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있다. 한 사람과의 약속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눈 약속도 있다. 약속의 무게는 다를지 몰라도 형태는 대개 같다. “언제 밥 한번 먹자.”, “나중에 술 한잔하자.” 이런 종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이런 기약 없음이 다정함이 되기도 한다. ‘언제’가 가까운 시일 내에 도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만으로도 우리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라는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타인이 날리는 그런 공수표가 전혀 싫지 않다.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만난 친구들이 있다. 어느덧 이십 년 넘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단톡방에 여전히 10명이 그렇게 모여있는 게 징그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같은 전공이나 직업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고 그저 같은 교실에 있던 사이다 보니, 모두 하는 일은 제각각이다. 공업사 및 폐차장 사장, 전기 기사, 경찰, 가구 판매원, 소방관 등 공통점이라곤 없다.
작가 혹은 예술가 친구가 대부분인 내게 이런 친구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도 나에게 말한다. “내 주변엔 작가인 애가 너밖에 없어서 신기해.” 그런가? 여기서 작가가 제일 흔한 거 같은데. 우리가 모이면 누구 한 명 빠짐없이 이렇게 떠들곤 한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평범하지.”
모두 일하는 시간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달라서 다 같이 모이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1년은커녕 거의 10년째 만나지 못한 친구도 있다.
그 안에서 매년 송년회와 신년회 둘 중 하나는 꼭 챙기려고 하는 친구 H가 있다. 모임 내에서도 H는 내겐 특별하다. H가 주도하지 않았다면 이 모임은 오래전에 와해했을지도 모른다. 연말이 올 즈음 H는 넌지시 한마디를 던진다. “12월에는 모여야 하지 않아? 다들 시간 어떻게 돼?” 의견을 수렴한 뒤 대부분 가능하다고 하는 날에 모이기로 한다. 1년에 한 번이니 웬만하면 다들 참석하려고 하지만 모임 날이 다가올수록 한 명씩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긴다.
급히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아프다(이건 정말 더더욱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차표가 없다(연말이라 구하기 힘든 모양이다), 갈 수는 있는데 마감을 다 하고 가면 자정일 것 같다(이건 나의 변명이다). 결국 모임을 주도한 H와 그날 별일 없다는 다른 친구 한 명만 가능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모임은 미뤄진다.
꼭 H가 주도하지 않아도 모두 모이려는 의지 자체는 강하다. 올해 송년회가 실패하면 내년 신년회, 내년 신년회가 실패하면 내년 송년회에는 최대한 모이자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한 교실에서 자연스럽게 보던 것처럼 쉽게 모일 수가 없다. 각자의 일이, 저마다의 삶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내심 미안해하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나 혼자였던 것은 아니나 친구들이 서운해하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정해진 모임 날에는 내게 중요한 일이 생기곤 했다. “어쩔 수 없지. 일하고 건강이 먼저야.” L은 그렇게 말했다. 면죄부를 받은 느낌이었으나 그 면죄부에 유효 기간이 있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2023년 초, 그제야 무심하고 이기적인 내가 벌을 받을 시간이 되었던 모양이다. 겉치레에 불과한 약속이 아닌 정말 중요한 약속 두 개가 겹치고 말았다. H의 결혼식과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B의 결혼식이 하필 같은 날에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B의 결혼식은 12시, H의 결혼식은 3시라 하여 무리하면 갈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문제는, B는 부산, H는 서울에서 식을 올린다는 거였다. 절망적이었다. 한 곳만 가면 다른 한쪽은 너무나도 서운해할 게 분명했다. 서운한 걸 넘어서 살의를 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두 곳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어떻게 오가지? 심지어 B의 결혼식에서는 축가도 해야 했다.
내 고민을 알자마자 B는 H의 결혼식에 가기를, H는 B의 결혼식에 가기를 권했다. 나와 얼마나 친한지 알고 있으니 다른 친구에게 양보한다는 것이었다. 더 미안하게 그들은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이 약속은 하나도 어겨선 안 되겠다고.
당일 나는 B의 결혼식에 가 축가를 끝내고 김해 공항으로 간 다음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급히 택시를 타 H의 결혼식으로 향했다. 기념사진을 다 찍은 후에야 도착했지만, 그래도 H의 얼굴을 보고 축하를 건넬 수는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약속을 한다는 건 나와 누군가가 이어져 있다는 의미다. 불투명하나 따뜻한 안부 같은 것. 지켜지지 못할 약속도 지켜야 하는 약속도 모두 소중한 이유다.
/구현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