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경북에서 시작되는 기후민주주의 기후민주주의의 핵심은 ‘참여’ ‘숙의’ ‘신뢰’ 영덕·울진 ‘풍력’, 포항 ‘수소산업’, ESS 농촌형 태양광 등 주민참여 구조로 연결 ‘지역형 기후시민회의’ 도입도 서둘러야 포항·경북 추진 전력망·산업단지 전환 수소인프라 구축·탄소배출 감축 계획 등 정보 공개·데이터 투명성 보장도 ‘필수’
며칠 전, 5월 16일. 정부는 ‘기후시민회의’ 공식 발대식을 열고 국가 단위 상설 기후 공론장의 출범을 선언했다. 이는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탄소중립기본법 개정안에 근거한 것으로, 시민이 기후정책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정책 형성의 주체로 참여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변화는 단순히 행정기구 하나가 생긴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폭염과 산불, 집중호우와 해수면 상승은 이미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본질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과 에너지, 경제와 지역의 구조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누가 그 변화를 결정할 것인가”라는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의 기후정책은 정부와 전문가 중심으로 추진되어 왔다. 물론 전문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이 배제된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송전망 하나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지, 재생에너지 설비를 어느 지역에 둘 것인지, 산업 전환의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는 결국 시민의 삶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는 ‘기후민주주의’라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프랑스의 기후시민의회, 덴마크의 시민숙의 모델, 독일과 아일랜드의 시민참여형 기후 거버넌스는 모두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기후위기 시대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기후시민회의 역시 바로 그 흐름 속에 있다. 특히 이번 기후시민회의의 핵심은 ‘상설화’에 있다.
기존의 공론화위원회나 일회성 숙의조사는 특정 사안을 다룬 뒤 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기후시민회의는 국가 단위의 상설 시민 공론장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시민은 따라가는 시대에서, 시민이 정책의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는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한국의 산업과 에너지를 이끌어왔던 포항과 경북에서 더욱 중요하다. 포항은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중심이다. 동시에 앞으로 수소환원제철과 청정수소 산업, 대규모 전력 인프라 구축이 집중될 지역이기도 하다. 경북 동해안 역시 해상풍력과 송전망, 에너지 전환의 핵심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 거대한 전환이 중앙정부와 대기업 중심으로만 추진될 경우, 지역은 ‘희생의 공간’이 될 위험이 크다. 송전망은 지역을 지나가고, 발전 설비는 지역에 들어서며, 산업 구조조정의 충격 역시 지역 주민이 먼저 감당하게 된다. 그런데 결정 과정에서 시민이 배제된다면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포항과 경북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바로 기후민주주의다. 그리고 이 기후민주주의의 핵심은 참여, 숙의, 신뢰.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첫째는 주민참여형 에너지 구조다. 재생에너지와 수소 인프라는 더 이상 중앙집중형 구조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 태양광과 풍력, ESS(에너지저장장치), 그리고 지역 안에서 전기를 직접 생산·저장·공급하는 소규모 전력망인 마이크로그리드는 지역 주민의 삶과 직접 연결된다. 그런데 주민이 부담만 지고 이익에서 배제된다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주민이 사업에 참여하고 수익을 공유하며, 그 결과가 지역 복지와 인프라 개선으로 이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에너지 전환은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지역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포항과 경북은 바로 이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지역이다. 영덕과 울진의 풍력, 포항의 수소 산업, 농촌형 태양광과 지역 ESS를 주민참여형 구조로 연결한다면 지역은 단순한 에너지 공급지가 아니라 에너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핵심은 분명하다. 에너지는 단순한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의 문제라는 점이다.
둘째는 지역형 기후시민회의의 제도화다. 기후정책은 매우 복잡하다. 전기요금과 탄소가격, 철강산업 전환과 원전, 수소경제와 재생에너지, 지역 개발과 환경 문제가 서로 얽혀 있다. 이런 문제를 단순한 찬반 논리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숙의 민주주의다. 기후시민회의는 시민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으며, 서로 토론한 뒤 정책 방향에 대한 의견을 모으는 구조다. 시민은 단순한 여론조사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 형성의 참여자가 된다.
포항과 경북은 발빠르게 ‘지역형 기후시민회의’를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즉, 수소환원제철 전환, 송전망 확대, 해상풍력 입지, 산업단지 전환 문제를 시민들이 직접 토론하고 숙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사회적 합의 없는 전환은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후정책은 정권 하나로 끝나는 정책이 아니다. 10년, 20년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이 정책의 필요성과 비용을 이해하고, 스스로 선택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숙의 없는 전환은 결국 불신을 낳는다.
셋째는 정보 공개와 데이터 투명성이다. 기후정책은 신뢰 위에서만 작동한다. 시민이 정부 자료를 믿지 못하고, 기업 설명을 신뢰하지 못하면 어떤 정책도 지속되기 어렵다.
포항과 경북에서 추진될 전력망 계획, 수소 인프라 구축, 산업단지 전환, 탄소배출 감축 계획 역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단순한 형식적 공청회로는 부족하다. 시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법론을 찾아야 하고 비용과 이익, 위험과 효과가 함께 공개되어야 한다. 정보가 부족하면 불안이 생긴다. 불안은 소문을 만들고, 소문은 갈등을 키운다. 반대로 정보가 공개되고 시민이 충분히 이해하면 정책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포항과 경북은 지금 거대한 전환의 문 앞에 서 있다.
수소환원제철과 재생에너지, 수소경제와 산업 구조 전환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의 삶과 민주주의의 문제다. 이 전환이 성공하려면 중앙정부와 기업의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 사회의 참여와 동의, 그리고 시민의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기후민주주의는 거창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주민이 자신의 삶과 연결된 문제를 이해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며, 그 결과를 함께 책임지는 아주 현실적인 민주주의다.
기후전환은 기술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환을 끝까지 지속시키는 힘은 민주주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는 지금, 포항과 경북의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