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검사 결과지를 손에 쥐었다. 의사 선생님은 고지혈증 약을 성실히 먹지 않은 것 같다며 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공복혈당 101은 그나마 괜찮았으나, 당화혈색소 수치가 문제였다. 6.4에서 6.6으로, 다시 6.8로 3개월마다 계단을 오르듯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당뇨병 진단을 내려야 할지 선생님의 고민도 깊어 보였다. 다행히 혈관 벽은 깨끗하다며 다시 3개월의 유예 기간을 주었다.
이제부터는 약을 거르지 않고, 하루 20~30분은 반드시 걷기로 했다. 저녁에는 과일과 탄수화물을 절대 입에 대지 말라는 경고도 새겼다. 주 1회 정도는 내가 사는 대구를 벗어나 낯선 풍경 속에 나를 세워두려 한다. 혈관 속 찌꺼기뿐만 아니라 마음의 앙금까지 풀어버리는 일이 몸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처음 고지혈증 진단을 받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다만 은행에 근무할 때였으니 최소 28년 전의 일이다. 당시엔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빼빼 마른 내가 고지혈증이라니 그저 믿기지 않아 웃으며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 후로도 건강검진 때마다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니 운동하라는 처방이 따랐지만 깊이 생각지 않았다.
본격적인 경고등이 켜진 건 10년 전쯤이었다. 의사는 피가 걸쭉하다며 약을 처방했다. 그때도 심각성을 몰라 약을 먹다 말다 했다. 그 결과 5년 전 검사에서도 차도는 없었다. 부지런히 복용하라는 말만 들었지, 그 뒤에 숨은 위험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러다 24년, 공복혈당까지 높아져 당뇨 전 단계가 되었다. 고지혈증에 당뇨까지, 이제는 탄수화물을 줄이고 관리해야 한다는 소리에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듯했다. 진단이 믿기지 않아 지인이 추천한 병원을 찾았다.
새로 만난 의사는 당뇨는 아직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며 꾸준히 운동하라고 했다. 또한 고지혈증 약을 먹지 않았을 때 닥칠 위험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고지혈증이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같은 심혈관질환과 직결되는 위험요인임을 깨달았다. 약을 꾸준히 먹자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는 안정되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찾아왔다. 다리와 발에 쥐가 나고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의논 끝에 약을 바꾸자 증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문이 생겨 정보를 찾아보았다. 스타틴 계열의 약이 근육통이나 기억력 감퇴, 심지어 혈당 수치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혼란이 밀려왔다. 계속 먹어야 할지, 끊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끝내 마주한 결론은 명료했다. 약으로 인한 미미한 불편함보다, 약을 먹지 않았을 때 닥칠 심혈관질환의 위험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었다. 약은 단순히 숫자를 낮추는 도구가 아니라, 무너지기 쉬운 나의 미래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나는 기꺼이 그 안전장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저녁 식탁에서 탄수화물과 과일을 치우고, 단백질과 채소의 정갈한 맛에 익숙해지려 한다. 매일 운동화 끈을 묶는 일, 일주일에 한 번 낯선 길 위에 서는 일. 그것은 병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오랫동안 방치했던 내 몸에 대한 뒤늦은 예우다.
비록 수치는 높아졌으나 혈관 벽은 여전히 깨끗하다는 의사의 말이 희망의 불씨가 된다. 3개월 뒤, 다시 진료실 문을 열 때는 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기를 소망한다. 마른 나무를 다시 단단하게 가꾸는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손정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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