 신산업으로 확장하고, 기존산업과 신산업 연결형 클러스터 조성도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도시 공간 리셋이다. 산업과 차량 중심 공간에서 생활·문화·보행 중심 공간, 노후화된 산업·항만·도심 공간의 단계적 재구성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년 중심 도시로의 전환이다. 이제는 청년을 정책 ‘대상’이 아닌 기획·운영의 주체로 참여시켜야 하고, 더불어 도시 이미지 리셋도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도시를 리셋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중점적으로 실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시장 직속의 전담 조직은 물론 전 부서가 참여하는 통합 기획 기능 구축도 요구될 것이다. 이에 더해 시민 참여형 포항 리셋 프로그램 운영 등 행정 주도에서 시민 협력형 정책 구조 전환도 과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리셋 포항’은 △지속 가능한 산업·환경 구조 확보 △청년 유입 및 정착 기반 마련 △도시 활력 및 지역 경제 회복 △지역의 중장기 도시 경쟁력 강화 등의 효과가 기대되는 미래 성장 전략이 아닐 수 없다. 2026년이 리셋 포항의 원년이 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충운 환동해연구원장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2-01

지방선거 실패하면 현 지도부 책임이다

상식이 무너지는 시대가 있다. 1980년대 신군부는 야당마저 직접 만들었다. 야당이 5공화국 정권의 ‘2중대’(민한당), ‘3중대’(국민당)라고 불렸다. 양 김 씨(김영삼·김대중)가 신민당을 만들어 돌풍을 일으키자, 안기부(현 국정원)가 공작으로 내분을 일으켰다. 양 김 세력은 집단 탈당해 다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려 하자, 안기부가 사주한 깡패 수백 명이 각목을 휘두르며 방해했다. ‘용팔이’ 사건이다. 한국 정치에서 각목이 이게 처음은 아니다. 76년 신민당 전당대회도 당권파와 비주류연합이 ‘각목대회’로 치렀다. 자유당 시절에는 이정재 같은 정치 깡패들이 설쳤다. 따지고 보면 고려시대 무신정권도 깡패 전성시대다. 무신정권 100년간 칼을 든 무리가 국가의 법 위에 군림했다. 무뢰배들이 길가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공공재물을 훔치기도 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권력자들이 이런 불량배들을 사병으로 부렸다. 몽골 침략기에도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 역사는 반복된다. 무뢰배 시대가 역사 이야기로 사라진 것 같지 않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한동훈 전 대표를 제명했다. 당원 게시판에서 가족 명의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는 이유다. 강성 우파는 한 전 대표를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비상계엄을 막고, 윤 전 대통령을 탄핵했다는 이유다. 장 대표도 대표 경선 때 “당론을 어기면서까지 탄핵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탄핵을 막아내지 못했다. 국민이 만들어준 정권을 2번 연속 지켜내지 못했다”라고 사과했다. 정권을 빼앗긴 책임이 비상계엄을 한 윤 전 대통령이 아니라, 탄핵에 동조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지목한 셈이다. 장 대표는 ‘윤 어게인’ 세력을 업고 대표가 됐다. 그들에게 빚을 졌다. 한동훈 전 대표를 쳐야 하는 빚이다. 향후 정치 행보에서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장 대표는 정치 경험이 짧다. 하지만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쳐야 권력을 잡는다고 민주당에서 배웠다. 지난 총선 때 이재명 대통령은 비(이재)명계 인사들을 가차 없이 ‘학살’했다. 컷오프(공천 배제) 하거나, 터무니없이 불리한 핸디캡을 씌워 경선하게 했다. 과거 ‘각목 전당대회’가 왜 벌어졌겠는가. 거대 양당 외에는 살아남기 어렵다. 사표(死票)를 던지지 않으려는 투표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제3당으로 성공한 것은 지역 기반이 튼튼한 3김 씨 정도나 가능했다. 더구나 신당을 만들어 보수표만 분산시키면, 선거 패배의 책임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 꼼짝없이고사할 처지다. 그러나 민주당과 큰 차이가 있다. 지지 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없다. 대중의 여론은 성난 파도와 같다. 통제력을 잃고, 얹혀가면 뒤집힐 수 있다. 이 대통령은 극성 지지 세력인 ‘개딸’을 끌고 갔다. 그러나 장 대표는 강경 목소리에 끌려다니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지 세력을 확산해 왔다. 자기가 만든 명분으로 지지 세력을 설득하고, 확산했다. 그 논리가 옳건 그르건, 지지 세력을 늘려가는 바탕이 됐다. 그러나 장 대표는 스스로 해제 투표에 참여한 비상계엄과 탄핵 반대라는 논리적 모순 속에 갇혔다. 더구나 ‘윤 어게인’은 확산 가능성이 없다. 강경 보수 세력으로 스스로 고립해 간다. 선거가 넉 달 앞이다. 여권 내부의 권력투쟁, 트럼프의 위협 등 집권 세력을 공격할 거리가 많았지만, 국민의힘은 모두 놓쳤다. 당내 싸움하느라 대여 투쟁은 묻어버렸다. 지지율도 스스로 발등을 찍고 있다. 장 대표의 단식도 한 전 대표를 치기 위한 정지 작업이라는 게 확인됐다. 시작할 때 내건 특검 요구는 흔적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지면 장 대표가 책임질 수밖에 없다. 윤 전 대통령은 총선 패배의 책임도 내부 총질로 돌렸다. 장 대표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아무리 주장해도, 모든 언론이 그의 책임이라고 지목했다. 중도에 하차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명 변경 등을 시도한다지만, 효과가 의문이다. 진정성을 담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2-01

정치인을 잘 선택해야 하는 이유

관계로 시작해 관계로 끝나는 인간의 삶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 속에 놓이며, 그 관계는 삶의 전 과정과 함께 지속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는 뜻이다. 사회란 두 사람 이상이 맺는 관계의 구조이며,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살아가고 성장하며 세상을 떠난다. 부모와 자식의 ‘천륜과 인륜’, 시절이 만들어낸 인연,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으로 다가오는 만남이 삶을 채운다. 그 과정에서 좋은 관계도 있고, 무난한 관계도 있으며, 때로는 피하고 싶은 관계도 생겨난다. 선한 인연과 악한 인연, 오래 남는 인연과 스쳐 가는 인연은 인간관계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관계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관계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선택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있다. 관계는 감정이 아니라 선택으로 성립된다 인간관계는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지속 여부는 선택의 문제다. 관계는 정서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현실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편익과 비용을 동반한다. 개인이 느끼는 관계의 편익이 부담보다 크다고 판단될 때 관계는 유지된다. 이는 계산적이라기보다 삶의 현실에 가까운 판단이다. 모든 사람은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닌다. 개인적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기준은 상대의 장점이 단점보다 크게 느껴지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인간관계 역시 주체적인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관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며, 그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상대방 또한 같은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 관계는 균형을 가진다. 합리적 선택으로서의 인간관계 이러한 관계 인식은 합리적 선택 이론과 맞닿아 있다. 개인은 자신의 선호와 비교우위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진학과 전공, 배우자, 직장, 주거지 선택은 물론 은퇴 이후의 친구 관계와 취미, 배움의 방식까지도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합리적 개인이란 이기적인 개인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분명히 인식하고 선택하는 사람이다. 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의 시간과 감정, 에너지를 배분하는 일이다. 따라서 관계 선택은 삶의 방향과 내용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관계는 사적 영역에 머무는 듯 보이지만, 그 선택 방식은 사회적으로도 보편성을 가진다. 개인의 선택은 사회적 선택으로 확장된다 개인적 선택의 논리는 사회적 선택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선택, 경제적 선택, 정치적 선택 역시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무엇을 선호하는가? 어떤 선택이 나와 공동체에 더 이익이 되는가? 특히 정치의 계절이 오면 이 질문은 더욱 분명해진다. 정당과 후보자, 정치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개인은 장점과 단점을 비교한다. 이때 기준은 단순히 호불호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 지역의 미래, 국가의 방향이 함께 고려된다. 정치적 선택은 개인의 입장, 지역의 입장, 국가의 입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판단이 사회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선택의 책임이 사회의 질을 만든다 정치적 선택은 가장 종합적인 인간관계의 선택이다. 정치인은 나를 대신해 결정하는 사람이며, 사회의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다. 따라서 정치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개인적 관계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 장점이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는가? 개인의 이익을 넘어 지역과 국가의 지속 가능성에 기여하는가? 이 선택의 결과는 결국 사회 전체의 비용과 편익으로 돌아온다. 무심한 선택은 무책임한 사회를 낳고, 성찰 없는 관계는 공동체의 질을 낮춘다. 인간관계의 선택을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관계를 선택하는 기준이 사회를 결정한다 인간관계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며, 그 선택은 개인을 넘어 사회로 확장된다.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는 곧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다. 개인의 관계 선택이 모여 사회의 문화가 되고,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관계를 선택하는 기준은 삶의 태도이자 시민의 책임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선택하고 어떤 관계를 지지하는가에 따라 사회의 모습은 달라진다. 관계의 선택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ㆍ전 대구경북연구원장

2026-01-30

준비되지 않은 김 부장들에게

바야흐로 지방선거의 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각종 현수막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지역 정치인들의 문자 세례와 각종 여론조사 전화가 휴대폰을 괴롭힌다. 각자가 ‘준비된 일꾼’, ‘검증된 후보’, ‘지역의 적임자’임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들이 왜 지방선거에 나오려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부분이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정책들을 나열하지만, 정작 지역의 미래와 장기적 성장 전략에 대한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다. 지방선거를 약 4개월 가량 앞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작년 연말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가 화제를 모았다. 많은 직장인들이 극 중 김 부장이라는 캐릭터에 격한 공감을 표했다. 대기업 임원이 되기 위해 평생 직장에서 헌신했지만, 결국 임원이 되지 못하고 조직에서 버림받는 김 부장에 대해 시청자들의 동정 여론이 쏟아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이 드라마를 분석해보면 극 중 김 부장은 대기업 임원이라는 자리에 대한 욕망이 있을 뿐, 회사의 장기 전략이나 조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비전을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는 꼰대형 리더십으로 그려진다. 그러니 기업 입장에서는 김 부장이 임원을 달지 못한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지방선거에도 수많은 김 부장들이 출사표를 던진다. 자신이 지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기본이고, 과거의 치적을 열거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어필한다. 물론 그동안 정말 애썼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리더십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갈수록 벌어지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양질의 일자리 부족, 청년 인구 감소, 지방 소멸 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역의 난제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농경시대의 경험이 산업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듯이 지금까지의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미래 성장 전략이다. 비전 없는 지도자가 위험한 이유는 이들이 지역의 장기적 발전과 무관한 일들을 마구잡이로 추진하기 때문이다. 무능력한데 부지런한 리더가 얼마나 최악인지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드라마 속 김 부장처럼 지역의 리더십들은 언제나 바쁜 일정을 소화한다. 각종 준공식과 행사 참석, 주민 간담회 등 쏟아지는 보도자료로 성과를 연출하는 동안 지역의 미래 비전은 서서히 동력을 잃는다.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역 청년들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당장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지역의 권력 집단과 기성세대들의 입맛에 맞춘 공약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혁신이 어렵다. 준비되지 않은 김 부장들에게 묻고 싶다. AI가 노동을 대체하고, 디지털 플랫폼이 모든 산업을 블랙홀처럼 흡수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 지역의 미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상권 활성화’, ‘청년 유입’, ‘기업 유치’ 등 허황된 공약이 아닌, 지역사회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궁극적인 체질개선 방안이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어떤 김 부장을 임원으로 만들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1-30

사랑의 온도가 전해지는 사회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연말이면 시작하는 사랑나눔 캠페인이 올해도 목표액을 채우고 무난히 마무리됐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목표액 106억2000만원을 조기 달성했다고 모금회는 발표했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올해는 개인 기부금이 는 반면 기업 기부는 작년보다 조금 줄었다고 밝혔다. 모여진 성금은 지역의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을 발굴,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경제력이 세계 10위권 국가라 하지만 아직도 공공사회복지면에서 세계 중위권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의 공공사회복지 지출은 GDP 대비 15.5%로 OECD 국가 평균 20%에 못 미친다. 그러나 의료와 교육 분야는 한국이 꽤 높은 평가를 받는다. 복지사각지대란 복지 정책이나 제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문제는 도움이 필요해도 사회복지망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상존한다는 것이다. 작년 대전에서 60대 여성과 30대 남성 모자가 사망한 지 약 한 달만에 발견된 일이 있다. 경찰은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다. 아파트 관리비가 밀려 있었고 단전, 단수 독촉장이 집안에 수북 쌓여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해마다 세밑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쌀자루나 라면 박스, 돈 봉투 등을 몰래두고 가는 이름 없는 천사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훈훈케 했다. 불황으로 온정의 손길이 줄어들 것을 걱정했던 사랑의 온도탑은 그래도 건재했다. 대구 사랑의 온도탑이 조기 달성됐다는 소식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사랑이 넘쳐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1-29

'핑크수소'

최근 이어지는 강력한 한파로 저체온증 사망 사고와 심뇌혈관 질환 위험이 커지고 있다. 특히 난방비 부담이 큰 저소득 취약계층에게 겨울은 생존이 걸린 계절이다. 에너지가 곧 생명과 직결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과제가 겹쳐 있다. 바로 탄소중립이다. 화석연료에 계속 의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에너지 비용이 더 오르는 구조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한파에 강하고, 환경에도 부담이 적은 새로운 에너지 체계로의 전환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숙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 태양광과 함께 최근 주목받는 해법 중 하나가 바로 수소에너지다. 수소는 색깔이 없는 기체지만, 생산 방식에 따라 환경 영향을 구분하기 쉽게 색으로 부른다. 석탄 기반은 갈색, 천연가스 개질은 회색, 재생에너지 기반은 그린수소처럼 말이다. 이 가운데 원자력 전력을 활용해 물을 전기분해해 만드는 수소를 ‘핑크수소’라고 한다. 대구·경북은 이 ‘핑크수소’에 유리한 여건을 갖춘 지역이다. 울진 원전의 안정적인 전력을 활용한 대규모 수전해 수소 생산이 가능하고, 대구에는 바이오가스 기반 수소 인프라도 함께 구축되고 있다. 실제로 지역 청정수소 생산 로드맵을 보면, 2030년 이후 ‘핑크수소’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는 구상이 제시돼 있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면서도 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된다. 해외에서도 원전과 수소를 연계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원전의 남는 전력을 활용해 수소를 생산하고, 이를 산업과 수송 분야에 공급하는 실증사업이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원전 지역을 중심으로 수소 생산을 에너지 신산업으로 키우려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대구·경북은 울진의 ‘핑크수소’ 생산, 대구의 바이오가스 수소, 그리고 이를 연계한 청정연료 생산까지 아우르는 복합 수소 생태계를 구상하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는 수소 배관·저장 인프라, 수소 활용 산업 육성, 주민 수용성 확보가 핵심 과제로 떠오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 전환이 곧 지역의 새로운 먹거리”라는 인식 전환이다. 물론 ‘핑크수소’도 과제가 있다. 원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초기 인프라 비용, 수소 안전에 대한 우려 등 해결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시대에 선택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구·경북이 바이오자원과 원자력이라는 두 축을 바탕으로 청정수소 선도 지역으로 나아간다면, 기후위기 대응은 물론 지역 산업과 일자리에도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핑크수소’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대구·경북의 미래를 바꾸는 전환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와 방향이다. 선제적 준비와 과감한 정책 결단이 지역의 지속가능한 내일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대구·경북이 ‘핑크수소’ 에너지 정책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면, 탄소중립 선도 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물론 우리 이웃 모두가 따뜻하고 안전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미래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지역민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지지가 대구·경북의 핑크빛 미래를 만드는 동력이 될 것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1-29

포항문화재단이 나아가야 할 길

창립 10주년을 맞은 포항문화재단이 2026년을 인구 감소와 저성장 시대 속에서 ‘문화가 도시의 생존 조건’이 되는 원년으로 선포했다. 산업과 개발 중심 성장의 한계가 분명해진 지금, 문화의 역할을 도시 전략의 전면에 세우겠다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특히 핵심 전략인 ‘SODO(소도) 프로젝트’는 구도심을 공예와 융합예술의 벨트로 묶어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는 실질적인 청사진을 담고 있다. 단순히 보기 좋은 예술을 넘어 시민의 삶에 녹아들고 지역 경제의 동력이 되는 ‘문화의 산업화’를 꾀하는 것이 골자다. 이 같은 방향 설정은 포항문화재단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재단이 현재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시민’과 ‘공간’이다. 연간 수만 명이 찾는 동빈문화창고1969와 시민 주도 플랫폼 ‘판플러스’는 그 단적인 예다.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 만들어지고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 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김설보:여인의 숲’ 역시 이런 토대 위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포항문화재단은 다시 10년 미래의 출발선상에 섰다. 이제는 성과를 나열하는 시기를 넘어, 방향을 고도화해야 할 시점이다. 갈 길은 명확하다. 포항의 문화 업그레이드다. 지역의 문화가 정체되거나 머물면 그 도시는 삭막함만 더하게 된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포항만의 문화를 구축하고, 외지에서 포항의 그 문화를 보기 위해 걸음을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포항문화재단에 주어진 책무다. 포항 인구가 줄어드는 그 이면에는 각종 설문조사에서 드러나듯 문화에 대한 갈증도 한몫하고 있다. 물론 포항문화재단이 오롯이 포항 문화 전반을 책임지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도시가 가야 할 문화적 방향을 설계하고, 그 길로 가도록 이끄는 역할만큼은 재단이 앞장서야 한다는 점에서 책임은 가볍지 않다. 이상모 포항문화재단 대표이사가 재선임됐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포항만의 정체성을 현대적 콘텐츠로 치환해내는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왔다. 다시 지휘봉을 잡은 그가 취임 초 내건 ‘문화의 수신지에서 발신지로’라는 기치를 다시 어떻게 빛나게 할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지난해 APEC 2025 정상회의 당시 선보인 불꽃&드론쇼와 로보틱스 퍼포먼스 ‘이아피’는 포항의 첨단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이 결합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런 수준의 문화가 일회성 이벤트에 머무르지 않고 도시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일이다. 그래야 포항은 더 이상 문화를 소비만 하는 변두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발신지가 될 수 있다. 포항은 철강도시다. 단어가 주는 어감만으로도 무게가 느껴진다. 이제 포항만의 문화는 창작을 통해 이 ‘철강’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의 2년, 이상모 대표가 이끄는 포항문화재단이 ‘철’의 단단함에 ‘문화’의 유연함을 더해 포항을 세계적인 문화 매력 도시로 완성해 주길 기대해 본다. /임창희 선임기자

2026-01-29

AI와 로봇의 시대

스페이스엑스(SpaceX)와 테슬라(Tesla)의 창업자 일론머스크(Elon Musk)는 인류가 머지않아 ‘보편적 고소득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 전망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국가가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넘어, 대다수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경제 구조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논리는 단순하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그 결과 재화와 서비스가 넘쳐나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희소성에 기초한 화폐경제는 약화되고, 돈의 가치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뒤따른다. 공상과학 소설처럼 들리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미 변화의 조짐이 분명하다. 산업현장 곳곳에 자동화 설비가 들어서고, 사무직 업무마저 AI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보통사람들도 AI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생산라인에 로봇 도입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소식은 전환기의 긴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효율과 경쟁력을 이유로 자동화를 밀어붙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었던 장면이 또 한 번 펼쳐진다. 수년 내에 인간의 숫자와 맞먹는 로봇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라 한다. AI는 특정 분야에서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고, 활약 범위는 급격하게 확장되고 있다. 흐름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노동에서 해방된 사회는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정체성의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사람은 오랫동안 직업을 통해 자신을 규정해 왔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곧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일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다면, 인간의 역할과 존재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생산성이 극적으로 높아진 사회에서 그 성과가 과연 공평하게 분배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술을 소유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다면, ‘보편적 고소득’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인 불평등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도와 정책, 사회적 합의가 적절하게 뒤따르지 않으면 기술의 진보는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도 무조건적인 공포도 아니다. 다가올 변화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교육과 복지, 경제와 노동을 어떻게 재설계할지 고민해야 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지켜야 할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 일도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연대, 공동체 의식과 상생의 정신, 책임과 존엄 같은 가치는 기계화되거나 자동화될 수 없는 영역이다. AI와 로봇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인다. 시대의 모습이 유토피아를 당겨올지 아니면 새로운 불안과 불안정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부분,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술과 함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다시 인간에게 달려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28

유전형 탈모 보험 적용에 대하여

지난 12월 업무보고 때 이재명 대통령이 유전적 탈모에도 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하자 찬반양론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부터 그 자리에서 바로 난색을 표했다. 그동안 원형탈모나 지루성 탈모 같은 질병으로 인한 탈모는 질병으로 간주하여 보험 급여 대상이지만, 유전적 남성형 탈모는 미용 목적이 강하다고 보험 적용을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 달이 지난 현재 보건복지부는 건강바우처 사업에 청년 탈모 치료도 포함하는 방안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건강바우처는 복지부의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2024~2028)에 담긴 시범사업으로, 20~34살의 탈모인들이 분기별 1회씩, 1년에 4회 미만으로 의료를 이용했다면, 전년에 납부한 건보료의 10%(연간 최대 12만원)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보험료만 내고 혜택을 못 받은 금액 중 일부를 바우처 형식으로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건도 까다롭고 금액도 적어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논란을 보다가 오래전 대학 동창 만난 일이 생각났다. 대학 졸업 후 20년이 넘어 만난 남자 동창들은 모두 변함이 없었는데, 유독 한 동창이 어색하게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군대 갔다가 심한 사고를 당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심한 탈모가 와서 언제나 모자를 쓴다는 것이다. 대학 다닐 때 허물없이 지냈던 동창이라 장난삼아 모자를 건드렸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혹자는 우리 사회가 유난스럽게 외모에 민감하다며 드웨인 존슨이나 제이슨 스타뎀, 이연걸 같은 영화배우를 예로 들며 탈모인의 고민을 무시하지만, 일반인이 그들처럼 빡빡 밀고 다닌다면 어느 문화권이라도 호감형은 아닐 것이다. 유전이라서 질병이 아니라는 논리도 군색하고, 유전형 탈모 치료를 미용 목적이라고만 단정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유전형 탈모가 생존 문제라는 대통령의 인식도 심하다고 생각하다가 ‘털업’으로 활동하는 유튜버 최수호 씨가 가발 벗은 모습을 보니, 내 원형탈모가 보험 적용을 받은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10대 20대의 탈모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니 그들이 최수호 씨처럼 탈모가 심하면 정말 생존 문제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어떤 이는 탈모 인구가 1천만 명에 이르고, 10~30대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건강보험재정의 한계를 들어 반대한다. 그러나 고혈압 인구는 1천300만 명으로 의료기관 진료는 700만 명이 넘고 기대수명 증가로 30년 이상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다. 고혈압은 생명과 직결되고 탈모는 생명과는 상관없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고혈압은 인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탈모를 방치하는 사람은 없다. 유전형 탈모에 보험 적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보험이 적용되면 탈모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뀔 것이고 그러면 약 먹기를 꺼리는 경향도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조기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니 의학적으로 질병의 기준을 세워 약에 한정하여 보험을 적용하는 것은 공평한 처리라고 본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1-28

솔선리더십이 주는 긍정조직문화

‘부하 직원은 상사의 등을 보고 배운다‘라는 속담이 있다. 리더가 말보다 먼저 행동으로 기준을 보여 조직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솔선리더십이다. ‘하라‘가 아니라 ‘내가 먼저 한다.‘ 규정·구호보다 현장에서의 실천, 권한이 아니라 신뢰로 이끄는 힘을 말한다. 현업 개선 활동 참여, 설비 환경 청소 등 똑같은 일을 직책보임자들이 먼저 행하는 것으로, 현장 직원들이 공감하고 상하 간 마음으로 통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자발적 참여와 진정한 소통을 이루어 긍정조직문화를 형성하는 출발점이 된다. 솔선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3가지 조건을 갖춰야 목적과 기능을 발휘한다. 첫째, 말과 행동의 일치로 일관성이다. 안전을 강조하려면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보이지 않는 잠재위험‘ ’사각지대 6대 잠재위험‘ 등을 직접 찾아 먼저 행하며, 비용 절감을 말하면 불필요한 회의·의전부터 줄여 나가는 것이다. 즉, 구성원은 말이 아니라 리더의 선택을 본다. 둘째, 불리한 상황에서도 먼저 행동한다. 문제 발생 시 책임 회피보다 책임을 수용하고, 성과는 팀원에게, 실패는 리더가 감당하는 자세이다. 솔선은 편할 때가 아니라 불편할 때 드러난다. 셋째, 현장 중심이다. 3현주의에 입각한 책상 위 보고보다 현장 눈높이에 맞춰 일하는 것을 말한다. 지시보다 함께 보고, 함께 고민하고, 숫자보다 사람·공정·흐름을 이해하는 것에서 솔선은 시작된다. 현장을 모르는 솔선은 ‘연출‘로 보이고, 현업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다. 솔선활동은 ‘공개적 쇼‘라고도 하지만 진정성이 없거나 정말 쇼가 되어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솔선리더십은 긍정 조직문화로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구성원은 감시없이 기준을 지키고, 스스로 개선하는 조직문화는 통제 중심 조직에서는 불가능하다. 상하 간, 동료 간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 가능하고, 진정한 솔선리더십이 조직의 신뢰를 형성시켜준다. ‘리더가 하는 데 내가 안 할 이유가 없다.‘라는 문화가 형성되어 지시가 없어도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준수한다. 지시 문화에서 자율 문화로 바뀌면, ‘내 일‘이라는 주인의식이 강화된다. 안전, 품질, 윤리, 개선 활동이 구호가 아닌 관행이 되고, 편법, 타협이 설 자리가 줄어들어 조직의 기준이 높아지고 신입도 빠르게 조직 기준을 학습한다. ‘이번에도 말뿐이겠지’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구성원이 변화를 신뢰하고 따라온다. 솔선리더십은 지속 가능한 혁신과 개선 문화의 토양이 된다. 긍정조직문화는 개선이 살아있고 성과의 토양이 된다. 개인과 조직간 상호 신뢰를 토대로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 조직이 하고자 하는 일의 수용이 빠르고, 함께 하는 일들이 시너지가 발휘되는 것이다. 숨김없는 일의 문화, 원칙과 공정성, 일관성이 살아있는 조직, 존중과 소통으로 함께 성장하는 교육·개선·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이다. 솔선리더십은 긍정 조직문화의 출발점이며, 긍정조직문화는 성과의 토양이 된다. 제도보다 빠른 변화는 리더의 태도와 행동이고, 조직의 리더가 허용한 수준까지 기업문화는 성장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1-28

포항시민 권정무 2

깔쌈하다는 경상도 촌말이 있어요 검색해 보세요 당신들이 울릉도 갈 때, 천 명이 넘는 손님들이 타는 크루즈, 객실의 바닥과 소금기 가득한 계단, 당신들이 싸지르는 화장실 청소를 이 사람이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일에 집착해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소주도 꼭 한 잔만 해요 술자리 끝나면 후배들 선배들 다 챙겨 보내요 그야말로 인생의 바닥을 싹쓸이하는 사람이에요 해충박멸, 방역과 청결, 하는 일 모두가 얼굴만큼 깔삼해요 기부도 잘 해요, 왼손은 몰라요, 부자도 아니에요 알릴 일도 아니고 그러지도 않아요, 그냥 해요 시니컬한 허세, 그러나 진정성 가득한 포스 덜떨어진 애교가 볼 만해요 그리고 맨발 달리기의 전도사예요. 비오는 날엔 시내를 맨발로도 달려요 영일대 바닷가를 죽자고 달리는 미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거기에 더한 일도 합니다 시 한 편 제대로 못 외우는 이 삭막한 시대에 그는 삼 백 편의 시를 외우고 있고 필요로 하는 곳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낭송을 합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정말 열심입니다 정말이지 읽고 외워 인문을 함양하고 달리고 달려 신체를 구축하고 쓸고 닦아 생활을 바로 세우는 실존적인 삼종(三種) 세트 인간, 말릴 재간이 없습니다, 지켜보며 응원합니다 후배지만 선배 같아요, 그렇습니다 일부에 충실하여 전부를 말하는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 순수하다고 해서 맹탕일 필요는 없다. 생업은 치열할 뿐만 아니라 더러는 더럽고 저급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순화시키면 주위가 고요해진다. 그렇다고 고요가 적막은 아니다.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적막의 흐름을 아는 사람이 있고, 또 그것이 적막임을 모르면서도 그 적막을 지배하는 능력자들이 도처에 있음을, 본인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런 사람이 정말로 영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다. 가장 잡놈이라 불릴 사람에게서 경지를 이룬 사람의 불가해한 능력을 보는 것은 대낮에 등불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거나 도태되었다. 그들의 마을에 가고 싶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1-28

꽃 뒤에 선 잎

지난해 가을, 수필집을 발간했다. 신문과 여러 매체에 흩어져 있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새로운 숨을 얻었다. 어떤 글은 오래 묵은 슬픔에서 왔고 어떤 글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기쁨에서 태어난 글이었다. 책 속의 모든 글이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듯이 독자들에게도 은은한 치유의 서막이 되기를 바랐다. 12월 초입에 북콘서트를 했다. 한 독자가 내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까지 잘 키우세요”라는 말과 함께 포인세티아 화분을 안겨 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초록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기에 크리스마스 꽃이라 불리며 꽃말은 축복과 행복이다. 갓 태어난 책을 축복하듯 눈부신 생명의 빛을 품고 있어 자태가 황홀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온종일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화분을 두었다. 전등을 켜자 붉은 잎이 실내의 공기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풍성한 초록 잎에 둘러싸인 포인세티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꽃이라 부르는 붉은 부분은 진짜 꽃이 아니다. 포엽(苞葉)이다. 꽃을 감싸고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잎. 가운데 작고 노란 꽃은 조용히 숨어 있었고, 포엽은 자신이 꽃인 듯 화려하게 빛나며 세상의 시선을 대신 받아주고 있었다. 포엽은 스스로를 꽃처럼 드러낸다. 하지만 사실은 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잎이다. 그 희생과 배려가 없다면 진짜 꽃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문득 세상 만물의 이치가 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무대 위에 서고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조명을 켠다. 누군가는 이름을 남기고 누군가는 이름 없이 지탱한다. 드러내지 않고 타인을 도와주는 돌봄의 손길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뒷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하는 이웃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내 삶에도 포엽 같은 존재가 있다. 수필 동인과 독서회,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분들이다. 혼자 책을 읽고 혼자 글을 쓰는 행위는 개인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지만, 여럿이 참여하는 책 읽기와 글쓰기는 타인의 관점을 들여다보며 내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 독서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책 읽기를 마칠 때도 있지만 토론을 통해 사고의 전환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나는 분들은 서로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이끌어 주고 토닥여 주는 포엽이다. 포엽은 화려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빛을 잃고 이내 시든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꽃은 열매를 맺어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포엽의 겉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열매라는 본질은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한때 찬란히 빛났던 순간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참고 견뎠던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포엽은 말이 없다. 하지만 자기 역할을 알고 있다. 앞에 나서지 않아도 없으면 안 되는 존재. 꽃을 위해 자기 색을 태우는 잎이다. 그 겸허한 구조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 잊고 지내던 마음 하나를 다시 기억해냈다. 빛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드러나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진실이다. 나는 지금 포인세티아를 바라본다. 포엽 사이에서 작은 꽃이 살포시 숨을 쉬고 있다. 포인세티아는 나에게 은유 하나를 조용히 건넨다. 내 삶이 빛나고 싶다면누군가를 감싸 안는 법을 먼저 배우라고. /정미영 수필가

2026-01-28

수소환원제철, 국가의 결단과 주도성이 중요하다

2025년 12월 26일자 파이낸셜뉴스는 다소 충격적인 제목의 기사를 전했다. “수소환원제철 큰일났다···한국은 R&D, 중국은 벌써 생산 시작.” 기사에 따르면 중국 최대 철강기업인 ‘중국 바오우(宝武)그룹’은 광둥성 잔장(湛江)시에 연간 100만 톤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생산라인을 완공하고 이미 가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코크스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하고, 전기로에 재생에너지를 공급하는 이 공정은 기존 제철방식보다 탄소배출을 50~80%까지 줄일 수 있으며, 연간 300만 톤이 넘는 탄소감축효과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중국과 대비되는 한국의 현실은 냉정하다. 한국은 아직 범정부 차원의 연구개발(R&D)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정부는 파이넥스(FINEX) 공법을 기반으로 한 수소환원제철 실증기술 개발사업을 추진하며,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약 8146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의미 있는 출발임은 분명하지만, 이미 생산 경쟁에 들어간 중국과의 격차는 분명하다. 이 차이를 단순히 기술력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철강산업이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국가전략산업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응 역시 국가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국민 개개인의 독립적 존엄과 자유와 더불어, 국민 전체의 생활과 생존을 책임지는 공동체가 바로 국가이고 정부이기 때문이다. 수소환원제철에서 국가와 정부의 주도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이 먼저 수소환원제철의 고지에 깃발을 꽂은 사실에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명확하다. ‘누가 더 좋은 기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국가의 결단을 내렸는가’이다. 수소환원제철은 개별 기업이 선택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신기술이 아니다. 이는 철강 생산방식뿐 아니라 국가 산업구조와 에너지시스템을 동시에 바꾸는 전면적 대전환 프로젝트다. 수소환원제철은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요구한다. 첫째, 수조~수십조 원에 이르는 초대형 투자다. 둘째, 흔히 “10년이 걸린다”고 말해지는 장기간의 기술적 불확실성이다. 셋째, 청정수소와 재생전력이라는 에너지 인프라의 동시 구축이다. 이 모든 조건은 개별 기업의 통제범위를 명백히 넘어선다. 시장에만 맡길 경우“누군가 먼저 하면 따라가겠다”는 조정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의 개입 없이는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어렵다. 실제로 주요국은 이미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스웨덴은 정부·국영 전력회사·철강기업이 함께 실증부터 상용화까지 전 과정을 국가 전략사업으로 관리하고 있다. 독일은 수조 원의 재정을 투입해 전력과 수소 가격 리스크를 국가가 보전하며 철강전환을 에너지전환의 핵심 축으로 삼았다. 중국 역시 국가계획에 수소에너지 기반 제철전환을 포함시키고, 국영 철강기업에 상용화를 주문했다. 이들에게 수소환원제철은 기술 실험이 아니라 철강강국 간 생산능력 경쟁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또 다른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다. 수소환원제철은 단기간 성과를 내는 정책이 아니라 최소 10년 이상 지속되어야 하는 국가 전환프로젝트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행정구조는 이러한 장기과제에 취약하다. 정권교체와 함께 정책 우선순위가 흔들리고, 조직과 예산이 단절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그래서 수소환원제철 논의는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 개인의 의지 차원을 넘어, 국가전략의‘계속성’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산업 전환과 탄소중립 전략이 실증을 넘어 상용화 단계까지 이어지려면, 정책의 시간표 역시 단임 임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 임기구조에 대한 논의 또한 특정 인물을 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이러한 장기 국가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제도적 고민 속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한국도 이제 관점을 바꿔야 한다. 수소환원제철을 포스코라는 한 기업의 선택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이는‘기업의 혁신과제’가 아니라‘국가의 전환과제’이며, 국가전략기술로 공식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주도성이 필요하다는 점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첫째, 국가 비전과 로드맵이 필요하다. 언제 실증을 끝내고 언제 상용화로 넘어갈 것인지 국가가 명확히 제시해야 기업이 움직인다. 둘째, 초기 단계에서 불가피한 수소·전력 가격 리스크를 국가가 흡수해야 한다. 장기 전력구매계약(PPA), 탄소차액계약제도(CCfD)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핵심 수단이다. 셋째, 연구개발을 넘어 설비투자에 대한 직접 지원과 금융보증이 필요하다. “실패하면 국가도 함께 책임진다”는 시그널이 있어야 투자 결단이 가능하다. 넷째, 수소 생산·저장·운송, 전력망, 항만과 같은 인프라는 공공재로 인식하고 국가가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다섯째, 법과 제도를 통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전환 특별법, 인허가 패스트트랙, 그린철강 공공조달 의무화는 선언이 아니라 실행을 위한 장치다. 특히 K-스틸법 시행령에 수소환원제철의 국가 주도 실증·상용화, 국고 직접 지원, 전담조직 설치가 명확히 담기지 않으면 법은 구호에 그칠 위험이 크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제를 통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상설 전담조직이 필요하다. 산업·에너지·환경·인력 정책을 통합 조정할 국무총리실 산하의 수소환원제철 전환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또한 전환청(추진단)이 자리할 곳은 책상 위의 정책 공간이 아니라, 실제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 현장이어야 한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심장인 포항이 그 장소다. 실증·생산·인력·연구가 공간적으로 집적된 곳에서 산업전환의 속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어 왔다. 수소환원제철이 뒤처질 경우 그 대가는 막대하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로 수출 경쟁력을 잃고, 자동차·조선·방산 등 연관 산업이 연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안보의 문제다. 이제 선택은 분명하다.“기업이 알아서 하길 기다리자”거나 “R&D만 하면 언젠가 된다”는 접근으로는 늦다. 필요한 것은 국가가 책임지고, 수소환원제철 구축 기간의 계속성을 보장하며, 현장에서 실행하는 체계다. RE100을 모르고 시작해서 아까운 시간 3년을 허비했다. 다시 자세를 다잡아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중심, 포항에서 수소환원제철의 신기원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수소환원제철이 제2의 철강혁명이라면, 수소환원제철은 기업의 선택이 아니라 국가의 결단이며, 그 결단은 국가의 문제이므로 정부와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의 임무이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1-28

진짜 두려운 것

어느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건조기였다. 전날 저녁, 건조기를 돌려놓고는 잠들어버린 것이다. 며칠 치의 수건이 겹겹이 몸을 포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수건을 꺼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건조기가 있는 베란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밤새 꼭꼭 닫아두었던 베란다 창문을 열고 건조기를 열었다. 건조기 깊숙이 상체를 밀어 넣고 건조된 수건 뭉치를 품에 안던 때였다. 오른발에 무언가 밟혔다. 바삭. 말 그대로 바삭한 소리가 들렸다. 베란다에서 감자칩을 먹은 적이 있었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잠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불 꺼진 베란다는 어두웠고, 나는 손에 든 수건을 우선 거실 소파 위로 옮겨두었다. 그러곤 베란다 불을 켰다. 그곳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 ‘공포’라는 단어에는 ‘두려울 공(恐)’과 ‘두려워할 포(怖)’라는 한자가 쓰였다. 말 그대로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공포라는 뜻인데, 두려운 것이 두 배가 될 때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두려운 것과 두려운 것. 평소에 나는 겁이 별로 없는 편이다. 공포나 고어 영화도 잘 보고 무서운 놀이기구도 즐겨 탄다. 높은 곳도 겁내지 않는다. 이런 내가 두려워하는 건 두 가지인데, 바로 어둠과 벌레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목격했다. 하나, 내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바퀴벌레. 둘, 그 바퀴벌레를 어둠 속에서 내가 밟았다는 사실. 나는 곧장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바퀴벌레가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반쯤 울먹이며 화장실에서 발을 깨끗이 닦고, 살충제로 바퀴벌레를 익사시켰다. 겨우겨우 사체까지 치우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나는 완전히 탈진한 채 소파에 누워 세스코 무료 상담을 검색했다. 가장 이른 날짜로 방문 신청을 하곤 며칠간 베란다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그날의 충격과 공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나는 이 일을 무용담처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끔찍한 일인데, 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도 친구 한 명에게 바퀴벌레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추운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뜨끈한 샤부샤부를 먹기로 했다. 식사하는 동안엔 만나지 못하는 동안 있었던 근황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계획 중이었다. 친구의 애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이어갔다. 집은 어디에 구하기로 했어? 음료를 마시며 가볍게 던진 질문에 친구가 잠시 머뭇거렸다.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괜히 민감한 주제를 던졌나 고민하던 찰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같이 집을 보러 다녔는데, 오빠가 나는 바퀴벌레 나오는 집만 아니면 돼, 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되게 이상했어.” 친구가 유리잔에 꽂힌 빨대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오빠는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았거든. 우리 집은 바퀴벌레가 종종 나오곤 했는데 오빠한테 말하면 아마 기겁할걸. 자기는 집에서 바퀴벌레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대.” 친구가 빨대를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이럴 때 조금 무서운 것 같아. 우리가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다는 게.”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 또한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집에서 바퀴벌레를 비롯한 벌레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여름엔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에서 날파리가 들끓고 몰래 침투한 모기가 가족들을 괴롭혔지만 그건 거의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므로 제외하고). 그게 너무 당연해서, 내가 사는 집에선 당연히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바퀴벌레가 징그러운 해충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평생 겪은 적 없는 미지를 앞으로 수없이 맞닥뜨려야 한다는 막막함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든 건 아닐까. 내가 진짜 두려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진 순간이었다. “나도 그랬는데, 살면 또 살아지더라.” 나는 친구를 위로하듯 말했다. 친구가 빙긋 웃었다. “그렇겠지? 그리고 바퀴벌레쯤이야 내가 잡으면 되니까.” 나는 친구에게 세스코 정기 구독료에 대해 알려주고, 친구는 바퀴벌레를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약을 소개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독 어두웠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걸었다. 살면 또 살아지더라. 친구에게 건넨 말이 부드럽게 몸을 돌려 내게 다가오는 걸 느끼며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양수빈(소설가)

2026-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