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적은 누구인가? 선거철만 되면 보수 진영에서 반복해서 내미는 질문이다. 대체로 이런 물음은 안보 정책에 대한 실질적인 토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 동원과 이념적 낙인찍기를 목표로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래서 지겹고, 어이없기도 하다. 보수 정권이 들어섰을 땐 안보 위기가 없거나 대북 관계가 크게 변하기라도 했던가? 국방과 군사 문제에 있어 지난 정권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거론해야 할까? 주적을 묻는 저의에 내재한 폭력성과 단순성, 그 역사에 대한 몰인식을 어찌해야 하나?
한국 사회에 축적된 레드 콤플렉스를 자기 이해를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할 뿐인 행태를 응당 그러려니 방치해도 되는 걸까. 주지하듯 한국의 반공주의는 단순한 안보의식이 아니라 냉전과 권위주의 체제의 산물이며 치안 유지를 위한 이념적 도구이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기에는 반공을 구실로 민주주의와 노동‧학생 운동이 억압됐고, 언론 통제 등이 자행됐다. 누구에게는 그저 한 표라도 얻어볼 요량으로 낡은 색깔 공세를 펴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 배후에는 켜켜이 쌓인 국가 폭력의 역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주적론(?)은 너무 단순하기도 하다. 가령 북한을 비판하면서도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체제 구축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는 중국의 영향력을 우려하면서도 경제 협력의 필요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실의 외교와 안보는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의 주적이 누구냐는 질문은 마치 단답형 시험 문제처럼 작동한다. 국가의 정통성과 충성심을 겨우 이런 검사 따위를 통해 검증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게으른 것 아닌가? 대북, 안보, 국방, 군사 분야에 구체적인 정책과 대안을 갖고 토의할 수는 없는 걸까?
국가 안보는 시민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 존재의 이유가 애초 시민의 안전과 존엄을 보호하기 위함이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누가 우리의 적인가?”를 묻는 대신 “무엇이 시민의 삶을 위협하는가?”에 관해 질문해야 하지 않겠나. 경제적 양극화와 노동 유연화, 실업과 산업재해, 재난과 기후 위기, 불평등, 혐오범죄, 주거 불안정 등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실질적 문제보다 국가 안보를 추상적인 적대 관계로 환원하여 상대를 ‘북한 편’ 취급하고자 하는 저열한 정치를 언제쯤 청산할 수 있을까?
박영준의 ‘용초도근해’(1953)라는 소설이 있다. 북한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던 주인공의 귀환을 다루는 작품이다. 당시 한국은 국군포로를 ‘귀환용사’라 명명하고 ‘애국청년’이라 부르며 환대할 준비를 했지만, 휴전선을 넘어서는 순간 이들은 항구적인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위장된 간첩’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주인공 용수의 자살로 마감되는 이 소설은 반공주의와 소박한 휴머니즘이 결합한 소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묻는 시대착오적 질문 속에서 반공포로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자들만큼 상대가 실제 ‘북한 편’이기를 바라는 이들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나 군사적 긴장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외려 그런 불안을 자기 이익을 위해 정략적‧감정적으로 동원할 뿐인 속 보이는 모략을 이제는 끝낼 때가 아닐까 한다.
/허민 문학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