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아카시아 줄넘기

등록일 2026-05-20 15:33 게재일 2026-05-21 16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내가 꽃잎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언스플래쉬

요즘은 어딜 가도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와 어깨 위로 새하얀 꽃잎이 떨어지고 미처 안착하지 못한 꽃잎들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점점이 수놓는다. 나는 꽃향기는 좋아하지만 꽃의 종류나 이름을 구별하는 일엔 영 재능이 없어서, 누군가 떨어진 꽃잎을 가리키며 “이게 아카시아야.”라고 말한 후에야 이게 아카시아구나, 했다. 요즘처럼 바닥을 가득 채운 아카시아 꽃잎을 볼 때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2년 전에 지금의 동네로 이사 왔다. 나의 집을 꾸린다는 설렘도 분명 있었지만, 평생을 가족과 함께 살았기에 그곳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불안과 공포가 더욱 컸다. “내 인생은 내 거”라는 말을 습관처럼 읊조리고 다녔던 게 조금 후회될 정도로. 

 

집을 보고, 계약금을 넣고, 이삿짐을 싸는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사 온 지역은 본가에서 역 하나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매우 가까웠지만, 살면서 처음 와 보는 동네이기도 했다. 늘 익숙한 곳에 가서 익숙한 음식만 먹는 나였으므로 이토록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폭풍 같던 이사 당일이 지나고, 나는 반쯤 정리된 짐들 사이를 헤집고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정리와 청소에 시달렸더니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고 가슴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동네도 둘러보고 괜찮은 카페를 발견하면 커피라도 한잔 마실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동네는 한적했다. 눈에 띄는 음식점은 없었지만, 퍽 분위기 있는 카페가 몇 군데 있었다. 게다가 집 맞은편엔 큰 공원이 있어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집 근처 골목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할머니들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을 배경 삼아, 편의점 의자를 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할머니 서너 명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자리한 골목은 해가 비치지 않아 시원했다. 나는 괜스레 걸음을 늦추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없는 곳, 모두가 자기의 목소리를 소리 높여 내지 않는 곳이구나.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골목을 지나쳤다.

 

차분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카페에서 산 커피를 손에 든 채 나는 탐색을 이어갔다.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동네라 그런지, 골목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전부 노인이었다. 집에 돌아가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짓누를 때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무언가를 잃고 배회하는 소설 속 인물처럼, 나는 생각과 계획 없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카페 몇 군데를 더 지났을 때 “이렇게 하라니까?” 하고 외치는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골목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머리를 높이 묶은 여자아이 한 명과, 그보다 한 뼘 정도 작은 남자아이 한 명이 마주 보고 선 채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골목을 지나야만 하는 사람처럼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면 슬쩍 만류할 심산이었다. “아이, 답답하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팔목을 꽉 잡았다. 자세히 보니, 여자아이의 한 손에 줄넘기가 들려 있었다. 나는 얼음이 거의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들이켜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였다.

 

“자, 내가 하는 거 잘 봐.” 남자아이의 팔목을 놓은 여자아이가 줄넘기를 돌리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눈 깜빡할 새에 골목 끝까지 다다라 있었다. “쉽지? 이렇게 하면 돼!” 여자아이가 멀찍이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손에 쥔 줄넘기를 만지작거리던 남자아이가 이내 결심한 듯, 줄넘기를 돌리며 뛰기 시작했다. 남자아이가 줄을 돌릴 때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카시아 꽃잎들이 튀어 오르듯 휘날렸다. 

Second alt text
양수빈 소설가

내가 꽃잎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남자아이는 열심히 줄을 돌리며 달려간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곁에 서 있었다. “봐봐, 할 수 있잖아!” 여자아이가 씩씩하게 말하며 남자아이를 끌어안았다. “못할 줄 알았지? 그런데 같이하면 다 돼!” 여자아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쯤, 동거인 Y가 전화를 걸어왔다. Y는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없었다며, 어디 있는 거냐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거의 다 왔다고 대답했다. 집에 가서 같이 정리를 하고, 밥을 먹고, 앞으로의 삶을 잘 꾸려가 보자고 이야기하자 Y가 작게 웃었다. “물론이지.”
/양수빈 (소설가)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