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산업대전환의 교차로에서 대한민국의 선택
고등학교 1학년 생물 시간이었다. 식물에 필요한 10대 영양소를 외워야 했지만 이름도 많고 순서도 복잡해 좀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구레나룻이 멋졌던 생물 선생님께서 칠판 앞에서 외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CHON SPeaK Mg Ca Fe.”
그리고 웃으며 덧붙이셨다. “촌사람들은 마카다 철을 말한다.”
포항제철소가 형산강 뚝방 넘어 빤히 보이는 포항의 송도동에서 자란 필자는 그 말을 금방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십육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문장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참 묘한 일이다. 교실에서 시험을 위해 외웠던 한 줄의 암기법이 오늘날 기후위기와 산업대전환의 시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되었기 때문이다.
CHON SPeaK Mg Ca Fe.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 황(S), 인(P), 칼륨(K), 마그네슘(Mg), 칼슘(Ca), 철(Fe). 식물의 몸을 이루고 생명활동을 떠받치는 핵심 원소들이고 C.H.O는 탄수화물과 지방을, C.H.O.N은 단백질을 이룬다.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가 아무리 많다 해도 생명의 기본 재료는 결국 이런 원소들이다. 사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인간도 동물계의 존재이며 먹이사슬을 통해 식물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우리 몸을 이루는 성분 역시 식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인류 문명을 움직여 온 석탄과 석유 같은 화석연료 역시 탄소와 수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기물의 축적물이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과 자동차, 발전소와 도시의 불빛까지 인류 문명의 대부분은 탄소를 태워 움직였다. 탄소는 산업문명을 성장시킨 원소였지만 이제는 기후위기의 중심에 선 원소가 되었다.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 극단적인 폭염과 폭우, 거대한 산불과 태풍의 증가 등 기후 변화는 이미 우리 일상 속에서 체감되고 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경제, 산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오늘의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 문제만이 아니다. 산업과 에너지, 무역과 안보까지 동시에 흔드는 문명의 전환 문제다. 세계는 지금 탄소를 중심으로 산업 질서를 다시 짜고 있다.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제 철강과 시멘트, 알루미늄 같은 산업 제품은 가격과 품질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생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했는지가 곧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다. 새로운 경제질서의 등장이다. 탄소를 많이 쓰는 산업은 점점 불리해지고 탄소를 줄이는 기술을 가진 국가와 기업이 앞서 나가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기후정책이 산업정책이 되고 에너지정책이 무역전략이 되는 시대다. 산업의 경쟁력과 국가의 경제전략이 기후와 에너지 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탄소 다음의 에너지는 무엇이 될 것인가. 여러 답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후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수소다. 수소는 연소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대신 물을 만든다. 저장과 운송이 가능하고 발전과 모빌리티, 산업 공정까지 폭넓게 활용될 수 있다. 그래서 수소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탄소중립 시대의 산업 원료이자 에너지 매개체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철강산업에서 수소의 의미는 더욱 크다. 현재의 제철공정은 석탄을 이용해 철광석에서 산소를 제거하는 방식인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철강은 전(全)세계 제조업의 기반산업이지만 동시에 대표적인 고탄소 산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등장한 기술이 바로 수소환원제철이다. 기존에는 탄소가 철광석의 산소를 제거했다면 앞으로는 수소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부산물은 이산화탄소가 아니라 물이 된다. 철을 만들면서도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개선이 아니다. 산업 문명의 연료와 재료 체계를 함께 바꾸는 일이다. 탄소 문명에서 수소 문명으로 건너가는 산업 대전환의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포항의 의미가 다시 떠오른다.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적인 철강 도시이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한국 산업 성장의 상징이었고 철강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과 기계 산업을 떠받치는 국가 경제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지금 포항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정부는 포항을 수소특화단지로 지정해 발전용 연료전지 산업을 중심으로 수소산업 집적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영일만 산업단지 일대는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지정되어 수소 기반 발전과 지역 전력 공급을 결합하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를 실험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산업단지 지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소특화단지가 수소산업의 씨앗을 심는 일이라면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은 그 산업이 실제 전력 시스템과 연결되어 작동하도록 만드는 토대다. 수소와 전기, 제조업과 전력시장, 산업전환과 지역경제가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움직이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처럼 제조업 비중이 높은 나라에서 철강산업의 탈탄소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포항이 수소환원제철과 수소연료전지, 분산에너지 산업의 거점으로 성장한다면 그것은 한 도시의 변화가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 구조의 방향 전환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전환은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소 공급망과 전력 인프라, 산업 투자와 사회적 합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탄소중립은 선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도와 시장, 산업과 지역사회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K-기후환경’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환경을 지키는 일이 산업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산업경쟁력을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후와 에너지, 산업과 환경을 따로 떼어 볼 수 없는 시대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적인 제조업 역량을 갖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추진방향이다. 탄소 중심의 낡은 산업구조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수소와 재생에너지, 저탄소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질서를 준비할 것인가.
돌이켜보면 생물 시간에 외웠던 “촌사람들은 마카다 철”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생명의 원소와 산업 문명의 재료가 함께 들어 있었다. 탄소는 우리가 지나온 시대의 연료였고 수소는 우리가 건너가야 할 시대의 에너지이며 철은 그 전환의 한복판에 서 있는 문명의 재료다.
철의 도시 포항은 이제 과거의 산업도시를 넘어 수소와 분산에너지의 실증 도시로 변화하게 된다. 탄소의 시대를 넘어 수소와 청정(淸淨)전력의 시대로 건너가는 대한민국 산업대전환의 최전선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기후와 산업, 환경과 에너지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대한민국은 선택해야 한다. 탄소의 시대를 천천히 연장할 것인가, 수소의 시대를 확실하게 준비할 것인가.
그 선택의 현장에 오늘도 포항의 철이 서 있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