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소가 있다. 내게 뉴욕은 그런 도시다. 세계 문명의 중심이기 이전에, 절망의 끝에서 다시 희망을 배웠던 곳이다. 그래서 뉴욕은 내 인생의 제2의 고향이다. 퀸즈 플러싱, 한 대로 선상의 낡은 아파트. 그곳은 내 삶의 물줄기가 바뀐 자리였다. 가난했고 불안했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젊은 날의 시간이 그곳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 내게 그 아파트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었다. 다시 살아갈 힘을 배운 삶의 교실이었고, 버티는 일이 곧 희망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자리였다.
나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청년이 품어야 할 희망은 이미 많이 닳아 있었고, 미래는 안갯속처럼 희미했다. 현실은 무거웠고, 경제적 어려움은 학업을 포기하라고 등을 떠미는 듯했다. 삶은 자꾸만 내게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인생은 참으로 이상하다. 모든 소망이 꺼진 듯한 순간, 오히려 더 깊은 소망이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걸어올 때가 있다. 뉴욕은 그 역설을 내게 가르쳐 준 도시였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나는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뉴욕과 뉴저지를 새벽부터 밤까지 달렸다. 낯선 승객들을 태우고 도시의 혈관 같은 길 위를 쉼 없이 오갔다. 그것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이상의 시간이었다. 한 가장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견뎌 낸 사랑의 시간이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붙들던 책임의 시간이었으며, 내 안의 약한 마음을 조금씩 단단하게 벼려 가던 훈련의 시간이었다.
눈 내리던 어느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JFK 공항에서 벨트 파크웨이를 달리던 중 차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빙글빙글 돌았다. 차 앞머리가 반대편을 향하던 그 순간, 심장은 멎는 듯했으며 시간은 한순간 얼어붙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멈춰 섰지만, 그날 나는 분명히 알았다. 나를 지켜 준 것은 운전 기술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그때부터 크리스천이 되었다.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인생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다. 삶의 가장 위태로운 순간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손길이 우리를 붙들어 줄 때가 있다. 내게 뉴욕은 바로 그 은혜를 가장 절실히 배운 도시이기도 하다.
그 뒤로 내 삶에는 다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컬럼비아대학교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높은 등록금은 또 하나의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내 마이크로컴퓨터실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고, 그 일은 학비의 부담을 덜어 주는 고마운 문이 되었다. 학업을 마칠 무렵에는 뉴욕의 한 법률회사에서 일하며 논문 집필에 집중할 여건도 마련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은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막막한 골목마다 예기치 않게 열렸던 작은 문들의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성공보다 먼저 감사를 떠올린다. 절망의 밤마다 조용히 켜지던 작은 등불들, 그리고 그 곁에서 말없이 버텨 준 아내의 사랑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한국의 한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그 후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사람과 문명, 자연과 역사의 표정을 읽는 여행자가 되었다. 이번 페루와 볼리비아의 여정 또한 그러했다. 잉카의 돌담, 고원의 침묵, 오래된 광장과 거친 바람 앞에서 나는 문명의 흥망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견디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다시 일어서는가. 그리고 삶은 무엇으로 끝내 자기 깊이를 얻는가.
그런데 아무리 먼 길을 돌아도, 뉴욕은 늘 내 삶의 근원으로 나를 이끈다. 뉴욕은 내가 한때 버티며 살았던 도시가 아니다. 끝내 나를 다시 살아내게 한 도시다. 사람들은 뉴욕을 욕망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게 뉴욕은 그보다 더 깊은 얼굴을 지닌 도시다. 돈과 문화, 예술과 기술, 언어와 인종, 야망과 상처가 이곳에서 부딪히고 섞인다. 그 거대한 소음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깨닫고 있다. 더 많이 소유한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더 높이 오른다고 마음까지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의 뉴욕은 다른 목소리도 함께 들려준다. 걷기, 명상, 요가, 건강한 식단, 심리적 안정, 자연과의 접촉 같은 작지만 본질적인 실천들이다. 나는 이것이 21세기 웰니스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웰니스는 단지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몸과 마음, 관계와 의미, 노동과 휴식, 성취와 평온 사이의 조화를 이루려는 삶의 태도다. 세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내면의 중심은 더 깊어져야 한다. 진정한 건강은 오래 사는 데만 있지 않다. 자기 자신답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내는 데 있다.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있으니, 남미의 대지와 뉴욕의 불빛이 문득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비극이 ‘존재’보다 ‘소유’에 집착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그것은 개인의 삶에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대를 이익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가 지닌 역사와 문화, 상처와 자부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관계가 시작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조용히 존중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뉴욕을 사랑한다. 이 거대한 도시는 여전히 시끄럽고, 눈부시고, 분주하다. 그러나 내게 뉴욕은 화려함의 도시이기 전에 회복의 도시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희망은 싹틀 수 있고, 삶의 벼랑 끝에서도 길은 다시 열릴 수 있으며, 세계의 소음 한가운데서도 자기 영혼의 목소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도시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돌아보면 페루와 볼리비아의 높은 하늘 아래서도, 뉴욕의 빽빽한 빌딩 숲 사이에서도 내가 끝내 찾고 있었던 것은 같은 것이었다. 더 많이 갖는 삶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삶, 더 높이 오르는 인생이 아니라 더 진실하게 존재하는 인생을 찾고 있었다.
인생은 결국, 바깥으로 멀리 떠나는 길 같지만 끝내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긴 순례인지도 모른다. 뉴욕은 내게 그 길의 시작이었고, 남미는 그 길의 뜻을 다시 묻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용히 믿는다. 사람은 소유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은 끝내, 존재의 깊이로 살아난다. 이 칼럼은 이것으로 마무리 된다.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