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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연민과 희망 가득하길··· 병오년 새해를 밝힐 3편의 시

환하게 떠오른 2026년 첫날의 붉은 태양. 그 아래를 선명한 붉은빛을 가진 말이 뛰어간다. 말은 진취적 기상과 역동성, 거기에 꿈틀대는 생명력까지 가진 동물이다. 재론의 여지없이 활기찬 에너지가 넘친다.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다. 전쟁터에선 장수를 태우고 종회무진 적진을 헤쳐 나가고, 무거운 짐이 등에 실렸을 때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빨리 한다. 그 옛날, 인간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 말이 2026년엔 어떤 기운을 국민들에게 선물할까? 그 기운을 토대로 우리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삶을 가져갈 수 있을까? 질문이 많아지는 새해 벽두다. 누구나 이때쯤이면 한 해를 설계하고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 올해는 이기심보다는 이타(利他),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청사진을 그려보면 어떨까 싶다. 2026년 열두 달을 살아가는 동안 한 번쯤 읽어본다면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사랑·연민·희망이란 귀한 메시지를 품은 시 3편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죽음도 이겨내는 사랑... 송수권 ‘석남꽃 꺾어’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 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남도의 소월’로 불리는 송수권 시인의 서정시 중 으뜸이라 불러도 좋을 ‘석남꽃 꺾어’는 어떤 존재에 대한 깊은 사랑이 어디에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간명하고 질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정한 사랑은 너와 내가 오가는 방에도, 부엌에도 웅크리고 있으며 심지어 젖은 행주에도 깃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가 웃을 때도, 울 때도 사랑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강고하게 건재한다. 그 사랑의 힘은 때로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도 발휘된다.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싶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2026년 사람들의 지상목표는 그게 사람이건 사물이건 단 하나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찾아가는 것이 돼야 할 듯하다. ▲연민이 없다면 인간도 없다,.. 이면우 ‘화엄경배’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연민(憐憫), 즉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인간만이 가진 소중한 것이다. 저 혼자 잘 먹고, 저 혼자 잘살겠다는 마음가짐이야 금수(禽獸)라도 못 가질 게 없다. 연민을 가지려면 평범한 삶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면우는 실제로 온갖 육체적 노동을 하며 시를 써온 시인이다.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보는’ 일을 했다. 그의 작품에서 근육의 꿈틀거림과 진솔한 생활의 냄새가 나는 것은 이면우가 일상을 고마워하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 아닐지. ‘보일러공의 기도’라고 불러도 좋은 ‘화엄경배’에선 뜨거운 불기운이 느껴진다. 세상의 하찮은 것들을 다사롭게 끌어안는 휴머니티 가득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 ‘연민을 가질 수 있어야 마침내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고 이면우는 노래한다. 아프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희망은 언제나 우리의 숙제... 이성부의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적지 않은 독자들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최고의 절창(絕唱)’으로 손꼽는 게 이성부 시인의 ‘봄’이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분홍빛 꽃들과 함께 봄은 온다. 겨우내 꽁꽁 언 땅에서 새파란 새싹이 돋아나듯 희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해마다 그 모습을 드러내며 인류와 함께 공존해왔다. 삶이 있다면 희망도 있고, 생이 소멸하지 않는 한 희망도 소멸하지 않는다. 2026년 1월 초. 아직은 북풍에 어깨를 움츠려야 하는 차가운 날씨지만, 머지않아 희망의 메타포라 할 봄이 ‘눈 부비며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다. 만약 그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네 세상살이가 얼마나 메마르고 팍팍할 것인가. 맞다. 병오년의 봄도 멀지 않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6-01-01

혹한의 겨울, 한국 사람은 아직 ‘밥심’으로 살까?

몇 해 전 겨울이다. 가수 진성이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아/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고 노래한 ‘안동역’ 인근 조그만 식당에 갔다.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고, 무언가 따끈한 게 먹고 싶었다. ‘냄비밥’이란 메뉴가 눈에 띄었다. 알고 찾아간 게 아니었는데, 거긴 이미 기자 외엔 알 만한 사람이 다 아는 맛집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다른 메뉴를 쳐다볼 것도 없이 냄비밥을 주문했다. 기대했던 대단한 밥상이 차려지진 않았다. 그저 몇 가지 나물반찬에 담백하게 끓인 된장찌개, 거기에 고등어조림 한 토막. 헌데, 얇은 냄비에 갓 지어낸 밥이 기가 막혔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구수하고 달았다. 그 옛날 교주 최시형을 따르던 동학교도들은 “밥이 곧 하늘”이라 했다. 거창한 의미 따위를 붙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밥은 ‘섬김의 대상’이었다. 뿐인가? 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말에 토를 다는 이들이 없었다. 싱싱한 푸성귀 무침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따끈한 냄비밥을 깨끗하게 비운 그날. 냄비에 지은 밥이 선물한 ‘또 다른 별식’ 누룽지를 씹으며 기억의 회로 저 먼 곳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선친과 외조모에 얽힌 에피소드였다. 주전부리나 별식 따위가 없던 시절엔 반찬도 부실했다. 그래서였을 터다. 지난 세기 한국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주식이라 할 밥을 무지하게 많이 먹었단다. 물론 제 땅이 없고, 소작할 땅도 마땅찮아 극도로 가난했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리와 콩 등 잡곡을 섞은 밥도 양껏 먹지 못했겠지만.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 선교 등의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농부나 어부의 식사량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고 한다. ‘밥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먹는 조선 사람’에 대한 놀라움은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쓴 책에 고스란히 남았다. 커다란 밥그릇을 앞에 놓고 앉은 상투 튼 조선인 사진 몇 장도 함께 전해진다. 1947년에 태어난 모친은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농사일을 도우며 시골에서 살았다. 반면 선친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세련된 도회지’라 불러도 좋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1944년, 그러니까 해방 한 해 전에 나고야에서 부산으로 이주한 아버지는 혼인하기 전까지 내내 도시에서만 살았다. 그리고, 일생 소식(小食)했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기 주먹만한 조그만 밥그릇임에도. 그런 아버지가 장가를 갔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처음으로 처가에 갔을 때 몹시 곤혹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선친의 첫 번째 처갓집행(行)은 벼 수확이 한창이던 1970년 가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위는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이런저런 처갓집 피붙이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니 저녁밥 먹을 때가 됐다. 장모가 들고 온 밥상을 본 아버지는 대경실색(大驚失色) 했단다. 황소 머리통만한 밥그릇엔 푸른 염료로 큼직하게 ‘福(복)’자가 새겨져 있었고, 밥그릇에서 솟아오른 밥의 높이가 족히 10cm는 넘어 보였다는 것. 이른바 농사짓는 상일꾼이 먹는 ‘고봉밥’이었다. 선친은 매사에 과장이 없는 사람. “이걸 혼자서 어떻게 다 먹나? 쌀 한 되로 밥 한 그릇을 만든 형국”이란 혼잣말을 참지 못하고 했다는데, 그걸 장모는 듣지 못했을까? 만약 들었다면 꽤 서운했을 듯하다. 맏사위를 위해 정성껏 차린 밥상이었으니.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그 밥을 아버지는 결국 남겼고…. 세월무상(歲月無常)이다. 지난 2007년. 산처럼 높고 높은 고봉밥을 퍼주던 1920년생 외조모(아버지의 장모)가 세상을 떴고, 이듬해 시골 사람들 밥그릇 크기와 밥의 양에 경악했던 사위(선친)도 귀천했으니. 그리고 2025년 찬바람 매운 오늘.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믿던 1970년에서부터 55년이 흘렀다. 이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밥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나와 모친도 겨우 쌀 한 홉으로 밥을 지어 둘이서 나눠 먹는다. 그러고도 그걸 남길 정도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먹고 싶어진다. 외조모의 가마솥 고봉밥이나 낡은 냄비에 고슬고슬 지은 따끈한 밥이. 그런 걸 보면 기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 모양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30

‘깜밥’ ‘가마치’로도 불리던 별미

한국에 전기밥솥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아마도 20세기 중후반이 아닐까 싶다. 장작이나 연탄 없이도 전기를 사용해 빠르고 간편하게 밥을 지을 수 있는 수단이 생기면서 주부들의 ‘밥 짓기’ 고민은 사라졌다. 아쉽게도 그 고민과 동시에 하나 더 사라진 게 있으니 바로 ‘누룽지’다. 깜밥, 깐밥, 깡개밥, 깡개, 누룽갱이, 가마치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던 누룽지는 가마솥이나 냄비에 밥을 할 때 바닥에 밥이 눌어붙은 걸 지칭한다. 고소하고 묘한 단맛이 나기에 군것질거리가 많지 않던 1970년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별미로 먹었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룽지를 프라이팬에 구워 설탕이라도 조금 뿌리면 인기는 더 높아졌다. 어른들은 누룽지에 물을 붓고 푹 끓인 숭늉을 지금 사람들이 커피 마시듯 즐겼다. 요즘엔 일부러 밥에 열을 가해 누룽지를 만드는 가게도 있다. 옛 기억을 잊지 못하는 어르신들은 그렇게 만든 ‘21세기 스타일 누룽지’를 잔뜩 구입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과자처럼 먹거나, 식후 입가심용 숭늉으로 마시기도 한다고. 누룽지는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수분이 대폭 줄어들고, 적지 않은 양만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포만감이 생기기에 젊은 여성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누룽지의 쓰임새도 변하고 있는 모양. 한국인들의 ‘누룽지 사랑’을 알려주듯 사탕도 누룽지 맛이 나는 게 있고, 백미보다 건강에 좋다는 현미로 누룽지를 만들어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누룽지를 한국 사람만 먹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아직도 전기밥솥이 아닌 전근대적인 수단으로 솥에 불을 때서 쌀을 익혀 먹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 심지어 유럽 몇몇 나라 사람들도 누룽지를 즐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30

명성황후 민자영의 죽음 일주일 전엔 어떤 일이?

“나는 상상할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역사를 재료로 글을 쓰면서 가슴이 뛰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적 상상력을 기사에 담을 수는 없었다. 이제 마음껏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한 세계를 글로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는 것이 신이 나고 보람 있다.” 누군가에게는 ‘명성황후’라는 극존칭으로 불리고, 어떤 사람들에겐 ‘민비’로 비하되는 조선 26대 왕 고종의 아내 민자영(1851~1895). 민씨는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사망했다.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인의 칼에 찔린 처참한 죽음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TV와 영화를 통해 지켜봤을 이 유명한 살인 사건은 왜 발생한 것이고, 그 이전엔 어떤 일이 있었으며, 중전 민씨를 살해한 이들의 정체는 뭐였을까? 35년 동안 연합뉴스 기자로 일하고 올해 봄 퇴직한 권영석은 앞서 언급한 3가지 의문을 자신의 첫 소설 ‘작전명 여우사냥’을 통해 추적한다. 권영석은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상상을 교직(交織)하는 방식으로 중전 민씨의 죽음 직전 일주일을 긴장감 넘치게 묘사, 또는 서술한다. 오랜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짧고 명확한 단문이기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이명재와 아다치 겐조의 치열한 지략 대결 펼쳐져 소설의 주인공은 19세기 말 온건 개화파의 수장이던 민영익의 호위무사 이명재. 가상의 인물이다. 그와 대척점에 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인물은 아다치 겐조다.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나라에 세운 일간지 ‘한성신보’ 사장이며 실존 인물. 책을 펴낸 출판사는 “‘작전명 여우사냥’은 주인공 이명재와 라이벌 아다치 겐조의 치열한 지략 대결과 한성 시내를 뒤흔든 대형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한다”는 설명으로 이 작품이 딱딱한 역사소설의 모습만이 아닌 흥미진진한 스릴러의 면모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중전 민씨의 죽음은 정확한 전말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관련된 논란도 현재 진행형이다. 권영석의 첫 장편 ‘작전명 여우사냥’은 이 풀리지 않은 역사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까? 권영석은 1991년에 연합뉴스에 입사해 올해 봄 정년퇴직했다. 여러 부서에서 근무했고, 재직 마지막 시기엔 북한부와 통일언론연구소 등 북한 관련 부서에서 주로 일했다. 이에 관해 권 작가는 “역사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 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다. 역사적 삶이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독립전쟁을, 독재 치하에 산다면 민주화 투쟁을 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지금은 분단시대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와 통합을 위하는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서고 싶었다”고 부연한다. 소설을 쓴 이유에 관해선 “지금까지 남이 하는 얘기만 썼다. 기사는 쓸 만큼 썼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쓰려 한다”고 했다. 크게 봐서는 똑같은 글쓰기지만, 소설과 기사는 그 작법과 호흡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분량만을 보자면 소설의 길이는 기사를 크게 압도한다. 그래서다. ‘작전명 여우사냥’이 나오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지난 2022년 5월 권 작가는 영화감독 한 명과 통음했다. 그 자리에서 감독에서 우연히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설명했고, “흥미로운 소재고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격려를 얻었다. “그때 이후 조금씩 시간을 쪼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탈고까지 거의 3년 걸렸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상상력을 발휘하며 소설 쓸 때가 더 행복했다.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는 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권영석의 회고다. ▲자신의 문장으로 소설 쓰는 시간, 너무 행복해 작가라면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권영석은 명성황후, 혹은 민비로 불리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래는 그에 관한 대답이다. “명성황후란 명칭은 귀에 거슬린다. 내 소설 속에선 중전 민씨라고 불렀다. 황후라고 높여 부를 필요도 없지만 민비라고 업신여길 필요도 없다. 총명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이 잇따라 죽으면서 하나 남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다. 무당에게 의지하고 뇌물도 좋아했다.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탐욕이 끝이 없었다. 가장 큰 죄는 사대주의였다.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조선을 청나라 속국으로 만들었고 청나라가 망하자 그 다음에는 러시아에 의지했다.”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의 아픔은 패전국들의 몫이었다. 동독과 서독처럼 일본도 미국과 러시아가 분할 점령을 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에 대해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했다. 권영석은 바로 여기서 우리 민족 비극의 시작을 봤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에도 일본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처음 제안한 1895년 상황이 서술된다. 러시아가 일본의 대륙 진출을 봉쇄하자 한성 주재 일본 공사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한반도를 분할해 나눠 갖자고 제안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 권 작가는 독자들에게 “특히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주며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예순 살. 기자에서 소설가로 존재 전이한 권영석에 “이젠 또 어떤 책을 쓰고 싶은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그의 단단한 결심을 짐작하게 해줬다. “이번 소설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으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생각이다. 글을 쓰는 재능도 없으면서 하찮은 소설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독자들이 소설을 계속 써도 좋다는 평가를 내려준다면 남북한 문제를 다룬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 독자들은 그에게 “당신은 앞으로 소설가로 살아가도 좋다”는 평가를 내려줄까? 그가 새롭게 써낼 남북관계에 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현재까지는 고종과 중전 민씨의 한쪽 측면만 과대 포장한 소설이나 드라마가 많았다. 그걸 알기에 권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보탰다. “‘작전명 여우사냥’이 고종과 중전 민씨를 입체적으고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23

“1인분을 다하는 것이 현장을 지키는 일입니다”

2010넌 입사 전기정비직으로 만 15넌 현재 ‘냉연의 꽃’ PCM 압연 공정 맡아 설비 고장 예측·예방 최적의 상태 유지 - 본인 소개와 현재 맡고 있는 주요 업무를 말해달라. 포항제철소 압연설비2부 냉연정비2섹션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헌제 계장이다. 2010년 포스코에 입사해 전기정비직으로 일한 지 만 15년이 됐다. 현재는 냉연의 꽃이라 불리는 PCM 압연 공정을 맡고 있다. PCM 압연은 쉽게 말해, 두꺼운 철판을 얇고 매끈하게 만드는 ‘철판 다듬기 공정’이다. 마치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눌러 원하는 두께로 펴는 과정과 비슷하다. 열연 코일이라는 ‘반죽’을 압연 롤이라는 ‘밀대’로 강하게 눌러 얇게 만들고, 표면을 고르게 다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압연 롤과 철판이 맞물리며 강한 압력과 마찰이 발생하고, 여기에 고속 회전으로 인한 열까지 더해진다. 아주 미세한 두께 조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면밀한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 설치된 각종 센서와 전기설비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데이터를 분석해 고장을 예방하는 일을 맡고 있다. 또한 생산 효율과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설비 제어 프로그램을 개선하고 있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어릴 때부터 내 꿈은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포항제철공고에 입학한 순간부터 그 목표는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졸업할 무렵엔 경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바로 목표를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취업 시장도 얼어붙어서 대기업에 들어가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중장비를 제작하는 제조업체에 입사하게 되어 약 2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단순 반복적인 조립 공정은 내 적성과 잘 맞지 않았고,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도심 생활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고민 끝에 오랜 꿈이었던 포스코 입사를 목표로 다시 준비를 시작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 냉연정비섹션을 소개한다면, 어떤 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냉연정비섹션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설비의 명의(名醫)’다. 사람의 병을 미리 발견해 예방하고, 병이 생기더라도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치료하는 의사처럼, 우리는 설비의 건강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철강 산업이라고 하면 거친 현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요즘 현장은 점점 스마트하게 변하고 있다. 다양한 기술이 접목되면서 설비의 ‘아픈 곳’을 미리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몇 년 전 도입된 PIMS(POSCO Intelligent Maintenance System)이다. 이 시스템은 과거에 발생했던 고장이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데이터로 분석해, 설비 고장을 미리 예측하고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직은 활용도가 높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면 정비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곧 ‘스마트 제철소’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냉연정비섹션은 그 길을 묵묵히 준비하며, 설비가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오늘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1인분은 반드시 하자” 평소의 생활 신조 내가 지키고 싶은 원칙은 ‘책임’과 ‘헌신’ 신뢰받고 안전한 현장 만들기 위해 필요 - 회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원칙은 무엇인가? 내 회사생활의 신조는 단순하다. “1인분은 반드시 하자.” 내가 맡은 몫을 다하지 않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동료에게 넘어간다. 그렇게 되면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1인분’은 단순히 주어진 일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만큼 배우고, 익히고,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정비 업무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필요한 부품을 미리 준비하고, 고장에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설비 상태를 숙지하는 것이 필수다. 이런 역량을 키우기 위해 압연기능장, 산업안전기사, 설비보전산업기사 등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하며 꾸준히 자기계발에 힘쓰고 있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전문지식을 높이는 것이 곧 팀의 안정성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선후배 사이의 연결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경험이 많은 선배들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후배들의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선배들에게 전달하며 팀이 하나로 움직이도록 돕는다. 설비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야간에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도 주저 없이 현장에 나서 문제를 해결한다. 결국 내가 지키고 싶은 원칙은 ‘책임’과 ‘헌신’이다.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고, 동료와 조직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모여야 비로소 안전하고 신뢰받는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 포스코의 복지 제도 중에서 특히 만족하며 누리고 있는 제도가 있다면? 우리 회사는 직원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방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연극 프로그램, 클래식 공연, K-POP 콘서트까지 그 폭이 넓고 수준도 높아 다방면에서 만족하고 있다. 특히 8세 자녀가 있는 나에게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문화행사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공연 프로그램들을 보며 가족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런 경험은 포스코의 복지 혜택이 아니었다면 쉽게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다. 올여름 블루원 워터파크 대관 행사도 잊을 수 없다. 평소 대형 워터파크는 인파 때문에 선뜻 가기 어려웠는데, 대관 행사 덕분에 아이와 함께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시원한 물놀이와 함께 소소한 이벤트, 기념촬영까지 하루 종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경험은 단순한 ‘행사 참여’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이고, 삶의 활력을 주는 순간이었다.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애써주시는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직원들의 문화생활 다양한 지원 큰 만족 연극·클래식·K-POP 까지 수준도 높아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삶의 활력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철강 산업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글로벌 경기 변동, 세계적인 철강 수요 둔화, 특히 중국의 과잉 생산과 저가 수출은 국내 철강업계의 경쟁 환경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석탄을 쓰는 고로 제철 방식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포스코는 이러한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수소환원제철(HyREX) 기술 개발에 착수하여,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해 철을 생산하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더 나아가 2050년까지 모든 제철소를 수소환원제철소로 전환해, 환경 친화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동시에 갖춘 ‘탄소중립 철강기업’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국내 철강업계가 세계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미래 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산업을 물려주기 위한 필수 과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힘, 그리고 변화를 선도하는 실행력 그것이 포스코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도 걸어갈 길이라고 믿는다. 조직 내 MZ세대가 주력 인력으로 자리 세대 교체되는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협력·소통이 강한 조직 만드는 것 목표 - 앞으로의 포부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큰 세대 교체의 흐름 속에 있다. 60년대에 태어난 선배들이 차례로 현장을 떠나고, 이제 MZ세대가 주력 인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중견사원으로서, 선배들의 경험과 후배들의 열정을 이어주는 연결점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후배 사원들과의 좋은 유대 관계를 유지하며, 업무를 빠르게 습득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동시에 관리자를 보필하고, 현장에서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중간 리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변화하는 인력 구조 속에서, 세대 간의 협력과 소통이 강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2-21

영덕 관어대 고래불해수욕장의 '눈부신 풍경'

경북 영덕 상대산(上臺山) 관어대(觀魚臺)에 올랐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 서자 사방으로 열린 하늘과 바다, 능선과 들녘이 한 폭의 거대한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동쪽으로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푸른 동해가 숨결처럼 일렁이고, 북쪽으로 이어진 울진 후포항의 해안선은 산과 바다를 꿰매어 붙인 곡선의 비단 폭이 고요히 흐른다. 아래로는 영해와 병곡의 평야가 평화롭게 누워서 잠들고, 명사 20리라 불리는 고래불해수욕장과 솔숲은 푸르고 유쾌한 기운을 밀어 올린다. 푸른 바다와 솔숲 사이 황금빛 모래 해변은 또 어떤가. 발아래 헤엄치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다고 하여 붙인 이곳, 관어대는 오래 바라볼수록 물결 속에 숨 쉬는 생명과 풍광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고, 옛 시절 목은 이색 선생을 비롯한 시인, 묵객들이 시심을 틔웠을 까닭을 알 듯하다. 퇴직 후 황혼의 청년이라 자처하는 고향의 친구 정기채, 이승구, 황조연, 이희열님과 함께 이 멋진 풍광을 즐겼다. 한 주가 멀다고 하며 유명한 산천을 주유하는 이들이다. 오랜 공직 생활 내내 성실과 청렴을 지켰고, 고위 공직자로 명예롭게 퇴임한 뒤에는 새 일자리를 찾기보다 몸을 돌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인생 2막 황혼의 삶을 꾸리고 있다. 이름난 명소라면 이미 대부분 다녀온 터라, 우린 여행지를 추천하기보다 어떻게 자연을 느끼고, 걷고, 쉼을 얻으며 노년의 삶을 균형 있게 꾸밀 것인지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부신 풍경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속도를 늦추고, 해풍에 마음을 걸어두고 침묵의 명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고래불이라는 이름에는 바다 내음처럼 긴 시간을 품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옛사람들은 목은 이색 선생이 이곳을 찾았을 때, 해수욕장 앞 바다에서 고래가 흰 물줄기를 뿜으며 장난치듯 노니는 장관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전한다. 그날의 놀라움과 감탄이 바람결에 스며 지명으로 남았으니, 고래가 노니는 모래뻘이라는 뜻에서 고래불이라 불린 것이다. 여기서 불은 뻘의 옛말이라 한다. 1986년 국제 고래잡이 금지 전까지 바다에서 실제로 고래잡이가 행해졌고, 2000년엔 멸치잡이 어선이 이빨부리고래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는 소식을 마을에 전했다. 고래불 해변, 북쪽의 솔숲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면 또 하나의 지명 이야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용머리이다. 마을 앞 바다에는 용이 머리를 내밀고 파도를 내려다보는 듯한 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바위를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 용머리라 불러왔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곳곳에 말뚝을 박아 민족의 기운을 꺾으려 했던 어두운 시절에도 마을 사람들은 용머리를 잃지 않기 위해 팔각정을 세워 수호처인 듯 위장했다 한다. 그들의 작은 지혜와 간절함이 마을의 숨결을 지켜낸 것이다. 지금도 5년마다 풍어제가 열리면 첫 제의는 용머리에서 드린다. 바위에 제사가 올려지고 북소리가 바다를 흔들며 퍼져 나가면, 오래된 믿음과 바다의 영혼이 조용히 호흡한다. 전국에서 무속인과 여행객이 기도를 위해 찾아온다. 바람에 흔들린 촛불과 파도 소리가 어우러지면, 이곳은 세월을 건너 이어져 온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 고래불 해변을 신발 벗고 맨발로 걷다 보면 모래가 체온을 닮아 따스하다. 발끝 사이로 스며드는 파도는 오래된 슬픔마저 씻어주는 듯하다. 수평선 위 붉은빛이 서서히 번지고, 둥근 해가 바다를 뚫고 솟구치던 순간, 윤슬이 바다를 타고 내게로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절로 합장되고, 감사와 소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렸다. 그 황홀한 빛의 파동이 몸을 스치자 잠자던 세포가 꽃잎처럼 터져 오르는 듯했으니, 자연의 감동이란 이토록 말없이도 깊고 환한 것임을 깨닫는다. 세상의 소음은 멀어지고, 오직 파도와 바람, 나의 숨결만이 투명하게 남는다. 모래 해변, 그 이름만으로도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낭만의 장소이다.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면, 바다 건너 오래전 고래가 수면을 가르며 솟구치던 순간의 물빛이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파도친다. 파도는 은빛 결을 이루며 모래 위를 밀어내고 다시 끌어당긴다. 무심한 물결에 발끝을 내맡기고 한참을 걷다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근심이 바닷물에 씻겨 나가는 듯 가벼워진다. 모래를 딛는 발걸음은 더디고 힘들지만, 바람에 실린 조개껍질의 미세한 반짝임과 파도 소리의 리듬은 그조차 잊게 만든다. 돌아올 때는 고래불 솔숲으로 들어섰다. 공기는 한층 더 맑고, 수천 그루 소나무가 선선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솔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송진과 흙냄새가 어우러진 향기를 머금고 있다. 식물이 몸을 지키기 위해 내뿜는 피톤치드가 온몸에 닿아 정신과 폐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테르펜이라 불리는 이 향은 살균, 진정, 소염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약리의 힘을 품고 있다. 숲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몸의 균형이 되살아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생각의 먼지가 털리고, 초록의 물결이 눈과 가슴을 편안하게 덮어준다. 숲은 설명보다 먼저 감각으로 스며들고, 치유는 어느새 몸속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이곳은 영덕 고래불해수욕장으로 뿐만 아니라 국민 야영지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든다. 녹음이 짙어질수록 마음의 결도 부드러워진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그리워하는 존재, 생명애라 부르는 바이오필리아의 흔적이 DNA 속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숲길을 걷는 동안 도시의 빌딩 숲에서 느꼈던 숨 막힘은 사라지고, 심장은 넓어지고 호흡은 길어진다. 자연은 값을 치르지 않아도 우리에게 풍요를 내어준다. 모래의 질감, 파도의 리듬, 숲의 향기, 흙의 온도, 시원한 바람…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다. 고래불 솔숲 길과 모래 해변을 걷는 일은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는 조용한 귀향이다. 고래불 솔숲과 황금 모래 해변, 푸른 동해,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에 부드러운 파도가 스친다. 숲길을 따라 솔향이 은은히 번지면 곧장 바다가 열린다. 모래 위로 햇살이 반짝이고 윤슬이 길을 내어주듯 손짓한다. 걸을수록 바람은 맑고 잎사귀 사이에서 흘러나온 푸른 향은 마음 깊은 곳의 오래된 응어리까지 씻어 낸다. 숲의 숨결과 바다의 리듬이 만나 한 걸음마다 시가 되고, 파도는 발뒤꿈치를 적시며 다시 돌아오라 속삭인다. 고래불, 그곳은 한 번이라도 마음에 스며들면 다시 찾고 싶은 자리이다. 보고 싶고 걷고 싶은 낭만이 불빛처럼 번져 가슴 끝을 환히 밝히는 곳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포구(浦口) 용머리 시비는… 동해(東海) 가을 깊어 파도는 멀고 안개 갠 포구에 갈매기 앉네 어이차 한 소리에 님은 십 리 밖 오늘도 무사하길 바라는 아내 상대산 우뚝 솟아 십리 같은데 펼쳐진 백사장은 이십 리라네 언제나 철썩이는 파도와 같이 마음껏 날고파라 물새와 함께 -2000년 4월 17일

2025-12-17

‘오미자’에 관해 우리가 궁금한 것들

보석처럼 붉은 조그만 열매. 매혹적인 빛깔과 여러 가지 효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오미자는 어떤 식물일까? 먼저 이 궁금증에 답해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산골짜기, 모가 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돌이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넓은 타원모양. 잎의 길이는 7∼10㎝, 너비 3∼5㎝로 가장자리에 작은 치아상의 톱니가 있다. 열매는 8~9월에 빨간색으로 익으며 둥글거나, 달걀 모양이다. 이 열매는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 가지의 맛을 낸다. 그 가운데서도 신맛이 가장 강하다. 한방에서는 약재로 이용된다. 대뇌신경을 흥분시키고 강장작용이 나타났으며, 호흡중독에도 작용한다. 또한, 심장활동을 도와 혈압을 조절하고, 간장의 대사를 촉진시키는 효과가 인정됐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차와 진액을 만들 수 있고, 각종 요리의 재료로 흔하게 사용되는 오미자가 건강에도 좋다면 그걸 먹지 않겠다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경북 문경은 오미자로 유명세를 탄 고장이다. 1993년에 야생 오미자를 이식해 재배 시험을 진행했고, 1996년엔 유휴산지에서 소득시범사업으로 오미자를 재배한 문경은 2006년 ‘오미자 산업특구’로 지정됐다. 전국 시장에 풀리는 오미자의 45% 이상이 문경에서 나온다. 오미자를 지역 특산물로 잘 키워왔기에 2013년엔 지역경제 활성화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문경에서 자라고 수확되는 질 좋은 오미자로 만드는 오미자청은 각지로 판매돼 ‘오미자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오미자청은 만들기 어렵지 않다. 흐르는 물에 씻어 이물질을 제거한 후 물기를 없애고 설탕이나 꿀에 버무린다. 이를 밀봉한 후 뚜껑을 덮어 공기를 차단한 다음엔 주 1회 정도 통을 잘 흔들어 준다. 직사광선을 피해 2~3개월 숙성하면 오미자청이 거의 완성된다. 이걸 잘 걸러 서늘한 곳에 두고 용도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는 게 요리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16

술도, 돼지고기도 맛있어진다...‘오미자의 마법’

오미자(五味子)를 재료로 만든 술을 처음 맛본 건 20대 초반 때다. 엄마를 대신해 생일상을 차려줄 정도로 터무니없이 날 귀여워했던 친구의 어머니는 곱상하고 귀티 나는 외모에 한식에서부터 양식, 일식까지 무엇이건 능수능란하게 차려내는 수준급 요리사이기도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50대 중반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재인박명(才人薄命). 다시 한 번 그녀의 명복을 빈다. 어쨌건 그 친구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1990년대 초반이다. 구멍가게에서 사간 맥주 한 박스를 다 비우고도 술이 모자랐던 우리는 주방 선반에서 매혹적인 빛깔을 뽐내는 담금주 한 병을 발견했다. 조그맣고 새빨간 열매가 독한 소주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망설일 것 있나? 주인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뚜껑부터 열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자다가 일어난 친구 어머니가 “아이고, 이놈들. 결국은 약하려고 만든 오미자주까지 너희들이 먹는구나. 그래 잘했다. 젊으니 한 말 술인들 못 마실까”라며 사람 좋게 웃어줬다. 기자와 친구도 도도한 취기 속에서 따라 웃었다. 새벽까지 통음한 그날 밤이 벌써 30년도 더 된 옛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오미자의 이름이 어째서 ‘오미자’인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오미자나무는 바위가 많은 산에서 자라는 덩굴성식물이다. 바로 여기서 열리는 열매가 오미자. 색깔은 다르지만 포도와 유사한 모양이기에 ‘붉은 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열매엔 달고, 쓰고, 시고, 맵고, 짠맛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다.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열매’라는 뜻에서 온 작명이 바로 오마자인 것. 한자를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터. 헌데,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감지해내는 절대미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쨌건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 사람들은 오미자나무를 재배했고, 그 열매를 따서 술을 담고, 차(茶)도 만들고, 설탕이나 꿀을 섞어 발효시킨 후 청으로도 먹었다. 병을 치료하는 한약재를 연구하는 ‘본초학(本草學)’에선 오미자의 효능에 관해 ‘쇠진한 몸을 완화시키고, 눈을 밝게 해주며, 신장을 데워준다. 여기에 더해 남성의 정기를 높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30여 년 전 친구 어머니가 “약에 쓰려고 담근 술”이라 말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주려고 정성껏 만들었을 귀한 술을 아들도 아닌, 아들 친구가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마셔버렸으니 마음속으론 밉지 않았을까? 너무 늦었지만 이 대목에선 용서를 구한다. 경상북도 문경은 이름난 오미자 생산지다. 오미자 열매는 초여름에 열리는데 그 시기에 맞춰 뻑적지근할 정도로 성대한 축제가 해마다 펼쳐진다. 취재를 위해 그 계절에 맞춰 두어 번 문경을 찾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문경 오미자 축제에 간 게 아마 7~8년 전쯤인 듯하다. 그곳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돼지불백 식당에 들렀다. 동료들과 함께였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리고 구워주는 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 맛은 유별났다. 잡내가 없었고 육질은 부드러웠다. 돼지고기 특유의 부들부들한 식감과 불에 익힌 단백질의 고소함, 과하지 않은 매운맛과 단맛이 근사하게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던 것. 기자들 서너 명의 논쟁이 시작됐다. “이건 돼지고기를 양념할 때 오미자청을 넣은 게 틀림없어” “아냐. 고추장을 만들 때부터 오마자를 재료로 사용한 것 같은데…” 운운하는. 정신없이 바쁜 식당 주인에게 “누구 말이 맞습니까?”라고 물어보기엔 미안했다. 사실 먹음직한 돼지불고기를 안주 삼아 오미자가 들어갔다는 핑크색 막걸리를 들이켜기에도 바빴고. 때마다 문경을 다녀올 때면 오미자청, 오미자차, 오미자 열매를 구입하곤 한다. 엄마는 오미자차를 즐겨 마셨고, 오미자청은 이런저런 볶음 요리의 재료로 사용했다. 지난해엔 오미자주도 만들었는데, 우리 집 거실에서 붉게 익어가는 그걸 다가오는 설에 마실 생각이다. 여전히 스물두어 살 때 친구 집에서 마셨던 그 맛일까? 궁금하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16

포항의 정체성과 풍경, 그 기억의 사잇길을 걷다

지역 곳곳 실뿌리 내린 아홉 노포와의 여정 웃음과 슬픔 버무린 일상의 경이로움 전해 시민과 애환 함께한 다른 노포 소개도 기대 지난 2019년 필자는 칼럼에서 노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포항 원도심에는 코주부사 외에도 50년 된 포항이발소, 40여 년 된 동아세탁소, 할매떡볶이 같은 노포가 있다. 이 오래된 점포의 주인들은 소소한 기술과 성실한 노동으로 어렵게나마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웠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 톨의 씨앗도 품기 어려웠던 폐허에 힘겹게 실뿌리를 내리며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인생의 황혼에 이른 노포의 주인들을 만나 삶의 여정을 들어보면, 진정한 역사는 이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생명력이 서로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한평생 지켜온 점포가 작은 박물관이고, 이들이 사용해온 재봉틀, 이발도구, 요리도구가 역사 유물이며, 이들이 웃음과 슬픔을 버무려 풀어놓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책이 아닐까. 지역 공동체의 정서와 문화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애틋한 삶을 잘 갈무리해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궁리해야 할 때가 됐다. - 「코주부사,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작은 역사」, 『경북매일신문』 2019년 12월 2일 자. 그로부터 6년이 흘러 ‘포항의 노포 기행’ 연재가 진행되었다. 2021년부터 『경북매일신문』 지면을 통해 포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해온 참여자들의 뜻이 모여 이 기획이 만들어졌다. 노포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지역의 문화,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서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이 연재는 개복치점, 열쇠점, 막걸리 양조장, 양복점, 제과점, 국수공장, 속옷가게, 중화요리점, 마크사 등 지역 곳곳에 있는 노포 아홉 곳을 다루었다. 물론 주목할 만한 다른 노포도 있다. 이를테면 1967년 개업한 로타리냉면은 오랜 세월 냉면의 깊은 맛을 선사해온 맛집으로 포항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다. 그 밖에 초원통닭, 시정당, 제일화공약품상사 등도 시민과 애환을 함께해온 노포다. 이 노포의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통해 펼쳐 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포항고 부지 기부 김춘생 창업주 ‘동성조선’ 3대 이어 전국서도 유명한 조선소로 발전 박일천 첫 민선시장과의 끈끈한 인연은 포스텍 설립 이끈 ‘선한 영향력’으로 발휘 포항고 대신동 부지를 기부한 동성조선 창업자 노포 외에도 포항의 기업 중에 3대째 이어온 기업이 있다. 중소형 조선소인 동성조선이 대표적이다. 전국에서 이름이 높은 동성조선은 1946년에 설립된 향도조선(向島造船)이 모체로 1955년에 지금의 상호로 변경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소를 일본이 패망하여 철수하자 그곳에서 일하던 대목장(大木匠) 김춘생이 인수해 향도조선을 설립한 것이다. 김춘생의 차남 김성호에 따르면, 조선소 인수 과정에서 자금이 부족했던 김춘생은 지역 유지 김용주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그러자 김용주는 차용증도 작성하지 않고 김춘생에게 큰돈을 빌려주었다. 김용주의 통 큰 도움 덕분에 향도조선을 설립한 김춘생은 성실한 자세로 사업에 임해 사업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그 후 김춘생의 친구인 박일천 첫 민선 포항시장이 김춘생에게 당시 두호동에 있던 포항고등학교를 시내로 이전해야 하는데 김춘생 소유의 대신동 땅을 기부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김춘생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포항고등학교는 1954년 9월 1일 대신동 신축 교사로 이전할 수 있었다. 지금 동성조선 사무실 벽에는 포항고등학교 교장과 기성회장 명의로 김춘생에게 수여한 감사장이 걸려 있다. 박일천은 뒷날 포항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에 앞장섰으며, 이 청원은 포항공대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8년 박일천 사후에 유족들이 유산을 포항공대 발전기금으로 기탁한 바 있다. 포항의 역사·문화기록 대장정에 도움 준 지역 원로들의 ‘안타까운 죽음’ 깊이 애도 지난 5년간 포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게 도와준 세 분의 별세 2021년에 발간된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1』을 시작으로 포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포항뿐 아니라 서울, 부산, 인천, 대구에서 여러 분이 이 작업을 지켜보며 따듯한 격려를 해주었다. 그들 중 작년 12월에 별세한 손장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잊을 수 없다. 손 관장은 필자와 얼굴 한 번 본 적 없건만 귀한 사진 자료를 기꺼이 제공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른 타계를 인천 학계가 안타까워했는데 필자로서도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포항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작업에 많은 도움을 준 고 손장원 관장의 명복을 빈다. 5년간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뷰에 응해준 세 분이 별세했다.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2』(2022)에 나온 이봉식 선생은 향년 93세로 작년 3월에, 김두호 화백은 향년 89세로 올해 8월 작고했다. 『포항의 예술인』(2024)에 나온 문신구 영화감독은 향년 70세로 올해 5월 영면에 들었다. 이들의 부음을 들으며 이 작업의 의미와 무게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들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한다. ‘포항의 노포 기행’을 지켜본 문학평론가 최영호 교수(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가 감상평을 보내왔다. 그의 표현처럼 이 연재는 “포항의 정체성과 풍경, 그 기억의 사잇길”을 걸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넉 달간의 여정을 함께해준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같을까 다를까? 눈에 보이는 것은 같지만 공간은 비어 있되 장소는 꽉 차 있다. 텅 빈 질그릇이 무엇인가 담긴 후부터 전혀 다른 것이 되듯 말이다. 그 질그릇의 ‘빈 중심’과 관계성이 질그릇의 새로운 본질을 창조한다. 하나의 공간이 장소로 재탄생하는 것은 우리와의 관계 때문이다. 포항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엔 애틋하고 친밀한 포항이 깃들어 있다. 이 연재는 포항 사람들이 관계 맺고 있는 장소로서의 포항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시계 바깥의 시간으로 축적된 포항 노포를 찾아가는 이 연재에는 우리가 잊을 뻔한 장소로서의 포항 가는 길이 산지사방으로 열려 있다. 포항의 정체성과 풍경, 그 기억의 사잇길을 걷고 싶다면 이 연재의 일상적 경이로움에 마음의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끝> 필 자 : 김도형 사 진 : 김 훈

2025-12-14

피부 매끄럽고 윤기 있게 가꾸어 주는 ‘동해 부인’

홍합서 분비되는 단백질 접착력 125㎏ 무게 들어 올릴 정도 강력 지금은 지중해 담치에 밀려 ‘귀물’ △ 토종홍합의 달큰한 맛이 일품인 홍합밥 울릉도 홍합밥이 인기 있는 것은 홍합 덕분이다. 울릉도 홍합밥에 들어가는 홍합은 요즘 흔한 지중해담치가 아니라 토종 홍합이다. 지중해담치보다 크고 살이 두텁고 탱글탱글하고 쫄깃한 진짜 우리 홍합이다. 지중해 담치는 토종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토종 홍합은 지역에 따라 합자, 합, 열합, 담치, 참담치, 담채, 섭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옛날에는 성질이 따뜻하고 피부를 매끄럽고 윤기 있게 가꿔준다는 속설이 있어서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고도 했다. 본래 우리 바다에는 토종 홍합들이 다수였는데 지금은 보기 드문 귀물이 되었다. 외국을 왕래하는 화물선의 밸러스트(Ballast)에 지중해 담치의 유생이 섞여 들어오면서 이제는 전 연안을 장악해버렸기 때문이다. 벨러스트란 배에 실은 화물의 양이 적어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 안전을 위해 배 바닥에 싣는 물(평형수)이나 돌 등의 중량물을 의미한다. 우리 바다에는 토종 홍합과 지중해담치 외에도 비단담치, 털담치 등 13종 내외의 홍합류가 서식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합은 조개 살이 붉은 빛이라 홍합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상 암수에 따라 그 살 색이 다르다. 암홍합은 붉은색, 숫홍합은 흰색을 띤다. 암홍합이 맛이 더 뛰어나다. 홍합은 폴리페놀이라는 접착력 강한 단백질을 분비해 바위에 몸을 고정시켜 살면서 바닷물 속의 영양분을 걸러 먹는다. 홍합 하나에서 분비되는 단백질 족사의 접착력은 무려 125kg의 무게를 들어 올릴 정도로 강하다. 울릉도 토종 홍합의 강력한 접착력이 거친 파도를 버티며 살아가게 만든다. 울릉도 홍합의 맛과 영양이 뛰어난 것은 그 강한 생명력 때문이 아닐까? 귀한 특식인 홍합밥 뿐만 아니라 울릉도에는 부족한 곡물의 양을 늘리기 위해 산나물이나 해초를 넣어서 지어먹던 구황 밥도 많았다. 개척 시기 울릉도 사람들의 목숨을 이어준 나물답게 명이로 지은 밥도 있었다. 명이 밥은 명이 줄기를 썰어서 보리나 조, 감자 등의 곡식과 섞어 지어먹던 울릉도의 구황 음식이다. 명이 줄기는 삶으면 찐득찐득 해지기 때문에 명이 밥은 먹기에 편치 않다. 소화가 잘 안 되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명이 밥은 양을 늘려 주린 속을 채우려는 고육지책으로 해 먹던 밥이다. 따개비라고도 불리는 삿갓조개 속살이나 우려낸 국물을 이용해 따개비밥·죽·칼국수·무침 요리 △ 대형 바다 말로 만든 대황밥과 따개비 밥 대황은 울릉도 바다의 대표적인 대형 바다 말이다. 과거 울릉도 사람들은 대황을 넣은 대황밥으로 굶주림을 면했을 정도로 고마운 음식이다. 대황은 바다에서 베어 갯바위에 널어 말린 뒤 마르면 짊어지고 와서 장작불을 때서 삶았다. 삶은 대황의 줄기는 빼고 잎만 썰어서 보리나 감자, 옥수수를 섞어서 밥을 한 것이 대황 밥이다. 울릉도에는 따개비밥 있다. 하지만 따개비라 부르는 것은 실상 진짜 따개비가 아니다. 삿갓조개다. 따개비밥도 정확한 명칭은 삿갓조개 밥이라 해야 맞다. 진짜 따개비는 굴등이라고도 하는데 바닷가 암초나 말뚝, 배 밑 등에 붙어서 고착생활을 한다. 몸은 산(山)자 모양이며 딱딱한 석회질 껍데기로 덮여 있다. 삿갓조개(bernique)는 배말이라고도 하며 바닷가 바위에서 고둥과 함께 사는 삿갓 모양의 조개다. 따개비는 갑각류이고 삿갓조개는 연체동물문 복족강 삿갓조개류(Patello gastropoda)에 속하는 조개다. 둘이 전혀 다른 종이다. 따개비는 고착 생물이고 삿갓조개는 움직이며 산다는 점도 큰 차이다. 그런데 울릉도 사람들은 이 삿갓조개를 따개비라 부르며 따개비밥, 따개비칼국수, 따개비죽, 따개비무침 등 다양한 음식들으로 만들어 먹었다. 여기서는 울릉도 표현대로 삿갓조개를 따개비로 칭한다. 따개비는 속살이나 우려낸 국물을 이용해 요리를 한다. 채취해온 따개비는 깨끗이 씻고 껍질에 붙은 불순물을 제거한다. 따개비를 물에 넣고 껍질이 벌어질 정도로 삶는다. 속살은 건져낸 뒤 껍질만 남기고 물을 조금 더 넣어 다시 5시간 정도 푹 끓인다. 이렇게 끓인 따개비 물은 요리의 육수로 사용한다. 속살은 다양한 요리에 따라 활용한다. 따개비밥은 따개비 육수와 따개비 속살을 함께 넣고 지은 밥이다. 감자는 삶은 감자나 감자전이 대표적인 요리지만 감자 인절미, 감자 팥죽, 감자밥도 즐겨 먹던 울릉도 음식이다. 감자밥은 옥수수나, 보리 등 곡식에 감자를 넣고 해 먹었다. 이 또한 곡물이 부족한 울릉도에서 밥의 양을 늘리기 위해 만들어낸 음식이다. 옥수수 밥도 있었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다 보니 과거에는 옥수수도 귀한 곳이 울릉도였다. 그래서 옥수수밥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해 먹던 밥이다. 옥수수를 갈아서 감자를 넣고 지었다. 식량이 귀한 울릉도에서는 잔치에도 음식으로 부조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웃집에 결혼식 같은 잔치가 있으면 돈이 아니라 옥수수와 콩나물, 두부 등으로 부조를 대신했다. 쌀밥은 명절이나 제사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한 울릉도 이웃집에 결혼식 같은 잔치땐 옥수수·콩나물·두부로도 부조 △ 옥수수밥과 무밥으로 굶주림 면해 옥수수는 1500년경 폴란드인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고, 1700년대에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766년에 편찬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옥수수의 한자식 표현인 ‘옥촉서(玉蜀黍)’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옥수수밥은 ‘강냉이밥’이라고도 부르는데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옥수수 알갱이로 밥을 짓는 방법과 옥수수 가루로 짓는 방법이다. 옥수수 알갱이로 밥을 지을 때는 옥수수를 물에 불려두었다가 맷돌에 갈아 겉껍질을 벗긴 후 절구로 찧어 작은 알갱이로 만든 뒤 쌀밥과 동일하게 짓는다. 옥수수 가루 밥을 할 때는 삶은 팥, 밤, 감자 등을 함께 넣거나 불린 쌀을 조금 넣기도 한다. 솥에 감자나 콩을 먼저 넣고 끓인 후 그 위에 옥수수 가루를 넣고 끓이면서 뜸을 들여 밥을 짓는다. 옥수수를 저장할 때는 맷돌에 갈아서 ‘옥수수쌀’로 만들어 저장하기도 했다. 그래야 옥수수 밥을 해 먹기 편한 까닭이었다. 육지에서는 주로 봄철에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춘궁기 구황 음식을 먹었다. 초여름 보리가 나기 전까지 봄을 견뎌야 했기에 보릿고개란 말도 생겼다. 하지만 늘 음식이 부족했던 울릉도는 사시사철 구황 음식을 먹었다. 대표적인 구황 음식이 목숨을 이어가게 해 줬다는 명이밥, 대황밥, 무밥, 옥수수밥 등이다. 무밥은 보리, 옥수수 등에 무를 썰어 넣고 지은 밥이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무를 많이 넣으면 그나마 살림이 나은 집이라 했을 정도였다. 울릉도의 무밥은 무를 굵게 채 썰어 솥 밑에 깐 다음, 삶은 보리나 갈아서 물에 불린 옥수수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지었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무가 “오장의 나쁜 기운을 씻어 체기를 가라앉히고 속을 따뜻하게 하여 설사도 다스리는 고마운 약재”라 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도 “무의 생즙은 소화를 촉진하며 매운 맛은 열을 내려 속을 가라앉히고 해독 작용으로 독성을 풀며 숙취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도 섣달그믐날 먹는 생무는 산삼과 같고, 이때 무를 먹으면 부스럼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가난할 때 먹던 구황 음식이었지만 무밥은 음식인 동시에 약이었던 셈이다. 울릉도 사람들은 밥이 곧 약이 되는 식약동원의 시대를 살았다. 절대 궁핍을 건너 풍요의 시대에 도달 했으나 잊지 말고 전승해야 할 소중한 가치다. <끝>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11

[기획] 외국인이 지탱하는 도시⋯포항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포항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변수는 더 이상 출산율만이 아니다. 인구 50만 명의 경계가 흔들리는 가운데 외국인 8615명은 산업·교육·지역 공동체 전반에서 이미 도시를 떠받치는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제조업과 수산가공, 항만 물류, 농축산업, 대학 교육 등 도시의 여러 기능이 외국인 인력 없이는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운 구조로 변한 지금, 포항이 어떤 방향을 택하느냐는 단순한 인구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 전략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구조적 관점을 제시한 안성조 경북연구원 연구위원,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실질적 과제를 지적한 장흔성 경북 K-드림외국인지원센터 센터장의 의견을 각각 들었다. ◇ 안성조 경북연구원 연구위원 “이민은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대응이다” 안성조 경북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의 인구 상황을 “20년 누적으로 형성된 저출생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는 합계출산율이 바닥을 찍으며 진정 국면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대체출산율 2.1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며 인구구조 변화가 사실상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지방도시의 미래는 감소하는 인구를 전제로 한 대응 전략을 얼마나 정교하게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외국인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진다. 안 연구위원은 “유학생, 산업현장 근로자, 농어업 인력 등 외국인은 이미 도시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하고 있다”며 단순한 숫자 보완을 넘어 포항이 유지되는 구조 자체의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외국인을 ‘일시 체류자’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 장기적으로 함께 살아갈 구성원으로 자리 잡도록 돕는 제도와 문화가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안 연구위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을 정착 단계·체류 목적·접근성이라는 세 축으로 설명했다. 그는 “입국 초기, 2~3년 적응기, 장기 정착기 등 단계별로 필요한 지원은 모두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유학생·산업근로자·농축산업 근로자·결혼이민자 등 체류 목적에 따라 서비스가 구분돼야 한다”면서 지금처럼 모든 외국인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지원 방식으로는 실질적인 정착 기반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 전략을 뒷받침할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접근성 개선’이다. 안 연구위원은 “언어·정보·생활 서비스를 한 곳에서 안내받을 수 있는 종합 플랫폼이 필요하다”며 지역대학·관공서·센터가 연계한 상시 언어교육 모델 구축을 제안했다. 또 “해외 광역비자처럼 지역 산업구조에 기반한 지역특화형 체류제도를 적극 도입해 포항의 상황에 맞는 인구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항이 산업도시라는 점을 고려하면 숙련 외국인 인력의 장기 정착은 핵심적 과제로 꼽힌다. 그는 “단기 체류 뒤 귀국하면서 산업현장의 기술이 단절되는 문제가 반복된다”며 장기 근속을 유도할 수 있도록 기술 장인 육성, 10년 이상 근속 지원, 가족 동반 정착 허용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산업 생태계의 지속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안 연구위원은 가장 시급한 과제로 외국인 주민 실태조사를 제시했다. 그는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는 어떤 정책도 지속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실태 파악이 포항이 이민 시대에 적합한 전략을 설계하기 위한 출발점이다”고 말했다. ◇ 장흔성 경북 K-드림외국인지원센터 센터장 “주거문제, 삶의 조건과 정착의 장벽” 현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장흔성 경북 K-드림외국인지원센터 센터장은 외국인이 포항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장벽을 주거 문제로 규정했다. 그는 “집주인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약을 거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하며 주거 확보가 단순한 생활 요소가 아니라 취업·이동·건강 등 모든 정착 과정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안정된 주거 없이 시작되는 일상은 결국 정착 자체를 흔드는 구조적 위험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장 센터장은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리스크”라고 표현했다. 그는 “과도한 노동, 휴가 미부여, 사업장 이동 제한, 임금 체불 등 구조적 착취에 가까운 사례가 반복된다”고 말했다. 특히 여성 외국인 근로자의 경우 상황은 더 취약하다. 그는 “성희롱, 차별, 부당한 급여 지급 등 현실적인 피해가 존재하지만, 문제 제기가 어려운 구조적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단순한 노동 분쟁이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형성돼 있다는 의미다. 비자 제도와 행정 절차에 대한 정보 부족 역시 장기 정착을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축이다. 장 센터장은 “비자 종류가 달라지면 근로 조건도 크게 달라지는데 이를 몰라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의료 접근성 또한 취약하다. 그는 “의료 통역이 없어 의사소통이 안 되고 결국 치료를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하며 정보 접근성이 곧 정착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행정지원 체계가 외국인의 삶에 깊이 닿지 못하는 이유도 구체적으로 짚었다. 그는 “대부분의 외국인은 ‘시에서 도움받은 적 없다’고 말한다. 다문화센터 프로그램 참여 경험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는 결혼이민자 중심으로 설계된 기존 정책이 노동 목적 체류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포항의 현실과 맞지 않는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장 센터장은 인식의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외국인을 잠시 머무는 사람이나 부담으로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며 제도 이전에 서로 관계를 맺고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설명했다. 생활체육, 주민 모임, 자조모임 등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의 기회가 있어야만 문화적 거리감이 줄어들고 통합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도시의 변화가 제도보다 한발 앞서가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장 센터장은 “상가 한 블록 전체가 러시아어 간판으로 바뀐 곳도 있고 어떤 학교는 학생 10명 중 8명이 외국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존재가 이미 도시의 일상과 구조를 바꿔놓았지만, 행정은 여전히 과거 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포항은 이미 다문화 도시로 진입했지만, 제도와 지원 체계는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간극을 안고 있다는 분석이다. ◇ 두 개의 해법, 하나의 방향 두 전문가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결론은 한 방향으로 모인다. 포항은 이미 다문화도시가 됐고, 외국인은 산업과 지역 공동체를 지탱하는 필수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정착을 전제로 한 정책 전환 없이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안성조 연구위원은 저출생으로 인한 구조적 인구 변화를 ‘도시 전략’ 차원에서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제도·정책 전반의 재정비 필요성을 제기했다. 장흔성 센터장은 현장에서 외국인이 마주하는 주거·노동·정보 접근의 현실적 장벽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구조가 실생활에 닿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이들의 메시지가 교차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외국인을 ‘지원 대상’이나 ‘임시 체류자’가 아니라 포항의 미래를 함께 구성할 이웃으로 인식하는 전환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환의 출발점은 정확한 실태 조사이며 이어 주거·의료·언어·정보 등 기본 생활 기반을 보장하고 공동체와 연결되는 체계적 정착 전략을 마련하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 포항이 이러한 변화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느냐가 도시의 향후 10년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시리즈 끝>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5-12-11

울릉 주민들의 주전부리가 한국인이 사랑하는 간식으로⋯

섬 개척 초기 구황작물이던 호박 옥수수 전분·엿기름 등과 배합해 국민간식 ‘호박엿’으로 인기 상승 △ 호박, 척박한 땅에서 잘자라는 구황식물 호박엿은 오징어와 함께 울릉도의 상징이다. 울릉도 호박엿이 유독 사랑받는 것은 엿에 늙은 호박(청둥호박)이 30% 이상 들어가 지나치게 달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부드러워 먹기 좋은 까닭이다. 일설에는 울릉도에서 많이 자생하는 후박나무 껍질을 달여서 엿을 만들어 먹어 후박엿이라 했는데 발음이 변하면서 호박엿으로 되었고 나중에는 후박나무 껍질 대신 늙은 호박으로 엿을 만들게 되면서 호박엿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미약하다. 후박 껍질보다 흔한 것이 호박이었기 때문이다. 호박은 덩굴성 1년생 박과 식물로 아메리카대륙(북중미)이 원산지다. pumpkin은 해독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학명 ‘Cucurbita’는 오이를 뜻하는 라틴어 ‘Cucumis’와 둥글다는 ‘orbis’에서 유래했다. 호박은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고 땅이나 가뭄, 병충해에도 강하고 저장성도 좋아 옛날부터 구황 음식으로 널리 쓰였다. 호박은 동양계 호박, 서양계 호박, 페포계 호박 등 3가지로 나뉜다. 동양계 호박은 애호박과 늙은 호박이, 서양계 호박으로는 단호박과 밤호박이, 페포계 호박으로는 쥬키니와 관상용 색동 호박이 잘 알려져 있다. 늙은 호박은 가을이 제철이며 익으면 황색으로 변하는데 잘 익을수록 당도가 높다. 호박은 임진왜란 이후 남쪽으로 들어왔다 해서 남과(南瓜)라 불렸다. 호박은 1613년에 출간된 『동의보감』에는 실려 있지 않으며 1884년에 발행된 ‘동의보감’ 의 축소판인 ‘방약합편’에는 ‘남과‘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울릉도에서는 울릉도 개척 당시 주민들이 호박 종자를 가지고 와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곡식이 부족했던 울릉도 개척 초기 구황작물로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80년대 중반부터 관광객에 판매 울릉농협, 1991년 생산공장 지어 지역 특산물로 본격 상품화 나서 △ 호박엿과 관련된 전설도 남아 있어 울릉도 호박엿 제조법도 전해진다. 주재료는 옥수수 전분과 엿기름, 늙은 호박이다. 먼저 말린 옥수수를 물에 불린다. 불린 옥수수를 멧돌에 넣고 갈아낸다. 갈아낸 옥수수는 다시 물에 불렸다 갈기를 반복한다. 옥수수의 하얀 전분이 나오면 물에 넣고 약한 불에 끓이다가 엿기름을 넣고 섞어 준다. 약한 불에서 서서히 엿기름이 전분을 잘 삭히도록 저어준다. 적당히 우러나면 무명 보자기에 넣어서 전분과 엿기름의 찌꺼기를 걸러낸다. 곱게 걸러낸 물을 다시 솥에 넣고 약한 불에 졸인다. 여기에 껍질 벗긴 늙은 호박을 잘게 잘라서 넣고 저어주며 졸아들도록 푹 고아낸다. 엿이 굳어지면 길게 늘였다가 접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엿 속에 많은 공기구멍이 생긴다. 엿에 공기구멍이 많을수록 이에 달라붙지 않고 먹기 좋다. 울릉도에서는 옥수수 가루 전분이 아니라 옥수수를 쪄서 자루에 담아 즙을 짜낸 뒤 엿기름과 호박을 넣고 엿을 만들기도 한다. 또 호박 조청에 옥수수 물엿을 배합해 호박엿을 만들기도 한다. 울릉도 호박엿이 생기게 된 전설도 있다. 울릉도 개척 무렵 태하마을 석달령 근처에는 열댓 가구가 살았다. 그중 한 집에 과년한 처녀가 있었는데 이른 봄 육지에서 가져온 호박씨를 심었다. 여름이 되자 호박은 열매를 맺었는데 호박이 익기도 전에 처녀는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가고 말았다. 부모는 호박을 따먹었는데도 호박은 자꾸 열렸다. 가을이 되자 누렇게 익은 호박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겨울이 되자 부모는 그 호박으로 죽을 쑤었는데 엿과 같이 달았다. 호박죽이 아니라 그대로 엿이었다. 그 후부터 울릉도 사람들은 호박으로 엿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울릉도 호박엿에 대한 또 다른 유래도 있다. 1882년 개척 당시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과년한 처녀가 육지로 시집갈 날을 받아놓고 호박범벅을 끊이고 있었다. 자신이 시집을 가버리면 혼자 살아갈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다가 졸다가 호박범벅이 너무 많이 끓어서 졸아들어 버렸다. 호박이 졸아서 굳어진 것을 지나가던 이웃이 맛보고 ‘이거 호박엿이네’ 했던 것이 울릉도 호박엿이 생기게 된 기원이라고도 전해진다. 식량으로 호박을 먹다가 간식으로 엿을 만들어 먹게 된 내력이 전설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육지에 이주해 온 이들은 이미 엿을 만들어 먹을 줄 알고 있었는데 울릉도에 흔하게 나는 호박을 이용해 달달한 간식으로 호박엿을 만들었던 것이 오늘에는 울릉도를 대표하는 음식이 됐다. 울릉도 호박엿은 주민들이 집에서 직접 만들어 이웃끼리 나누어 먹다가 1980년대 중반 경부터 관광객들에게 팔기 시작하면서 울릉도 특산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울릉도 호박엿은 보통 호박 30%, 옥수수 물엿 70%를 배합해 엿을 만들고 있다. 울릉 농협이 호박엿을 지역특산물로 상품화 한 것은 1990년도 정부에 의해 전통식품개발사업자로 선정된 후 한국식품연구원의 자문을 받아 1991년 11월 울릉읍 도동리406-1일대에 생산 공장을 건립하면서 부터다. 울릉농협의 호박엿은 1992년부터 판매가 시작됐다. 울릉도의 늙은 호박 음식은 호박엿 외에도 장아찌, 범벅, 죽, 즙, 엿, 젤리, 빵, 조청, 막걸리, 케익, 쇼콜라 등의 가공제품으로 다양화 되고 있다. 장아찌·죽·즙·젤리·빵·케이크 등 각양각색 호박 가공제품 쏟아져 민간선 조청·전·동동주로도 개발 △ 호박엿 울릉도 주민들이 즐겨먹던 간식거리 늙은 호박으로는 조청도 만든다. 천연의꿀은 청(淸)이라 하니 조청은 인공 꿀이라는 뜻이다. 곡물의 전분은 찌거나 삶으면 익어서 호화(糊化: 전분에 물을 더하고 열을 가하면 팽윤하고 점성이 증가해 전체가 반투명한 풀 상태가 되는 현상. 즉 소화하기 쉬운 상태로 변한다.) 되는데, 여기에 엿기름 물을 섞고 따뜻하게 중탕을 하거나 묻어두면 밥알이 삭아서 당화되어 풀어지게 된다. 이것을 자루에 담아 단물을 짜낸다. 자루에 남은 것은 엿밥이라 하고 단물은 엿물이라 한다. 솥에 엿물을 붓고 진하게 조려낸 것이 조청이다. 호박 조청은 곡물가루 대신 늙은 호박을 이용해 만든다. 늙은 호박의 껍질을 벗기고 속을 긁어낸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푹 삶는다. 여기에 엿기름을 넣고 5시간 정도 달이면 반고체 상태가 된다. 이것을 식히면 호박 조청이 된다. 외래 작물인 호박이 이 땅에 유입된 시기는 부정확하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와 함께 들어 왔다는 설도 있고 남아시아에서 당나라를 거쳐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곡식이 귀한 울릉도에서 호박은 소중한 식량이었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호박은 최고의 구황식품이자 효자식품이었다. 그래서 호박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들이 만들어졌다. 늙은 호박을 갈아서 부친 전인 호박전은 울릉도 주민들이 즐겨 먹던 간식거리였다. 울릉도식 호박전은 늙은 호박의 껍질을 벗기고 속을 긁어낸 뒤 강판에 곱게 간다. 여기에 찹쌀가루와 튀김가루를 혼합하여 걸쭉하게 만든다. 실파와 홍고추는 채 썰어 준비해 둔다. 달궈진 후라이팬에 반죽을 한 국자씩 올린 뒤 실파와 홍고추를 얹어 부쳐낸다. 쌀이 귀한 울릉도에서 호박은 옥수수와 함께 술을 빚는데 흔한 재료였다. 지금도 관광객들이 울릉도에서 쉽게 맛볼 수 있는 토속 술이 호박 동동주다. 울릉도 사람들도 일을 하거나 잔치 때 즐겨 마시던 술이다. 호박 20kg을 기준으로 호박 동동주를 만드는 법은 이렇다. 호박20kg, 쌀1되, 누룩1되, 엿기름 1되를 준비한다. 쌀로 고두밥을 찌고 물 2되와 누룩 가루 1되를 섞어서 밑술을 만든다. 따뜻한 방에 3일 정도 발효시킨다. 호박은 쪼개서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내 죽을 끊인 후 식힌 뒤 엿기름을 넣고 거름망에 짠다. 호박 짠물을 끓여 엿물을 만든다. 발효시킨 밑술에 끊인 호박엿물을 섞고 여기에 끓여서 식힌 물 10리터를 붓는다. 따뜻한 곳에 2일 정도 놔둔다. 발효가 활발히 일어나고 쌀알이 동동 뜨면 술을 걸러낸다. 이 방법을 따라 하면 누구나 집에서도 울릉도 호박 동동주를 빚어 먹을 수 있다. 흔한 호박 하나가 그토록 다양한 음식들을 선물했다. 호박은 흔한 것이 귀한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만들어준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5-12-10

문화예술계 후원자이자 럭비 선수로 맹활약한 김대정

“이육사 선생 삼륜포도원으로 직접 안내” ‘청포도’ 시상 포항 구상 결정적 증거 제시 한흑구가 회장을 맡은 ‘흐름회’ 포함해 지역 문화단체 후원자로도 지대한 역할 코주부사 한편에 오래된 작업대가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업대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쓰던 것이다. 독특한 모양에 고졸미(古拙美)가 느껴지는 것이어서 눈독을 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코주부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단면이다. 코주부사를 시작한 김대정은 어떤 사람일까. 박영준 대표에 따르면 김대정은 1915년쯤 포항에서 태어났다. 어느 학교를 다녔고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코주부사를 개업하기 전에 지금의 두꺼비약국 옆에서 ‘보리밭’이라는 다방을 운영했고, 자택은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후문 쪽에 있었다고 한다. 포항에서 발간된 어떤 문헌에도 그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한 점포의 주인에만 머무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포항의 문화예술과 체육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많이 도왔다. 다만 그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해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육사가 포항 동해면에 있던 포도농장에서 「청포도」의 시상(詩想)을 얻었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다. 그러면 육사는 「청포도」의 시상을 어디에서 떠올렸을까. 이에 대한 해답이 나온 것은 지난 1970년대 초였다. 당시 포항지역 문화단체 후원자이면서 이육사 생존 시 친교했던 심당 김대정(80년대 초 작고) 선생이 어느 날 지역의 몇몇 문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결핵 요양차 포항의 송도원에 머물던 이육사 선생이 찾아와 직접 동해면 도구리의 삼륜포도원으로 안내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육사는 이후 나에게 삼륜포도원에서 청포도의 시상을 얻었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시 초안을 잡은 것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중략) 김대정 선생이 아꼈던 후배이자 한국문인협회 포항시 지부 창립회원으로 그 자리에 동석했던 박이득(63·전 언론인) 씨의 증언이다. 수필 「보리」의 작가로 육사와 교류했던 한흑구(1979년 작고) 선생도 1973년 『시문학』지에 이육사의 청포도에 관한 문학적 배경이 영일만이라고 설명하는 짧은 수필을 발표했었다. - 「영일만의 이육사」, 『서울신문』, 2004년 10월 7일. “김대정은 푼돈 모아 목돈 쓴 사람” 회상 포항 로터리클럽 회장 맡으며 기부·후원 형편 어려운 학생들 위해 학비 보태기도 이육사가 다른 지역에서 「청포도」의 시상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포항에서 구상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김대정이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포항지역 문화단체 후원자’였다. 이 문화단체는 한흑구가 회장을 맡은 ‘흐름회’를 말한다. 1968년 12월에 창립된 흐름회는 문학의 밤, 백일장, 전시 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 문화예술이 성장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흐름회 회원은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한흑구(수필가), 박영달(사진작가), 김대정, 최정석(효성여대 교수), 김녹촌(아동문학가), 신상률(사업가), 김상훈(부산일보 논설위원), 최성소(조선일보 기자), 손춘익(아동문학가)이 그들이다. 김대정이 흐름회를 포함해 문화예술계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신문 기사가 있다. 포항의 흐름회를 말할 때 심당 김대정 씨를 잊을 수가 없다. 10년 동안 이 모임을 뒷받침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애호가’로 알려진 김씨는 흐름회를 뒷받침하는 이외에도 체육, 음악, 등산 등 이 지방 문화행사를 도와주고 있다. (중략) 흐름회가 10년 동안 문화사업을 해온 배경을 회원들은 “심당이 있었기 때문”으로 말하고 있을 정도다. - 「同樂의 길-흐름會」, 제호(題號) 미상, 1977년 1월 23일. 수준급 실력으로 ‘경북럭비협회 부회장’ 동생 김대호·이호진 함께한 포항MIG팀 전국대회서 여러 차례 우승컵 휩쓸기도 동생과 함께 포항 대표 럭비 선수로 활약해 흐름회 회원명부에 김대정의 직업은 ‘산악인’으로 적혀 있다. 그가 산을 어느 정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가 운영하던 코주부사가 포항에서 처음으로 등산복과 등산용품을 취급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가 동생과 함께 전국 무대에서 맹활약한 럭비 선수였고 경북럭비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6·25사변 무렵의 포항에는 유도와 축구, 럭비, 복싱 등 격렬한 운동이 바다 사나이들의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포항 럭비는 전국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었고, 김대정, 김대호 형제와 이호진 등이 가세한 당시 포항 MIG팀은 전국대회서 여러 차례 우승컵을 안았다. - 『포항시사』,2010년, 208쪽. 김대정의 동생 김대호는 울릉군수(1988. 6. 10.〜1989. 6. 14.)와 예천군수(1989. 6. 15.〜1991. 1. 14.)를 역임한 공직자였다. 박영준 대표는 김대호를 인물이 훤하고 체격이 좋았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박영준 대표 부부는 김대정을 ‘푼돈 모아 목돈 쓴 사람’이라고 떠올렸다. 코주부사에서 번 돈을 문화예술과 체육계에 후원한 것은 물론 포항 로터리클럽 회장을 맡으며 기부도 꽤 했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썼으니 정작 자신의 형편은 어땠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흑구와 김대정의 인연 한흑구는 김대정의 6년쯤 선배인데 두 사람의 성품은 여러 면에서 겹친다. 한흑구도 보성전문학교에 다닐 때 축구 선수로 뛸 만큼 운동을 잘했다. 미국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덩치 좋은 흑인 청년과 시비가 붙었을 때 ‘평양 박치기’로 가볍게 제압했다는 무용담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 에피소드는 일제강점기 때 소설가 이석훈이 쓴 글에도 나온다. 흑구는 (…) 미국에 평양식 헤딩(머리로 밧는 것)의 위력을 소개한 최초(?)의 人이다. - 이석훈, 「문학풍토기-평양 편」, 『인문평론』 1940년 8월, 78쪽. 한흑구는 서울과 부산 피난 시절 문우들의 술값과 밥값은 물론 용돈까지 챙겨주었다. 오천 미군 부대에 근무할 때는 전쟁 때 초토가 된 포항에 숱한 선행을 베풀었다. 한흑구와 김대정의 행적을 볼 때 두 사람이 흐름회를 매개로 의기투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인연이라 할 수 있다. 한흑구의 서울 시절 가장 가까웠던 주붕(酒朋)이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였는데 포항에 정착한 후의 주붕은 김대정이었다. 김대정은 1978년에 코주부사를 양자처럼 여긴 박영준에게 물려주었고, 이듬해 11월 한흑구가 별세했다. 그 후로 흐름회 활동은 눈에 띄는 게 없고, 김대정이 어떻게 지냈는지도 알 수 없다. 김대정이 언제 작고했는지는 신문 기사와 증언이 엇갈린다. 앞서 언급한 『서울신문』에는 1980년대 초라고 나와 있는데 박영준 대표는 김대호가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990년대 초라고 말했다. 정황상 1990년대 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이 돕고 베풀었는데 나이 들고 병들자 찾아오는 사람이 없더군요. 포항의료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김대정의 황혼을 얘기하던 박영준 대표 부부의 표정에 잠시 그늘이 졌다. 포항 한복판에서 수많은 학생의 명찰을 새기던 코주부사. 지금은 문이 잠긴 그 노포에 아름답고도 쓸쓸한 이야기가 있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2-10

솔고개 소나무는 하늘과 땅 잇는 생명의 분수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강원도 영월 솔고개 소나무를 답사하겠다는 오랜 바람이 그렇다. 늘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대구에서 거리가 멀고 쉽게 시간을 내기 어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국산림문학회 김선길 이사장이 영월 하이힐링원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한다며 동행을 권했다. 그 순간 솔고개 소나무가 불현듯 마음속에 고개를 들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승낙했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대구에서 출발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의성에서 장효식 이사(한국산림문학회)의 차량으로 갈아탄 뒤 영주 죽령터널을 지나 영월로 내달렸다. 영월 시내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산림문학회 이사들과 점심을 함께한 뒤, 굽이진 계곡 길을 따라 하이힐링원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산준령을 지키고 선 영월의 소나무들은 어느 때보다 깊고 푸른빛을 품고 있었다. 자연스레 화제는 솔고개 소나무로 모였다. 그러는 사이 고갯길을 굽이굽이 오르던 차창 너머로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고갯마루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솔고개 소나무임을 직감했다. 모두가 아름다운 모습에 탄성을 내지르며 차를 멈추었다. 안내판에는 ‘수령 660년, 수고 12m, 가슴둘레 2.8m, 1982년 11월 13일 보호수 지정’이라 적혀 있었다. 단종이 승하한 뒤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고, 그 혼령이 태백산으로 향하던 중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갔는데 노송들이 머리를 조아려 배웅했다는 전설 또한 적혀 있었다. 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나는 소나무가 있는 고갯마루로 올랐다.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명품송(名品松)’ 중 하나이고, 독특한 수형과 용트림하듯 뒤틀린 형상은 1980년대 ‘솔담배’ 표지 문양이 되었고, 오늘날 모 제약 회사의 상표 모티브가 된 나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영월군 산솔면 녹전리 81-1번지에 있는 이 나무를 최근에는 산림청이 주관하는 ‘2025년 올해의 나무’ 보호수 부문에 선정되어 그 유명세를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보고 실제로 처음 마주한 솔고개 소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생명의 분수처럼 보였다. 사방으로 고르게 뻗은 수관은 바람을 품어 안는 듯 크고 부드럽고, 비스듬히 구부러졌다가 굳세게 치켜 오른 가지들은 오랜 생명의 기운을 하늘로 밀어 올리듯 곧게 솟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면 거친 거북이 등껍질 무늬가 울퉁불퉁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비틀린 몸통에서는 세월을 뚫고 올라온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단순한 조형미가 아니라, 오래 버텨 낸 존재가 품은 생명의 자세였다. 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 온 소나무는 외형만으로도 장관이다. 특히 준령의 산자락 끝에 솟아오른 언덕이랄까, 고갯마루 펑퍼짐한 곳에 홀로 춤추듯 한 형상에 마음마저 숙연해진다. 수백 년 풍설이 새긴 껍질은 두껍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가지들은 굽이굽이 산맥처럼 장대한 곡선을 그린다. 준령의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대지를 붙든 뿌리는 거대한 몸을 지탱하며, 고개를 지나는 이들의 발걸음 위로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나무 앞에서는 시간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은 자연과 역사가 겹쳐지는 순간 속에 머무르게 된다. 서로 주고받는 날숨과 들숨이 오고 가는 동안 어느 사이 나무와 하나가 된다. 나무를 진정 빛나게 하는 것은 외양보다 훨씬 깊은 품성이다. 단종의 혼령이 머물렀다는 전설처럼, 소나무는 슬픔을 품되 슬픔에 잠기지 않고, 상처를 지녔으되 그 상처를 다시 생명으로 밀어 올리는 관용을 보여준다. 지나간 역사와 인간의 비극마저 넉넉히 감싸안으며, 비바람에 깎인 가지마다 새살을 틔우는 생명의 인내를 증명해 왔다. 그래서 나무는 한 그루의 거목을 넘어 자연이 오래 품어온 위로의 산신령이자, 고개를 지나는 이들에게 단단한 마음의 자세를 일깨우는 시간의 스승이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 단종의 혼령을 솔고개 소나무 가지 위에 올려두었던 조상의 지혜가 지금도 그 푸른 솔가지 너머로 빛난다. 내일 다시 이곳을 지날 때 한 번 더 인사하러 오리라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하이힐링원으로 향했다. 한국산림문학회(김선길 이사장)와 하이힐링원(조병철 원장)은 이날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조병철 원장은 하이힐링원은 영월의 깊은 숲속에서 행위 중독으로 지친 이들이 자연의 느린 호흡 속에서 멈추고 회복을 배우는 치유 공간이라면서 숲길 산책과 도마 우드버닝 체험을 한번 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다음 날 조병철 원장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새벽 힐링원 숲길을 산책하고 아침 식사 후 도마우드버닝 체험을 했다. 그 시간만큼은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이었다. 귀가하는 길에 또다시 힐링원에서 5km 정도 떨어진 솔고개 소나무 앞에 섰다. 힐링원 치유 프로그램에 이 소나무와 마주하기를 넣으면 어떨까 싶다. 보탠다고 해서 경비가 더 드는 것도 아니고 힘든 일도 아니다. 솔고개 소나무 앞에 서면 누구나 한순간 고요해진다. 단종의 넋을 품었다는 전설 때문만이 아니라, 수백 년 세월을 온몸에 새긴 나무의 침묵이 깊은 울림을 준다. 깊게 갈라진 옹이는 상처를 품은 이들에게 “너도 견뎌낼 수 있다”라는 무언의 위로가 되고, 바람에 흔들리는 솔잎 소리는 살아 있는 숨결처럼 가슴을 두드리고 그 떨림은 마음으로 전달되어 설렘으로 긴장의 짜릿한 맛은 용기로 이어진다. 힐링원 프로그램의 마지막 종착점이랄까 정점은 솔고개 소나무와의 마주하기, 즉 만남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의 그늘에서 자신을 옥죄던 불안과 중독의 굴레를 조금씩 내려놓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마치 솔고개 소나무가 조용히 손을 내밀어 “다시 시작해도 된다”라고 일으켜 세워 주는 듯하다. 장엄한 소나무의 기상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 또한 다시금 되살아난다. 나무는 우리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하이힐링원은… 강원랜드 산림 힐링 재단, 행위 중독 예방 치유 프로그램 및 웰니스 프로그램 운영 사업을 통해 국민의 건강 증진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한다. 하이힐링원은 강원랜드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설립된 사회공헌재단으로 아동, 청소년 및 사회적 배려 대상자에게 프로그램을 무상 제공하며 행위 중독 예방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해먹 테라피는 소나무 숲까지 가볍게 트레킹하고 해먹에 누워 바디 스캔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이완한다. 피톤치드, 음이온 등의 산림 치유 인자가 몸의 감각을 깨우고 스트레스를 완화하며 자기돌봄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나무 도마우드버닝은 원목 도마에 인두로 원하는 그림, 또는 감명 깊은 글귀를 새기며 자신만의 풀레이팅 도마를 만들어 본다. 테라피 효능을 가진 나무 타는 향기로 마음의 안정과 몰입을 통해 명상의 효과와 성취감을 경험할 수 있다. 아로마테라피 식물에서 추출하는 천연 아로마 향으로 심신의 균형을 회복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블렌딩 오일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천연 아로마 오일은 인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면역력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2025-12-10

[기획] 포항 외국인 8615명 시대, 제도는 무엇을 놓치고 있나

◇ 변화한 도시, 뒤따라가는 제도 올해 10월 기준 포항의 외국인 인구는 8615명이다. 산업·교육·가족 등 체류 목적이 다양해지면서 외국인은 도시 곳곳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으며 전체 인구 감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산업 현장에서의 인력 공백을 메우는 역할까지 맡고 있어 그 존재는 단순한 비율을 넘어 도시 운영을 지탱하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특히 수산물 가공업, 제조 하청업체, 항만·물류, 농축산업, 건설 보조 등 현장은 외국인 노동력 없이는 공정 가동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반복된다. 도시가 이미 다문화적 구조로 재편되고 있음에도 행정과 정책은 아직 기존의 분류 체계와 지원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 거주외국인 조례는 포괄적이지만 현실을 모두 담지 못한다 ‘포항시 거주외국인 지원 조례’는 90일 이상 포항에 거주하며 생계활동을 하는 외국인을 지원 대상으로 규정하고 공공시설 이용 보장, 한국어 교육, 기초생활 적응, 고충·법률 상담, 응급구호 등 기본적인 정착 지원을 시장의 책무로 명시한다. 제도적 선언이라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조례는 제조업 생산직, 항만·물류 근로자, 계절근로자, 연구 인력, 유학생, 결혼이민자 등 체류 목적과 생활 조건이 서로 다른 다양한 외국인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지원한다. 현실에서 각 집단이 겪는 문제와 필요는 크게 다른데 조례 안에서는 이를 구분하는 세부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사업 집행이 대부분 위탁기관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조례가 규정하는 기본 지원이 산업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근로계약 분쟁, 임금 체불, 산재, 숙소 안전 문제 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포항에서 외국인의 역할이 단순 생활 적응을 넘어 산업·고용·인구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으로 확대된 상황에서는 조례의 포괄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언은 있었지만 실행의 정교함은 여전히 부족한 셈이다. ◇ 다문화가족 지원 정책은 촘촘하지만 ‘대상 편중’의 벽 2023년 개정된 ‘포항시 다문화가족 지원 조례’는 결혼이민자와 귀화자를 중심으로 한 정교한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방문교육, 자녀 언어발달·취학준비·성장지원, 관계향상 프로그램, 인권감수성 교육, 통·번역 서비스, 다문화엄마학교, 자조모임(6개국 227명), 이중언어 환경 조성, 학위취득비 지원, 취·창업 교육 등 20여 개가 넘는 사업이 운영되며 지역사회 인식 개선 사업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예산 규모도 작지 않다. 다문화가족정책 예산 10억 128만 원 중 실제 사업비가 8억 4183만 원에 달하고 건강가정·다문화센터 통합서비스 예산 13억 7103만 원까지 더하면 연간 약 24억 원이 투입된다. 지방 도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재원이며 사업의 내용과 범위도 촘촘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체계가 결혼이민자와 귀화자라는 비교적 좁은 범위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법무부의 2025년 6월 통계에 따르면 포항의 거주 외국인 7575명 중 외국인근로자는 5303명으로 전체의 약 70%에 이른다. 즉, 포항 외국인의 다수는 노동 목적 체류자이며 이들은 언어·노동환경·주거·의료 등 복합적인 문제를 동시에 겪는다. 하지만 이들을 포괄하는 지원체계는 상담센터 외에는 사실상 부재하다. 외국인 지원 체계가 결혼이민자 중심으로 설계된 구조에서 노동 목적 체류자 다수가 제도 밖에 놓이면서 정책의 설계와 실제 현장의 필요 사이에는 뚜렷한 간극이 발생한다. ◇ 김지원씨의 인터뷰가 드러낸 ‘정책과 현실의 거리’ 베트남 출신 귀화자 김지원씨(34)의 경험은 제도의 공백을 가장 일상적인 차원에서 보여준다. 2016년 결혼을 계기로 포항에 정착한 그는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적응했고 올해 9월부터 출산도우미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루 2~3시간씩 주 4일 근무해 받는 월급은 80만 원. 그는 “아이 키우고 생활하기에는 부족하다. 30만 원만 더 있으면 숨통이 트일 것 같다”고 말했다. 센터를 통해 언어교육과 일자리 연계를 받았지만 “센터 말고 시에서 직접 지원받는 건 거의 없다”고 했다. 시내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경험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한국어가 제일 중요하다. 소통이 안 되면 오해가 생긴다”고 강조했지만 동시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와 시간이 제한적이라고 했다. 결혼이민자조차 이러한 경험을 한다는 것은 노동 목적 체류자가 겪는 어려움은 더 광범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상담센터는 현장의 최전선이지만, 제도적 연결은 약하다 포항에는 외국인근로자 상담센터가 남구·북구·여성센터 등 3곳 운영되고 있다. 이들 센터는 노동·산재 상담, 통역, 생활 문제 조정 등 외국인이 당장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전선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운영 체계는 구역과 성별에 따라 분리돼 있으며, 다문화센터와 연계해 문제를 함께 처리할 수 있는 통합 매뉴얼도 부족하다. 노동·주거·가족·교육 문제는 실제 삶에서는 한 사람에게 동시에 얽혀 나타나지만 행정은 이를 분야별로 나눠 관리하고 있어 복합적 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이러한 구조적 단절은 결국 지원의 공백으로 이어지고 정책의 실효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 계절근로자 조례는 세밀하지만 ‘정착’이라는 개념이 없다 ‘포항시 외국인 계절근로자 지원 조례’는 통역료, 외국인등록비, 마약검사비, 숙소 점검, 교육비 등 필요한 지원 항목을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단기 노동력을 확보하고 근로 기간 중 최소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데에는 충실한 조례다. 그러나 구조는 어디까지나 ‘입국-근로-관리-귀국’이라는 단기 순환을 전제로 한다. 지역사회 편입이나 장기 정착을 고려한 조항은 존재하지 않으며 근로 기간이 끝나면 관계 또한 종료되는 방식이다. 농어촌의 노동력 의존도가 매년 높아지고 있음에도 정책이 다루는 범위는 여전히 ‘단기 관리’에 머물러 있어 지역이 실제로 겪는 구조적 인력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 정책도 다문화로 전환해야 한다 포항의 외국인은 특정 분야에 국한된 ‘지원 대상자’가 아니라 도시 운영을 함께 떠받치는 핵심 구성원이다. 외국인이 빠지면 생산라인이 느려지고 물류가 지체되며 농어업 현장은 즉각 인력난에 직면한다. 변화한 도시 구조에 맞춰 체류 목적별 통합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상담센터-다문화센터-행정의 연계를 강화하며 의료·주거·언어 등 생활 기반 서비스 접근성을 확대해야 한다. 제도와 행정이 이 변화를 따라갈 때 포항은 외국인과 시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도시로 나아갈 수 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5-12-10

극심한 빈곤 속에서 꽃핀 울릉도 음식문화

쌀·보리 귀했던 궁핍한 옛 시절엔 나물·해초 넣은 ‘옥수수죽’이 주식 옥수수로 만든 떡·범벅조차 귀해 △ 옥수수에 감자 넣어 죽으로 끓여 먹어 “문턱에 다다르니 주렁주렁 엮어서 달아놓은 미역취가 눈에 띈다. 부지갱이나물을 말려 항아리에 담아 놓은 것도 여기저기 있다. 부잣집에서 볏섬을 쌓아 놓듯 어느 집이나 두 가지 나물 준비가 돼 있다. 장씨가 점심으로 죽 그릇을 가지고 나와 기자의 눈앞에 내민다. 나물 건더기만 빽빽한 푸른 죽이다. 이 죽을 숟가락으로 뜨면 한 술에 곡식 알맹이라곤 강냉이 두세 조각이 얹어진다. 감자 조각 삐져 넣은 것은 세 술 만에 한 조각 담길까 말까….“ 1934년 12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옛날 울릉도의 궁핍이 눈앞에 선해지게 만드는 기사다.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이 부족하던 울릉도에서는 옥수수나 감자가 주식이었다. 그러나 감자나 옥수수도 넉넉지 않아 죽으로 끓여 먹었지만, 그마저도 감자나 옥수수보다 푸성귀가 더 많이 들어갔으니 그 시절 울릉도 주민들이 겪었을 가난을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저려온다. 옥수수를 맷돌에 쌀알 절반 크기로 갈아 감자와 함께 넣고 물을 부어 끓여낸 것이 옥수수죽이다. 옥수수는 주로 감자와 함께 죽을 끓여 먹었는데 그래야 포만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옥수수나 감자도 부족해 부지갱이나 대황 같은 나물, 해초 등을 넣고 죽을 끓여 먹기가 다반사였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칡을 캐다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칡뿌리는 방망이로 한껏 두들겨서 물에 풀면 앙금이 가라앉고 녹말이 만들어진다. 그 녹말로 떡을 하면 까만색이 나고 쫄깃쫄깃하다. 다른 재료를 섞지 않고 오로지 칡 녹말만으로 떡을 하면 감자떡보다 더 맛있다. 칡 녹말로는 밀가루를 섞어서 수제비를 끓여 먹기도 했다. 하지만 칡 녹말을 만드는 일은 품이 아주 많이 든다. 칡을 캐다가 껍질을 씻고 찢고, 빻아서 물에 며칠을 우려야 한다. 7~8번을 우려야 하얀 녹말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여유가 있는 집은 옥수수떡도 만들어 먹었다. 옥수수는 맷돌로 갈아서 만들었는데 쌀이 귀한 울릉도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떡이었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마른 옥수수를 물에 불린 뒤 갈아서 가루로 만든다. 팥은 삶아서 건진다. 찹쌀은 물에 불려 가루로 만든다. 옥수숫가루, 찹쌀가루, 삶은 팥을 버무리고 소금 간을 한 뒤 찜 솥에 쪄낸다. 다른 말로는 강냉이떡이라고도 한다. 옥수수는 식혜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울릉도 옥수수 식혜 조리법은 어렵지 않다. 옥수수 알은 잘게 갈아서 4-5시간 정도 불린 후 찜통에 찐다. 엿기름은 따뜻한 물에 주물러서 불린 후 채에 곱게 걸러 가라앉힌다. 찐 옥수수는 뜨거울 때 펴서 엿기름물을 붓고 따뜻한 곳에 놓아둔다. 4~5시간 후 옥수수 알갱이가 몇 알 떠오르면 찬물을 더 붓고 중불로 한번 끊인 후 식혀서 먹는다. 단맛을 더하려면 설탕을 약간 첨가하기도 한다. 이제는 섬 상징 같은 ‘호박엿’ 대신 ‘옥수수엿’ 고아 팔던 산막도 여럿 △ 울릉도의 귀한 음식 취급했던 범벅 울릉도에서는 범벅도 귀한 음식이었다. 범벅은 쌀이나, 밀, 메밀 등의 곡식 가루에 감자, 옥수수, 팥, 고구마, 호박, 콩 등을 섞어서 풀처럼 되직하게 쑤거나 푹 삶아서 만든 음식이다. 울릉도는 옥수수나 감자로 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울릉도 옥수수 범벅은 마른 옥수수를 절구에 넣고 물을 뿌려 껍질이 벗겨서 만든다. 껍질이 벗겨진 옥수수를 솥에 넣고 물을 넉넉히 부어 옥수수가 툭툭 터질 때까지 삶는다. 여기에 팥을 넣고 계속 끓이면 옥수수에서 나온 전분에서 끈끈한 점성이 생겨나 옥수수와 팥이 고루 잘 섞인다.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춘다. 울릉도의 상징 같은 호박엿이 있었지만, 주민들은 옥수수엿도 만들어 먹었다. 인류가 엿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은 무려 2천여 년 가까이 된다. 후한 말 유희(劉煕)가 지은 ‘석명(釋名)’에는 ‘묽은 엿은 이(飴), 된 엿은 당(餳), 당보다 딱딱하면서 탁한 엿은 포(餔)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6세기에 저술된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농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싹이 푸른 엿기름은 검은 엿을 만들 때 사용하고, 희게 싹을 틔운 엿기름은 흰 엿을 만드는데 사용한다.’는 기록도 있다. 엿에 대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나온다. ‘행당맥락(杏餳麥酪)’이라고 해 ‘당(餳)‘은 단단한 엿이고 ‘락(酪)‘은 감주의 일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때부터 엿기름을 만들어 엿이나 감주를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엿 만들기가 민간에서 보편화됐다. 엿은 쌀, 조, 수수, 옥수수, 고구마 등의 곡물에 엿기름을 넣어 삭혀서 만든 음식이다. 곡물에 들어있는 전분이 엿기름의 효소 성분에 의하여 삭으면서 당분으로 변하는데, 전분의 당화(糖化)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다. 밥을 지어 한 김을 식히고, 그 위에 엿기름을 섞은 다음 8~10시간 정도 따뜻한 아랫목에 덮어두면 엿물이 된다. 엿물은 베자루에 퍼 담아 찌꺼기는 거르고 물만 받는다. 이 정제된 엿물을 가마솥에서 고면 엿이 된다. 물엿이다. 물엿을 밀이나 콩을 볶아 만든 가루를 깔고 펼쳐놓은 엿판에 부으면 굳어져 엿이 된다. 옛날에는 울릉도의 산막에서 옥수수엿을 만들어 파는 집도 여러 곳 있었다. 쉽지 않지만 지금도 레시피대로만 따라 하면 옥수수엿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먼저 말린 보리를 3~4일 정도 물을 뿌려주면 하얀 뿌리와 촉이 나온다. 이것을 3일 정도 말리면 엿기름이 된다. 이 엿기름에 물을 넣어가며 맷돌에 간다. 빻아둔 옥수수 가루와 엿기름 가루를 함께 넣고 한 시간 정도 끓인다. 솥이 팔팔 끓으면 두 시간 남짓 식힌 다음 엿기름을 더 넣는다. 4시간 정도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불을 때서 팔팔 끓인다. 이것을 자루에 담아 엿 틀에 짜서 물을 받아낸다. 이 엿물을 솥에 붓고 4분의 1가량 남을 때까지 졸이면 물엿이 완성된다. 이 물엿을 엿판에 담으면 옥수수엿이 완성된다. 쌀 3말, 옥수수 2말, 엿기름 1말이면 30kg 정도의 엿이 나온다. 엿물에 누룩 넣어 발효시킨 탁주 용수 박아 만든 엿 청주까지 즐겨 △ 옥수수로 술 만들어 먹기도 옥수수로는 술도 만들어 먹었다. 엿과 술은 불가분의 관계다. 엿 만들기가 술 제조의 전 단계에 해당된다. 엿물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키면 술이 된다. 옥수수 엿 탁주를 만든 뒤 용수 박아 떠내면 엿청주가 된다. 전통적인 울릉도 엿탁주는 밑술에 덧술을 넣고 두 번 빚은 술이다. 밑술은 멥쌀 1말 기준, 껍질 벗긴 생감자 4kg 정도를 섞어 감자고두밥을 쪄서 차게 식힌 뒤 잘게 부순 누룩 4kg을 섞는다. 여기에 감자고두밥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붓는다. 따뜻한 방안 아랫목에 술독을 놓고 베 보자기로 술독을 살짝 덮어 2~3일 지나면 밑술이 완성된다. 덧술은 옥수수 가루 5말에 물 5말, 엿기름 2되를 섞어 가마솥에서 끓인 뒤 차게 식힌다. 여기에 다시 엿기름 4되, 양조용수 3말을 섞어 넣고 불을 지펴 엿물이 살짝 데워진 상태로 보온을 해 주면서 7~9시간 정도 삭힌다. 엿밥이 충분히 삭으면 기포가 올라올 때까지 한 번 더 팔팔 끓인 뒤 삼베 자루에 담고 눌러 짠다. 찌꺼기는 버리고 엿물은 다시 솥에서 졸여서 차게 식힌다. 식힌 엿물에 발효가 된 밑술을 붓고 고루 섞이도록 저어준다. 술항아리에 담아 따뜻한 방안에 이불로 싸서 덮어둔다. 술을 안친 지 하루 반나절이 지나면 술이 익는다. 이것이 엿탁주다. 여기에 용수를 박아 떠내면 엿청주가 된다. 계절에 따라 술을 빚는 시간이 다르다. 짧게는 4~5일 길게는 10여일이면 완성된다. 남쪽이 아니지만 울릉도에는 동백나무가 많다. 해양성 기후 덕분이다. 그래서 동백 송편도 만들어 먹었다. 추석에 먹는 음식인 동백 송편은 육지에서 만드는 송편과 비슷하지만, 송편에 참기름 대신 동백기름을 바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울릉도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동백 열매에서 기름을 짜 등잔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다. 동백기름은 부스럼을 치료하거나 머릿기름으로도 사용했다. 이 또한 재현해 내면 좋을 울릉도의 소중한 문화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9

내과의사, 원고지 20장 속에 인간과 세상을 담아내다

원고지 20매 안팎의 짧은 글로 세상과 인간을 해석하는 게 가능할까? 이 질문에 관한 대답으로 읽히는 책이 출간돼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곧, 그 밤이 또 온다’(득수)엔 지난 2024년 본지에 연재돼 화제를 모았던 20편의 엽편(葉篇)을 담았다. 엽편소설이 뭔가? 나뭇잎 넓이 정도의 크기에 담아낼 수 있는 소설을 지칭하는 단어다. 우리가 통상 인식하는 짤막한 소설인 단편보다도 더 짧은 분량. 그렇기에 구구절절한 설명과 서술보다는 명료한 상징과 반짝이는 은유의 문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작가로선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터. ‘곧, 그 밤이 또 온다’를 출간한 소설가 김강(53)은 세속적 시각으로 보기엔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그는 경북 포항에서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지역 작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서점(책방 수북)을 운영 중이다. 출판업에도 손을 대 사라져가는 종이책 독자들을 끌어 모으는 역할까지 병행한다. 거기에 더해 꾸준히 소설까지 쓰고 있다. ▲소설가와 의사 겸업...8년간 수십 편의 작품 써내 의사가 문학을 겸업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시인 마종기, 나해철, 서홍관 등이 그렇고, 지난여름 별세한 부산 문단의 원로 소설가 전용문도 신경외과의사를 겸했던 작가다. 종일 환자들을 진료하는 쉽지 않은 일정 속에서도 김강은 소설 쓰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2017년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온 김강은 그간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착하다는 말 내게 하지마’ ‘그래스프 리플렉스’ ‘블라블라블라’ ‘여행시절’ ‘당신의 가장 중심’ ‘소방관을 부탁해’ ‘작은 것들’ ‘쇼팽을 읽다’ 등 적지 않은 수의 책을 펴냈다. 등단 8년을 조금 넘겼지만 이미 단편소설집, 장편소설, 청소년소설, 공동창작집 등을 고루 자신의 출간 이력에 올린 중견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실성과 꾸준함은 우리가 그의 현재가 아닌 미래에 더 주목하는 이유가 돼준다. 지난 10월 말. ‘곧, 그 밤이 또 온다’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때 김강은 “부끄럽지만, 저의 여섯 번째 단행본이 출간됐습니다. 원고지 20~30매 사이의 짧은 소설 스무 편을 엮었습니다. 소소한설(小笑寒說)이라는 시리즈의 첫 번째 책입니다”라는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여기에 아래와 같은 은유 가득한 작가의 말을 더했다. 김강의 소설을 부지런히 따라가며 읽은 독자는 “그의 소설 문장이 시와 닮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다음을 꼼꼼하게 읽어보자. ‘책상 위 책들이 쌓였습니다. 읽은 책, 읽다가 만 책, 사놓고 그냥 둔 책. 책들 사이에 노트북이 있습니다. 노트북 오른쪽 귀퉁이에는 스탠드 등이 있네요. 의자는 등받이가 없는 장의자입니다. 장의자에도 책이 가득입니다. 박스 채 놓아둔 것들, 언젠가 읽으리라, 하루에 한 꼭지 씩 읽으리라 다짐했던 책들입니다. 맞은편에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가 있습니다. 그의 의자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십니다. 문득문득 무언가를 찾는 듯 창밖을 내다보기도 합니다. 가끔은 글을 쓰는 저를 바라보기도 하지요…(이하 생략)’ 김강은 일견 자신의 무덤덤한 일상을 별다른 기교 없이 서술한 것으로 보이는 ‘작가의 말’ 속에 책과 함께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문장’과 동의어인 책과 더불어 울고 웃을 것이라는 단단한 의지와 결심을 담아내고 있다. 편안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무서운 결기다. ‘문득문득 무언가를 찾는 듯’ 거실에서 내다본 창밖엔 또 어떤 소설의 소재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있었을까? 김강은 그걸 찾아냈을까? 찾아냈다면 그것들은 새로운 책으로 만들어져 우리 곁으로 찾아오겠지. 이런 모종의 기대감을 독자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소설가는 행복한 사람이 분명하다. ▲은유와 상징의 문장으로 해석해낸 세상 속 사람살이 이제 ‘곧, 그 밤이 또 온다’로 들어가 보자. 책 속엔 ‘느닷없는 마음’으로 명명된 짤막한 엽편이 등장한다. 거기엔 이런 문장이 담겼다. ‘모래 언덕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붉은 물결 같은 모래무늬 뒤로 짧은 그림자가, 모래 언덕 뒤로는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는 짙고 연한 어둠을 만들었고 그 위로 햇살은 막 떠오르는 해와 같이 밝고 붉게 빛났다. 연은 작은 모래 언덕 기슭에 앉아 큰 모래 언덕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보았다. 해가 언덕 너머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하략)’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란 어찌 보면 일상이다. 그러나, 실연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남긴다. 상처를 받는 대상이 남자건, 여자건. 소설 속 화자는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사막에서 해가 지는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세상사 모든 건 ‘느닷없이’ 다가오고, 다시 ‘느닷없이’ 끝나거나 사라진다는 걸. 인용한 김강의 시적(詩的) 문장은 이걸 설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내친김에 수록작을 한 편 더 살펴보자. 이건 제목부터가 시적이다. 아래는 ‘물을 주다’는 엽편의 일부. ‘물을 다 주고 들어온 K는 샤워를 했다. S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뜨거운 햇살에 금방 땀이 배어나오기는 했지만 바람은 조금 더 시원해진 듯 했다. 늘어져있던 나팔꽃 잎이 조금은 펴졌고, 색을 되찾은 고춧잎 사이 매달린 초록 고추가 반짝였다. 상사화 꽃대는 힘을 찾았는지 내일은 십 센티미터는 더 올라올 듯 보였다…(하략)’ 자신의 집 정원에서 자란 상사화(相思花)를 보면서 미미한 존재의 숨겨진 존귀함을 발견해내는 따스한 시선과 더불어 ‘우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무얼 해야 할까? 그 행위는 반드시 크고 거창한 것이어야 할까’를 에둘러 묻는 김강의 진중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문학적 촉수를 가져다 댄 김강은 은유와 상징의 문장으로 인간과 세계의 해석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작업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게 분명해 보인다. 지난 6년간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본 김강은 무엇보다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그렇지만 남은 삶도 문장과 함께 하겠다”는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니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곧, 그 밤이 또 온다’를 읽은 소설가 이기호가 동료작가인 김강과 그의 책에 전한 격려의 말을 마지막으로 아래 옮긴다. “(김강) 소설의 무대는 자연스럽게 ‘부재’와 끝내 응답받지 못한 목소리 사이를 오간다. 인물들 또한 울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대신, 결핍과 공백을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그것은 겉으로는 절망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실을 정작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없는 것을 억지로 메우지 않고, 부재와 함께 살아내는 일. 김강은 풍자와 유머, 아이러니를 통해 그 애도의 과정을 완수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09

[기획] 환영과 불안 사이, 포항이 마주한 감정의 지도

◇ “고맙지만 낯설다”⋯시민 감정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포항의 외국인 인구는 어느새 8000명을 넘어 도시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산업과 일상을 움직이는 현장에서 외국인은 이미 빠질 수 없는 구성원이 됐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단일한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고마움과 낯섦, 환영과 불편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의 지도가 지금, 이 도시를 통과하고 있다. 포항시 북구의 한 재래시장에서 만난 상인은 외국인 손님이 늘어난 걸 반긴다. “장사가 예전 같지 않은데, 외국인 손님 덕분에 버티는 날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포항처럼 인구 감소가 이어지는 도시에서는 손님이 한 명이라도 더 오는 것이 그에게는 곧 생계다. 하지만 바로 옆 가게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이웃 상인은 “외국인 손님과 말이 잘 안 통하면 가격이나 사용법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럴 때 서로 조금 어색해진다”고 했다. 불편함이라기보다 ‘설명이 자꾸 빗나가는 상황’에서 오는 피로감에 가까웠다. 이 두 감정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포항 시민 다수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산업과 인력난을 생각하면 외국인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정작 일상에서 마주할 때는 여전히 낯설고 조심스러운 감정이 남아 있다. 구조의 변화는 빠른데 사람의 감정은 그만큼 빨리 움직이지 않는 현실. 지금 포항은 그 중간 지점에 서 있다. ◇ 마찰은 큰 사건이 아니라 생활의 작은 틈에서 생긴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에서 20년간 조업을 해온 선장 박씨는 현재 외국인 선원 5명과 함께 매일 바다에 나간다. 그는 “일은 잘한다. 문제는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생활 규칙을 몰라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조업을 마친 뒤 배에서 나온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외국인 선원들이 헷갈려 할 때마다 “이건 분리해야 하고 이건 지정 장소에 버려야 한다”고 다시 알려준다. 사소해 보이지만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이 같은 경험은 박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포항의 수산 가공장·양식장·어선에는 베트남·스리랑카·인도네시아 등 여러 국적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수 일하고 있으며 업무는 익숙해도 지역의 생활 규칙은 여전히 낯선 경우가 많다. 주민들의 일상에서도 비슷한 충돌이 이어진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외국인 근로자의 생활 리듬은 원룸촌 주민들의 수면 패턴과 자연스럽게 겹치고 분리배출 시간·방법 차이, 공동주택 출입 방식, 주차 질서 등이 충분히 안내되지 않으면 오해가 쌓인다. 포항시 남구 한 원룸촌에서 만난 주민은 “의도는 아니라는 걸 알지만 반복되면 피로가 쌓인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 역시 불안을 느낀다. 스리랑카 출신 근로자 E씨는 “규칙을 따르고 싶은데 어디에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현행 정착 지원 체계는 결혼이민자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E-9(비전문취업)·H-2(방문취업) 등 ‘노동 중심 체류자’가 생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식 창구는 거의 없다. 결국 ‘몰라서 생긴 행동’은 주민에게는 불편으로 외국인에게는 불안으로 쌓인다. 문제의 핵심은 문화 차이가 아니라 초기 정보 제공의 부족이다. 이 틈이 좁혀지지 않는 한 비슷한 마찰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 외국인에게도 포항은 쉽지 않은 도시⋯의료·언어·행정이라는 높은 벽 여성가족부의 ‘2023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서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의료 이용과 언어 장벽 등이 지목됐다. 이는 포항에서 만난 외국인 유학생과 근로자들의 체감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증상을 설명하기 어렵고 의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두려우며 통역 지원도 충분치 않다. 의료비 확인 과정 역시 부담이 된다. 결국 많은 외국인이 병원 방문조차 누군가의 동행을 필요로 한다. 언어 장벽은 의료를 넘어 행정·주거·교육 전반에서 반복된다. 각종 서류 신청, 학교 상담, 계약서 검토 등 대부분의 제도적 절차가 한국어를 기준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틀릴까 봐 걱정되는 상태”로 일상을 지내야 하고 이는 도시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긴장감을 만든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계절근로자와 유학생조차 언어·제도·고립이라는 공통된 장애물 앞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 포항은 다문화 도시의 초입에 서 있다 포항은 이미 고령인구가 23.5%를 넘어선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생산가능인구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지만, 제조·수산·물류·농축산업의 여러 현장에서 외국인은 사실상 ‘없으면 공정이 멈추는’ 핵심 노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성과 정서적 거리감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산업은 외국인을 요구하지만, 생활권에서는 여전히 익숙함보다 낯섦이 먼저 작동하는 순간이 많다. 그 결과 외국인은 도시 경제의 필수 요소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이웃’으로 인식되는 이중 구조가 형성된다. 이 같은 상황은 포항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다문화 사회로 넘어가는 도시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전형적 단계다. 문제는 감정의 복잡성 자체가 아니라 그 복잡한 감정을 안전하게 흡수할 제도가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마움과 불편, 환영과 조심스러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 사이의 빈 공간이 제도적으로 메워지지 않으면 오해가 반복되고 거리감이 누적된다. 도시가 필요로 하는 인력 구성의 변화와 시민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맞물리지 않는 지금, 포항은 다문화 도시로 넘어가는 첫 관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 공존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감정을 받쳐줄 구조가 필요하다 포항이 다문화 도시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외국인과 시민 모두가 불안을 덜 느낄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분리배출, 응급 상황 대응, 주거 규칙 등과 같은 기본 생활 정보는 단순 번역을 넘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전달돼야 한다. 또 각 부서와 기관에 흩어져 있는 외국인지원 기능을 연계해 체류 목적이 다르더라도 ‘삶 전체’를 아우르는 지원이 가능해야 한다. 지역사회 경험의 통로도 넓어져야 한다. 단기 노동자에게도 지역의 일원으로 존재감을 느낄 기회가 제공될 때 낯섦은 줄고 관계는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주민 역시 일상의 작은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감정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공존은 선언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포항은 지금 다문화 도시의 초입에 서 있다. 외국인 없이는 산업과 인구 구조가 유지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공존은 숫자로 자동 생성되지 않는다. 환영과 불안, 고마움과 낯섦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복잡한 감정의 지도는 포항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완벽한 이민은 없다. 그러나 서로의 불안을 줄이는 도시는 만들 수 있다. 감정을 이해하는 속도만큼 도시의 미래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선택이 포항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것이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5-12-09

고기맛이 나는 삼나물부터 구황식물 섬말 나리까지

△ 울릉도 대표적인 나물 부지갱이 명이나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울릉도의 대표적인 나물이 부지갱이다. 부지갱이는 섬쑥부쟁이의 울릉도식 이름이다. 부지깽이, 자원,자완,백원,청원,산백국 등 다양한 이름이 있다. 쑥부쟁이는 전국 산야에 자생하지만 섬쑥부쟁이는 일본과 울릉도에서 자라는 다년초다. 비타민A 와 C가 풍부하고 단백질, 지방, 당질, 섬유질, 칼슘, 인 등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나물의 지상부는 산백국이라고 하는데 소염과 천식을 가라앉히는 약재로 사용한다. 몸 전체를 건조시켜 해열제나 이뇨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다. 잎줄기에는 사포닌이 함유되어 있고 뿌리에는 프로사포게닌이 함유되어 있다. 가을에 질겨진 잎줄기는 가축 사료로 이용한다. 어린 잎은 울릉도 나물들 중 가장 부드럽다. 부지갱이는 3월 말부터 5월 사이에 채집한다. 겨울에도 눈 속에서 자란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첫 번째 잎을 뜯는다. 이때 뜯은 잎이 가장 맛있다. 이때 뜯은 잎은 바로 삶아서 냉동 보관한 뒤 1년 내내 생채로 먹는다. 새잎으로는 장아찌를 담가 먹기도 한다. 5월 초에는 두 번째로 잎을 채취한다. 이때 채취한 잎들은 데친 뒤 말려서 묵나물로 먹는다. 울릉도 부지갱이를 육지에서 재배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첫해는 괜찮은데 2년째부터는 쓴맛이 강해서 재배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지갱이는 살짝 데쳐서 집 간장으로 간을 하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무쳐 먹는다. 튀김, 깨무침, 부지갱이 밥, 된장국 등으로 다양하게 요리한다. 정유(에쎈셜 오일)를 함유하고 있어 쑥갓 같은 독특한 향기가 난다. 고기가 부족했던 울릉도에서 고기 대용을 먹은 나물도 있다. 삼나물이다. 눈개승마를 울릉도에서는 삼나물이라 부른다. 눈개승마는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눈산승마라고도 한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데 키가 30∼100cm이다. 뿌리줄기는 나무처럼 단단하고 굵다. 잎의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이다. 산지의 숲 가장자리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다. 삼나물은 식감이 고기 맛이 나는 까닭에 고기 나물이라고도 부른다. 울릉도 사람들은 명절이나 잔치 때면 삼나물 육개장을 만들어 먹었다. 삼나물은 제사상에도 올라간다. 삼나물은 사포닌을 함유하고 있어서 다른 나물들보다 2-3배 높은 값에 거래 된다. △ 고기맛 나는 삼나물도 소울푸드 삼나물은 날것으로는 먹지 않는다. 꼭 익혀 먹어야 한다. 여름철에 주로 초무침을 해서 먹는다. 조리법은 먼저 어린 순을 뜯어 소금을 넣고 끓인 물에 데친다. 데친 삼나물을 찬물에 잠시 우려낸다. 삼나물에 미나리, 깻잎, 오이, 고추 등의 갖은 야채와 깨소금, 참기름, 고추장, 식초를 넣고 무쳐내면 삼나물 초무침이 된다. 우려낸 삼나물을 기름에 볶아서 먹기도 한다. 참고비 나물도 울릉도 사람들의 소울푸드다. 참고비는 양치식물인 꼬리고사리과 섬고사리(울릉고사리)의 울릉도 지역 이름이다. 참고비도 꽃이 피지 않고 포자로 번식한다. 고비와는 다르다. 울릉도에서 고비는 깨치미라 부른다. 깨치미도 나물로 먹는데 참고비 보다 크다. 고비는 잎이 피기 전에 잎을 동그랗게 말고 고개를 숙인 구부정한 생김새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굽이> 곱이>고비로 변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비는 잎이 동그랗게 말려 있고 줄기에 흑색 인편 있는 것이 고사리와 다른 점이다. 울릉도에서 참고비 나물은 명절상이나 제사상은 물론 결혼식, 장례식이나 그 밖의 주요행사에 빠지지 않고 올라온다. 참고비에는 섬유질, 비타민과 기능성 성분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3월 하순에서 5월까지 참고비가 잎을 돌돌 말고 있는 상태에서 순을 꺾어 줄기에 있는 인편을 손으로 훑어 제거한 뒤 삶아서 말리고 다듬어 상품으로 낸다. 참고비는 채취 후 바로 말려야 한다. 채취하고 시간이 지나면 물러지기 때문이다. 삶은 뒤 녹차 비비듯이 비벼서 말리면 질이 좋아진다. 참고비는 고사리 맛과 차이가 난다. 참고비에서는 약간 쌉싸름한 향과 인삼 향 같은 것이 난다. 말린 참고비는 끓는 물에 20~30분 정도 삶은 뒤 미지근한 물에 2~3시간 불리면 양이 5배로 늘어난다. 사계절 모두 먹을 수 있다. 요리법은 고사리나물과 같다. 삶아서 말린 참고비는 물에 충분히 불린다. 불린 참고비에 참기름이나 들기름, 마늘, 멸치 육수, 집 간장을 넣고 볶다가 육수를 약간 더 넣은 뒤 볶아 먹는다. 마늘을 많이 넣고 볶아야 더욱 맛있다. 참고비는 울릉도에서 나물뿐만 아니라 국, 육개장, 비빔밥에도 사용된다. △ 울릉도 특산물 전호나물 약초로도 쓰여 전호(前胡)나물도 울릉도 특산물이다. 산형과의 산나물인데 울릉도 사람들이 즐겨 먹는 나물 중 하나다. 섬이나 산지의 숲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고 5-6월에 개화한다. 바디나물, 사약채, 향채 등으로도 불리는데 미나리과의 식물인 섬바디와 비슷하게 생겼다. 울릉도의 전호나물은 깊은 산 속 낙엽 밑에서 주로 자라는 까닭에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해 줄기가 희다. 전호나물은 눈 속에서도 자란다. 울릉도에서는 대체로 12월경부터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3월 눈이 녹으면 바로 채취한다. 뿌리는 약초로 쓰고 잎은 나물로 먹는다. 향미가 독특하지만 저장성이 떨어져 맛보기가 쉽지 않다. 산채비빔밥의 재료나 샐러드로 해서 먹기도 한다. 전호나물은 시금치 무치듯 바로 데쳐서 조리한 뒤 먹는다. 전호나물을 소금 넣고 끓인 물에 살짝 데친 뒤 찬물에 씻어준다. 데친 나물의 물기를 꼭 짜낸 뒤 간장, 깨소금, 참기름을 넣고 무쳐낸다. 굵은 갈색의 뿌리는 한약재로 이용한다. 생채를 쌈으로도 먹는다.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이자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가 나리 마을이다. 마을 이름이 나물 이름에서 유래했다. 나리는 울릉도에 서식하고 있는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강원도 금강산, 함경도 원산·무산령 등지와 만주·아무르·우수리 지방까지 분포한다. 일본에서는 관상용으로 건너간 것이 귀화하여 널리 자란다. 말나리에 비해 꽃이 노랑색으로 피는 것이 다르다. 울릉도에서도 성인봉 일대 4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군락을 지어 서식한다. 울릉도 개척민들 일부가 나리분지에 정착했는데 식량이 부족해서 나리분지 일대에 널린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서 식량으로 썼다. 섬말나리가 많았다 해서 지명도 나리분지가 됐다. 식량으로 쓰일 정도로 흔하던 섬말나리가 귀해져서 1997년에는 산림청에 의해 희귀 및 멸종 위기 식물 37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일본이 울릉도의 섬말나리를 채취해다가 증식한 뒤 다케시마(독도)나리로 이름 붙이고 독도가 일본 땅인 양 선전하는데 이용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영남대 김규원 교수가 섬말나리의 복원 증식에 성공한 뒤 2003년부터 나리분지에 다시 심기 시작했다. 울릉도 개척민들은 섬말나리의 어린 순을 삶아 나물로 무쳐 먹거나 땅속의 비늘줄기를 어린순과 함께 삶아 먹기도 했다. 지금은 산채비빔밥에 활용된다. 알뿌리를 밥에 섞어서 먹기도 했다. 그야말로 울릉도 사람들을 살려낸 음식들이다. /강제윤 (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9

[기획] ‘포항인구를 지탱하는 힘, 외국인’

◇ 새벽 6시, 부추밭의 습기 속에서 하루를 견디는 사람 새벽 6시,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한 부추 농장. 공기는 차갑지만, 비닐하우스 안은 이미 묵직한 습기가 차오른다. 이 시간, 베트남 출신 노동자 티 항 탄항씨(33)가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씻고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땀이 맺힌다. 오전 7시, 사장님의 트럭이 골목에 들어서면 그는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짐칸에 오른다. 모두 고향을 떠나온 같은 베트남 사람들이다. 하루 종일 말을 섞을 수 있는 이들도 결국 서로뿐이다. 부추밭의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몸은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부추를 베고, 골라내고, 상자에 담고, 버릴 잎을 정리한 뒤 다음 모종을 심기 위해 흙과 비닐을 다시 다듬는 일은 허리와 손끝을 끊임없이 소모한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조금씩 다른 힘과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흙과 땀은 어느새 뒤섞여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점심 무렵 작업이 잠시 멈출 때면 손끝은 얼얼하다. 하루 일정은 정해져 있지만, 실제 노동은 그날 배정된 작업량에 맞춰 흘러간다. 오후 1시 30분 다시 비닐하우스로 들어서면 열기가 갇혀 바깥보다 더 뜨겁다. 티 항 탄항 씨는 말없이 몸을 움직이다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올해로 세 번째다. 계절근로자 제도는 최대 8개월만 머무를 수 있어 매년 다시 신청해야 하고 장기 체류나 직장 이동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는 “언니와 동생, 이렇게 셋이 같은 농가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임금이 곧 가족의 생계이기 때문이다. 티 항 탄항씨는 월급 약 190만 원 중 20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본가로 보낸다”고 했다. 언어는 여전히 높은 벽이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나면 한국어를 공부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한국 사회와 연결되는 통로는 거의 없고, 일터와 숙소, 가족이라는 좁은 세계만이 반복된다. 병원 방문은 특히 두렵다. 그는 “말을 잘못하면 오해가 생길까 걱정돼 사장님을 따라간다”고 털어놨다. 티 항 탄항씨는 “사장님이 잘해주셔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에는 고단함과 삶의 무게가 스며 있었다. ◇ 오전 8시 30분, 연구실의 불을 켜는 사람 아침 햇빛이 포항공대 캠퍼스에 비스듬히 내려앉을 때 첨단원자력공학과 건물 한편에서 불이 먼저 켜진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 주마로(27)다. 2021년 9월 포항에 온 뒤 그의 하루는 줄곧 이 시간에 시작됐다. 그는 정규 학위과정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D-2 유학비자로 체류하고 있으며 학업 성적과 재학 요건을 충족해야 비자를 연장할 수 있다. 생활비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연구 급여로 해결한다. 주마로는 “생활비와 숙박비, 보험료까지 감당돼 큰 불편은 없다”고 설명했다. 연구실의 아침은 언제나 고요하다. 그는 장비를 점검하고 실험 데이터를 확인하며 하루의 흐름을 만들어간다. 점심 후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일정은 반복적이지만 그는 “금요일은 주간 세미나 때문에 가장 분주하다”고 말했다. 연구실 밖에서는 운동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포항의 조용함은 그에게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학식 근처 연못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간이 됐다. 다만 도시의 말투는 처음엔 낯설었다. 그는 “사투리를 처음 들었을 때 사람들이 화난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풍경이 익숙해질수록 도시가 안고 있는 현실도 조금씩 드러났다. 한국의 근무 문화는 그에게 가장 큰 낯섦이었다. 그는 “연구실에 오래 남아 있을수록 성실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이어 “저녁이 되면 집중력이 떨어져 효율이 낮아진다”는 이야기도 보탰다. 위계가 명확한 연구 문화도 적응이 필요했다. 언어 장벽은 일상 곳곳에서 드러났다. 행정 업무는 처리할 수 있었지만, 병원 진료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증상을 설명하고 진료 내용을 이해해야 해서 종종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기숙사의 공동 화장실과 샤워실도 불편한 요소였다. 포항시의 무료 한국어 교육 과정에도 참여했지만, 수업 난도는 그와 맞지 않았다. 반대로 언어교류 활동과 독서 모임은 외로움을 견디는 데 더 큰 도움이 됐다. 그는 “그런 모임이 한국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접점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국 체류를 위해 필요한 TOPIK 시험도 넘어야 했다. 그는 기준인 3급을 넘어 4급, 최근에는 6급까지 취득했다. 시험 방식에 대해 그는 “실제 실력보다 문제 풀이 요령에 비중이 크다”고 평가했다. 졸업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년 남짓. 그는 판교의 기술기업과 대기업 여러 곳에 지원한 상태다. 이는 개인의 선호라기보다 구조가 만든 선택지였다. 첨단 실험 기반 연구 인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 외국인이 E-7 전문직 비자로 전환해 장기 체류할 수 있는 고용 요건을 갖춘 기업은 대부분 수도권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포항은 연구하기에는 충분히 좋은 도시였지만 그는 이곳에서 미래를 이어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 모순은 주마로 개인을 넘어 포항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지역 대학은 세계에서 인재를 불러들이지만, 그 인재가 도시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받쳐주는 산업 기반은 부족하다. 포항이 길러낸 인재가 결국 도시 밖에서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방 대도시가 직면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포항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며 “포항은 행복과 고독이 함께 있는 숨은 보물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 두 개의 하루가 포항에 던지는 질문 비닐하우스에서 하루를 견디는 계절근로자와, 연구실에서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유학생의 하루는 서로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하루는 포항이라는 공간 위에서 겹치며 우리가 숫자로만 읽어온 외국인의 존재를 구체적인 얼굴로 바꾼다. 티 항 탄항씨에게 포항은 생계를 붙드는 노동의 자리이고, 주마로에게 포항은 학문과 미래를 시험하는 공간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이유로 이 도시에 왔지만, 두 사람은 ‘고립’과 ‘관계’라는 공통된 감정을 겪으며 포항을 살아낸다. 그들의 하루는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한다. 포항은 외국인이 일하러 오는 도시를 넘어, 살아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가. 비자, 언어, 노동, 제도, 관계망이라는 구조적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 질문은 계속해서 도시의 미래를 흔들 것이다. 글·사진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5-12-08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강인한 힘의 일원 되고파”

고교시절 ‘철의 매력’ 발견, 포스코 입사 코크스 품질 결정하는 선탄공장서 근무 석탄 투입량·배합 관리, 데이터 확인 등 24시간 설비 가동, ‘원팀’으로 안전 책임 - 자기소개와 현재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 소개해달라. 나는 포항제철소 화성부 선탄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최준혁 대리이다. 제철소의 핵심 연료인 코크스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원료탄을 관리하고 적절히 배합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쉽게 말하면, 코크스를 만들기 전에 석탄을 미리 선별하고 관리해서 ‘코크스가 잘 나오도록 밑작업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선탄공장에는 각국에서 다양한 종류의 석탄이 들어온다. 겉보기에는 다 비슷한 석탄같지만 실제로는 성분과 강도, 수분 등 특성들이 조금씩 다르다. 나는 이런 원료탄을 저장하고 옮기는 설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하고, 투입량과 배합 비율을 확인하며, 이상 징후가 없는지 데이터를 통해 수시로 살펴본다. 석탄의 관리와 배합 단계는 사실상 코크스의 최종 품질을 결정짓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 작은 오류가 생기면 고스란히 코크스 품질 저하로 이어지고, 나중에 쇳물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지에도 영향을 준다. 이처럼 코크스의 품질이 곧 고로 조업의 안정성과 직결되기에, 선탄공장에서 내 업무는 제철소 전체 공정의 안정성을 책임지는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눈에 띄는 화려한 공정은 아니지만, 원료 관리와 배합 단계가 잘 이행되어야 포스코의 경쟁력 있는 철강 제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 이 부분이 내가 현재 업무에 큰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임과 동시에 가장 큰 자부심을 느끼는 지점이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금속재료과에 입학해 전문적으로 철을 공부하다 보니, 건물·자동차·선박·가전제품 등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것들의 바탕에 철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같은 철이라도 성분과 공정에 따라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른 쓰임새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전공 공부를 하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공부가 손에 잘 안 잡히는 시기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던 시기에 우연히 내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문구가 있었다. 바로 포스코의 슬로건이었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 처음에는 그저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라고만 여겼던 이 말이 어느 순간 내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다. 철은 겉보기엔 둔탁한 이미지가 있지만, 결국 ‘산업의 쌀’답게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소리 없이 강인한 힘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이 다시 공부에 매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덕분에 방황하던 시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목표를 포스코에 맞추게 되었다. 나에게 포스코 입사는 단순한 취업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고민해 온 과정과 한 문장의 울림이 만나 만들어낸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 현재의 팀을 소개한다면. 우리 팀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로 뭉치는 “원팀(One Team)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설비를 24시간 가동하는 현장 특성상, 아무리 관리를 철저히 해도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갑자기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는 등 조업에 지장이 생길 상황이 발생하면, 파트장의 지휘 아래 주임을 필두로 누구 하나 빠짐없이 팀원 전원이 합심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또한, 급박한 상황일수록 안전에 더 신경을 쓴다. 우리 팀에게 안전은 단순한 수칙이 아니라 동료에 대한 약속이다. 나의 안전이 지켜져야 동료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이러한 동료애 덕분에 거친 현장에서도 팀원 모두가 각자의 역량을 100% 발휘해, 안전하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 입사 이후 가장 도전적이었던 순간이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은? 2년 전 QSS 개선리더로 활동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신규 설비가 말썽을 일으켜 석탄 저장고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석탄을 정해진 비율대로 섞는 배합비가 틀어지는 일이 발생했고, 비싼 원료를 더 쓰거나 품질 조정을 위한 추가비용이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우리 개선리더 팀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 데이터를 모으고 원인을 분석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신규 설비를 재개조했고, 석탄 저장고 사용률을 다시 100%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로써 원료 배합 단가를 정상화해 회사 수익성 개선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이 성과를 인정받아 우리 개선리더팀은 제철소장상을 받았다. 성과공유회에서 임원분들 앞에서 직접 개선 사례를 발표하는 영광도 누릴 수 있었다. 이 경험이 회사 생활에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 중 하나다. 현장 경험 바탕 자격증 등 공부하며 성장 직원들 노하우·스마트 기술로 한층 진화 육아휴직 등 든든한 육아 복지제도 혜택 이론·실무 겸비한 독보적인 전문가 될것 -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평소 어떤 노력들을 하는지? 현장의 경험과 실전은 분명 업무 전문성을 끌어올리는 데 좋은 바탕이 된다. 하지만 실전 경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장 경험과 노하우에 이론의 깊이를 더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매년 자격증 한 개씩 따는 것을 목표로 삼고 꾸준히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교대 근무를 하며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짧게는 하루 30분이라도 책을 보고, 휴무일에는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과정 끝에 금속재료기사와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먼저 취득했고, 이후 제선기능장과 제강기능장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 제선·제강 관련 이론과 조업을 함께 공부하고 나니, 내가 다루는 원료탄이 코크스를 거쳐 용광로와 제강 공정을 지나 어떤 과정을 거쳐 최종 제품으로 이어지는지, 공정 전체의 흐름이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저 설비를 고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왜 이런 조건이 중요한지, 이 한 번의 조작이 뒤 공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까지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은? 앞서 언급했던 QSS 활동도 그 순간 중 하나다. 추운 겨울날 6기 코크스 시운전팀으로 차출돼, 여러 동료와 함께 노력한 끝에 설비가 안정 조업 단계에 들어갔을 때도 스스로가 이 조직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어떤 특정한 날이 아니라 ‘지금, 이 현재’이다. 선탄공장은 제철소의 심장인 고로에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하는, 말 그대로 혈액을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서 있는 이 공정이 흔들리면 그 영향은 고로와 코크스, 나아가 제철소 전체 조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설비 하나하나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고, 작은 이상 징후라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이며, 안전 수칙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한 번 더 멈춰 서서 확인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렇게 거대한 제철소의 설비와 공정이 한 치의 멈춤 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마주할 때면, 가슴 안쪽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뜨거운 자부심이 올라온다. 나와 동료들이 지켜낸 이 ‘당연한 일상’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이 현재가 쌓여 나의 경력이 되고, 포항제철소의 경쟁력이 된다고 생각할 때, 나는 오늘도 아주 자랑스럽다. - 회사에서 잘 누리고 있는 복지 제도가 있는지? 회사 복지제도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육아 관련 제도다. 아이를 키우고 있다 보니 출산장려금을 비롯해 육아휴직, 자녀 장학금, 어린이집 지원, 학자금 제도까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체감이 된다. 내년이면 둘째 아이가 태어나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데, 이러한 회사의 든든한 시스템 덕분에 양육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동기들도 여러 복지 중에서 육아 제도를 가장 만족스럽게 꼽을 만큼, 회사가 구성원의 가정을 함께 책임지려는 의지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건강관리 차원의 복지이다. 매년 사내 의료기관이나 사외 지정 의료기관에서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고, 필요할 때는 사내 의료기관에서 물리치료를 받거나 일반 상비약 처방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작은 불편이나 컨디션 난조를 방치하지 않고 초기 단계에서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은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특히 의미가 크다고 느낀다. 이처럼 육아와 건강에 대한 회사의 체계적인 지원 덕분에, 가정에서는 가장으로서, 직장에서는 현장 기술자로서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복지제도가 단순한 혜택을 넘어 직원이 오래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고 있다는 점이 회사의 큰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나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지? 나는 지금 국내 철강업계가 아주 큰 전환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보는 미래의 철강업, 그리고 선탄공장의 모습은 한층 스마트해진 첨단 일터이다. 먼저, 선탄공장은 더 이상 석탄을 부수고 섞는 데 그치는 곳이 아니라, 제철소 전체 경쟁력을 좌우하는 스마트 원료센터로 진화할 것이다. 지금까지 선탄 조업은 베테랑 선배들의 감과 오랜 경험에 많이 의존해 왔지만, 앞으로는 원료탄의 특성, 설비 상태, 조업 조건 등이 모두 데이터로 수치화되고, AI와 빅데이터, IoT 기술이 본격적으로 현장에 접목될 것이다. 동료들의 노하우와 첨단 기술이 만나 더 높은 효율과 생산성을 갖춘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또한 밀폐형 설비와 최첨단 집진 시스템을 바탕으로, 말 그대로 맑은 공기가 느껴지는 공장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 일부 구간에서는 밀폐 설비가 구축되고 있고, 집진 시스템도 지속적으로 개선되면서 환경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이런 변화가 선탄공장 전체, 더 나아가 제철소 전체로 확산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 앞으로의 포부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나에게 ‘기능장’이 현장 실무의 정점이었다면, 그다음 단계인 ‘기술사’는 이론과 엔지니어링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금속재료·제련·가공 세 분야의 기술사를 차례로 취득하는 것이다. 훗날에는 이론과 실무를 두루 소화해 내는 독보적인 전문가가 되고 싶다. 단지 설비를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짚어내고, 공정 전체를 생각하며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포스코의 기술자로 성장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과 노하우를 혼자만의 자산으로 남기지 않고, 선배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으며 성장한 만큼 후배들에게도 그 역할을 해 주고 싶다. 향후 10년 뒤에는 후배들이 업무나 진로 등으로 고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려 믿고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또한 공부하는 현장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기여하고 싶다. 현장이 그저 주어진 일만 처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업무 개선 활동이 이뤄지는 ‘모두가 성장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먼저 공부하고 여러 도전 과제에 뛰어들며,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다 함께 성장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첫 디딤돌이 되고 싶다. 아빠로서의 목표도 있다. 나는 첫째 아이와 내년에 태어날 둘째 아이에게 ‘늘 도전하는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내 뒷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메시지를 가졌으면 한다. “우리 아빠도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니까, 나도 내 꿈을 위해 노력해 봐야겠구나” 집에서는 따뜻하고 믿음직한 가장으로, 회사에서는 실력과 태도를 모두 인정받는 기술자로 서고 싶다. 앞으로도 이론과 현장 노하우를 바탕으로 철강계 전문가가 되겠다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가정에서는 존경받는 아빠로, 회사에서는 믿음직스러운 기술인으로 성장하고 싶다. - 미래의 철강인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현장은 사소한 방심 하나가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곳이다. 초반에는 긴장감 덕분에 자연스럽게 두 번, 세 번 확인하지만,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확인이 줄어들고 절차가 형식적으로 변하기 쉽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이 ‘처음의 태도’를 오래 가져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무조건 똑같이만 일하라는 뜻이 아니라, 처음 가졌던 진지함과 책임감, 기본을 지키려는 마음을 놓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내가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현장 철학이며,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계속 지키려고 노력하는 약속 중 하나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2-07

섬 곳곳에 자라는 명이 나물, 생채·무침·절임·튀김·김치⋯

구충·이뇨·해독·감기에 효과 정력에 좋은 자양강장 식물 日 수도승들 체력 증진에 이용 △백합과의 다년생 식물인 산마늘 명이는 백합과의 다년생 식물인 산마늘의 울릉도 이름이다. 춘궁기 울릉도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나물이다. 그래서 목숨 명자를 써서 명(命)이라 부른다.산마늘은 명이란 이름 외에도 땅이나물, 망부추, 맹이나물, 산산, 각총, 소산, 산총, 행자마늘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시베리아, 중국, 한국, 일본 등에 분포하는데 한국에서는 오대산, 지리산, 설악산 등의 고산지대나 울릉도 숲속에 자생한다. 울릉도의 명이는 내륙 지방의 산마늘에 비해 잎이 넓고 끝이 둥글다. 산마늘의 비늘줄기는 각총이라 하여 구충, 이뇨, 해독 및 감기 증상을 제거하는 약용으로 쓰인다. 정력에 좋은 자양강장 식물로도 알려져 있다. 명이는 생채나 무침, 절임, 튀김, 김치, 염장 가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식용한다. 다른 나물들과든 달리 명이는 뿌리와 인경(저장기관의 역할을 하는 짧은 땅줄기), 잎, 꽃 등 식물 전체를 식용할 수 있다. 3~6월까지는 새싹과 잎, 잎줄기 등을 식용하고 뿌리와 인경은 연중 내내 식용할 수 있다. 명이의 꽃과 꽃봉오리는 6~7월에 식용 가능하다. 명이가 인체 내 비타민 B의 흡수를 촉진한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수도승들이 고행에 견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즐겨 먹는다 해서 행자 마늘이라고 한다. 울릉도산 명이는 1994년 경 울릉도에서 반출되어 현재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지만, 품질 면에서는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것이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요즈음은 명이 장아찌가 별미로 팔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울릉도 산천에 널린 것이 명이였다. 개척 당시 먹을 것이 떨어지면 주민들이 명이 나물을 뜯어다 먹고 목숨을 부지했다. 명이는 겨울에는 눈밭 속에서 찬 바람을 피해 웅크리고 있다가 새봄에 눈이 녹자마자 푸릇푸릇 다시 자란다. 주민들은 눈 녹으면 명이부터 채취하기 시작한다. 명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한다. 절임이나 김치, 물김치 등으로 조리해서 김치 대용으로 즐겨 먹는다. 명이 장아찌는 주로 초간장에 절여서 먹는다. 장아찌는 성장 중인 부드러운 명이 잎과 줄기로 담는다. 아주 부드러운 명이는 잎과 줄기, 뿌리까지 온전히 통째로 장아찌로 담가 먹기도 한다. 하지만 본래 울릉도 사람들은 명이를 소금에 절여서 젓갈 넣고 김치로 담가 먹었다. 간장 절임 해서 장아찌로 담가 먹은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관광 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명이 장아찌 담기가 본격화 됐다. 명이 장아찌는 보통 물과 간장 식초 설탕을 1:1:1:0.5의 비율로 섞어서 명이가 잠기도록 붓고 무거운 돌 등으로 눌러둔다. 2-3일 정도 지난 후 명이 나물의 숨이 죽으면 초간장 물을 따라내서 끓인 뒤 식혀 다시 부어준다. 그후에는 냉장 보관해서 저온 숙성시킨 뒤 먹는다. 명이는 마늘과라 다른 나물에 비해 잘 상하지 않는다. 울릉도에서는 명이 장아찌 외에도 40cm 정도 되는 명이를 채취해서 잎은 떼어내고 줄기만 불에 졸여 먹는 명이 졸임도 즐겼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졸이면 달콤한 맛이 난다. 명이는 또 잘라서 콩가루에 무처 먹기도 한다. 부드러운 명이는 초고추장으로 무침도 해 먹는다. 완전히 성장한 명이는 장아찌로 담지 않는다. 줄기는 물김치로 담고 잎은 쌈으로 먹는다. 뿔명이 김치도 울릉도 토속 요리다. 명이는 한 포기에서 한 줄기의 쌍엽만을 피워내는데 잎이 다 퍼지지 않고 뿔처럼 올라온 명이나물의 어린 순을 뿔명이라 한다. 4월 초 솟아난 명이의 어린 순인 뿔명이를 일 년 내내 두고 먹기 위해 만들어진 저장 음식이다. 본래는 가정에서 집 간장을 달인 물에 명이를 절여서 잠깐씩 먹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관광객에게 판매하려면 장기간 보관을 해야 하는 까닭에 소금을 많이 첨가한다. 채취하여 깨끗이 씻은 뿔명이를 항아리에 담은 뒤 물과 소금을 섞은 소금물로 염장한다. 뿔명이 김치는 먹을 때 조금씩 꺼내서 무쳐낸다. 염장한 뿔명이를 꺼내 물에 씻은 뒤 물기를 꼭 짜낸 다음 고춧가루, 마늘, 생강, 꽁치젓갈을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 버무려 내면 뿔명이 김치가 완성된다. 농가 소득 작물인 울릉미역취 초봄부터 年 4-5회 수확 가능 비타민 풍부·다이어트에 좋아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취나물 울릉도에도 취나물이 자란다.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취나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울릉미역취란 이름으로 불린다. 미역취는 국화과(Asteraceae)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 평지부터 해발 1000m의 높은 지대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다. 미역취와 비슷한 식물은 울릉미역취와 미국미역취가 있다. 울릉미역취는 육지의 참취와는 구분되는데 육지에서 자생하는 취나물보다 잎이 훨씬 커서 큰 미역취라고 부르기도 한다. 울릉미역취는 두상 꽃차례(꽃의 배열 상태)가 빽빽하게 모여 있고, 미국미역취는 길이가 1m가 넘는데 줄기에서 꽃이 달리는 가지가 많이 나온다.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울릉미역취는 미역취의 변종이다. 미역취는 민간에서는 갑상선종양, 후두암, 기관지염의 치료에 약용한다. 한방에서 식물 전체를 말려 건위제·강장제·이뇨제로 쓴다. 미역취의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개미취, 메역취, 일지황화, 야국화, 주금화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야생에서 자생하던 울릉미역취는 울릉도의 소득 작물로 개발돼 농가에서 재배되고 있는데 농가 재배 시에는 초봄부터 채취하여 연간 4~5회 수확도 가능하다. 초벌 채취한 나물은 곧장 육지의 시장에 출하 되지만 두벌 채취 이후의 것들은 삶아서 말린 뒤 저장 판매된다. 울릉미역취는 울릉도 산나물 가운데 비타민A의 함량이 가장 높다. 피부미용과 감기에 대한 저항력, 시력을 좋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울릉미역취는 어린잎은 살짝 데쳐서 무쳐 먹거나 데친 나물을 햇볕에 말려 묵나물로 먹기도 한다. 묵나물을 무쳐 먹을 때는 먼저 마른 미역취를 물에 불린다. 불린 미역취는 물에 넣고 끓인다. 끓인 물속에 미역취를 7시간 정도 담가두었다가 물기를 꼭 짠다. 불에 달군 후라이팬에 콩기름이나 들기름을 두른 후 마늘과 양파를 넣고 살짝 볶는다. 진간장을 넣고 다시 들들 볶다가 미역취를 넣고 더 볶는다. 여기에 미리 만들어둔 멸치 육수를 살짝 넣고 김이 한번 나면 바로 불을 끄고 먹는다. 멸치 육수는 나물이 눌러붙지 않을 정도만 넣는다. 싱거우면 집 간장이나 소금으로 간을 더 한다. 미역취를 볶지 않고 무쳐 먹을 때는 참기름을 사용한다. 참기름은 미역취에 부족한 식물성 지방을 보충해 준다. 미역취는 열량과 지방 함량은 낮고 비타민이 풍부해 다이어트 시 섭취하면 위에 부담이 적고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어 좋다. 울릉도에서는 된장찌개를 끓여 생 미역취나물에 쌈을 싸먹기도 한다. 바다에서 베어와 삶은 잎 썰어 보리·감자·옥수수 섞은 대황밥 춘궁기 굶주림 면한 귀한 음식 △춘궁기에 먹던 대황밥 과거 춘궁기에 울릉도 사람들은 대황을 넣은 대황밥으로 굶주림을 면했다. 바다에서 베어온 대황을 갯바위에 널어 말린 뒤 마르면 짊어지고 와서 장작불을 때서 삶았다. 삶은 대황의 줄기는 빼고 잎만 썰어서 보리나 감자, 옥수수 섞어서 밥을 한 것이 대황밥이다. 대황은 염증을 없앤다고 한다. 간혹 곰피를 대황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종이다. 울릉도에서도 통구미 지역에서 대황을 넣은 대황밥을 많이 먹었다. 대황은 쌈이나 무침으로도 먹는다. 대황무침은 마른 대황을 물에 불린 뒤 마늘, 고춧가루, 쪽파 등 양념과 젓갈을 넣고 버무려서 만든다. 생 대황은 살짝 데쳐서 먹기도 한다. 남획으로 양이 줄어들자 현재는 3개월 동안 대황 채취 금지 기간으로 정해서 보호하고 있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7

[기획] 포항의 8615명 외국인은 오늘의 도시를 지탱하고, 내일의 한국을 묻는다

‘50만 도시’의 경계에 선 포항. 이 숫자는 단순한 인구 통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도시의 행정 권한과 위상을 가르는 기준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준을 지탱하는 전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올해 10월 기준 포항에 거주하는 외국인 8615명이 없다면 이 도시는 지금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내국인 감소와 고령화가 누적되는 현실에서 외국인의 존재는 통계를 넘어 도시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요인으로 부상했다. 포항시는 최근 몇 년간 인구 감소가 고착화되며 50만 명 회복이 점점 더 어려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한다. 인구절벽 충격이 현실화하는 지방 중핵도시 포항에서 외국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짚어본다. <글 싣는 순서> 1. 포항의 8615명 외국인은 오늘의 도시를 지탱하고, 내일의 한국을 묻는다 2. 포항에 산다는 것, 외국인의 하루 3. 환영과 불안 사이, 완벽한 이민은 없다 - 다문화 도시로 넘어가는 포항의 ‘감정 지도’ 4. 정책도 다문화로 - 도시의 변화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고 있는가 5. 이민 시대, 지속 가능한 길을 찾다 ◇ ‘8615명’의 존재, 도시를 지탱하다 올해 10월 기준 포항시 총인구는 49만 7578명으로 이 가운데 내국인은 48만 8963명, 외국인과 외국국적동포는 8615명이다. 외국인은 전체의 1.7%에 불과하지만 인구 구조 변화 속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의미는 단순 비율로 설명되기 어렵다. 지난해 말 50만 명에 근접했던 포항의 인구는 1년 새 약 2600명 감소해 49만 명대 중반으로 내려왔으며 자연 감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외국인 인구만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전체 감소 폭을 일부 상쇄하고 있다. 세대 구조 역시 변화가 뚜렷하다. 포항의 총 23만 8324세대 가운데 1인 세대는 9만 9719세대로 41.8%를 차지하고 세대당 인구는 2.05명에 머문다. 평균연령은 46세이며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11만 5939명으로 전체의 23.5%를 차지해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이처럼 청년층과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는 구조 속에서 외국인은 일부 노동인구 공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산업 현장에서 외국인의 비중은 더욱 중요하게 나타난다. 수산물 가공업, 제조 하청업체, 항만·물류업, 농축산업, 건설 보조 등에서 외국인 의존도는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현장에서는 “외국인이 빠지면 공정이 지연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실제 수산물 가공업체는 일정 규모의 외국인 인력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도계·선별·가공 라인의 가동률이 즉각 낮아진다고 설명한다. 항만 물류 작업 또한 배정 인력 변화가 처리 속도로 이어지는 만큼 외국인 노동력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외국인은 단순히 부족 인력을 보충하는 수준을 넘어 도시 기능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데 기여하는 실질적 축으로 자리 잡았다. ◇ 외국인이 빠진다면 외국인을 제외한 포항의 모습을 가정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영역은 도시의 행정적 지위다. ‘지방자치법 시행령’ 제118조는 주민등록인구에 외국인등록과 거소 신고 외국국적동포를 합산해 2년 연속 50만 명 이상을 기록할 때 대도시로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재 포항은 주민등록 인구만으로는 기준에 미달하며 외국인을 포함하더라도 50만 명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외국인 8615명이 제외될 경우 총인구는 48만 명대 중반으로 감소해 향후 50만 회복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도시 지위는 단순한 명칭을 넘어 도시가 행사할 수 있는 정책 자율성과 직결된다. 행정안전부는 2021년 인구 50만 이상 도시를 대상으로 도시계획시설 결정, 공원녹지 기본계획 수립, 주택건설사업 승인, 노인복지시설 설치 등 27개 사무를 지방정부에 이양했다. 이 기준 충족 여부에 따라 정책 집행 범위가 달라지는 만큼 외국인 인구는 행정 체계의 안정성을 지탱하는 현실적 변수로 작용한다. 산업 현장에서의 영향은 더 직접적이다. 고용노동부 ‘2024년 외국인 고용현황’에 따르면 제조업 외국인 근로자 비중은 전국 10.6%, 경북 12.4%로 나타났다. 철강·가공·물류 산업이 밀집한 포항은 본 공정보다는 협력업체와 연관산업에서 외국인 비중이 높다는 것이 산업계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외국인 인력이 빠질 경우 생산라인 가동률 저하, 항만 물류 지연, 농축산업 계절 작업 차질, 수산 가공량 감소 등 공급망 여러 지점에서 가시적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지역 고용과 소득, 소비에 영향을 미치며 중소 제조업체와 수산업 기반 약화로 이어질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인구 구조 측면에서도 외국인의 역할은 중요하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이 이미 23.5%를 넘는 가운데 외국인은 대부분 20~50대 노동 연령층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이 이탈하면 생산가능인구는 추가로 줄고 고령층 비중은 더 두드러지게 된다. 이는 도시 활력 약화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역 재정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외국인 인구는 포항의 산업, 인구 구조, 행정 지위를 동시에 떠받치는 핵심적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 그러나 ‘유입’만으로는 부족하다 외국인 유입은 도시 활력의 중요한 변수지만 단순히 인구가 늘고 줄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인구절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법무부 ‘2024 체류 외국인 통계’에 따르면 전국 체류 외국인은 약 233만 명이며 이 중 60% 이상이 체류 기간 3년 미만으로 분류되는 단기 체류자다. 이는 장기 정착까지 이어지는 비율이 높지 않음을 보여준다. 경상북도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법무부 통계에서 경북 체류 외국인의 52.1%가 고용허가제 근로자(E-9)로 집계되며 E-9 비자의 기본체류 기간은 3년, 연장해도 4년 10개월을 넘지 않는다. 즉, 이 인력은 구조적으로 ‘장기 정착’보다는 ‘기간제 노동력’의 성격을 갖는다. 정착 기반 부족 문제는 삶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여성가족부 ‘2023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다문화·이주민 가구의 27.8%가 “주민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고 응답했다. 단기 체류 비중이 높고 지역사회와의 접촉면이 제한적일수록 공동체에 편입되는 속도는 늦을 수밖에 없다. 이는 외국인이 지역에 유입된다는 사실만으로는 도시의 인구 구조와 사회적 통합을 동시에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외국인 유입이 산업 현장의 인력난을 일시적으로 완화할 수는 있지만 정착을 뒷받침하는 주거·의료·교육·언어·지역사회 교류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포항이 지속 가능한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외국인이 ‘일하러 오는 도시’를 넘어 ‘살아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정착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외국인과 지역사회가 함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때에야 비로소 인구절벽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 도시의 선택 “49만 7000명 중 외국인 8615명이 없다면”이라는 물음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포항의 현재 인구 구조와 행정적 지위를 동시에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다. 외국인의 존재는 산업 현장의 인력난을 메우는 것을 넘어 고령화와 내국인 감소가 심화하는 포항에서 생산가능인구를 보완하는 현실적 해법이다. 실제로 외국인은 도시가 대도시 기준선을 유지하는 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유입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정착이다. 법적 지위, 산업 현장, 생활 기반 중 어느 하나라도 취약하면 외국인의 체류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포항이 지속 가능한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일하러 오는 도시’를 넘어 ‘살아갈 수 있는 도시’로 변화해야 한다. 지금 포항은 그 변곡점에 서 있다. 다음 2편에서는 ‘포항에 산다는 것, 외국인의 하루’를 통해 숫자 뒤에 숨은 삶의 얼굴들을 따라가 본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5-12-07

산란기 수초에 손 넣어 사냥… 신선도 높아 물회로 즐겨

△ 신선도 높아 물회로도 먹을 수 있는 손꽁치 울릉도에는 꽁치를 활용한 요리가 많다. 작은 꽁치 하나로도 참 다양한 요리들을 만들어냈다. 구워 먹고 끓여 먹는 것은 기본이고 날 것은 회로 먹고 물회로도 먹고, 꽁치전도 부처먹었다. 소금에 절여서는 젓갈로도 담가 먹었다. 다양한 꽁치 요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울릉도를 대표하는 꽁치 요리는 꽁치물회다. 과거 울릉도의 꽁치잡이 풍습은 독특했다. 낚시나 그물이 아니라 맨손으로 잡았다. 어선을 타고 나가 맨손으로 꽁치를 직접 잡았던 것이다. 그렇게 잡은 꽁치는 손꽁치라 했다. 손꽁치는 그물이나 낚시로 잡은 것 보다 신선도가 높아 물회로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음식이 꽁치물회다. 보통 비린 맛이 강한 꽁치로는 물회를 만들어 먹기 어렵다. 울릉도 손꽁치니까 가능했던 음식이다. 옛날에는 손꽁치가 잡히는 4-5월에만 맛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냉동시설이 발달해 그물로 잡은 꽁치도 급랭해 두고 오래 맛볼 수 있다. 4~5월에 꽁치들이 산란을 위해 울릉도 해안으로 찾아든다. 꽁치는 공치, 청갈치, 추광어 등으로도 불린다. 꽁치는 일본의 남부 바다에서 겨울을 난 뒤 봄과 여름 사이에 북쪽으로 이동하여 동해에서 산란한다. 꽁치는 산란기가 되면 수초에 몸을 비비며 산란을 하는 특성이 있다. 어부가 수초 사이에 손을 넣으면 꽁치들은 손가락 사이를 콕콕 쑤시고 손가락 사이에도 몸을 비벼대며 산란을 하려 한다. 이때 어부는 그냥 손으로 꽁치를 잡을 수 있다. 이처럼 꽁치가 해조류에 산란하는 특성을 이용해 잡는 것이 손꽁치 어법이다. 어부들은 천연 수초 사이에서도 꽁치를 잡았지만 바닷물 위에 잘피나 몰, 가마니 같은 것을 깔아놓고 잡기도 했다. 이때 잡히는 꽁치를 손꽁치, 햇물꽁치, 몰꽁치 라고 했다. 성질이 급한 꽁치는 낚시에 물려 올라오면서부터 스트레스 때문에 부패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손꽁치는 산란철이라 기름이 오르고 스트레스나 상처가 적어 선도가 아주 뛰어나다. 이 신선한 꽁치를 이용하여 ‘손꽁치 물회’, 손꽁치 무침 등을 만들어 먹었다. △ 울릉도 토속젖갈로 이름높은 꽁치젖갈 꽁치는 암컷이 알을 낳은 뒤 숫컷의 체외수정이 이루어지며 알은 실과 같은 섬유질 조직을 통해 해조류나 부유물에 부착된다. 수명은 약 2년 남짓이다. 한국의 동해와 남해, 아시아, 북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북태평양 해역에 널리 분포한다. 요즈음은 더 이상 손으로 잡지 않고 그물로 잡는데 살아있는 꽁치라도 바로 물회를 하지 않고 급랭해 하루 이상 냉동시킨 후 물회로 만들어 먹는다. 비린 맛이나 세균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냉동해 둔 꽁치는 껍질을 벗기고 포를 뜬 뒤 배, 오이, 당근, 파 등과 적당량의 물을 넣고 물회를 만든다. 꽁치무침은 발라낸 꽁치 살에 무채, 양파, 상추, 당근채, 마늘, 고춧가루, 식초, 오이채를 넣고 무쳐낸다. 생 꽁치 요리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간혹 탈이 나기도 하니 장이 나쁜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꽁치젓갈은 울릉도 바다에서 잡은 꽁치로 담은 울릉도 토속 젓갈이다. 섬이지만 울릉도는 젓갈 음식이 잘 발달하지 못했다. 소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란 추정도 있다. 천일염을 만들 수 있는 갯벌도 없고 육지에서 유입된 소금 가격은 너무 높아 젓갈용으로 쓸 수 없었다. 울릉도 자체에서는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지만 아주 소량이었다. 음식에 쓰기도 부족할 정도니 젓갈을 담을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울릉도에 사철 싱싱한 해산물이 넘치니 젓갈을 담을 필요가 없었다고도 하지만 내륙의 해안가에도 사철 해산물이 넘쳐 나지만 젓갈이나 염장해서 말리는 건정 생선 문화가 발달한 것을 보면 소금이 귀하고 부족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꽁치젓갈은 꽁치와 소금의 비율을 7대 3으로 해서 3개월 정도 숙성한 뒤 먹었다. 5월에 담그면 8월쯤 먹을 수 있었다. 꽁치젓갈은 손으로 찢어 먹어야 제맛이다. 그 자체로도 먹었지만 김치를 담그거나 겉절이 등 각종 음식을 만들 때도 다양하게 활용됐다. 울릉도에서 김치에 멸치젓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 꽁치다대기, 꽁치 시락국수 등 다양하게 변화 포항 지역에서는 꽁치를 뼈째 다져서 만든 완자를 넣고 끓이는 음식을 꽁치 다대기 혹은 꽁치 완자 시락국, 꽁치국, 꽁치 당구국, 꽁치 다대기 추어탕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완자를 넣은 꽁치 시락국수도 인기가 있다. 꽁치 완자 요리는 포항뿐만 아니라 울릉도에서 즐기는 향토 음식이었다. 울릉도에서는 꽁치 완자와 섬엉겅퀴를 넣고 끓이는 꽁치완자 엉겅퀴된장국이 대표 요리다. 꽁치가 많이 나던 시절 싸고 영양가 많은 꽁치를 뼈까지 다져 먹기 위해 꽁치 완자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음식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꽁치 완자 요리는 살뿐만 아니라 칼슘이 풍부한 뼈까지 버리지 않고 다져서 완자로 만들어 먹었던 지혜로운 음식이다. 꽁치 완자는 칼등으로 두드려 잘게 다진 뒤 녹말가루를 섞어 적당한 크기로 만든다. 꽁치완자엉겅퀴 된장국은 된장을 푼 물에 섬엉겅퀴와 꽁치 완자를 넣고 끓여낸다. 섬엉겅퀴에 이면수를 넣고 끓이기도 한다. 섬엉겅퀴는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인데 울릉도 자생엉겅퀴다. 울릉도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사는데 다른 엉겅퀴에 비하여 키가 매우 크다. 꽃은 8~10월에 자주색으로 핀다. 한방에서는 대계라고 하며, 뿌리는 가을에 사용하고 잎과 줄기는 꽃이 필 때 채취하여 햇빛에 말려 사용한다. 엉겅퀴에서 나오는 휘발성 기름인 정유, 알칼로이드, 수지, 이눌린 등의 성분이 있어서 옛날에는 지혈, 해열, 소종, 백일해, 고혈압, 장염, 신장염, 토혈, 혈변, 산후조리, 대하증, 종기 치료제로 사용했다. 그만큼 약효가 뛰어났다는 반증이다. 말린 잎은 차로, 어린잎은 나물이나 국거리로 먹는다. 부드러운 잎과 순을 데쳐서 고추장이나 된장에 무쳐 먹기도 하고 된장국이나 해장국을 끓이기도 한다. 육지의 엉겅퀴는 가시가 나서 새잎이 아니면 식용하기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울릉도에서 나는 섬엉겅퀴는 가시가 없어서 봄의 새순은 물론 가을에 나는 끝순까지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섬엉겅퀴는 번식력도 좋은 데다 담백하고 감칠맛도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시래기는 많이 끓이면 흐물거리지만 엉겅퀴는 오래 끓여도 흐물거리지 않고 본래 모양을 잃지 않는다. 그래도 부드럽고 맛있다. 울릉도에서 비린 생선으로 꼽히는 생꽁치로 물회나 무침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손으로 직접 잡는 손꽁치잡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기억해야 할 소중한 전통 문화다. 손꽁치 어법은 사라졌어도 손꽁치가 있어서 척박하고 먹거리가 풍성하지 못했던 울릉도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꽁치 요리법을 개발해 냈다. 척박함이 창의적인 요리를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4

전국에서 재봉틀을 가장 오랫동안 돌린 사람

1953년 포항 육거리서 문 연 ‘코주부사’ 마크 ·명찰 제작 가게, 새학기땐 북새통 포항 육거리 시립중앙아트홀 옆에 코주부사라는 아담한 가게가 있다. 상호가 독특해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게 되는 곳이다. 이 가게는 명찰과 마크, 휘장 등을 만드는 마크사로 1953년에 개업했으니 원도심의 터줏대감이다. 학생들이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니던 시절, 새 학년이 시작될 때면 코주부사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명찰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 체육복과 교련복에 학교 마크를 붙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 학교 학생만 몰려도 북새통을 이룰 텐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니 그 풍경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개점휴업 상태다. 학생 명찰은 사라져버렸고 마크사의 일감도 대부분 컴퓨터로 대체되면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주부사를 지켜온 박영준 대표는 이제 고령(85세)이어서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들어졌다. 박영준 대표는 1940년 포항 신흥동에서 태어났다. 포항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강이 안 좋아 2년 동안 쉬었다가 동지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 무렵 중앙동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뒤편에 인쇄소가 있었고 그 옆에 코주부사가 있었다. 박영준의 친구가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박영준이 친구를 만나러 인쇄소에 갔다가 우연히 당시 김대정 코주부사 대표를 만났다. 손재주 좋고 똑똑했던 박영준 대표 중학생 시절 창업주 김대정 대표 만나 재봉틀 배우며 1978년 가게 이어받아 체육복·태권도복 등 다양한 품목 소화 중학생 때 처음 재봉틀 잡아 김대정 대표는 착하고 똑똑해 보이는 박영준에게 재봉틀을 다뤄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박영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처지였던 박영준은 재봉틀 다루는 일이 괜찮아 보였다. 곧이어 김 대표는 박영준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재봉틀 다루는 기술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슬하에 자녀가 없던 김 대표는 박영준을 양자처럼 여기며 일을 전수했다. 발로 밟는 재봉틀을 다룰 때는 손가락을 다치기가 예사였고 힘이 들었지만 새로운 일을 배우는 재미도 있었다. 박영준은 일을 배우며 자신에게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크사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려면 한문과 영어, 일본어도 웬만큼 알아야 하는데 박영준은 이를 빨리 습득했다. 일제 주키(JUKI) 자동 재봉틀이 들어오면서 일이 조금 쉬워졌다. 박영준 대표는 중학생 때 쓰던 주키 재봉틀을 7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다. 동지중학교를 졸업한 박영준은 동지상고와 포항수산전문대학 야간부를 다녔다. 중학교부터 전문대학까지 8년을 주경야독한 것이다. 동지상고 야간부 1년 선배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초창기 코주부사는 명찰, 마크, 휘장은 물론 체육복, 작업복, 태권도복 등 다양한 품목을 다뤘다. 박 대표는 손님들한테 “가게 이름이 왜 코주부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상호는 김대정 대표가 만들었다. 주고객인 어린 학생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당시 인기 절정의 만화였던 「코주부 삼국지」의 주인공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코주부사는 원도심의 하나뿐인 마크사였기에 일감이 몰려들었고 한창 바쁠 때는 2~3일 철야 근무를 했다. 당시는 체육복이나 작업복을 양복처럼 맞춰 입었기에 학교나 공장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1970년대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호황을 맞았다. 한때는 열 명이 넘는 직원을 두기도 했는데 일감을 소화하지 못할 때는 대구의 기술자를 부르거나 큰 공장에 주문을 넣었다. 다른 한편으로 포항에서 처음으로 등산복과 등산장비를 취급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78년에 코주부사를 물려받아 오지에서 불러도 군말 없이 달려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박영준 대표가 당시를 회상했다. “상옥, 하옥은 시내에서 먼 곳이잖아요. 그쪽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릴 때면 교사용 체육복 치수를 재러 와달라고 해요. 지금도 그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과거에는 어땠겠어요. 그 멀고 험한 길을 안 갈 수가 없었지요. 그보다 더 먼 분교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어요. 체육복이 겨우 다섯 벌 정도 필요하다고 해도 달려갔습니다. 그런 곳에 다녀오면 하루가 다 갔어요.” 김대정 대표는 1978년 코주부사를 박영준 대표에게 물려주었다. 가게를 넘겨받은 박 대표는 더 부지런히 일했다. 박 대표의 부인이 일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그때는 돈 쓸 시간도 없었어요. 돈이 들어오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집 안 장롱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곤 했지요. 대신동 해동아파트에서 살다가 해도동 동아타운으로 이사 갈 때 장롱을 옮기는데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툭 튀어나왔어요. 무언가 싶어 봉지를 뜯어보니 지폐 뭉치가 들어 있어 깜짝 놀랐지요. 곰곰이 생각하니 지폐를 넣어둔 비닐봉지 중에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더군요.” 컴퓨터 기술 변화 속 쇠락한 수작업 친구들의 사랑방 ⋯ 가게만 덩그러니 재봉틀과 함께한 70년, 추억 속으로 “몸만 괜찮다면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 지금도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 1970년대까지는 어느 분야에서든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접받았다.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많은 기술자가 사라지고 말았다. 재봉틀 기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하던 자수(刺繡)도 컴퓨터가 대신했다. 작업복이나 체육복을 만드는 기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흐름 속에 코주부사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다. 코주부사는 박 대표 친구들의 사랑방이었다. 원도심 한복판에 있기에 친구들이 오며 가며 들르기에 좋았다. 친구들이 칠순, 팔순을 넘기며 “누가 먼저 저세상에 갈 것 같냐”고 얘기를 꺼내면 “아무래도 영준이가 먼저 가지 않겠냐”고들 했다. 박 대표가 어릴 때부터 건강이 안 좋은 탓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친구들은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나고 이제는 박 대표만 남았다. “포항이 좋았던 시절을 다 지켜봤지요. 육거리에 남은 노포는 코주부사와 길 건너 로타리냉면밖에 없군요. 전국에서 재봉틀을 저처럼 오래 돌린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도 몸만 아프지 않다면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요.” 박 대표는 필자의 이름을 묻더니 재봉틀을 잡았다. 재봉틀 굉음이 울리면서 파란색 명찰에 이름이 새겨졌다. 50여 년 전, 초등학생인 필자의 명찰을 새기던 박 대표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2-03

가을·겨울에 더 맛있는 ‘오징어 내장탕’ 숙취 해소에 탁월

오징어 내장탕 - 흰색 찾자 중 심장·수란관·맹장·난소 등 재료로 사용 오징어 똥창찌개 - 적갈생 내장 이용 ⋯ 식당서 맛 볼 수 없는 토속요리 오징어 순대·오징어 잡채·오징어 홍합꼬지 등 여행 즐거움 더욱 커져 △ 겨울에 맛있는 오징어 내장탕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토속 음식이다. 울릉도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징어 요리들은 울릉도 맛 기행의 백미다. 오징어 내장탕은 오징어 내장 중 흰 창자를 이용해 끓인 울릉도 토속 음식이다. 오징어 내장은 쉽게 부패하고 내장에 기생하는 기생충 아나사키스 때문에 식용으로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했던 울릉도에서는 오징어잡이가 시작될 때부터 내장을 버리지 않고 식용했다. 오징어 내장탕은 냉동을 해 두고 사철 먹지만 본격 오징어 철인 가을과 겨울에 먹는 것이 더 맛있다. 울릉도 사람들이 식용하는 오징어의 내장은 하얀 창자와 적갈색 창자 두 종류가 있다. 적갈색은 간장 부위, 흰색은 기타 내장기관이다. 흰색의 내장 가운데 심장, 수란관, 맹장, 난소 등을 내장탕 재료로 쓴다. 내장탕은 계절마다 제철에 나오는 야채를 이용한다. 내장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뒤 호박이나 호박잎, 콩나물, 파, 무, 양파 등을 넣고 끓인다. 호박, 양파는 비린 맛을 잡아 준다. 숙취 해소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릉도의 일부 노인들은 오징어 내장탕을 ‘이카 창대기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징어의 일본 말인 ‘이카‘(イカ)와 내장의 비속어 ‘창대기‘가 결합한 말이다. 오징어 똥창찌개는 식당에서는 맛볼 수 없는 울릉도 토속 요리다. 적갈색 내장인 간장으로 끓인다. 울진 등 오징어가 많이 나던 동해안 내륙 지역에서도 즐겨 먹던 음식이다. 오징어의 간장을 소금에 절였다가 끓인다. 끓일 때 냄새가 고약해서 일반 식당에서는 팔지 않는다. 오징어의 건조를 위해 내장을 제거할 때 하얀 창자는 급랭하거나 즉석에서 오징어 내장탕을 끓여먹고 적갈색인 간장은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1년 정도 숙성시킨 뒤 끓여 먹는다. 이 음식은 똥창찌개 혹은 오징어 누런창 찌개라고도 한다. 소금에 절여 숙성된 간장에 된장과 마늘을 넣고 달달 볶다가 시래기와 고춧가루, 제피 등을 넣고 졸여서 먹다. 찌개나 탕이라기보다는 조림에 가깝다. 울릉도에서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주민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내리던 소울 푸드 같은 음식이다. △ 오징어 간장, 오징어 순대 등 다양한 요리로 변주 오징어 간장은 쌈장으로 요리해 먹기도 한다. 쌈장은 ‘뽀글장‘ ’빡빡장‘이라 부른다. 빡빡장은 간장과 된장을 냄비에 넣고 볶다가 물을 조금 부은 뒤 고춧가루와 양파, 마늘, 고추 등을 넣고 졸여낸다. 배추 같은 생채소가 나는 철에는 주로 쌈장으로, 생채소가 없을 때는 찌개로 끓여 먹었다. 오징어 간장은 방어 잡이 미끼에도 최고로 친다.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다. 오징어순대는 오징어 몸통 속에 각종 야채를 다져넣고 쩌낸 요리. 오징어순대는 만드는 방법이나 형태가 순대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징어순대 만든 법은 어렵지 않다. 먼저 오징어 몸통에서 오징어 다리를 분리한다. 오징어 몸통 속의 내장은 제거한 뒤 소금을 뿌렸다가 물로 씻고 오징어 몸통 속을 전분이나 밀가루로 깨끗이 씻어낸다. 오징어 다리와 당근, 양파, 부추, 숙주 등을 잘게 다진 뒤 찹쌀밥이나 으깬 두부 등을 섞어 양념한 소를 만든다. 오징어 몸통 속에 만들어진 소를 채워 넣고 입구를 꼬치로 봉한다. 오징어 몸통 곳곳을 바늘로 찔러둔다. 내용물이 팽창하면서 오징어가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또 익으면서 생긴 수분이 밖으로 흘러나와 순대 속과 오징어 몸통이 분리되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순대는 김이 오른 찜통에 15분 정도 쩌 낸다. 울릉도에서는 오징어의 내장으로 순대를 만들기도 했다. 오징어 내장 중에서 먹통만 떼어내고 다른 내장을 남긴 채 뱃속에 고추, 당근, 쪽파, 양파 등을 다져 넣은 뒤 묶어서 쪄냈다. 생오징어로 만든 오징어순대는 강원도 해안이나 울릉도 지방의 향토 음식이지만 생오징어를 구할 수 없었던 옛날 경기도 지방에서는 마른 오징어로 순대를 만들기도 했다. 마른 오징어를 불린 뒤 물기를 없애고 밀가루에 파, 마늘, 참기름, 설탕, 간장을 섞어 반죽한 것을 바른 다음 돌돌 말아 실로 꽁꽁 묶어서 찜통에 쪄냈다. 울릉도에서는 오징어 내장탕뿐만 아니라 오징어의 살과 야채를 넣고 끓인 국도 있다. 오징어국은 생오징어와 마른오징어 모두가 사용된다. 오징어 내장이 주로 국 끓이는 재료로 이용된 것은 몸통은 상품으로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유가 있는 집은 오징어 몸통으로도 국을 끓였다. 울릉도 뿐만 아니라 내륙에서도 옛날부터 건오징어와 생오징어 모두 국으로 끓여 먹었다. 그래서 1809년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말린 오징어는 물에 불려 썰어 닭 속에 깻국을 탕하여 잣 띄워 여름에 쓰면 먹음직스럽다”고 건오징어 요리법을 소개한다. △ 1830년대 농정회요에도 오징어 요리 기록 있어 1830년대에 최한기가 편찬한 ‘농정회요農政會要’에도 “오징어의 흰 살점을 썰어 볶아 국을 만든다. 달궈진 솥에 기름과 술을 두르고 오징어를 재빨리 볶아 5~6할 가량 익혀낸다. 기름, 간장, 물과 재료를 솥에 넣고 끓어오르면 오징어를 넣고 조금 더 끓인다. 역시 참깨즙을 뿌려 올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징어국은 먼저 적당한 양의 물에 무를 넣어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넓적하게 자른 오징어를 넣는다. 거기에 콩나물, 매운 생고추, 마늘 등 갖은 양념을 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기호에 따라 고춧가루를 넣기도 한다. 울릉도 토속 오징어 요리 중에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오징어 잡채도 있다. 내륙에서는 잡채를 만들 때 고명으로 고기를 넣고 만들지만 울릉도에서는 홍합이나 오징어 등 해산물을 이용했다. 그중 가장 흔하고 대중적이면서 비리지 않은 생선인 오징어를 재료로 만들어 먹었던 것이 오징어 잡채다. 오징어 잡채는 일반적인 잡채 재료에 고기 대신 오징어를 주재료로 하고 홍합을 사용하는 점만 다르다. 오징어 2마리 기준으로 잡채를 할 경우 부재료는 조선 홍합 4개, 당면 200g, 풋고추 4개, 당근 1개, 마늘, 파 약간, 식용유, 간장, 설탕, 깨소금, 참기름 등이다. 더러 부추를 넣기도 한다. 오징어는 껍질을 벗기고 끊는 물에 데쳐 4cm정도 길이로 썬다. 홍합은 어슷하게 저민다. 당면은 삶아둔다. 후라이팬에 파, 마늘을 볶다가 오징어, 홍합과 풋고추, 당근 등 야채를 넣어 함께 볶아낸다. 당면은 따로 볶다가 간을 한 다음 오징어, 홍합, 야채 볶음과 섞은 뒤 깨소금, 참기름을 첨가해 완성한다. 오징어홍합 꼬지도 울릉도만의 특별한 토속 음식인데 오징어와 홍합을 꼬챙이에 끼워 구운 산적이다. 각 지역마다 고기나 홍합, 바지락, 대합 등의 조개나 전복, 소라 등을 대나무 꼬챙이에 꽂아서 굽거나 말려서 먹는 꼬지 요리가 있다. 낙지를 꼬챙이에 말아서 구워 먹는 낙지꾸리도 꼬지 요리의 일종이다. 내륙에서는 주로 고기를 이용하는 반면 해안이나 섬 지방은 해산물을 꼬지 요리에 활용했다. 울릉도에서는 옛날에 흔했던 수산물인 오징어와 토종 홍합을 이용해 꼬지 요리를 만들어 명절이나 제사상에 올렸다. 오징어는 생물을 두툼하게 자르고 홍합은 삶아서 껍질과 알을 분리한 뒤 물기를 뺀다. 대나무 꼬챙이에 오징어와 홍합을 번갈아 끼운다. 꼬지가 만들어지면 후라이팬에 참기름을 살짝 두른 뒤 구워내면 완성된다. 단순해 보이는 오징어 하나에도 이토록 많은 요리가 깃들어 있다. 울릉도가 보전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5-12-03

위기의 식물원 살려낸 은혜 갚는 낙우송 3父子

카톡으로 보내온 이삼우 원장님의 기청산식물원 동영상을 보고 불현듯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 포항 기청산식물원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원장님께서 지난 11월 8일 개통된 포항-영덕 동해안 고속도로 한번 자동차로 달려보고 싶다고 하셨다. 월포․청하 IC를 통하여 영덕 방향으로 향했다. 창밖의 동해 풍경을 즐기도록 천천히 운전했다. 그러자 원장님께서 고속도로는 쾌속의 재미도 있다며 빨리 달리기를 원했다. 영덕에서 되돌아서 고속도로 ‘포항휴게소’에 들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창밖으로 내다본 동해 뷰는 정말 환상의 풍경이었다. 바다의 경관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과 몸이 힐링 되었다. 식사를 끝내고 곧장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월포, 청화 IC를 빠져나와 기청산식물원에 도착했다. 오늘 함께 기청산식물원을 관람하기로 약속한 진원대 전 구룡포 읍장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기청산식물원을 오늘날까지 꾸미고 가꾸어 온 주인공은 바로 이삼우 원장이다. 그는 온화한 성품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임학과를 나온 전문 나무 사랑꾼이다. 졸업 후 바로 소년 시절의 꿈을 찾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1968년 청하중학교 재단 농장 관리인으로 부임하여 과수 농업을 하면서 독자적으로 농장을 확장하고서 향토 고유 수종 연구개발 보급 테마로 하는 기청산식물농원을 설립하였다. 지금까지 일평생을 나무와 인연을 맺고 나무와 함께 익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 그는 정원의 나무와 닮아 있었다. 나무 백과사전과 같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원장님과 함께 우리는 정원 숲의 가을 정취에 빠졌다. 이삼우 원장은 차향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기청산식물원의 존재 이유를 들려주었다. 식물을 배우는 일은 곧 자연을 이해하는 일이며, 자연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이 다시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깨우치는 길이라는 그의 말은 오래된 진리처럼 가슴에 스며들었다. 식물원은 이 땅 고유의 자생종을 연구하고 되살리며, 희귀하고 멸종위기에 놓인 생명들을 서식지 밖에서 보듬어 지키고, 다양한 전시와 문화 행사를 통해 식물의 언어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묵묵한 시간의 숲이었다. 원장님은 이곳을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한국적이며, 무엇보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숲”으로 만들고자 했다.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하로 175길 50번지 기청산식물원 울타리 안은 아직도 가을을 붙잡고 있었다. 단풍 든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세상과는 달리 아직도 감태나무의 붉은 단풍잎,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 풍향수의 푸른 잎이 어울려 정원의 숲은 아름다운 세계를 연출했다. 아름다움은 모두가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자연 숲의 느낌이었다. 정원 숲은 마음과 몸을 힐링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나무와 교감은 아픔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힐링의 손길이 가슴을 쓰다듬어준다. 우리의 날숨 공기는 나무가 들숨으로, 나무의 날숨 향기는 우리의 들숨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연인의 입맞춤과 무엇이 다르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나무 특유의 치료 향기를 나누어 준다. 기청산식물원은 토종의 다양한 식물로 구성된 인공 정원이었으나 이제는 그들 스스로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 정원으로 변모했다. 대나무 울타리를 배경으로 언덕배기에 우뚝 서 있는 장엄한 낙우송 3 부자(父子)는 키 15미터, 몸 둘레 3.5미터의 거목으로 식물원의 가장 오래된 존재이었다. 마치 ‘정원의 왕(king tree)’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움은 물론 장중한 품위까지 지녔다. 샘물이 흐르는 골짜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지면 위로 밀어 올려 호흡근을 키운 모습은 하나의 신화적 풍경이다. 땅 위로 솟아난 뿌리들은 오백나한이 수행을 위해 모여든 듯 기묘한 형상을 이루고, 그 앞에 서면 식물의 생명이 얼마나 영묘한 방식으로 뿌리에서부터 호흡하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멀리서는 메타세쿼이아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잎이 어긋나고 가지가 수평으로 뻗는 낙우송만의 세계가 드러난다. 미국 미시시피강 습지에서 시작된 그 원형질은 깊고 오래된 생명의 지혜를 품고 있다. 그러나 낙우송 3 부자(父子)는 생태학 이상의 이야기, 인간과 나무가 주고받은 소박한 기적이 숨어 있다. 한때 이곳의 땅은 식물원 소유가 아니었고, 주택단지 공사가 시작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굴착기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원장님은 공사를 멈추게 하고 빚을 내어 토지를 사들였다. 무거운 이자에 지치던 어느 날, 그는 나무 앞에서 넋두리처럼 고단한 속을 털어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가 방송에 소개되면서 뜻밖의 수익이 생겨 1년 치 이자가 모두 해결되었다. 그 후로 원장님은 낙우송을 ‘은혜 갚는 나무’라 부르며 매년 막걸리 한 사발을 올린다. 세월을 견딘 생명의 의지, 생태적 원리, 그리고 인간과 나무 사이에 흐르는 조용한 인연까지, 기청산의 낙우송 3 부자는 그 모든 이야기를 고요한 몸짓으로 품고 서 있다. 정원 숲길에 첫 발을 들이는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온 새소리가 은은한 경음악처럼 발끝을 따라붙는다. 그 소리는 마치 숲이 오랜 침묵 위에 올려두었던 서곡(序曲) 같아, 한 걸음 한걸음에 부드러운 숨결을 더한다. 나무 사이로 어린 햇살이 비스듬히 흘러내리면, 길 위에 흩어진 낙엽들은 발바닥의 가벼운 압력에 응답하듯 제 나름의 음계를 토해낸다. 높고 낮고, 길고 짧은소리들이 켜켜이 겹쳐, 숲의 자연 화음에 하나의 목관악기가 새로 참여한 듯한 깊이를 만든다. 낙엽을 밟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스며들 때, 새들의 짧은 기척과 바람의 숨결은 다시금 한데 더해져, 숲은 더없이 정교한 즉흥곡으로 변모한다. 정원의 나무들은 그 음악의 무대 뒤에서 천천히 호흡하며, 피톤치드의 향을 내어 마치 악보의 여백처럼 공기를 정화한다. 나뭇잎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숲에서는 하나의 섬세한 악절이 된다. 때로는 물결처럼 멀리서 미묘한 저음을 보내오고, 가지 끝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작은 새의 기척은 곡 마지막에 찍히는 가느다란 쉼표처럼 흘러간다. 숲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과 나 사이의 경계가 천천히 풀어지고, 발걸음은 음악의 일부가 되어 숲과 함께 호흡하기 시작한다. 꽃 앞에 멈추면 마음은 꽃의 색채를 닮아 단정해지고, 나무 아래 서면 마음속 오래된 그림자마저 제 자리를 찾아간다. 숲이 들려주는 이 음악은 치유의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오히려 존재의 본래 리듬을 되돌려주는 회복의 예술처럼 느껴졌다. 정원의 숲을 빠져나오기까지 여전히 발목을 스치며 따라오는 새소리와 낙엽의 여운 속에서 문득 깨닫는다. 치유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새 한 마리의 노래와 낙엽 한 장의 울림이 한 몸처럼 흐르는 이 숲길 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몸은 알고 있다. 정원의 낙우송과 숲의 감동 여운을 안고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을 빠져나왔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기청산식물원은… 기청산식물원은 자연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자생식물 중심으로 꾸며진 독특한 식물원으로, ‘쇠솔이 흐르는 천년의 숲’처럼 조성되어 명상과 치유를 위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환경부가 지정한 서식지 외 보존기관이기도 해서, 울릉도를 비롯해 경상도 지역의 희귀하고 멸종위기 식물을 20년 넘게 조사하고 보전해 왔다. 식물원 내부는 자생식물 전시원, 울릉식물 관찰원, 약용식물원, 수생식물원, 향기식물원, 희귀종 전시원 등 여러 테마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생식물의 다양성을 사계절 내내 감상할 수 있다. 전화 054-232-4129. 개장 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겨울철은 5시) 매주 월요일은 휴원. 식물 해설 및 안내 제도 운영.

2025-12-03

1970~80년대 전성기 재현 ⋯ 수온 상승에 어장 북상 ‘귀하신 몸’

△ 오적어로 불리던 오징어 어획량 줄어 오징어는 울릉도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제는 동해바다 오징어의 씨가 말라 울릉도에서도 오징어 구경하기가 어렵게 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 연평균 1만톤을 유지하던 어획량이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447톤으로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오징어는 한때 명태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수산물 1-2위를 다투던 수산물이다. 그런데 바다 수면에서는 오징어를 쉽게 볼 수가 없다. 오징어는 낮 동안에는 수심 200~300m 지대에 살다가 밤에만 20m-50m 안팎의 수심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오징어는 주광성이라 빛을 찾아 모여든다. 오징어 배가 집어등을 걸고 조업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징어는 타우린의 함량이 다른 어패류에 비해 2-3배나 많고 단백질 함량이 수산물 중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오징어의 옛 이름은 오적어(烏賊魚)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그 연유가 나온다. ˝남월지(南越志)에서 이르기를 그 성질이 까마귀를 즐겨 먹어서, 매일 물 위에 떠 있다가 날아가던 까마귀가 이것을 보고 죽은 줄 알고 쪼면 곧 그 까마귀를 감아 잡아가지고 물속에 들어가 먹으므로 오적(烏賊)이라 이름 지었는데, 까마귀를 해치는 도적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오징어는 전 세계에 450~500종. 우리나라 연안에는 8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징어 중 가장 큰 것은 대왕오징어류인 대양대왕오징어(Architheutis harveyi)로 대서양에 사는데 길이가 15.2m에 이르고 가장 작은 종인 애기오징어류는 1.6cm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살오징어·갑오징어·무늬오징어·반디오징어·쇠오징어·화살오징어·창오징어·흰오징어 등이 있다. 울릉도에서 잡히는 오징어는 살오징어다. 일반적으로 몸속에 석회질의 갑라(甲羅)가 들어 있는 종류는 갑오징어라 부르고 얇고 투명한 연갑(軟甲)이 들어 있는 종류는 오징어라 한다. 참고로 오징어 다리는 10개 문어 다리는 8개다. 울릉도 살오징어는 다리를 포함한 몸통 길이가 보통 30cm 전후인데 성장 속도가 빠르고 붙박이가 아니라 회유성 어종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1만톤 어획 최근 4년 동안 447톤으로 급감 가장 좋은 서식 수온은 12~18℃ △ 울릉도 오징어잡이 가짜 미끼 어업서 기원 오징어의 산란은 여름, 가을, 겨울 여러 차례 이루어지며 주 산란장은 동중국해 중북부 해역이다. 가장 좋은 서식 수온은 12~18℃이다. 수컷은 교접 후, 암컷은 산란 후에 쇠약해져 사망하는 1년생이다. 오징어는 여름, 가을, 겨울에 동중국해 중북부 해역에서 산란 부화 되어 동해 및 대화퇴와 황해로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하는 회유 과정에서 계속 성장 소멸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7월에서 다음 해 2월 사이 집중적으로 어장이 형성된다. 오징어는 냉동 보관이 아닐 경우 1~2일 경과하면 나쁜 맛과 냄새를 유발하는 물질인 휘발성 염기질소와 비린내의 주성분인 트리메탈아민 등이 생성되어 향과 맛이 나빠진다. 건오징어의 단백질 함량은 쇠고기의 3배 이상이다. 한때는 울릉도 수산물 판매액의 96%가 오징어였던 적도 있다. 울릉도에서는 1902년부터 본격적인 오징어잡이가 시작됐는데 오징어잡이 전성기였던 1910년대에 일본인들이 울릉도로 대거 이주해왔다가 쇠퇴기인 1930년대에는 대부분 떠났다. 그래서 울릉도 오징어 어업이 일본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울릉도독도연구기지 김윤배 대장의 주장에 따르면 울릉도 오징어잡이는 조선시대 남해안에서 성행하던 가짜 미끼 어업에서 기원한 것이다. 1900년대 이전에는 수온이 너무 차가워 동해안에 오징어 어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때마침 1900년대 들어 일본이 우리 어장을 침략해 조업할 때 마침 수온 조건이 맞아 동해에서도 오징어 조업이 성행했을 뿐이다. 울진군지에도 ”동해안의 선박은 울릉도 출신의 한희원이라는 사람이 조선 선박과 일본 선박의 장점을 결합해 만든 선박“ 이라는 기록이 있다. 울릉도 전통 오징어잡이 어선도 우리의 조선 기술에 일본 어선의 장점을 취해 만들었다. 어법 또한 남해안 오징어 잡이 어법에서 유래했다. 그러니 울릉도 오징어잡이가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다. 2004년 북중 공동어로 협약후 동해 북쪽 어장의 중국 어선들 연간 10만톤 싹쓸이도 큰 타격 △ 동해 표층 수온 급격한 상승, 울릉도 어장 쇠퇴 오징어가 명태와 함께 다시 전성기를 구가한 것은 1970-1980년대다. 울릉도 또한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그래서 1974년에는 울릉도 인구가 2만9810명이나 됐다. 지금은 3분의 1인 1만여 명 내외로 줄었다. 1970년대 후반 울릉도 인구의 64%가 수산업에 종사했는데 현재는 10% 내외에 불과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오징어잡이 쇠퇴가 시작되어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것이 인구 감소의 원인 중 하나다. 울릉도 바다에서 오징어는 왜 사라졌을까? 울릉도 오징어의 주어종인 살오징어는 다년생인데 가을에 동중국해와 일본의 동쪽 연안에서 태어나 대마 난류를 타고 동해로 와서 성장한 뒤 산란장으로 되돌아가 산란 직후 일생을 마친다. 그런데 동해 표층 수온의 급격한 상승으로 9월에도 수온이 27~28도에 이르고 있다. 살오징어는 섭씨 12-18도에서 어장을 형성하는데 이 수온대가 울릉도 먼바다로 북상하게 된 것이 울릉도 오징어 어장의 쇠퇴를 가져왔다. 표층과 중층의 온도 차가 커지면 영양염의 순환이 약화되고, 먹이 망 자체가 붕괴된다. 수온 상승으로 먹이가 없어지니 오징어가 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기후 위기가 울릉도에서 오징어를 사라지게 한 가장 큰 원인이다. 거기에 더해 2004년 북 중 공동어로 협약 이후 동해 북쪽 어장에서 중국 어선들이 연간 10만 톤이 넘는 오징어를 싹쓸이 하는 것도 울릉도 오징어잡이에 심대한 타격을 미치고 있다. 최상품 마른 오징어는 거무스름한 빛깔에 윤기가 흐르고 황금빛이 난다. 또 다리 빨판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당일 잡아 바로 말린 오징어를 당일바리 오징어라 한다. 배에서 잡아 말린 것이라 배오징어라고도 한다. 갓 잡아 펄떡 뛰는 싱싱한 오징어를 내장은 제거한 뒤 물에 씻어 배에서 바로 줄에 걸어 말린 오징어다. 워낙 귀해서 상품으로 만나기는 어렵다. 대부분 어민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줄 선물용으로 말린다. 마른 오징어는 하얀 분이 피어 있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분이 피었다는 것은 그만큼 공기와 접촉이 많았다는 뜻이다. 즉 말린지 오래됐다는 의미다. 그래서 옛날 냉장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는 공기와 접촉을 줄이기 위해 말린 오징어를 담요 등으로 덮어서 보관하기도 했다. 저동항은 울릉도 오징어잡이 어업 전진기지다. 저동에는 울릉도 오징어잡이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1980년대 초 2기가 설치된 수협 제빙 공장 앞의 펭귄 조형물이다. 촛대바위와 함께 40년 동안 저동의 랜드마크였다. 수협 제빙 공장에서 생산된 얼음을 어선에 공급하는 9m 높이 주탑이다. 과거 울릉도의 전성기 때는 얼음 공급을 받기 위해 이 펭귄 조형물 앞에 길게 줄을 선 어선들 풍경이 울릉도의 풍요를 상징했다. 이 펭귄 구조물이 ‘저동 다기능항 공사’ 예정지에 포함되면서 철거위기를 맞게 됐다는 소식을 독도문방구 김민정 대표의 sns를 통해 알게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펭귄 조형물은 울릉군수협 소유물이다. 어선에 냉동고가 없던 시절 어선들이 원양 조업할 때 오징어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펭귄 조형물을 통해 얼음을 공급받고 출항했다. 울릉도 오징어잡이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귀한 조형물이다. 김민정 대표의 공론화 덕에 펭귄 조형물은 보존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니 다행스럽다. 포항 해수청은 울릉도 오징어잡이의 상징인 펭귄 조형물을 반드시 보존시켜야 마땅하다. 어항이란 어촌의 현재와 미래 뿐만 아니라 역사도 담아야 한다. 그러니 울릉도 오징어잡이 역사의 상징물을 없애고 만든다면 다기능 어항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2

무침· 김밥·월남쌈까지…다채로운 ‘과메기 요리’

과메기의 재료가 되는 건 꽁치다. 한국의 재래시장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생선. 몸은 가늘고 길며 양턱은 돌출해 새 부리와 비슷하고, 아래턱이 위턱보다 긴 것이 특징이다. 등지느러미는 10~12줄, 뒤쪽에 곁지느러미 6~7개가 있다. 한류성 어류이며 우리나라 인근에선 5~8월쯤 알을 낳는다. 주된 먹이는 동물성 플랑크톤. 싱싱한 꽁치를 굽거나 김치를 넣어 함께 조린 요리는 누구나 좋아하는 반찬이고, 토막을 내 쪄서 통조림으로도 만든다. 꽁치를 반쯤 말려 먹는 게 바로 과메기다. 숙성 과정에서 감칠맛이 더해져 겨울철 별미로 손꼽히는 음식. 과거엔 꽁치나 청어를 반으로 가르지 않고 통째 말려 둘러앉은 식구들이 손으로 쭉쭉 찢어가며 먹었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추운 계절에 먹는 과메기는 천연 단백질 보충제 역학을 톡톡히 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과메기의 요리법도 다양해졌다. 마늘과 파를 넣어 미역이나 상추에 싸서 초장에 찍어 먹는 ‘클래식한 방식’ 외에도 과메기 섭취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과메기 무침은 푸릇푸릇한 미나리와 각종 양념을 더해 매콤하게 만든다. 입맛 없을 때 밥과 함께 먹으면 더없이 좋은 반찬이 된다. 과메기 김밥은 말 그대로 과메기로 속을 채운 스타일의 김밥이다.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잘 맞추면 괜찮은 일품요리가 된다는 것이 요리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취향에 맞는다면 라이스페이퍼에 과메기와 파프리카 등의 채소를 함께 싸먹는 월남쌈 형태의 요리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추장으로 얼큰하게 비벼낸 국수에 과메기를 섞어 ‘과메기 소면’을 즐기는 사람도 없지 않다고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02

‘귀한 손님’ 과메기와 함께 포항에 겨울이 왔다

세칭 ‘코로나19 사태’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던 2022년 여름이다. 어렵사리 섭외한 인터뷰를 몇 회에 걸쳐 진행했다. 10대 때부터 뱃일로 잔뼈가 굵은 80대 후반 어르신은 대게, 킹크랩, 오징어, 청어, 거기에 포경선을 타고 고래까지 잡으러 다녔던 이야기를 신명나게 들려줬다. 경상북도 포항 사람들의 겨울철 별미 ‘과메기’도 나와 어르신이 나눈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과메기의 유래에 관해선 원체 여러 가지 설(說)이 중구난방으로 떠도는 탓에 누구도 “이게 맞고, 저건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다. 여하튼 아래 그날 들었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옮긴다. “내가 젊을 땐 요 앞 동해에 청어와 꽁치가 넘쳐났다 아이가. 원체 싼 물고기라 그물에서 뗄 때도 신경 안 쓰고 ‘툴툴’ 아무렇게나 털었거든. 그라믄 어떻게 되겠나? 그물에서 튕겨나간 청어나 꽁치가 눈에 잘 안 띄는 배 갑판 구석이나 선장실 지붕에도 몇 마리 떨어질 것 아이겠나. 그 생선이 추운 날 밤에는 얼었다가, 해가 뜨면 녹았다가를 수차례 반복한다 아이가. 어느 날 선원 한 사람이 반쯤 건조된 그걸 먹어보고는 깜짝 놀란 거라. 생각 외로 맛이 꽤 좋았거든. 허허허.” 이상이 어르신이 주장하는 과메기 섭식의 출발점이다. 포항에서 생활한 지 10년. 이외에도 과메기의 유래에 관한 여러 건의 풍문을 거창한 ‘탄생 설화’처럼 들었다. 다 나름대로 일리 있고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그 출발이야 어찌됐건 과메기는 이제 포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음식이 됐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과메기 거의 대부분이 건조·숙성되는 구룡포엔 12월이면 말린 꽁치나 청어의 말랑한 식감을 느껴보려는 여행객들이 왁자지껄 몰려든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포항엔 과메기를 안주로 내세운 주점이 적지 않다. 사람에 따라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혹자는 물미역에 과메기 한 점을 넣고 채 썬 마늘과 파를 올린 ‘삼합 스타일’을 최고라 하고, 어떤 이는 산양삼 한 뿌리를 곁들여 먹는 것으로 과메기의 고급화를 도모한다. 드물게는 “과메기는 아무 것도 더하지 않고 본연을 맛을 즐겨야한다”며 말린 꽁치만을 먹기 좋게 찢어 입에 넣는 모주꾼도 존재한다. 관목어(貫目魚)라는 단어가 있다. 예전 과메기는 청어의 눈에 꼬챙이를 꽂아 그을음 피어오르는 재래식 부엌에서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뚫을 관(貫), 눈 목(目), 고기 어(魚)자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청어를 말려 먹은 건 수백 년 전에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이규경의 책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엔 ‘연관목(燃貫目)’이 등장한다. 눈을 뚫은 생선은 청어고, 연기를 사용해 부패를 더디게 했다는 제조 방식까지 드러나고 있는 것. 야담(野談)이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水軍)들은 일본과의 전투 이상으로 ‘청어잡이’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당시 바다엔 엄청난 양의 청어가 서식했다. 그걸 잡아 병사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피난민에게도 나눠 주고, 잡힌 생선의 일부는 팔아서 칼과 창, 화약 등의 무기를 구입했다고. 그러니 16세기 조선 수군은 해군과 어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고난 속에서 살았다고 해야 할까? 세월이 흘렀다. 직접 청어나 꽁치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돈만 주면 집에 앉아서 과메기를 먹을 수 있는 21세기가 왔다. 포항엔 과메기와 함께 쌈채소, 물미역, 초장까지를 깔끔하게 포장해 주문 다음날이면 집까지 가져다주는 업체가 흔전만전이다. 지난 주말 저녁. 올해 첫 과메기를 친구와 함께 먹었다. 16가지 재료를 배합해 만든다는 ‘비법 초장’이 맛있는 가게였다. 이건 빼먹은 이야긴데 과메기의 맛은 찍어 먹는 초장에 좌우되기도 한다. 비법 초장 듬뿍 찍은 과메기를 안주로 소주 한 병쯤을 달게 비우고 나니 동해에 겨울이 왔다는 게 실감으로 느껴졌다. 그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시절을 떠올리며 찬바람 부는 영일대 해변을 오래 산책했다. 어디선가 청어 비린내가 풍겨온 듯도 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