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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립기어의 필요성

마피아게임이라는 놀이가 있다. 사회자가 참가 인원 중 몇 명을 마피아로 지목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 숨어든다. 선량한 시민들은 회의를 통해 의심 가는 사람을 마피아로 지목하고 투표로 그의 생사를 결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피아를 모두 색출해내면 선량한 시민이 승리하고, 마피아는 잡지 못한 채 선량한 시민만 죽이다 보면 마피아가 승리하는 놀이다. 이 놀이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다. 선량한 시민들이 누군가를 마피아로 지목하면 투표 이전에 최후의 변론 시간을 준다는 점이다. 지목된 사람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선량한 시민임을 주장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선량한 시민들의 판단은 반드시 그 변론이 끝난 뒤에 이루어진다. 선량한 시민이 선량한 시민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행여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억울함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 지목된 사람의 주장 또한 귀 기울여 듣는 것. 시민의 선량함은 거기서 나온다. 한 해가 다 끝나가는 이 시점에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학교폭력, 갑질, 연애스캔들 등등 다양한 이유로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매체들은 보통 톱스타 A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거나, 그에 대한 제보가 있었다는 식으로 기사를 작성한다. 그것이 모두 사실인지, 아니면 일부만 사실이거나 아예 사실무근인지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된다. 그러나 일단 그런 기사가 올라오면 당사자는 대중들의 강력한 비난과 질타를 마주해야 한다. 많은 대중들이 그러한 기사 속 의혹과 제보, 주장 같은 것들을 빠르게 사실로 받아들이는 탓이다. 물론 정말로 그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흔하기는 하다. 그러나 때로는 최초의 의혹 중 일부 혹은 전부가 왜곡된 것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사실을 바로 잡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고 작성되더라도 의혹을 제기했던 그 기사에 비하면 훨씬 주목을 덜 받게 되곤 한다. 당사자의 억울함이나 손해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대중은 다소 섣부르게 의혹과 주장을 받아들이고 비난부터 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향해 비난의 스탠스를 취하고 그러한 의도를 담아 댓글 하나 달고 게시물 하나 올리는 것이 별로 심각한 것이라고 인지하지 않는 탓이 있을 것이다. 내가 쓴 몇 마디가 대단한 영향력을 가질 리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하나가 다른 비난을 부르고 또 그것이 다른 비난을 불러 결국 당사자는 눈덩이처럼 커다란 비난을 마주해야 한다.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 탓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믿었던 것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글을 다시 게시하거나 자신이 던진 비난의 화살을 거두어들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비난은 그대로 거기 남아있게 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우리가 누군가가 스캔들에 휘말리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보며 묘한 쾌감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것이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떤 유명인이나, 심지어 별 관심도 없었던 누군가가 그렇게 되는 과정을 보며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던 적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한 경험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어떤 일이 사실이기를 바라게 만들고, 또 끝내 그것이 사실이라 믿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가끔 요즘 언어로 ‘일단 중립기어 박는다’는 댓글을 마주하면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 말은 아직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중립의 태도를 취하겠다는 뜻이다. 득달같이 달라들어 재빠르게 비난의 화살을 쏘지 않아도 언론이 움직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것이다. 법리적인 판단이 필요한 문제라면 그 결론을 기다린 뒤에 나의 의견을 정리해도 늦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고, 그 중에는 당연히 당사자의 이야기도 포함된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아니면 억울함을 호소하는지 들어보고 그 이야기의 신빙성을 따져보는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피아게임 같은 걸 할 때도 최후의 변론을 할 기회를 주는데, 누군가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면 그 정도 시간은 할애할 수 있지 않을까. 죄 지은 모든 이들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기를 바란다.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은 비난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적절한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억울한 한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수천 명의 죄를 밝혀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이기에. /강백수(시인)

2025-12-17

연예계 비리가 소환한 ‘스타의 사회적 책임’

최근 박나래 논란을 비롯한 연예인들의 비리·일탈 행위는 그들의 공적 책임에 대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스타 또는 셀럽(유명인)들의 언행 하나하나는 MZ세대의 준거기준이 될 수도 있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커질 수 있다. 사회학에서는 사회문제를 다룰 때 ‘준거(reference) 집단’이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준거집단은 자신의 신념·태도·가치나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데 기준으로 삼고, 스스로를 동일화하는 그룹이다. 자신이 소속돼 있는 집단일 수도 있고, 소속되고 싶은 집단일 수도 있다. 외부세계와의 소통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가족이나 학교, 직장이 준거집단에 속했지만, 각종 매체가 러시를 이루는 지금은 개인의 준거집단이 매우 다양화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주로 MZ세대가 대부분인 팔로워들의 준거집단 역할을 한다. 인플루언서들의 말투나 생각,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제품이나 라이프스타일도 팔로워들의 소비 대상이 된다. 준거집단이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의 95%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MZ세대들에겐 주로 준거집단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대구의 젊은 직장인이 서울 강남을 준거집단으로 삼으면 심한 박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으로 방송에 출연해 부동산 자랑을 하는 연예인들의 신중하지 못한 행위가 저소득층에게 얼마나 큰 박탈감을 느끼게 할지는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이 클수록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이는 다시 사회적 고립감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빈부격차가 큰 나라도 드물다. 국가통계포털(KOSIS)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하위 20%(1분위) 가구의 평균근로소득은 401만원, 상위 20%(5분위) 가구의 평균근로소득은 1억2006만원으로 격차가 약 30배까지 벌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예인들의 반사회적인 탈세행위도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정일영 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 열린 국세청 국정감사에서 “법인 전환을 통해 세금 과소 납부, 법인명의 자산 편법 취득, 법인카드 사적 유용 등의 연예인 탈세 사례가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고 밝혔다. 일부겠지만, 연예인이 가족 명의 1인 기획사를 설립하는 방법으로 탈세하거나 세금을 적게 내는 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개인 소득 10억원에 대한 세율이 45%인데 비해 법인 매출 10억원의 세율은 19%에 불과하다. 똑같은 금액을 벌어도 개인은 4억5000만원을 내지만 법인은 1억9000만원만 내 약 2억6000만원을 적게 납부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부모나 친인척을 대표로 둔 연예계 ‘1인 기획사’가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양한 측면에서 스타 연예인이나 셀럽들의 사회적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들의 물질적인 과시나 일탈행위는 불필요한 박탈감을 낳게 되고, 결과적으로 미래세대의 삶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2-16

해외 토픽감이 된 한국의 불수능

수능의 난이도가 어려우면 불수능이란 이름으로 호되게 비판을 받는다. 수능시험이 어렵게 출제되면 수험생들의 사교육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험을 쉽게 내면 물수능이란 비판을 뒤집어 써야 한다. 대학 수능시험의 난이도 조절은 시험 때마다 자주 도마에 오르는 주제다. 시험의 변별력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난이도 조절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모든 수험생의 눈높이에 맞는 난이도를 구성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 힘들다. 2026학년 대학수학능력 시험의 영어 영역을 둘러싼 난이도 논란이 시끄럽다. 논란 끝에 불영어란 불명예를 쓰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사태를 들여다 본 해외 언론들이 한국의 수능 영어 영역을 조명하고 나서는 등 뉴스 소재로 삼았다. 영어의 본산인 영국의 BBC 방송은 “한국의 대학입시 시험은 악명 높게 어렵다”고 설명하고 올해 출제된 영어 영역 문제를 두고 일부 학생들은 고대문자 해독에 비유하는가 하면 일부서는 “미쳤다”는 표현까지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한국의 대학 수학능력 시험이 불수능으로 불릴 정도로 어렵다는 소식과 함께 올해 출제된 영어 문항을 소개하고 독자들이 직접 풀어보는 온라인 퀴즈를 내기도 했다. 또 일부 해외 언론은 한국의 과열된 입시경쟁 구조가 청소년의 우울증이나 극단적 선택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입시문제가 청소년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한국의 수능이 해외 토픽감이 됐다. 좋은 의미보다 부정적 의미가 컸다. 32년 전통의 수능방식, 고민할 때 된 것 아닐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12-16

살육의 서막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인류는 폭력과 살육의 연속이었다. 무지한 인간이 신념을 지니면 더욱 무서운 법, 만약에 신이 있다면 인간이 얼마나 광폭한지, 얼마만큼 폭력적이고 악해질 수 있는지, 자신의 이익에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일 것이다. 과거로 돌려보내는 것은 기억이고, 미래로 가는 것은 꿈이다. 발칸반도 폭력의 중심에 섰던 권력, 유고내전과 보스니아 전쟁, 그리고 민족을 앞세운 권력욕에 매몰된 인간들에 의해 자행된 코소보 살육의 현장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대한민국 해방정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정권에서 자행됐던, 당대 유명한 오제도(吳制道) 검사가 기획하고 이승만이 승인한 국민보도연맹사건(國民保導聯盟事件)에서 죽어간 수만 명의 억울한 주검 앞에 그 누구도, 백주대낮의 세상이 도래했다고 해도 책임지는 이가 없는 세상이다. 희대의 살육자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이다. 뒤이은 월남전, 중동전쟁을 넘어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청소한다면서 자행한 제노사이드가 21세기에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강대국은 이익이 나지 않은 곳에 눈 돌리지 않는 법, 어쩌면 재고 넘치는 순 구제 무기라도 팔아먹으려면 그마저도 부추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일평생 호위호식하며 몸을 살찌우고 이름 없이 죽어간 인물은 부지기수다. 그나마 악에 물들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살육에 앞장선 인물에 비하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독한 고독을 이겨내고 인류 평화를 밝혔던 역사 속 인물이 주는 메시지는 결국 꿈과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현실보다는 역사에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조선의 폭군 연산군조차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했다. 이것이 ‘기억의 힘’이다. 되돌아보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서두르지도, 넋을 놓아서도 안 된다. 아무리 두려워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 과거에 아픔이 있더라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활용할 일이다.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 플리트비체 물길 따라 흐르는 장엄한 풍경, 아드리아해 진주 아름다운 항구 두브로브니크 성벽에 올라서서 윤슬 반짝이는 바다는 여전히 추억에서 반짝이고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중세 골목골목을 누벼가며 장검을 찬 기사가 된 양 폼을 잡고, 골목 비탈길에 앉아 나 홀로 맥주를 홀짝거려본 기억도 그립다. 달마티아 해변에서 항구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시간, 달마티아 출신 최초로 로마 황제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년을 보낸 궁전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에 압도당했던 기억은 여전히 설렌다. 성도미니우스대성당의 고즈넉한 맛과 함께 신을 향해 흐르는 인간의 물결은 보이지 않는 신의 에너지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자그레브 밤거리를 대한민국인 양 휘청거린 경험은 치기의 아찔한 추억이다. 자그레브 옐라취치 광장에서 어린 학생들 단체사진을 찍어준 일,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명강사는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삶처럼 베테랑 여행자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한 법, 길을 걷다가 보면 소도 보고, 중도 본다. 청산(靑山)과 녹수(綠水)가 산 입에 거미줄 치게 두겠는가, 어찌 소인처럼 작은 이익과 아름다움에만 얽매이겠는가. 삶은 길에서 배운다. 유랑민의 본능이 살아나면 폭력의 아픔과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아름다움에만 빠져 하늘을 우러러 찬사의 목청만 높일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드리아해 진주 두브로브니크 성에 올라 둘레를 몇 발자국만 걸어도 과거 아픈 상헌흔이 채 아물지 않은 채 생살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몬테네그로 자칭 용사들이 한 명의 크로아티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며 무차별적인 포격의 현장이다. 크로아티아가. 일명 ‘문화전쟁’이라며 문화재를 총알받이로 앞세운 전략이었다. 세르비아 연방군을 문화재 파괴의 주범으로 몰기 위해 텔레비전 중계까지 준비하고 파괴하기만을 기다리는 크로아티아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13세기에 건축된 두브로브니크 성이 화염과 포염에 휩싸인 모습을 상상을 해보면 마냥 아름답고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젖을 수만은 없다. 크로아티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유고전쟁 당시 연방군과 크로아티아군 살육전은 소름 돋는 역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조직 우스타샤는 나치 지원 아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 35만(부상자 포함 70만?) 명을 학살했다. 순박하게 생긴 청년들, 밤에만 피는 박꽃 같은 여인들, 팁이라고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만든 할아버지와 동방의 끝자락에서 날아온 이방인을 향한 비아냥대는 청소년들의 얼굴과 겹쳐진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 세르비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을 때, 국경선 군인들 눈초리는 여전히 이들의 가슴에는 폭력의 앙금이 완전히 씻어지질 않았다고 대변하고 있다. 이제부터 21세기 우리 한반도와 닮은 발칸반도 폭력의 역사를 이야기할까 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2-16

잠금 이후

작년에 새 노트북으로 바꾼 후 일 년을 나의 호흡처럼 품고 있었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수업의 문장들이 깜빡이며 살아났고 미완의 글들은 밤의 잔열을 머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노트북은 나를 배척했다. 늘 통과하던 비밀번호가 더는 문이 아니었다. 기계는 침묵했고 나는 의아함과 불안함이 번갈아 오고 갔다. 서비스 센터에서는 백업이 불가하다 하여 외부 수리에 맡겼지만 문을 통과하지 못한 원인은 간단했다. 해킹, 누군가 나의 공간에 들어와 비밀번호를 바꾸었고 나는 나의 방에서 추방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초기화였다. 그 단어의 무정함은 늘 정확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혹은 시스템의 명령에 의해 기억은 지워졌다. 이전 노트북에서 옮겨 놓은 수많은 수업자료와 켜켜이 쌓아온 문장들, 밤마다 키워온 내 삶의 비유와 숨결들. 자식 같은 글이라는 표현이 과장 같을지 모르나 글을 써 본 사람이면 안다. 문장은 태어나기까지 오랜 진통을 치르고 태어난 뒤에도 수없이 넘어지며 자란다는 것을. 그 아이들이 한꺼번에 몽땅 사라졌다. 기계의 망각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인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같은 주, 시아버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병실의 밝은 불빛 아래에서 우리는 수없이 아버님을 불렀다. 자식들의 부름은 공중으로 흩어졌고 아버님의 몸은 그저 누운 채로 저 깊은 수면 상태로 시간은 흘러갔다. ‘반응 없음’ 의료 기록의 차가운 문구는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해킹은 더 이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에 침입해 문을 잠그는 행위, 기억의 경로를 바꾸고 접근 권한을 박탈하는 폭력이었다. 나의 노트북이 그러했고, 아버님의 몸도 그러했다. 뇌라는 서버에 갑작스러운 오류가 발생하자 아버님이 평생 축적해 온 얼굴과 목소리, 하물며 사랑의 암호까지 모두 접근 불가 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늘 대비하며 산다고 믿는다. 백업을 하고, 보험도 들고, 검진도 미루지 않고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삶의 취약점은 우리가 방심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순식간에 열린다. 보안은 완벽할 수 없고 건강은 영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몸으로 겪는 일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초기화 이후의 노트북은 말끔했다. 공백은 깔끔했고 빈 바탕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애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지워진 것들 위에 새로 쓴다는 것은 상실을 전제로 한 창조였다. 지금의 나의 저울은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이전의 기억을 더듬는 데 더 기울어져 있었다. 아버님이 계신 병실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체온을 확인하고, 숨의 리듬을 읽었다. 기술은 반응을 숫자로 보여주었지만 우리는 숫자 너머의 미세한 떨림을 기다렸다. 삶은 언제나 데이터보다 느리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만 회복된다. 나는 다시 문장을 쓴다. 기억을 백업하고 비밀번호를 바꾸며 동시에 사람의 손도 더 오래 붙든다. 기술은 보호막이지만 결국 삶을 지키는 것은 주의와 애정의 지속이다. 아버님의 침묵은 아직 풀리지 않은 암호처럼 남았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로그인을 시도한다. 이름을 부르고 기억을 들려주고 사랑의 키를 바꿔간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시도 자체가 우리의 삶을 해킹으로부터 지키는 최후의 보안이라 나는 믿고 싶다. 해킹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침입자는 로그를 지웠고 시스템은 정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용자는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을 안다. 아버님의 맥박도 규칙적이라고 기계는 말했지만 우리가 알던 아버님의 리듬은 사라졌다. 정상과 온전함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는 매일을 건너고 있다. 잠금은 늘 풀릴 수 있고 잠금 해제는 예고되지 않는다. 우리가 믿어온 ‘안전’이 얼마나 임시적인지 생각한다. 기록은 기계에 남기되 삶의 의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남기고 나눠야 함을 다시 한 번 나에게 로그인한다. /김경아 작가

2025-12-16

혁신주상과 삶의 프레임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기준 틀’을 삶의 프레임(Frame)이라고 한다. 살면서 얻는 지식과 경험이 삶의 프레임이 되고 세상을 보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같은 현실을 겪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느끼고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이 프레임 때문이다.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무엇을 문제로 인식하며, 어떤 기준으로 선택과 포기를 결정하는가를 규정하는 내면의 사고 구조이다. 내가 아는 지식과 경험의 잣대로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면 지혜롭게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제조 기업의 안전과 작업 환경, 생산 경쟁력을 위해서 공장 내 수작업 장이 이슈가 되곤 한다. 일을 하는 데 돌아가거나 넘어가거나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것은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안전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작업장 레이아웃(Layout) 최적화를 해나가야 한다. 사람, 자재, 설비, 정보의 흐름을 기준으로 작업자의 동작 낭비를 최소화하고 생산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극대화하도록 작업 공간을 재설계하는 것이다. 수작업 공정에서는 설비보다 사람의 이동·동작·판단이 성과를 좌우하므로 작업 품질과 속도를 결정하는 공간 설계인 레이아웃 최적화가 중요하다. 레이아웃 최적화의 핵심 조건은 첫째, 흐름 중심 설계(Flow)이다. 작업 흐름에 맞는 설비 배치와 자재 입고, 가공, 검사, 포장, 출하가 역류 없이 직선 또는 U자 형으로 흐르게 한다. 둘째, 작업자 동작 최소화이다. 수작업에 필요한 공구·치구·비품·용품 등을 허리-어깨 높이, 팔꿈치 반경 50cm 이내 일하기 쉽게 배치한다. 셋째, 생산과 일의 흐름화이다. 일의 흐름에 맞게 작업 통로를 만들고 지그재그 작업을 강물이 흘러가듯 작업 흐름화로 만들어 간다. 넷째, 표준과 시각화이다. 작업 통로 선을 긋고, 이를 중심으로 물건의 위치 구획선, 비품, 공구의 이름을 VM(Visual Management)하여 찾아 쓰기 쉽게 시각화 한다. 제철소 FINEX부 ‘혁신주상만들기‘ 할 때의 일이다. 쇳물을 생산하는 주상을 ‘산모가 아기를 낳는 신선한 곳’으로 정의하고, 열악한 환경과 작업 조건 개선을 시작했다. 3시간마다 쇳물 흐르는 탕도 위치가 바뀌고, 뚜껑이 열릴 때 다량의 연기(Fume)가 발생한다. 탕도 주변은 경사져 있어 지게차, 작업자 이동시 미끄럼 위험이 상존한다. 주상 바닥은 설비 중심부 외는 콘크리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서장의 생각 프레임이 있었다. 작업자의 안전 위협과 일의 비효율성을 근거로 주상 전체 평탄 작업 필요성을 인지시켰다. 모래·왕겨 운반 차량과 안전 통로를 확보하고, 주상에 필요한 물건들을 허리 높이부터 어깨 높이 사이에 배치하여 일을 쉽고 안전하게 했다. 부서장의 생각 프레임에 바닥 평탄 작업을 못했다면, ‘혁신주상’ 레이아웃 최적화는 실패했을 것이고, 환경, 안전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과 경험으로 고정 관념화 되는 생각 프레임은 중요 의사 결정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멈춘 삶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유연성을 갖고 미래를 향한 가치관으로 내일을 열어가야 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12-16

소리를 담금질하는 정가(正歌)의 울림

연말이면 으레 길거리에서 들리는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가 정겹고 훈훈하게 여겨진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타고 따뜻한 이웃사랑의 울림이 잔잔히 퍼져 나가고 있다. 매년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세계 100여 국에서 울려 퍼지는 자선냄비 종소리가 우리나라 명동에서도 100여 년째 울리면서 따뜻한 불우 이웃돕기와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 만들기에 기여하고 있다. 길거리에 자선냄비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이 연말에는 이러저러한 음악회나 발표회 등이 잇따라 열리면서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살고 사랑하며 수고한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다가오는 새해의 희망과 안녕을 기원하는 음악회가 다채로운 선율을 타고 위로와 위무의 마음으로 흐르고 있다. 음악과 소리는 그만큼 상황과 느낌에 따라 마음을 이완시키며 위안과 치유로 더할 수 없는 감동과 감흥을 주기도 한다. 소리를 재료로 하는 복합적인 시간예술인 음악은 대부분 악기나 음향장비를 이용하여 리듬이나 멜로디, 하모니, 음색 등을 표현하고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하게 된다. 다양한 음악의 장르 중 특히 우리 고유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국악은 한국의 전통음악을 일컫는 말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예술적 표현활동인 전통음악·전통무용·전통연희와 이를 재해석·재창작한 공연예술을 가르킨다. 그중 정악(正樂)·정가(正歌)는 한국 전통 성악곡의 정수이자 조선시대 선비 문화의 미적·정신적 가치를 보여주는 음악 장르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궁중과 상류층에서 연주·향유된 ‘바른 음악’을 의미한다. 정악(正樂) 가운데 대표적인 가곡·가사·시조창을 성악곡이라 하여 ‘정가’라고 통칭하고 있다. 즉 정악정가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 정신과 예술적 미학을 담고 있으며, 전통 성악곡의 미학과 선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음악 장르로 오늘날까지 전승, 보존되며 그 예술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첨단 문명의 정보화로 전통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우리의 뿌리 깊은 소리를 배우고 익히며 전승하는 일은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가곡·가사·시조창에는 선조들의 얼과 풍류가 스며 있고 우리 고유의 정서가 배어 있기에, 정가를 현대적으로 계승, 보급,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참으로 바람직하며 적극 장려해야 되리라고 본다. 그러한 차제에 최근 정가의 맑은 울림으로 겨울의 인사를 나누듯 소리의 향연을 다소곳하게 펼쳐 보인 곳이 있어서 주목된다. 지난 주말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원에서 포항정가보존회의 정가 발표회가 담담하고 구성지게 열린 것이다. 옛날 선비들이 사랑방에서 거문고나 장구의 장단에 맞춰 가곡이나 시조창을 멋들어지게 불렀듯이, 좁은 실내지만 음향시설 없이 대금을 곁들여 가곡·가사·시조창에 민요까지 다양하고 이채롭게 펼쳐 보여 상당히 고무적으로 여겨진다. 방 안에서 그야말로 정가 특유의 방중악(房中樂)으로 부르고 연주하며 춤까지 어우러진 시간 내내 품격과 감흥을 더하며 탄성과 추임새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전통의 가치를 창(唱)과 소리로 담금질하며 소중한 정가의 맥을 이어가는 활동과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12-16

자유를 생각함

하나의 책이 엉성한 대로나마 마무리를 향해 간다. 얼마 전부터 아직 써야 할 게 남아 있다고 느꼈다. 시간이 가면서 그 부담감이 더 커졌다. ‘자유’라는 큰 주제가 남았던 것이다. 생각하면, 자유는 무상으로 주어진 것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도 같다. 꼭 짝을 지어 평등과 함께 소중한 것이라 말하고 그뿐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옛날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이라는 책에서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 했다. ‘꼭두서니’에서 알리자딘이라는 염료를 얻을 수 있으면, 우리는 그에 관한 자연법칙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려니 했다. 만약 필연, 곧 자연법칙을 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연의 ‘노예’인가? 국회도서관에서 대의제에 관한 책을 찾을 때였나? 자유민주주의는 유럽의 사민주의에서도 그 토대를 이룬다고 했다. 사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념을 놓고 경쟁하는 근본적 사회정치적 토대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일제 강점기 때 작가 이효석은 ‘산’·'들'·'소라'의 연작을 남겼다. 이중 ‘산’에서 주인공인 머슴 중실은 자신을 핍박하는 주인집에서 나와, 다른 주인을 찾아가지도 않고, 서울 같은 도시로 가지도 않고, 산으로 올라간다. 한 계절을 산에서 보내고 나니 자신도 산의 나무들 같은 나무가 되어간다고 느낀다. 중실은 ‘나무의 자유’를 찾아 ‘사회’를 떠나 ‘자연’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 대목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 밀은 인간은 나무처럼 자유로와야 한다고 말했다. 비유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여기서 나무는 부자유하지 않다. 자연은 자유의 토대요, 사회는 속박의 조건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은 ‘자유’를 노래한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이 당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화자는 그에 대하여 스스로 복종하는 ‘자유’를 누리고자 할까? 이 한용운의 ‘조선 독립의 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도대체 자기 목숨을 터럭같이 여기게도 하는 이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생명체의 본연의 자기 존속의 원리일 것 같다. 생명은 본디 생명력을 추구하고 소모하기를 근본으로 삼는 존재이고, 이 지향은 무조건적이고 원리적이다. 이러한 생명체적 본성을 인간의 언어로 옮긴 말이 바로 자유일 것이다. 자유는 자기 몸과 마음에서 말미암음이며 구속이나 복종조차도 자유일 때만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한국 작가와 시인은 이것을 어떻게 사유해 왔던가? 남은 문제가 너무 크다. 연말인데도 즐겁지가 않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2-15

노무현을 팔아먹는 자들

칼 마르크스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 정치가 언제부터 토론의 영역이 아닌 신념의 영역이 되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대신,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먼저 묻는다. 이때부터 정치는 토론이 아니라 충성의 문제가 된다. 이런 상태를 두고, ‘정치가 종교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라고 한다. 정치가 종교처럼 어떤 상황을 비판할 수 없는 영역으로 격리된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가. 정치가 종교가 된다는 것은, 특정 이름과 가치가 질문으로부터 보호된다는 의미다. 보호되는 순간, 사유는 멈춘다. 질문은 곧 불경스러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진보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점점 이런 성역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처음 이 이름이 불리었을 때, 그것은 한 개인의 선택과 실패, 용기와 고독을 함께 떠올리게 했다. 기득권과 싸웠고, 패배를 감수했으며,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불편해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하나의 질문이 아니다, 노무현은 어느새 정의가 되었고, 정의는 진보가 되었으며, 진보는 현재의 특정 정치 세력과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등가와 연쇄가 작동하는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다. 누군가 현재의 정책을 비판하면, ‘노무현의 가치를 부정하는가? 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여기서 논의는 끝이다. 비판하는 자는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문제 제기는 내부 총질이 되고, 자연스럽게 ’입틀막‘으로 가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 연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종교에서 신이 성스러운 이유는, 비판과 사용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성스러워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 된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지금 그런 위치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그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를 정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용 가치가 아닌 교환 가치가 된 것이다. 돈과 권력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성스러워진 이름은 그 이름이 가졌던 좋은 것들을 제거한다. 예컨대,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나‘ ’왜 권력은 늘 기득권의 편으로 기우는가‘ ’왜 진보조차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가‘ 같은 질문들이 사라진다. 대신 상징만 남는다. 상징은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과거의 희생은 현재의 정당성이 되고, 죽은 자의 이름은 살아있는 자의 방패가 된다. 믿음은 반복되지만, 의미는 갱신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가이다. 이데올로기는 늘 이렇게 작동한다. 거창한 선언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아주 익숙한 동기에서 출발한다. 노무현=정의. 정의=진보. 진보=지금 우리. 이 등가와 연쇄가 완성되면 현재의 권력은 스스로 성찰할 필요가 없어진다. 노무현을 팔아 돈과 권력 장사를 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노무현 성전‘을 세워 신도들을 그러모아 기도하게 하고, 헌금을 바치도록 한다. 지금 당장 성전을 허물고, 노무현을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려 놓기 바란다. 정의롭고 당당하게 열심히 일한 인간 노무현을 신으로 격상시켜 죽이지 않길 바란다. 신 노무현이 아닌 인간 노무현의 가치를 이어받고 싶다. 누가 노무현의 바울인가···. /공봉학 변호사

2025-12-15

앙상한 절약 비법

세밑 달 중순 첫날이다. 앙상한 활엽수 가지들이 초겨울 유리알 하늘에 매달렸다. 쓸쓸하다. 정열 불태우던 단풍잎들은 봄에 나서, 늦가을에 떠나는 짧은 생만 살고 가는 기분이 어땠을까. ‘하루살이도 있는데, 세 계절이나 살았으니 여한 없다’라고 할까. ‘나무는 수십 년씩 사는데, 우리는 겨우 세 철을 살게 하다니요. 하느님 너무해요’하고 원망이라도 할까. 생기 찬란했던 봄날도, 성숙 일렁이던 여름철도, 황금 들판 빛나던 가을도 가고 초겨울이 왔다. 지난 한 해 햇볕과 공기와 물로 양분을 만들어 자신도 살고, 나무도 키워온 나뭇잎들. 오늘은 왠지 앙상한 나무가 마치 우리나라 같다. 자칫 나라가 겨울로 갈 수도 있는 요즈음일 테니까. 나라란 나무는 기관, 기업, 단체 등 생산‧유통‧소비자를 망라한 국민일 터. 연구자들은 설명한다. 나뭇잎이 단풍들어 낙엽 지는 건 나무의 ‘생존 전략’이라고…. 광합성의 촉매제 엽록소 결합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줄기나 뿌리로 비축되며 단풍이 물든다. 활엽수는 잎에서 수분이 증발한다. 겨울엔 뿌리의 수분 흡수가 어렵다. 때문에, 나무는 코르크 세포 장벽 떨켜를 만들어 낙엽 지게 해 ‘수분 절약’을 한다. 곧, 활엽수는 겨울을 ‘앙상한 절약’으로 살아낸다. 결국, 나무는 살기 위해 나뭇잎을 떠나보내고 낙엽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 떠난다. 한 해 동안의 행복했던 삶이, 단풍이란 아름다움과 낙엽이란 아쉬움으로 마감되는 자연의 섭리가 깔끔하다. 이론(異論)도, 미련도 없다. 낙엽은 나뭇가지에 새 눈을 남겼고, 나무는 다음 한해살이를 위해 새 눈들의 도입 교육에 들어갔으리라. 지금, 나라에 겨울을 예고하는 징표들이 나타나고 있다. 낙엽 져 가지들이 앙상하듯, 우리 경제란 나무도 그래 보인다. 거침없던 성장의 잎사귀들은 정치 바람에 낙엽처럼 흩어지고, 억지로 버티는 앙상한 가지들만 남았다. 원화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외환 위기 우려가 커진다. 제2의 IMF가 온다는 소리도 떠돈다. 국민연금으로 환율하락을 막겠다는 보도가 국민 심장을 찌른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할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안’같이 괴상한 법률들이 입법부 단상에 막무가내로 진상(進上)되고, 물가는 돌아서면 오른다. 가계 수입이 같아도 실질소득은 줄어든다. 한미환율협상 후유증으로 비어가는 상가와 공장들이 늘어난다. 나랏빚이 천문학적인데, 위정자는 ‘민생지원금’이란 구실로 빚을 내서 공짜로 나눠준다. 누가 갚으라고···. 각자도생이란 말이 가슴에 박혀도 기댈 언덕이 안 보이는 세태다. 하지만, 앙상한 나뭇가지가 ‘수분 절약’으로 설한풍에 맞서 도생을 꾀하듯, 국민도 ‘절약’으로 닥칠 나라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정부도 앙상한 가지같이 ‘절약’해야 겨울을 견딜 것 아닌가. 예전 IMF 때, 국민이 근검절약하고 금 모으기 정신으로 외환 위기를 이겨냈듯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낙엽 졌다’라는 탄식보다 새잎을 피우기 위한 용기와 절약이다. ‘앙상한 절약’이 우리나라에 내려주는 하늘의 든든한 국가 도생 비법일 테니까···. /강길수 수필가

2025-12-15

AI 시대에도 인간의 연주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

인공지능의 작곡·연주 기술이 급속히 고도화되면서 음악 경험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AI 연주는 여전히 리듬게임처럼 딱딱한 감이 있으며 인간 연주의 미세한 뉘앙스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방대한 연주 데이터를 기반으로 템포 루바토, 다이내믹, 터치 등을 학습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간극은 점차 좁혀질 것으로 보인다. 연주를 기계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는 사실 100년 전쯤 ‘자동연주 피아노’에서 시작되었다. 사전에 입력된 데이터를 토대로 특정 연주자의 연주를 그대로 재생하는 방식이다. AI 기술은 이를 넘어, 동일한 악보를 연주할 때 연주자 간 스타일 차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본다. 이론적으로는 고(故)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윤이상의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진전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연주’라는 행위는 AI가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일까. 연주의 핵심에는 기교뿐 아니라 해석, 표현, 구조 이해, 소통, 그리고 감정이 포함된다. AI가 구현하는 감정 표현은 대규모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가장 그럴듯한 패턴을 산출한 결과이다. 반면 인간의 감정 표현은 삶의 경험과 기억, 신체 감각이 통합되어 나타난다. 예술 행위는 ‘체화된 인지’의 산물이며, 인간 연주의 감정은 호흡과 근육 긴장, 미세한 시간 지각이 함께 작동하는 체화된 정동적 사건이다. 즉 연주자의 삶 자체가 연주에 스며드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을 떠올려보면 더욱 분명하다. 절망의 시기를 통과하며 탄생한 이 작품은 인간 연주자가 그 서사를 감각적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청중에게 강한 울림을 전달한다. 반면 AI는 감정의 원천이 되는 생애 경험을 가질 수 없으며, 감정을 ‘유사 패턴’으로 처리할 뿐이다. 특히 클래식 음악에서 연주자는 악보라는 추상적 기호를 시간 속에서 실제로 구현하는 능동적 해석자다. 동일한 악보라도 연주자에 따라 음악이 전혀 다른 이유는, 해석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연주자의 인식과 신체, 경험이 결합된 수행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AI는 해석의 결과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왜 이러한 해석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해석의 동기가 결여된 결과만을 산출한다. 음악 경험은 또한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공연 현장에서 연주자와 청중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호흡과 긴장, 침묵의 밀도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다. 이는 무대 예술의 핵심 개념인 ‘현존성’과 직결되며, 단순한 물리적 존재를 넘어 상호 감각적 조응 속에서 생성되는 관계적 에너지다. AI는 이러한 상호작용의 구조에 참여할 수 없다. AI 기술은 완벽함을 구현함에 의미가 있지만, 기술적 완성도가 곧 예술적 깊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AI는 인간이 느끼고자 하는 감정을 정교하게 건드릴 수는 있어도 그 감성의 근원은 비어 있다. 그렇기에 연주는 여전히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며, 연주자는 AI 시대에도 마지막까지 남을 예술적 직업 가운데 하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의 가치는 인간의 삶과 감정을 비추는 데 있으며, 기술은 그 ‘살아 있음’을 대체할 수 없다. /박정은 객원기자

2025-12-15

가난한 사람은 지하실로 간다?

사는 집은 사람의 생활수준과 가진 돈을 우회적으로 확인하게 해준다. 이른바 서울 중심가의 아파트는 거래가격이 수십억 원에 이른다. 대구·경북에도 고가 아파트가 적지 않다. 하늘 높이 솟아 마천루를 이루는 고층 아파트를 보면서 ‘나는 언제쯤 저런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절망하는 서민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 형태는 어떨까? 지하 또는, 반지하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흔하다. 지하는 어둡고 갑갑하며 습기가 차는 공간이다. 그러나, ‘지상의 집’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면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길에서 이불 깔고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엔 부잣집 가정부의 남편이 오랜 세월 지하실에 갇혀 생활해온 모습이 영상으로 보여진다. 주인공 가족의 주거 형태도 유사하다. 방 안에서 거리가 올려다 보이는 반지하 집인 것. 가난한 사람들은 땅 위가 아닌 땅 아래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의 영화적 형상화가 아니었을까.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한 모양이다. 최근 대만의 언론매체 TVBS는 딱한 사연 하나를 보도했다. 한 아파트 주차장 지하실에서 3년 넘게 살아온 70대 노인이 불법 점유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아파트 입주민이었으나 문제가 생겨 자신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가자 생활필수품만을 챙겨 지하실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한다. 긴 세월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주차장 지하실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야했던 대만 노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측은지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2-15

[팔면경] 한국 박물관의 세계화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올들어 중앙박물관을 방문한 사람이 600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1945년 박물관 개관 이래 한해 누적 방문객으로서는 가장 많은 사람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것이다. 그 숫자는 동양권 국가에서 가장 많고, 세계적으로는 루브르, 바티칸, 영국박물관에 이어 네 번째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2024년 기준 한해 약 870만 명이 다녀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방문객이 늘어난 것과 관련 박물관 관계자는 한류 콘텐츠의 인기가 전통문화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분석을 한다. 특히 한류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외국인 관람객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박물관이 K-컬처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영국의 킹스칼리지 런던연구팀은 이색적인 연구결과를 발표, 관심을 모았다. 연구팀은 프랑스 화가 마네, 고갱, 네덜란드 화가 고흐 등 세계적 명성의 화가가 그린 진본을 감상하면 스트레스가 줄고,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연구팀은 50명의 사람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은 미술관에서 세계적 화가의 진짜 그림을 보게 하고, 다른 그룹은 다른 장소에서 복제된 그림을 보도록 해 신체 변화를 살폈다는 것이다. 진짜 그림을 본 그룹은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감소하고 몸속 염증 물질도 줄어든 반면 복제본을 본 그룹에서는 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 한나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 유산 등이다. 한국의 문화가 집대성된 박물관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늘어나는 것은 바로 한국박물관의 세계화가 멀지 않았다는 신호다. /우정구 논설위원

2025-12-14

수사기관이 도둑의 하수인이 되려는가

“민나 도로보데스(みんな泥棒です).” ‘모두가 도둑놈이다’라는 뜻의 일본말이다. 1982년 한 TV 방송 시리즈물 ‘거부실록’에서 공주 갑부 김갑순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자유당 정권 때 유행하고, 4.19 직후 김상돈 서울시장이 취임식에서 이 말을 인용해 회자됐다고 한다. 김갑순은 주변에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뿐이라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믿을 놈이 없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해먹을 궁 리뿐이다. 나라를 걱정이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서민 입에서 ‘모두 도둑놈’이란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부인을 보호하려고 비상계엄을 발동한 윤석열 전 대통령도 어이가 없지만, 정권을 거저 얻은 이재명 정부가 입법 권력으로 장난쳐, 법치를 희화화하는 것도 기가 찬다. 유죄를 무죄로, 무죄를 유죄로 만든다. 통일교와 유착했다고 국민의힘을 해산해야 한다고 소리 지르던 민주당 인사가 정작 로비를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제 내놓고 ‘내로남불’이다. 특검 수사가 너무 편파적이다. 야당은 수사하고, 여당은 은폐한다. ‘김건희 특검’이 여권 연루 사실을 안 것은 지난 8월.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이 지난 5일 법정에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국민의힘보다 민주당과 가까웠다”라면서 “현 정부의 장관급 인사 등 4명과 국회의원 리스트를 (특검팀에) 말했다”라고 증언하면서 드러났다. 그제야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임종성 전 민주당 의원, 김규환 전 미래통합당 의원의 수천만 원대 금품수수 혐의를 경찰에게 넘겼다. 한겨레는 윤 전 본부장이 민주당 정치인 15명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도 통일교가 민주당 인사 중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강선우 민주당 의원 등을 직접 접촉하며 관리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윤 전 본부장은 대선 직전 “이재명 후 보 쪽에서도 다이렉트로 어머님(한학자 총재) 뵈려고 전화가 왔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특검은 국민의힘만 조사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특검은 전 정부와 국민의힘 인사들에 대해 최소 18명을 30차례 이상 조사했다. 민주당은 단 한 명도 수사하지 않았다. 특검 측은 민주당 관련자들이 “특검법상 수사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애초에 통일교 자금 문제로 권성동 의원을 조사한 게 별건이었다. 특검이 기소한 24명 가운데 16명은 김건희 여사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는 특검법상 ‘수사 과정에서 인지된 관련 범죄행위’도 수사할 수 있다며 정당화했다. 수사가 아니라 야당 때려잡기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민주당 인사들에 대한 진술은 정식 조서가 아닌 수사보고서만 만들었다. 지난 8월 윤 전 본부장의 법정 발언이 있고, 외부로 불거지자, 부랴부랴 입건 전 내사 사건 번호를 붙여 경찰에게 던져버렸다. 특검은 2023년 국민의힘 대표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통일교 신도가 집단 입당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지난 8~9월 세 번이나 국민의힘 당사 압수수색을 시 도했다. 결국 당원 명부를 확보했다. 민주당은 “종교 권력에 기생한 정치 집단의 정당 해산은 불가피하다”라는 주장까지 했다. 윤 전 본부장은 여당에도 입 당했다고 증언했다는 데도 말이다. 특검과 민주당이 짜고, 정치공세 한다고 의심받기에 꼭 알맞다. 이재명 대통령 개입은 화룡점정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무회의에서 종교의 정치 개입 사례를 지적하면서 ‘종교재단 해산 명령’ 여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9일 이 대통령은 “(종교)법인체도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는 지탄받을 행위를 하면 해산시켜야 한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문체부는 통일부 재산 목록 제출을 요구했다. 갑자기 왜 이런 조치들이 나왔을까. 윤 전 본부장이 말을 뒤집었다. 그는 12일 “(여권 인사에게 금품을 줬다는) 그런 진술을 한 적이 없다”라고 부인했다. 이 대통령의 경고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 연루 진술이 없었다면 특검은 무엇을 경찰에게 넘긴 건가. 영화 ‘아수라’처럼 수사 기관이 도둑의 하수인, 조롱거리가 되어간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12-14

가르친다는 것

이번 학기에 ‘문학과 영화, 그리고 나’ 교양 수업을 진행하고 나서 느끼는 소회(所懷)가 이 글을 쓰도록 인도한다.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 작품들을 읽히고, 고전에 기초한 영화를 감상하게 함으로써 문학과 영화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게 강의 요지다. 그러하되 강의의 방점은 영화가 아니라, 문학에 찍혀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나는 이른바 ‘최대강령주의자’에 속한다. 무엇을 하든 열렬하고 집요하게 대상을 파고드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강의 준비도 치밀하고 폭넓게 하고, 강의 시간도 최대한 준수하려 애쓴다. 당연히 휴강은 없다. 시인 동주는 “한 시간의 휴강은 실로 살로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인 시점에 그런 자세는 너무 한가하다는 생각이다. 학생들과 15주 강의를 함께 만들어가면서 느낀 뼈아픈 사실은 그들 내면에 지나치게 깊이 새겨진 사회적 수동성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이번 학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동성의 깊이와 폭이 심화-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타자를 위한 배려가 실종되고, 각자의 좁은 공간에 자발적으로 유폐된 청춘들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언젠가 여기는 강의실이 아니라, 공원묘지나 무덤 속 같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졸거나 자거나 휴대전화 건드리면서 75분을 간신히 버티는 학생들의 무표정하고 생기 없는 얼굴과 눈빛을 보노라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세대차(世代差)와 ‘엄근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지만, 학과장 말에 따르면, 많은 강의실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공자는 지식인의 기본자세를 ‘묵이지지(黙而識知)’ ‘학이불염(學而不厭)’ ‘회인불권(誨人不倦)’ 셋으로 정리한다. 이 가운데 나는 회인불권, 그러니까 사람을 가르침에 지겨워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을 가장 요긴한 것으로 생각한다. 회(誨)를 파자(破子)하면, 매번 말한다는 뜻이다. 무엇인가 부정적인 상황이나 언행을 보면 그것을 말로써 계도(啓導)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렇게 끈질기고도 정성스럽게 가르치는 행위가 아무 보답도 없이 시간과 더불어 스러질 경우, 완전히 속수무책이라는 데 있다. 그때 적용할 수 있는 영어 속담이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그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을 먹을지 말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최종적인 주재자는 교수나 부모가 아니라, 학생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말이 목구멍에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꾹 눌러 참고 노자의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떠올린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야말로 참교육을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도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언행일치 교육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학부모는 가능하지만, 교사나 교수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회적 수동성으로 무장한 대학생들을 보면서 한국 교육이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행-재정적인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교육하는 방식의 혁신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으면, 인재 양성은 기대난망(期待難望)일 밖에 없을 것이다. 창밖 겨울비 촉촉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2-14

시민불복종, 명령불복종

지난 12일, 비상계엄 가담 공직자를 조사 중인 국방부 헌법존중 정부혁신 티에프(TF)는 박정훈 대령을 중심으로 조사분석실을 신설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박정훈 대령은 2023년 채상병 사망 사건을 수사한 후 결과 임성근 사단장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보고 수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하려던 중 보류 지시를 받았지만, 수사 결과를 경상북도경찰청에 이첩한 일로 항명죄로 기소되었다가 올 1월에 무죄 판결을 받은 군인이다. 재판부가 무죄 판결한 이유는 이첩 중단 명령이 부당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난 2월 민형배 등 10명의 국회의원은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몇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군인이 정당한 명령에만 복종하고, 위법 또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군형법」은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않은 군인을 항명죄로 처벌한다. 물론 군인은 직무와 관계가 없거나, 법규 및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반하는 사항, 또는 자신의 권한 밖의 사항에 관하여 명령은 하달할 수 없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은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이기는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이라는 책에서 보다시피 시민불복종은 기본권과 헌법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부당한 법이나 제도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명령불복종은 시민불복종과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지배 권력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명령불복종은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전시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상명하달이 중요하기 때문에 엄한 벌을 받는다. 1995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크림슨 타이드’는 위기 상황에서 명령불복종을 다룬 영화로 유명하다. 러시아의 핵공격 압박 상황에서 1차 통신에 선제 핵미사일 발사 명령이 왔다가 2차 통신이 오던 중 중단되어 발사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이 되었다. 함장 램지는 1차 통신을 근거로 발사를 명령하지만, 2인자인 부장 론터는 분명하지 않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함장을 감금하기까지 한다. 다시 도착한 3차 통신은 발사하지 말라는 것이어서 영화는 헌터의 편을 들어준다. 하지만 램지는 월권으로, 헌터는 항명으로 모두 해군 청문회에 소집된다. 결론은 모두 국가를 위한 충정이었다고 보고 램지 함장은 징계 없이 전역하고 헌터 부장은 승진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핵발사의 후폭풍이 너무나 크기에 신중함도 필요하지만, 헌터의 명령불복종은 위험했다. 선제적 핵발사가 꼭 필요한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와 정당과 부당이 확실한 박정훈 대령의 사례는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헌터의 승진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명령불복종의 명분이 정당하다면 용인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박정훈이 비상계엄 가담 공직자를 조사하는 중심인물로 복직된 것은 다행이다. 이번 기회에 법률이 일부 개정되어 기본권이 존중받는 군대가 되기를 바란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2-14

갈등보다는 통합의 정책을

정부와 민노총의 새벽 배송 금지 법안 추진을 놓고 의견이 갈린다. 하루라도 빨리 입법을 추진하려는 민노총 택배노조와 참여연대가 ‘과로사 없는 택배 만들기 시민 대행진’을 열었다. ‘속도보다 생명이다’, ‘늦어도 괜찮아 과로 없는 안전한 배송’ 구호를 외치며, 새벽 배송 최소화를 요구했다. 택배노조에 대하여 쿠팡노조는 “새벽 배송은 국민 삶에 필요불가결한 서비스이며 현실을 외면한 정책은 택배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처사”라고 말했다. 새벽 배송을 금지하면 배송을 맡은 기사들과 관련 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일자리를 잃는다. 2000만 명이 넘는 이용자와 15조 원 규모의 시장을 송두리째 잃고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새벽 배송 금지는 늘어난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에 필요한 생필품 구매 수단을 무너뜨림으로 새로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산지에서 생산한 농산물 이동망의 붕괴로 농산물은 경매시장으로 몰려 가격의 하락과 생산 농가의 타격은 불가피하다. 새벽 배송은 이미 큰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에서 입법으로 규제하려면 국민 생활과 관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검토한 다음에 시행해야 한다. 새벽 배송이 택배 기사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시간대별로 분석하고, 택배 산업과 농산물 재배와 유통업자와 농산물 시설 관련 산업 등을 폭넓게 조사해야 한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며, 택배 기사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새벽에 일하는 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법으로 금지한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음을 정부는 알아야 한다. 택배기사들이 새벽 배송을 선호하는 이유는 43%를 차지하는 ‘주간보다 교통체증이 적고 엘리베이터 이용이 편리하다’, 29%의 ‘수입이 높다’, 22%의 ‘주간에 개인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6%를 차지하는 ‘주간 일자리가 부족하다’로 조사되었다. 결과를 보면 국민 생활패턴의 변화와 사회 여건이 새벽 택배를 하게 만드는 측면이 강하다. 섣부른 정책 시행으로 그렇지 않아도 활기 잃은 경기를 침체의 국면으로 정부가 나서서 몰아야만 하는지. 새벽 택배 관련 산업을 없앰으로써 얻는 득보다는 실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다수의 조사에서 새벽 배송을 유지해야 한다는 국민의 의사를 정부는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실업자를 양산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노동자가 반대하고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굳이 할 이유가 있을까. 현실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택배기사의 건강을 정부가 챙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간의 철저한 조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쓸데없는 일로 국론을 분열하고 사람들을 가르는 일을 정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갈등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국민의 삶과 무관한 정치권의 지루한 샅바싸움에 국민은 지친다. 국민이 필요하고 행복한 정책을 정치권은 고민해야 한다. 국민을 바라보는, 국민의 삶을 살피는 그런 정책을 국민은 원한다. 갈등보다는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정치권과 언론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김규인 수필가

2025-12-14

포항시립연극단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최근 공연된 포항시립연극단의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는 노년 빈곤, 가족 해체, 세대 간 단절이라는 묵직한 사회적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내며 관객 앞에 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비관에 함몰되지 않고, 생의 아이러니를 유머와 상징으로 재해석해낸 점이다. 장면의 미학과 배우의 신체 연기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노년의 삶을 단순한 동정이나 비극이 아닌 삶의 역설적 풍경으로 그려낸다. 노년 서사를 블랙코미디로 다루는 독특한 시도는 관객이 현실을 비장함 없이 바라보도록 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웃음 강조로 인해 인물의 고통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채 전환되는 순간이 발생한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연극이 흔히 빠지는 함정-메시지와 장면 리듬의 충돌-이 이 공연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노년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생활적 오브제와 신체 이미지를 활용해 상징적 층위를 쌓아 올린다. 이는 박장렬 연출이 이번 작품에서 선택한 중요한 전략이며, 그 전략은 상당 부분 유효하다. 최현아가 연기한 광주리 할머니는 작품의 중심축으로, 그녀의 신체는 과장 없는 리얼리티로 세월의 질감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는 설명적 대사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일부 장면에서 신체 이미지의 미학적 강조가 인물의 구체적 삶을 압도하며 해석의 간극을 남기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희와 윤도경이 연기한 미미와 분신의 이중 구조는 청년 세대의 불안정한 심리를 날카롭게 시각화한다. 담요에서 탈피하는 듯한 연출은 유머와 위태로움이 교차하며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상징적 퍼포먼스가 서사의 흐름을 압도해 인물의 내적 갈등이 희미해진다. 중년 부부와 군상 배우들은 장면의 리듬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공동체적 분위기를 구축하나, 후반부 군상 장면은 기능적 역할에 머무르며 초반의 세밀함이 퇴색된다. 미니멀한 무대는 배우의 신체성을 부각시키는 연출 의도와 조화를 이루나, 일부 장면에서 과도한 여백이 인물의 감정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조명은 어둠 속의 미세한 빛으로 고독을 섬세하게 표현해냈지만, 장면 전환 시 배우 동선과 조명 타이밍의 불일치로 명료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장렬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 ‘몸의 언어’를 전면에 세우는 방식을 택했다. 설명을 줄이고 경험을 강조하는 이 연출 방식은 최근 한국 연극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신체 이미지는 본래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단순화할 위험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보여준다.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는 노년을 소재로 삼았지만, 결국 세대 전체의 균열을 드러내는 사회적 진단에 가깝다. 작품은 높은 미학적 성취와 형식적 실험을 보여주면서도, 장면 간 정서의 불균형, 상징의 반복으로 인한 의미 과포화 등 몇 가지 과제가 남는다. 그럼에도 이 공연은 지역극단의 정기공연을 넘어, 동시대 한국 연극이 사회적 소재와 미학적 실험을 어떻게 병치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작품은 완성도에 더해,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는 비평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백진기 문학박사·호산대학교 공연예술학부 초빙교수

2025-12-14

도심 속 까마귀

엷은 커텐 사이로 가만가만 들어온 햇살이 눈을 간지럽힌다. 빨리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라는 신호다. 아침의 행복한 순간이다. 맑은 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희망적이어서 좋고,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마음을 안정시켜서 좋다. 바람에 밀려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이런 소소한 기쁨을 깨뜨리는 존재가 나타났는데, 바로 까마귀이다. 이 새는 가볍게 짹짹 대는 참새나 까치 소리에 익숙했던 내 잔잔한 하루의 시작을 흔들고 있다. 까마귀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 중 강원도에서 동아리 활동이 끝나는 날 오대산을 들렀다. 산 초입에 무리 지어 앉아 있던 새까만 새들을 보았고, 그 울음 소리를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그 새는 몸집도 상당히 컸다. 까마귀를 흉조라 말했던 어른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온통 검은색인 모습은 묘하게 위협적이었다. 꽤 오랜 동안 머리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숲에서 살던 까마귀들이 도심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결국 생존을 위해서라고 한다. 숲의 개발은 그들의 서식지를 빼앗았고 먹이를 찾아 도시로 나오게 된 것이라 했다. 열섬으로 인해 도심지의 온도가 산이나 들보다 높은 것이 그 새들이 도심지로 오는 이유라고 설명한 글도 있었다. 생태계의 변화는 까마귀의 생활방식조차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변화를 겪는다. 자연적인 성장으로 겪는 것도 있지만 달라지는 환경으로 오는 것도 있다. 어떤 변화는 작고 미세하여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있는 반면 그 흐름이 격렬해서 몸을 맡기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발전의 속도가 빨라서 일상적인 삶의 양상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 중에서도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발전은 가히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이다. 앞으로 다가올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사물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 또한 더 급속하게 확산될 것이고, 연결된 다양한 사물들이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데이터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 데이터들을 모아 클라우드(Cloud)에 저장하고 인공지능으로 효과적으로 학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흔한 일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물론 젊은 사람들조차 그 빠른 속도를 맞추어 따라가느라 바쁠 것이다. 번역일을 하는 친구가 챗GPT를 사용하면서 느낀 AI의 엄청난 발전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조만간 사라질 직업군 가운데 작가도 있다는 이야기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는데 며칠 전 뉴스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이 실시한 설문 조사가 소개되었다. 영국 소설가 10명 중 4명은 생성형 AI 등장 이후 소득이 줄었다고 했다. 또한 85%의 소설가는 생성형 AI로 인해 향후 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그 소설가들은 장차 직업이 사라질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61%는 여전히 AI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쉽게 사용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민감한 순응은 변화에 가장 어울리는 대처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배우기 힘들다는 이유와 첨단 기기를 많이 쓸 일이 없다는 이유로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양한 검색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고, 그것을 활용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고 느꼈지만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며, 이제는 나이도 들었으니 조금은 모른 척하고 살아도 되지 않았나 하는 적당히 안이한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 생활은 앞으로도 가속이 붙어 상상을 넘어서는 변화를 가지고 올 것이다. 이미 정보화시대는 빠른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필요한 정보를 찾고 그것을 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변화에 빠르게 순응할지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배우고 익히지 않는다면 책임도 내 몫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생활터전이 위협받자 서식지를 바꾼 까마귀의 순응의 지혜가 마음에 다가왔다. 생존을 향한 열정을 보이는 모습이 처음으로 위협적이지도 무섭지도 않게 느껴졌다. 필요를 느끼면서도 게으름을 부렸던 나를 달래는 소리로 들렸다. 오랜 동안 미뤄왔던 챗GPT앱을 찾아서 비로소 휴대폰에 깔아본다. 부드러운 햇살이 창 깊이 들어와 아침을 밝혀주고 있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12-14

법정 휘젓는 AI 환각 판례

의뢰인들이 찾아 가져온 판례나 법률 정보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인 일은 이제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특히 챗지피티에 물어 얻어낸 판례는 실제로 없는 AI 환각(Hallucination) 판례인 경우가 매우 많다. AI 환각이란 인공지능이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사실과 다른 정보를 생성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AI는 진실을 판단하거나 검증하는 능력이 없으며, 단지 다음에 올 텍스트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그럴듯한지만 예측하여 생성하기 때문에 매끄럽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정보도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요즘 법원과 수사기관에서 변호사나 경찰이 이런 환각 판례를 그대로 법률서면에 사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변호사가 AI가 만든 허위 판례를 인용한 서면을 법원에 제출했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법원의 형사재판부는 이 변호사가 제출한 의견서에 인용된 판결 5개를 법원 전산망에서 조회한 결과, 해당 판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해당 변호사는 다음 기일이 열리기 전 문제가 된 판례를 철회한다는 의견서를 냈지만 법률전문가인 변호사가 AI 환각 현상이 만든 가짜 판례를 검증하지 않고 법원에 제출했다가 발각된 것이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문에 AI 허위 판례를 인용한 사건도 있었다. 경기도의 한 경찰서에서 작성한 아동복지법 위반 사건의 불송치 결정문은 일시적이거나 단편적인 언행만으로는 아동의 정신 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친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반복성·지속성 및 구체적인 피해 정황이 인정되어야 한다”라는 대법원과 서울북부지법 판결문을 인용했는데 고소인 측이 확인한 결과 해당 문장은 판결문에 없는 내용이었다. 행정심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9월 부당해고를 당해 울산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낸 부당해고 사건에서 청구인은 상대방 회사 측 공인노무사가 제출한 답변서에 인용한 전체 법원 판례 10건의 원문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10건의 판례엔 존재하지 않는 판례 번호가 달려 있었다. 청구인 측이 판례의 진위를 따지자, 해당 노무사는 그제야 AI가 만들어준 판례였다고 시인했다. 노무사는 “사실관계를 조작하지 않았으니, 고의나 허위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청구인 측은 허위 판례를 인용한 노무사의 노무사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달라며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관련 분야 전문직종에서조차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일반 민원인들이 내는 서류에 이런 환각판례와 허위정보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 된다. 법률전문가가 낸 서면에서도 환각 판례를 인용했으나 발각되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점점 사람들은 AI를 좋아하고 의존한다. 하지만 법률 분야에서의 이런 일들을 지금 적절히 규제하지 않으면 법률절차와 우리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성 자체가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변호사가 쓴 서면과 판사의 판결문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 말이다. 환각판례 인용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 변호사협회에서도 변호사들이 보조도구로서만 AI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12-11

남아선호 사상이 문제

남녀 성비(性比)의 불균형이 생기는 결정적 이유는 남아선호 사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남아선호 사상이 지배한 사회다.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칠거지악이나 남존여비 사상의 발단도 근원적으로 보면 남아선호 사상에 기인한다. 남아가 우대받던 신라시대에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특이한 경우다. 당시 진골의 남자는 많았지만 성골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혈통과 신분을 중요시하는 관습에 따라 성골의 여자를 왕위 계승자로 뽑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남아선호 사상 때문에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장자 상속이나 부계 중심으로 집안이 이어졌다. 특히 유교문화 영향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면서 우리나라 성비 불균형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1990년 우리나라 출생 성비는 여성 100명 당 남성 116.5명. 셋째 자녀까지 내려가면 여아 100명당 남아는 200명까지 치솟았다. 이러던 것이 2007년 107명 아래로 떨어졌고, 2022년에 와서는 정상 성비 범주에 들었다. 남아선호 사상은 전 세계 국가의 공통된 흐름이다. 중국과 인도는 남아선호 갈등 구조가 특히 심했던 나라다. 베트남은 세계 217개국 중 네 번째로 성비 불균형이 큰 나라다. 작년 베트남의 출생 성비는 111.4명. 2034년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150만명이 더 많을 거란 관측도 있다. 정부가 태아의 성별을 공개한 의사의 면허를 박탈하고, 성별 시술행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한다. 문제는 유교 영향이 큰 베트남의 남아선호 사상부터 바뀌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2-11

전문가다운 이야기를 듣고싶다

어떤 대담 프로에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얼핏 알겠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잘 이해할 수 없다. 뭔가 번지르르한 단어와 외래어나 외국어를 섞어 이야기하는 통에 말하는 바를 평범한 사람이 주워 담기엔 역부족이다. 더 웃기는 것은 대담하는 장소에서 대담은 하지 않고 자기가 준비해 온 것만 줄곧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마치 한 개인에 불과한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비판이나 비난, 불평만 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고 대다수의 바보들은 그렇게 한다’라는 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대안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요즘 방송에 전문가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관 학과 교수나 그쪽 계통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소위 ‘전문가’라고 치고 섭외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도저히 전문가 같지 않은 분이 나와서 자기 주관대로 말하는 사람이 보인다. 그런 사람을 전문가라 부르기는 무리가 따른다. 마치 뚱뚱한 사람이 다 미식가가 아닌데 그런 사람만 끌어모아 맛 탐방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전문가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능통함은 물론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아닌가? 사실 종편을 보면 심하게 꽉 막힌 사람들이 전문가입네 하고 나와서 온갖 말을 다 쏟아내고 있다. 사실 검증이나 제대로 거친 이야기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상관없다. 그냥 특정인의 입맛에 맞으면 그만이다. 사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다.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가늠하고 이해하려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그래서 더 많고 정확한 정보에 기초해서 더 정확한 판단과 예측이 가능한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견해를 검증받고자 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요즘 ‘농업’이란 교과 과목을 학교에서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만, 옛날 농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작물들의 파종 시기를 한 시간 내내 강의하시다가 마지막 한마디로 종료한다. ‘책대로 하지 말고 집에 할아버지가 씨뿌리라면 그때가 씨뿌리는 시기’라고. 연습생 시절을 거치지 않고 목청만 좋다고 다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많이 먹어보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음식 전문가가 될 수가 없다. 선수 시절이 없는 감독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진리다. 그냥 책만 보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보 수집과 분석함에 있어서의 편견 없이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가치중립적으로 이해한 후 그 경험적 정보를 바탕으로 일반화하기에 사람들의 이해도가 높아지게 마련이다. 마치 귀신에게 홀려 설득당하는 기분까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문가가 드물다. 그러니 몸에 와닿지 않아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선택은 내 몫이 되고 만다. 이걸 흔히 전문 용어로 ‘제자리 곰뱅이’라고 하던가? /노병철 수필가

2025-12-11

‘2035 NDC’

올해 유난히 길고 혹독했던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가며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난 11월 11일 우리 정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국제사회가 약속한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중간 관문으로서, ‘2035 NDC’를 최종 확정한 것이다. 전 세계가 함께 지구 온도를 낮추기 위해 치열한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 대열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절박한 선언이다. 그렇다면 ‘NDC’는 무엇일까? NDC는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각 나라가 “우리는 이만큼 줄이겠습니다”라고 유엔(UN)에 제출하는 ‘탄소 감축 숙제’이자 ‘국제적 공약’인 셈이다. 이번에 정부가 확정한 목표는 2018년 배출량 대비 무려 53%에서 최대 61%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기존 2030년 목표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이 수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우리 경제와 사회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야만 달성 가능한, 그야말로 ‘전시 체제’에 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거대한 숙제 앞에서 우리 대구와 경북은 어떤 상황일까? 우리 지역은 탄소 감축의 ‘위기’와 ‘기회’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곳이다. 대구는 건물과 자동차가 빽빽한 소비 중심 도시이고, 경북은 철강과 전자 산업이 주력인 생산 중심 지역이기 때문이다. 대구는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내뿜는 탄소를 줄여야 하고, 경북은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탄소를 줄여야 하는 서로 다른 숙제를 안고 있다. 포항의 제철소나 구미의 산업단지가 탄소 국경 장벽에 막혀 수출길이 막힌다면 지역 경제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반대로 대구의 노후화된 건물들이 에너지를 펑펑 낭비한다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시민들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유럽(EU)이나 미국 등 선진국들은 2035년까지 60% 이상의 감축을 목표로 달리며 새로운 녹색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우리도 ‘2035 NDC’를 지역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대구는 ‘걷기 좋은 도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하철과 전기·수소 버스를 중심으로 대중교통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승용차 이용을 줄이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낡은 건물은 ‘그린 리모델링’을 통해 에너지가 새지 않는 똑똑한 건물로 바꿔야 한다. 경북 지역은 ‘녹색 혁명’의 최전선이 되어야 한다. 포항의 철강 산업은 수소로 쇠를 만드는 기술을 도입해 세계 최고의 친환경 제철소로 거듭나야 하고, 동해안은 바람과 원자력을 이용한 청정에너지의 보물창고가 되어야 한다. 농촌에서는 논물을 관리해 메탄가스를 줄이고, 가축분뇨를 에너지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 앞에는 10년이라는 ‘골든타임’이 남았다. 2035년, 대구·경북이 대한민국 탄소중립의 심장으로 힘차게 뛰고 있을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숨을 헐떡이고 있을지는 바로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12-11

멸치육젓

소금꽃 환한 염전에서 눈 부신 햇살 누리는 것 내 뜻대로 가능할까, 불가능이 가능한 곳에서 맑은 하늘을 본다 포항 어느 식당에서 멸치육젓을 만나 나는 환호하며 몸을 떨었다, 그 집을 평생 신뢰한다 맛있게 먹었다고 아첨하지 않으며 발효라 치장하며 시간을 옹호하지는 않겠다 시간을 쟁여 응축된 저 묵은 시간 그윽하게 젓가락으로 침범하는 발랄한 도발 은둔(隱遁)의 지존(至尊)은 강호(江湖)에 즐비하다 텔레비전에 나와 요리하는 것들 혹은 미슐랭, 천한 허영의 표본들은 껍죽거리지 마라 장독에 유배되어 그늘 아래 묵혀둔 시간이 암흑에 가까운 시절이었지만 봉숭아가 이웃이 되어 좀 좋았지 잘 견디어, 불현듯 당신과 조우(遭遇)하여 약간의 양념, 가령 고춧가루와 잘게 썬 고추와 다진 마늘의 데코레이션으로 완성된 멸치육젓은, 그러나 아내는 딸의 임신 중에도 하지 않은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고 아내는 지극히 불행한 상황을 눈썹 세우고 지켜 본다 남편은 돌연변이이자 몬도가네라 한다 그런 극단적으로 상반된 풍경이 못내 즐겁다 저건 사람의 음식이 아니야, 거칠게 반항하는 아내에게 곱창 먹는 너보다 낫다고, 항변한다 공감하지 못해도 이해는 필요하다 서민의 음식이라 일차원적으로 평가하고 폄하하는 주둥아리에는 똥 한 바가지가 딱이다 이런 비유가 서글픈 일이지만, 일상을 지탱하고 뛰어넘는 하나의 축(軸)이 있어, 시대를 초월하는 이음새의 장치를 마련하고 싶어서 섬세하게 대가리를 자르고 뼈를 발라내며, 세로로 길게 찢어 숭고하게 먹는 멸치육젓, 그 시간에 감사한다. ….. 멸치육젓을 꺼내면 보통의 사람들은 썩었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 깊은 발효에 내재된 시간의 융숭함을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짜기도 하다. 그 먼 시간을 이기려면 그 정도의 소금은 필수다. 생멸치가 얼마나 부드러운 생선인지 만져보지 않으면 모른다. 마른 멸치만 아는 것은 땅만 알고 바다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탓할 수 없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에게는 최고의 밥반찬이다. 밥 익을 때 데친 양배추를 함께 먹는다면 참 달고 깊다. 거칠고 소박함이 우리에게는 옳다. 본질에서 멀어지지 않으므로 장식된 삶을 최소한 살지 않는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12-10

부석사

들어간 병실에는 그녀를 덮고 있던 이불의 끝자락이 그녀의 흐느낌만큼이나 들썩였다. 그녀의 병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는 약봉지가 그녀처럼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일어나 앉은 그녀의 부은 얼굴은 몇 년 전 행복해하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게끔 하였다. 남편의 폭력과 유산. 부석사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컷 울었다는 듯이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푸석한 얼굴로 부석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젊은 그녀가 이렇게 털고 일어나 준 것이 고마워 아무 말 없이 길동무로 따라나섰다. 오르는 길목엔 젖은 연초록의 잎들이 비에 젖어 싱싱해 보였고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사과들이 빗속에서도 달짝지근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린 비로 사과밭 앞에는 작은 도랑이 생겨 물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고 빗물은 흘러갈 뿐 본래의 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 내가 우산을 쓴 채 오르막을 거쳐 천왕문을 지났다. 천천히 걸어도 그녀는 힘들어 보인다. 삶의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두 손에서 내려놓은 것처럼 텅 비어 버린 표정이다. 지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다고 그녀는 느낌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로 인한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고통뿐인 지금,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지금 그녀가 그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 을 느낀다면 그녀는 성불(成佛)할 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다 주지도 못하고, 이해타산(利害打算)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부석사를 오르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문자답하다 긴 계단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선묘가 의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 용이 되었다면 의상 대사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랑하지 않았을까?”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를 바라본다. 아마도 이해(理解)를 바라지 않고 한 남자에게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 스스로 선묘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느껴졌다. 선묘와 의상조사와의 사랑 이야기는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부석사에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랑하는 이의 안전을 염려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선묘의 행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어리석은 이를 일깨우고자 하더라도 긴 세월 속에 묻혀 사라진 것에 로맨틱한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인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자신을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누군가에게 몽땅 주기만 한 것이 사랑이라면 받는 누군가는 얼마나 부담스러울 것인가.’ 혼자 생각에 젖어 계단을 오르자 목어와 북이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생겨나서 괴롭고, 존재해서 괴롭고, 존재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괴로우며, 사라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저 목어와 북을 쳐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아니 나 자신만이라도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기를 바라며 내 속의 북을 울리고 싶다. 내린 비로 웅덩이 가득 물이 차인 곳에 연꽃이 환하게 피어 있다. 연꽃 가까이 손을 가져가던 그녀가 무슨 생각에서일까. “기다려 볼래. 그러다 보면 그의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지도 몰라.” 가늘디가는 바람 소리같이 그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의상을 사랑했던 선묘가 용으로 변해 사모하는 임을 위해 드러누워 있다는 대웅전 계단 어느 곳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고, 멈추었던 비는 다시 내려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무량수전 기와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큰 강을 이룰 것처럼 느껴졌다. 대웅전 뒤 곁엔 땅에조차 내려앉지 못하는 큰 바위가 있으니 선묘의 사랑이 의상조사의 가슴을 사랑으로 감화시키지 못하여 아직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인가?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혼잣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는 것이 부석(浮石)인 것을.” /배문경 수필가

2025-12-10

이문열의 ‘시인’을 다시 읽다

서가에 박경리, 박완서, 양귀자, 강석경, 김형경, 권지예 등의 소설책은 따로 분류되어 있었다. 젊은 날 가난한 주머니 사정으로 200원 짜리 삼중당문고 소설로 허기를 달랬다. 그 후 소설책 정도는 내 맘대로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졌을 때, 마치 젊은 날의 그 허기와 갈증을 달래는 의식처럼 매달 한두 권씩 소설책을 샀다. 공부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면 맛난 음식 몰래 탐식하듯 소설을 읽었다. 이 책들은 과거 연구실에 전공 관련한 책들이 빼곡한 서가에서는 한켠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서재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쪽에 문 앞에 배치해 두었다. 작년에 오랜만에 산 한강의 소설들도 함께 있었다. 공부 압박감이 없으니 이젠 내 마음대로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으니 참 좋다. 이미 읽었던 것들이지만 뭐든 한 권을 뽑아 머리맡에 던져두고 잠들기 전, 또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몇 장씩 읽는다. 대부분의 소설은 몇 장씩이 아니라 거의 밤샘용이다. 마치 몰래 먹는 단맛의 유혹 같은 소설이기에 한 번 입속에 넣었다 하면 멈추기가 어렵다. 소설책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눈에 띄는 이문열의 ‘시인’이었다. 내가 주로 사 읽었던 소설이 여성소설가의 것이었는데 이문열이라? 꺼내 펼쳤더니 그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맞다. 2009년 가을 영양 두들마을 그의 광산서사를 찾았다가 너른 서재에서 두어 시간 귀한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인 김삿갓의 시집도 서가를 뒤져 찾았다. 김삿갓의 시편들은 가끔씩 강의용으로 사용한 적이 있어 함께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예전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문열의 문장은 참으로 찬탄하게 만든다. 곱씹고 줄치고 싶을 만큼 웅장한 문장들이었다. 허구와 사실이 뒤섞인 김삿갓의 파란만장한 서사를 ‘허구적 평전’으로 재구해낸 것은 바로 그의 필력이라는 확정을 새삼 하게 됐다. “세상에 대놓고 그 이유까지를 드러낼 수 없으되, 그는 또 자신에게 세상을 원망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꾸짖고 욕할 권리가 있으며 조롱하고 이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자 그 믿음은 절로 그를 부패한 지배 계층이나 그 보조 계급보다는 자신과 같이 소외당한 계층 쪽으로 다가가게 했다. 거기 따라 그의 시도 당연히 변했다. 문예의 형식도 제도의 일부로 본 그는 먼저 형식 면에서 대담한 파격과 변조를 시작했다.” 이렇게 단 몇 개의 문장으로 김삿갓, 아니 희대의 천재시인 김병연을 요약해 버릴 정도로 이문열의 통찰은 잘 벼린 칼날 같았다. 실제 나도 김삿갓의 천재적 희시(戱詩) 속에 번뜩이는 익살과 풍자와 장난이 좋아 읽는데, 이렇게 단칼로 정리해 두는 이문열이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된 것, 그리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 건, 이 소설이 김병연의 ‘허구적 평전’일 뿐 아니라 이문열의 ‘위장된 자서(自敍)’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좌익사상과 행보로 연좌제에 묶여 사범대학을 졸업했어도 교사가 될 수 없기에 중퇴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좌절했던 젊은 날의 이문열이 김병연과 많이 겹쳤다. 조선의 시인으로 현대의 소설가로 우뚝한 둘이기에 더욱 닮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2-10

겨울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지는 이유

겨울이 되면 평소보다 통증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기온이 떨어지면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단단하게 굳으며 허리, 무릎, 손목 같은 관절까지도 예민해지는데 이를 단순히 날씨 탓이라고만 넘기기에는 그 안에 많은 생리학적 기전이 숨어 있다. 핵심적인 요소는 혈류와 근막이다. 우리 몸은 추위에 노출되면 체온 유지를 위해 말초 혈관부터 빠르게 수축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근육과 관절 주변으로 공급되는 혈액량이 줄어들고 산소 공급이 떨어지며 노폐물 배출도 지연된다.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으면 근육은 빠르게 굳는다. 굳은 근육은 스스로 풀리지 못해 더 단단해지고 그 긴장 자체가 통증 수용체를 자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평소 같으면 별문제 없이 지나가던 작은 자극도 겨울에는 훨씬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근막의 변화는 더욱더 상황을 악화시킨다. 근막은 근육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 아니라 온몸을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연결하는 연부조직이다. 근막은 온도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기온이 떨어지면 섬유가 수축하면서 그 안에 있던 작은 긴장이 전체 근육군으로 확대된다. 결국 움직임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근육의 미세한 긴장까지도 증폭되어 통증으로 이어진다. 특히 목과 어깨 등은 근막이 넓고 민감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온도 변화에 따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겨울에 목과 어깨 통증이 증가하는 이유가 바로 근막의 온도 반응 때문이다. 자율신경계의 변화도 통증을 증가시킨다. 추위는 교감신경을 자동으로 활성화시킨다. 교감신경이 항진하면 혈관이 더 수축하고 근육 긴장은 더 높아진다. 혈류는 줄어들고 조직의 움직임은 더 제한되고 통증 수용체는 예민해진다. 추위가 교감신경을 항진시키고 이로 인해 혈관 수축, 근육과 근막 긴장으로 인해 통증 증가라는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겨울 통증 치료의 핵심은 단순하다. 굳은 조직을 풀고 막힌 곳의 혈액순환을 잘되게 하고 항진된 자율신경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근육층이나 힘줄을 정확히 찾아 침과 부항 약침으로 치료하면 즉시 혈류가 회복되고 근육의 긴장이 빠르게 풀린다. 매선은 수축된 근막을 직접적으로 이완시키며 반복된 긴장으로 틀어진 정렬까지도 잡아줄 수 있어 겨울철 통증 환자에게 특히 효과적이다. 어느 한 부위를 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근막 네트워크 전체가 유연성을 되찾으면서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다. 치료 후 환자들이 몸이 따뜻해졌다거나 가벼워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체온 때문이 아니라 조직의 기능이 회복된 결과다. 샤워 후 찬 공기 맞으며 오래 서 있는 행동은 혈관이 수축되어 통증이 악화된다. 장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면 근막이 긴장되므로 주기적으로 목 어깨를 가볍게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 하루에 1~2분만 움직여도 혈류가 크게 개선되는 경우가 많다. 겨울에 통증이 심해지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니고 몸이 갑자기 나빠져서도 아니다. 우리 몸이 추위에 반응하는 아주 정상적인 생리 과정이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겨울철 통증 관리가 훨씬 명확해진다. 결국 겨울 통증은 기온 변화 → 혈류 감소 → 근막 수축 → 자율신경 항진이라는 연결 고리에서 시작되고 이를 반대로 풀어주면 치료가 된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12-10

조진웅·박나래·조세호…쓸데없는 연예인 걱정

TV나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익숙한 유명 연예인 몇 명이 곤혹스런 상황에 빠졌다. 어린 시절 저지른 범죄가 드러나거나, 자신의 매니저에게 갑질을 하거나, 조직폭력배와 어울렸다는 이유에서다. 조진웅은 한 언론매체에 의해 소년범 전력이 알려져 배우 생활을 그만두게 생겼다. 그 여파가 심상찮다. 조씨를 두둔하는 이들은 “한 때의 실수가 인간의 미래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반대측에 선 사람들은 “지금이라면 징역 5년 이상을 받았을 악질 범죄자가 공인으로 활동하면 되겠는가”라고 비난한다. 조씨의 범죄 사실을 최초 보도한 매체는 고발까지 당했다. 박나래의 경우도 마찬가지. 박씨의 행위가 경솔하며 악의적이라고 지적하는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매니저의 폭로에 어떤 의도가 있는 듯하니 사실 관계를 잘 살펴봐야 한다며 박씨를 옹호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폭력배로 의심되는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인해 데뷔 이후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조세호는 현재 출연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실이 아닌 부분은 바로 잡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국제 정세,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여야 정치권, 회복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서민들의 어려운 경제생활 등 내외적인 문제가 가득한 2025년 한국의 겨울. 지금 나라가 처한 입장이 첩첩산중에 설상가상인데, 이제 배우와 개그맨이 얽힌 사건·사고를 두고 국민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겪어야 하나? 누군가 그랬다. “세상 쓸데없는 게 떼돈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연예인 걱정”이라고. 어쨌건 이래저래 참으로 심란한 시절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2-10

한 엄마의 절규 ‘국가는 왜 청년을 지켜주지 못했는가’

대한민국은 국방의 의무를 헌법적 가치로 말하고, 그 가치는 병역이라는 형태로 청년들의 삶 속을 구속한다. 그러나 정작 그 의무를 수행하는 청년들에게 국가는 무엇을 돌려주고 있는가. 필자는 지난 2년 동안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매우 불편한 방식으로. 큰아이는 군 복무 중 오른손을 다쳤다. 체력단련 중 손목이 비정상적으로 꺾였고, 극심한 통증과 부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군의관은 X-ray만 찍고 “단순 염좌”라는 추정진단을 내렸다. 정형외과 전문의도 아닌, 마취통증의학과 전공의였다. 그 진단은 전역할 때까지 재검토되지 않았고, 아이는 손이 뒤로 젖혀지지 않는 명백한 기능 이상을 안고도 군 생활을 버티며 만기 전역했다. 이것은 의료 실수이자 군 조직의 구조적 한계가 한 청년의 신체를 파괴한 사건이다. 도서 지역 부대에는 정형외과 전문의도 없고, CT·MRI도 없다. 진단이 불확실하면 외진을 보내는 것이 상식이지만, 군의관은 그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원망해 무엇하랴.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전역 후 손 기능은 더 나빠졌고, 그 사실을 부모인 내가 알 때까지 2년이 걸렸다. 민간병원 정밀검사에서 드러난 것은 오래된 골절 불유합, 골괴사, 결국 ‘자가 뼈이식 수술’을 받아야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주치의는 영구 장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말이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국가보훈처였다. 대구지방보훈청에 국가보훈대상자(재해부상군경) 신청을 했지만, 그들은 군의 오진인 ‘단순염좌’ 추정진단 기록을 그대로 믿으며 1년 만에 ‘기각’을 통보했다. 정밀검사도 없이 미세 골절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훈청 스스로 입증할 수 없음에도, 그 책임을 청년에게 돌렸다. 필자는 부모로서 군의관의 오진을 증명해야 했다. 당시 중대장, 소대장, 행정관, 함께 복무했던 동료 사병들의 진술서를 6장 받았다. 제대하고 2년 만에 상급자 동료들의 연락처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뼈이식 수술을 집도한 정형외과 전문의의 소견서 및 각종 영상 검사 판독 결과지를 첨부하여 대구지방보훈청장을 피의자로 하여 이의신청과 행정심판을 동시에 제기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또다시 억장이 무너졌다. 행정심판에서 다시 기각 처분을 내렸고,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청문회를 단 일주일 앞두고, 군 내부 문서인 ‘공모상병 인증 기록’, ‘부대장 면담기록’ 등을 청구인이 직접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군 문서는 민간인이 발급받을 수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외면한 것이다. 담당 사무관은 “우리는 이런 서류를 안내할 의무가 없는 부서입니다. 부대에 요청했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안내하지 않아도 되지만 호의로 말씀드린 거예요.” 행정절차법 제8조는 “행정청은 민원인이 절차에 필요한 사항을 알 수 있도록 충분히 안내해야 한다.” 라고 규정한다. 법이 정한 ‘의무’를 공무원이 ‘호의’로 격하시키는 순간,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개인의 기분에 맡긴 것이 된다. 필자는 직접 국방부와 해병대에 연락하며 정신없이 뛰어야 했다. 결국 필요한 기록 없이 청문에 임해야 했고, 청문 하루 지난 날 해병대 관계자는 “필요한 모든 군 자료를 이미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보냈다”고 했다. 즉, 군부대에서 보낸 자료를 담당 사무관이 놓친 것이다. 그렇게 청문회가 열리고 1달 반이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대구지방보훈청에서 한통의 통지서가 왔다. “직무 수행이나 교육훈련과 관련한 상이로 인정하여 국가보훈보상대상자(재해부상군경)로 결정한다”고. 행정심판은 기각이었지만 이의신청에서는 중앙심판위원회가 아이의 부상을 재해부상군경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결정은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초기 ‘기각’부터 잘못된 것이다. 대구지방보훈청은 끝까지 자신의 ‘기각’ 판단을 고수했지만, 결국 상급기관인 중앙심판위원회의 판단은 그 결정이 허술했음을 드러냈다. 이 사건은 아들 한 명의 문제가 아니다. 군 의료와 보훈 행정이 얼마나 부실하고 거만한지를 그대로 노출한 사례다. 국가는 말한다. “국가유공자 예우는 국가의 책무다.” 그러나 정작 ‘유공자’의 문 앞에 서기까지 국가는 끝없이 요구한다. 증명하라. 증명하라. 또 증명하라. 그러지 못하면 끝까지 네 책임이다. 묻고 싶다. 국가는 젊은이들에게 국가를 위해 국방의 의무 운운하며 희생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군인의 건강한 신체는 개인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다. 이제 그 의무를 이행할 차례는 국가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2025-12-10

호박전

어떤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삶의 틈으로 스며들어 내가 오래전 잊었다고 믿었던 자리에 조용히 자리를 펴고 앉는다. 나에게 호박전은 그런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다. 사소하고 투박한 음식에 불과하지만 그 음식이 지닌 따뜻함만큼은 내 생애를 따라 부유하며 계절의 냄새처럼 되살아난다. 결혼하기 전, 아버지는 해마다 초가을이 기울어질 때쯤이면 누런 늙은 호박을 하나씩 들고 들어오셨다. 마당에서 호박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다독이는 듯했다. 아버지가 호박을 가를 때마다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어쩐지 집 안의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장독대의 숨결처럼 어디 선가부터 천천히 일어나는 생명의 소리 같았다. 아버지는 늘 같은 방식으로 호박의 속살을 퍼냈다. 숟가락을 깊이 밀어 넣은 뒤 흩어지지 않도록 살짝 비틀고 그러고는 한 줌씩 그릇에 고이 담았다. 그 단순한 동작에 담긴 인내와 다정함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부엌으로 들어가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후라이팬 위에서 호박전이 반질한 표면을 드러낼 때 집은 한순간에 축제 같은 온기를 머금었다. 아버지는 완성된 호박전을 내 앞에 놓으며 항상 같은 말을 덧붙였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먹어라.” 그 말은 사실 ‘너를 위해 만들었다’는 아버지의 또 다른 말이라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결혼 후 집을 떠난 뒤, 호박전은 내 삶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누구도 내게 해주지 않았고, 스스로 찾아서 해 먹을 마음도 없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니면 그 시절의 냄새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호박전을 잊으려 했다. 마치 그 맛을 잊어버리면 그 시절도 사라질 거라 착각하듯.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친구가 내게 호박전을 해 주었다. 어설픈 모양이었지만 젓가락을 들려는 순간 밀려드는 감정에 숨이 멎을 듯했다. 기름 냄새와 부드러운 감촉, 달큼한 향이 한꺼번에 스며들었다. 호박전을 한 입 베어 넣는 순간 아버지가 호박을 긁던 모습, 그릇을 기울여 반죽의 농도를 맞추던 손끝, ‘뜨거우니 조심해’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던 얼굴이 겹겹이 떠올랐다. 그 기억의 정경이 너무도 선명하여 마치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가슴이 찌르르 저려왔다. 음식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하다. 말보다 앞서 마음을 건드리고 논리보다 먼저 어떤 진실을 들춰낸다. 한 접시의 음식에는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 그가 품고 있던 생각들, 꾹 눌러 담은 마음의 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리움도, 체념도, 오래된 사랑도, 때로는 잃어버린 것들의 그림자까지도 그 속에 담겨 있다. 사람의 삶이란 결국 수많은 맛과 향을 통과하며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식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먹고, 서로의 마음을 삼키고, 서로의 과거를 나누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호박전도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한 끼의 음식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에게 건넨 가장 온순한 형태의 사랑이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 어설프게 감추어 둔 애정, 부드럽게 감싸려 했던 마음이 모두 그 한 장의 노란 전 속에 스며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을 건너오는 동안 아버지는 너무 많이 늙어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의 호박전을 맛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음식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손길과 숨결, 눈빛을 함께 떠올린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장면들은 여전히 따뜻하게 익어가며 때로는 내 삶의 한 귀퉁이를 밝혀준다. 인생의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위해 호박전을 부치게 된다면 아버지가 내게 건넸던 그 마음의 결을 조금은 닮아 있기를 바란다. 음식은 결국 이야기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역사와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순한 언어다. 호박전의 노란 빛이 내게 그러했듯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삶에서 건너온 이야기를 먹고 자라며 다시 누군가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조용히 건네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런 호박을 가르던 아버지의 손등 위에 떨어지던 햇빛처럼, 그 모든 이야기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사르르 익어가고 있다. /김경아 작가

202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