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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오징어?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잡히는 개체수가 많을 때는 군대나 학교의 단체급식 반찬으로도 흔하게 올랐다. 국을 끓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채소와 함께 고추장 양념에 볶아도 인기가 좋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에도 ‘오징어OO’이란 이름이 붙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시기가 되면 동해엔 환하게 불 밝힌 집어등(集魚燈)을 매단 어선이 수백 척 떠다녔다. 오징어는 빛을 발견하면 모여드는 성질을 가졌기에 그런 어획 방식이 사용됐다. 바다 위에서 빛나는 집어등 불빛이 인공위성에서도 관찰될 정도였다. 지금은 어획량이 줄어 이전처럼 ‘심심풀이’로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된 오징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냉동된 오징어를 해동해 끓는 물에 데쳐 먹는 숙회는 오래전부터 주당들이 즐기는 안주였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오징어를 칼질 솜씨 좋은 횟집 주인이 썰어낸 산오징회는 식감이 일품이다. 몸통이 아닌 다리는 기름에 튀겨 고소하게 먹는다. 무, 파, 마늘 등을 넣어 칼칼하게 무치면 그 또한 색다른 맛을 낸다. 달콤짭짤하게 볶아낸 오징어는 아이들이 너나없이 좋아하고, 삼겹살과 함께 철판에 구워먹는 오삼불고기도 소박한 주점의 인기 메뉴 중 하나다. 오징어순대와 오징어 버터구이 역시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많은 한국인들이 땅콩과 곁들여 먹는 마른오징어.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미권 국가에선 이걸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를 구울 때 나는 냄새를 끔찍스럽게 여기는 탓이라고. 그럼에도 유럽 대다수 나라는 우리처럼 오징어 요리를 즐긴다. 남부 유럽 사람들은 오징어에 올리브유를 발라 구워 먹고, 오징어 먹물을 파스타에 넣기도 하는 것. 이처럼 오징어는 몇몇 국가를 제외한 동서양 모두에서 사랑받는 식재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8

그 섬에서 ‘오징어내장탕’을 먹어봤더니…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1980~1990년대 대학생들은 캠퍼스 잔디밭에서 곧잘 술판을 벌이곤 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인이던 사람들이 권력을 탈취해 권위적인 공포 통치를 이어가던 끝 무렵. 머리칼조차 마음대로 기를 수 없는 경직된 고교 시절을 보낸 학생들은 대학 입학의 해방감과 거기서 느끼는 자유를 ‘대낮 만취’라는, 어른들이 보기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끽하곤 했다. 그들 대부분이 철없던 스무 살 시절이었으니 있을 수 있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막걸리를 마실 때면 과자 부스러기가 안주였고, 소주를 마실라치면 마른오징어 한두 마리가 신문지를 깐 잔디밭 위에 놓였다. 쫄깃한 식감과 짭짤 고소한 맛의 오징어 한국인이라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호오(好惡)가 거의 갈리지 않는 식재료 울릉 별미 중 기억에 남은 ‘오징어내장탕’ 하얀 내장·콩나물 등 넣어 맑게 끓인 탕 혀 위로 부드럽게 녹아들던 내장이 생생 취기가 오르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 속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라는 염세적인 노래를 부르는 애들이 있었고, 또 다른 쪽에선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라는 비장한 가사가 들려오기도 했다. 어쨌건 그 시절엔 오징어가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을 만큼 값싼 안주였다. 많지 않은 아버지의 월급으로 내핍하며 살림하던 엄마도 냉동오징어 정도는 넉넉하게 사서 숙회를 만들거나, 찌개나 국을 한 냄비 가득 끓여 밥상 위에 올리곤 했으니까. 그때 학교를 다니던 세대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살아있는 오징어를 재빠른 칼질로 썰어낸 산오징어회와 따끈한 내장과 먹물까지 맛볼 수 있는 통오징어찜도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들 역시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의 만만한 안주 역할을 했다. 오징어는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과 짭짤하고 고소한 맛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렇기에 호오(好惡)가 거의 갈리지 않는 식재료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라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가릴 것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된 오징어를 즐겨 먹는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징어의 어획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바다 오염과 기후 변화가 이유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중국 어선들의 싹쓸이 조업으로 씨가 말랐다”는 말도 들려왔다. 실제로 그랬다. 몇 해 전 특정한 기간엔 산오징어회의 가격이 고가로 이름 높은 돌돔회 시세에 육박했다. 말린 오징어 한 축이 쌀 한 가마니 가격을 위협하던 때도 있었다. 오징어 값은 요즘에도 등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비싸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오징어 좋아하는 이들에겐 ‘굿 뉴스’가 분명하다. 동해가 지척인 도시 포항에서 생활하는 기자와 동료들은 가까운 어시장이나 해변에 즐비한 횟집에서 가끔 오징어물회를 맛보고 있다. 다른 어떤 생선으로 만든 물회보다 감칠맛이 좋다. ‘오징어’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쌍둥이 형제처럼 같이 떠오르는 섬이 있으니 바로 ‘울릉도’다. 55년을 살아오며 울릉도는 딱 한 번 가봤다. 울릉도 해안 일주도로가 완공된 2019년이었고, 버스를 이용해 울릉도를 한 바퀴 돌아본 후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취재를 마친 후 이틀쯤 더 울릉도에 머물렀다. 그때 따개비밥과 약소불고기를 시작으로 어지간한 울릉도 별미는 대부분 맛봤으니 운이 좋았다. 그 기간 먹어본 울릉도 음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오징어내장탕’. “내장을 많이 넣어 끓여야 제맛이 나기에 1인분은 만들기 어렵다”는 식당 주인을 억지로 구슬려 먹었던 요리. 하얀 오징어 내장과 콩나물, 무, 애호박 등을 넣어 맑게 끓인 탕이었다. 맛은 어땠냐고? 식당 주인의 말이 맞았다. 애초 기대했던 구수함과 눅진함은 없었다. 전문가의 말은 틀리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그럼에도 오징어의 내장이 혀 위로 부드럽게 녹아들던 느낌은 생생하다. 만약 다시 한 번 울릉도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친구들 여러 명과 동행해 내장이 듬뿍 들어간 제대로 된 오징어내장탕을 먹어보고 싶다. 2019년에 맛본 것과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진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8

‘협조’ 넘어 법적 권한 부여한 국가 차원 ‘통합지휘 체계’ 필요

지난 3월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등에서 발생한 영남권 산불이 발생하면서 신불 진화 체계에 대한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산불 진화 체계 문제에 대해 “대통령실에서 역점을 두고 정비 중”, “산림청, 소방청, 지방정부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통합 지휘체계를 운영하며 산불 발생 시 일사천리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평소 산불 예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대형 산불로 번졌다고 진단한 뒤 해외 산불 대응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한국형 산불대응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통합 지휘체계 필요…“명령체계 가까운 법적 권한”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통합 지휘체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지성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산림청과 소방청 등으로 나뉜 산불 대응 체계가 초동 진화에 혼선을 불러왔다”며 “재난안전관리법과 산림보호법 등 법령을 일치시켜 지휘체계에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고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산불방지센터에 인력과 장비 동원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산림청, 소방청, 국방부, 지자체가 사전 협약에 따라 지원 공유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현행 ‘협조’ 체계를 ‘명령’에 가까운 법적 권한으로 격상시키는 국가 차원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고기연 한국산불학회장은 “사무실에 자리한 컨트롤 타워는 현장을 통제하기보다 법적 지휘권자인 자치단체장 임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대응 과정에서 일관성이 유지되고 참여기관간 역할 분담이 명확히 나뉘도록 중앙기관은 지원 기능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국가산불센터(NIFC·National Interagency Fire Center)와 같은 통합 지휘 체계와 함께 한국 특성에 맞게 ‘현장 중심 지휘체계’도 마련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고 회장은 “NIFC 기능에 더해 미국 산불 사고지휘시스템(ICS·Incident Command System) 코디네이션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ICS는 대형산불 발생 시 여러 기관 간 대응 실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표준화된 현장 지휘 관례 체계다. 그는 또 “산림청과 산불과 관련된 예방, 진화에 필요한 정보 체계는 상황실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기에 NIFC를 참조할 만하다. NIFC 내 각 기관 대표가 참여하는 국가 다기관조정그룹(NMAC·National Multi-Agency Coordinating Group)은 현장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되고 있다”며 “코디네이션은 산불이 일어났을 때가 아니라 그 전에 대응 기관별 교육 훈련 등을 강력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NIFC는 대형 산불이 발생하면 NMAC 조정 아래 기관 대표들이 헬기, 진화 인력, 장비 배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진화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변화 특히 진화 중심 대응 시스템에서 예방 대응 시스템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포르투칼과 캐나다는 ‘산불은 반드시 발생한다’는 전제로 예방과 피해 최소화 전략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진화 중심, 사후 복구 중심 구조에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국외 사례와 마찬가지로 장기적으로 진화중심에서 예방·피해 최소화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며 “주택 방어, 주민 교육, 산림 구조를 바꿔 화재 및 피해를 낮추는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산불 발생 전 연료관리 등 위험 요인 제거와 산불 감시·예찰 인원을 확충해 예산을 우선 배정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고 회장도 형식적인 재난 대응 훈련이 아니라 초대형 산불에 대비한 실제적인 예방 훈련이 이뤄져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불이나 침수 피해 관련, 좋은 장비와 통신 시스템이 있다 해도 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된 대응이 되지 않거나 사고가 더 커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서 “평소 실전과 같은 훈련, 연습이 있어야 실제 상황에서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캐나다의 파이어스마트(FireSmaet) 프로그램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산불 예방에 있어 ‘주민참여형 연료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파이어스마트는 캐나다 전역 산불 위험을 줄이고 지역사회 산불 탄력성을 높이고자 고안된 종합프로그램이다. △교육 △식생 관리 △법률 및 계획 수립 △개발 시 고려사항 관리 △주택과 기반시설 생존 가능성을 높일 개발 규제 도입 △기관 간 협력 △교차 훈련 △비상계획 수립 등 7가지 핵심 원칙 하에 운영되고 있다. 이는 각 지역 파이어스마트 코디네이터와 지역 대표 등이 주도하고 실행한다. 포르투칼 역시 시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산불통합지휘기관인 AGIF를 중심으로 예방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집 주변과 거주지를 관리하는 공동체 기반 구조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각 마을 단위에 직접 화재 위험 줄이기 위한 노력을 주민 주도로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안전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이와 관련, 이 연구위원은 “주민이 주도적으로 집 주변을 안전하게 만들고, 지자체가 지원하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며 “주민과 지자체가 공동으로 연료 제거, 주택 방어 등을 계획하고 모의 훈련을 실행 등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산불 위험도가 높거나 과거 산불 피해가 높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캐나다와 같은 파이어스마트 시범 사업 추진도 좋은 방향으로 판단된다”면서 “또 주민이 집 인근지역 산불 위험요인을 신고하고, 지자체가 즉각 대응하는 커뮤니티 기반 경보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른바 ‘한국형 파이어스마트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고 회장도 “산불방지학은 불이 일어나는 3요소로 화원, 연료, 기상을 꼽는다. 숲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현실에서 화원과 기상은 대처가 어렵다 해도 연료 관리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불이 붙지 않고 또 불이 번지더라도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불의 매개와 사람이 사는 공간을 이격하는 등 평소에도 관리를 하면 좋은데 한국은 관련 정책 제도가 미흡하다. 연료를 평상시 관리하지 않는 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당국의 임무 소홀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무엇보다 주민들이 산불 경각심을 알리고 연료 관리에 참여하는 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하다”며 “캐나다의 파이어스마트 프로그램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아가 98%가 사유지인 포르투칼이 공공 개입이 가능하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 연구위원은 “산불위험이 높은 사유림을 대상으로 지자체가 일시적으로 진입해 연료 제거 및 방화선 설치를 할 수 있는 조례를 개정하고, 사유림 소유자에게 보상금, 세금 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며 “산업조합, 지자체, 마을단위에서 연료 관리계획을 수립하고 사유림주 동의 시 소유권을 유지한 상태에서 공공이 관리하는 방안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산림 구조 다변화 필요성 제기 산림 구조의 다변화 필요성도 제기된다. 포르투칼 산불통합지휘기관인 AGIF 이사회 의장인 티아고 올리베이라는 한국 화재 시스템을 조언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단일 수송 식생 구조는 화재 확신을 빠르게 만드는 위험 요인”이라며 산림 구조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연구위원도 “단순히 숲가꾸기에 대한 환경단체의 비판보다는 최근 대형 산불을 교훈삼아 참나무 등 내화수종과 혼효림으로 전환하는 숲가꾸기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도 주변과 마을에 인접한 산지는 주민과 함께 연료를 제거하고, 산불 확산이 우려될 때 일부 구역을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온난화 등 영향으로 한국 숲 식생이 침엽수에서 활엽수로 바뀌고 있다며 초대형 산불 피해를 줄이려면 침엽수 위주 인공조림이 아닌 자연식생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정정환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은 “국립공원은 산림청 손을 타지 않기 때문에 숲이 자연스럽게 활엽수로 변했다”면서 “활엽수가 많아 산불이 발생할 경우 지표화로 땅으로만 가게 된다. 수관화도 비화 현상도 없어 피해가 크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수관화란 나무의 잎과 가지가 타는 불로, 지표화에서 시작해 수간을 거쳐 수관으로 강한 화세로 퍼지는 위험한 산불을 뜻하는데 혼효림이 조성된 숲은 활엽수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가지들이 수증 역할을 하면서 수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 산불 예방 장기 로드맵을 수립할 필요성도 거론된다. 이 연구위원은 “포르투칼 사례와 같이 5년 혹은 10년 단위 산불 관리 계획을 수립해 임도·조림·토지이용 규제 등 구조적 변화를 단계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8

깃대봉에 오르니 ‘성인봉은 암것도 아니네“

나리분지에서 4.4km 오르면 정상… 성인봉보다 더 멋진 풍경 30여분 가파른 길 내려가면 가수 이장희 사는 ‘울릉천국’ 나와 송곳을 세워 놓은 것 같은 추산 용출소엔 하루 2만t 물 쏟아져 △ 숲속에 숨어 있는 용출소 알봉 둘레길 흙길의 끝자락은 내리막길이다. 흙길이 끝나고 보도블럭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추산마을로 가는 길이다. 추산은 송곳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말이 그 말이다. 송곳(錐) 산을 한자화 한 것이 추산(錐山)이다. 송곳산이 마을 뒤에 떡 버티고 있어서 추산 마을이다. 송곳산은 해발 430m에 이르는 뾰족한 봉우리가 마치 송곳을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어디에서 봐도 그 뾰족한 모양이 신비롭다. 오른쪽은 다시 나리마을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길가 어디선가 우렁찬 물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계곡이 없는 듯한데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두리번거리니 안내판이 서 있다. 추산 용출소에서 쏟아져 내려가는 물소리다. 추산 아래 용출수가 솟아나 만들어진 소라 해서 용출소다. 용출소는 숲속에 숨어 있다. 이 소는 나리분지에 내린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지하로 흐르다 갑자기 분출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용출소 아래 바위틈에서 하루 2만 톤의 물이 쏟아져 나온다. 엄청난 양이다. 초당 220리터가 솟아오르는 이 물은 도수관을 통해 104m, 143m의 낙차로 두 차례 떨어져 각각 200kW, 1,200kW의 전기를 생산하는 수력 발전소로 만들었다. 1966년 준공 이후 울릉도 전기 생산량의 약 10%를 담당했으나, 2024년부터 용출소 제2 발전소는 생수 사업 전환으로 가동이 중단되었다. 이 용출소는 나리분지의 화산이 함몰되어 호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호수 아래에 투수율 높은 부석들이 퇴적되어 지하수 저장고와 이동 통로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됐는데 갑자기 이 지하수가 단층과 급경사를 만나면서 더이상 흐를 곳이 없자 위로 분출된 것이다. 이 길에서 또 하나 지구의 신비를 배우고 간다. △ 일봉 등산로 희귀종 섬말나리 볼 수 있어 나리분지 초입, 알봉 등산로 입구에는 섬말나리 동산이 있다. 섬말나리는 울릉도에 자생하는 나리다.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강원도 금강산, 함경도 원산·무산령 등지와 만주·아무르·우수리 지방까지 분포한다. 일본에서는 관상용으로 건너간 것이 귀화하여 널리 퍼졌다. 말나리와 달리 꽃이 노랑색으로 핀다. 울릉도에서도 성인봉 일대 4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군락을 지어 서식한다. 나리마을 사람들의 식량으로 쓰일 정도로 흔하던 섬말나리가 1997년에는 산림청에 의해 희귀및 멸종 위기 식물 37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일본이 울릉도의 섬말나리를 채취해가 증식한 뒤 다케시마(독도)나리로 이름 붙이고 독도가 일본 땅인 양 선전하는데 이용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영남대 김규원 교수가 복원 증식에 성공했고 2003년부터 나리분지에 다시 심기 시작했다. 섬말나리 동산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알봉 분화구까지는 왕복 2km, 1시간 30분 정도의 길이다. 정상에 분화구 흔적이 남아 있지만 나리분지나 제주에서 흔히 보는 분화구처럼 뚜렷하지는 않다. 뻥 뚫린 분화구 같은 특별한 기대를 한다면 오르지 않아도 무방하다. 알봉을 발견한 것은 전라도 사람들이라고 전한다. 공식 거주 허가 이전 울릉도로 가장 많이 찾아들어와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이들이 전라도, 그중에서도 거문도 섬사람들이다. 아마도 이들이 배를 지을 목재를 구하러 나리분지에 왔다가 알봉을 발견하고 알처럼 생겼다 해서 알봉이라 이름 지었던 듯하다. 알봉은 나리분지가 만들어진 후에 형성됐다. 지하의 마그마가 분출해 화산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마그마가 수축했고 그로 인해 마그마 위에 있던 화산이 무너져 내려 나리분지가 형성됐다. 그후 다시 나리분지 틈새로 마그마가 분출 했는데 멀리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봉긋한 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알봉이다. 알봉으로 오르는 길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야산 자락이다. 제법 가파른 길인데 다리가 무겁지 않다. 많이 걸을수록 고단함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까닭이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은 동물이 아닌가. 움직이는 존재, 움직여야 사는 존재. 움직일수록 되살아나는 존재가 아닌가. 정상에 오르니 데크로 만들어진 넓은 전망대가 있다. 정상 부근은 약간의 경사가 있을 뿐 분화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펼쳐지는 나리분지 풍경은 장관이다. 나리분지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발길이다. 나리마을에서 나물 음식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알봉 둘레길을 걷는다. 이번에는 깃대봉이 목표다. 오늘 벌써 두 번째 걸음이지만 역시나 평온하고 행복한 길이다. 이처럼 걷기 좋은 길은 매일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계절마다 그 길이 다르듯 오전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다. 매번 걸어도 같은 길은 없다. 빛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공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걷는 마음이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길을 잘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가는 것이다. 아무리 험한 길일지라도. 두려움 없이 계산 없이 가는 것이다. 다시 투막집을 지나 갈림길. 이번에는 깃대봉으로 향한다. 나리분지에서 깃대봉까지는 4.4km. 5분 남짓 가파른 길을 오르니 그 다음부터는 또 평탄한 산 둘레길이다. 아래서 올려다 봤을 때는 가팔라 보여서 고생 좀 하겠다 싶었는데 의외다. 역시 길은 가봐야 안다. △ 울릉도의 정수 조망할 수 있는 깃대봉 길은 내내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한껏 물들어 있다. 길가에 문득 ‘사유지니 무단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걸려있다. 각종 산나물이 돈이 되니 불법으로 채취해 가는 이들이 있어 이를 방지하기 위함인 듯하다. 정상 부근에서 길은 잠시 다시 가파르다. 그래도 가파름은 잠깐이고 이내 정상이다. 정상에 올라서자 탄성이 절로 난다.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 나리분지의 전경과 성인봉, 말잔등, 미륵산, 옥녀봉을 비롯한 외륜산 봉우리들과 대풍감, 송곳봉, 노인봉, 공암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울릉도의 정수를 온전히 조망할 수 있는 산봉우리. 이보다 더 빼어난 전망대가 어디 있을까. 가장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성인봉도 깃대봉의 풍경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높다는 것은 상징일 뿐 보여줄 것 없는 높은 자리도 많다. 참으로 감동적인 풍경이 아닌가. 게다가 이미 가버린 줄 알았던 울릉도의 단풍은 여기에 다 몰려와 있다. 한참 넋을 놓고 서 있는데 노부부가 정상으로 올라온다, 노인들은 올라서자마자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지른다. “성인봉은 암것도 아니네.” 노부부는 도동에서 성인봉을 넘어 깃대봉까지 왔다. 성인봉에서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섭섭했는데 깃대봉에서 비로소 보상받았다고 감탄을 멈추지 않는다. 노부부는 아쉬운 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노부부가 내려가고 또 시간이 지나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데도 나는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찬바람에 손도 시리다. 오늘 8시간을 걸은 끝에 최고의 풍경을 만났다. 해가 지면 위험하니 어쩔 수 없이 하산한다. 그래도 마음은 도무지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30분 남짓 가파른 길을 내려가니 가수 이장희씨가 사는 집, 울릉천국이다. 울릉천국에서 5분을 더 내려가니 평리마을 버스정류장이다. 이제 울릉도의 밤은 깊을 대로 깊었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8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화구 안에서 다시 분출한 알봉과 용암 둘레길

△ 일본인들이 입항했던 왜선창이 예선장으로 여객선이 기항하는 울릉도의 관문은 3곳이다. 저동항, 도동항, 사동항이다. 기항지에서 대중교통으로 나리분지에 가려면 일주버스를 타고 천부에 하차한 뒤 나리분지를 오가는 셔틀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천부는 북면의 중심지다. 저동-섬목 간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는 울릉읍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교통이 편리해졌다. 천부는 1883년 울릉도에 공식 입도가 허락된 뒤 개척민들이 처음으로 들어왔던 포구다. 그 선창이 예선창이다. 공식 입주 허가 이전에도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몰래 들어와 살고 있었고 그 시절 천부는 주로 일본인들이 입항하던 포구라 해서 왜선창이라 불렸다. 왜선창이 예선창으로 변이되어 불리게 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불법으로 울릉도에 입도한 뒤 벌목해서 배를 건조하고 해산물들을 채취해갔다. 개척 시기 울릉도를 탐사했던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의 검찰일기에도 왜선창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부라는 이름은 후일에 생겼다. 당시에는 조선 본토에서 온 사람들도 울릉도에 거주하며 배를 짓고 어로를 했다. 나리마을 출발 초입부터 우산고로쇠·섬단풍나무 숲터널 이뤄 눈이 많기로 유명한 나리분지 12월부터 4월까지 3~4m씩 폭설 개척민 살았던 전통가옥 투막집 4채·너와집 1채 문화재로 보존 △ 울릉도의 유일한 평야 나리분지 나리분지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야다. 동서길이 약 1.5km, 남북길이가 2km 남짓 된다. 나리분지는 1만5000~2만년 전 일어난 화산 폭발 당시 칼데라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성인봉(984m) 북쪽의 화구원(火口原)이다. 면적 198만㎡. 알봉마을 분지까지 포함하면 330만㎡다. 나리분지는 화구 안에서 다시 분출한 알봉(611m)에서 흘러내린 용암에 의해 형성된 알봉분지까지 두 개의 화구원으로 분리되어 있다. 북동쪽의 평지인 나리분지에 나리마을이, 남서쪽의 평지인 알봉분지에 알봉마을이 있다. 지금은 알봉분지에 주민이 살지 않고 나리분지에만 산다. 분지는 외륜산(外輪山)으로 둘러싸여 있다. 화산에서 중앙의 분화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산을 외륜산이라 하는데 성인봉은 외륜산의 최고봉이자 울릉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다. 개척 초기부터 개척민들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땅이 척박해 농사가 잘 안되면 근방에 널려있던 섬말나리를 캐 먹고 굶주림을 면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나리마을이 됐다. 나리분지는 울릉도에서도 눈이 많기로 유명하다. 12월부터 4월까지 눈이 내린다. 3-4미터씩 쌓이는 폭설이다. 눈이 쌓이면 마을은 고립무원이다. 더러는 5월까지 눈이 내리는 해도 있다. 나리분지는 울릉도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다. 섬이지만 바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완벽한 산촌, 분화구 속의 마을은 성수기 때면 탐방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늦가을이라 마을이 조용한 편이다. 그래도 점심시간이면 울릉도 특산 나물 음식들을 맛보기 위해 찾아드는 여행객들로 식당들은 북적인다. 기근을 면해주었던 구황식물, 산나물들이 이제는 건강식으로 각광받으며 주민들의 큰 소득원이 됐다. 화구 안의 산, 이중 화산으로 형성된 까닭에 알봉(538m)은 마치 분화구 안에 하늘이 낳아 놓은 알처럼 둥그렇게 놓여있다. 그래서 이름도 알봉이다. 알봉의 둘레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트레일은 5.5km.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걷기에 좋다. 입구는 두 곳이지만 버스 종점에서 성인봉 가는 방향으로 걷는 것이 더욱 편안하다. 나리마을에서 출발해 다시 나리 마을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둘레길 초입부터 길은 온통 숲 터널 길이다. 길은 더없이 평화롭고 고즈넉하다. 단풍도 거의 끝물이라 낙엽으로 뒤덮인 길바닥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푹신하다. 흙길에서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촉감이 부드럽다. 몰두해서 걷다 보면 어느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길손에게 숲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바람이수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내가 문득 숲 안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첩첩산중, 숲속의 바람에서 바다 냄새가 묻어난다. 동해를 건너온 바람이 바다의 안부를 전해주는 것이다. 울릉도의 바람은 바다의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다. 이 숲길에는 유독 단풍나무들이 많다.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우산고로쇠와 섬단풍나무들이다. 사람들은 우산고로쇠나무로부터 수액을 얻어먹었고 섬단풍나무는 주로 땔감이나 농기구 재료로 쓰였다. △ 울릉국화와 섬백리향 등 꽃들의 잔치판 알봉 마을 조금 못 미쳐 울타리가 처진 빈터 하나가 있다. 옛날 집터라도 되는 걸까 싶어 다가가니 울릉국화와 섬백리향의 서식처다. 지금은 꽃들이 거의 지고 없지만 초가을 꽃 시절이면 꽃들의 잔치판이다. 특히 섬백리향은 그 향기가 백리까지 갈 정도로 향이 강하다 해서 백리향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늘을 싫어해서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 곳에 작은 군락을 이루는데 대체로 울릉국화와 이웃해 살아간다. 섬백리향은 낮에는 향이 약하고 밤에만 유독 강한 향을 내뿜는다. 무엇일까? 곤충도 없는 한 밤중에 굳이 향을 풍기는 이유는. 누구를 유혹하자는 것일까. 혹시 이 꽃들의 매개자는 곤충이 아니라 달빛일까? 알봉 마을 부근 숲 가운데는 큰 밭이 하나 있다. 밭에는 두 분의 할머니가 나물을 심고 있다. 경작하지 않고 버려진 밭에 울릉군이 관상용 나물 단지를 조성하는 중이다. 부지깽이 모종을 심는다. 두 분은 나리마을 분이 아니고 저동에서 품을 팔러 오셨다. 알봉 마을에도 본래 20여 가구가 살았었다. 옥수수, 감자,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다. 지금은 모두가 떠나 폐촌이 된 마을. 그들이 살던 투막집 두채가 보존되어 있다. 투막집은 울릉도 전통가옥의 하나인데 둥근 통나무를 우물 틀(井) 모양으로 쌓아올려서 벽을 삼은 집이다. 강원도 산간지대에서는 ‘귀틀집’, 평안남도에서는 ‘방틀집’ 또는 ‘목채집’, 평안북도에서는 ‘틀목집’이라고 부른다. 투막집 벽은 고래솔·마고마·솔송나무·너도밤나무·칭칭목·마가목·회솔목 등으로 만들었다. 집 주위는 추위를 피하기위해 띠로 엮은 우데기를 둘러쌌다. 지붕 처마 안쪽에 여러 개의 기둥을 돌아가며 세운 다음 띠로 엮은 자리를 둘러친 것이 우데기다. 방의 투막 벽은 내벽, 우데기는 외벽에 해당한다. 초입의 투막집은 문화재로 지정됐다. 중요민속문화재 257호였다가 2017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승격됐다. 문화재란 것이 처음부터 문화재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삶을 담았던 일상의 건축물에 세월의 더께가 쌓여 문화재가 된 것이다. 투막을 지어 띠로 지붕을 덮고 살던 가난한 집이 이제는 문화재가 됐다. 4칸짜리 1자 형태의 이 투막집은 1945년 지어진 것인데 울릉도 개척 초기 개척민 주택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보존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울릉도에도 몇 채 남지 않은 원형의 집이다. 현재 나리분지, 알봉 분지 내의 전통가옥은 투막 집 4채와 너와집 1채인데 모두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산봉우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든다. 어느새 산봉우리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산마루를 감싸고도는 신령한 구름들. 산을 내놓기도 하고 삼키기도 하는 구름들. 신비로움이란 저처럼 안개나 구름에 쌓인 산자락 같은 것에 불과하다. 안개와 구름 걷히면 평범한 야산일 뿐.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신비를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다. 허망한 줄 몰라서가 아니다. 신비가 없다면 더이상 삶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봉 마을 터에 남은 두채의 투막집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걷는다. 투막집에서 1km 정도를 가면 갈림길이다. 앞길은 그대로 나리마을로 가는 둘레길이고 왼편 산길은 깃대봉을 올랐다가 평리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두 길 다 탐나는 길이다. 나리마을을 이미 둘러봤다면 그대로 깃대봉으로 올라도 후회 없다. 두 길을 온전히 다 걷고 싶다면 그대로 나리마을까지 갔다가 다시 반 바퀴 돌아서 깃대봉을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길은 몇 번을 다시 걸어도 좋은 길이다. 나그네는 후자를 택하기로 한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7

“산불은 인간 활동에 의한 파괴… 다차원적 교육·정책 필요”

“포르투칼 국민이 문제다” 포르투칼 화재와 관련한 직언이다. 포르투칼에서 발생하는 모든 화재 중 98%는 인위적 발화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올해 초 방대한 면적의 산간을 집어삼키며 국민들의 속까지 타들어가게 만들었던 대형화재는 성묘객의 라이터불에서 시작됐다. ‘설마’라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작은 행동이 어마어마한 피해로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산불 등 대형화재를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과 ‘교육’이 꼽힌다. 인구 대비 인위적인 화재 발생 건수가 불균형적으로 높기로 악명높은 포르투칼 역시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포르투칼은 1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2017년 대형 산불 이후 AGIF라는 농촌 화재 통합 관리 기관을 설립하고 산불 뿐 아니라 산림과 인접한 농촌까지 아우르는 ‘농촌 화재’를 예방하고 관리하고 지원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주민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티아고 올리베이라(Tiago Oliveira) AGIF 이사회 의장은 “AGIF는 산불을 단순 자연재해가 아닌, 주로 인간의 활동에서 발생하는 ‘인재(人災)’로 본다. 비의도적, 반복적, 구조적인 인재가 산불의 주된 원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파괴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때문에 더 많이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행동 변화야말로 산불 예방을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라는 것이다. 올리베이라 의장은 다양한 부처가 힘을 모아 기후변화, 산불, 토지 관리, 자원 연계 등을 포괄하는 다차원적 교육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면서 “교육은 단순 캠페인이 아닌 정책의 기둥”이라 말했다. 이어 “AGIF는 교육을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캠페인 이상, 정책적으로 가장 중요한 축 중 하나로 본다. 이와 관련해 농업·환경·에너지 정책을 수립하고 어린이와 청년 세대에 대한 교육을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전략으로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AGIF는 주민들이 정책을 수용하는 수동적 입장에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단속, 홍보 위주로 산불 예방 교육이 전개되고 있는 반면, 포르투칼은 보다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교육을 통해 시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실제 산불 발생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올리베이라 의장은 “2023년부터는 예방 투자에 따른 효과가 가시화됐다는 평가가 있다”면서 “AGIF는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집 주변과 거주지를 관리하는 ‘공동체 기반’ 구조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각 마을 단위에서 직접 화재 위험을 줄이기 위한 예방 활동을 주민 주도로 시행하도록 안내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안전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Vilas Seguras)’이 있는데 산불에 취약한 지역의 나무를 미리 없애거나 집 주변 (연소 물질 등)을 정리하는 식이다”라고 설명했다. 포르투칼은 주민들의 의식 고취와 적극적 행동을 위해 주민들이 나무 벌목, 잡초 제거, 위험 지대 정비 등 실제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군경과 시골경찰이 직접 고령자 가구들을 방문해 불법행위 예방과 안전 안내를 실시한다. 지자체는 고령 주민 및 취약계층을 위해 직접 나서 산불 방지를 위한 정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인구 감소 및 고령화가 심각한 지역의 경우 AGIF의 기술인력이 직접 투입돼 지역 맞춤형 전략을 세우고 실행한다. 이와 함께 지자체 공무원 역량 강화 교육도 실시한다는 설명이다. 또 성공적으로 화재 예방 시스템이 안착된 지역이 다른 지역과 교류하고 알려줄 수 있도록 하는 워크숍도 진행하는 등 유사한 조건의 지자체가 경험과 전략을 공유하고 협력하도록 돕는 역할도 하고 있다. 무엇보다 AGIF는 산불 예방을 위해 주민과 지자체 참여를 높이기 위한 방책으로 “압력과 인센티브의 병행”을 꼽았다. 단순한 ‘홍보’나 ‘캠페인’이 아니라 강제 및 지원이 결합된 정책을 추진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을 및 가구 단위로 일정 반경(통상 50~100m) 내 연료 제거 의무를 법제화하고, 이를 위반할 시 실제 수백 유로 수준의 벌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사유지의 경우 소유주가 직접 청소를 하지 않을 경우, 정부나 읍·면·동 단위에서 대체 집행 후 비용 청구를 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주민 자원봉사 등을 통해 이들의 실적에 따라 수당이나 마일리지를 제공하는 등 보상책도 병행하고 있다. 단순한 인식 개선을 넘어 법제화를 통한 강제력과 의무 발생으로 효과를 높이는 방책이다. 이같은 정책은 실제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지난 2022년 포르투칼 북부 브라간사(Bragança) 지역이 연료 감소 및 주민 행동 전략을 도입했는데 이듬해 여름 발생한 대규모 산불을 막을 수 있었다. 당시 산불 초기만 해도 대형산불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됐지만 마을 인근에서 화재 확산이 차단된 것이다. 해당 화재 후 지역 주민 다수가 “초기에는 불안했지만 처방화(prescribed fire·숲의 연료를 사전에 없애는 전략)가 마을을 지켜줬다”고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AGIF는 산불 예방을 위해 명확한 정책 프레임을 구성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기술·제도·행정·교육·인센티브 결합을 통해 주민과 주체의 현실적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주민이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덕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AGIF는 지금까지의 화재 예방 정책과 방향을 유지·강화해나간다는 방침이다. AGIF 올리베이라 의장은 “기존 정책 방향과 전략을 유지하면서 더 많은 예산확보를 통해 실행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이를 위해 민감 산림 소유자들의 참여를 확대시키는 한편 정치권의 지원과 지지도 확보해 더욱 효과적인 정책과 제도를 실행해나갈 것”이라 밝혔다. AGIF가 정부와 정책, 지자체와 주민을 활용하는 방식은 국내에서도 배울 점이 적지 않다. 한국 역시 고령화 및 인구감소가 심각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지금까지처럼 안일한 단속·경고 시스템으로는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산불이 발생한 후 진화단계에 대한 대응이 주로 논의되고 있는 단계를 뛰어넘어 산불 예방에 대한 보다 심도깊은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 재정적 유인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의식 고취와 능동적 활동을 이끌어내는 제도 시행, 인구감소 및 고령화에 따른 인력 부족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 지역과 지역 간 연계를 통한 효율적인 예방 교육 및 전략 실행 등 다각도에서 대응 전략을 구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7

동해 물놀이 즐기던 세 선녀 옥황상제 불벼락에 바위로…

선녀-호위장수의 몰래한 사랑 천계로 승천할 시간 놓쳐 비극 삼선암 옆엔 키작은 장군바위 산 하나가 해상에 솟은 관음도 2012년 본섬과 다리 놓였지만 살던 2가구 떠난 지금은 무인도 △ 깍새섬으로 불렸던 관음도 석포에 들렀으니 내친김에 관음도를 빼놓을 수가 있다. 저동에서 북면으로 향하는 순환 버스가 섬목 터널들을 빠져나오면 바로 관음도 입구다. 이 지역은 울릉도의 목이다. 섬목이란 이름은 목처럼 기다란 섬의 목(모가지)이란 뜻이다. 섬 지역에는 유난히 목이란 지명이 들어간 곳이 많다. 목섬이란 이름의 섬들도 많다. 이곳은 울릉도의 목이니 관음도는 그 머리쯤 되는 걸까? 울릉도의 머리, 관음도. 몸체와 목이 있는데 머리까지 있어야 완전체가 아닌가. 관음도로 인해 울릉도는 비로소 온전한 몸이 된다. 관음도 입도는 유료다. 입장료를 내고 관음도로 들어간다. 어제는 비할 데 없이 잔잔하더니 오늘은 또 파도가 거세다. 늦가을부터 울릉도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이제부터 겨우 내내 파도 센 날들의 연속이다. 2021년, 울릉크루즈에서 1만2톤급 전천후 여객선 ‘뉴다시오펄’호를 띄우기 전까지 겨울 울릉도에 입도하는 이는 보름쯤 발이 묶일 각오를 해야 했다. 2017년의 경우 연간 울릉도 여객선 결항 일이 143일이나 됐다. 그러니 겨울이면 한달에 2-3회 배가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크루즈선이 뜨면서 결항일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제는 겨울에도 두려움 없이 울릉도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울릉도의 설경 또한 일본의 북해도 못지않다. 눈 구경하러 북해도에 가는 것도 좋겠지만 울릉도로 가는 것 또한 좋지 않겠는가? 관음도와 울릉 본섬 사이에 다리가 놓인 것은 2012년이다. 2009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해 2012년 5월에 끝났으니 작은 다리 하나 만드는 데 3년이나 걸렸다. 울릉도에서는 모든 공사가 더디기만 하다. 지금은 무인도가 됐지만 예전에는 관음도에도 2가구가 살았었다. 죽도만큼이나 가파르고 작은 섬이지만 그래도 죽도와는 달리 관음도에는 먹을 물이 나왔다. 섬은 깍새(슴새)가 많이 살아서 깍새 섬이라고 했다. 울릉도 개척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한 개척민들이 이 섬에서 깍새를 잡아 구워 먹고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매표소에서 다리까지 가는 데는 엘리베이터도 있고 7층 높이의 계단도 있다. 관음도로 건너는 다리에 오르자 동쪽으로는 죽도가 서쪽으로는 삼선암이 관음도를 호위하듯 서 있다. 삼선암은 보는 방향에 따라 하나가 되기도 하고 둘이 되기도, 또 셋이 되기도 한다. 한 방향에서만 보면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은 사물이나 관계나 다르지 않다. 다리를 건너 관음도 초입에서 보니 삼선암은 서로 겹쳐져서 마치 하나의 섬 같다. △ 막내 선녀와 호위무사의 사랑 전설로 남아 아득한 옛날 동해 바다의 경치에 매혹된 세 선녀가 자주 울릉도 부근 바다에 내려와 물놀이를 즐기다 승천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도 선녀들은 옥황상제의 장수와 용의 호위를 받으며 울릉도 앞 바다로 내려와 노닐었다. 물놀이에 열중해 있던 두 언니 선녀는 문득 막내 선녀가 호위 장수와 몰래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언니 선녀는 옥황상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하늘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막내 선녀의 옷이 사라지고 없었다. 막내를 버려두고 둘이만 돌아갈 수가 없어 함께 옷을 찾다가 선녀들은 천계로 승천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옥황상제가 누군가. 아무리 숨어도 다 알아낼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가. 선녀가 호위무사와 정을 통한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옥황상제는 불벼락을 내려 그들을 모두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삼선암 옆에는 키 작은 장군 바위도 있다. 막내 선녀와 사랑을 나누던 호위 무사일 것이다. 질투에 눈먼 옥황상제가 무사라고 봐줬겠는가? 울릉도 삼선암에 깃든 전설이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천상의 주인인 옥화상제마저도 질투심에 눈멀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힘은 신보다 강한 것이 아닌가. 두렵고 또 두렵구나. 사랑이여!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울릉도 본섬의 산봉우리들은 이미 안개가 삼켜버렸다. 관음도 다리에서 왼쪽 절벽에 사람의 얼굴 모양이 보인다. 무심히 지나치면 볼 수 없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메부리코와 입, 눈두덩이 그대로 사람 얼굴이다. 저 또한 큰 바위 얼굴인가? 관음도는 그대로 산 하나가 해상에 솟아 오른 모양이다. 높이 106m, 둘레 800m, 깎아지른 절벽의 섬에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죽도처럼 정상부에 평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관음도 북동쪽에는 큰 굴이 2개나 뚫려있다. 울릉도의 3대 해상 비경 중 하나인 관음 쌍굴이다. 이 굴의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마시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어서 울릉도 사람들이 받아다 마시곤 했다. △ 편안한 숲과 초원이 펼쳐진 관음도 관음도 초입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군락이다. 강한 바닷바람에 잎들이 바짝 타버렸다. 관음도는 일부만 숲이 남아 있고 대부분은 초지다. 농사를 짓고 살던 시절의 유산이다. 관음도 전망대에 서니 건너편 절벽 위 건물들이 아찔하다. 안용복 기념관과 석포 마을의 집들이다. 천 길 낭떠러지 위 공중 마을. 어제 저 마을을 지나올 때는 볼 수 없던 풍경이다. 그토록 위태롭고 가파른 절벽 위의 마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역시 숲에서 나와야 숲이 보인다. 멀리서 위태롭고 아스라이 보이던 관음도에 들어오니 섬은 그저 평안한 숲과 초원이다. 오래 전 다리가 놓이지 않아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을 때 해무에 쌓인 관음도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관음도는 더없이 신비로웠었다. 섬 속에 들어오니 더이상 신비는 없다. 저 건너 삼선암 또한 그러할 것이다. 떨어져 보니 신화 속의 삼선암이지만 다가가면 그저 바위덩어리일 뿐이다. 관음도를 빠져나와 삼선암 방향 도로를 따라 걷는다. 섬목에서 10여분이면 삼선암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멀리서 보던 삼선암을 바로 앞에서 보니 그 풍경이 압도적이다. 멀리서는 삼선암, 세 선녀가 나란히 서 있는 듯 보였는데 가까이 와 보니 막내 선녀 바위만 뚝 떨어져 있다. 가혹하기도 하다. 심술보 가득한 옥황상제. 여기서 천부까지 이르는 해안도로는 울릉도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삼선암, 장군바위, 딴섬, 공암까지 절경의 바위섬들이 이 길에 다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해안도로 변을 따라서 걸어도 더없이 좋다. 죽암 마을 앞의 딴섬은 삼선암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바위섬인데 아마도 삼선암과 다른 섬이라서 딴섬이란 이름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오래전 울릉도 사람들은 향나무를 베어다 육지에 팔아 소득을 올리곤 했다. 향나무는 조각품 재료나 향을 사르는데 쓰였는데 울릉도 향나무는 육지 나무보다 서너 배는 향이 강해서 인기가 많았다. 그때 사람들은 저 까마득히 높고 가파른 삼선암 꼭대기까지도 밧줄을 타고 올라가 향나무를 베어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담력이요 삶의 무게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6

만물상으로 시작해 80여 년간 죽도시장과 애환을 함께해

죽도시장이 어디 만만한 시장인가. 대한민국 10대 시장으로 손꼽히는 곳이자 시장의 의미를 뛰어넘는 광장이 아닌가.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모여드는 큰 시장이자 유통의 요충지다. 지금도 그 명성은 여전하지만 다양한 유통구조의 발달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죽도시장에 대한 포항 사람들의 애정과 자부심은 차고 넘친다. 죽도시장 없는 포항은 상상하기 어렵다. 포스코가 힘줄이라면 죽도시장은 실핏줄이다. 김용문 대표의 선친인 김석이 창업자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 배워 귀국 후 죽도시장서 만물상으로 시작 “어려울 때 도움 되는 사람이 돼야 ”강조 한국전쟁 땐‘아모레’에 물건값 돌려줘 그 인연으로 1965년 대리점 제의 받아 사훈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변수 난무하는 장터서 평생 지키며 살아 생전 25년간 펼친 장학사업도 연장선 죽도시장은 면적이 14만 8760㎡이고, 점포 수는 2500여 개에 달한다. 좌판 몇 개로 시작한 초창기를 생각한다면 문자 그대로상전벽해다. 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은 소비자가 된다. 단순히 일회용 소비자가 아니라 지속적인 구매자의 자격을 스스로 획득한다. 시장 상인들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깨끗해야 하며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장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신성상회 김용문(72) 대표는 말한다. 만물상으로 시작한 신성상회는 속옷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다. 77년의 역사가 고이 간직된 가게로 죽도시장의 역사와 오롯이 그 궤를 같이한다. 창업자 김석이, 일본에서 세탁소 견습생으로 출발 신성상회는 김용문 대표의 선친이 처음 시작했다. 선친의 존함은 김석이(1911∼1996)다. 그는 포항에서 태어나 대송국민학교를 졸었했으며, 일찍 뜻을 세워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를 배웠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앞날을 도모하려면 장사를 배우는 것이 최선의 방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부족한 언어 실력은 노력으로 때우면서 오기와 끈기 그리고 성실로 버텨냈다. 나가사키 우동을 꽤나 끓여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나가사키 우동은 구룡포의 모리국수와 같은 메뉴로 그날그날 얻은 남루한 재료를 몽땅 집어넣고 끓인 우동이다. 영양보다는 오로지 한 끼를 때우기 위한 최소한의 간편식이다. 그냥 잡탕국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선친이 일본에서 처음 접한 직업은 세탁소 견습생이었다. 보이지 않는 멸시와 견제, 열악한 생활환경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일에 전념했다. 고국을 등지고 이역만리를 선택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0년을 그렇게 일했다. 그 시절을 지켜본 일본인 세탁소 주인이 강력하게 추천해 본격적으로 세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경영을 시작한 것이다. 타고난 성실과 추진력으로 일에 매진한 결과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선친은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모나지 않게 어울려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선친은 몸소 보여주었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그때의 경험이 이어져 옷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고 선친은 회상하곤 했다. 그리고 겉옷을 완성하려면 속옷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고 한다. 기본을 익히고 멋과 예절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드러나는 인상은 그 모든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김 대표는 그렇게 미루어 짐작한다. 선친은 사진에서 보더라도 옷을 입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정갈함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움은 그 감각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좌판 몇 개가 내항(內港)의 늪지대인 뻘밭에 들어서면서 죽도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사람이 다니기 힘든 뻘밭이다 보니 규모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 부는 황량한 들판에서 시작된 1950년대를 지나 1969년에 죽도시장번영회가 설립되면서 죽도시장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선친은 죽도시장에서 좌판을 폈다. 좌판에는 비닐 포장지, 빚, 지압기, 옷, 바가지, ‘동동구루무’ 등이 널려 있었다. 이처럼 신성상회는 거래가 가능한 거의 모든 것을 취급하는 만물상으로 시작했다. 신성상회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아모레화장품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많은 물건 중에 화장품과 인연이 된 일이 있었다. 지금은 굴지의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이 ABC화장품이었다. 선친은 당시에 ABC화장품의 제품을 팔면서 아모레퍼시픽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다른 사람들은 피난 가기 바쁠 때 선친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큰 회사가 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라도 받은 물건값을 돌려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과 장사에 대한 예의다.” 그 길로 선친은 외상 잔금을 모두 챙겨 서울에 다녀왔다.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그 후 1965년쯤 아모레퍼시픽이의 경영이 정상화되면서 전국적으로 대리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런데 어느 날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회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한 직원이 선친을 찾아왔다. 그 직원의 말에 따르면, 서 회장이 포항에 가서 신성상회 김석이 대표를 만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 직원은 김석이 대표가 아모레화장품 대리점을 할 생각이 있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서 회장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아모레화장품 대리점을 지난 4월에 작고한 큰형님(김박문, 1938년생)이 맡아 경영했다고 한다. 큰형님은 그 대리점 외에 청하 조사리에서 친구와 식품업을 동업했는데 갑자기 부도나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고, 그 여파로 화장품 대리점을 접었다. 선친은 신성상회 안 정면에 이런 사훈을 걸어두었다.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보면 웃을 수 있는 고색창연한 사훈일 수 있겠지만 그 내용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변수가 난무하는 장터의 장사꾼으로서는 더더욱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선친은 그 사훈에서 벗어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다. 선친이 살아생전 25년 정도 이어간 장학사업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배수강 포항시장 재직(1967. 11. 15.∼1969. 8. 8.) 때 시장 건물을 불하받았다. 여담이지만, 당시 죽도시장에서 있었던 불하는 대검에서 ‘부정 불하’로 판단해 배수강 시장과 포항시 공무원, 은행 지점장 등 7명을 기소함으로써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죽도시장 부지 3909평을 감정가보다 낮게 시장번영회에 불하해 국고 손실을 끼친 혐의를 적용한 것이다. 여하튼 당시에 번듯한 가게 이름을 내걸고 제법 규모를 갖춘 매장을 내어 한자리에서 77년을 보낸 것이 신성상회의 역사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16

‘농촌 화재’로 패러다임 확장… 예방 중심의 다각적 시스템 전환

불이과(不貳過). 같은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 번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같은 마음가짐은 대형 재난 및 사고에 꼭 필요한 태도지만 실제 이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달랐다. 2017년 백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화재 후 포르투갈은 두팔을 걷어붙였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철이 되면 고온 건조해져 산불 발생 위험이 매우 높은 포르투갈은 ‘불이 나면 진화한다’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산불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단순히 ‘산불’ 개념이 아닌 ‘농촌화재’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더 많은 이들이 역할을 나눠 화재에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산불통합지휘기관인 AGIF를 필두로 포르투칼은 화재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 본지는 지난 7월 포르투갈 리스본을 찾아 포르투갈이 운영 중인 농촌 화재 통합 관리 기관(AGIF)을 찾아 포르투갈이 대형 화재 후 어떻게 변화했고, 어떤 정책으로 화재와 맞서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농지는 물론 도시 외곽까지 아울러 산림부·농업·환경부·지자체 이어 토지소유자까지 책임·역할 부여 전국적 위험도 지도화 작업 실시 한국 현장대응 체계 잘돼있지만 재발방지 위한 방법은 부재 상태 티아고 올리베이라 AGIF 의장 “소나무 중심 식생 빠른 확산 요인 수종 다양화 등 구조적 관리 필요”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산불 위험도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고온, 강풍, 낮은 습도 등 극단적인 포르투갈 기후와 산림과 주거지역이 혼재된 지역적 구조는 산불이 발생하기 좋은 환경이다. 이에 더해 농촌인구감소가 영향을 미쳤다. AGIF 이사회 의장인 티아고 올리베이라(Tiago Oliveira)는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이동하면서 토지 이용에 변화가 많았고, 방치되는 농림 지역도 늘어나면서 산림관리 및 화재 계획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민간 화재 대응과 달리 미흡했던 산림 화재 시스템까지 더해지며, 결국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AGIF는 2017년을 ‘비극의 해’로 기억한다. 당시 산불은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했다. 포르투갈 당국은 전국적으로 1700명 이상의 소방관을 파견했지만 페드로강그란드 도로를 덮친 화마를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차량 안에서 화염에 휩싸여 숨졌다. 사망자는 무려 120여 명. 이 사건에 대해 AGIF 측은 “사건 이전까지는 다들 진화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고를 기점으로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사고를 계기로 들여다 본 시스템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AGIF 측은 “과거 20년동안 포르투갈 소방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검토를 시작했다. 소방대, 감독관 등의 전문지식이 부족했고 화재 전술이 미흡했으며 컨트롤타워 부재도 심각했다. 천연자원 관리부터 화재발생시 지원체계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왔고, 산불예측서비스 또한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AGIF 측은 “미흡한 점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는 수년간 존재해 왔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미미했다”면서 “2017년 실태조사 후 발화방지, 화재의 재료가 되는 연료감소방법, 산불화재 경계 통제 전술과 전문지식 탑재 등을 중점에 둔 새로운 정부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AGIF가 탄생했다”고 밝혔다. 이후 AGIF는 단순히 화재 진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예방 중심’의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했다. 특히 AGIF는 산불 뿐만이 아니라 농촌 화재까지 개념을 확장했다. 포르투갈 내에서 실제 발생하는 화재의 대다수는 ‘산림 내부’가 아닌 ‘농촌 지역’ 또는 ‘산림과 인접한 비산림 지역’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 근처에서 일어난 화재가 인명 피해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서 단순히 ‘산불’ 개념만으로는 실제 화재 발생시 대응 전략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AGIF는 개념전환을 시도해 산림뿐 아니라, 목초지, 방치된 농지, 도시 외곽까지 아우르는 다각도의 예방 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정책 프레임도 전환시켰다. ‘산불’은 산림부 문제로 치부됐지만 ‘농촌화재’는 농업부, 환경부, 지자체, 민간토지소유자까지 다양한 다수의 주체에게 책임과 역할을 부여했다. AGIF는 “개념 전환이 처음부터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 화재 데이터 분석 결과를 통해 ‘농촌화재’ 개념의 필요성을 명확히 제시하고 EU 및 OECD와의 정책 공유를 통해 ‘다른 선진국들도 이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는 공감대와 정책전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포르투갈 내에서 정착된 ‘농촌화재’는 단순한 표현 변경을 넘어 위험도에 대한 인식 자체를 재설계하는 시작점이 됐다. 통합 농촌 화재 관리 시스템을 국가 전략 전반에 체계적으로 반영했고 위험이 도사리는 모든 농촌공간을 관리 대상으로 확장했다. 전국단위로 위험도 지도화 작업을 실시해 ‘어디에 사람이 거주하며, 더 위험한 곳은 어디인가’를 찾고 위험 구역을 재설계했다. 또 화재 대응과 예방을 위한 활동에는 산림청, 농림부, 환경부 외에도 내무부(공공안전, GNR(국가헌병), 지방경찰), 교육부, 언론, 지자체, 민간 소유주 등 다양한 주체가 조직적으로 참여하도록 재구성했다. 내무부와의 협업을 통해 경찰 등 공공안전 조직도 예방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했으며, 교육 및 언론과 협력해 화재 인식 전환 캠페인도 병행했다. 무엇보다 농촌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적극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위험도가 높은 지역에 대해 인력, 장비, 훈련, 보조금 등 각종 공공자원을 차등 배분했고 ‘정책적 긍정차별’을 활용, 물리적·사회적으로 취약한 지역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배정했다. 실질적인 안전 확보와 구조, 사후 복원 등 모든 관점에서 자원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엇보다 포르투갈 산림의 97%가 민간 소유라는 점을 감안한 정책을 추진한 점이 눈길을 끈다. 숲정비 비용 등 관리 실적에 따른 보조금을 지원하고, 에너지 작물, 방재용 수액채취, 특용작물 도입 등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하며 화재가 발생할 요인을 줄이고 화재 시 대형화 방지에도 힘썼다. AGIF는 “O proprietário para limpar tem que receber dinheiro, tem que ter um investimento.(소유자가 정비하려면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말로 적재적소 보상이 적극적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방적 관점에서는 진화중심에서 예방중심으로 전환했다. 2017년 화재 당시 당시 소방력, 장비 등 진화 자원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기상조건, 인적자원 소진 등으로 대형 산불 확산을 막지 못했던 경험을 발판삼아 산불이 퍼지지 않게 만드는 구조적·생태적·사회적 조건 자체를 바꾸는 해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예방이 진화보다 비용 절감 효과가 높다”는 경제적 설득과 “불을 끄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게 목적”이라는 목표의식도 함께였다. 이같은 모든 변화는 데이터와 기술 전문성, 중립성에 기반한 신뢰와 객관성, 국제사회의 기준과 외부 평가를 활용한 설득력 있는 접근 방식을 통해 이뤄질 수 있었다. 화재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부터 대대적인 시스템 전환, 적절한 지원정책 등 구체적 시행까지 포르투갈은 AGIF를 주축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는 국내 시스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재 전문가들이 보는 한국의 시스템은 현장 진화와 대응에 집중하는 체계는 잘 구축돼 있지만 화재 재발 방지를 위한 방법은 부재한 상태다. 단순히 화재 발생 시 진화하는 방법론을 넘어서 ‘화재를 막는 법,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 근본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보인다. AGIF 이사회 의장인 티아고 올리베이라는 국내 화재 시스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기자에게 “한국처럼 소나무 중심의 단일 수종 식생 구조는 화재 확산을 빠르게 만드는 주요한 위험 요인”이라면서 “특히 단일수종의 밀식림에서 화재가 빠르게 확산되기 때문에 산림 구조의 다양화, 방화대 조성, 사전 연료 제거 등의 ‘구조적 관리’가 핵심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단순히 진화 자원을 증강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불이 나기 전에 어떻게 막을 것인가’ 라는 시각으로 대응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6

Fire Smart 커뮤니티 모델의 현장

경북 산불의 주요 원인은 성묘객의 실화로 인한 불씨 발생으로 확인됐다. 2025년 3월 의성군에서 시작된 산불은 성묘객이 묘지 정리 중 라이터와 술병 뚜껑을 사용해 불을 붙인 것이 최초 발화로 추정되며, 강풍과 건조한 날씨, 소나무 밀집 지형 등이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사소한 부주의가 대형 피해로 이어졌기에 산림 내 화기 사용과 안전수칙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산불 예방에 대한 주민 의식들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주민 참여와 예방 교육이 핵심으로, 산불 위험 인식을 높이고 실질적인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데 중점을 둔 캐나다의 ‘파이어 스마트(Fire Smart)’ 프로그램은 한국 산불 관리 정책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마을단위 방위선 ‘파이어 스마트’ 주 정부가 펀딩자금 등 지원하고 규제·개발 등 문제 해결 역할 도맡아 산불피해 완화 전문가들은 조직적으로 직거래 시장·축제장 등 ‘다중시설’이나 가정집 등 찾아다니며 예방 교육 실시 ‘지역사회 공동체 인증제도’는 인식 변화·참여도 제고 ‘일등공신’ 파이어 스마트는 캐나다 전역 산불 위험을 줄이고 지역사회 산불 탄력성읖 높이고자 고안된 국가 프로그램이다. 지역 사회·정부·주민이 협력해 취약 지점을 개선하고 마을 단위 방어선을 구축하는 종합 정책으로, 단순한 불 끄기가 아닌 ‘불이 번지기 어려운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파이어 스마트는 △교육 △식생 관리 △법률 및 계획 수립 △개발 시 고려사항 관리 △주택과 기반시설 생존 가능성을 높일 개발 규제 도입 △기관 간 협력 △교차 훈련 △비상계획 수립 등의 7가지 핵심 원칙으로 운영된다. 이는 각 지역 파이어스마트 코디네이터와 지역 대표 등에 의해 실행된다. 지난 7월 방문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파이어스마트 BC’에서는 80여 명에 이르는 코디네이터들에 의해 프로그램이 기획·운영되고 있다. ‘파이어 스마트 BC’는 단순한 산불 대응 교육을 넘어 예방 중심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 주 산불방지(FireSmart) 프로그램 책임자는 “‘파이어 스마트 BC’ 는 사후 대응에서 벗어나 예방 위주로 옮겨갔다. 실제로 바람 등으로 인해 산불을 대응하는 데 굉장히 한계가 있다 보고, 지금은 예방 중심으로 지역 사회 사람들에 대한 교육 훈련 위주로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다”며 “집을 조성하거나 나무를 심고 꾸몄을 때 주민들의 행동이 변화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산불은 ‘정부만이 아니라 주민들과의 공동 책임’라는 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본지는 파이어 스마트 프로그램 책임인 한나스위프트를 통해 주민 중심 예방 활동, 실행 과정 등 파이어 스마트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를 살펴봤다. -파이어 스마트 BC는 산불을 단순한 재난이 아닌 ‘공존해야 할 자연 현상’으로 이해하는 전환의 한 축으로 여겨진다. 이런 인식은 기관의 전략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는가. =산불은 불가피한 자연 현상이다. 굉장히 나쁜 것이 아닌 생태계에서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며 실제로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데 불이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불을 억제한다는 차원이 아니고 불에 대해서 ‘불이 났을 때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능력, 불이 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적응하는 지역사회를 만드는 데로 옮겨갔다. 그래서 불이라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관리는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주민들도 무조건 불을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불이 난 후 대응을 해야 된다 등의 자세에 벗어나 불이 난 다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와 더불어 주민들도 공동 책임을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산불 대응은 전통적으로 주정부, 연방정부의 역할로 여겨졌다. 특히 주민들은 ‘피난 대상’이 아닌 ‘대응 주체’로서 주민을 포지셔닝하는 접근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 파이어 스마트 BC가 예방의 주체로 나서게 된 계기는. =산불을 예방하거나 피해를 완화하는 데 있어 지역 사회가 굉장히 중요하다. 파이어 스마트라는 게 원래는 정부가 아니라 주민들이 먼저 시작한 움직임이다. 산불 위험이 높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위험을 경감시키기 위해 시작했던 움직이고, 주 정부가 이를 인정하고 지원하면서 시작됐다. 펀딩 자금 지원도 하고 있다. 지역 정부에 지원한다든지, 원주민들 공동체 지원을 제공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규제 개발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그 정책을 받아들이고, 실천 했을 때 주민들에게 리베이트를 줘서 행동을 유도하거나 인증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주민들이 모여 공동 대응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파이어 스마트 7대 원칙은 각기 다른 지역 여건과 적용 방식이 있다. 이 원칙들이 어떻게 현실에 맞게 조정되고 적용됐는가. =각각의 지역사회가 자기 특성에 맞게 해결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산불을 한 번 경험했던 지역과 경험하지 않았던 지역의 주민들의 행동과 대응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산불을 경험하지 않은 쪽은 산불에 대한 경각심이 별로 없다. 이 경우 교육 위주로 접근한다. 그래서 직거래 농민 시장 등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 중심으로 교육을 한다. 즉, 산불 위험이 별로 없었던 지역이 산불 위험이 높은 지역으로 바뀌었을 때 주민들이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산불을 이미 경험했던 지역은 저희가 가지고 있는 7가지 원칙을 가지고 접근해보면 주민들이 더 적극적으로 저희들의 교육이나 정책을 수용한다. 일례로 자신들의 집을 산불에 훨씬 잘 대응할 수 있는 집으로 수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불 예방 프로그램이 지역 정부나 커뮤니티 입장에서 ‘매력적인 유인’이 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쓰는가. =예를 들어 산불 피해 완화 전문가들을 조직해 활동한다. 이들은 각 집을 방문해 집들이 산불에 대해 얼마나 취약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평가해주고 집 주인들에게 권고한다. 또 지역 정부와 협력해 각종 주택 규제 기준들에 조언을 해준다. 공원 같은 경우 연료 저감이라고 해서 불에 탈 수 있는 것들을 사전에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각종 안내판을 붙여 공원에 오는 사람들에게 산불에 대해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을 알려주면서 교육 효과도 누린다. 이 외에도 지역사회 축제 등에 참석해 부스를 설치해 주민들을 만나 적극적인 교육을 진행하는 ‘레프리젠터티브’(representative)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일종의 지역사회 챔피언이라 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아주 모범적이고 공익적 역할을 수행하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파이어 스마트는 교육과 캠페인을 통해 주민 인식을 바꾸는 데 노력해 왔다. 어떤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는가. =‘지역사회 공동체에 대한 인증 제도’다. 이런 인증 제도를 받은 공동체에서는 공동으로 자기들이 산불 위험을 감수하는 여러 가지 행동을 한다. 자기 집 정원에 탈 수 있는 연료를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한 번 화재가 난 뒤 어떤 집이 더 잘타는지를 연구했는데, 대체적으로 파이어 스마트에서 제시했던 권고 사항을 지킨 집들은 화재를 덜 당했다는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지역사회 공동체 인증하고도 연결이 된다. -파이어 스마트 인증 제도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2021년 시작한 프로그램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판매자들과 협약을 맺어 구매자들로 하여금 산불을 대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이를 테면 식물판매자와 파트너십을 맺고 시작한 프로그램은 식물 판매시 태그를 붙여 구매자가 구매 단계부터 어떤 식물이 산불에 대해 강한지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해당 식물은 어느 종이어도 상관없고 구매자들은 어느 구획이든 심을 수 있다. 식물판매처 뿐 아니라 건설 자재를 판매하는 숍, 철물소 등과도 파트너를 맺어 주민들이 집을 짓거나 보수하는 과정에서도 산불 취약 자재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식으로 현재까지 65군데와 파트너십을 맺었고 이 중에는 캐나다의 유명 체인점들도 있다. -파이어 스마트 BC는 향후 어떤 분야에 가장 역량을 집중할 계획인가. =도시 설계를 하고 건축물 규제를 하고 있어 새로 집을 짓거나 기존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산불에 대응하는 원칙들이 정책이나 규제를 통해서 파이어 스마트가 적용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려고 한다. 또 보험 산업과 연계하려 노력하고 있다. 주택 소유자가 파이어 스마트에서 얘기한 권장 사항들을 실천했을 때 실질적인 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 산불에 대응하는 행동들을 집주인들이 적극적으로 취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 외에 산불이 일어나 피해를 입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집을 짓는데 산불에 취약한 자재를 쓰는 등 행동에 대해서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어떻게 하면 행동 변화를 가져오는지, 사람들의 행동을 어떤 방식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려고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3

오징어 판 돈으로 무기 구입… 일본군 침범 맞서 7차례 격퇴

독도 지키는 군대·경찰 없던 1953~56년까지 헌신적 수호 활동 1954년 日 전함 2척을 박격포 발사해 상륙 막은 ‘독도대첩’ 전훈 의용수비대기념관엔 1905년 패배한 러 발틱함대 유물도 보관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의 의용수비대 석포에서는 맑은 날이면 92㎞ 거리의 독도가 한눈에 보인다. 안용복 기념관을 나서면 인근에 독도 의용수비대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2개 층에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의용수비대원 33인의 독도 수호 활동을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키는 군대나 경찰이 없던 1953년-1956년까지 독도 수호를 위해 울릉도 주민들이 만들었던 자경단이다. 1956년 경찰에 독도 수비 업무와 장비들을 인계할 때까지 밤낮으로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이 기념관이다. 의용수비대 대장은 한국전 상이용사이자 육군 특무상사 출신의 울릉도 최고 부자 홍순칠이었으며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 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이 되었다. 1952년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세 차례나 독도를 무단 침범했다. 이때 일본은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으로 희생된 150여명의 한국 어부들을 기려 세운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코카무라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五箇村竹島)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이에 대항하여 홍순칠과 울릉도 청년들이 1953년 4월 20일 결성한 것이 독도의용수비대다. 의용수비대는 전쟁의 와중에 7차례나 전투를 해 일본에 빼앗길 뻔 했던 독도를 지켜냈다. 독도를 수비할 무기들도 홍순칠 의용수비 대장이 부산으로 가 울릉도 오징어를 판 돈으로 구입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의 서도 150m 걸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해 7월 해상보안청 순시선 치마루호가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 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이 수비대가 일본에 맞서 벌인 실질적인 첫 전투이다. △ 독도침범 일본 순시성 여러차례 격퇴 1954년 5월 23일에도 해상보안청의 1000t급 무장 순시선 즈가루호가 침범하자 격퇴했고, 5월 29일에는 일본 어업 실습선인 450t급 다이센호가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다에센호에 승선, 격렬하게 항의해 퇴각시켰다. 1954년 6월에는 홍순칠 대장 등이 독도의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같은 해 7월 28일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나가라호(270t급)와 구르쥬호(270t급) 2척이 동시에 위협 사격을 가하며 독도를 침범하자 의용수비대원들이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1954년 8월 23일에는 독도를 침략하려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450t급 무장 순시선 오키호를 향해 기관총 600발을 발사해 격퇴시켰다. 1954년 10월 2일에는 2척의 전함이 동시에 독도 영해를 침범하자 대포를 발사하며 격퇴시켰다. 일본의 독도 침공 작전은 1954년 11월 21일 아침 6시경에 시작됐다. 450톤급 헤쿠라호와 450t급 오키호 두 척의 일본 전함은 동도와 서도 방향에서 동시에 독도로 접근해 왔다. 이때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는 박격포를 발사해 두 전함의 독도 상륙을 저지시켰다. 이 전투는 후일 독도대첩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켜냈다. 경찰 인계 때 10명의 의용수비대원들은 경찰 소속으로 전환해 이후에도 독도를 지켰다. 의용대원들은 독도에 상주하며 갈매기 알로 배를 채우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독도를 지켜냈다. 울릉도 주민들도 의용대원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며 헌신적으로 도왔다. 이들이 후예가 지금 독도를 방어하고 있는 독도경비대다. 울릉도와 울릉도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애지중지 하는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섬은 독도일 것이다. 여전히 일본이 침략하러 호시탐탐 노리는 국경의 섬, 심지어 일본은 정부의 공식 섬 통계에도 독도를 자국의 섬으로 포함시켜 놓고 있다. 그럼에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를 받는 우리 땅임을 국민들은 모두가 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다녀왔고 누구나 생애 한번은 독도에 가는 꿈을 꾼다. 그런데 육지 사람들은 독도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울릉도란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울릉도가 없었으면 독도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울릉도가 있어서 독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는 역사 시대 내내 변함없는 진리였다. 고대 국가 우산국부터,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 대한민국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소중한 우리 땅 독도를 지켜온 것은 울릉도 섬사람들이었다. 울릉도 사람들이 조각배를 타고 그 험한 바다를 건너가 독도에 거처하며 해산물을 채취해 살아갔다. 독도를 침탈하려는 왜국과 일본에 맞서 싸우고 마침내 지켜낸 것도 울릉도 사람들이다. 그 증거가 바로 독도의용수비대다.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된 기념관 의용수비대 기념관에는 러일전쟁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러시아제 청동 주전자다. 1905년 러일전쟁 막바지에 발틱 함대 소속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서 쓰던 것이다. 한동안 보물선으로 세간의 화제가 됐던 그 배다. 돈스코이호 함장은 일본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돈스코이호는 끝까지 일본에 항전했다. 힘에 부친 돈스코이호 함장은 결국 전함을 스스로 침몰시키기로 결정한 후 러시아 해병 570명을 울릉도에 상륙시켰다. 돈스코이호는 침몰했고 이 과정에서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할아버지 홍재형이 러시아 해병 구제에 나서 많은 목숨을 살렸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홍재형이 돈스코이호 함장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 금화와 청동 주전자였다. 석포 마을 경로당 옆, 밭에서 노인 한 분이 잡초 제거 작업 중이다. 오래 묵혀두었던 밭에 다시 나물 재배를 시작하려고 돼지풀 등을 뽑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30여년을 뭍으로 떠돌다 노년에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49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당시 울릉도에는 오징어도 잘 나지 않았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먹고 살길을 찾아 뭍으로 나갔다. 뭍에서는 주로 건설 현장 ‘노가다’(막노동)를 했다. 한때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까지 떠돌았다. 주로 대구의 건설 현장에 있으면서 ‘노가다’ 십장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 다 키우고 결혼까지 시키다 보니 중년의 사내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거리도 없고 그래서 다시 고향 쪽으로 눈을 돌렸다. 대부분의 밭은 고향 떠날 때 팔아버렸고 아주 조금 남겨둔 밭뙈기에 참고비 나물을 재배하려고 다시 개간 중이다. “옛날에는 나물을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자기 먹을 거나 했지. 요새는 판로가 있으니 돈이 되지.” 겨울에는 자식들이 사는 대구의 집으로 가서 지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울릉도에 산다. 빈집을 빌려 지내지만 그래도 고향이라 마음은 편하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이는 행복하다. 고향을 잃어버린 시대. 섬을 고향으로 가진 이들은 행복하다. /강제윤(시인·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3

전통 모델·위성 감지·AI 기술 결합 ‘다층 대응’ 구축한 캐나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산림 면적을 보유한 나라 중 한 곳이다. 캐나다는 전체 국토 면적이 약 998만 ㎢에 달하는데 약 38%인 347만 ㎢가 산림으로 구성돼 있다. 캐나다 산림 면적은 세계 산림 면적의 약 9%에 해당할 정도로 넓어 그만큼 산불이 잦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더해 지구 온난화 가속화에 따른 ‘열돔 현상’이 캐나다를 뒤덮으면서 매년 수천 건의 산불과 맞서 싸우고 있다. 캐나다 산림청(NRCan)에 따르면 지난 한해동안 캐나다에서 산불로 소실된 면적은 약 5만3천㎢로 캐나다 산림 면적의 1.5%가 불에 탔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후변화로 인해 고온·건조·강풍 등 극단적 기상 조건이 빈번해진 탓에 산불 발생 가능성과 피해 규모가 커지고 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산불 발생 변수에 대비할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는 한발 앞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산불 예방 활동에 집중하는 동시에 예기치 못한 산불이 일어나더라도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캐나다 산림청이 운영하는 캐나다산불정보시스템(CWFIS·Canadian Wildland Fire Information System)을 통해 첨단 예측 체계를 구축하고 관련 기술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와 함께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파이어스마트(FireSmart) 프로그램을 통해 ‘산불 피해 최소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온난화 ‘열돔현상’에 매년 수천 건씩 산불 발생 2500여 기상관측소 데이터 활용하는 CWFIS 산불위험지수·화재행동예측지도 만들어 대비 정확도 위해 2029년엔 ‘소형위성’도 띄울 계획 지역사회-정부-주민 협력 ‘파이어스마트’ 가동 교육·식생관리 등 ‘피해 최소화’ 환경구축 힘써 전통 시스템에서 첨단 예측으로 캐나다 산림청이 운영 중인 CWFIS는 위성 관측, 기상 데이터, 식생 정보 등을 매일 통합해 전국의 화재 위험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국가 플랫폼이다. CWFIS는 캐나다 및 미국을 포함한 2천5백여개의 기상관측소 데이터를 활용해 기상관측자료, 연료상태, 지형자료 등을 파악하고 산불 위험지수 및 화재행동예측을 지도로 만들어 산불 위험에 대비한다. 산불 지도화를 통해 통해 산불이 발생했을 때 대응 자원을 즉각 배치할 수 있고, 지자체나 일반 시민이 지역 화재 위험도를 확인하고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 위성 관측을 통해 산불 발생을 감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산불 대응 기관들이 산불 초기 대응에 신속하게 나설 수 있도록 자원을 배분하는 등 전략을 수립하는 자료를 제공한다. 이 가운데 ‘Forest Fire Behaviour Prediction(FBP·산불확산예측)’ 시스템은 바람, 습도, 연료 종류에 따른 화재의 확산 속도와 강도를 예측하는 모델로, 현장 소방대와 지방정부가 자원 배치와 대피 판단에 활용하고 있다. 다만 데이터의 품질과 현실 적용에 있어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어 캐나다는 최근 위성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첨단 산불 예측 기술을 적극 개발하고 있다. 캐나다 우주국의 ‘‘WildFireSat’ 프로젝트는 소형 위성 여러 대를 띄워 캐나다 전역의 열 신호와 연기를 실시간 감지하기 위한 것으로 2029년 발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기존 FBP등 모델의 정확도를 위성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로, 발화 초기의 작은 불씨까지 포착해 대응하는 것이 목표다. 이같은 노력은 국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여러 차례 대형 산불을 겪으면서 나름의 대책들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발표한 종합대책에는 기상청과 산림청을 주축으로 ‘드론·위성·CCTV를 활용한 입체적 산불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획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로 구체적 실행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다. 기상청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산불 대응에 있어 기상 관측 및 예보, 경보 발령 등 역할이 대부분이다. 산불 발생 후 진화, 자원 배치, 화재 확산 속도 예측 등은 주로 산림청, 소방청, 지자체 등에서 맡고 있어 통합된 시스템 하에서 인공지능에 기반한 산불 대응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주변국이나 캐나다·미국처럼 산불발생 가능성과 화재행동 예측, 자원배치까지 아우르는 종합 예측 모델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산림청 및 국립산림과학원 등이 전국 각 지역별 지형과 산림 현황, 기상청 예보 정보(온도·습도·풍속 등)를 활용해 산불 위험도가 높은 지역을 예측 제공하는 국가산불위험예보시스템이 운영 중이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으로서는 산불 예측과 확산 모델 전체를 커버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하고, 산불 예방에 주력하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 비해 연료(낙엽, 식생 밀도)상태, 지형의 복잡성, 국지 기후 등 변수 반영에 취약한 만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및 발전이 수반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정부 주도 개발 동시에 지역사회-주민 협력 프로그램 마련 이와 함께 산불 피해를 줄이고자 지역 사회-정부-주민이 협력하는 파이어스마트(FireSmart)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하다. 파이어스마트는 캐나다 전역 산불 위험을 줄이고 지역사회 산불 탄력성을 높이고자 고안된 종합프로그램이다. 파이어스마트는 △교육 △식생 관리 △법률 및 계획 수립 △개발 시 고려사항 관리 △주택과 기반시설 생존 가능성을 높일 개발 규제 도입 △기관 간 협력 △교차 훈련 △비상계획 수립 등 7가지 핵심 원칙 하에 운영되며, 이는 각 지역 파이어스마트 코디네이터와 지역 대표 등이 주도하고 실행한다. 지난 7월 방문한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파이어스마트 BC’의 경우 ‘지역사회 중심 예방문화 확대’를 목표로 산불 위험 인식을 높이고 예방과 완화에 필요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산불 위험지역 내 산불 확산 원인이 될 수 있는 나뭇가지나 낙엽 같은 ‘연료’를 효과적으로 관리해 위험을 줄이는 식생 관리부터 각 주의 공공 정책과 통합 토지 이용 계획, 법률 명령 등을 정비해 화재에도 잘 견디는 건축자재로 주택을 짓는 등 방법을 통해 생존력을 높이고 있다. 특히 산불은 ‘정부만이 아닌 주민들과의 공동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주민 중심에서 산불 예방 활동 및 실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한 점이 특징이다. 신문, TV 등 전통적 방식에 더해 SNS 등 젊은 층이 향유하는 플랫폼을 통해 산불 예방과 행동 요령, 파이어스마트 BC 활동 관련 홍보·소통 등에 나서고 있다. 이를 통해 주민-지방자치단체-소방 등이 산불 예방과 안전에 공감하고 대처 요령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모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민이 주체가 되는 산불 예방 활동인 셈인데 이는 국내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산불의 직접적 피해자는 다름 아닌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발생한 대형 산불은 비단 산과 임야 뿐 아니라 도시 주택과 도로, 학교 등 주거지역을 위협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9년 강원도 고성·속초 산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연이 피해를 입는 데 그치지 않고 주민의 생활과 생명을 위협했다. 때문에 산불이 ‘주거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점에서 ‘불이 나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 주민과 힘을 함께 모으겠다는 캐나다의 정책은 국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2

日 막부와 담판 안용복, 왕조가 버린 섬들 지키려 고군분투

△ 울릉도의 오지 중의 하나인 석포 해담길 내수전 구간이 끝나면 석포-추산 구간으로 이어진다. 이 길로 들어서기 전에서 석포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석포마을에는 안용복기념관과 의용수비대기념관, 석포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일주도로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석포는 울릉도의 오지였다. 정들포, 정들께라고도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울릉도에서도 워낙 험한 산속 오지라 처음 찾아왔을 때는 막막하지만 막상 떠나려면 정이 들어서 떠나기 힘들 정도로 정이 많은 산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들포였다. 석포 일출전망대는 의용수비대 기념관과 붙어 있는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망루 역할을 했다. 전망댕에서는 울릉도의 3대 비경인 삼선암과 관음도, 공암을 모두 볼 수 있다. 1693년 日 어부들과 조업권 실랑이 벌이다 오키섬으로 끌려가 에도 관백 앞에서 ‘독도는 조선땅’ 주장, 출어 금지 서계 받아내 1948년 美 B29 독도 해상 폭격 연습… 어민들 집단 희생 비극 안용복 기념관은 왕조가 버린 섬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안용복(安龍福. 1658~?)을 비롯한 백성들의 분투를 기념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伯耆)주 요나코무라(米子村)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는데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숫자가 적었던 탓에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 오키(隱岐) 섬으로 끌려갔다. 여러 경로를 거처 에도(江戶) 관백의 심문을 받고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납치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결국 “죽도(울릉도)와 자산도(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인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법 월경을 해 울릉도 근해에서 조업을 계속했다. 안용복은 조정의 관원으로 위장한 뒤 2차 도일을 감행해 담판을 짓고 돌아오려 했으나 실패하고 송환됐다. 조선 조정은 그런 안용복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사형을 시키려다 감형해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유배 이후 안용복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지금 안용복은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후대의 추대일 뿐이고 그가 살던 당시에는 전라 좌수영의 노꾼 출신이 어부였다. 국가가 못한 일을 해낸 백성. 안용복은 장군 그 이상으로 추앙받고도 남을 공적을 세웠다. 장군들도 지키지 못한 독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서린 한 안용복 기념관에는 독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는 전시물도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 말고 우리가 독도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 독도에서도 미군에 의한 한국인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안용복 기념관에 그 증거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 군경에 의한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 양민학살은 많이 밝혀졌지만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충북 영동군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300여명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 사건 정도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섬 지역에서도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적지 않았다. 여수의 섬 안도에서의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그 중 하나다. 한국전쟁 시기 여수에서 섬으로 피난을 오던 300여명의 양민을 실은 피난선을 미군 제트기가 무차별 폭격했다. 안도의 이야포 해변이 그곳이다, 이 폭격으로 한국인 150여명이 숨졌다. 그 증거가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새겨져 있다. 1948년 6월8일 미군은 사전 통보도 없이 독도를 타깃으로 폭격 연습을 시작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 공군 제93중폭격비행단의 B29 폭격기 20대가 독도 주변 해상에 무차별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독도 앞바다에서 미역을 채취하고 조업하던 울릉도와 강원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후 미 군정청은 어선 11척이 파괴되고 어민 1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업 중이던 어선이 30여척이었고, 사상자도 150명이 훨씬 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생존 어부들은 “30여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니 150명 이상 숨졌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어민들 피해에 대한 정당한 조사 이뤄져야 당시 독도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년 9월16일)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미군정청은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지만 30여척이나 조업을 하는데 미군 조종사들 눈에 어선들이 보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묻혀버릴 뻔했던 미군이 벌인 참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다음날인 6월9일 독도로 조업을 나온 어민들에게 구조된 장학상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 목격자 덕분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선들은 조업하고 일부 어민들은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 독도로 접근하는 한 무리의 비행기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모두 4차례에 걸친 폭격과 총격으로 어민들 대다수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미국은 처음 폭격 사실 자체를 부인하다 6월17일이 되어서야 폭격을 시인했다. 7월 9일 미 군정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해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완료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며 사건은 덮어지고 말았다. 진상규명도, 피해 배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덮어지자 강원도와 울릉도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1950년 6월 8일, 독도 동도의 몽돌해안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위령비 제막식에는 조재천 경상북도 도지사와 해군 의장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참혹한 사살이 조난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비석은 1959년 유실됐고 2005년 경상북도가 독도 동도에 다시 세웠다. 원래 비석은 2015년 바다에서 발견돼 안용복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매년 6월8일 독도에서 희생 어민 위령제를 지낸다. 기상이 나빠 독도 접안이 어려우면, 안용복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많이 늦었지만 정부는 이제라도 미군에 의한 독도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다시 규명해야 마땅하다. 조난자위령비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수백년 전 일본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이란 문서를 받아냈던 어부 안용복의 후예인 우리 어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주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지름길이다. 조난이 아닌 폭격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들 그들을 위한 비석을 세워야 한다.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 그것만이 억울한 양민들의 죽음에 작은 위로라도 될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샛길로 들어선 안용복 기념관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배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2

어머니의 정신과 해풍국수의 전통 지키고 싶어

이순화 여사는 노동을 감당하지 못할 나이에 이르면서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업장에 앉아 국수를 판매한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하지 않아 다방면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홍보대사’ 역할은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크게 되지는 않지만 필생의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인 아들이 고마웠다. 돈이 우선인가, 소멸되어가는 소중한 가치가 사장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가장 늦게 시작한 국수시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밥벌이의 지겨움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들 역시 20여 년 잘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가업을 이어받은 것이기에 정말 고마웠다. 20여 년 직장 정리하고 가업 잇는 아들 10년 간 어머니 감각 익히며 공부 매진 어머니가 지켜온 가치 훼손 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품질에만 정성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조언 따라 상표등록·최신 장비 갖추며 준비 ‘착착’ “해풍국수 먹고프면 구룡포로 오시라” 하동대 대표, 지역경제 상생 소명 전해 전통시장에서 상인연합회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순화 여사는 구룡포 전통시장의 현대화는 물론 좌판 상인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노후에 이르러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이런 노력에 아들은 그림자처럼 도움이 되고 있다. 그 많은 국수공장이 사라졌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는 이유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을까요? 젊었을 적에는 자식들을 위한 희생으로, 나중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으로 일을 그만두지 않잖아요. 그 삶이 고귀해 이 사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어머니에게 국수는 남편과 같고 친구와 같고 없는 애인과 같다는 말씀에 도저히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건강하게 천천히 하고 싶은 대로 하시길 바랄 뿐이지요.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선물해준 어머니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구룡포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게 하고 싶어 하동대 대표는 홍보의 중요함을 절감하고 있다. 알아야 면면장(免面牆)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사회정보 시스템을 활용한 홍보는 일부러 거부하고 있다. 대량생산 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2억 원가량을 투자해 최신식 장비를 설치하고 최상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언제까지 이 공장을 가동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발전 속도가 느린 사양산업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멈추지 말아야 할 의무가 그에게 있다. 해풍국수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구룡포를 방문해 해풍국수를 끓이는 점포에서 맛을 보면 좋을 테고, 그렇게 사람을 불러 모으면 구룡포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해풍국수는 직접 방문해 구입할 수 있는데 생산량을 적정하게 조절하다 보니 전화 주문을 하면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고객들은 그런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 대표는 배짱이 아니라 해풍국수를 먹고 싶으면 구룡포로 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룡포의 발전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려 그는 말했다. “인문학은 발걸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컴퓨터로 검색하고 모바일로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경지라는 말로 해석되었습니다. 와서 보고 느끼고 감동하고, 건전한 소비를 통해 지역 경제에 기여한다면, 음식만이 아니라 지역의 정서를 고스란히 느끼고, 그다음 자신의 페이지에 그걸 기록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이 확산된다면 지방 소멸이라는 말이 떠돌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여행이 관광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룡포는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오세요, 그리고 느껴 보세요. 구룡포는 국수만이 아니라 보고 느낄 것들이 정말 많으니까요. 구룡포 대게도 참 맛있는 음식입니다. 저렴한 생선회는 덤이고요. 구만리 청보리밭을 보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겁니다. 만월의 달밤에는 어쩌면 신비한 환각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10년 동안 어머니의 감각을 익혀 하 대표는 자신의 사업만 생각하지 않는다. 구룡포의 발전을 위해, 나아가서는 포항시민들과의 상생을 위해 작으나마 힘을 보태고자 한다. 물론 어머니가 우선이다. “이제 쉬셔도 되는 연세입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잠시도 일을 접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는 분입니다. 장터가 생활의 터전이기 때문이죠. 4남매 중 제가 장남입니다. 위로 두 누님은 내외가 다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요. 남동생도 있지만, 어머니의 인생을 완성하려면 제가 가업을 잇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의 후회도 없어요. 다만 더 잘하고 싶습니다.” 하동대 대표는 주어진 소임에 충실하고, 욕심은 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품질에만 신경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투자를 하고, 홍보를 강화하고, 대량생산은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경영을 하면 훨씬 사정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종 규제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싸우고 싶지 않다. 상표등록 등 다른 준비는 다 해놓았다. 대기업과 상표를 공유하며 매칭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지만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지켜온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구룡포의 바람과 햇살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때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고생되더라도 어머니의 정신을 지키고, 가업을 이어받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도 해풍국수의 전통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충분하다. 10년 동안 어머니의 감각을 익혔고, 그걸 기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부는 항상 진행형이다. 위기를 맞은 인생음식 구룡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줄었다.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길은 기본에 충실하는 것임을 그는 어머니에게 배운다. 국수가 잘 팔리는 날도 있고 파리만 날리는 날도 있다.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가만히 말씀해주셨다. 그 많던 국수공장이 다 사라져도, 가장 늦게 시작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 밥 먹고 산 일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런 생각을 하면 금세 겸손해진다, 저 간판을 보라, 우체국장이 만들어준 저 간판이 우리의 얼굴 아닌가. 저 간판의 변치 않는 쨍쨍함, 그 어떤 붓글씨 대가의 필체보다 낫고 비바람 맞고 견딘 저 나무의 결만 보아도 마른 눈물이 난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고 이 길을 선택해준 네가 더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혼잣말하듯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구룡포의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창망하다. 그 깊이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순화 여사의 마음 역시 그 깊이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 세대를 뛰어넘어 면면히 유지되는 극명한 이유다. 모든 잔치에 국수는 반드시 등장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이 인생 음식이 조금씩 소외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대량과 편리, 파격적인 저가로 밀어붙이는 음식들이 식탁을 위협한다. 그러나 라면과 빵, 인스턴트로 대체되는 음식으로 간단하게 우리 인생을 때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끝〉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12

속리산 법주사 정이품송과 부인 정부인송

우리가 흔히 짐승이라 부르는 동물이나 새들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영역을 지킨다. 수천 년 동안 대를 이어 마치 개미가 쳇바퀴 돌 듯 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계절을 맞고 보내는 사이, 특히 갈바람이 나뭇잎을 물들이는 가을이면 어딘지 모르게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럴 때면 어느 때보다 생각이 깊어지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가을이 짙어가던 어느 날, 아우 대붕과 함께 대구에서 출발해 속리산 법주사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과 그의 부인 정부인송을 만나러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속리산(俗離山)은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중간 허리에 솟은 해발 1058m의 명산이다.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지녀 예로부터 수행과 깨달음의 도량으로 여겨졌다.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 속에는 천왕봉과 문장대 등 고봉이 즐비하고, 문장대에 오르면 백두대간의 능선이 파도처럼 굽이친다. 사시사철 다른 빛깔의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보은 장안면 600살 된 소나무 ‘정부인송’ 치맛자락처럼 두 갈래로 펼쳐진 줄기들 천연기념물 제352호… 평안 품은 名木 세조의 벼슬을 받은 소나무 ‘정이품송’ 600년 세월 외줄기 곧은 자태 ‘남성적’ 천연기념물 제103호, 정부인송과 부부 산기슭에는 1500년 역사의 신라 고찰 법주사가 자리하여 불심의 중심을 이루고, 그 속의 팔상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목탑으로 보물처럼 남아 있다. 이렇게 속리산은 자연과 불심,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성산으로, 지금도 사람들에게 세속을 벗어나 마음의 고요와 깨달음을 찾게 하는 영산이다. 속리산의 치맛자락 아래, 마치 가을 하늘의 별빛처럼 박혀 있는 정이품송과 정부인송을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갈바람을 헤치며 달리는 고속도로 위로 펼쳐진 황금빛 들판과 붉게 물들어가는 숲의 풍경은 내 지나온 세월처럼 아득했다. 자연은 ‘가을’이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또한 노거수를 찾아가는 순례길 같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자동차는 순식간에 고속도로를 벗어나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49-4번지로 향했다. 그곳에 정부인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선비의 아내답게 풍채는 점잖고 단정하여, 한 집안의 맏며느리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가지들은 동서남북을 고루 감싸며 너그럽게 품어주는 여인의 품을 닮았다. 나이 600살, 높이 15.2m, 가슴둘레 4.7m. 높이 70cm 지점에서 두 갈래로 나뉜 줄기 하나는 3.3m, 다른 하나는 2.9m였다. 동서로 23.8m, 남북으로 23.1m나 되는 치마 품의 그늘에 서면, 부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한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의 삼가천을 안고, 법주사로 이어지는 장안로를 곁에 두고 살아간다. 지나가는 이들을 굽어보며 유유자적 세월을 이어가는 품이 건강하고 고요하다. 사람들 또한 정부인송의 미모와 하늘로 뻗은 두 줄기의 힘찬 기운에 매료되어 많이 찾고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경외감이 들어 매년 음력 초이튿날, 정부인송 아래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마을은 평화롭고 주민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라에서도 1988년 4월 30일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정부인송의 치맛자락 속에는 세월의 나이테만큼이나 깊은 연륜과 지혜가 깃들어 있다. 지난 폭설에 몸이 다소 상했지만, 곧 회복해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 되찾았다. 그 회복력은 놀라우리만큼 강인했다. 그래서 보은 사람들은 정이품송과 부부의 연을 맺어주어 ‘정부인송’, ‘보은의 딸’, ‘보은의 며느리’라 부르며 아끼고 사랑한다. 그 곁에 서면 누구라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긴 듯한 평안을 느낀다. 그녀의 남편은 바로 조선 세조로부터 정이품 벼슬을 받은 정이품송이다. 법주사 입구, 이곳에서 7km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수많은 나무 가운데 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은 나무는 아마 이 정이품송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세조 10년(1464),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였다.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려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가마가 걸릴 듯했다. 세조가 “가마가 걸리는구나” 하고 말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다. 또 다른 날, 세조가 비를 피하려 이 나무 아래 머물렀고, 그 충정을 기리기 위해 정이품, 곧 장관급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정이품송은 한때 삿갓처럼 둥글고 단정한 자태였으나, 1993년 강풍에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많이 상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연히 서 있다. 나이 600살, 높이 16.5m, 가슴둘레 5.3m.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오늘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정이품송이 외줄기로 곧게 자란 남성적이라면, 정부인송은 우산 모양으로 치맛자락을 드리운 여성적이다. 서로 닮았으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세월을 견디며 부부의 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 두 그루의 인연을 맺어준 중매자는 다름 아닌 충북 보은의 주민들과 산림청이다. 천지자연의 모든 존재가 이들의 장수와 평화를 축복했으리라. 오늘도 많은 사람이 정이품송 앞에서 부부 인연의 중요함을 인식하며 그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부의 인연이란 무엇일까.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실은 오랜 세월의 실로 꿰어진 인연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연이 있을까. 젊은 날의 설렘이 생활의 언어로 바뀌어도, 그 속에는 서로의 웃음과 눈물이 켜켜이 쌓이며 단단해진다. 옛사람들이 부부를 ‘천지지합(天地之合)’이라 한 것은, 하늘과 땅처럼 서로의 햇살과 그늘이 되어주는 삶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결국 서로의 얼굴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본다. 부부는 소유나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늙어가는 동행자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이라면, 세월의 사랑은 서로의 숨결로 켜지는 등불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다. 오늘 속리산 법주사의 정이품송과 서원리 정부인송을 마주하며 나는 부부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나무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준 보은인(報恩人)의 나무 사랑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부부는 말없이 눈빛으로 약속한다. “내일도, 알콩달콩 함께 걸어가자.” /글·사진=장은재 작가 속리산 국립공원 기념비문의 내용은…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고 옛 문물을 숭상함은 문화 민족의 자랑이다. 웅장하면서도 청아한 영봉과 기암괴석이며 첩첩이 굽이도는 절묘한 계곡과 하늘을 덮는 울창한 숲은 찾는 이로 하여금 한 여름에도 옷깃을 여미게 하고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천년 향기 그윽한 법주사가 그 중턱에 자리 잡아 여기에 불교문화의 정수인 값진 문화제를 간직한 우리의 속리산은 역조의 왕이 행어 하셨고 많은 문인재사에 의하여 시와 노래로 읊어져 천하의 절승으로 널리 알려진 지 오래이다. 이 유서 깊은 지역은 1966년 6월 24일 사적지 제4호로 지정되었고 1969년 1월 21일에는 관광지로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자연보호와 국민의 보건 휴양에 이바지하는 바 지대하다. 1970년 5월 4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이곳에 이르시어 국민 정서 순화의 요람지로서 속리산 국립공원 보호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시고 공원 환경 조성과 사찰 정화에 관하여 구체적 개발 방향을 지시하심과 아울러 정부에서 적극 지원토록 조처하심으로써 1970년부터 사내리 신도시 건설 등 국립공원 연관 사업을 이룩도록 하였고 친히 공원 표제를 써 주시었기 우리는 조상의 얼이 담긴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가다듬을 것을 다짐하고 이에 속리산 국립공원의 연역을 밝힌다. 1970년 10월 3일 충청북도 지사 정해식 엮음

2025-11-12

트럼프, 치즈버거, 그리고 경주 돼지찌개

지난 10월 말. 경상북도 경주가 시끌벅적했다. 21세기 ‘지구 위 최강 2개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최고 권력자 도널드 트럼프와 시진핑(習近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라의 옛 도읍인 서라벌을 찾았다. 그들의 전용기가 착륙한 김해공항에서부터의 비까번쩍한 의전과 그들이 머문 경주 보문단지 숙소 주변 경호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유명인사가 왔다 가면 무성한 뒷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남는다.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경주를 찾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특별하게 수억 원대의 금을 사용해 제작된 신라 금관 모형과 무궁화대훈장을 선물 받고 입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난달 APEC 정상회의 참석 트럼프 ‘k-푸드’와 한국 스타일 별미 지천인데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 요청 안강엔 엄지척 돼지고기찌개 맛집 2곳 진미 맛볼 기회 영영 놓친 듯 안타까워 대부분이 짐작하듯 트럼프는 세계 어느 국가의 통치자보다 ‘이익’을 국제관계의 주요 잣대로 판단하는 인간. 어쨌건 이런 딱딱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경주 APEC 회의에선 트럼프의 ‘욕심 없고 저렴한’ 음식 취향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국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그는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치즈버거’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단다. “채소는 따로, 베이컨은 빼고, 토마토케첩 많이”라는 구체적 요구까지 비서실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문이다. 한국에선 판매되지 않기에 곁들일 콜라는 미국에서부터 공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햄버거에 콜라…. 가진 재산을 헤아리기도 힘든 사람의 음식 취향치고는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시간이 흘러 트럼프가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때, 그는 한국 경주와 거기서 열렸던 APEC을 늘상 즐기던 ‘치즈버거’를 재차 먹었던 도시로 기억할까? 만약 그렇다면 딱하기 그지없다. 경주는 이른바 ‘k-푸드’와 한국 스타일의 별미가 지천인 도시인데. 생각해보자. 제 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총리도 결국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이 사는 공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그게 전용기를 사용한 국빈 방문이건, 좁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한 가난한 사람의 해외여행이건-을 떠나는 건 도착한 여행지의 낯선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느 곳이라 특정할 것 없다. 신문사의 사진기자는 이른바 ‘맛집’을 많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을 1년 365일 떠돌아다니며 혼자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사진기자는 북쪽으론 영주와 안동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경주와 포항, 때로는 푸른 물결 출렁이는 먼 섬 울릉도까지를 오간다. 직업이 그러니 어떤 곳을 지목해 “거긴 가기 싫다”고 말할 방법도 없다. 30년 가까이 경상북도 일대 사진을 찍으러 다닌 사진기자 한 명을 알고 있다. 그가 경주를 수백 번 오갔을 건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일 터. 그가 소개한 ‘숨겨진 경주 맛집’이 몇 곳 있다. 쫄면을 파는 저렴한 분식집에서부터 석쇠에 일등급 한우를 구워주는 제법 비싼 식당까지 프리즘이 넓었다. 가격을 불문하고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곳은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돼지고기는 닭고기와 더불어 동서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육류의 수위(首位)를 다툰다. 닭고기와 달리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돼지고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각종 요리 재료로 사용된 식용 고기일 터. 17세기 초반에 출간된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돼지고기가 ‘신장의 음을 보하고 위액을 충족시키며 간장의 음혈을 보하는 작용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보편의 상식과 달리 적당한 양을 먹는다면 몸에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소고기에 비해 가격도 헐하다.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이 즐기는 이유가 있다. 지척이라 불러도 좋을 거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경주 안강의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군데. 한 곳은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넣은 붉은빛으로 매운 맛을 좋아하는 이들의 혀를 유혹하고, 나머지 한 곳 식당은 얼핏 보기엔 맹물 같은 육수를 넣어 맑은 색깔의 독특함을 유지한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돼지고기와 채소 몇 가지를 넣은 찌개가 ‘놀라운 맛’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 돈 10달러 안팎의 싼 가격으로 맛보는 경주 안강읍의 돼지고기찌개는 각별하다. 낮과 밤 언제 먹어도 소주를 부르는 별미다. 만약 이걸 트럼프가 맛봤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좋아했던 형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다가 죽었고, 그런 이유로 트럼프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들과 손자에게도 금주를 금과옥조처럼 강조한단다. 반주 없는 돼지찌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만에 하나 다시 경주를 오더라도 트럼프의 선택은 돼지고기찌개가 아닌 치즈버거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경주의 애주가들은 이렇게 말할 듯하다. “안타깝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외국인들은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뜨거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삼겹살. 다수의 한국인들이 군침을 흘리게 되는 장면이다. 노릇노릇 잘 익은 삼겹살에 고추와 마늘, 쌈장을 넣어 상추에 싸먹는 방식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매혹시켰다. 당연지사 ‘삼겹살 쌈’은 손꼽히는 K-푸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시인 하재봉은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 잔하며 직장 상사 욕하는 재미에 회사 다닌다’는 내용을 담은 시까지 섰다. 이처럼 삼겹살 구이는 서민들의 가장 만만한 술안주이기도 하다. 삼겹살만이 아니다. 한국엔 돼지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요리가 많다. 돼지 다리를 각종 약재를 넣어 삶아낸 쫄깃한 족발, 구이보다 기름기가 적어 담백한 수육, 내장을 매운 양념에 볶아먹는 곱창구이 등등. 그렇다면 외국에선 어떤 돼지고기 요리를 먹을까? 독일 사람들은 돼지 다리를 오븐에 오랜 시간 익혀 먹는 ‘슈바인스학세’를 즐긴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이 맥주에 잘 어울리기에 독일을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맛보게 된다고. 이탈리아에서는 향신료와 소금을 바른 돼지고기를 일정한 온도와 습도에서 숙성시킨 ‘카포콜로’를 피자 위에 토핑으로 올리기도 한다. 독특한 향과 식감 탓에 호오는 갈리는 편이다. 돼지고기 어깨살을 결대로 찢은 ‘풀드 포크’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주로 먹는다. 고기만 먹기도 하지만, 빵 사이에 넣어 먹는 방식이 보편적이다. 중국 또한 찌고, 굽고, 삶고, 튀기는 등 돼지고기 요리의 방식이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1

19년간 폭설·폭우에 조난 당하고 굶주림에 지친 300여명 구조

△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천국같은 집 한 채 내수전 전망대 가는 길, 내수전 마을 경치 좋은 곳에 홀로 들어선 집 한 채가 있다. 마당에서 앉아서도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관음도와 죽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굳이 전망대까지 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최고의 전망대다. 노부부가 사는 집, 부부는 저동에 새집이 있지만 틈만 나면 오래 전부터 살아온 이 집에 와서 지내다 간다. 특히 여름에는 내내 이 집에서만 생활한다. 고지대라 시원하고 모기도 없기 때문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 일이 없으니 전기세도 안 나간다. 연중 콸콸 흘러나오는 물 또한 더없이 달고 풍족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너른 마당은 캠핑족들에게 놀다 가라고 그냥 내준다. 그래서 해마다 텐트를 들고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가는 이들도 많다. 어차피 산에서 쏟아지는 물 마음껏 쓰라고 한다. 사람들이 와서 지내니 말벗도 되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관광객 상대로 무슨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속이 좋다. 종일 좋아하는 노래 틀어놔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어서 더욱 좋다. 오늘도 작은 카세트에서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온다. 노래를 들으며 할머니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겨울에 땔 장작을 패고 있다. “여기 있으면 몸 안 아파요. 시내 가면 가만히 들어앉아 테레비나 보지. 공기도 좋고 앞에 훤하니 좋아요.” 내수전 전망대 가는길 외딴 집 동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여 캠핑족들 오면 너른 마당 제공 원시림 숲속 ‘영혼의 길’ 거닐며 진객 붉은배오색딱다구리 조우 사람들 떠난 백운동엔 구름만 할머니는 이 산중 옛집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다. 전부 다 내 것 같고 마음이 푸지다. “돈 많으면 뭐해요. 죽어서 가져가나. 살았을 때 묵고 살면 되지. 마음이 부자라야지.” 할아버지와는 동갑인데 호적에는 4살이 더 많게 올라 있다. 사촌 형 호적에 대신 오른 바람에 그리됐다. 할머니는 나물 농사를 지었고 할아버지는 배 만드는 목수가 천직이었다. 비탈밭에 나물 농사를 많이 했지만 아들이 와서 다 처내 버렸다. 부모님 고생 그만하라고. 그래서 나물 밭은 참고비 밭만 아주 쪼금 남았다. “나물 중에는 참고비가 젤 맛있어요. 고사리 증조할아버지쯤 되지.” 할아버지는 본래 포항, 제주, 부산, 울산 등지를 떠돌며 배 짓는 목수로 일하다 울릉도로 들어와서는 오징어 배 짓는 ‘도대목’을 했다. 배 짓는 목수 중에서도 우두머리를 하셨단 말씀이다. 배 목수는 집 목수보다 기술을 몇 배 위로 쳐준다. 그만큼 공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배 목수는 집을 지어도 집 목수는 배를 못 짓는다. 죽은 사람 널(관)도 많이 짰고 강고(노 젓는 배)들도 많이 만들곤 했다. FRP로 배를 만들게 되면서부터 일거리가 없어져 배 목수 일을 그만뒀다. “옛날엔 죽도 앞바다에 오징어가 바글바글했어요. 초저녁에 나가 한배 잡고 또 날 샐 때 가서 한배 잡아오고 그럴 정도였죠.” 그 시절에는 명태도 많이 났다. 처녀 시절 할머니는 땔감용 나무하러 다니고 오징어 내장 따서 돈 벌러 다니느라 학교 공부를 못했다. “학교는 문 앞에도 안 가봤어요.” 마을 사람들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키가 안 큰다고 걱정 할 정도였다. “일 좀 그만 시키라고 시집 못 보낸다고 그랬어.” 동생들이 많아 동생들 업어 키우고 물 길러 다니라고 학교를 안 보내줬다. 7살 때부터 동생들 업어 키웠다. 명태, 오징어 손질해서 돈 벌어 동생들 가르치고 25살 때 중매로 신랑을 만나 결혼했다. “신랑을 잘 만났어요.” 저동 마을, 한동네 사는 총각이었다. 지금의 할아버지다. “봐라 세월이 얼마나 좋으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기나긴 인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찾은 안식. 그 안식의 시간이 할머니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또한 울릉도가 주는 행복이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귓가에 울리는 할머니의 충고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부지런히 놀러 다니소.” 일 열심히 하지 말고 부지런히 놀러 다니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인가. 내수전 마을 삼거리에서 석포 방향으로 5분 남짓 걸으면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다시 숲길이 시작된다. 지금부터는 포근한 흙길에 더없이 호젓한 숲속 오솔길이다. 이 숲길에는 중간중간 저동에서 석포로 전기를 운반하는 전선과 전봇대가 눈에 띄는데 이 또한 사람이 오고 가던 옛길의 흔적이다. △ 옛 개척민 정매화가 살던 골짜기 그 외에는 내내 원시림의 숲길이다. 육지에는 사라지고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와 키 작은 대나무인 이대, 동백나무 들이 길을 따라 도열해 있다. 가을 숲은 더 바랄 나위 없이 고요하다. 이 고요함 속에서는 작은 시냇물 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린다. 이 또한 고요함의 증거다. 또 한동안 길에만 몰두해 걷는데 느닷없이 쉼터가 나타난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정매화골이다. 옛날 개척민 중에 정매화란 이가 살던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매화가 살다 간 뒤 이곳은 1962년 9월부터 이효영씨 부부가 삼남매와 살았다. 이씨 일가는 1981년까지 19년을 이 외딴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이씨 부부의 이름이 남은 것은 그들이 이곳에 살면서 폭설, 폭우에 조난 당하거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300여명이나 구조한 미담이 있기 때문이다. 1981년 11월27일 자 대구 매일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이씨 부부는 1982년 선행군민 표창을 받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숲속의 오솔길은 흙길이다. 이 흙길은 오래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다. 흙길은 발바닥이나 무릎에도 무리가 가지 않는다. 충격을 반사해내는 시멘트 길과 달리 흙바닥이 충격을 흡수해 주기 때문이다. 길가의 오래된 나무들이 뿜어내 주는 피톤치드는 내 몸 안의 나쁜 세균들만이 아니라 내 영혼을 좀먹는 병균들까지 박멸해 주는 듯하다. 어찌 영혼의 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이 숲길에서 진객을 만났다. 나무 둥치에 몸을 바짝 붙이고 먹이 사냥에 열중해 있는 새. 깃털이 아름다운 붉은배오색딱다구리. 한국에서는 번식이나 월동을 하지 않고 우연히 들르는 나그네새라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한다. 경기도 광릉, 옹진군 소청도 등에서 관찰된 기록이 있는데 봄에 북상하고 가을에 남하한다. 남쪽 먼 나라로 가다가 울릉도에 들렀다. 반갑구나! 나그네새여. 그대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주린 배 많이 채우고 가시라. △ 구름도 쉬어가는 백운동마을 풍경 이제부터 길은 울릉읍 저동을 완전히 벗어나 북면 지역으로 들어선다. 울릉도의 북단이다. 숲속에 산장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이 숲에도 몇 가구가 살았었지만 1960년대 말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 이후 외딴 집들은 모두 이주당했다. 이 숲의 꼭대기 산정에도 10여 가구가 살았었다. 백운동 마을이다. 그야말로 구름도 쉬어가는 산 정상에도 사람이 살았었다. 조금이라도 평지가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깃들어 살던 울릉도 사람들. 이제는 백운동도 폐촌이 되었고 그저 구름이나 가끔 쉬어가는 구름 마을, 진짜 백운동이 되었다.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마을은 독거 가구 이주정책과 화전 금지 조치로 더이상 존립이 불가능해 졌고 백운동 주민들은 모두 뭍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한 시대가 오고 갔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1

산불과의 싸움 변수는 ‘하늘’ 美 통합 대응 전략서 배운다

지난 3월 말, 영남권을 휩쓴 역대 최악의 대형 산불은 초속 25m/s의 강풍을 타고 불길이 삽시간에 확산되며 수천 헥타르의 산림을 삼켰다. 산불발생지역 지자체는 각자도생해야 했고, 진화 헬기 투입은 늦었다. 그 사이 화마는 밤낮을 쉬지 않고 번졌고, 불길이 지나간 자리의 모든 것은 속절없이 스러졌다. 대형 산불, 그것도 산악 지형이 험한 한국 특성상 헬기가 필수 요건이나 열악한 장비는 산불 진화에 어려움을 키웠다. 한국은 산불의 헬기 진화율이 80%에 달할 만큼 산불 진화에서 핵심 역할을 하지만 지난 영남권 산불 때 산림청 보유 헬기 50대 중 35대만 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러시아제 8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부품 수입이 끊겨 운용이 불가능했고, 7대는 1980~90년대 도입한 600리터급 소형 헬기라서 대형 산불 현장에 투입할 수가 없었다. 헬기가 필수인 지형의 한국이 갖가지 이유로 현장 투입이 어려운 상황과 달리 미국은 민간과 계약을 통해 산불 관리 항공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용 중이다. 한국이 대형 산불에도 헬기 운용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실태와 함께 이와 다른 미국의 시스템을 소개한다. 항공기·인력 등 조정·배분하는 ‘NIFC’ 1~5단계 대비 데이터 기반 우선순위 정해 언제든 투입 가능한 민간항공기와 계약 전문소방대원 ‘스모크점퍼’도 현장 급파 美 전문가들 “韓, 산림청·소방청·지자체 헬기 통합 운용 컨트롤타워 필요” 조언 헬기 운영 한계 드러낸 우리나라 현재 국내 산불 진화에 투입되는 헬기는 △산림청 산림헬기 △소방청 소방헬기 △지방자치단체 임차헬기로 나뉜다. 산림청 소속 헬기는 2025년 2월 기준 총 50대인데 기령 20년 이상인 헬기가 44대(88%)에 달해 노후화 우려가 심각한 상황이다. 소방청 소속 헬기의 경우 총 32대로 이중 8대만이 2천~4천L급 담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자체는 총 81대의 임차 헬기를 민간항공업체로부터 빌려 사용하고 있지만 기령 20년 이상이 74대에 달하며, 그마저도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는 임차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노후 기종이라도 계약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다. 운영체계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산불은 초기에 진화하지 못하면 급속히 확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행 대응 체계에서는 산불이 발생하면 시장·군수·구청장이 초기 진화를 지휘하고 관할 헬기만 투입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지자체 임차헬기만으로 조기 진화를 감당하기 어렵게 만든다. 지난 3월, 경북 의성에서 강풍과 함께 넘어온 산불에 맞닥뜨려야 했던 영양군은 당시 임차 보유 중이던 진화헬기 1대를 임차 업체 소속 조종사와 함께 현장에 투입했다. 그마저도 30년전 생산된 노후헬기로 산불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 산림청 관계자는 “전국적으로 동시에 산불이 발생할 경우, 산림청과 지자체 헬기만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하다”며 “야간운항이 가능한 헬기가 3대뿐이라는 점도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산불 대응시에는 신속한 대응이 우선이나 법체계마저 이를 가로막는다. ‘항공안전법’상 야간 산불진화는 비행안전 확보를 위한 특별 운항제한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데 국토교통부 고시 「회전익항공기를 위한 운항기술기준」 제10절(회전익항공기 야간 산불진화 추가기준 10.3.1.가)에서는 회전익항공기의 야간 진화가 ‘주간부터 해당 지역의 지형·장애물을 숙지한 경우’에만 허용된다. 결과적으로 야간 산불은 헬기로 진화할 수 없는 시간대가 되기에 산불 진화 어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상황 “항공 자원, 하나의 시스템으로 전국 단위 배분” 산림청과 소방청, 각 지자체가 알아서 대응해야 하는 국내 시스템과 달리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인 산불 대응 시스템으로 꼽히는 NIFC(National Interagency Fire Center) 운영을 통해 모든 항공 자원을 한 개 시스템 하에 두고, 전국 단위로 배분하는 극효율의 체계를 운영 중이다. 여러 기관이 모여 서로의 자원을 공유하고, 정보와 인력을 통합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NIFC는 전국단위로 필요한 항공기나 인력을 모두 센터에서 조정해 배분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자원을 조정하는 담당처는 NIFC 내에 있는 전국 산불 조정센터(NICC·National Interagency Coordination Center)다. 주로 국토부와 산림청 소속 직원들로 구성돼 있어 관계 부처 간 대응과 협력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다. NICC관계자는 “산불 발생시 로컬 디스패치(비상 상황시 화재 진압 소방대원 투입 조정센터)에서 자체적 해결이 가능한 경우 외에 전국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시 인적 및 장비 요청을 진행한다”면서 “1~5단계까지의 준비상태(Preparedness Level)를 거치는데 기상청, 정보기관, 산불 관리 담당 등 세 곳이 협력해 정보를 통합하고 결정한다. 산불이 여러 곳에서 발생할 경우 헬기, 항공기, 인력 같은 대규모 자원 배분을 어떻게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감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라며 “데이터 기반으로 어느 지역에 헬기를 우선 배치할지, 어떤 규모의 인력을 투입할지 결정한다”고 덧붙였다. 각 지자체 및 기관부처가 초기 대응을 도맡는 한국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특히 NICC가 보유한 항공 자원의 경우 정부 소유 항공기보다 민간 소유 항공기가 더 많이 계약돼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필요할 시 언제든 투입이 가능한 항공기 수량이 항시 확보돼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NICC 관계자는 “NICC가 보유한 대부분 항공기는 개인소유, 민간항공사다”면서 “계약기간 동안 민간 계약자들은 상시 대기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든 항공기를 제공하며 출동 시 추가 비용을 지급받는다”고 설명했다. 항공기와 함께 전문 훈련을 받은 인력이 투입된다는 점도 산불 대응력을 높인다. NIFC에 소속된 기관중 미국 산림청(USFS)이 직접 운영하는 Great Basin Smokejumper Base(스모크 점퍼들의 훈련·출동·보급 거점)에서는 산불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을 훈련·교육하고, 항공 출동을 지휘한다. 이들은 산불 전문 소방대원인 스모크점퍼(Smoke jumper)로,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산불 현장에 투입되는 전문대원이다. 주로 도로나 접근로가 없는 깊은 산속에서 산불 초기 대응을 하는 데 적합한 인력인 이들은 낙하 후 불길 근처에서 방화선을 만들어 불이 번지지 않도록 가연물을 제거하거나 작은 불길을 직접 진화하는 등 불길을 끊어 내며, 산불이 대형 재난으로 번지지 않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이 역시 한국의 상황과 확연하게 다르다. 한국은 크게 산불특수진화대, 산불예방진화대, 공중진화대로 나눠 산불 진화대를 운영하고 있다. 이중 산불예방진화대가 대부분 비중을 차지하는데 6개월~1년 계약을 체결한 기간제인데다 전문적인 직무 교육도 받지 않는다. 미국이 빠르게 초기 진압을 가능케 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반면, 국내 산불예방진화대는 주로 산불 예방과 잔불 정리 작업을 맡는데 지난 영남권 산불과 같은 대형 산불에는 진화에 직접 투입된다. 그만큼 위험성이 높다. 실제 당시 경남 산청에서는 창녕군청 소속 예방진화대원 3명이 작업 도중 목숨을 잃었다. 국내도 모자라다, 국제 협력 체계 갖춘 미국 미국의 NIFC 시스템은 확실하게 산불을 진화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민간 계약자들과 계약을 통해 산불 현장에 지체없이 투입할 수 있는 항공기를 확보해두고, 이 항공기를 이용해 스모크점퍼들과 같은 전문 인력을 현장으로 보내 산불 악화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로도 모자라 캐나다, 멕시코, 뉴질랜드, 포르투갈 등과 국제 협력 체계를 갖추고 있다. NIFC 관계자는 “1982년부터 NIFC와 협력을 시작했다. 이들 국가와 협력을 위해 공통적으로 ICS(Incident Command System)라는 표준화된 대응체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NIFC와 협력관계를 맺은 이들 국가는 화재 발생시 인적 자원 등을 지원한다. 미국 NIFC 역시 호주 화재 발생시 인력을 투입했고, 올해도 캐나다로 600명의 소방관을 지원했다. 이에 더해 NIFC 관계자는 “필요한 경우에 따라 군과도 밀접한 연락을 해 도움을 받기도 한다”면서 “또 산불만이 아니라 허리케인 등 다른 자연재해에도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을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군(軍)과 민간, 정부 기관이 명확히 역할을 나눈 통합 구조를 운영중이며, 산불 대응에서 나아가 허리케인, 대형 산업화재, 원전 사고 등에도 동일한 체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대비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을 들은 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도 장기적으로 산림청·소방청·지자체의 헬기를 통합 운용할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은 예측과 협력, 훈련을 통해 ‘책임론’에서 벗어나 통합 체계를 구성했고 ‘누가 움직일 것인가’가 아니라 ‘함께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산불과의 싸움에서 이겨나가고 있다. 견고한 대비 체계를 구축해 시간을 확보한 덕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1

준비된 시스템·촘촘한 협력… 미국의 ‘예방 최우선’ 대응

“불은 경계가 없다.”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Boise)에 위치한 국가 산불 공동 대응 센터(NIFC, National Interagency Fire Center) 관계자의 말이다. 그 말 그대로다. 불은, 특히 산불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간다. 올해 초 경북지역에 발생한 산불도 소백산맥을 타고 하염없이 타들어갔다. 때문에 산불재발방지를 위해선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실제 미국은 산불을 ‘진압’이 아닌 ‘관리’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여러 기관이 모여 서로의 자원을 공유하고, 정보와 인력을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했다. 컨트롤타워조차 오락가락인 한국과 비교되며, 배울 점 또한 적지 않다. 화재대응정보 통합·자원조율기구 운용 중앙서 진화 자재 투입 등 ‘신속한 대처’ 산불예측데이터 제공 기상 시스템부터 항공적외선탐지기 등 고도화 장비 갖춰 지역사회 교육·협력 네트워크도 ‘탄탄’ 한국은 ‘전문기관 설치’ 논의만 수년째 NIFC: 아홉 기관이 모인 ‘협력 본부’ NIFC는 9개 연방기관(△미국 산림청:USFS △토지관리국:BLM △국립공원관리청:NPS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청:FWS △미국 토착민 업무국:BIA △연방 비상관리청:FEMA △미국 국방부:DOD △국립기상청:NWS △미국 해양대기청:NOAA)이 협력하는 기구다. 이들이 협력하고 있는 NIFC는 직접 진화 현장에 투입되지는 않지만 전국의 화재 대응 정보를 통합하고 자원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보이시 현지에서 만난 NIFC관계자는 “NIFC는 처음 군부와 국토부, 기상청 등 3개 기관이 뭉쳐 시작했는데 화재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점점 더 여러 기관들이 힘을 합치게 됐다”면서 “연방기관들이 속해 있어 신속한 대처가 가능하고, 군부가 함께 하기에 비행기 및 헬기 등도 빠른 투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실시간 자원 조정의 중심, NICC NIFC 센터 내 핵심 조직인 전국 산불 조정센터(NICC·National Interagency Coordination Center)는 전국을 10개 구역으로 나누고, 250개의 지역 디스패치 센터(비상 상황에서 화재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소방대원들을 조정하는 센터)로부터 실시간 보고를 받는다. 이 곳에서는 화재 진화를 위한 소방차, 헬리콥터 등 모든 자재들을 관리하고 있다. 일례로 항공 진압 요청 등도 모두 NICC를 거친다. 센터 매니저인 션 피터슨(Sean Peterson)은 “전국에 10개로 나뉜 지역구마다 소규모 센터가 있는 구조다. 총 250개 로컬 디스패치가 있으며, 각 지역에서 발생한 화재들은 로컬센터를 통해 산불의 위치, 규모, 기상 상태, 필요 인력 등이 NICC로 보고된다”고 설명했다. 즉, 현장에서 시작해 중앙으로 올라오는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중앙에서 장비, 인력 배치 등이 이뤄져 현장의 혼선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A지역에서 산불이 발생해 A지역이 가진 자원이 모두 소진됐을 때 2단계로 인근 B주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며, B주의 지원 여력도 소진되면 NICC 지원이 이뤄진다. 상세하게 각 대응 단계를 나눠 빠른 판단이 이뤄질 수 있는 데다 꼭 필요한 곳에 자원이 투입될 수 있도록 설계한 시스템이다. NICC 매니저는 “산불이 많이 발생하는 시즌엔 모두가 헬리콥터를 원한다”면서 “그럴땐 산불 진화 중요도와 필요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NICC의 역할”이라 설명했다. 우선순위를 정해 자원을 배정하고 지원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진화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기상·통신·탐지…과학기술이 뒷받침하는 산불 대응 NIFC는 기상, 통신, 탐지 등을 통해 대응에 주력하고 있다. 우선 RAWS(Remote Automatic Weather Stations)에서는 미국 전역 331개의 자동 기상 관측소가 산불 예측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RAWS의 앨런 헤스터(Alan Hester)필드 섹션장은 “RAWS는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이동식 장비로, 산불이 나면 현장 근처로 직접 가져다 놓는 이동식 장비”라며 “기상청의 도심 기상관측과 달리 사람이 없는 위험 지역을 관측할 수 있어 보다 정확한 데이터 분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미국 전역에 331개의 RAWS가 설치돼 있으며, 이를 통해 기온·습도·풍향·풍속·강수량·자외선 등의 자료가 수집된다. 이처럼 보다 고도화된 기상 시스템을 올초 발생한 경북산불에 적용할 수 있었다면 보다 빠른 진화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북 산불 당시 국내 기상청도 보관·관측차량 현장 파견, 실시간 강풍 정보 제공 등 총력 지원을 펼쳤지만 산불 진화 후 기성청 실시간 대응 한계가 명확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상청도 초고속 대형산불 대응을 위한 시스템 개선, 재난 발생시 신속한 분석과 전달 체계 마련 등 계획을 밝힌 바다. 화재 현장에서 필요한 통신장비도 NIFC가 강조하는 시스템 중 하나다. NIICD(National Interagency Incident Communications Division)는 1만 2,000대의 무전기와 중계 장비 등을 갖추고 산불 현장에서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는다. 마크 힐튼(Mark Hilton) 국장은 “깊은 산악지대에서는 통신이 생명”이라며 “현장에 관련 기기를 설치해 소방대 간 통신망을 확장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장 투입 소방관들은 보다 넓은 지역에서, 보다 많은 인원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힐튼 국장은 “거대한 산불이 발생하는 곳은 통신망이 약하기에 이런 기기는 필수적이며, 기기를 더 설치하면 무전 거리를 더 넓힐 수도 있다”면서 “주파수 교체, 중복 주파수 관리 인원 등도 배치돼 현장의 효율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Infrared Scanner(항공 적외선 탐지기)도 효율적 도구로 꼽힌다. 항공기에 장착해 사용하는 이 탐지기는 1만4천피트(4.2672km) 상공에서 작은 불씨까지 감지해 화재의 중심·확산 방향을 지도와 겹쳐 분석하고 산불화재 현장의 온도까지 파악해줘 정확한 화염지도를 만들고,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게 돕는다. 또 GBISC(Great Basin Incident Support Cache·물자 창고)는 약 2000평 부지에 텐트, 호스, 식사 키트, 장비 등 산불 대응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같은 물자창고는 15개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산불이 많이 발생한 지난해 기준 8300만 달러(약 1000억원) 규모의 재고량을 확보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다. 연방 토지관리국(BLM) 운영은 국내 도입시 산불 예방 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NIFC에 속한 BLM은 미 내무부 산하 최대 규모이자 가장 복잡한 화재 대응 프로그램인 ‘BLM Fire’을 운영한다. 공공 토지 산불 관리를 직접 담당하면서 선제적 토지 관리 및 대국민 공공 교육까지 병행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에 의해 발생하는 산불이 전체 산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인식, 대중과 적극 협력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사회 산불 보호계획(CWPP), Firewise 프로그램, 대중 교육 행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또 화재 위험이 높은 시기에는 지역사회와 협력해 일시적인 활동 제한, 공공 토지 폐쇄도 시행하고 있다. BLM 관계자는 “산불은 행정 경계 또한 가리지 않기 때문에 이 ‘all-hands, all-lands’(모두의 손으로, 모두의 땅을) 접근 방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화재는 자연현상이지만, 사람의 부주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지역사회 교육과 협력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NIFC 센터 내 추모 공간에는 임무 중 순직한 350명 이상의 소방관을 기리는 보라색 리본이 걸려 있다. 그 리본은 단지 기억의 상징이 아니라, 미국이 산불과 싸워온 긴 시간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거치며 미국은 산불 대응에 있어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웠다. 한국은 어떨까. 대형 산불이 발생할 때마다 각종 대책이 거론되지만 실제 실행 단계에 들어서는 경우는 극히 적다. 일례로 진화대원 교육을 철저히 하겠다며 거론된 훈련 센터 설립은 3년째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난 4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 현안보고에서 민주당 문대림 의원도 “산림청 특수진화대원에게 들어보니 필요한 기술은 선배들에게 구두로 전수받고 있다고 한다”며 “미국은 전국화재합동센터(NIFC) 등 전문기관이 있지만 우리는 논의만 수년째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견고한 시스템은 우리에게 던지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다. 여러 기관이 한 데 모여 과학과 데이터와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숲은 푸르름을 잃고 까만 재로 뒤덮일 수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25-11-10

해방 무렵 오징어잡이 호황… 어업 전진 기지 저동항 ‘불야성’

저동은 울릉도의 어업 전진 기지다. 울릉도의 어선들은 저동항으로 입항하고 저동항에 정박한다. 그래서 저동은 울릉도에서도 가장 어촌다운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울릉도 어선들뿐만 아니라 동해안에서 조업하는 모든 선박들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저동항은 동해 어업전진기지로 만들어졌다. 1977부터 1980까지 93억원의 예산으로 완공됐는데 최대 어선 1000척까지 정박 가능한 대형 어항이다. 전성기 오징어배만 200척 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연간 1만t 방파제 위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 저동마을 지키는 수호신장 역할 사방 둘러 온통 절벽에 쌓인 죽도 지금은 1가구가 더덕 농사 지어 △ 모시가 많은 바닷가 마을 저동 저동의 상징은 촛대바위다. 방파제 위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는 저동항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몰아내고 세상을 환히 밝힐 태세다. 촛대바위는 저동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장이기도 한 것이다. 저동의 본래 이름은 모시개. 모시 잎이 많아 모시개라 했는데 한자화 과정에서 모시 저(紵) 자를 써, 저동이 됐다. 개는 바닷가를 이르는 한글 말이니 저동은 모시가 많은 바닷가 마을이란 뜻이다. 저동은 모두 세 개의 작은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모시개, 중간 모시개, 작은 모시개다. 조선시대 말 울릉도 개척을 위해 탐사대장으로 들어왔던 이규원 검찰사의 울릉도 검찰일기에는 ‘대저포(大苧浦)’와 ‘소저포(小苧浦)’로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에서는 1902년부터 본격적인 오징어잡이가 시작됐다. 1910년대가 오징어잡이의 최전성기였다. 그 무렵 일본인들이 울릉도로 대거 이주해왔다. 1930년대 들어서는 오징어가 사라져버렸다. 그때 일본인들도 대부분 울릉도를 떠났고 그 무렵부터는 고등어와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 울릉도에서 오징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다. 오징어잡이로 호황을 누리던 때는 ‘동네 개도 5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었다. 근래까지도 오징어잡이 철이면 불야성을 이루던 저동이 요즈음은 한산하기만 하다. 동해에 오징어 흉년이 든 까닭이다. 울릉도의 최대 산업기반이고 상징이기도 한 동해 오징어가 멸족되다 싶이 하면서 저동뿐만 아니라 울릉도 전체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 △ 내수전에서 석포로 가는 아름다운 트레일길 올해도 울릉도 오징어는 흉어였다.. 오징어 배를 따서 말리는 풍경도 보기 어려웠다. 어민들뿐만 아니라 울릉도 주민들 대다수가 오징어 배 따는 일로 생계를 이어왔었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울릉도는 한때 오징어잡이 어선만 200척을 넘겼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연간 1만t을 기록했다. 하지만 2024년 말 기준 울릉도 어선은 129척인데 90% 이상이 오징어 채낚기어선이다 어획량이 급감하자 어민들은 올해만 30여 척이나 감척을 신청했다. 생업을 포기하다 싶이 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감척 확정된 어선은 13척 뿐이라 한다. 오징어가 사라진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온 변화, 동해 바다를 새까맣게 뒤덮은 중국어선들의 대량 남획,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체 이 세계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저동 해안 도로를 따라 내수전까지 걸어간다. 길은 시멘트 차량 도로지만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어서 지루하지 않다. 내수전에서 석포에 이르는 길은 울릉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로 꼽힌다. 내수전은 옛날 울릉도 개척 당시 제주도 대정 출신의 김내수(金內水)라는 사람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도 내수전이 표기되어 있다. 내수전은 예전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저전포’라고도 불렸다. 행정구역은 저동 3리다. △ 겨울꽃의 대명사 동백 선비들이 사랑한 꽃 11월인데 길가에는 벌써 동백꽃이 만개했다. 같은 위도상의 육지인 강원도 산간지역에는 동백이 살지 못하지만 울릉도는 해양성 기후라 겨울이 따뜻해 동백이 자생할 수 있다. 동백은 흔히 겨울꽃의 대명사로 꼽히지만 실상 개화 기간이 어느 꽃보다 길다. 늦가을부터 피기 시작해 상춘까지 물경 6개월 남짓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그래서 피는 시기에 따라 그 이름도 제각각이다. 봄에 피면 춘백, 가을에 피면 추백, 겨울에 피는 꽃이라야 비로소 동백이다. 동백은 옛날부터 매화와 함께 이 땅의 선비들에게도 한껏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이규보, 서거정, 기대승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도 동백을 노래했다. 퇴계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1538년~1593년)도 매화와 함께 동백을 고고함의 상징으로 꼽으며 지극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두 가지 동백나무 각자 다른 정 있나니/동백 춘백 그 풍도를 누가 능히 평하리오/사람들은 모두 봄철 늦게 핀 꽃 좋아하나/나는 홀로 눈 속에 핀 동백 너를 좋아하네” (학봉 김서일) 꽃에 미쳐 살았던 조선의 선비 유박(1730-1787)도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치자와 동백은 청수(淸秀)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 평하며 동백이 도골선풍을 지녔다고 찬탄했다. 서양에서도 동백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다. 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한 달 내내 밤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꽂고 다녔다.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 그래서 그녀는 카멜리아의 여인(동백꽃 여인)으로 불렸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춘희’ 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동백은 내내 울릉도의 산야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 저동2리 방파제 끝을 돌아서면 저동3리 마을 이정표가 서 있다. 내수전 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경계선 건너 우뚝 솟아있는 섬이 죽도다. 1가구가 더덕 농사를 지으면 살아간다. 예전에는 7-8가구가 살았었다. 감자, 고구마, 더덕 농사도 짓고 소도 기르며 살았었다. 죽도에서는 송아지 때 올라간 소가 산채로는 못 내려왔다고 한다. 작은 송아지는 밧줄에 매달아 올렸지만 온통 절벽이라 다 자란 큰 소는 밧줄에 매달 수도 없고 달리 내려보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축을 해서 고기가 돼서야 내려왔다. 죽도는 물이 귀해서 울릉도 본섬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생활용수는 빗물을 받아서 사용했다. 죽도 사람들은 20여 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폐촌이 된 내수전 길 아래 마을 와달리로 왕래하며 살았다. 물도 와달리에서 길어다 먹었다. 날마다 먹을 물을 구하려고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가 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까. 지금은 사람들이 떠나고 농사도 덜 지으니 솔밭도 새로 생겼다. 죽도는 사방을 둘러 온통 절벽이다. 마을은 절벽 위에 들어서 있다. 절벽 위에 제법 너른 평지가 있어 농사도 짓고 집도 짓고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이야 계단이 만들어져 제법 쉽게 오르내릴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저 아득한 절벽을 어찌 오르내리며 살았을까 생각하니 그저 삶이 온통 아득해진다. 울릉도 본섬 또한 가파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울릉도 본토에서도 밭 한 뙈기 얻지 못해 처음 저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그저 먹먹하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0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 연재합니다

울릉도는 바다 한가운데 고요히 솟은 섬이다. 배가 포항을 떠나 동해의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면 도시는 점점 희미해지고 바다의 숨결이 서서히 스며든다. 파도는 굽이치는 듯 부드럽고, 짙은 푸른빛은 어느새 여행자의 마음을 잠식한다. 도동항에 닿는 순간 섬은 거대한 화산의 품으로 여행자를 끌어안는다. 절벽과 숲, 그리고 안개가 어우러진 풍경은 육지의 시간과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른다. 행남 해안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위 틈새로 솟는 억새와 해풍에 일렁이는 파도가 묘하게 닮았다. 섬의 중심부인 나리분지는 화산분화구가 만든 평원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붉게 번지고, 여름에는 초록이 하늘을 밀어 올린다. 가을의 억새는 바람을 따라 은빛 물결을 만들고, 겨울의 고요는 섬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나리분지의 투박한 밥상 위에는 막걸리 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오징어·더덕·산채로 차린 한 상은 ‘섬의 맛’ 그 자체다. 울릉도의 매력은 느림에 있다. 봉래폭포의 물안개에 젖고 관음도 앞에서 바다와 마주 앉아 있노라면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스마트폰의 시계 대신 파도 소리가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해 질 무렵 도동항의 포구에 앉으면 섬이 붉게 물든다. 오징어 배 불빛이 반짝이며 바다 위에 별을 띄우고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울릉도는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푸르다. 최근 울릉도가 상처를 입었다. 바가지와 불친절의 표본처럼 매도당했다. 상당 부분은 사소한 오해이기도 하고 작은 부분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상처 위에 푸른 빛을 덧칠한다. 해담길을 따라 걸으며 절벽 끝에서 바람이 속삭인다. 10일부터 본지 15면에서 총 25회에 걸쳐 섬연구소 소장인 강제윤 시인의 ‘해담길에서 만나는 울릉도’를 연재한다. 강제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울릉도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5-11-09

‘해가 담긴 길’ 9개 코스 35km… ‘걷기 천국’ 속살 제대로 만끽

울릉도 여행자들은 대부분 자동차로만 섬을 둘러보고 돌아간다. 하지만 걸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숨어 있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 울릉도의 트레일은 실핏줄처럼 섬 곳곳에 퍼져 있다. 그래서 사실 울릉도는 ‘걷기 천국’이다. 울릉도에는 걷기 좋은 길들이 많다. 걸어야 울릉도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여행기는 울릉도의 트레일을 걸으면서 울릉도의 속살을 들여다 본 이야기다. 2017년 옛사람 다니던 옛길 발굴 도동~저동~천부~태하~도동 회귀 느리게 느리게 걸으며 비경 감상 여객터미널 뒤 행남해안로 시작 울릉도 초기 화산활동 특징 간직 절벽엔 2500년된 향나무가 환영 △ ‘밝은 해가 담긴 길’ 해담길 걷기 울릉도의 대표적인 길은 ‘해담길’이다. 2017년 울릉군에서 울릉도의 옛사람들이 다니던 옛길을 발굴해 만들었다. 해담길이란 ‘울릉도의 이른 아침 밝은 해가 담긴 길’이란 뜻이다. 이 길 또한 최대한 천천히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걸을수록 울릉도에 오래 머물 수 있다. 울릉도와 더 깊이 교감할 수 있다. 빠르게 걷느라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자동차를 버리고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울릉도에서는 느리게 느리게 걸어야 한다.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한다. 걷는 길에서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어야 한다.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어떠랴. 길을 벗어나 낯선 길로 들어선들 또 어떠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가 아닌가? 여행을 떠난 순간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울릉도를 깊이 있게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담길을 걷는 것이다. 울릉도를 온전히 걸어서 일주할 수 있는 길. 제주 올레길 만큼이나 아름다운 길이다. 해담길은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을 출발해 저동, 천부, 태하, 옥천 등을 거친 뒤 해안 둘레를 따라 다시 도동으로 돌아오는 35㎞ 길이의 트레일이다. 모두 9개 코스로 구성됐다. 지형적 문제 때문에 길이 완벽하게 하나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분 부분 단절돼 있기도 하다. 그러니 해담길을 걸으며 길에는 포함되지 않는 샛길로 빠져 마을들을 둘러본 뒤 다시 해담길로 되돌아오는 것도 좋다. 길이란 온전히 걷는 자의 몫이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걸을 때 길은 비로소 온전히 자신만의 길이 된다. △ 2500년된 향나무가 여행자를 반기다 해담길의 시작점은 울릉도의 도동항이다. 도동항 여객터미널 뒤 안에서부터 해담길 행남해안로가 시작된다. 이 길은 지금 공사 중이다. 하지만 중간쯤에서 우회로를 따라가면 된다. 도동 행남해안로 초입에서 가장 먼저 여행자를 환영해 주는 것은 절벽 꼭대기의 2500년 된 향나무다. 실제로는 3000~4000년쯤 됐다는 설도 있다. 향나무는 1985년 10월 5일 태풍 브랜다가 왔을 때 한쪽 가지가 부러졌고 그 부러진 가지를 울릉군에서 공개 입찰했다. 향나무 가지는 기념품 가게를 하던 서귀용씨가 낙찰 받아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조각을 해서 소장 중이라 한다. 사람은 한 자리에 하루도 서있기 어려운데 저 향나무는 수 천 년을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지독한 인고의 향이 얼마나 진할 것인지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울릉도는 한국 최초의 국가 지질공원이다. 2012년 12월 27일 인증됐는데 울릉도 19개소, 독도 4개소가 지질 공원의 관할 영역이다. 울릉도의 도동 해안산책로, 저동 해안산책로, 봉래폭포, 죽도, 향나무자생지, 황토굴, 대풍감, 노인봉, 송곳봉, 코끼리바위, 삼선암, 관음도, 성인봉 원시림, 용출소, 알봉 등과 독도의 숫돌바위, 천장굴, 삼형제굴바위, 독립문바위가 지질 공원으로 지정된 곳들이다. 지질 공원은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하고 경관이 우수한 지역 중에서 지정된다. 도동에서 행남마을에 이르는 도동 해안 산책로도 국가 지질공원의 일부다. 섬의 크기는 울릉도에 비해 독도가 훨씬 작지만, 탄생 년도는 독도가 한참을 앞서는 형이다. 독도는 460만 년 전 수중화산으로 탄생했고 250만 년 전 화산활동을 멈췄다. 울릉도는 약 14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5단계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탄생했다. 마지막 화산활동은 9300~6300년 전 쯤으로 알려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화산 분화시기가 다르지만 주요 암석이 알칼리 계열 조면암이고 화학적 구성도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울릉도는 수중 2300m부터 시작돼 수면 위로 986.5m가 솟아올랐다. 전체 높이 3300m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체다. 독도도 해수면 밑에 2300m의 화산체가 있다.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다. 독도 수면 아래 한라산보다 높은 산이 숨어 있는 것이다. △ 도동 해안산책로 다양한 지질구조 볼 수 있어 행남 해안산책로는 도동 해안산책로와 저동 해안산책로를 합한 이름이다. 두 곳 다 지질 공원으로 지정됐다. 저동 해안 산책로는 파손되어 접근 할 수 없으니 이 길에서는 도동 산책로의 지질만 관찰이 가능하다. 도동 해안산책로에서는 울릉도 초기 화산활동의 특징을 간직한 다양한 지질구조가 관찰된다. 절벽의 하부로부터 현무암질 용암류, 산사태로 운반되어 만들어진 재퇴적쇄설암, 화산재가 뜨거운 상태에서 쌓여 생성된 이그님브라이트, 분출암의 일종인 조면암 등이 순서대로 분포한다. 그야말로 이 산책로는 지질 박물관이다. 행남 마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길은 저동 옛길이고 또 한길은 행남해안로 저동 교량 길, 저동 해안 산책로다. 그런데 거친 파도를 견디지 못한 해상 교량이 여러 해 전 파손된 뒤 교량 구간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새로운 교량 공사가 진행 중인데 개통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듯하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저동 옛길을 지나야만 저동에 이를 수 있다. 저동 옛길을 걷기 전에 행남등대까지 다녀와도 좋다. 등대까지의 길은 평탄하고 호젓하다. 등대를 다녀온 뒤 길이 끊어진 저동 해안 산책로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완공이 되면 다시 기암괴석의 절경을 바라보며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끊긴 해안로 입구에서는 다시 행남 마을 쪽으로 조금 되돌아가야 저동마을 옛길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 비탈길이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생활의 길이었다. 산길이지만 가파르지 않아 천천히 걷다보면 금새 저동마을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옛길의 끝자락에 저동마을 당집이 있다. 신당 안 제단에는 해동대신위라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바다의 신을 모시는 해신당이다. 이제 바다의 안전은 용왕 대신 GPS가 책임져 주는 시대가 왔지만 섬사람들은 여전히 바다가 두렵다. 아무리 인공위성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한다 한들 순간적으로 돌변하는 파도의 변덕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전히 해신의 위력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섬사람들이다. 섬사람 중에서도 어부들은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 조차도 몰래 해신들에게 제를 지내기도 한다. 보험도 하나보다는 여러 개 들어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심사일 터다. 길의 끝에 문득 해상 도시가 나타난다. 저동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09

영남권 대형산불, 예방부터 진화까지 ‘구멍난 시스템’ 화 키워

지난 3월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등 경북 5개 시·군은 물론 울산, 경남 지역에서 산불이 확산되면서 영남권 전역이 산불로 뒤덮였다. 2000년 동해안 산불의 4배가 넘는 규모로 문화재 손실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산림과 주거지의 경계가 밀접하고 강풍 통로와 급경사 지형, 고령화된 인구 분포, 불법 소각과 관리 사각지대 등이 겹쳐 산불 피해가 유난히 컸다. 이번 초대형 산불을 진화하는 과정에서 대형 살수 헬기 부재 등 우리나라의 산불 대응 체계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본지는 기획 시리즈로 이번 우리나라 산불 대응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초대형 산불을 맞닥뜨렸던 포르투칼·캐나다·미국 지역의 산불 대응 방안이 주는 교훈과 대책도 면밀히 살펴봤다.<편집자주> 지난 3월 의성 등 영남권 삼킨 ‘괴물 산불’ 산림청·소방청·지자체 등 따로따로 대응 대피경보조차 제대로 전달못해 혼선 빚어 산불 피해지 복원에 대부분 ‘침엽수’ 식재 ‘불쏘시개’ 된 소나무가 ‘불의 통로’ 만들어 진화헬기·장비·인력부족까지 총체적 난제 “예방 중심 대응책 등 장기적 로드맵 필요” 우리나라 산불 발생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봄에 주기적으로 비가 내려 산불 발생이 적었던 2024년을 제외하고는 2017년부터 해마다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특히 산불 위치정보를 토대로 산림청이 만든 산불다발지역 지도는 서울, 인천, 대구 등 인구 밀집 지역에 산불 위험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대형 인명 피해 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경고한다. 그런데 이 같은 경고도 불구하고 지난 3월 의성 등 영남권 전역을 집어삼킨 산불이 발생했다. 이른바 ‘괴물 산불’로 불린다. 사망자 27명을 포함해 총 183명의 인명피해와 10만 4004ha의 산림이 불에 탔고, 주택 3848동과 농어업시설 6106건, 농기계 1만7158대 등에 피해를 입혔다. 이 외에 의성에 있는 고운사 등 전통사찰, 국가유산 등의 피해도 상당했다. 정부는 재난 대응 최고 단계를 발령하고, 전국의 소방 인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진화 작업을 전개했지만 강풍과 건조한 날씨로 인해 진화 작업이 장기화됐다. 산림 훼손에 따른 주거지 파괴 등은 지방소멸이라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도권 일극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컨트롤타워 부재로 현장은 ‘혼선만’ 이번 영남권 산불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상당하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재난 대응 체계를 문제삼고 있다. 우선적으로 컨트롤타워 문제가 꼽힌다. 지역의 한 소방 소장은 “산불이 나면 산림청 지휘를 받아야 한다”며 “산림청의 산불대응은 소수 인력에 불과해 산불 대응 체계가 너무 빈약하다”고 진단했다. 산림청·소방청·지방자치단체 간 산불대응체계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실제 국회 입법조사처의 ‘최근 산불대응 관련 주요 쟁점 및 향후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산불대응 주관기관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해당법 시행령에 따라 산림청이 맡고 있다. 문제는 산불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산림보호법’ 제37조 및 제38조에 따르면 중·소형산불의 경우 특별자치시장·특별자치도지사·시장·군수·구청장 또는 국유림관리소장이, 대형산불의 경우 시·도지사가 각각 산불현장 통합지휘본부장을 맡는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산림보호법이 산불대응 주관기관을 서로 다르게 규정하고 있어, 일선 현장의 지휘체계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행 산불대응 발령 기준에 따르면 시·군·구 차원의 초기 대응이 어려울 뿐 아니라 적기에 협조를 받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영남권 산불이 대표적이다. 산불 초기 당시 강풍이 불면서 확산세가 컸고 이로 인해 현장에선 시·군·구, 산림당국, 소방관서 간 혼선이 발생했다. 산불 피해를 직접 겪은 주민들 사이에서도 “컨트롤타워가 없었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이는 주민 대피 체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도 주민들에게 대피 경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대피명령이 지연된 사례가 있다. 산불 현장을 지켜봤던 민영권 산청난개발대책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마을에 산불이 내려와 주민들이 불을 끄러 가는데도 ‘대피 명령’ 하나가 안내려 왔다“며 “재난 대응 관련한 대응 메뉴얼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산림은 산림청, 산불 대응은 소방청이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정환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은 “산림청에서 말했던 산불 대응 시스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쪽에서 ‘이쪽으로 가라’, 저쪽에서는 ‘저쪽으로 가라’ 이런 식이다. 이렇게 되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으면서 산불 대응을 빨리 하지 못한다“며 “일원화가 되지 않으면 서로 다른 얘기를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장에서 봤을 때 불에 대한 전문가는 소방청”이라며 “산불 관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소방청에 이관하는 게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주장은 지난 10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대구의 마음을 듣다’ 타운홀 미팅에서도 나왔다. 지난 3월 산불 진화작업에 투입됐다 순직한 대원의 장녀가 이 대통령에게 “아버지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산불 진화 업무가 제대로 된 체계로 관리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요청드린다”며 산불 진화 업무를 소방청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산불 진화 체계 재정비 문제는 대통령실에서 역점을 두고 정비 중”이라며 같은 대형 화재 참사를 막겠다고 약속했다. 산림 정책 ‘숲 가꾸기’ 대형 산불 원인으로 지목 산림청의 소나무 단순림 숲가꾸기 정책도 대형 산불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수분이 적고 건조한 환경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활엽수에 견줘 산불 발생 시 1.4배 더 뜨겁게 타고 불 지속 시간도 2.4배 길다. 소나무보다 활엽수가 불에 강하며, 산불 확산을 막는 데에는 활엽수림이 더 유용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산림당국은 산불 피해지 복원 등 인공조림 땐 침염수를 더 많이 심고 있다. 산림당국의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인공조림 현황을 수종별로 살펴보면 소나무를 포함한 침엽수는 13만5000ha를 차지한 반면 활엽수는 9만ha에 그쳤다. 정 운영위원은 “소나무 이파리는 불이 붙으면 숯처럼 빨갛게 날림 상태로 번지고, 불을 머금은 솔방울은 수류탄처럼 터져 인근 숲과 강 건너까지 불을 확산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립공원은 산림청 손을 타지 않기 때문에 숲이 자연스럽게 활엽수로 변했다”며 “활엽수가 많아 불이 지표화로 땅으로만 가지 수관화도 비화 현상도 없어 피해가 크지 않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관리용 임도가 불을 키웠다는 주장도 나온다. 민 집행위원장은 “이번 산불에도 임도를 따라 불이 번지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며 “불을 끄기 위한 길이 오히려 불의 통로가 됐다”고 지적했다. 정 운영위원도 “소나무림은 불이 수관화해 임도를 덮어버린다”며 “내부 온도가 1600도 이상으로 치솟아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산림 당국이 진화를 위해 임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이 외에도 진화 헬기와 장비 부족, 인력 부족 등도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산불은 대형화되고, 산불 발생 빈도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산불 진화 체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산림 정책으로는 산불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대형 산불이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커지는 산불 위험에 대응할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이지성 경남연구원 박사는 “기후 변화 등으로 대형 산불이 많이 나고 있다”며 “장기적인 로드맵 같은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산불 대응이 산림청과 소방청으로 나뉘어 있어 초동 진화에 혼선이 생긴다는 점을 거론하며 “재난안전관리법과 산림보호법 등 관련 법령을 일치시켜 지휘체계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고,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산불방지센터에 인력과 장비 동원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다른 산림 전문가들은 단편적인 대응을 넘어선 구조적인 전환, 즉 기후 현실을 반영한 예방 중심의 재난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산불 위험이 높은 나라들의 산불 대응 정책을 벤치마킹해 ‘한국형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11-09

국수를 건조하는 데에는 하늬바람이 최고

‘해풍국수’는 배합과 건조의 기술로 탄생한다. 원재료도 중요하다. 브랜드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최선의 제품을 엄선하여 쓴다. 소금도 그렇다. 물도 정제하여 쓴다. 하룻밤 묵힌 물을 쓴다. 재료를 함부로 선택하면 제품이 반항한다. 싼값을 고집하면 싼 음식이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뛰어넘어 손수하는 공정에서의 모든 노력이 국수를 완성하는 기본이 된다. 그중 바람의 영향이 크다. 밀가루를 반죽해 재래식 기계에서 면을 뽑기까지 반나절이 걸린다. 야외 건조장에서 바닷바람으로 반건조시켜 창고에 넣는다. 그렇게 숙성시키는 데 한나절 넘게 걸린다. 이를 다시 꺼내 햇살에 건조시킨다. 바람의 종류도 다양하다. 샛바람이 있다. 이는 동풍을 말한다. 하늬바람이 있다. 서풍이다. 마파람(동풍), 된바람(북풍)도 있다. 이 중에서 서풍인 하늬바람이 최고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연을 이기는 인간은 없다. 하룻밤 묵힌 정제된 물로 밀가루 반죽 바닷바람에 반건조, 창고서 한나절 숙성 자연과 정성으로 전 과정 세심하게 관리 남편 친구가 선물한 제일국수공장 간판 56년 된 간판 아래 ‘더불어 사는 삶’ 실천 본분에 충실… 전통적 국수의 맛 지켜와 2017년 구평리에 현대식 제2공장 건립 바다·솔숲 등 좋은 환경에서 제품 생산 ‘해풍국수’ 기본 바탕 품질 향상에 집중 밀가루 사기를 당하기도 국수공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경주에서 밀가루 공장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생산한 제품이 너무 많아 밀가루 500포대를 염가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국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밀가루가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500포대는 너무 많았다. 주위에 있는 일곱 군데 국수공장과 의논해 그 밀가루를 구입하기로 했다. 남편이 나섰다. 돈을 모아 경주 근화여고 뒤편의 다방에서 그 업자를 만나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고서였다. 돈을 지불하면서 차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밀가루가 있는 창고로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다리를 하나 건너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돈은 온데간데없고 맨몸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돈을 들고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이순화 여사는 애가 탔다. 그때 경주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사람을 데리러오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경찰서에 들러 신고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일로 큰 손해를 입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벌어가며 애걸복걸하면서 돈을 갚아야 했다. 한참 뒤에 다행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범인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날 상황을 지켜본 똑똑한 다방 레지가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경찰에 신고해 그 사람을 체포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 길로 경찰서로 쫓아가 범인에게 분노의 귀싸대기를 날렸다고 한다. 빼앗긴 돈 일부를 돌려받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본인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른 공장에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혁혁한 공을 세운 레지 아가씨에게도 사례금을 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오직 본분만 생각해 인터뷰 내내 ‘밀까리’라는 경상도식 발음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학교는 ‘가는’ 곳이고 핵교는 ‘댕기는’ 곳이라는 농담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다니는 곳’보다 ‘댕기는 곳’이 훨씬 정감 있고 몸에 맞는 낱말인 듯하다. ‘밀가루’든 ‘밀까리’든 본질에서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본질이 변함없으니 조금 잘나간다고 더 큰 이익을 추구하거나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이순화 여사는 바르게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 오직 본분만 생각한다. 제일국수공장에는 오래된 간판이 있다. 그 간판은 남편의 친구인 구룡포우체국장에게 개업 기념 선물로 받은 것이다. 정갈하고 산뜻한 필체의 간판은 56년째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 오랜 세월은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밀가루 사건 이후 절대 욕심을 내지 않았다. 팔리면 팔리는 대로,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국수를 끓여 식구들을 먹이고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만하면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작은 도움이라도 정성껏 나누며 살았다. 그래도 손해나는 사업은 아니라서 먹고살 만했다.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은 가게라도 있으니 괜찮지만 좌판을 하는 사람들의 형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도우며 산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순화 여사는 구룡포시장 상인연합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시장이 살아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라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희생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했다. 묵묵하다는 말이 있다. 침묵의 묵(黙), 고요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침묵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견디는 것은 수행자의 자세이기도 하지만 생활인의 삶에 더욱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구평리에 현대식 제2공장 건립 2022년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몰아닥쳤을 때 구룡포는 큰 피해를 입었다. 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다. 공장 뒷마당과 옥상에서 국수를 말리던 시절의 마지막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재래식 공정은 원래 조금은 원시적인 방법이다. 공장이 바다와 맞닿아 있어 바람이 거세거나 파도가 맹렬할 때는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국수를 몽땅 버려야 했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판자를 세우고 집에서 사용하고 남은 비료 포대를 모조리 거두어 덧대고 덧댔다. 그러나 파도의 힘은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바닷물에 젖어 못 쓰게 된 국수를 내다 버린 양이 얼마였던가. 그러나 구룡포의 바람은 맑고 투명했고 햇살은 차고 넘쳤다. 그런 환경이 정말 고마웠다. 구룡포의 도로가 개선되고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분진 등의 환경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제일국수공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일국수공장의 자연건조 방식에 위생적인 문제가 있다는 민원이 제기된 것이다. 낡은 시설도 미관상 좋지 않았다. 전통을 고집하며 고유의 방법으로 국수를 만든다는 자부심만으로 마냥 버틸 수는 없 없었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야 했다. 그것 또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었다. 국수 가게는 읍내에 그대로 두고 구룡포 구평리에 생산을 전담하는 제2공장을 2017년에 만들었다. 이 공장에는 현대식 설비를 갖추었다. 이순화 여사의 장남인 하동대(55) 대표가 제2공장 부지를 처음 방문해보니 바다가 눈앞에 있고 솔숲이 일렁거렸다. 마을보다 조금 높은 둔덕에 위치해 바람이 자유롭게 흘러다녔다. 주위에 건물이 없으니 햇살이 풍부했다. 더 나은 조건에서 더 좋은 국수를 생산할 여건이 마련되었다. 읍내의 좁은 장소에서 국수를 만드느라 물량 부족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더 품질 좋은 국수만 생산하면 되었다. 전성기의 판매량에 비하면 반토막도 안 되지만 이제는 품질에 집중할 수 있다. 하동대 대표가 행복한 이유다. 가업을 잇고 생업에 충실하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공장을 지키며 자유롭게 산책하는 삽살개 해풍이도 그 주인공의 일부다. 마당 가득 바람과 햇살이 차고 넘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09

피보다 깊은 정신의 혈맥, 한 마을의 뿌리가 되다

나무를 심어 그로 하여금 가훈을 삼거나 그의 삶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는 가문이 있다는 사실을, 노거수를 쫓아다니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무의 삶과 상징성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요, 인문학의 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서원과 향교는 물론이고 각 가문의 종택, 제실, 정자에 살고 있는 나무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동은 유교 문화, 선비 문화의 고장으로 우리 한국학의 본고장 정신문화의 수도이다. 안동은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옛 선비의 고고한 문화생활과 끈끈한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경북 안동 정상 770번지 귀래정(歸來亭)에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귀래정이라는 말에서 삶의 철학이 묻어나고 은행나무에서 공자의 인의예지가 생각나고 노거수라는 말에서 삶의 경륜이 반짝인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낙포 이굉(李宏, 1441~1516)이라는 조선 선비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7호인 귀래정은 조선 중기에 문신이었던 이굉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조선 중기 이굉이 안동에 지은 ‘귀래정’ 후학양성·쉼터 ‘경북 문화재 17호’ 지정 500년 세월 귀래정에 터잡은 ‘은행나무’ 1982년 보호수 지정·키 18m·둘레 6m 유교문화·선비정신·가문의 정신 상징 귀래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맹의 귀래처사(歸來處士)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귀양을 가기도 한 사람이다. 1513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이곳에서 귀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원래는 강변 가까이 있어 낙동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인하여 이곳으로 물러나 옮겨놓았다. 그는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로 귀래정에 은행나무를 심어 후학을 가르쳤다. 이 은행나무는 이굉을 상징하는 가문의 가훈 역할을 반세기 동안 이어 오고 있다. 조선의 가문(家門)은 한 집의 울타리를 넘어, 나라의 기둥이자 사회의 뿌리였다. 피붙이의 혈맥으로 이어진 그 울타리 안에는 예의와 도리, 충과 효가 자라났고, 조상의 숨결과 후손의 뜻이 한 줄기로 이어졌다. 은행나무는 세월이 흘러도 푸른 기개를 잃지 않았고, 그 정신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임청각의 이상용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가문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뿌리로 맺은 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신의와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조선의 가문은 그렇게 한 사람의 도덕을 세우고, 한 마을의 질서를 바로잡으며, 한 나라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가문은 피보다 깊은 정신의 혈맥이었고, 그 정신이 모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문화의 줄기의 바탕이었다. 또한 그의 현손인 이응태(李應台 1556-1586) 가족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 제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부인(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이다. 1998년 안동시 정하동 택지 개발 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써서 무덤의 관 속에 넣어 둔 것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병을 간호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어린 아들과 유복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그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그리움을 편지로 썼다. 편지의 절절하고 애틋한 내용은 평소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500년의 세월이 지나 그 편지가 세상에 다시 빛을 보았을 때, 그 속에는 한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한 사랑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피로 맺힌 인연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다리이며,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온기의 흔적이다. 말 한마디, 손길 하나, 밥 한 그릇에 스며 있는 정, 그것이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가족애의 언어이며,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자리다. 이곳 귀래정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뛰어놀며 나무를 보고 자란 이굉의 가정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귀래정의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의 공원을 찾은 것은 한국산림문학 가을 문학기행(안동 이육사 발자취, 청송 객주문학관) 때 김선길 이사장님과 김선완 교수(회원)와 함께 짬을 내어 귀래정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 상을 답사 했다. 우리는 은행나무를 통하여 원이 엄마의 가족애와 고성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등 내력을 더 깊게 알게 되었다. 가족과 가문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은행나무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나무는 옛날부터 이래저래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았다. 산림문학회는 문학이 숲이 되고 숲이 문학이 되는 날까지 나무와 숲, 생명, 환경을 모티브로 하여 문학으로 우리 삶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단체이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나이 500살, 키 18m, 가슴둘레 6m, 앉은 자리 폭이 16m인 거인이다. 원래는 귀래정 담장 안에 있던 나무를 지금은 담장 밖으로 나와 있다. 낙포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는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선비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귀래정에 은행나무가 없다면 그저 하나의 오래된 정자로 기억될 뿐일 것이다. 택리지에서도 하회의 옥연정, 임청각, 군자정과 함께 안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라고 했다. 또한 안동 팔경 중 제2경 귀래조운(歸來朝雲) 즉, 귀래정의 아침 구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귀래정을 품고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원이 엄마의 편지는…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 1586년 6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이르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가로 58.5cm, 세로 34.0cm 크기의 이 편지는 한지에 한글 고어체로 쓰여진 것으로 형의 만시 미투리, 의복 등 다른 출토 유물들도 함께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덤은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로 이장하였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11-05

궁핍했던 시대, 구룡포의 자연에 사람의 정성을 더한 국수

나는 몰랐다. 무지한 편견으로 살았다. 국수가 다 그런 줄 알았다. 멸치국물에다 데친 나물 몇 점, 그것은 미나리이거나 부추무침이거나 호박나물이거나 달걀지단 등등 재료들의 향긋함과 고소함. 마늘과 쪽파를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고명이면 최고인 줄 알았다. 정작 주인공인 국수의 존재는 무시했다. 무지도 이런 무지가 없었다. 앙꼬 없는 진빵을 먹고 고무줄 빠진 팬티를 입고 돌아다닌 꼴이었다. 1969년 문을 연 구룡포 제일국수공장의 창업자인 이순화(86) 여사의 가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작정 철규분식으로 향했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만 사용하는 가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쉬는 날이었다. 그 옆에 있는 삼광상회로 발을 돌려 국수를 시켰다. 자그만 양은냄비에 담긴 적당한 양의 국수가 앙증스럽다. 최소한의 부추와 양념이 올라앉아 있다. 먼저 국물을 들이킨다. 적당하게 차가운 향이 그윽하다. 스물아홉 구룡포로 시집 온 이순화 여사 생업 위해 국수공장 한 켠서 일하며 창업 전문가 2명 모셔 직접 배우며 경력 쌓아 ‘해풍국수’ 이름 건 이순화 표 국수 탄생 밀가루•소금•물로서만 만드는 수제국수 기술이 아닌 몸으로 익힌 ‘경험의 산물’ 소금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 보며 감각 키우고 새벽마다 바람부터 헤아려 기계 반죽•열풍기 건조땐 7~8시간 충분 온전한 수제 생산은 빨라도 이틀 넘겨야 날씨•바람 따라 사나흘까지 험난한 과정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면에 도전한다. 편견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혓바닥을 휘어 감는 면발의 부드러운 몸부림이 목젖까지 공격해온다. 너무 매끄러워 그냥 삼켜도 무난할 듯싶다. 쫄깃하다느니 탱탱하다는 진부한 표현은 그만두어야 한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는 그 둘을 합하고도 그윽함과 넉넉함이 넘친다는 표현을 포함해야 한다. 맑은 육수 외에는 별다른 간을 하지 않는다는 삼광상회 주인장의 말을 빌리면, 참으로 적당하게 국수에 소금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한판의 능란한 블루스를 본다. 필자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멸치국수」다. 대략 옮긴다. 웨이브가 농염하네/장작의 부추김이 은근하네/짓이겨 뭉개져도 이마에 남는 마늘 향기/희생과 흔적은 이런 것이라 일러주네/팔팔 끓는 뙤약볕 밀밭의 추억//너무 정직하게 참 착한 햇살과/결 고운 바람 차분한 뒤뜰의 풍경마저 담겨 있네//바다의 뒤통수가 보이네//마치 첫 입맞춤의 그 비릿함의 멸치국수. 이순화 여사는 스물아홉에 감포에서 구룡포로 시집왔다. 공군으로 근무하다 막 제대한 남편은 철부지였다. 식구도 많았다. 남편은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더 열심이었다. 당연히 가정사에는 소홀했다. 문득 남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친정에서는 곱게 자란 여식이었지만 시집온 이상, 뼈를 묻어야 할 가정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여사는 시장에 자리를 빌려 옹기 장사를 했다. 그때 많은 사람을 알 수 있었다.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 시장은 사람의 공간이다. 그때 구룡포시장에는 국수공장이 일곱 군데나 있었다. 옹기 장사로는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돈을 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수공장의 끄트머리에서 국수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국수를 만드는 방법도 몰랐다. 의욕은 앞섰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본이 부족했다. 그러나 사업 전망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질보다 양이라고, 고픈 배를 불리는 데 국수만 한 음식이 없었다. 구룡포답게 상품성이 없는 생선이나 지천으로 깔린 푸성귀를 넣고 끓이면 훌륭한 한 끼 저녁식사가 해결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배부르면 장땡이었다. 어부들도 먼 바다로 나가면 식사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국수였다. 밤샘 작업을 하고 새벽에 돌아온 어부들의 빈속을 채워주는 뜨끈한 식사이자 해장국으로 칼칼한 어탕만 한 것이 없었다. 맑은 소주와 붉은 어탕으로 내일을 구축하는 머나먼 삶의 설계에, 미약하나마 국수는 삶을 위한 음식이었다. 그것을 ‘모리국수’라 했다. 멸치국수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렇게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았다. 자타공인 전문가 두 분을 모시고 제품을 생산하면서 일을 배웠다. 2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국수를 생산했다. 이순화 표 국수는 밀가루와 소금과 물이 전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바람을 관찰한다.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이다.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 걸려 감각은 경험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감각을 계발하고 유지하며 일상적으로 적용하려면 섬세해야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우며 눈여겨본 노동에 성실이 더해지면서 이순화 표 국수는 ‘해풍국수’라는 이름으로 거듭 탄생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냥 국수라고 취급하면 그 차이를 모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든 국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비슷하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국수나 손으로 직접 생산하는 국수는 외형적으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의 혼이 깃든 제품은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효용성을 아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삶의 질을 고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감하는 능력은 사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기대 이상의 실용적이며 정신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문화의 힘은 누리는 것에 있다. 실용성만 따지면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다. 장삼이사의 수준에서 그냥 단순한 실용성에 머물며 만족하고 만다. 그렇게 살아도 크게 문제가 될 것도, 불편할 것도 없으며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옹호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게 되고 자리가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이순화 여사는 염도계의 존재를 모른다. 처음 일을 배울 때부터 전문가들에게 소금의 양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조금씩 물에 소금을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감각을 키웠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면서 익힌 경험의 산물로 굳어졌다. 날씨에 따라 소금의 양이 달라진다. 추운 날씨에는 평소보다 조금 많게, 여름에는 적게 넣는다. 흐린 날씨에는 적게, 바람이 약하면 많이 넣는다. 자연건조를 고집하는 탓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기계로 반죽하고 열풍기로 건조하고 최신 기계로 절단하면 일고여덟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온전하게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이 걸린다.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 사나흘도 걸린다. 지금이야 기계로 반죽하지만 처음에는 여물통 같은 됫박에다 손수 밀가루를 치대야 했다. 그 험난한 과정을 비틀리고 굽은 손가락이 증명하고 있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05

영양엔 고기보다 맛있는 ‘그것’이 있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에서 필체 좋기로 으뜸을 다툰 이가 있다. 한호(韓濩·한석봉)다.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풍류묵객 다수가 그러했듯 술을 어지간히도 좋아했던 모양. 한호는 종장(終章)이 근사한 시조 한 수를 남겼는데, 1980년대엔 그게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그 시절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기자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런 노래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16세기 말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조를 21세기 방식으로 다시 써보면 재밌을 듯하다. 대리석 바닥 깔린 근사한 살롱이 아니라도 좋다. 휘황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없으면 또 어떠랴. 보시게, 여기 산나물 한 접시에 탁주 한 병 가져오게나. 경상북도 영양군은 시인 조지훈과 소설가 이문열을 낳은 문향(文鄕)이다. 산이 깊고 골짜기마다 철따라 화사한 꽃이 피는 곳. 사람들에겐 알싸하고 달달한 고추의 산지로 유명한 영양엔 그럴듯한 산나물 식당이 몇 곳 있다. 군(郡)의 이름을 걸고 산나물축제가 열릴 만큼 이런저런 나물이 흔한 영양군에 처음 간 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이다. 동행한 둘은 당시 모두 예순을 넘긴 사람들. 서울에서 출발해 먼 길을 가느라 점심을 시원찮게 먹은 기자는 저녁엔 소고기 구워 선배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고급 양주를 마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선배들이 문을 밀고 들어간 식당은 산채(山菜)를 파는 곳이었다. 연이어 기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주문을 했다. “여기 산채정식 3인분에 막걸리 하나 주시오.” 식탁 위엔 열 가지는 분명 넘고, 아니 스무 가지도 넘는 온갖 나물에 된장찌개와 밥이 놓였다. 그 많은 나물 중 기자가 이름을 아는 건 겨우 고사리와 도라지 정도. ‘풀 반찬’을 싫어하는 얼굴은 찡그려졌지만, 그와 별개로 놀라움이 성큼 다가왔다. 세상에 사람이 먹는 나물이 그처럼 많다는 걸 그날 알게됐으니. 한국인, 그 가운데서도 나이 지긋한 이들의 ‘나물 사랑’은 대단하다. 유명인이라고 다를 바 없다. 늘그막의 미당 서정주(시인)는 두릅을 먹기 위해 봄을 기다렸고, 노년의 정치인 김영삼의 아침상엔 언제나 시래깃국과 나물 한두 가지가 반찬으로 올랐다고 한다.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의 동물적 감각과 축적된 경험에서 오는 선별법은 기가 막힌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린 수백, 수천 가지의 풀 가운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 뜯어서 즉시 먹는 것과 데쳐서 말려 먹는 것, 약이 되는 식물과 독초를 신묘하게 가려낸다. 살아생전 기자의 외조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고 모친에게 들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등의 고문헌엔 약용 나물과 독초의 구별법, 철 따라 나오는 산채의 종류 따위가 기록돼 있다. 그러니, 우리가 나물을 상식(常食)한 건 아주 오래고 오래된 옛날부터가 아닐지. 시계를 2년 전 봄으로 돌린다. 두 번째로 영양군을 찾았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영양이 고향인 한 살 많은 선배가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이끌었다. 1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산채가 맛있다는 밥집 가운데 하나였다. 세월이 흘러서였을까? 나이를 더 먹어서였을까? 그날 맛본 곰취와 방풍나물, 씀바귀와 당귀는 향이 좋았고 식감 또한 독특했다.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 점심을 달게 먹고 이런 혼잣말을 했다. ‘육식주의자를 자처한 내가 지천명을 넘어 이순에 가까워지니 산채를 안주로 박주 마시는 즐거움을 알게 됐구나. 역시 사람의 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따끈한 밥에 향긋한 나물, 한국인의 소울푸드

한국인의 밥상에서 나물을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 팥소 없는 찐빵, 신랑과 신부 없는 결혼식이 돼버리지 않을까? 김 오르는 따끈한 밥에 고소한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무친 각종 나물을 함께 먹는 건 수백 년 이어져온 우리네 섭식 형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새’라고도 부르는 나물은 콩나물 등의 채소나 산마늘 등의 산채, 또는 야생초를 삶아 만든 것을 조미료와 기름에 버무린 것을 지칭한다. 채취하여 데치고, 양념에 뒤섞는 나물 조리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철마다 찾아낼 수 있는 재료가 원체 다양하기에 한국엔 수백 종의 나물이 존재한다. 채소의 재배와 채집이 힘든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나물을 삶아 말리는 방식도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를 ‘묵나물’이라 부른다. 채소만이 아니라 야생초, 나뭇잎, 식물 뿌리 중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양념한 것도 일종의 나물로 분류된다. 쌀의 수확량이 적었던 시기. 봄이 되면 산이나 들에서 채취한 산나물로 밥을 대신했던 춘궁기도 있었다. 이를 기억하는 70~80대 어르신들은 모든 것이 풍족해진 요즘도 그때 먹던 나물 맛을 잊지 못하며 추억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나물은 한반도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식을 금하는 불교의 본격적 유입 이후 나물이 중요한 반찬으로 정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나물은 건강에도 이롭다. 한국임업진흥원의 설명을 아래 옮긴다. “현대인은 육식, 술, 담배 등을 즐기면서 체질이 산성화되고 있다. 산성체질은 여러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산나물은 알칼리성으로 이를 섭취하면 산성인 체질이 알칼리성이 되도록 도와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04

파리 명문 요리학교에서 공부하며 시민제과의 미래를 구상

시민제과를 포항의 시그니처로서 전국적 명성을 획득한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진정하(45) 시민제과 3대 대표는 말한다.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명물을 만드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또한 거기에서 자부심을 창출하는 것, 이러한 것은 누구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일까? 진 대표는 포항시민의 참여와 성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이면에는 또 다른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 원도심의 쇠락을 걱정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시민제과의 소비자가 되어 원도심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도 진 대표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동해바다와 구룡포의 풍경을 바탕으로 죽도시장과 포스코의 야경 그리고 불빛축제 등의 행사가 시민제과로의 ‘빵지순례’로 어울어진다면 자연스러운 관광상품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파급효과가 입소문으로, SNS로 연결된다면 전국적인 브랜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포항 ‘시민제과’ 3대 대표 진정하 씨 미국의 안정된 삶 포기하고 제빵 도전 파리 명문 제과과정 수료 후 가업 계승 프랑스·일본 등 해외출장에도 많은 투자 직원 연수·세미나·품평회로 노하우 공유 시민 참여와 성원 바탕 지속적 발전 기대 포항 명물로 전국적 브랜드 만들기 ‘총력’ 프랑스, 일본 출장 다니며 식견 넓혀 빵집은 의외로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오븐 하나에도 수천만 원이 든다. 밀가루도 일본산을 수입해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춘다. 국내 밀가루도 사용하지만 각자의 제품에 적합한 맞춤형의 재료는 생산자가 직접 연구 개발하여 적용해야 한다. 이런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면 굳건한 의지와 확실한 목표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단기 매출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한 투자로 확보한 인프라는 서서히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진정하 대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소비자의 적극적인 소비를 유도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토대임을 그는 믿는다. 사람들의 입맛은 현란하고 변덕스럽기도 하다는 현실을 그는 직시하고 있다. 맛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이고 문화적인 취향까지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매장에 깔리는 음악에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기본이 완벽하면 응용은 무한대의 힘을 발휘한다고 그는 믿는다. 투자는 기술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매장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다. 진 대표는 틈나는 대로 출장을 떠난다. 일본의 각종 세미나, 품평회, 신제품 발표회 때는 거의 빠지지 않으려 한다.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 출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식견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제품 개발에 응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축적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이 동행하기도 한다. 최고의 투자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진 대표의 신념은 굳건하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연수를 제의하거나 각종 세미나에 여건이 허락하는 한 참여시키려 한다. 자체적인 품평회와 제품 개발회의도 수시로 열어 직원들의 중지를 모으려 한다. 오래 머물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것은 물론 외부에서도 많은 사람이 시민제과만의 경영 시스템과 제품 개발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업체로 만들고 싶다. 그들을 통해 시민제과의 가치를 전국에 알리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발전에 필요한 작은 밑돌이 될 수 있게 인식의 발판을 확장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젊은 기업인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것을 진 대표는 절감하고 있다. 파리의 명문 ‘에꼴 페랑디’에서 제과 과정을 수료 포항이 그리웠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길고 깊었다. 아버지의 생업을 저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아직도 젊은 패기가 남아 있어서 과감한 도전의 유혹도 느꼈다. 나의 삶을 살자고 생각했다. 돌아왔다. 텅 빈 건물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나의 뿌리가 지금 눈앞의 살아 있는 역사인데, 이것을 도무지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도전은 재미있는 일이지 억압이 아니다. 억압이라고 느낀다면 사업은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하 대표는 이른 나이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굴지의 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일한 샐러리맨이었다. 모자랄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럭저럭 살아도 부족함이 없을 삶이었다. 그러나 우연은 필연을 관통한다고 했던가. 그는 해운업 회사에서 원자재 운임 트레이드로 오랫동안 일했다. 그때 주로 맡은 업무가 밀을 비롯한 곡물의 대규모 거래였다. 그래서 그 한 부분인 밀 거래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제과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며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자못 흥미로웠다. 무엇이 되든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잘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이 어려운 일을 권하는 어른의 심중을 못 헤아릴 바는 아니었지만, 언감생심 막막하기만 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은퇴를 조금 앞당겨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과 가업을 전승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는 대대로 가업을 잇는 기업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도 진 대표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문제는 현실적인 적응 능력과 실질적인 기업 운영 능력이었다. 세상일은 용기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본인이 제과와 제빵의 전문 기술자가 아니었므로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돈 이상의 재산이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그때부터 알았다. 사람 없이 어떻게 사람의 일을 할 것인가. 평생의 친구는 도반(道伴)이라는 말을 그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하 대표는 당장 실천에 옮겼다. 2015년 프랑스 파리에 본원을 둔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서울분교에서 제빵 과정을 수료하고, 내친김에 1년 6개월이란 시간을 투자해 제빵의 본산인 프랑스로 날아갔다. 자처한 고통은 때로는 희열이 된다. 미래를 보장받을 수는 없지만, 인생의 방향은 스스로 설정할 수가 있다. 그는 파리의 명문 요리학교인 ‘에꼴 페랑디’에서 제과 과정을 수료한 후 제과 제빵의 기본기를 다지는 것은 물론 거기에 따른 디저트와 음료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수많은 책과 사진과 몇십 권의 노트가 그 시간의 고된 여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귀국해서도 전국의 유명한 제과점을 돌아다니며 견습생을 자처해 공부했다.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하고 그 끝은 성공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객 요구에 부응하려면 잠시도 멈출 수 없어 빵과 과자를 만드는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요리나 제빵에 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고객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제과점의 삶은 전쟁의 연속이다.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고 깊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요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려면 잠시도 멈출 수가 없다. 쏟아지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흡수하는 고객들의 요구는 실로 다양하다. 그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지만 판로를 개척하고 끊임없는 연구 개발로 고객의 입맛을 이끌어간다는 자세는 필수적이다. 늘 깨어 있고 도전적이어야 한다. 이익이 적더라도 다양한 제품으로 이목을 끌어들이고 맛과 영양, 시각적 효과, 특화된 서비스, 밝고 쾌적한 매장 환경에도 신경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다만 필자는 아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 가난했던 때라 시민제과에는 잘 들르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지 편집을 맡아 사람들을 인터뷰하거나 문학회 간부들을 만날 때면 가끔씩 들러 고소한 빵과 우유를 음미하며 우쭐한 마음으로 배를 채운 기억이 있다. 그때의 냄새는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정말 아쉽고 미안한 것은, 내 첫사랑을 한 번도 시민제과에 데려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독하게 반성한다. 그러나 다시 오질 않을 날들을, 시민제과는 시민 개개인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그 넉넉한 가치를 오래 지켜줄 것이다. 그는 더 분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민제과는 시민의 것이므로. 〈끝〉 글 : 이우근(시인) 사진 : 김 훈(작가)

202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