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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타 도시로 환자 가지 않고,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했으면…”

“병원을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병원을 통해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지난 10일 개원 16주년을 맞이한 에스포항병원의 김문철 대표 원장은 자신의 운영철학을 설명하며 미소 지었다. 김 원장은 “뇌졸중(Stroke)과 척추(Spine) 분야에서만큼은 환자들이 타 도시에 치료받으러 가는 불편을 겪지 않게 하겠다”면서 “환자들이 우리 병원이 있는 포항에 사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에스포항병원은 올해 초 ‘보건복지부 제5기 1차 연도 뇌혈관부문 전문병원’으로 지정됐다. 앞서 2011년 1기 신경외과 전문병원에 지정된 후 2∼5기 ‘5회 연속 뇌혈관 전문병원’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리기도 했다. 에스포항병원은 개원 이래로 대학병원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전문화된 진료로 ‘지역민의 건강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오고 있다. 지금의 모든 영광은 김 원장의 피나는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원장은 대구 경북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그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됐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밤을 꼬박새서 만든 신규 논문 계획서가 교수회의에서 매번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다니던 대학병원을 과감히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퇴직 후에는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더 높은 연봉과 조건을 제시하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자리는 없었다. 고심 끝에 김 원장은‘지역 의료 질을 높일 수 있는 제대로 된 병원을 만들자’라는 일념 하나로 돌연 ‘포항행’을 택했다. 2008년 11월 마침내 김 원장은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북구 죽도동에 에스포항병원을 개원했기 때문이다. 개원 후 환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개원 9년 만에 병원 규모는 3배가량 늘었고, 남구 대이동으로 신축 이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4명의 의사와 70여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병원은, 현재 66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16년간 성장시킨 병원의 모습은 만족스럽나? -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에스포항병원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본다. 병원이 단순히 치료를 제공하는 곳을 넘어,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신뢰와 희망을 주는 사회적 책임을 가진 기관이다. 병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환자의 건강을 개선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좋은 병원의 시스템을 가지고 치료의 질을 높이고 우리 지역사회를 안전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병원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갖길 바라나. - ‘진짜 괜찮은 병원’, ‘진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는 병원’이다. ‘진짜 목적’의 의미는 지역사회가 안전하고 내 부모와 형제, 친구가 사는 이 도시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 진료 시 의료진이 가장 중점을 두는 점은. - 우리 병원의 모토는 ‘가치 있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하자’이다. 어떤 이들은 ‘병원 모토에 정작 환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환자를 잘 보기 위한 가치 체계가 바로 우리 병원의 모토이고, 이것이 곧 우리 병원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를 잘 보기 위해서는 먼저 병원과 구성원들이 건강해야 한다. 건강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비전과 삶의 태도에 대한 건강함을 뜻한다. 이 모든 게 합쳐진다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이 목표는 개인의 영달이 아닌, 오로지 공적 가치를 공동으로 추구했을 때 가능하다. 그래야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의료봉사 등 사회공헌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떠한 활동들이 있나. - 병원이 지역사회와 긴밀한 연결을 통해 지역사회의 건강을 증진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한 예로 매주 포항시 남·북구 치매안심센터로 신경과 의료진을 파견근무하고 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병원이 가진 전문성을 가지고 치매안심센터에 직접 나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치매 환자의 초기 증상과 경과를 잘 파악해 조기에 치매를 발견하고, 향후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나 예방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치매 친화적인 지역사회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 앞으로의 에스포항병원은? - 우리 병원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미션, 목표는 단순히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시스템을 바탕으로 가치와 정보를 직원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통합이 되었을 때 혁신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스포항병원이 단순히 환자 치료를 넘어서, 사회적 책임, 지속 가능한 가치공유, 혁신적인 의료 서비스 제공하는 병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4-11-11

중학생 때 미술 선생님을 보며 화가를 동경

포항 미술계는 배원복, 김두호 선생이 첫 장을 열고 이방웅(동아미술학원), 강문길(현대미술학원), 박수철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박수철 선생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해 호미곶 구만리, 포항역, 철길 같은 포항의 풍경을 깊고 따듯한 색채로 그려냈다. 또한 1979년 일요화가회를 창립하는 등 지역의 화단을 두텁게 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중앙동에 있는 그의 화실과 오래된 커피숍 그리고 죽도시장의 보리밥집을 오가며 선생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도형(김) : 이 화실에는 언제쯤 들어오셨는지요? 박수철(박) : 7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식당을 하다가 비어 있던 곳인데, 고쳐서 화실로 만들었습니다. 김 : 근사한 화실이군요. 박 : 생계를 위해 집수리하는 일을 20여 년간 해왔습니다. 덕분에 이런 일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6·25 전쟁이 터진 1950년에 태어나셨더군요. 박 : 전쟁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울산 호계동 근처의 신답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 배 속에 있었어요. 박씨 집성촌인 그곳에서 9월 말(음력 8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4남 1녀 중 셋째였지요. 김 : 전쟁통에 태어난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 선린병원과 나루끝 사이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은 기와집이었지요. 아버지는 페인트 판매업을 준비하다가 친척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힘든 처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페인트칠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지요. 집 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장독대 주변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어요. 모란, 작약 등이 핀 작은 꽃밭도 있었지요. 집 주변 텃밭에는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포플러가 우리 집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마루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면 포플러 사이로 송도 송림이 보였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이전에 풍경을 먼저 봤습니다. 이런 환경이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김 :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아름다운 풍경화 한 점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박 :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의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연장자이고 마당이 넓은 편이었기 때문이지요. 김 : 댁 주변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습니까? 박 : 지금 선린병원 자리에 선린애육원이 있었어요. 미 해병대에서 선린애육원에 지원을 많이 해줬는데, 여러 가지 물품 중에 종이 팩에 담긴 우유를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포항세무서 자리에 덕수교회가 있었고, 근처에 구세군교회가 있었습니다. 점심때 구세군교회에서 강냉이죽을 배급했어요. 나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그 강냉이죽을 먹었습니다. 김 :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도 배급이 있었나요? 박 :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옥수수빵을 무상으로 주더군요. 배가 고프기도 했고 빵을 난생처음 맛보았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우리 집에서는 시래기와 쌀을 섞어 끓인 시래기갱죽을 자주 먹었습니다. 집 근처 술도가에서 달착지근한 술찌끼를 받아먹고 취했던 게 떠오르는군요. 김 : 당시 포항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박 :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 앞에 북부시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요. 시장 바닥이 질퍽질퍽했고 주변에 오리가 뒤뚱뒤뚱 다녔지요. 그리고 칠성천 옆 뻘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좌판을 놓고 장사했어요. 그곳에 엉성한 판잣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죽도시장은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 고아나 소아마비, 언청이가 많았어요. 걸인들이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연민을 느꼈지요. 김 : 미술을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박 : 포항중학교 다닐 때 미술 교사인 권영호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권 선생님은 한마디로 자유분방한 분이었어요. 미술실의 책걸상을 모두 빼내고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화가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림에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권영호(1936∼2012)는 경주에서 태어나 포항 구룡포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항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미술과로 전과해 2년 과정을 마쳤으며, 그 뒤 영남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부터 경북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부임해 2001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 「권영호」, 『네이버 지식백과』(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 : 중학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박 :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대구매일신문을 돌렸는데, 한 달에 450원을 받았어요. 석 달 치를 모으면 한 분기 공납금을 내고 50원이 남았지요. 김 : 고등학교는 동지상고로 가셨지요? 박 : 동지상고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야간부로 옮겼습니다. 학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당시 야간부는 한 학년에 한 학급이 있었어요. 1학년 때는 대신동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0원을 받았고, 2학년 때는 포항경찰서 정보과에서 한 달에 2000원을 받았지요. 3학년 때는 서경도서관(훗날 포항문화원이 되었던 곳)에서 한 달에 3000원을 받고 일했습니다. 그때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돈을 벌어가며 학교에 다녔어요. 김 : 고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박 : 2학년 때 200일가량 결석했어요. 사춘기의 방황이었지요. 왠지 학교에 가기 싫었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빠졌습니다. 그 바람에 학교 게시판 유급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지요. 다행히 담임교사였던 손춘익 선생이 손을 써서 유급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김 : 중고등학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가 있는지요? 박 : 중학교 다닐 때부터 새벽마다 수도산 자락의 철길을 따라 수도산에 올라갔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는데, 당시는 많은 학생이 그렇게 했습니다. 여덟 살 터울의 누나도 시집갈 때 철길을 걸어서 포항역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기차를 타고 포항을 떠났지요. 철길에 많은 추억이 묻혀 있는데, 철길이 사라지면서 추억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 : 대입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지자 군 입대 영장이 날아왔습니다. 서울 거여동에 있는 30사단에서 근무했지요. 군에서 제대한 후 집 안의 헛간을 개조해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네 살 터울의 형이 대학 다닐 때 보던 영문 소설책의 표지를 복사해 드로잉 연습을 했지요. 형도 동지상고 야간부를 나와서 서경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서경도서관에 형의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을 정도였지요. 김 : 이제 선생님의 미술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박 : 20대 중반 무렵 포항에는 미술학원이 하나뿐이었어요. 바로 시민제과 2층에 있던 현대미술학원이었습니다. 강문길이라는 사람이 원장이었는데 형을 무척 따랐지요. 형 덕분에 나보다 한 살 많은 강 원장과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레슨비를 낼 형편이 안 되어 돈이 생기면 소주 한잔은 사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학원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미술학원은 예술을 하는 청년들의 아지트가 되었어요. 난로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삶과 예술에 관한 열띤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러면 누군가 옆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지요. 박수철은… 1950년 6·25 전쟁 때 포항에 살던 가족이 피난을 간 울산 신답에서 태어났으며, 9·28 서울 수복 후 포항으로 돌아왔다. 포항중학교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고,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오지호를 사사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갈뫼화실을 운영했으며, 1979년 포항일요화가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 포항문화예술회관 기획 초대 개인전, 2017년 포항 우수작가 초대전(포항문화재단), 2023년 ‘The Cross 40’(개인전), 2024년 ‘Still Life’(개인전)를 열었고, 그 밖에 여러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10

“트로트계에 전유진 있다면 클라이밍엔 박지유가 있지요”

15m, 인간이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높이라고 한다. 암벽 여제(女帝) 김자인도 클라이밍 첫 도전 때 밑을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는 높이다. 이 높이를 오르내리는 운동이 스포츠클라이밍이다. 60여 개의 홀더를 이용해 직벽과 오버 행어를 올라야 하니 국대급 피지컬은 기본이다. 푸시-업 100개에 턱걸이 50개는 해줘야 ‘선수급’ 명함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극한의 운동에 뛰어든 어린 꼬마가 있다. 바로 포항 효자초등학교 3학년 박지유 양이다. 키 135cm, 체중 27kg으로 놀이터 구름다리나 타면 딱 맞을 나이인데 지유의 성적을 들여다보면 깜짝 놀란다. 지방, 전국대회 입상 메달이 10개가 넘고 우승컵도 몇 개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록이 입문 1년 여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트로트계에 전유진이 있다면 스포츠클라이밍에는 박지유가 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오늘도 열심히 인공암벽을 오르고 있는 박지유 양을 만나보았다. ◆놀이터 구름다리에서 발견한 지유 재능 “엄마 손 떼도 돼. 나 혼자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지유와 암벽과의 만남은 동네 놀이터에서부터 시작됐다. “지유가 5살 때 놀이터 구름다리에 올려달라는 거예요. 위험했지만 애가 원하니까 난간을 잡게 해주었는데 바로 한달음에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때 우리 애의 손힘이 남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딸의 운동 재능을 발견한 가족은 그 길로 포항의 클라이밍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지유는 여러 종목 중 리드(Lead, 정해진 시간 안에 높이 오르기 경쟁)에서 강점을 보였다. 아이의 재능을 살릴 전문시설을 찾고 있는데 마침 클라이밍 선배가 구미의 ‘포시즌’(센터장 김기만)을 추천해줘 그곳에 등록을 했다. 좋은 코치진, 훌륭한 시설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지유의 기량은 날로 향상됐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 다행히 지유는 부모님의 기대와 믿음대로 따라 주었다. 입문 두 달 만에 출전한 영남이공대총장배 ‘전국 클라이밍 대회’에서 2등(초교 저학년부)을 차지하며 가족은 물론 코치진을 놀라게 했다. 출전 학생들은 대부분 2~3년씩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선수들이고, 이미 ‘전국구급’에 이름을 올린 애들이 대부분이어서 부모님의 보람은 더 컸다. 아직 초보 수준이었지만 ‘일등’이 못내 아쉬웠는데 금메달 갈증은 6개월 후에 풀렸다. 2024년 4월 ‘광주김홍빈컵 클라이밍대회’에서 지유가 1위 시상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지유 역시 초등학교(저학년부) 유망주에 이름을 올리며 전국구급 선수로 부상했다.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에 승부욕까지 “아빠도 체육중학교 육상선수 출신이고, 저(엄마)도 학교 대표로 각종 육상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나름 운동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단기간에 성장을 거듭한 지유 운동 능력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 덕인 듯하다. 타고난 근력과 운동신경 외 성적을 받쳐주는 또 하나의 축(軸)이 있으니 바로 지유의 정신력이다. “지유가 처음 클라이밍장에 등록을 하고 며칠 훈련을 받았는데, 코치가 조용히 부르는 거예요. 지유가 암벽에 최적화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 못지않게 정신력과 도전 자세가 너무 좋다는 거예요. 저 정도 멘탈이면 중간에 슬럼프가 와도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보통은 초창기에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거나 피가 나면 훈련을 멈추거나 권태기가 한두 번 오는데 지유는 지혈이 끝나는 대로 암벽장으로 달려간다는 것. 엄마 눈에는 10살 어린 나이에 하루 5시간 고된 훈련에도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지유가 대견하고 애처롭기만 하다. 피로 물든 홀더를 바라보는 부모님 가슴은 안타깝지만 고통을 견딘 후에 돌아올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있다. 구미 포시즌에 등록하면서 지유는 어쩌면 본격 선수의 길로 들어선 셈인데, 이곳의 훈련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근력을 위해 턱걸이 100개(세트), 푸시-업 300개(세트) 크런치 100개(세트), 스쿼트 200개(세트)는 기본이고 하체 근육을 위해 개인 PT를 별도로 받고 있다. 클라이밍장에는 난이도 별로 A부터 F코스까지 있는데 이 코스를 하루 10번씩 반복하고 있다. ◆포항 유소년 클라이밍의 기대주로 성장할 “현재 지유의 라이벌은 전주의 오채서, 시흥의 김재령이에요. 동갑내기인 이 3명은 전국 대회에서 1~3위를 주고받으며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 구미에서 동계훈련 후 지유는 성장을 거듭해 현재 위의 두 학생과 초등학교 저학년부 전국 ‘빅3’를 형성하고 있다. 앞선 두 학생이 2~3년 체계적인 레슨을 거친 데 비해 지유는 입문 1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성장 가능성은 더 크다고 보지만, 다들 어린 선수들이어서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유는 현재 기록에서 앞서고 있는 채서보다 기량이 날로 향상되고 있는 재령이가 더 두렵다고 말한다. 이에 코치진은 경쟁 선수들을 공략할 나름의 작전과 훈련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 지유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는 국가대표 서채현 선수다. 서 선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암벽 여제’로 불리던 김자인 선수를 단숨에 제끼며 국내 정상에 올랐다. 장기적으로 서채현 선수처럼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지만 우선은 각종 대회, 체전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 “2025년 전국소년체전에서 클라이밍의 정식 종목 채택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우리 지유한테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입니다.” 클라이밍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 지역 대표에 선발돼 전국체전에도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체전에서 공인(公認) 입상은 국가대표로 가는 중요 관문이기 때문에 지유 입장에서는 가장 절실한 부분이다. 센터에서는 우선 전국대회에 참여해서 기량을 더 쌓고 몸을 만든 후 소년체전 참가 기회가 오면 포항시 명예를 걸고 훈련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전유진이 압도적인 노래 실력으로 ‘포항의 딸’이 되었듯이, 우리 지유도 더 열심히 성장해서 포항 클라이밍의 기대주로 거듭나겠습니다.” ◆2023∼24년 박지유양 입상 성적 ◇2023년10월 영남이공대총장배 2위11월 제주도지사배 스포츠클라이밍 3위 ◇2024년4월 김홍빈컵 광주시 스포츠클라이밍 1위5월 서울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2위5월 전주 스포츠클라이밍 동호인대회 2위5월 문경 전국 청소년스포츠클라이밍 2위6월 영남이공대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6월 대구시장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8월 부산 스포츠클라이밍 2위9월 포항 스포츠클라이밍 1위10월 엄홍길배 스포츠클라이밍 2위 (초교 저학년부)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1-07

“해월 최시형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

경주에서 태어난 해월 최시형은 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10대 중반에 포항으로 옮겨 신광면에서 살았다. 34세인 1861년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해 수운(水雲)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1863년부터 영덕, 영해 등 경상도 곳곳을 다니며 포교 활동을 했다. 1863년 8월 도통(道統)을 승계받으며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김용옥은 “오늘 우리의 가능성의 모든 씨앗이 동학에서 뿌려졌다”고 했고, 김상봉은 동학을 “현대 한국 철학의 시원”이라고 했다. 이형수 선생은 환갑을 넘어 동학에 매료되어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려왔다. 포항에 깃든 동학 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도형(이하 김) : 언제부터 동학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형수(이하 이) : 서울에서 그림을 배울 때 동학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해월이 포항에서 살았다는 걸 몰랐어요. 환갑이 지나 동학 공부를 하면서 해월과 포항의 깊은 인연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김 : 해월의 살림터에도 가보셨겠군요. 이 : 신광면 기일리와 마북리 검곡에 자주 갔어요. 기일리는 오지이긴 하지만 산세와 터의 기운이 참 좋습니다. 기일리는 해월이 일하던 제지소가 있던 곳이고, 검곡은 해월이 농사를 지으면서 동학 수련을 하던 곳이지요. 김 : 동학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습니까? 이 : 당시에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선포한 것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은 알면 알수록 가치와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해월은 36년 동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도피 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을 보듬어 안으며 인내천 사상을 전했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해월은 우리 곁을 다녀간 형님 같은 성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 동학에 관한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 그렸습니까? 이 : 동학의 깊은 뜻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물화를 그릴 때 해월과 장일순, 김지하도 그렸어요. 해월의 정신이 장일순과 김지하로 이어지니까요. 2022년에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문화예술촌 벽면에 삼례의 역사 기록 도판화를 만들어 부착했습니다. 삼례읍은 동학운동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지요.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51A4) 운동을 했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가 있었던 곳입니다. 동학의 역사를 기록한 도판화 1천여 장을 그려서 그중 420장을 도판으로 만들어 삼례문화예술촌 벽면에 부착했어요. 참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김 : 천도교에서 제작한 2024년 달력에 선생님의 작품이 있더군요. 이 : 해월의 큰딸 최윤(1878~1956)과 외손자인 정순철(1901~?)을 그린 인물화입니다. 정순철은 전 국민의 애창곡인 짝짜꿍, 졸업식 노래를 작곡했고 윤극영, 박태준, 홍난파와 함께 한국 동요 4대 작곡가로 꼽힙니다. 방정환과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 운동에도 앞장섰어요.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확인이 안 되면서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지요. 정순철은 충북 옥천 출신으로 정지용 시인의 문우(文友)다. 도종환 시인이 2022년에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어린이를 노래하다-한국 동요의 선구자 정순철 평전』(미디어창비)을 내면서 한국근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한 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평전에 따르면, 정순철이 방정환과 함께 전개한 어린이 운동은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라고 한 해월의 「내수도문(內修道文)」에 뿌리를 둔다. 김 : 정순철의 어머니도 명성이 높은 분이지요? 이 : 그렇지요. 정순철의 어머니 최윤은 경주 용담정을 지키며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해 ‘용담 할매’라고 불립니다. 그분이 고생한 건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김 : 수운 최제우는 경주 최부자 가문의 정신적 지주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의 7대 후손입니다. 동학은 경주 최부자 가문과 인연이 깊을 것 같습니다. 이 : 해월의 첫째 아들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손병희가 주선했지요. 최동희가 최부자 가문에 보낸 감사의 편지를 최부자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어요. 김 : 죽도시장과 동학 외에 관심 있는 분야가 있습니까? 이 : 동해안별신굿도 귀중한 문화유산이지요. 한번은 영해에서 별신굿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1박 2일 동안 구경했는데 정말 볼만하더군요. 다른 곳에서도 별신굿 한다는 소식이 있으면 달려갑니다. 김석출 만신에게 자문을 구한 백남준도 “나의 예술의 뿌리는 굿”이라고 했어요. 김 : 선생님을 뵐 때마다 배낭을 메고 걷기에 좋은 복장으로 오시더군요. 평소에 많이 걸으시나 봅니다. 이 : 걷는 게 삶 자체라 할 수 있지요. 60대 초반에는 호미곶 둘레길을 거의 다 걸었습니다. 구룡포 삼정리에서 호미곶면 신창리까지는 여섯 시간 정도, 구룡포에서 호미곶 보리밭까지는 네 시간가량 걸립니다. 60대 후반에는 집(장량동 대림골든빌아파트)에서 출발해 달전 사거리를 지나 도음산을 거쳐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신라 냉수비까지 걸었어요. 이 코스도 대략 여섯 시간이 걸리지요. 영덕에도 이따금 가는데 강구 버스 정류장에서 화림정맥을 타고 영덕군민운동장까지 가면 여섯 시간쯤 걸립니다. 강구 등대에서 오십천변을 따라 무릉도원교까지 가면 네 시간가량 걸리고요. 김 :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걷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첫째는 작품 구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혼자 걸어요. 둘째는 작품을 계속 그리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 : 걷기 외에 꾸준히 하는 일이 있습니까? 이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점의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독서는 게을리할 수 없어요. 김 : 많은 작품을 그렸을 텐데, 작품을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이 : 시간 나는 대로 작품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작품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할 생각이에요. 김 : 한 점 한 점 공들여 그린 작품을 소각하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이 : 어차피 모든 작품을 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요. 김 : 최근에 하신 작업이 있습니까? 이 : 영덕 출신 동갑내기인 김종완 선생이 동시집을 내는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더군요. 동시에 어울리는 그림 50여 점을 그렸는데, 동시의 원천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최근 『열두 살의 봄』(청개구리)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김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이 : 한 자루 붓이 한 생명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숲을 찾으려 합니다. 지방에 묻혀 있는 귀한 인문학적 자료를 찾아내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끝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06

신라의 전설 깃든 840년 은행나무… 그 시간과 마주한 장대함

하늘로 치솟은 웅장한 은행나무의 모습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가렸다. 은행 나뭇잎에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은행잎에 모여 큰 빗방울로 변해 머리 위에 떨어졌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고 벼락 치는 우레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빗방울은 채찍으로 변해 대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거대하고 무성한 잎의 은행나무 아래에도 소낙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빗물은 도랑을 형성하고 산자락 경사진 개울로 쏟아져 내렸다. 신라 천 년 고찰 적천사로 뛰어들었다. 맞닥뜨린 것이 험상궂은 얼굴의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사대천왕이었다. 두려움에 간은 쪼그라들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내 유년 시절에 청도 원리 적천사에 갔을 때 은행나무와 사대천왕을 처음 보았을 때 경험한 일이다. 화악산 적천사는 나의 고향 청도군 청도읍 소재지에서 밀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에 원리 마을이 있다. 마을 고샅길을 따라 산 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고찰과 함께 원리 981번지에 나이 840살, 키 29m, 가슴둘레 9m, 앉은자리 폭이 30.8m 되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두 그루의 서 있다. 신라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는 웅장함에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고향 가는 길에 청도 원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이곳 원리 마을 출신 대구광역시 교육청 부교육감과 대구예술대학 총장을 역임한 도정기 선배님은 늘 고향 적천사 은행나무 자랑을 나에게 늘어놓곤 했던 기억이 오늘따라 새롭게 떠오른다. 고찰로 가는 산 비탈진 오솔길은 유년 시절에는 걸어서 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숨 한 번 헐떡거림 없이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노거수의 웅장한 몸집에 주렁주렁 달린 은행이 떨어져 나무 밑을 꽉 채워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잘못하여 은행을 밟기라도 한다면 신발에 그 고약한 냄새는 귀가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접근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은행나무는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나무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임을 알았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감정을 나무 아래에서 느꼈다. 나무는 그 자체로 시간의 기록이었고,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불교 신앙을 지키며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쉼터를 제공했을 것이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마치 그 시간 속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가지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장대한 모습, 그 아름다움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요와 평안을 담고 있는 듯했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나무, 그 나무를 지켜온 사찰, 아니 사찰을 지켜온 은행나무, 그리고 사대천왕의 존재는 나에게 자연과 불교, 그리고 인간의 삶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사대천왕은 그들의 세상을 지키고, 악을 물리치며,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은행나무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천년의 세월을 지켜왔다. 나는 이곳에서 자연과 신앙, 그리고 인간의 삶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경험을 했다.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생불(生佛)이라 할 수 있다. 부처가 인간 내면의 불안감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주듯, 은행나무는 그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연의 지혜를 상징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고, 그 고요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운다. 인간은 종종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흔들리지만, 고요히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볼 때면 그 모든 걱정이 잠시나마 잊히고, 평온과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렇듯 은행나무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그리고 부처의 자비 속에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선사하는 생명의 상징이다. 천년 사찰의 은행나무는 이렇게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불과 같은 존재로 와 닿았다. 가을 햇살이 사찰을 비추고, 은행나무의 잎이 바람에 날리면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서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시간 속에 포함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이 저만큼 높이 솟아 있고 푸른 솔가지 위에 가을 햇살이 반짝인다. 사대천왕의 무서운 트라우마를 떨치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산사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내 빈자리에 누군가 또 다른 방문객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오르고 있다.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요히 방문객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있다. 천년의 시간은 은행나무와 사찰을 지나, 나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었음을 적천사를 빠져나오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적천사 사대천왕은… ①동쪽의 국토를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을 하고 있다. 치켜세운 눈썹과 드러난 이빨로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발로 마귀의 등을 밟고 있다. 발밑에 깔린 마귀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단청의 화려한 색상으로 앉아 있는 키만 하더라도 4m는 족히 되었다.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권선징악으로 인간을 고루 보살핀다고 한다. ②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이를 악물고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다.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세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진 마귀를 왼발로 배를 밟고 있다.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한다. ③서쪽을 방어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검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입을 꾹 다물고 부릅뜬 눈은 앞을 직시하고 있다.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는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광목천왕의 결의에 찬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느꼈다. ④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부릅뜬 눈으로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붉은 입술의 입을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손바닥 위에 보탑을 받들어 쥐고 왼발로 악귀의 배를 밟고 있다.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고 하는 다문천왕은 다른 천왕과는 다르게 배와 발아래 이상하게 생긴 마귀가 있다. 사대천왕의 오른발 아래 악귀가 하나씩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미산(須彌山)에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제석천(帝釋天)의 명을 받아 불법을 수호하며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1-06

황산벌 5000 결사대는 떼죽음을 맞았고…

우뚝 선 부처와 보살이 장엄함을 보여주는 마애여래삼존불과 줄줄이 늘어선 왕릉, 여기에 국가의 시작을 알린 성모(聖母)의 전설이 떠도는 선도산. 신라는 56명의 왕이 통치하며 992년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였다. 하지만 백일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어쩔 수 없는 순리. 말기에 들어서며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이 다스렸으나, 지역에선 반란 세력들이 들끓었다. 중앙집권 정치의 힘을 잃고 있었던 신라. 이윽고 918년엔 궁예를 무너뜨린 왕건(王建)이 후백제와 비교해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신라의 마지막 집권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이름을 지우게 된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백제에 비해 신라의 멸망은 피비린내가 덜했다. 왕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새로운 실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반면 백제의 멸망 과정은 참혹했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맞서겠다고 황산벌로 나섰던 5천명의 결사대가 떼죽음을 맞았고, 이후 백제 수도로 쳐들어온 나당 연합군에 백성들은 혼비백산했다. ◆지는 해처럼 사라진 고대 왕국 백제는... 백제의 멸망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 등에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이를 요약해 옮기면 아래와 같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660년 6월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을 무사히 통과했고,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에 상륙했다. 의자왕은 계백을 출전시켰다. 하지만, 결사대 5000명은 황산벌전투에서 전멸했다. 이후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무너뜨리고…(후략)” 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인 의자왕은 무력했다.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 지척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왕자 중 한 명인 태(泰)가 끝까지 사비성을 사수하고자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남은 군대에선 이탈자가 속출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왕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한때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백제는 그렇게 지는 해의 형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자리했다. 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칠갑산 일대는 백제의 사라짐을 통곡하며 그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고자 했던 세칭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나당 연합군의 횡포로 촉발된 백제부흥운동 그렇다면 백제부흥운동을 촉발시킨 매개체는 무엇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들려주는 해답은 이렇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 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했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했다. 백제부흥군의 주요 인물로는 정무·지수신·흑치상지·복신·도침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또한 길었다. 그래서일까? 10월 중하순에 찾아간 청양 칠갑산엔 드문드문 물들어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보였을 뿐, 제대로 된 단풍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칠갑산의 초입과 등산로를 제법 오랜 시간 거닐었다. 한때는 신라와 고구려 못지않은 힘과 세력을 과시하며 일본으로까지 이른바 ‘문화 수출’을 했던 예술지향의 백제 왕조. 하지만, 사라짐의 순간은 찰나처럼 덧없고 짧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깨진 사발의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몰락한 국가를 재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백제부흥운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흥운동 초기 백제의 복신은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군을 압도하기도 했고, 661년 가을엔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일본에서 돌아와 왕에 오르며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부흥군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고, 주요 수뇌부가 암살되기도 한다.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부로부터의 불화와 같은 편끼리의 암투, 나당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 풍왕의 고구려 도피, 신라군에 의한 주류성과 임존성의 함락…. 백제부흥운동의 짧았던 3년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직까지 백제의 서러운 멸망사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내려오는 길에 본 칠갑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유독 핏빛으로 붉었다. (계속) 토기가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전시물. 절제되고 간결한 백제토기 고구려·신라 등과 비교하면 기종 다양장식성 강하지 않고 실용적인 면 선호 ‘백제부흥운동의 본산’으로 불리는 청양군. 그곳에 건립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가장 주목되는 건 토기다. 흙으로 만들어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던 그릇과 병은 1천 년 전 먼 옛 시대 백제인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용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엔 백제의 토기가 출토된 지역을 아기자기하게 복원해놓은 전시 공간이 있고, 흥미로운 형상을 지닌 여러 가지 토기를 모아 선보이고 있다. 박물관을 찾는 학생들이 토기 제작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전시물도 확인 가능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제 토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백제 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기종이 확인된다. 장식성이 강하지 않고 단순하며 색조, 유려한 선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인들이 보다 절제되고 간결함을 추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성기부터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 토기가 고분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됨으로써 실용적인 면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찾아 살펴본 백제의 토기는 위의 설명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많지 않은 소박함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가에서 봤던 그릇이나 항아리처럼 투박했지만 단아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 거기에 더해 연꽃무늬 수막새, 오수전무늬 벽돌, 귀면전, 암막새, 토제직구호처럼 신라와는 구별되는 백제만의 향기가 담긴 여러 생활용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인상적인 체험으로 다가왔다. 패망한 왕국 백제를 다시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지금의 청양 지역엔 청남면 왕진리 가마터, 장평면 관현리 가마터, 정산면 학암리 가마터, 목면 본의리 가마터 등에서 다양한 기와, 와당(瓦當), 토기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것들은 현재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다수 전시돼 있다. ‘고고학사전’에 따르면 ‘백제 토기는 백제라는 특정 정치체의 시공적(時空的) 영역 안에서 제작·사용되었던 것으로 여타 토기와 식별할 수 있는 일정한 양식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토기군’을 지칭한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와 특정 토기의 양식이 가진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일정 양식 토기의 성립이 반드시 국가의 형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정치적 긴장 상황이 매우 증대되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고구려나 신라 모두 그 시공적 영역 내에서 식별할 수 있는 토기양식이 등장하고 있어 이 무렵 국가와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 토기의 형성은 곧 백제라는 국가 형성의 한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청양군을 찾게 된다면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생활물품 가운데 하나였던 토기를 통해 백제의 실체와 그림자를 살펴보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1-05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운전자는 계기판을 보고 속도를 조절한다. 여기서 계기판에 표시된 속도가 ‘계측’이라면, 속도를 내거나 줄이는 게 ‘제어’이다. 우리의 일상은 알고 보면 ‘계측과 제어’로 구성돼 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살 때도 저울의 눈금을 보고, 주유소에서 주유할 때도 기름의 양을 숫자로 본다. 산업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상보다 현장의 계측은 더욱 빈번하고 극도로 정밀하게 이뤄진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계측제어 전문가인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계장정비섹션 이경재(60) 포스코 명장을 만나 섬세함을 배워 본다. - 현재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포항제철소에는 계측기가 무려 4만5000여 대가 있다. 이 모든 계측기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해서 유량, 압력, 온도, 레벨, 무게 등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측기는 사람이 정량화하지 못하는 많은 종류의 설비 상태를 숫자로 보여준다. 나는 이 계측기가 오차 없이 정확하게 측정하는지 진단하고, 교정하는 일을 한다. 계측기를 제어하는 DCS(분산제어시스템)에 대한 문제 해결 및 개선 방안 도출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또한 기술 검토 및 사양 설계, 후배 양성교육 등 기술 전수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다. - 업무를 하면서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제철 공정 중 연주설비는 용강을 천천히 흘려보내면서 냉각수를 분사해 고체 슬라브를 만들게 된다. 냉각수의 분사량에 따라 슬라브의 품질이 결정된다. 냉각수가 많으면 급격히 냉각돼 크랙이 발생하고, 적으면 블랙아웃이 발생하거나 강도가 약해진다. 2016년, 우리는 쇄빙선 선두의 철판이나 컨테이너선 갑판에 사용되는 후판 400㎜ 특수강 주편 생산을 해야 했다. 특수강 생산을 시도했지만, 냉각수의 미세 유량 제어 문제로 인해 품질 불량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따라 수요자는 구매를 꺼리기 시작했고, 제조 원가 손실도 증가했다. 운전, 정비, 기술부서가 모여 대책을 검토한 결과, 84대의 제어밸브를 교체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기존 제어밸브는 15~80% 범위에서 사용됐지만, 특수강 조업에서는 5~10% 범위에서 제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주설비 구성상 모두 교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는 제어밸브의 특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연주공정의 냉각 조업 패턴은 몰랐다. 그래서 기초부터 조업 기술을 파악하고 실적을 분석했다. 제어밸브 동작 특성을 5~60%로 바꾸고, 특수강 제어용 PID 제어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일반강 품질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50일간 밸브 특성을 개조하고 프로그램을 개선해 미세 유량 제어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크랙 발생 품질 불량을 0.8%로 낮추는 획기적인 개선을 이뤄냈다. 모두가 변화를 두려워할 때, 그간 쌓아온 밸브 특성과 제어 이론의 전문지식, 새롭게 습득한 조업 이론을 접목시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떤 문제든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며, 모르는 것을 알아내려는 평소의 지론이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 현장 관리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다. 스위스 치즈 모델이라는 안전 이론이 있다. 이는 모든 현상이 하나의 원인에서 기인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케이블이 자주 끊어지는 고장이 발생할 때, 단순히 해당 부위의 환경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수리 방법을 찾기보다는, 그 환경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재질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론부터 먼저 파고들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아기가 울 때 엄마는 배가 고픈지, 기저귀가 젖었는지 아이의 입장에서 알아차리고 돌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직장은 학교나 군대와 달리 단기간에 관계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관계를 이어가는 집단이다. 따라서 후배라면 선배의 입장에서, 선배라면 후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먼저 다가가는 소통 방식이 중요하다. 이는 직장 생활의 보람을 배가시키는 요령이라고 확신한다. - 배드민턴 불모지 포항에 생활체육 클럽 31개를 만들었다고. △내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특기를 가지라고 권장하는 편이다. 나 역시 배드민턴을 취미이자 특기로 즐기고 있다. 처음에는 당구, 탁구, 테니스를 하다가 일본 유학 시절 학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 배드민턴을 처음 알게 됐다. 그때 배드민턴이 대중적인 스포츠라는 것을 느끼고, 다른 운동을 모두 그만두고 배드민턴에만 몰두하게 됐다. 한국에 돌아온 뒤, 포항에서 배드민턴을 하려고 보니 중앙고등학교와 포항공대 체육관에서 소규모 인원으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7년 6월, 12명을 모아 포항시 첫 생활체육 클럽인 ‘포스피드’를 만들었고, 주변 학교를 설득해 생활체육 배드민턴 연합회까지 탄생시켰다. 지금은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을 합쳐 31개 클럽, 3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포항시 배드민턴협회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정과 회사생활, 배드민턴 활성화까지 노력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첫째가 5살, 둘째가 100일 지난 시점부터 시작했으나, 아내와 수많은 갈등도 있었다. 심지어 애꿎은 라켓을 부러뜨리며 다시는 배드민턴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의 이해심 덕분에 지금의 큰 협회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배드민턴을 통해 남 앞에 서는 것을 꺼렸던 성격이 바뀌었고,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후배 숙련기술인에게도 자신의 특기를 가지라고 적극 추천하고 싶다. - ‘소프트웨어 개선’으로 전국 최초 자주관리대회 동상 수상 이야기를 들려달라. △1989년, 입사한 지 5년 정도 됐을 때였다. 당시 제강 탈가스 공정의 설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공정은 쇳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여러 종류의 합금철을 투입해 용강의 성분을 맞추는 작업이다. 매일 현장 설비 점검을 마치면 운전실에서 조업하시는 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업 방법이나 불편사항, 설비 성능 개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보니 운전과 조업에 대해 깊이 알게 됐다. 가끔 직접 조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어느 날 용강 성분을 조정하기 위해 3~8종류의 합금철을 한 종류씩 투입하는 것을 보고, 문득 ‘한꺼번에 투입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한꺼번에 투입해도 성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프로그램 개선을 시작했다. 운전부서의 협조를 받아 수차례 테스트를 거친 결과, 투입 횟수를 1~2회로 줄여 탈가스 공정의 경처리 조업시간을 20분대에서 10분대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단순히 제어 시스템의 프로그램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업 방법에 대한 이해도와 완벽한 제어의 균형을 통해 실질적인 기술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 당시 경북도, 전국 대회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개선이었기 때문에 “진짜 개선된 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에 “기계장치나 전기설비 등 눈에 보이는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프로그램을 활용한 개선이 더 큰 성과를 가져오고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설비 소프트웨어 개선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나만의 지침을 만들어 늘 체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포스코에 입사한 후, 나는 1제강 공장에서 계장정비 업무를 맡았다. 이때부터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라”,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마라”, “내가 하는 업무에 최고가 되어라”, “대인관계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후회하는 행동은 두 번 이상 하지 않겠다”라는 셀프 지침을 세우고 실천해 왔다. 명장이 된 후, 6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는 것을 묻지 않는 것이 창피한 것이다”라는 단순한 지침을 추가해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 앞으로의 포부는. △포항제철소는 스마트팩토리 구축, 4차 산업혁명 등 기술의 변화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계측제어는 안전, 품질, 생산, 에너지 등 모든 분야의 기초이다. 어떤 종류의 AI, 빅데이터라도 계측제어를 통해 기초 데이터의 신뢰성이 높고 정확해야 성공할 수 있다. 고급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집이라면, 건물의 기초가 바로 계측제어의 역할이다. 탄탄히 다진 기초 위에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다. 오차가 크고 수시로 흔들리는 데이터로 집을 짓는다면 그 집은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특히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소홀해지기 쉽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하고 있는 계측제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계측제어에 대한 인식의 저변을 넓히는 일에도 힘쓰고 싶다. 또한 이제 시작되는 수소환원제철 공법의 수소안전관리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에도 앞장설 계획이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이자 사명이다.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포스코 명장은 △포항제철공고 졸업(1984년) △전국자주관리대회 동상(1989년) △전사 제안왕(1990년) △일본 산업기술단기대 졸업(1997년) △포스코 명장(2018년) △위덕대학교 신재생에너지공학과 기업전문교수(2020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1-05

“유방암 수술 위해 포항을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이제 그것이 실현돼 너무 기쁘다"

사실 암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이 서울의 ‘빅5 병원’을 떠올리는데, 포항세명기독병원은 이런 편견을 깬 흔치 않은 병원으로 손꼽힌다. 전국 각지의 환자들이 치료 잘하는 의사를 찾아 수도권 병원에서 지역 병원으로 U턴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데, 실제로 많은 환자가 포항세명기독병원행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병원 백남선 원장은 유방암 분야의 세계적 명의로 정평이 나있다. 백 원장은 지난 2021년 인생 2막을 고향도, 오래 살아온 도시 서울도 아닌 ‘포항’에서 열기로 했다. 그가 포항에 내려온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유방암 분야 최고 권위자 백남선 원장을 지난 1일 만나 ‘유방암 예방과 극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우리나라 여성암 1위인 유방암이 급증한 원인은 무엇이며, 어느 연령대의 발병률이 가장 높나.  -국가암정보센터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유방암 환자는 2만8000명으로 여성암 1위를 차지했다. 연령대별로 40대 발병율이 가장 높고 50대, 60대, 30대 순서로 많다.  특히 최근 들어선 30대 발병률이 높아지는 추세다.  직장생활 하는 여성이 늘면서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식습관이 서구화되면서 고칼로리 음식 섭취가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또 피임약 복용이 늘고 첫째 아이 출산은 늦어지는데 반해 모유 수유 기간이 짧아진 것도 영향을 미친다. □ 백 원장은 전북 익산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 입학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서울에서 생활을 해왔다. 흔히 명의들이 은퇴를 고려하면 유명 병원에서 서로 모시려고 한다. 하지만 백 원장은 서울 지역 병원에서의 수많은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돌연 ‘포항행’을 택했다. -포항은 한국 경제의 주춧돌인 포스코와 세계적인 대학인 포스텍이 있는 지역으로, 글로벌 의료 활동을 펼치기에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2021년 9월 포항세명기독병원 유방갑상선암센터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지난달 14일까지 유방암 및 갑상선암 수술 500여 건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부분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제 병원은 유방암과 갑상선암 전문 치료를 위해 환자 중심의 가치관을 갖춘 우수한 의료진과 최첨단 의료 장비, 암환자를 위한 입원실 등 두루 여건을 갖춘 상태가 만들어져 있다.  진료 프로세스도 진척됐다.  그간 진단된 암에 대해 다각적인 분야에서 환자의 상태를 진료하는 최신 치료법인 다학제 진료 시스템을 적용하고 빠른 진단검사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암환자의 기다림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세명기독병워에서도 당일 진단 후 일주일 이내에 수술과 시술을 시행해 빠르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암환자의 불안감을 줄여줄 수 있다는 점이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진료를 해보면 지역 주민들이 보내주는 신뢰도를 느낄 수 있는데, 더 노력해 질 높은 의료서비스로 보답하겠다.  최근에는 수술 후에 항암제 치료가 꼭 필요할지를 알아보는 유전자분석법을 미국연구소와 협업해 실제 우리 환자들에게 응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나의 특기인 환자들의 생존율과 외적 여성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고려한 ‘암수술 후 동시재건술’이 인기다.  포항뿐만 아니라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광주 등 전국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심지어 미국, 영국, 중국,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도 환자들이 래방한다. 그들로부터 서울의 어느 대학병원보다 못지않은 치료를 해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때는 뿌듯하기도 하다.    지금 우리나라 지방 의료체계를 두고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포항에 내려오면서 지방에서도 ‘최신의 기술로 암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이 내 목표가 잘 안착돼 그동안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간과 치료비용을 최소화시켜줬다고 자부한다.  □ 1986년 당시 유방 전 절제 없는 유방보존술을 연구한 계기와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당시는 유방암에 걸리면 유방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암이 전이됐다. 마침 그때 방사선치료기가 구비돼 있던 원자력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던 터라 부분 절제를 하고 방사선 치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배 교수님들로부터 “위험하다. 조직을 살리면 암이 재발할 확률이 높아질 텐데 어린놈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그 방식을 나무랐다. 오기가 생겨 더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절제를 하지않고도 유방암을 퇴치하는 나만의 치료법을 개발해 냈다.   기억에 남는 환자는 많다. 결혼도 안 했는데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된 약사가 유방을 다 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울었다. 또 수술 후에 이혼을 당하거나, 신체적 약점에 따른 자괴감으로 먼저 이혼을 제안한 여성, 극단적 선택을 하는 여성, 직장생활을 포기하거나, 산으로 들어간 여성도 있었다. 어떤 환자는 목욕탕을 못 간다고 하길래, ‘팔 없는 사람도 가는데 왜 못 가느냐’고 했지만 당사자는 그게 아니었다. 여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았고, 그것이 나만의 길을 가게 한 동인을 만들었다.   최근 유방보존술은 유방 모양을 원래대로 갖추기 위해 수술 후 빈 공간에 팰릿 생체조직인 ADM을 채워넣는다. 쉽게 말해 사람 피부로 만든 알갱이다.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밥은 먹고살았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못한 꽃을 보려면 다른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유방암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식습관 영향이 가장 크다. 전체 암 원인의 35%가 잘못된 식습관이다.  암(癌) 자를 보면 입(口)이 산처럼 쌓여서 완성된다. 많이 먹고, 잘못 먹고, 맛있는 것만 먹어서 생기는 게 암이다. 여성호르몬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는데 폐경 여성 중에 삶의 질을 높이겠단 이유로 여성호르몬을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분들이 많은데 상당히 위험하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웃으면 암을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 □ 마지막 한 말씀 부탁 드린다. -우수한 의료진, 최첨단 방사선치료 장비와 시설시스템을 갖춘 지역 병원이 있다면 지역에서 암 수술받는 것이 환자에게 더 이득이다. 암 환자는 늘 불안감을 가지는데 굳이 대학병원을 찾아 한달, 두달 대기하면서 불안감을 키울 필요가 없다. 재수술 비율도 선진국에서는 20% 이상이나 우리 병원은 병리 의사가 진행하는 동결절편생검술을 수술 중 시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춴 놓아 재수술이 지금까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역 병원에서도 충분히 암 수술이 가능함을 우리 병원 암 수술 실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백남선 원장 백남선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 입학을 시작으로 50년간 임상의사로서 서울의 원자력병원장, 건국대학교병원 병원장, 이화여자대학교 여성암병원 병원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또 학생과 수련의들의 교육, 연구, 진료는 물론, 세계학회에서 기조강연(keynote lecture)을 수차례 해 오는 등 한국의 의료 수준을 세계에 알려왔다. 이 업적을 평가받아 한국 및 아시아 유방암학회장도 역임했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4-11-04

“죽도시장 그리며 그림에 땀내가 나야 한다는 걸 깨달아”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문인화를 접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문인화는 현대인이 자주 접하는 예술 장르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문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렇다면 문인화가 지금 왜 필요한지, 그 가치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 평자는 이런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문인화가 어디 있느냐고 다들 반문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필묵(筆墨)의 현대적 재해석은 차치하고라도 작품의 형식, 구도, 소재 자체가 구태의연하다. 그러니 수구나 매너리즘의 끝자락으로 간주한다. 오늘날 문인화의 현실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문인과 문인화 이전에 인간과 예술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나의 실존의 노래 역사가 문인화의 역사고 예술의 역사다. 그런 만큼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가 문인화다. 오히려 그 중요성이 오늘날보다 더 큰 때도 없다. - 이동국, ‘역사와 실존·심관의 시서화 일체 언어’, ‘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서예문인화, 2017, 13쪽. 그렇다면 이형수의 문인화는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어떻게 펼쳐 보이고 있을까? 그 ‘가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김도형(이하 김) : 선생님은 근래 죽도시장 그리고 동학과 관련된 작업을 꾸준히 하시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형수(이하 이) : 60대에 김지하, 박동진 같은 역사에서 굵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 위주로 그림을 그렸지요. 일흔을 바라보면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방향을 두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멀리 갈 것 없이 내가 사는 바로 이곳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장소를 택해야 할 텐데, 그 장소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어야 하겠고요. 그래서 책과 자료를 찾아보며 고민하다가 두 군데를 떠올렸어요. 하나는 죽도시장이고, 또 하나는 해월(海月) 최시형이 살았던 신광면 마북리 검곡(劍谷, 검등골)입니다. 김 : 먼저 죽도시장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군요. 죽도시장은 동해안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인데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습니까? 이 : 2005년부터입니다. 그 당시 거의 매일 아침 죽도시장에 갔어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죽도시장에 가면 꿈틀거리는 생명력 같은 걸 느끼게 됩니다. 그런 체험을 하면서 죽도시장이야말로 인문학의 보고(寶庫)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 어떤 의미에서 죽도시장을 인문학의 보고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이 : 인문학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지요. 죽도시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삶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도시장은 다양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 문인화에서 시장 풍경은 잘 다루지 않는 것 같은데, 작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이 : 죽도시장을 100점 정도 그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림에 딸린 화제(畫題)를 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잘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물론, 상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요. 다루고자 하는 소재를 충분히 이해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니까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일주일가량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작업하면서 그림에 땀내가 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칼을 가는 여인 칼을 가는 여인의 삶은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칼날을 세우는 여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기운은 날카롭다.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짧은 일상의 한순간이지만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그녀의 손끝 칼날은 무섭다. 인생은 짧고 짧은 순간의 연속이지만 때가 되면 죽음은 칼같이 온다. - 2017년 6월, 죽도시장 어물전 옆 30년간 칼 가는 여인을 보며. 노점상 ‘규합총서’에는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고 했다.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들어야 제맛이 난다는 것이다. 시속 40킬로미터로 차가 다니는 노점상의 힘든 삶의 조그만 공간에서 맛난 점심, 삶의 엄숙함을 본다. 아쉬움이 많은 세상살이 할머니들에게서 꿈과 희망을 읽는다. - 2017년 6월. 아귀를 파는 여인 아귀는 방언으로 아구, 물 텀벙, 아구어라고도 한다. 아귀는 체형 탓인지 헤엄치는 속도가 느린 탓에 바닥에 엎드린 채 유인 돌기를 흔들어 먹잇감을 유혹해 잡아먹는다. ‘자산어보’에도 낚시하는 물고기 조사어(낚시조, 실사, 고기어)라고 했다. 한 번에 큰 입으로 큰 고기를 삼키는 먹성 때문에 탐욕과 욕심의 상징으로 통한다. - 2016년 6월, 어물전에서 본 아귀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두 아이와 부부를 그리다. 김 : 죽도시장을 오랫동안 다니셨으면 다양한 사연을 접했을 것 같습니다. 인상 깊은 사연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밥 한 끼를 천 원에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한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말을 안 들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한 스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말 잘 듣는 아들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지요. 스님은 할머니가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말 잘 듣는 아들이 될 거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할머니는 고민 끝에 시장에서 밥 한 끼를 천 원에 팔았더니 손님이 몰려들고 아들도 말을 잘 듣게 되었다고 해요. 김 : 한 편의 전설 같은 이야기군요. 인상 깊었던 장면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 한번은 식당에 들어갔는데 추사체를 흉내 낸 ‘淸淨(청정)’ 자가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씨 밑에서 한 할아버지가 밥을 앞에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겁니다. 아마 고된 일을 하고 힘이 들어서 졸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순간 ‘淸淨’과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지더군요. 김 : 죽도시장을 그린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셨지요? 이 : 2021년 10월에 포항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해도 도시 숲에서 30여 점을 전시했습니다. 죽도시장에서 전시를 더해 보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김 : 죽도시장을 100점 정도 그렸다고 하셨는데, 아직 제대로 된 전시가 이뤄지지 못했군요. 책자로 발간되지도 않았을 테고. 이 : 그런 셈이지요. 언젠가는 죽도시장을 주제로 한 좋은 전시가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김 : 혹시 포항의 풍경을 그린 작품 중에서 공개하지 못한 작품이 있는지요? 이 : 산수화를 제 나름대로 그리고 싶어서 2015년에 ‘청하골 12폭포’를 그렸어요. 그 후에도 다양한 크기의 ‘12폭포도’를 그렸습니다. 내연산 12폭포에 깃들어 있는 여러 이야기를 ‘12폭포도’에 화제로 썼지요. 아직 전시는 못 했습니다. 김 :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군요. 전시회를 통해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 : 개인전을 여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여는데 적어도 2000만 원이 듭니다. 작가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요.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1-03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문인화를 지향해”

이형수 선생은 20대 중반인 1976년 포항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간다. 1979년 포항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후로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초대전을 꾸준히 열었다. 일기처럼 그린 작품을 모아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엮어내기도 했다. 이형수 선생이 이런 활동을 펼치며 어떤 작품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는지 들었다. 김도형(이하 김) : 옥산 선생의 주변에도 유명한 예술인이 많았겠습니다. 이형수(이하 이) : 옥산 선생과 가까운 분으로 이상재, 문장호, 김춘, 최범술, 김범부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옥산 선생이 전라남도 진도 출신이다 보니 선생 주변에는 호남 사람이 많았어요. 호남 수묵화의 저변이 굉장히 넓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지요. 김 : 옥산 선생 문하에서는 언제까지 계셨는지요? 이 : 1973년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문하에 있었습니다. 김 : 당시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힘들었지요. 집사처럼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따금 그림을 팔아서 생기는 돈과 선생님이 간혹 주시는 용돈이 수입의 전부였어요. 군대 가니까 오히려 편할 정도였습니다. 김 : 옥산 선생 문하에 있을 때 기억에 남은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이 : 옥산 선생이 차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의제(毅薺) 허백련 선생이 만든 춘설차를 좋아했어요. 그 덕분에 저도 차 맛을 좀 알게 되어 다인(茶人)이 되었습니다. 김 : 선생님은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대가들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셨습니다. 혹시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걸 후회하신 적은 없는지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진학했더라면 좋은 대학에도 가고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하지만 문인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이니까요. 다만 당시 큰 스승 밑에서 더 열심히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김 : 포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이 : 군에 입대하면서 서울 생활은 마무리되었지요. 충북 조치원에 있는 32사단에서 군수처에 근무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1976년에 포항으로 왔어요. 영덕에 계시던 부모님이 거주지를 포항으로 옮기셨거든요. 김 : 당시 포항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이 : 그때는 해도가 늪지대였습니다. 포항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도시에 활력이 넘쳤지요. 포항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고 보면 됩니다. 김 : 포항에서 작품 활동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해도동 집에서 작업했습니다. 1979년 육거리 근처에 있던 용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지요. 산수 여덟 폭과 기러기 병풍을 전시했습니다. 작품이 팔리긴 했는데 전시 경비를 제하고 나니 남는 게 없더군요. 당시에는 그림 전시회 등 웬만한 문화예술 행사를 다방에서 했어요. 그런 행사를 소화할 만한 문화 공간이 없었거든요. 김 : 사모님(효원(曉園) 최영란)이 서예가이시죠? 이 : 포항에서 금강연묵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1982년에 결혼했어요. 제가 아내가 쓴 금강경에 반했지요. 결혼 1년 후에 아내가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지요. 김 : 서실도 열었을 것 같습니다만. 이 : 1990년에 두호동 해변가 상가에서 서실을 열었습니다. 뒤늦게 대학에도 갔지요. 검정고시를 거쳐 경주 동국대 조경학과를 1992년에 졸업했습니다. 김 : 선생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문인화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더군요. 이 : 1996년에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 경북문인화협회가 창립되었는데, 협회 회장을 10년 동안 맡았지요.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경북지회가 창립되면서 역시 10년 동안 지회장을 맡았고요. 그리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을 맡았는데, 그 후로는 두문불출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문인화와 서예 쪽에서 심부름을 많이 한 셈이지요. 김 : 전시도 꾸준히 하셨지요? 이 : 1995년 포항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할 때, 그리고 2007년 포항시 신청사가 개청할 때 초대전을 했습니다. 두 번 모두 전통 문인화를 소재로 전시했지요. 지금도 포항문화예술회관 1층에 ‘청매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2008년에는 대구 동아미술관에서 ‘먹빛이 마음빛’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어요. 성타 스님이 낸 생활법문집 ‘모래 한 알에 우주를 담다’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김 : 해외에서도 전시하셨지요? 이 : 2010년 12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19일까지 독일 베를린 스판다우 문화의 집 갤러리에서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鵲知孤虎)’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했습니다. 독일에 있는 동포들이 환대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동포들을 위해 빨랫방망이에 까치와 호랑이 그림을 그려서 갖고 갔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그 이듬해 함부르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닷새 동안 ‘모든 사람은 꽃이다’를 주제로 초대전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묵죽(墨竹)을 좋아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김 :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까치와 호랑이가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뜻을 담은 것인지요? 이 :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지요. 알고 보면 까치도 호랑이도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까치는 서로의 속마음을 아는 친구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김 : 유럽에서 전시하면서 문화 체험을 폭넓게 하셨겠군요. 이 : 독일 베를린에서 한 달 동안 민박하면서 독일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한밤중에 버스를 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 미술관을 찾아갔지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미술관에도 갔는데, 벽면에 새겨진 “장소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변하고, 그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면 미래가 변한다”는 영어 네온사인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셀도 둘러봤습니다.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어요. 김 : 선생님이 낸 책 중에 ‘수묵 편지’ 두 권이 눈에 띕니다. 이 : 2015년에 낸 ‘수묵 편지’는 일기 형식으로 그린 작품의 일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능소화, 대나무, 백합, 복숭아, 나팔꽃, 토마토, 참외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지요. 그림에 딸린 화제(畫題)는 제가 쓴 것도 있고 정희성 시인, 마종기 시인, 이해인 수녀 등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2017년에 낸 ‘수묵 편지’는 영덕 출신의 역사적 인물인 장계향, 나옹선사, 목은(牧隱) 이색 세 분을 다룬 것입니다. 장계향은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女中君子, 풍모와 도량이 큰 여인)의 칭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글로 쓴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저자이기도 합니다. 나옹선사와 목은은 워낙 유명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지요. 세 분은 송천강과 인연이 있는 큰 인물입니다. 송천강은 영해평야를 가로지르며 흐르다가 동해로 빠져나갑니다. 송천강 상류에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이 있고, 중류에는 장계향의 시댁인 충효당이 있으며, 하류에서 목은이 태어났습니다. 김 : 시(詩), 서(書), 화(畵)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작품을 그리려 합니다. 시서화가 혼융일체가 되려면 쉼 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사진 : 김훈(작가)

2024-10-30

2024 포항철강산업대전·스틸에세이 수상자 및 수상 소감

제 12회 철강산업대상 수상자 박태한 대표이사 철강 히어로 상-박태한, 직원과 회사 동반성장 기업가치 실현 “지역 사회의 책임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박태한 애경특수도료(주) 대표이사는 업계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다양한 분야에 경영 능력을 발휘해 직원과 회사가 동반성장하는 기업가치를 실현했다. 신규 생산공장 설립으로 고용 창출에 앞장서고 있으며 안전한 사업장 조성을 위해 다양한 업무 개선,직원복지 증진을 위한 적극적이 투자,상생 노사문화 정착,사회공헌활동을 통한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김태연 대표이사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김태연, 근로자 복지·안전 정착 기여 “산업 재해 예방에 공헌하겠습니다” 김태연 (주)그린바이로 대표이사는 안정적인 노사 관계를 원동력으로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근로자 복지 및 안전 보건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인근 지역 주민들과 잦은 대화와 교류를 통해 주민들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해소해 주는 등 상생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봉사하는 자세로 직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석진 대표이사 철강 프런티어상-석진, 기술·제품 개발과 업무시스템 개선 “철강, 배터리 등 산업 분야에 기여하겠습니다” 석진 (주)동연중공업 대표이사는 지속적인 신기술, 신제품 개발과 업무 시스템 개선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키고 있다. 특히 산업 현장의 안전과 작업 공정 개선을 통한 원가 절감, 신규 직원을 채용하는 등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직원들과의 유대 관계가 좋으며 대·내외적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주석 책임 경북도지사상-김주석, 무사고·무재해 사업장 달성 공헌 “회사 발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김주석 현대종합금속(주) 책임은 투철한 직업관과 주인 의식을 바탕으로 사업장 생산성을 개선하고 무사고,무재해 사업장 달성에 공헌했다. 생산성 향상과 품질 개선을 바탕으로 직원들의 모범이 됐다. 기업의 매출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해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 했다. 사내 구성원 간 화합만이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살 길임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했다. 박현규 공장장 동반성장상-박현규, 대·중소기업 간 동반 성장 촉진 유도 “상생 협력 사업을 통해 동반 성장하겠습니다” 박현규 OCI(주) 포항공장 공장장은 투철한 직업관과 상생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산업 평화 정착과 대·중소기업 간 동반 성장 촉진을 유도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으로 지역 사회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데 노력했다. 포항지역 화학 안전공동체 주관사로 활동하며 지역내 중소기업들의 화학물질 안전관리 지원 및 비상 상황 시 공동 대응했다. 양진우 차장 포항시장상-양진우, 근면 성실한 자세로 맡은 업무 수행 “업무 효율화로 생산성을 높이겠습니다” 양진우 밸프(주) 차장은 구매, 생산, 총무 업무 등 사내 모든 업무를 경험해 본 이력으로 동료 및 부서 간 원활한 소통을 유지하고 항상 근면 성실한 자세로 맡은 업무를 수행했다. 여성,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차별 금지 및 처우 개선을 회사에 요청 후 실행했다. 2공장 가동 안정화 및 신규 외주업체 확보로 회사의 매출 안정화와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제 8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건축물 철제 부속물 지네철 소재로 한 김동식 씨 ‘지네철’ 대상 전국에서 모인 스틸과 관련한 추억이 담긴 수필 작품 400여 편 출품일반 엄경애 ‘호미’·청소년 박민주 ‘밥 한 숟가락과 어머니’ 금상 영예 경북매일신문이 주최·주관하고 경북도, 포항시,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이 후원하는, 철(스틸·steel)을 소재로 한 창작 문학작품 공모전 ‘스틸에세이 공모전’ 제8회 수상자들이 결정됐다. 제8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심사위원회는 지난 25일 심사를 진행, 김동식(65·경북 포항시)씨가 응모한 수필 ‘지네철’을 대상작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일반 부문 대상 작품 ‘지네철’은 목조 건축물의 지붕을 고정하는 작은 철제 부속물인 지네철을 사물과 사물,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로 해석하는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아낸 작품이다. 대상 수상자 김동식 씨는 개인적인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비록 눈에 띄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네철처럼 사람의 삶이 관계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세이 소재로 지네철을 발견한 김씨의 밝은 시선과 함께 작품을 이끌어가는 문장이 일관되게 안정적인 점이 호평 받았다. 금상은 엄경애(서울특별시 강서구)씨의 ‘호미’, 은상은 양은경(서울시 중랑구)씨의 ‘클립, 클립’, 동상은 정재우(서울특별시 관악구)씨의 ‘아버지와 철반지’, 이현기(광주광역시 남구)씨의 ‘이제라도 당신의 덴 손을 잡아드리고 싶습니다.’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김주태(인천광역시 서구)·이병언(경기도 김포시)씨가 뽑혔다. 청소년 부문 금상의 영예를 안은 박민주(구미오상고 2년) 학생의 ‘밥 한 숟가락과 어머니’는 ‘철-숟가락-밥=어머니의 아낌없는 사랑과 응원, 격려’로 이어지는 뚜렷한 주제와 구성의 안정감은 물론 문장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은상은 이율찬(경기도 김포 푸른솔중학교 2년) 학생의 ‘기분 좋은 쇠 비린내’, 동상은 최서인(전북 익산 원광여고 3년) 학생의 ‘철은 날카롭기만 하지 않는다’, 박신후(포항 대동중학교 1년) 학생의 ‘철로 발달한 AI 기술’ 등이 최종 수상작으로 각각 결정됐다. 가작은 박진영(대구 천내중학교 1년), 박시원(포항 대동중학교 2년), 김지훈(포항 대동중학교 2년) 학생이 뽑혔다.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은 현대문명의 상징이자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돼온 철강산업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재도약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한 전국 유일의 철(鐵·Steel)을 소재로 한 수필 작품 공모전이다. 포항시·경북도 주최, 경북매일신문 주관으로 치러진 공모전은 올해가 여덟 번째다. 지난 8월 19일부터 10월 20일까지 국내외 거주자(기성문인 제외)를 대상으로 미발표된 순수 창작품을 접수한 올해 공모전에는 경북을 비롯 서울, 강원 등 전국에서 스틸과 관련한 추억이 담긴 수필 작품 400여 편이 출품돼 △일반부 대상 1점,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2점 △청소년부 금상 1점, 은상 1점, 동상 2점, 가작 3점 등 모두 14점이 입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회는 “철이라는 공통된 주제였기에 결국 같은 주제로 얼마나 색다른 구성을 하고 창의성 있는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느냐에 초점을 두어 심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며 “‘제8회 스틸에세이 공모전’ 수상작들은 철이라는 소재를 매개로 사람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창의적으로 바라본 애씀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들이었다”고 평가했다. 대상 수상 소감 김동식 김동식(65·포항시) “본향으로 가신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수필 한 편을 다듬어 쓰면서 모양이 이루어져 갈 때 그 과정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저에게 큰 상으로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공학 교육에만 전념하다 문학의 길이 가능할까, 글쓰기에 문외한인 공학도가 흥미를 가지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주저하며 몇 해 동안 문학 강좌를 귀동냥했습니다. 퇴직 무렵부터 관심을 가졌던 수필은 쓸수록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걸핏하면 문장이 실타래처럼 꼬이고 생각은 엉켜 긴 밤을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밑거름 되어 한 줄씩 조심스레 나아갔습니다. 문화해설사 봉사활동을 하다가 어느날 우연히 지네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벌어지고 찢어진 곳을 꿰매어 안전하고 튼튼하게 연결하는 역할이 신선하게 와 닿았습니다. 주로 목조건물에 사용되는 쇳조각 편린을 찾아 먼저 경주, 포항 지역의 사찰을 둘러 보았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떤 형태를 가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장흥의 보림사에서 물고기 모양의 지네철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건물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지네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벌어지고 틈이 생긴 자리에 덧대어야 할 매개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 사회, 국가에 벌어지는 갈등을 봉합해 줄 지네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저 또한 드러나지 않는 구석에서 아주 작은 지네철이라도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스틸에세이 공모전에 글을 보내고 곧바로 떠난 여행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났습니다. 배를 타고 폭포 곁을 지날 때 쌍무지개가 뒤따라왔습니다. 그때의 기분과 지금의 기쁨이 섞여 가슴이 사뭇 두근거립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또 다른 시작을 향해 정진하겠습니다. 문학의 토양을 넓혀주신 우리 수필 선생님과 같이 공부하는 문우들, 평생을 함께 한 사랑하는 아내, 두 딸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스틸에세이 공모 기회를 주신 경북매일신문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환갑을 겨우 넘기고 본향으로 가신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제 8회 스틸에세이 대상 수상 작품 나무와 나무를, 사람과 사람을 아우르는 묵묵한 지네철 처럼… 김동식씨 ‘지네철’ 여름휴가를 온 딸 가족과 경주에 갔다. 손자가 궁금해하는 첨성대를 먼저 보고 계림 숲에 들른 다음 곧바로 불국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 소나무 숲이 우리를 시원하게 맞이했다. 청운교, 백운교 다리를 넘어 부처님 나라에 들어섰다. 석등 불구멍 창을 통해 본 대웅전 큰 어른은 나에게 손자들과 같이 왔냐며 염화시중의 미소로 반겼다. 아이들은 다보탑 앞으로 달려갔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이 신기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번갈아 오가며 한참 감상했다. 나도 느긋하게 절을 둘러보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지네철이었다. 불국사 극락전 맞배집 지붕널 사이를 지네철이 연결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문화해설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통문화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는데 지네철을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네철은 건축물의 지붕널 벌어짐을 잡아주는 쇠 장식이다. 지네 모양이지만 언뜻 물고기의 뼈와 꼬리를 닮기도 했다. 꺽쇠 기능에 예술성이 가미된 독특한 장식이다. 철강 도시 포항에 살지만 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은 철조각이 박공널을 연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철물은 삼국시대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실제로 동궁월지에서 자물쇠, 가위, 문고리 등 철재류가 출토되었다. 관정 꺽쇠 쇠못은 흔한 편이고, 불국사 극락전 지네철이 말해주듯 목조건물에도 사용하였다. 건물에 어긋남이 생기거나 보수할 때 필요했을 텐데 다른 것들과 달리 지네철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궁전과 사찰에 지네철이 부착되어 있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양이 지네에서 맵시 있게 변형하여 다양했다. 경복궁 사정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꽃잎 모양, 운현궁 이로당은 둥근 지네 발 모양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은 날개를 편 새 모양에 복과 장수를 바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렇듯 다양한 문양으로 장인의 미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 놀라웠다. 포항 보경사 여러 목조건물 널에도 지네철이 붙어있다. 꽁치 뼈 모양은 물론이고 뼈가 많은 청어 닮은 형상도 있다. 일찍이 관목어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은 해변 도시에 철강회사가 자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현대는 목조건물뿐 아니라 시멘트벽에도 강철 볼트 너트로 꿰맨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생산뿐만 아니라 하찮아 보이는 지네철같이 나무와 나무를 아우르는데 사용하는 철을 생산하는 포항시민 자부심을 가진다. 지네철.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내 몸에도 지네철 모양의 자국이 있다. 오른쪽 다리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이다. 어릴 때 고향 뒷산에서 같이 놀던 친구가 낫으로 나무를 베다 내 다리를 쳤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 상처를 수건으로 동여맨 채 자전거에 실려 20리 밖 경주병원으로 갔다. 울며불며 꿰맨 상처가 60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에 지네처럼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후 난 흉터 때문에 반바지 입기를 꺼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내 살과 살을 연결하여 아물게 해 준 지네철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는 지네철이 있다. 곳곳에 필요하고 또 존재한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어긋나거나 벌어져 덧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형제간 우애에 보강대가 필요하고 집안 행사에서 의견 충돌로 널이 서로 뻗대면 바로 잡아야 한다. 세대 간 관점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지네철의 역할이 필요하다. 건축물의 그것처럼 사람 사이의 지네철도 드러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으스대며 힘자랑하거나 뽐내고 튀는 자세는 지네철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강철이면서도 서로 뻗대는 양쪽을 끈끈하게 하나로 아우르는 쇠 장식처럼 야무지면서도 인정 있게 양쪽을 보듬는 지혜와 공감력이 필요하다. 우리 집에는 두 딸이 지네철 역할을 한다. 나는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양육을 힘들어하며 딸 둘만으로 만족하였다. 난 그것이 야속하였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한동안 말 없는 평행선 속에서 살았다. 나는 직장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은 온통 아내 몫이었다. 아내도 직장이 있어 힘들었을 텐데 모른 척했다. 감정이 격해져 충돌이 있을 때는 꼬마 아가씨들이 나섰다. 안마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애교로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두 딸이 우리 부부를 다정하게 이어주었다. 경복궁 꽃망울 쇠 장식보다 몇 배나 더 곱고 사랑스러운 지네철이었다. 자라서도 그 역할은 계속되었다. 집안일에 솔선수범하고 일가붙이 사이에서도 아들 못지않게 의견 조율과 교통 정리를 잘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곤 하였다. 특히 큰딸은 때맞춰 결혼하여 늠름한 사위와 두 손자를 안겨주었으며, 이제 3대를 돈독하게 엮는 일에 애쓰고 있다. 딸들의 지네철 역할은 현재 진행형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다독이며 봉사하는 사람이 많다. 장애인을 돕거나 요양보호사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가교역할을 잘하고 있다. 불협화음과 문제성이 있는 단체는 그곳에 몸담았거나 그 분야를 아는 사람이 지네철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퇴직 교사인 친구가 대안학교에서 학교생활 적응력을 높여주고 사회 진출을 위한 기본 소양 교육을 기꺼이 담당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 야학에서 학생들과 검정고시 준비를 해 준 경험이 있다. 직장 퇴근 후 오는 학생들과 공부한 시간이 보람찬 지네철 같은 역할이었으리라. 지네철은 쇠의 숨겨진 미덕이다. 쇠란 완강하고 무거운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작지만 섬세한 모양으로 물체와 물체를 다잡아 하나로 묶는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강하면서 부드러운 드러나지 않는 일꾼이다. 그것이 있어 건물과 건물이 제대로 서고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간다. 지네철이 삶을 지탱한다. 모양은 별로 없지만 나도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서 한 조각 지네철이 되고 싶다. 청소년부 금상 수상 작품 ‘밥 한 숟가락과 어머니’ 아침이면 내 잠결을 깨우는 익숙한 소리가 있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하루를 먼저 시작하는 부지런한 소리다. 그 소리는 대부분 무언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다. 나는 얼른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고 그 소리가 더 경쾌하고 요란해질 때, 쇠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 천천히 일어나곤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 그릇과 접시 부딪히는 소리. 밥 짓는 냄새가 방 안까지 스며든다. 나는 세수를 하고 칫솔을 물고 이리저리 오가며 학교 갈 준비를 서두른다. ‘5분만 더 일찍 일어날 걸….’ 아침은 늘 분주하다. 어머니는 늘 같은 시간에 나를 부르신다. “00야 밥 먹어라.” 형광등 불빛에 숟가락이 반짝인다. ‘뭐야? 쇠붙이가 언제부터 저렇게 반짝였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리는 숟가락을 새삼 멍하니 바라본다. “00야, 뭐 하니? 퍼뜩 밥 안 먹고. 밥 다 식는다. 어서 먹어” 내 그릇에 밥 한 주걱 담으며 어머니께서 재촉하신다.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내가 어릴 때부터 한결같다. 나는 항상 숟가락을 보며 생각한다. 차갑고 무거운 쇠붙이가 어떻게 이리도 고급스런 숟가락으로 태어나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밥을 먹이는 것일까. 언젠가 TV에서 본 것 같다. 거칠고 둔탁한 쇠가 고온에 달궈진 채 수백 번의 연마 과정을 거치며 악기나 의료용, 그릇이나 수저, 또는 공구나 기계, 부품 등 세상 어떤 것이든 필요한 용도로 탈바꿈한다. 내가 지금 빠져 있는 것은 이 반짝이는 숟가락이다. 어렸을 때는 작은 숟가락을 썼지만, 언제부턴가 내게도 어른용 수저가 주어졌다. 무겁게 느껴졌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숟가락의 무게라고 여겼다. 숟가락이 어른용으로 바뀌면서 어머니가 주시는 밥의 양도 늘었다. 어머니가 준비한 밥과 수저 앞에 앉을 때면 왠지 모를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매일 반복 되면서 나는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아침이면 더 그랬다. 잠도 덜 깬 상태에서 학교에 갈 스트레스까지 더해졌기 때문일까. 밥을 먹는 일이 점점 귀찮았다. 아니 짜증이 났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싫었지만,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서둘러야 하니 심적인 부담이 컸다.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은 고스란히 내 일상에서 밀쳐버리곤 했다. “나중에 먹을게요.” 밥을 준비한 어머니에 대한 예의는 묵살한 채 오로지 내 입장의 대답은 단답의 거절이었다. 기껏해야 쇠붙이였다. 숟가락은 항상 차가웠다. 새벽 공기처럼 서늘했다. 입술에 닿을 때의 불쾌감처럼 내 싸늘한 거절이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매일 식탁에 아침밥과 수저를 올려놓고 나를 기다리셨다. 그 차가운 쇠붙이로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싫어 애써 외면했다. 아니 피하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차디찬 겨울이었다. 심한 몸살로 내가 사경을 헤맬 때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 입술을 타고 따뜻한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흘러들었다. “00야, 삼켜. 이러다가 큰일 나. 어서 삼켜” 어머니의 바람도 무색하게 나는 다 게워 냈다. 며칠이 흘렀는지 모른다. 내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나고 얼굴은 한껏 야위어 있었다. “엄마~” 그제야 알았다. 내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어머니는 밤낮으로 내 곁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나를 지키셨다는 걸. 어머니가 내미는 숟가락의 의미가 조금씩 달리 느껴진 건 그때부터였다. 매일 아침, 어머니는 여전히 그 차가운 숟가락에 따뜻한 밥을 떠서 내게 내미신다. 그 거대한 숟가락에 담긴 밥 한술은 그저 한 끼 식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내게 전하는 최선의 정성이요, 밥 굶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밥 먹고 힘내.” 밥 한 숟가락에 담긴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응원과 보살핌이었다. 어머니가 건네는 그 한 술의 밥은 무겁지도 크지도 않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작지도 않다. 그 밥엔 어머니의 모든 바람이 담겨 있다. 걱정과 연민, 배려와 사랑,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의 원동력까지 말이다. “밥 먹어”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정성과 사랑이 그 작은 한 숟가락에 다 담겨 있다. 내가 바쁘고 지쳐 있을 때, 어머니는 항상 밥 한 숟가락으로 나를 감싸안는다. 내가 학교에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가려던 나를 어머니가 조용히 불러 세우셨다. “밥 먹고 들어가.” 어머니는 이번에도 숟가락에 밥을 떠서 내게 내미셨다. 그러고 보니 종일 굶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밥 한 숟가락의 무게를 실감했다. 쇠붙이 숟가락이 주는 차가운 감촉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 차가움 너머에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숨겨진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조용히 나를 위해 그 자리에 계셨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고등학교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다음날의 시험을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에 들었던 새벽, 어머니는 평소처럼 일어나셔서 아침을 준비하셨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겨우 눈을 떴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밥 먹어라” 어머니는 여전히 숟가락에 밥을 얹어 내미셨다. 시험 준비로 지치고 힘들었지만, 순간 어머니의 숟가락이 위로가 되었다. 숟가락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제 나는 차가운 숟가락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에게 있어 그 철 숟가락은 이제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작은 의식이 되었다. 어머니의 손에서 건네지는 그 한 숟가락의 밥은 이제 내 삶에서 더없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쇠붙이 숟가락은 단순한 식사용 목적이 다가 아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새벽부터 준비한 하루의 정성, 그리고 나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다. 언젠가는 나도 어머니처럼 누군가를 위해 매일 아침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을 떠줄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내게 주신 그 차가운 숟가락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전하리라. 오늘도 계속되는 어머니의 집요한 밥 한 숟가락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금상 수상 소감  박민주 (구미 오상고등학교 2년) 박민주 (구미 오상고등학교 2년) 나를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 성장 발판으로진정성 있는 글로 또 다른 이야기 시작 어릴 적, 제가 쓴 첫 번째 글을 기억합니다. 그때의 순수한 열망과 진정한 감정이 담겼던 그 글은 지금의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면서, 저는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저에게 단순한 공모전을 넘어, 제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준비했기에 이번 수상이 더욱 뜻깊습니다. 이 대회를 통해 제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제게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수상은 저에게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선사한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깊이 있는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경북매일신문사와 포항스틸에세이 공모전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번 대회를 통해 아직 보지 못한 세계와 마주하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소중한 경험을 발판 삼아 저 자신을 더욱 단단히 다지며, 진정성 있는 글로 또 다른 이야기를 써나가고자 합니다. 심사평 ‘스틸에세이공모전’은 ‘철의 숨은 이야기: 일상에서 만나는 철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뚜렷한 주제를 제시한다.‘철(鐵)’이라는 물질이 어떻게 변화하여 인간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가 재해석되는지를 요구하는 공모전이다. 철과 연관된 소재와 주제로, 삶을 어떻게 문학 작품으로 건져 올리는지의 과정은 심사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제8회 스틸에세이공모전’에 작품을 투고한 분들은 평소 읽기와 쓰기의 중요성을 깊게 터득하고 계실 것으로 보여진다. 투고된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 철을 사람의 삶에 견주어 재해석하는 관점을 주목하며 읽었다. 일반부 대상 수상작인 ‘지네철’을 쓴 김동식 님은 사물을 창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작품의 소재인 지네철과 주제에 어울리는 어휘와 문체 사용, 작품을 이끌어가는 안정적인 문장 등이 에세이의 품격을 높여줬다. 청소년부에서는 결국 같은 주제로 얼마나 색다른 구성을 하고 창의성 있는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느냐에 초점을 두어 심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철’이라는 주제에 몰입하면서도 자신의 경험과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담아낸 글을 우선으로 우수작품으로 선정했다. 청소년부에서 지나친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다만 틀에 박힌 소재로도 삶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 글에는 점수를 더했음을 밝혀둔다. /심사위원 양진오(대구대 문화예술교양학부 교수) 김경민(경상대 국문과 교수) 박시윤(수필가) /윤희정기자·이부용기자

2024-10-30

자작나무 숲 길 위에서 인생 여정의 교훈과 위안을 얻다

시골 전원생활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정원을 가꾸는 등 일을 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정원의 일이라는 것이 그만 덮어 두면 또 그렇게 지나간다. 그러나 시골집은 사람의 손길이 가야 깨끗하다 할까,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정겹다. 가만히 놓아두면 풀들이 마구 자라고 거미가 집을 짓는 등 자연성은 있어 보이되 특히, 가을이 되면 낙엽 등으로 뒤엉켜 을씨년스럽다. 주변이 아름다운 산이고 넓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면 사계절이 스스로 찾아올 텐데, 굳이 계절이 바뀐다고 힘들게 다른 곳을 찾아다니면서 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필요는 있겠는가 하면서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말했다. 여태 아내가 원하는 곳을 차일피일 미루어 오늘날까지 왔다. 아내의 별호는 자작나무이다. 자작나무를 좋아하고 늘 그 숲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 집 정원에도 자작나무 묘목 8그루를 심었으나 4그루는 죽고 겨우 반타작에 만족했다. 더 이상 미룬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어 오늘 아내와 함께 영양 자작나무 숲을 탐방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지름길인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와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경계를 이루는 낙동정맥의 칠보산 고갯길을 택하였다. 비가 오면 도로가 물길로 변하는 고갯길은 이곳저곳 파이고 훼손되어 그야말로 오지 탐험에 나선 일종의 어드벤쳐이었다. 오르고 내려가는 구불구불한 고갯길 바닥은 울퉁불퉁하여 아이들 놀이기구 디스코 팡팡을 연상했다. 아내는 자칫 허리를 다칠까 봐 자동차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나는 한술 더 떠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가는 길은 또 다른 체험과 이야깃거리를 선물했다. 그래서 여행은 목적지보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때론 의미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영양 죽파리에 도착하여 1시 30분 차를 타고 자작나무숲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못해 전기차가 고장이 났다. 좁은 편도 차선이라 차를 치우고 다른 차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일행과 함께 오솔길 같은 계곡 따라 난 도로를 걸었다.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은 그 자체의 풍광으로도 우리의 심신은 힐링 되었다. 계곡의 이곳저곳을 들추어 훔쳐보며 자연의 묘미와 신비감에 넋을 잃었다. 그런데 일반 상식을 벗어난 형태의 소나무를 보고 놀랐다. 완벽한 ㄴ자로 꺾여 자라고 있지 않은가. 인간 사회에서도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보면 식물사회라고 해서 그러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이목을 끌기에 범상하고 귀한 소나무였다. 차가 고장나서 걸었던 것이 오히려 행운으로 이어졌다면서 웃으니 기분 또한 좋았다. 과정은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보태어 주었다. 목적지인 자작나무숲에 도착했다. “와!” 하는 감탄사가 나와 아내의 입에서 동시에 나왔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웃었다.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아내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자작나무 수피는 종이처럼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사랑의 글귀를 쓰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라며 나무 자랑을 늘어놓았다. 사람은 좋아하는 풍광이 있으면 사진으로 추억을 남겨놓고 싶은가 보다. 얼마 동안 나무 감상보다는 사진 찍기에 모두가 여념이 없었다. 모두 산책 코스를 택하여 아늑한 자작나무숲 품속에 안겼다. 아내는 얼마 가지 않아 이곳이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라며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면서 가을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어 했다. 아내를 남겨두고 숲 전체를 관망하고 싶은 욕망에 혼자 오솔길을 따라 정상의 전망대로 향했다. 눈앞에 펼쳐진 오솔길은 흰색의 피부를 가진 날씬한 몸매의 여인이 줄지어 서서 반겨 주는 기분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 순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 두고 온 아내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오르다 보니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어 빗방울처럼 땅에 뚝뚝 떨어졌다. 큰 들숨과 날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전망대에 올라섰다. 자작나무숲은 계곡 품에 숨어들어 보이지 않고 산자락 경사면을 기어오르는 일부 숲이 구름 사이로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에 노랗게 물들어 가는 잎들이 물결치며 물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과 푸른 산들이 겹치면서 불룩하게 솟은 산마루, 하늘과 맞닿은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펼쳐졌다. 풀벌레 소리, 새들의 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한 줄기 갈바람이 이마와 등줄기 땀을 식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있었다. 나무로부터 떠나감의 슬픈 이별이 아닌 나풀나풀 춤을 추며 님의 만남의 발걸음만 같았다. 아내는 자작나무숲 품속에 취하여 잠들고 나는 가을 하늘의 흰 구름과 푸른 산이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풍경에 취해 잠들었다. 함께 늙어가는 평생 반려자로서 서로 다름을 알았다. 오를 때는 발걸음 옮기는 데 몸이 집중했다면 내려갈 때는 쫓는 눈에 마음이 집중되었다. 오를 때는 보지 못한 것을 내려갈 때는 눈에 보였다. 숲길은 조명등을 비추는 것처럼 어둠과 밝음이 교차 되었다. 가을을 맞이하여 오솔길에는 노란 자작 나뭇잎으로 방문객의 발걸음 앞에 뿌려 놓았다. 즈려밟고 가란다. 나무의 배려심에 발걸음은 가볍다.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미안한 마음 가지면서 살며시 몸을 만져본다. 살결은 너무나 희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매끄럽다. 손을 떼어 보니 흰 가루가 묻었다. 숲속 벤치에 앉아 편안히 눈을 감고 이제 내가 자작나무를 품어본다. 정원에 자작나무를 심고 자라는 모습을 그려 본다. 자작나무는 형태와 살아 가는 모습에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새싹을 틔우는 나무로 새로운 시작과 재생, 회복의 상징으로 여긴다. 특히 북유럽에서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로 여겨지며, 생명의 순환과 재탄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무껍질의 하얀색은 여러 신화와 전설,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며, 정화와 깨끗한 에너지, 지혜와 영적인 보호를 상징하기도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며, 불리한 조건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끈기, 사랑,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가 여성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자작나무는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내면적 성장을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한다. 우리 부부는 자작나무숲 길 위에서 인생 삶의 여정에 교훈을 얻고 심신을 위로받는 시간이 되었다.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 가지 위로 하얀 구름의 숨결이 내려앉네. 갈바람이 스친 자작나무숲 노란 잎새가 나풀나풀 춤추며 내려앉네. 가을빛 속에 잠긴 하얀 피부 쓸쓸함과 고요함을 품은 채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순간 노란 가을옷 입고 미소 지으며 춤추네. 가을이 되고 자작나무숲이 되어 나도 따라 웃고 춤을 추네.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숲은... 1993년 산림청과 영양군이 조림한 것으로 국내 최대 규모인 30.6ha다. 가을철 평일 하루 300명, 주말 600명 정도가 방문한다. 주차료와 전기차 이용은 무료다. 전기차는 22명이 정원, 첫 출발은 아침 9시 30분이고 마지막 출발은 오후 3시 30분. 1시간 간격으로 왕복 운행한다. 예약은 불가하고 선착순 탑승이다. 우천시 전기차는 다니지 않는다. 이동 거리는 4.7km, 15분에서 20분이 소요된다. 자작나무 숲길 길이는 1.52km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30

“웅진·사비 탈환” 기치 내건 백제 부흥군의 최전방 요새

신라에 선도산이 있었다면, 백제엔 칠갑산이 있었다. 무열왕과 진흥왕 등 여러 명 신라 왕의 유택이 자리했고, 역사적 의미는 물론, 미학적 완결성까지 빼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래를 굽어보며, 신라의 태동을 알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선도산 성모(聖母)의 설화가 떠도는 곳이 선도산 일대다. 신라, 고구려와 함께 이 땅에서 명멸했던 고대왕국 중 하나인 백제에도 선도산에 필적하는 성스러운 산이 없을 까닭이 없다. 백제 또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한때 한반도의 절반 가까이를 통치했던 국가였으니. 백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왜 칠갑산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칠갑산이 있는 충청남도 청양을 향했다. 포항에서 KTX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대전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청양군까지. 청양 시내에서 장곡사와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등이 있는 칠갑산 입구까지는 하루에 6번 운행한다는 시내버스를 이용했다. ◆칠갑산은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 사실 칠갑산에 얽힌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수 주병선의 노래는 귀에 익숙하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하는 유행가다. 산간을 태워 힘겹게 농사를 지었던 화전민의 애달픈 삶이 담긴 가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졌다. 애잔한 곡조로. 하지만, 이번 취재는 노랫말 속 칠갑산이 아닌 백제 역사 속에 스며든 칠갑산의 정체성과 그림자를 찾아가는 길. 먼저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칠갑산에 관한 짤막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이다. “칠갑산(七甲山)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산이다. 1973년 3월 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칠(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칠갑산(七甲山)이라 경칭해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충청남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이 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다.” 백제 도읍지의 주된 산이며, 나라에서 직접 제사를 올린 산. 거기에 세상 만물이 생겨난 공간으로 여겨 이름을 지은 칠갑산은 멸망한 나라를 되살리려 한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백제부흥운동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660년부터 663년까지 왕족과 병사 등이 중심이 돼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을 뜻한다. 청양 시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칠갑산 초입에 도착해 먼 곳을 바라봤다. 가까이 완만한 능선 너머 웅장한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1400여 년 전 국가를 잃은 백제의 왕과 귀족, 백성들의 슬픈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백제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660년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는 육로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여 만 군사는 바닷길을 통해 각각 백제를 공격해 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으로 쳐들어오자, 백제 의자왕(641∼660)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피난하고, 제2왕자 태(泰)가 남아 사비성을 고수했으나 전사자 1만여 명을 내고 패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흑치상지·도침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661년 1월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고, 백제부흥운동을 꾀하였다.” 여기까지가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과정과 백제인의 부활 의지를 요약한 것이다. 위의 과정을 거쳐 백제는 70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다가 온전히 사라졌다. ◆청양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지역 공주대학교 이효원의 논문 ‘청양 지역 백제부흥운동 연구’는 각종 고고학 자료를 검토해 현재의 청양군 일대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한 부흥운동의 본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발호 당시 두시원악이라는 이름으로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청양 지역은 부흥운동의 핵심적인 활동이 웅진·사비 지역의 탈환이라는 기치 아래 진행되는 동안 최전선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열기현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는 점에서, 고량부리현과 사시량현은 임존성의 배후성이 되면서도 한티·대치 같은 육로나 무한천·지천 같은 수로를 통해 전장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로 쓰인다는 점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선도산이 한 고대왕국의 시작을 알리고, 전성기가 어떠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백제의 칠갑산은 침몰하는 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또 다른 고대왕국을 되살리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가뭇없이 흘러버린 기나긴 세월. 칠갑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했다. 웅진·사비시대 배후도시였던 청양지역 출토 유물 전시 청양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은 청양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버스를 이용해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전시실과 각종 문화체험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거기에 더해 한때 한국 금 생산량의 70% 이상을 채굴한 청양군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금광체험관 등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관광공사는 다음과 같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소개하고 있다. “백제시대 토기를 굽는 가마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졌다. 1500년 전 백제 가마터, 청기와, 최익현 유배도, 공자상 탁본, 황금복 거북이와 같은 5대 명품과 금광체험관, 농경문화체험관, 1960년대 추억의 옛거리 전시관, 한상돈 기념관, 유상옥 기증실, 정승공원으로 구성돼있는 박물관이다. 주말에는 토기 만들기, 나만의 컵 만들기, 백제의복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족 계통의 온조 집단이 현재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다. 웅진과 사비는 백제의 수도였던 도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청양역사실엔 웅진과 사비 시대 왕도 인접 지역인 청양에서 발굴된 도성 내 건축물인 궁궐, 사찰, 관공서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토기 등이 다수 전시돼 눈길을 끈다. “백제의 문화가 가장 화려하고 왕성했던 웅진·사비 시기의 수도 배후 도시로서 도성의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왕실과 수도에 거주하는 이들의 사용한 토기 등을 생산해 공급한 장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던 곳이 청양군”이라는 부연도 이어진다. 이외에도 백제문화체험박물관 특별기획 전시실에선 등짐을 지고 조선 팔도를 오갔던 보부상의 유래와 흔적을 살펴볼 수 있고, 과거 1960~70년대 우리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공간과도 만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눌 소재로 그저 그만이다. 농경문화전시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왕국의 하나인 백제의 역사가 궁금한 여행자라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의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글·사진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0-29

'끝없는 비상'으로 만나는 ‘제18회 청송사과축제’

‘산소카페’ 청송군이 사과 수확철을 맞아 풍성하고 다채로운 청송사과축제를 개최한다. 올해 제18회 청송사과축제는 ‘청송사과 끝없는 비상’이란 주제로 오는 30일 청송읍 월막리 용전천(현비암 앞)에서 화려한 막을 올려 11월 3일까지 5일 동안 열린다. 청송군은 이번 축제의 주제에 걸맞게 12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을 수상한 청송사과의 진면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청송사과 가공품, 사과를 활용한 요리 등을 통해 청송사과의 다양한 모습을 선보일 계획이다. 또한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과 용전천 현비암 자연경관을 활용한 야간 경관조성사업이 연계돼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축제장을 조성했다.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축제 축제는 엔데믹 이후 높아진 비대면 프로그램 수요를 반영해 온·오프라인을 병행한 하이브리드 축제로 진행된다. 온라인축제는 지난 1일부터 11월 3일까지 포털사이트 다음(daum)을 통해 청송사과축제 대표 체험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게임 4종(청송투어,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 청송퍼즐)을 온라인 게임으로 선보여 축제 형태를 다양화하고 축제 사전 체험을 통해 현장 축제 방문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새롭게 구축된 축제 전용 홈페이지에서는 축제 관련 다양한 정보와 소통을 연중 이어나갈 계획이다. □저출생극복을 위한 가족 중심의 콘텐츠 대폭 강화 이번 축제에서는 가족 중심의 콘텐츠도 대폭 강화됐다. 경북도와 함께 ‘가족이 행복한 축제한마당’을 개최한다. 이는 저출생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가족 단위 방문객에 맞춰진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가족사진 인화 서비스, 사과 와플 만들기체험 등 가족이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들이 추가되어 축제를 방문한 가족들에게 더욱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청송사과축제는 단순한 축제 이상의 가치를 지닌,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대표 프로그램 ‘청송사과 꽃줄엮기 전국대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청송사과 꽃줄엮기 경연대회’를 전국대회로 확대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시상 훈격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확보함으로써 ‘청송사과꽃줄엮기’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데 한걸음 다가가는 기회를 마련했다. □제18회 청송사과축제 홍보관 운영 210평 규모의 청송사과와 사과 요리, 사과 가공품 등을 전시하는 사과축제 홍보관을 구축했다. 역대 사과왕 화판과 올해의 황금진·사과왕 입상작을 전시하고 스마트 재배 시설 설치를 통해 청송사과의 역사와 선진화된 사과재배 기술은 물론 사과재배 최적지의 자연환경을 동시에 홍보한다. 홍보와 더불어 사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청송군 우리음식연구회에서 개발한 사과요리를 전시하고 사과바싹불고기, 사과푸딩 등 청송사과와 지역특산물을 활용한 6~8종의 요리 및 디저트도 시식·판매한다. 특히 올해는 특별히 사과존을 조성해 사과탄산주스, 사과식초, 사과마스크팩, 사과 굿즈, 그리고 사과를 활용한 간식류 등을 시식·판매하는 공간을 꾸며 사과축제의 다채로움과 다변화를 추구했다. □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 구성 올해 축제는 청송사과축제의 킬러 콘텐츠인 도전-사과 선별 로또, 꿀잼-사과난타와 만유인력-황금사과를찾아라 등 전 연령이 참여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과 8개 읍·면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호흡하는 ‘청송사과 퍼레이드’를 통해 군민과 관광객 모두가 하나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외에도 축제 기간 동안 제27회 청송문화제, 시니어 한마당, 건강체조 경연대회, 내고장 청송 알기 퀴즈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또한 소공연장 프로그램으로는 사과 올림픽 3종, 청송 골든벨, 청송군민이 구성하는 재능기부공연 등이 있다. 원산지 표시 위반자 의금부 압송 시연, 제3회 청송황금사과배 전국고교장사씨름대회, 제23회 경상북도지사기 생활체육 보디빌딩대회 등 특별 행사와 더불어 사과·사과즙·사과떡 시식·판매와 무료 차 시음 등의 상설 행사도 마련되어 있어 청송사과축제를 찾은 관광객에게 볼거리와 즐길거리,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축제장 및 주차장 편의시설 확충으로 관람객 편의 증진 올해는 축제장 편의시설도 크게 개선됐다. 작년 축제에서 관람객들이 많이 몰리면서 화장실과 주차장 시설이 부족하였던 점을 보완해 이동식 화장실 설치와 주차장 확충을 통해 방문객들의 편의를 도모한다. 더불어 축제 입점 부스에 대한 평가 시스템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행함으로써 부스 운영의 질을 높이고 고객 만족도를 제고할 예정이다. 윤경희 청송군수는 “올해 청송사과축제는 작년과 비교했을 때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변화와 발전을 도모했다. 온라인 프로그램 확대와 가족 중심 콘텐츠 강화는 물론, 방문객들이 불편함 없이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편의시설도 대폭 개선했다”며 “청송사과축제가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방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24-10-28

AR 게임으로 즐기는 보물찾기… 미션 속 흥미로운 정보 ‘쏙쏙’

“대구의 진산(鎭山)인 국립공원 팔공산의 가을을 증강현실 게임과 함께 만끽하는 보물 찾기 행사가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경북매일신문이 주최·주관하고 대구시가 후원하는 ‘AR증강현실로 떠나는 팔공산 둘레길 보물찾기’ 행사가 27일 팔공산 갓바위 보은사 입구에서 개최됐다. 1000여 명이나 되는 참여객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번 행사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팔공산의 문화유산과 희귀 동식물, 자연환경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마련됐다. 팔공산 둘레길 방문객은 이번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환경과 자연의 소중함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팔공산 둘레길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 행사는 시작부터 열기로 가득찼다. 팔공산 방문객과 등산객들은 둘레길 초입에 있는 안내배너의 QR코드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웹앱에 접속한 뒤 둘레길 어플을 설치해 신나는 보물찾기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행사 시작 전부터 갓바위를 오르는 시민들이 안내판을 통해 어플을 직접 다운로드하거나 자원봉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등산객들은 AR 기술을 활용한 보물찾기 미션에 도전하면서 팔공산의 역사 유적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도 배우며 자연을 탐방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홍보 부스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팔공산 둘레길 어플을 활용한 다양한 게임 미션들이 등산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특히 링 던지기 게임은 큰 인기를 끌었다. 참가자들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링을 던지며 선물에 도전했다. 이 게임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 성공한 참가자들에게는 멋진 기념품이 제공돼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게임을 즐기는 등산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길게 늘어선 줄은 게임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민들의 표정은 신나고 기대에 찼다. 한 참가자가 링을 던져 성공하는 순간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실패한 사람은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다음 사람에게 차례를 넘겼다. 갓바위 보은사 입구에서는 방문객과 등산객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무대 공연이 마련됐다. 사회자의 화려한 입담으로 문을 연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은 참석자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이며 시작됐다. 첫 무대에서는 오카리나와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어졌고, 색소폰과 통기타 연주로 분위기가 한층 더 고조됐다.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와 테너의 공연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자연 속에서의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색소폰과 장구난타 연주에는 시민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무대의 대미를 장식한 트로트 가수 태윤과 차연의 신나는 공연이 펼쳐지며 관객들은 흥겨운 분위기에 푹 빠졌다. 이어 단순하게 둘레길만 탐방하는 것이 아니라 산 곳곳에 흩어진 쓰레기를 담아 봉투에 가득채워오는 참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이번 행사는 힐링 걷기는 물론 지구를 살리는 작은 실천에 동참하는 ‘친환경 축제’로 진행돼 호평을 받았다. 행사에 참여한 최정윤(39·경산시 중방동)씨는 “아이들과 함께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신개념 둘레길 체험을 하며 숨겨진 보물과 역사문화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꼈다”면서 “위치 기반 서비스를 활용해 구간별 거리와 코스를 설명받으며 안전하게 등산을 할 수 있어서 유익했다”며 엄지를 들어올렸다. 강시원(57·대구 달서구 송현동)씨는 “행사를 통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탐험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즐거운 행사들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팔공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해발 1192.8m의 산으로 전체 능선 길이가 20㎞에 이르는 산이다. 신라시대부터 기록이 있는 역사·문화적인 곳으로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불렸다. 현재 멸종위기동물 15종이 서식하며 그 중 천연기념물로 13종이 지정되는 등 5295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연생태공원이다. 팔공산 둘레길은 대구 동구와 군위군, 경북 경산시, 영천시, 칠곡군 등을 잇는 16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으며 총 길이 108㎞에 달한다. 팔공산 둘레길 16 구간은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갓바위를 비롯한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화사, 초조대장경경을 봉인했던 부인사, 수려한 경관의 수태골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있다. /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27

‘아르헨 염수리튬 1단계 준공’ 포스코 홀딩스, 소재보국 실현

포스코홀딩스가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 리튬 염호에서 이차전지소재용 수산화리튬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준공했다. 포스코홀딩스는 24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살타주 구에메스(Guemes)시에서 연산 2만 5000t 규모의 수산화리튬 공장 준공식을 열었다. 이는 포스코홀딩스가 계획중인 총 3단계 프로젝트 중 첫 단계로, 100% 광권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리튬 염호의 염수를 활용하며, 고유의 리튬 추출 기술을 적용했다. 원료 분야에 대한 꾸준한 투자 속 국내 공급망 안정화와 소재 분야 글로벌 초일류 기업 도약을 향한 결실을 거뒀다. ◇ 아르헨티나 염수리튬 1단계 준공 이날 준공식에는 포스코홀딩스 김준형 이차전지소재총괄, 황창환 투자엔지니어링팀장, 김광복 포스코아르헨티나 법인장 등 포스코그룹 관계자와, 구스타보 사엔즈 살타 주지사, 라울 하릴 카타마르카 주지사, 카를로스 사디르 후후이 주지사, 루이스 루세로 아르헨티나 광업 차관, 이용수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수산화리튬은 전기차 등에 탑재되는 이차전지소재의 핵심인 양극재의 주원료로 ‘리튬-양극재-리사이클’로 이어지는 포스코그룹 이차전지소재사업 풀밸류체인의 시작점이자 사업 경쟁력의 한 축이다. 포스코그룹은 해외 염호와 광산에 대한 소유권과 지분을 통해 염수·광석리튬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국내·외 사업장에서 수산화리튬을 생산해 국내 핵심광물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한다. 또한 미국의 IRA 등 다양한 조건의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이차전지소재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글로벌 리튬 공급사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나갈 방침이다. 포스코홀딩스는 이번 아르헨티나 현지 염수리튬 공장 준공으로 전남 광양 율촌산단에 가동중인 포스코필바라리튬솔루션의 2만 1500t 규모 광석리튬 기반 수산화리튬 공장을 포함해 염수와 광석자원 모두에서 이차전지소재용 수산화리튬 총 4만 6500t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됐다. 김준형 총괄은 기념사에서 “이번 리튬 공장 준공은 포스코그룹이 아르헨티나에서 고부가가치 리튬을 생산하는 중요한 첫 걸음으로, 후속 프로젝트들을 통해 포스코그룹은 글로벌 리튬 산업의 리더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 아르헨티나 정부와 리튬 사업 세제 혜택 등 정부 지원 협의 포스코홀딩스 정기섭 전략기획총괄(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6월 12일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루이스 카푸토(Luis Caputo) 경제부 장관을 만나 포스코그룹의 아르헨티나 이차전지용 리튬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정 사장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추진 중인 ‘대규모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 대상에 포스코그룹의 리튬 사업이 포함될 수 있도록 현지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루이스 카푸토 장관은 인프라 및 인허가 지원을 비롯해, 우호적인 투자 및 사업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포스코홀딩스는 지난 2018년 아르헨티나 살타주 옴브레 무에르토 염호의 광권을 인수하며 100% 자회사인 ‘포스코아르헨티나’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염호 광권 인수 직후에는 추가 탐사를 통해 인수 당시 추산한 220만 t의 약 6배인 탄산리튬 기준 1350만 t의 리튬 매장량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후 염호 탐사와 데모플랜트 운영를 거쳐 지난 2022년 약 8억 3000만달러를 투자해 ‘염수리튬 1단계’ 상·하공정을 착공했다. ◇ 단일 기업 생산능력 기준 최대 규모 염수리튬 1단계 상공정은 살타주 해발 4000m 고지대 염호에 위치해 염수에서 인산리튬을 생산하고, 살타주 구에메스시 저지대에 위치한 하공정에서 인산리튬을 수산화리튬으로 전환한다. 염수리튬 1단계 공장은 포스코그룹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리튬 추출 기술을 적용, 생산에 필요한 부원료의 회수, 재이용이 가능해 유지관리비가 낮은 장점이 있다. 포스코홀딩스의 염수리튬 1단계 공장이 연간 생산할 수 있는 수산화리튬 2만 5000t은 전기차 약 6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으로 아르헨티나 최초의 상업용 수산화리튬 생산공장이면서 남미 전체를 통틀어 단일 기업 생산능력 기준 최대 규모다. 또한 건설 과정에서는 약 48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60개 이상의 지역 협력 업체를 참여시키는 등 현지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포스코홀딩스는 염수 리튬 1단계 준공에 이어 현재 약 1조원을 투자해 2025년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아르헨티나에 연산 2만 5000t 규모의 염수 리튬 2단계 상공정을 건설 중이다. 또한 연산 5만t 규모의 염수리튬 3단계 공장도 적시에 투자해 염수리튬 생산능력 총 10만t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 칠레 정부와 리튬 염호 신규 개발 의논 포스코그룹은 리튬 매장량 세계 1위인 칠레에서도 리튬 자원 확보에 나섰다. 정기섭 사장은 아르헨티나에 이어 6월 14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광업부 고위 인사와 면담하고 칠레 리튬 염호 개발 관련 협의를 했다. 정 사장은 면담에서 포스코그룹이 리튬자원 개발 등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재무건전성을 갖추고 있고, 아르헨티나 염수 리튬 및 호주 광석 리튬 사업 등을 통해 검증된 리튬 생산공장 건설 및 운영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친환경·고효율 리튬 추출 기술역량에 강점이 있어 칠레 염호 개발에 있어 성공적인 사업 추진의 최적 사업 파트너임을 강조했다. 칠레 광업부 인사는 칠레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칠레에서 생산한 리튬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혜택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며 포스코그룹의 리튬 사업 역량에 관심을 표하고, 현재 입찰이 진행 중인 마리쿤가(Maricunga) 염호와 알토안디노스(Altoandinos) 염호에 대한 포스코그룹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또한 칠레 광업부는 마리쿤가, 알토안디노스 염호 외에도 칠레 정부가 추진할 예정인 신규 리튬 염호 개발 사업에 포스코그룹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강조하고, 포스코그룹에 칠레 내 이차전지소재사업 공급망 확장 투자를 제안하며 정부 차원의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칠레는 2023년 4월 가브리엘 보리치(Gabriel Boric) 대통령이 ‘국가 리튬 전략’을 발표한 이래 국가 주도의 리튬 자원 개발을 추진 중이다. 핵심 전략염호 개발 프로젝트는 정부가 대지분을 갖는 민관협력 방식으로 진행하며, 개발 과정에서 환경 피해를 최소화하는 조치가 주요 내용이다. ◇ 해외 리튬사업 강화 위한 글로벌 행보 가속 포스코홀딩스는 2023년 11월 준공 후 가동중인 연산 2만 1500t 규모의 포스코필바라리튬솔루션 광석 리튬 1공장에 이어, 2024년 내 같은 규모의 2공장 준공을 앞두고 있어, 광석리튬 기반 수산화리튬 4만 3000t 체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 리튬 염호 인수, 호주 필바라 미네랄스(Pilbara Minerals)사 지분 투자를 통해 염수 및 광석 리튬의 안정적인 수급체계를 갖추고 있다. 특히 포스코그룹은 장인화 회장 취임 이후 이차전지소재사업에 흔들림 없이 투자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7대 미래혁신 과제 중 ‘이차전지소재사업 본원경쟁력 확보’의 일환으로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정체기)에 따른 전기차 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시장 선점을 위해 리튬 등 원료 부문의 투자는 계획대로 추진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칠레 등 남미의 염호 개발 참여를 검토 중이다. 북미·호주의 광산·자원회사와 협업 등 우량 자원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이차전지소재사업 핵심광물 공급망을 더욱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이차전지소재사업의 풀 밸류 체인을 완성해 미래 지속 성장을 위한 기반을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박형남·이부용기자

2024-10-27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

어린 나이에 고향 영덕을 떠나 서울로 갔고, 동양화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웠다. 20대 중반 포항에 정착한 후로 작품 활동에 정진했으며 환갑이 넘어서는 죽도시장과 동학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흔이 넘어서도 풍경 좋은 곳을 오래도록 걸으며 작품 구상을 한다.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 선생의 이야기다. 창포동에 있는 선생의 작업실과 근처 카페에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들었다. 김도형(이하 김)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형수(이하 이) :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로 소일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포항 이곳저곳을 걷기도 하지요. 김 : 영덕이 고향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 영덕 오십천(五十川)에서 가까운 남석동에서 태어났습니다. 7남매 중 넷째였지요. 부친은 농산물검사소에 다니다가 엽연초 조합에서 퇴직하셨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 있는 편이었어요. 김 : 영덕에서 태어난 분들은 오십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이 : 오십천은 영덕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어릴 때 소쿠리를 들고 오십천에 고기 잡으러 가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참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뛰놀았지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오십천이 범람해 우리 집 과수원이 물에 잠겼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일제강점기에 만든 강구대교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태풍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물난리가 났지요. 이형수 선생은 유년의 기억이 자신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유년의 살갗에 새겨진 고향 오십천의 맑은 물과 바람, 모래벌판의 풀잎과 나뭇잎, 종달새의 영롱한 소리가 내 몸과 마음속에 늘 남아 있습니다. 살다 보니 기쁨보다는 어렵고 바람 부는 날이 많았습니다. 힘든 삶을 아름답고 영롱한 유년의 추억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습니다. 나무가 뿌리의 힘으로 거센 바람을 견디듯이 붓 한 자루가 내 삶의 깊은 뿌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이형수 ‘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 서예문인화, 2015, 3쪽. 김 :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이 : 1958년에 영덕초등학교(현 영덕야성초등학교, 1911년 개교)에 입학했고 2학년 때 서울 신설동에 있는 안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큰형(1939년생)이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의과대학에 다녔는데, 큰형을 따라 서울로 간 것이지요. 김 : 어린 나이에 서울로 가셨군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 큰형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힐 수 있었지요.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한문 공부를 하면서 인문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큰형은 내가 그림에 재주가 있어 보였는지 나를 한국일보 주최 미술대회에 데리고 갔어요. 그 덕분에 그림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김 : 중학교 시절이 궁금합니다. 이 : 1964년에 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광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평안남도 출신 한경직 목사가 세운 대광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습니다. 대광중학교에서 『성경』을 접한 것도 인문적 소양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공부는 꽤 잘하는 축에 들었습니다. 정치인 김한길이 2학년 때 같은 반에 다녔어요. 그런데 중2 때 큰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충격을 받았고, 그러면서 사춘기에 접어들었지요. 그때 운명처럼 그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제운이 운영하는 성균서예학원에서 이철주 화백한테 수묵화 중 난초 그리기의 기초를 배우면서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김 : 일반적으로 어릴 때 그림을 배우면 수채화나 유화를 접하게 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문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까? 이 :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왠지 수묵의 세계에 끌렸습니다. 김 : 그 후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 중3 때 이당 김은호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선생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편지에 매화 소품 한 점을 동봉했습니다. 김 :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당 김은호 같은 대가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을 했는지 놀랍군요. 이 : 대광고등학교에서 3년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고 했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을 접고 대가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요. 동양화를 접하면서 이당 선생의 명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 : 답신이 왔던가요? 이 :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을 받았습니다. 한번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종로3가 비원 쪽(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선생 댁을 찾아가 큰절을 했더니 그날부터 당신의 수발을 들면서 그림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김 : 정규 교육과정을 포기하고 도제식 공부를 하게 된 거군요. 큰 결단이었을 텐데 집에서 반대하지는 않던가요? 이 : 반대는 안 했지만 밥벌이가 되겠느냐며 걱정하셨지요. 김 : 이당 문하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 : 선생이 바깥나들이 할 때 모시고 나가고 잔심부름도 했어요. 선생이 작품 구상에 필요해 고등어를 사 오라 하면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 왔지요. 김 : 이당 주변에 유명한 화가가 많았겠습니다. 이 : 오죽 많았겠습니까. 이당 선생 문하에 있으면서 운보(雲甫) 김기창, 혜촌(惠村) 김학수, 오당(吾堂) 안동숙, 유천(柳泉) 김화경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김 :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었겠습니다. 이 : 이당 선생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선생에게 감정을 의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가짜가 많았어요. 선생의 작품을 비싸게 매입한 사업가가 사업이 어려워져서 작품을 팔려고 감정을 부탁했는데 작품이 가짜여서 낭패를 보기도 했습니다. 김 : 이당의 작품은 고가였겠지요? 이 : 메이란팡(梅蘭芳)이라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 배우가 있었는데, 이당 선생의 작품 중 메이란팡을 그린 큰 작품이 있었어요.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 작품을 삼성 이병철 회장이 갖고 가면서 백지수표를 건넨 기억이 납니다. 김 : 이당 문하에서 공부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서화의 세계에 ‘체본(體本)’이라는 게 있어요. 배우는 사람이 따라 쓰거나 그리게 하려고 가르치는 사람이 써 준 글씨나 그림을 말하지요. 이당 선생은 세밀함이 특징인 북종화(北宗畵)의 대가였습니다. 이당 선생에게 처음 받은 체본이 참새였는데, 참새를 정밀하게 그리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내가 어려서인지 그 화풍이 갑갑하게 느껴지더군요. 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 이당 선생 문하에서 1년이 지날 무렵에 더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방향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종화(南宗畵)에서 명성이 높은 옥산(沃山) 김옥진 선생을 찾아가기로 했지요. 옥산 선생의 작품은 먹색과 운무가 좋았거든요. 김 : 이번에도 편지를 보냈나요? 이 :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북가좌동 32번 버스 종점 앞에 댁이 있었지요. 인사를 드리고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이당 선생에게 허락을 받고 오라고 하셨어요. 김 : 이당 선생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 : 뜻대로 하라고 선선히 말씀하시더군요. 이형수는… 1952년 경북 영덕군 남석동에서 태어나 영덕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해 안암초등학교와 대광중학교를 졸업했다. 마 지막 어진(御眞) 화가인 이당(以堂) 김은호와 남종화의 대가인 옥산(沃山) 김옥진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다. 1976년 포항에 정착한 후 네 번의 개인전과 세 번의 초대전을 국내외에서 가졌으며, 2015년과 2017년에 ‘심관(心觀) 이형수의 수묵 편지’를 냈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한국서가(書家)협회 초대작가가 되었고, 한국서가협회 수석 부이사장과 경북지회 초대 지회장을 지냈다. 경북문인화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871 영해동학혁명 기념사업회 고문으로 있다.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 김훈(작가)

2024-10-27

‘3대 시장’ 부조장 명성 이어받아 연일지역 전통시장으로 우뚝

포항에서 고대사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근기국’(勤耆國)의 실체다. 3~4세기 동해 소국들이 신라에 복속되기 전 포항에는 바로 근기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소국의 실체에 대해선 자료에 간헐적으로 등장하고, 체계화된 연구도 없어 각종 사료에 편린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철기시대를 막 벗어날 무렵 국가 단계는 아니지만 꽤 큰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은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해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근기국의 위치에 대해서 학계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연일설(延日說)’이 다수설로 인정받고 있다. 연일은 지금 포항 남부의 소도시로 큰 존재감이 없지만 연일이야말로 한때 일개 국가를 일군 터전, 왕경 터였다는 사실만으로 도시 자존심을 세우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오늘 방문할 포항의 전통시장은 바로 이 근기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시민들에게 생활 경제를 펼치고 있는 연일시장이다. 옛 왕조의 터에 시장을 열어 서민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연일시장으로 들어가 보자. ◆근기국 왕경 터는 오천, 연일읍 일대 다음은 연일 지역과 근기국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사학계에서는 근기국의 왕경터를 옥성리고분군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왕족, 귀족의 대규모 장례시설이 있는 곳이면 그 일대가 수도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분이 향토 사학자 배용일 전 포항문화원장이다. 배 원장은 근기국의 읍터를 오천읍 고현리(현재 원리, 원동) 일대로 보고 있다. 이곳은 포항의 젖줄인 형산강과 냉천 사이 중심에 위치해 있고, 동해와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배 원장은 근기국이 바로 이 고현, 연일읍, 오천읍, 대송면 일대에 왕경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고현성 반경 5km 내 고분군, 지석묘, 건물 터 등이 집중 분포한 점도 소국의 존재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근기국은 기원전을 전후한 시기에 소국을 형성했다가 신라가 동해 남부 맹주로 부상하면서 주변의 약소국들을 병합할 때 압독국(경산), 골벌국(영천) 등과 함께 경주 세력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근기국 멸망 당시 신라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연오랑세오녀의 스토리는 다음 오천시장 편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 동해 3대시장 부조장 전통 계승 연일은 동쪽으로 포항시와 철강산업단지를, 서쪽으로는 경주시 강동면, 남쪽으로는 대송면 공수리, 북으로는 학전-달전리와 접하고 있다. 옛날부터 교통이 발달해 조선시대 역원(驛院)의 하나였던 대송역(大松驛)이 장기를 거쳐 경주와 연결되었고, 형산강의 옛 포구를 이용한 해운도 크게 성했다.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시군격인 현(縣)이 설치됐고 한말엔 8면(面) 102개 리(里)를 거느릴 정도로 읍세를 자랑했다. 근대 기록에도 ‘현청(縣廳) 북쪽에 큰 어시장이 있어 동해안의 관문 역할을 했다’고 나와 있다. 지금도 전체 지도를 보고 놓고 볼 때 지리적으로 포항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혹자들은 철도를 형산강 남쪽으로 유치했다면 연일이 포항시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시청사가 있는 대이동, 포항공대가 있는 효곡동이 모두 연일의 관할이었을 정도다. 연일시장과 관련해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부조장’(扶助場)과 관계다. 조선시대 3대 시장으로 불리며 동해안 유통, 상업의 중심지였던 부조장은 현재 경주와 포항의 경계인 경주시 강동면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경상도 읍지에 의하면 ‘영일만, 형산강 지역엔 윗 부조장과 아래 부조장 두 곳의 장시(場市)가 개설되었다. 아랫 부조장은 연일읍 중명리 일대에서 1750~1905년까지 융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부조장터에서는 함경도 명태, 강원도 오징어, 포항의 청어·소금을 내륙에 팔고, 전라·경상도의 농산물을 교역하는 등 상거래의 요지 역할을 했다. 부조장의 상권과 전통은 연일시장으로 이어져 300년 가까이 그 상맥(商脈)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포항 경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1970~80년대 장꾼, 우마차, 리어카 북적 연일시장이 개장한 건 1968년으로 인근 죽도시장의 설립과 비슷한 시기다. 당시 연일읍의 인구가 20만 명이었으니 생필품 조달지로써 시장이 절실하던 때였다. 당시 형산강 이북 포항시의 인구가 6만 명에 불과했으니 유동인구는 오히려 연일시장이 많았던 셈인데, 당시 죽도시장은 신도시 개발붐을 타고 포항의 대표시장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어쨌든 두 시장은 1960년대 포항의 신, 구도심을 양분하며 형산강의 남북에서 전통시장 상권을 주도해 갔다. 인구 팽창에 따른 사설(私設) 시장으로 영업을 계속 해오던 연일시장은 2011년에 들어와서야 포항시가 인정하는 관인(官認)시장으로 인정 받게 된다. 1905년까지 부조장의 상권과 전통을 이어받은 덕에 1970~90년대 연일시장은 여타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이뤘다. “당시 장날엔 나뭇짐, 장작부터 토끼, 닭, 오리, 한약재까지 모든 물산들이 시장에서 거래됐습니다. 농민들은 집에서 재배한 배추, 무 등 각종 채소와 참외, 수박, 복숭아 등 각종 과일을 광주리에 실고와 팔고는 옷, 농기구, 신발 등 공산품과 바꾸어 갔습니다.” 조영만 상인회장은 1970~90년대 시장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장날 지게꾼, 짐꾼, 리어카, 우마차가 몰려들어 난전을 통과하는데 큰 애를 먹었지만 당시엔 그게 시장 풍경이었고, 장터의 낙(樂)이었다. 한때 포항 상권을 양분할 만큼 큰 위세를 자랑했던 연일시장의 현재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우선 이농현상으로 인해 유동인구가 줄었고, 특히 젊은층의 전통시장 외면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4~5곳이나 들어선 대형마트, SSM, 연쇄점 등도 전통시장 상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죽도시장이 위치해 주민들 상당수가 연일대교를 건너 큰 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조영만 상인회장은 “주민들이 지역 시장을 외면하고 타지로 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며 “이분들의 발길을 붙잡아 두는 것이 절실한 과제”라고 말한다. 이에 상인회에서는 3, 8일에 열리는 전통오일장에 큰 기대를 걸어 보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유동인구가 적으니 노점상들이 잘 오지 않고, 거래가 시원찮으니 한두 번 오던 행상들도 다른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부추 먹거리 개발 등 특성화 사업 추진 현재 연일시장은 3만여㎡ 부지에 150여개 점포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상인회는 2015년 ‘1시장 1특색’의 특화사업을 육성하는 ‘골목형 시장’에 선정돼 지역 특산물 먹거리 특성화 사업을 진행했다. 상인회는 연일의 특산품인 부추, 시금치와 연계한 음식, 식품을 개발해 먹거리 골목을 조성했다. “옛날 연일은 전국 부추시장의 20%를 점유할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에 상인회에서는 부추전, 부추통닭, 부추국, 부추빵, 부추두부 등 먹거리를 개발해 관광객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조 회장은 시장 특성화 사업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또 매년 10월에 형산강 둔치에서 열리는 ‘연일 부조장터 축제’도 상인회가 역점을 두는 행사다. 연일시장 정체성의 근거, 상권의 뿌리가 되는 행사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시장을 대표하는 축제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일시장은 현재 주차장 편의시설 확충과 입간판 정비 등 시장 현대화 작업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시민들이 쾌적한 공간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은 “고대에 근기국의 왕경 터를 이루고, 근대에 부조장 터의 상권을 이어받은 연일시장이 포항 남부의 유통, 상업 도시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강조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4-10-24

고령군 中企 글로벌시장 향한 첫걸음… 새로운 기회 ‘활짝’

고령군 중소기업이 베트남·태국 판로 개척의 문을 열었다. 최근 고령군은 “관내 중소기업 베트남 태국 시장 판로 개척을 통한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한 베트남·태국 수출상담회가 성황을 이뤘다”고 발표했다. 고령군에 따르면 지난 7일부터 5박6일간 해외무역사절단은 수출상담 87건, 상담금액 2284만7500달러(원화 약 307억원)의 성과를 거뒀다. MOU 체결건수도 22건, MOU 체결금액은 645만달러에 이른다. 베트남 해외투자청, 태국 투자청 방문을 통해 고령군 중소기업 해외 진출 네트워크 또한 구축했다는 평가다. KOCHAM(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 경제교류를 위한 업무협약도 체결됐다. 고령군 우수기업의 베트남 진출 지원과 지역 우수제품·농식품의 공동 컨설팅 등 협력의 길이 열린 것이다. 베트남 최대 한국 식품 유통업체 K-마켓과 수출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 역시 이뤄졌다. 농특산물 및 가공식품의 베트남 시장 진출 지원방안이 마련됐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고령군 해외무역사절단은 aT한국농수산식품공사 태국지사와 KOTRA 방콕무역관도 찾았다. 이는 태국-한국간 수출입 동향 및 한국 농식품의 태국시장 수출 전략을 모색하고, 태국 내 유통채널과의 정보 교류를 위해서였다. 아래에서 고령군이 이번 방문을 통해 수확한 성과와 관련 세부 사항을 하나씩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베트남·태국 수출상담회 큰 성과 이뤄내 고령군은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관내 중소기업 10개 업체와 함께 베트남, 태국 시장 판로 개척을 위해 해외무역사절단을 파견했다. 무역사절단에는 이남철 고령군수 등 공무원 8명과 고령군의회 김기창 성낙철 의원, 관내 중소기업 10개 업체 등 총 21명 참가했다. 7일엔 베트남 해외진출기업인 해원산업 현지공장인 해원비나를 방문해 견학을 시작으로 베트남 하노이, 태국 방콕에서 현지 상담회를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참가기업과 해외 바이어간 수출 상담도 진행했다. 참가업체는 (주)지산타포린, 해원산업(주), 이엔비무역, 다산주철, 대림팜스, 엠스푸드, 밥달라스, 주식회사 에스디, (주)삼정특수고무, (주)나호테크 등 10개 기업이었고, 가공식품, 1차금속(자동차부품), 타포린 및 고무롤 등 종합품목 전반을 상담 대상으로 했다. 고령군은 베트남과 태국에서 개최된 2번의 수출상담회에서 수출상담 87건, 상담금액 2284만7500달러의 성과를 거뒀다. 기업간 MOU 체결건수는 22건이었고, MOU 체결금액은 645만달러였다. 해외무역사절단은 베트남 수출상담회에서 현지 바이어와 1대1 맞춤상담 등을 진행해 실적 내실화를 도모했다. ◇고령군 중소기업 해외 진출 네트워크 구축 고령군은 기업의 해외 진출 네트워크 구축과 신뢰 형성을 위해 베트남 해외투자청과 태국 투자청(BOI)을 방문했다. 베트남 해외투자청과의 미팅을 통해 한국기업 진출에 대한 인센티브 및 지원내용 등을 파악했고, 고령군 기업의 베트남 진출시 베트남 해외투자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로 했다. 태국 투자청 미팅을 통해서는 태국의 경제 현황과 대내외 투자 계획, 투자 인센티브 등의 정보 교류와 고령군 문화관광과 산업경제 현황을 홍보하는 유익한 만남을 가졌다. 향후 고령군 우수기업의 베트남 진출 지원 및 지역 우수제품과 농식품의 공동 컨설팅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이뤘다. 고령군은 주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KOCHAM·회장 홍선)와 경제교류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협약식에는 이남철 군수와 김기창, 성낙철 군의원, 김종태 고령군상공협의회장과 주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 윤휘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고령군 우수기업의 베트남 진출 지원과 우수제품과 농식품의 공동 컨설팅, 인적자원 교류 등에 대해 앞으로 긴밀히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베트남 현지에서 136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베트남 최대 한국식품 유통업체인 K-마켓(회장 고상구)과 수출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K-마켓 본사 물류센터에서 진행된 협약식에는 이남철 군수, 김기창, 성낙철 의원, 김종태 고령군상공협의회장, K-마켓 신영화 총괄사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무역사절단 참가기업인 엠스푸드(냉동피자), 밥달라스(김), 이엔비무역(신선식품 등)은 제품 홍보 및 시식행사도 열었다. 참석자들은 이날 협약식에서 고령군 우수 농특산물과 가공식품의 베트남 수출 확대 및 유통 활성화를 위해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K-마켓은 2002년 설립돼 베트남 현지에 136개 매장을 운영 중이며, 임직원 수는 1800여명에 이른다. 베트남 최대 규모의 한국 식품 유통회사인 것이다.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을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 이번 고령군 무역사절단의 해외 방문에선 태국-한국간 수출입 동향 및 한국 농식품의 태국시장 수출 전략, 태국 내 유통채널 등에 대한 활발한 정보 교류도 있었다. “aT한국농수산식품공사 태국지사와 KOTRA 방콕무역관을 방문해 태국-한국간 수출입동향 및 한국 농식품의 태국시장 수출 전략과 태국 내 유통채널 등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 고령군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향후 고령군은 태국 내 K-푸드의 인기에 힘입어 고령군 우수 농특산물과 가공식품의 태국시장 진출 또한 적극 모색할 계획이다. 해외무역사절단 파견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뤄낸 고령군은 앞으로도 고령군 우수기업 및 제품의 해외시장 판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갈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이남철 군수는 “고령군 중소기업이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발돋움하는데 의미 있는 첫걸음을 떼었다”며 “K-마켓과의 업무협약 등을 통해 고령군 농특산물과 가공식품의 베트남·태국 시장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비전을 밝혔다. /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4-10-24

“인물이 역사고, 역사가 인물이다”

김일광 작가는 윤봉길, 윤선도, 링컨 등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써왔다. 그뿐 아니라 포항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인물들, 이를테면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인 석곡 이규준, 항일 의병부대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동남제도 수호검 배상삼, 인간 상록수 재생 이명석 등에 관한 책을 펴냈다. 작가는 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꾸준히 다뤄왔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선생님은 역사 속 인물, 특히 우리 지역의 인물 이야기를 계속 쓰셨습니다. 그중에는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도 있지요. 김일광(이하 김) :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이야기는 아픈 손가락입니다. 2021년 현북스에서 출판되었는데 최세윤의병대장기념사업회가 있지만 이 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시 의병들이 흥해 사람인데도 말이지요. 기념사업회 사업도 지지부진해서 안타까워요. 흥해 지진 복구 사업으로 주민종합시설을 건립하고 있는데, 여기에 최세윤기념관과 포항시 의병기념관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나라마다 나름대로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나에게 우리나라 자랑거리를 들라면 가장 먼저 ‘시민사회’를 꼽고 싶다. 어떤 사람은 짧은 기간 안에 우리가 시민사회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쉼 없이 펼쳐왔음을 볼 수 있다. - 김일광, 「작가의 말」,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현북스, 2021. 이 : 포항 장기면은 송시열과 정약용 등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데요, 장기에 조선시대 군마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김 : 2011년에 발간된 『조선의 마지막 군마』(내인생의책)도 공을 많이 들인 책이었습니다. 《고래가 숨 쉬는 도서관》이라는 잡지에서 권두 좌담으로 일제강점기 구룡포 장기목장이 폐목되는 과정과 구룡포와 호미곶 일대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동문학 평론가 김혜원은 「치열하고 성실한 글이 주는 즐거움」라는 글에서 김일광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야기의 한 축인 장기목장을 포함한 영일만, 포항, 구룡포 일대에 대한 일제 침략 과정은 작가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매우 견고하게 전달된다. 조선에 군마를 훈련시키는 장기목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훈련받던 많은 말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포항 토박이다. 그는 이미 발표한 『귀신고래』나 『강치야, 독도 강치야』 같은 책에서, 향토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이 책 『조선의 마지막 군마』도 그런 맥락에 기반을 두었다. 군마를 키우던 장기목장은 일제 침략 이후 황폐해져 말의 도망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산성의 흔적만 남겨놓고,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작가는 이렇게 사라진 기록을 찾기 위해, 당시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고금산에 말뚝이 박히며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 일본 배의 침몰과 등대 건설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기억에 의해 사실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자기가 있는 땅에 대한 애정, 사실에 기반을 둔 조사의 철저함, 그것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열정이 이 작가의 강점이다. 이 : 선생님의 작품에는 역사적 인물과 이야기 속 주인공이 공존하는데, 지역사의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김 : 『바위에 새긴 삼봉이』(봄봄출판사, 2017)는 장한상 수토사(搜討使)의 행적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울릉도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확보했지요. 동화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는 기행문 형식으로 『독도 가는 길』(현암사, 2017)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이 : 울릉도와 독도 이야기를 풀어낸 동화 중에 강치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 : 2014년 일본의 전직 초등학교 교사인 스기하라 유미코(杉原由美子)가 『메치가 있던 섬』이라는 동화책을 냈어요. 이 책은 강치(‘메치’는 일본 지역 방언)와 일본 어린이들의 우정을 다뤘는데, 독도 인근의 강치가 한국 어부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되었다는 거짓말을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이 책의 전자도서를 전국의 초·중학교에 배포한 것은 물론,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지요. 제가 『강치야, 독도 강치야』(봄봄출판사)를 2010년에 냈는데, 2019년 우리 외교부에서 영문판 『Where are you, Gangchi』 3000부를 발행해서 외국 주재 한국어학당이나 교포 단체에 배포했습니다. 동화를 통해 독도 분쟁이 점화된 사례지요. 독도 강치는 독도를 중심으로 우리 동해에서 살았던 바다사자의 한 종류입니다. 독도 주변에는 오징어를 비롯하여 물고기들이 참 풍부합니다. 쉴 자리도 있어서 그야말로 강치가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요. 그래서 강치는 오랜 옛날부터 독도에 자리를 잡고, 울릉도나 동해안 뭍에서 고기잡이하러 오는 어부들과 평화롭게 살아왔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던 20세기 초부터 일본 어업회사가 고기와 기름, 가죽을 얻으려고 강치를 무참히 죽였습니다. - 『강치야, 독도 강치야』, 봄봄출판사, 8쪽, 2010. 이 : 등단 40년을 맞은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김 : 가수 송창식은 매일 네 시간씩 기타를 잡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저도 매일 원고를 쓴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어요. 항상 작품을 쓰고 있기에 언제든 보낼 수 있어요. 이오덕 선생한테서 정신적 자세를 배웠고, 손춘익 선생한테는 부지런함을 배웠어요. 두 분은 중앙지에 상금 사냥꾼처럼 응모하지 말고 창작에 전념해서 좋은 작가가 되라고 하셨지요. 호미반도의 산길은 달빛이 내리면 모두 바다로 향한다. 웅크리고 있던 바위들도 어둠 한 자락씩 감아들고 바다로 간다. 관목 숲 끝에는 키 낮은 곰솔들이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달빛이 그 옛날 목부들이 쌓아올린 석축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그 돌덩이들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면 수백 년 전 말을 기르던 목부들이 깨어나서 파도 소리에 몸을 뒤척인다. 달밤, 숲으로 들어선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달그림자를 늘어뜨린 한 그루 곰솔이 된다. 그렇게 모두 한마음으로 달빛 길을 걷는다. - 『호미곶 가는 길』, 단비, 140쪽, 2019. 다무포 해안에서는 ‘고래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고래가 많았던 동해를 보았다. 바로 그곳에서 한국계 귀신고래의 멸종 연유도 들려주었다. 고래가 사라진 텅 빈 다무포 해안을 내려다보는 학생들의 표정은 안타까움 그대로였다. - 앞의 책, 137쪽. 이 :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호미곶으로 오는 길이 기쁨으로 벅찼습니다. 고래를 기다리는 집 서경와)의 잔상이 오래 남을 듯합니다. 김 : 한반도 끄트머리 호미곶의 청록빛 바다와 일렁이는 보리밭의 조화를 보노라면 생명의 신비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서정주의 시구가 떠오르는군요. 인터뷰 내내 함께했던 인연들이 아슴아슴 떠오르면서 그리워질 만하지요.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으며, 귀하지 않은 생명이 따로 있을까요. 먼저 글을 쓴 선배로서 후학들에게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려고 합니다. 그들의 길을 열어주고 그들과 함께 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요.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끝

2024-10-23

연못 둘러싼 노거수들 순흥도호부 흥망성쇠 지켜본 산증인

긴 무더운 여름 날씨도 가을이라는 계절을 맞이하여 몽니를 부려 보지만, 끝내 힘을 잃고 꼬리를 내린다. 더위와 함께 하늘을 짓누른 무거운 뭉게구름도 걷히고 청명한 하늘에 가벼운 새털구름이 우리의 짓눌린 마음을 꿈틀거리게 한다. 시원한 갈바람이 불 때면 우리는 어디론지 떠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를 이용한 각 지방자치 단체는 지역의 먹거리, 볼거리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로 욱적북적거린다.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이지만, 북적이는 사람들과 얄팍한 상혼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럴 때 여름 더위에 쌓였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한다면 호젓한 자연에서 힐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영주 순흥면 옛 도호부 관아의 정원을 찾았다. 당시의 건물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 유물과 산 증인 노거수만은 남아 나의 허전한 마음을 다잡아 주고 채워주었다. 오늘날 더위 못지않게 복잡다단한 사회의 고단한 삶에 새로운 에너지 창출을 위해 힐링은 필수이다. 옛날 우리 조상은 생활 터전의 가까운 장소에 연못을 조성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곳에 정자를 짓고 정신적 풍류를 즐겼다. 오늘날 힐링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소생태계, 즉 인공적인 작은 자연을 조성했다. 그곳엔 무더위와 강한 햇볕도 부드럽게 공손해지고 시원한 그늘은 덩달아 따라온다. 바람도 찾아와 솔가지와 나뭇잎을 흔들어 시원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푸른 개울물이 봇도랑으로 물고기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고 하늘의 빗물이 연못에 내려앉으면 나비, 개구리, 오리, 왜가리, 갈대, 수련 등 자연의 생명체들이 찾아든다. 정원의 녹색 나무와 숲이 우리의 이성을 찾아주고 정원 숲과 연못에 찾아오고 또 살아가는 생명체로 하여금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정자에 앉아 정원의 사계절 풍경을 보고 감상하는 것만으로 이성과 감성을 오가면서 오감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 이 얼마나 한가하고 평화로운 힐링의 장소가 아닌가. 이뿐일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정원에 들어서면 문학과 음악, 예술적 영감이 우리의 단조로운 삶을 풍요롭게 살찌운다. 정원은 우리 삶을 살찌우는 화수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영주시 순흥면사무소로 그 명칭이 순흥면 행정복지센터로 되어 있지만, 경내에는 연못, 숲, 봉도각 정자 등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우리 조상 삶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었다. 먼저 경내로 들어서니 우람한 느티나무 노거수가 맞이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또 다른 건장한 느티나무와 연리송(連理松)이 마중했다. 연리송은 만나기도 어렵지만,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상징성은 다른 어떤 물체보다 강렬하게 우리를 압도한다. 주민들도 연리송을 길수(吉樹)와 비파송(琵琶松)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연리지는 보통 동종 간, 이종 간에 가지가 서로 융합되어 있는 경우가 가끔 있으나, 이곳의 연리송은 두 수간이 용처럼 굽이치면서 연리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주민들은 두 가지의 금실이 좋다 해서 ‘금송송(金松松)’이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소나무 수형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감각에 놀랐다. 쭉 뻗어 올린 미인의 몸매에 아래로 처진 가지의 곡선미와 푸른 잎은 나에게 겸손의 미덕으로 다가왔다. 잘 다듬어진 담장 따라 머리와 양손이 떨어져나간 석불입상(石佛立像), 지방관 선덕비, 순흥도호부 초석, 순흥척화비 등 역사적 유물이 세워져 있었다. 지방관들의 선정비는 비가림막도 없이 가을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부서진 모서리는 세월의 탓인지 아니면 비석치기 탓인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삼권을 손에 쥐고 주민들을 쥐락펴락했을 권력이 권력의 보검을 놓는 순간 하나의 돌비석이 되어 공적을 몇 자의 글로 전하고 있었다. 반면에 민초의 정려비는 비가림막의 정자를 세우고 매년 마을의 주민이나 집안의 후손이 경배하고 보살피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다. 순흥도호부 시절의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비석좌대 그리고 누각석은 나를 슬프게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비 5백여 명이 국권 회복을 위해 항거하자 일본은 군사를 투입해 의병에 동조한 순흥부를 없애고 1907년 11월에 고을을 방화했다. 그로 인하여 관아와 석빙고, 고가 180여 호가 전소되고 고을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지난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보고 나이테에 기록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산증인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으면 텅 빈 속을 하늘로 까발려 놓았을까. 나이 420살의 증인 느티나무 노거수는 유비무환의 자세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정원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봉도각(鳳島閣)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뜻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따라 둥근 모양의 연못에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측의 연못은 사각형을 이루었고 북쪽에 돌다리를 놓아 정자로 출입하고 있었다. 조덕상(趙德常) 순흥부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는 봉도각의 ‘봉도(逢島)’란 신선이 산다는 봉래(逢萊)를 뜻한다. 당시 관원, 아전들의 휴식소로 삼았다고 한다. 정원의 주변에는 죽헌남정광기념비(竹軒南政廣記念碑), 애국지사 최봉환 선생 추모비(愛國志士崔鳳煥先生追慕碑)를 비롯하여 순흥 경로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경로소는 조선시대 때는 약국의 기능을 하며 ‘경로국(敬老局)’으로 불리다가 그 후 지역의 어르신들이 모여 각종 대소사, 가문의 다툼, 이웃의 분쟁 등을 해결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향촌 제도의 기능을 수행하며 400여 년을 이어 온 전국 유일의 ‘경로소(敬老所)’라고 한다. 정원의 주인은 왕버들이 아닌가 싶다. 왕버들 한 그루는 나이 400살, 키 20m, 가슴높이 둘레는 6m를 훨씬 넘었다. 또 다른 한 그루는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보였다. 잘려 나간 줄기며 속이 텅 빈 모습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 1754년 관아 뒤편의 정원을 조성할 때, 왕버들은 이미 130살이라는 나이를 먹었다 하니 왕버들을 그대로 둔 채 연못과 정자의 위치, 방향, 모양을 결정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얼마나 우리 조상들은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였는지 그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연못 주변의 왕버들과 소나무, 느티나무 노거수들은 순흥도호부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 증인으로서 지방행정의 관청에 서서, 지역 주민의 끈기와 정신, 역사와 문화를 전해주는 살아 숨 쉬는 문화재이다. 순흥 봉도각 연비어약(鳶飛魚躍) 내용은... 惡侯玉弩(슬피옥찬) 산뜻한 구슬 안엔黃流在中(황류재중) 황금 잎이 붙었네.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復寧協陵(복녕협릉) 복과 녹이 내리네.鳶飛戾天(연비려천) 솔개는 하늘을 날고魚躍于淵(어약우연) 고기는 연못에서 뛰네.豐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 남게遹不作人(하부작인) 어찌 인재를 잘 쓰지 않으리. “솔개가 하늘에 날고 고기가 연못에서 뛴다”라는 성군(聖君)의 다스림으로 세상이 조화롭고 정도(正道)에 맞게 운행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23

경산의 미래 먹거리 ‘임당 유니콘파크’ 젊은 인재 유혹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경산이 관광자원과 천혜의 자원이 부족함에도 경북 3대 도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산업을 견인한 산업단지와 지역에 산재한 기업들, 10개를 넘어선 대학들과 부설 연구소 등 젊은 피의 수혈에 지속적인 인구 증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지역의 성장에는 젊은 층의 지역 거주와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 경산에는 지역의 산업지도를 바꿀 것으로 기대되는 하양읍과 와촌면 일원에 조성 중인 경산지식산업지구, 유치 가능성이 구체화 된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 여기에 압량읍 일원에 조성될 임당 유니콘파크 등은 지속으로 느는 상주인구처럼 젊은 인재들의 지역 거주를 가능하게 해 지역발전을 기대하게 한다. 이 중에서도 경산의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주요 자원인 임당 유니콘파크를 살펴본다. □ 지식산업센터와 창업 열린 공간 임당 유니콘파크는 임당역에서 영남대역을 연결하는 지식산업센터(1만 846㎡)와 창업 열린 공간(9417㎡) 등 창업벤처 기관의 집적공간으로 ICT 창업벤처와 기업 지원 기능이 특화된 미국의 실리콘밸리나 판교테크노밸리와 같은 벤처창업 활성화 지구를 조성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애초의 ‘경산 미래융합타운’에서 브랜드 네이밍 공모를 통해 이름이 붙여졌다. 임당 유니콘파크라는 네이밍에는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 기업을 전설 속의 동물인 유니콘에 비유해 지역의 창업기업들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의미가 있다. 임당 유니콘파크의 거점 역할을 할 경산 지식산업센터 사업이 지난 2020년에, 2021년 창업 열린 공간 사업이 이례적으로 잇달아 중소벤처기업부의 국가 공모사업으로 선정되며 지역을 견인할 사업이 되었다. 총사업비 995억 원(국비 286억 원)을 투입해 지하 2층, 지상 6층, 전체면적 2만 1720㎡ 규모로 2026년 완공 예정인 창업 열린 공간과 지식산업센터는 120여 개의 기업 입주 공간과 다양한 기업 편의시설을 마련해 쾌적한 업무 환경을 제공하며 160대를 주차할 수 있다. 설계 공모작을 바탕으로 건축 중인 창업 열린 공간과 지식산업센터는 건축물을 달리하지만, 중앙에 서로를 위한 공간이 배치되며 외부에서는 일체형이다. 지상 1층은 코위킹 스페이스, 이벤트홀, 카페 등의 입주기업 편의 공간이 조성되며 지상 2층은 입주기업의 성정을 돕는 다양한 창업지원 기관과 협업 기관의 사무공간이, 지상 3층부터 4층은 입주기업 전용공간이다. 지상 5층은 현재 대구대학교에 있는 42경산이 이전해 SW 고급 인력 양성과 기업협업의 공간으로 특화되고 6층은 여가와 문화가 공존하는 복합공간으로 조성된다. 창업 열린 공간(스타트업파크)에는 ICT 융합과 미디어, 자율주행, 모빌리티 등 디지털 융합 기술 기반 스터트기업이 우선 입주해 창업자의 꿈을 실현한다. 지식산업센터에는 유망중소기업 기업부설 연구소와 중견기업 사내 벤처기업이 우선 입주 대상이다. □ 창업 생태계 조성 경산시는 특성화 분야가 뚜렷한 12개의 대학과 다수의 (연구)출연 기관, 9개의 산업단지와 뿌리산업에 기반을 둔 3400여 개의 제조업이 있어 산업성장을 위한 풍부한 인적자원과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시는 지역 내 창업문화 확산과 벤처창업 붐 조성을 위해 경일대와 대경대,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대구한의대, 영남대가 참여하는 ‘경산 벤처·창업 네트워크’를 구축해 창업 열린 공간을 구심점으로 지역 내 창업문화 확산과 지역 창업 생태계 활성화를 지원한다. 이를 통해 대학마다 2~3개 사의 유망 창업기업을 발굴·육성하고 지역의 창업보육공간과 지원사업의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창업플랫폼도 구축한다. 또 11월에는 경산 창업포럼을 개최해 벤처·창업기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지역 창업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모색한다. 이를 통해 지역 창업 관계기관이 보유한 산재한 인프라와 창업지원 정보를 통합적으로 제공해 정보 활용을 효율화하고 창업 과정의 불필요한 낭비를 최소화한다. 유망기업의 발굴과 유치, 임당 유니콘파크 입주기업의 자금을 위한 경산 제1호 펀드(대성 투게더 청년창업 투자) 250억 원을 대성창업투자(주)를 통해 운용한다. 경산 제1호 펀드는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 모태펀드 출자사업에 선정돼 모태펀드 100억 원을 확보했다. 투자대상은 청년창업자(60% 이상 투자)와 지방기업(20% 이상 투자)이다. 경산시는 한발 더 나아가 경산 제2호 펀드(경사 챌린지 유니버스 창업펀드) 60억 원으로 경산의 3년 이내 초기창업기업과 연 매출액 30억 미만의 기업을 지원한다. 운용사는 (주)대경기술지주와 와이앤아처(주)로 2024년 중소벤처기업부 모태펀드 출자사업에 선정돼 모태펀드 30억 원을 확보했다. 또 경북도와 6개 시, 금융기관, 기업이 참여하는 ‘지스타 경북의 저력 펀드’로 170억 원의 자금을 조성해 지원할 예정이다. □ 경산 ICT 산업 활성화 미래산업 페러다임 변화에 따라 지역산업 생존을 위해 고부가가치 산업인 ICT 산업으로의 전환이 지역 산업에 절실하다. 경산시의 ICT 산업의 활성화 추진 전략은 지식산업센터와 창업 열린 공간 등의 창업벤처기관의 집적공간과 기업 지원 특화구역을 대상으로 한다. 창업 열린 공간에는 3년 이상 창업기업이 대상이고 AI, 의료, 바이오 등 디지털 융합 기술 기반의 스타업이 분산된 창업 기능을 집적화해 창업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공간을 구축한다. 지식산업센터에서는 ICT 및 연구소 기업 등이 입주한다. 이를 통해 초기창업부터 성장기업 연계 시너지 효과로 유니콘 기업을 창출한다. 창업 열린 공간과 지식산업센터 5층에 입주할 42경산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의 역할은 임당 유니콘파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프트웨어 인재를 양성하고자 설립된 42경산 이노베이션 아카데미는 대구와 경북지역, 부산, 울산, 경남지역의 교육 수요를 감당하며 부산대와 유니스트 등을 전략 지역 전담 대학으로 지정해 연대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42경산은 청년 인재를 양성해 창업과 기업 유치의 선순환 체계를 구축할 중심에 있다. 이와 함께 위에서 거론한 펀드조성과 지역 창업 협력 네트워크 구축 등이 경산시의 ICT 산업 활성화의 바탕이다. 조현일 경산시장은 “임당 유니콘 파크는 경산 발전의 두 축이었던 대학과 자동차 부품산업을 살리는 최적화된 도시발전전략으로 기업들을 위한 세금과 규제 혁신을 위한 특구 도입과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문화 조성을 위해 다양한 정책적 지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조 시장은 또 “42경산에서 배출되는 인재가 임당 유니콘파크와 연계해 지역 기업에 취업하고 창업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하고 청년의 정주 여건 개선과 투자생태계 구축, 창업문화 구축 등으로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4-10-22

통일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 이끈 무열왕

먼저 아주 먼 나라 이야기 한 토막. 현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불리는 탈레반이 통치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그곳 바미안주(州)에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부처의 형상이 있었다. 이름하여 ‘바미안 석불’. 그 바위 불상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누가 폭탄을 터뜨려 파괴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같다. 불상을 포함한 바미안 석굴사원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의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절벽 양쪽 끝자락에 커다란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서쪽 불상은 높이 55m, 동쪽에 자리한 불상도 38m 높이로 크기부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통상은 서쪽 불상이 대중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았다. 각종 서적과 신문 기사에 의하면 바미안 불상은 아프가니스탄이 불교 문화권이었던 6세기에 만들어졌다. 그리스 조형미술에 영향 받은 간다라 양식의 불상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등장한다. 이는 유서 깊은 불교 유산이라는 의미. 그런데, 2001년 바로 이 바미안 석불이 먼지로 사라진다.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것이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통치하게 된 탈레반은 이슬람 교리를 이유로 ‘형상을 가진 우상의 숭배’를 일체 금지한다. 부처의 모습을 한 석상도 이 교조적 정책을 피해가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지의 대부분이 로켓포에 의해 형체도 없이 파괴됐다. KBS를 포함한 한국의 방송사는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의 포격으로 부서지는 장면을 TV 화면으로 가감 없이 보여줬다. 비단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류의 공동자산이라 할 유물이 역사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에 경악했다. 아직도 우리들 기억 속에 선명하다. ◆서라벌 서악의 불상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무열왕릉과 진흥왕릉 등 여러 기의 왕릉이 산재했고, 선도산 성모라는 신라의 태동을 알린 여신의 설화가 전하는 경주 선도산엔 신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유물이 우뚝 서 있다. 마애여래삼존불 혹은, 아미타삼존불입상 등으로 불리는 돌에 새긴 부처의 형상이다. 이와 관련된 문화재청의 요약된 설명을 읽어보자.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서있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이 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취재를 위해 3~4차례 찾아간 경주 서악 선도산 일대. 마애여래삼존불의 미학적 완성도는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크기는 작지만 섬세함과 치밀한 바위 조각 기술은 신라 석공들의 빼어난 솜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흑백사진 한 장도 눈길을 끌었다.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에 촬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엔 아미타여래입상 앞에 선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보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진 속 사내는 현실 바깥 피안(彼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화재청은 이 사진 속 석불들이 아름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입상의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 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진 특징과 미학적 완성도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불입상)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던 시기의 불상 조각으로 본존불은 높이 7m, 관음보살상은 높이 4.55m, 대세지보살은 높이 4.62m로 파악되고 있다. 크기와 규모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미안 석불에 밀리지만, 예술성 측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 이 불상은 특징이 적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까지 섞여 있다. 아래는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의 논문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의 한 대목이다.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마애여래삼존불)은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며 특별한 존상이다. 우선 본존과 협시(夾侍·좌우의 보살상)를 안산암과 화강암이라는 서로 다른 석재로 조각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주목했듯 이처럼 別石(별석·각기 다른 돌)으로 삼존을 구성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다. 더욱이 본존을 이루는 안산암은 경도가 높아 가공하기 어려우며, 상의 현재 상태에서도 확인되듯 쉽게 균열이 생겨 불상 제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석재다.” 본존불만이 아니다. 옆에 선 보살상은 재료가 된 석재가 인근에서 발견되지 않기에 ‘대체 어디에서 돌을 가져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산 정상부까지 무거운 석재를 옮겼을까’라는 의문을 부른다. 이에 관해 위의 논문은 이런 부연을 덧붙이고 있다. “보살상을 이루는 화강암은 한반도에서 석불을 제작한 이래 꾸준히 사용한 석재로, 신라에서도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이전부터 화강암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선도산 일대에서는 화강암이 전혀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두 보살상은 다른 곳에서 채석해 온 돌로 만든 것이다. 해발 약 390m에 달하는 선도산 정상까지 화강암 석재를 옮겨와 높이 4.5m에 달하는 보살상 두 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의 제작에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이 수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애여래삼존불, 누가 무슨 이유로 세운 것인지… 그렇다면 이 세 불상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일까? 이 의문에 ‘나무위키’는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 매우 흡사하다”고 간략하게 답한다.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걸 알고 싶다면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논문은 7세기 전반과 650년 전후, 그리고 661~663년 등 그간 다양한 의견이 제시돼온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시기를 능묘의 조영과 관련하여 쓴 글이다. 논문의 국문초록(國文抄錄)을 아래 인용한다. “불상의 지리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산의 정상에 6m가 넘는 대불을 조성할 당위성이 가장 높은 시기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시기, 즉 무열왕 재위기(654~661)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선도산이 6세기 전반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기 왕의 능역으로 사용되었지만, 7세기 전반에는 왕릉의 입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그러나 654년 김춘추의 즉위 이후 다시금 왕의 능역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생전에 수릉을 축조하는 관례와 문흥대왕으로 추존된 김용춘의 묘를 이장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선도산을 다시 능역으로 선택한 것을 무열왕대로 추정했으며, 산의 정상에 그 아래 왕릉들을 조망하는 방향으로 대형의 아미타상을 세운 것 역시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았다…(후략)” 만약 이런 추정에 힘이 실린다면 무열왕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동시에 통일을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를 이끈 왕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높이는 셈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22

불가능을 가능으로… 제철산업 변화 이끈 팀워크의 힘

“우리 기술로, 2열연공장 RM 전동기 수리 기간을 6개월에서 나흘로 당겼습니다.” 제철 설비는 거대하고 정밀해 다양한 기술이 결합한 종합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설비는 모두 전기 에너지로 움직이며, 신경망처럼 구성돼 있다. 이러한 거대하고 복잡한 설비를 구동하는 에너지원은 전력기반 설비이다. 우리의 기술을 정립했다는 자부심은 조직의 단결력을 높여 업무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성공 사례를 통해 제철소 내부에는 새로운 업무에 도전하는 조직 문화가 확산했다. ‘나’가 아닌 ‘우리’라는 이름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 손병락(65) 1호 포스코 명장의 인생길을 따라가 본다. -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은 업무는. △1977년 4월, 처음 포스코에 입사해 본격적인 철강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입사 후 전기수리과에 배치되자마자 제강공장 화재 사고 복구에 투입되면서 전기 설비와의 인연을 맺었다. 현재 전력기반설비 중 발전기, 전동기, 변압기 등 주요 전자기기의 투자 설치 관련 기술 검토, 설비 유지관리 및 설비, 정밀 절연 진단을 통한 잔존 수명 예측 및 수명 연장 기술 연구 개발 등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 적용해 설비 경쟁력을 향상하고, 다양한 설비의 국산화 개발과 설비 표준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에도 힘쓰고 있다. 이 외에도, 후배 양성을 위한 기술 전수 활동과 어렵게 취득한 기술의 사장 방지를 위해 기술 형식지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 업무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00년 어느 날, 포항제철소 2열연 공장의 RM 전동기가 소손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우리의 기술로는 수리가 어렵다고 판단해 일본 엔지니어에게 긴급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엔지니어가 “한국에는 장비, 자재, 인력 등의 문제로 일본에서 수리를 진행해야 하고 6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당시 우리의 기술을 적용해 수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차피 6개월이 걸린다면 1~2일 늦게 출발해도 전체 공정에 큰 영향이 없으니 이틀만 우리에게 시간을 달라고 상사에게 요청했고, 팀원들을 설득하여 도전해 보기로 했다. 무모함이 통했는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포스코가 가지고 있는 장비와 재료, 기술 인력의 부족함을 극복하며 수리 작업을 시작했다. 일본 엔지니어들도 우리의 방법과 기술에 가능성을 보았고,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놀랍게도 6개월이 걸린다는 수리를 단 4일 만에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회사는 안정적으로 생산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고, 동일한 고장 복구 작업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게 됐다. 수리품이 현장에 설치돼 정상적인 압연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고 많은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 그날 퇴근길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뿌듯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나를 웃음 짓게 한다. - 현장 관리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직원의 건강과 안전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모든 일이 안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직원이 안전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안전기준을 준수하고 부족한 부분을 함께 채워주는 것이 관리자의 역할이다. 이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내 기준에서 보면 첫째, 올바른 가치관을 통해 조직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하는 윤리성이 중요하다. 둘째, 끊임없는 소통으로 조직을 하나로 뭉치는 화합의 기술도 필수적이다. 셋째, 조직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더 큰 목표를 만들어내는 수용성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넷째, 지속적인 자기 계발을 통해 업무를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술력과 다섯째,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기 위한 공동의 꿈을 제시하고 지속적인 혁신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건강 악화로 인생 최대 위기를 겪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극복했는지. △4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었다. 때로는 질책과 시기도 있었고, 격려와 행복, 보람도 있었다. 항상 일에 대한 자부심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긍지를 가지고 업무에 임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자면, 일이 아닌 건강 문제였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기에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의사로부터 대장암이라는 진단 결과를 들었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녀가 학업과 국방의무 중이었고, 연로한 부모도 자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 집안의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던 일을 후배 직원들에게 나누어 맡기기는 했지만 걱정만 들었다.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정말 고맙게도 회사와 동료들은 내가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었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던 날, 건강 회복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당시 팀장은 “건강을 회복하고 자리를 지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어 달라”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이 쏟아지며 나를 믿어주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낫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됐다. 지금은 치료와 철저한 관리를 통해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나를 살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포스코에서 근무하며 ‘자율권이 넘치는 일터’라고 생각했다고. △포스코의 일하는 방식이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회사는 내가 제안하는 방법이나 새로운 기술의 적용에 대해 항상 실행할 기회를 주었다. 수많은 도전과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상사들은 그런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도전할 힘을 주곤 했다. 실패 뒤에도 질책보다는 항상 격려가 먼저였고, 질투보다는 협조가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는 언제나 해보고 싶은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특히 힌남노 복구작업 당시 부소장에게 전동기 복구 방안을 보고했다. “인력, 예산 고민하지 말고 손 명장 계획대로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무리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라도, 고졸 명장에게 사운이 걸린 일을 일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장에서 일에 대한 자율권이 주어지는 신뢰를 만들어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현장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코를 이끌어준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있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선배가 됐다. - 명장으로서 후배 양성과 기술 전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명장이 된 후, 철강기술대학 및 포스코 신입사원 교육 등 다양한 곳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차세대 제철소의 기둥이 될 젊은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자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그들이 다음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야 한다. - 인생철학과 비전이 있다면.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작게는 개인의 발전에서 크게는 인류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무한한 꿈을 꿀 수 있다. 혼자 꾸는 꿈은 달성하기 어렵지만, 함께 이루는 꿈이라면 달성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우리는 꿈꾸는 만큼 성장하기에 꿈이 커야 그 꿈이 깨지더라도 큰 조각이 남는다.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 모두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고 포기하거나, 실패했다고 좌절하거나, 해봤는데 어렵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고 멈추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유에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끈기있게 추진해야 한다. 혁신하고자 하면 언제나 실패와 좌절은 뒤따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실수를 무서워하거나 질책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혁신은 언제나 모험의 연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뒤에 숨어있는 협동, 격려, 칭찬, 배려 등을 찾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늦은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멈추는 것이야말로 진정 두려운 것”임을 잊지 말고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기와 기회 속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대하는 것이 좋을까. △인류 역사상 어렵지 않았던 시대는 그 어느 때도 없었다. 오늘날의 현실이 정말 어렵고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하지도 않고, 입을 것이 없어 벗고 살지도 않는다. 지금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세월은 분명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나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련을 극복하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분명 우리는 지금보다 더 멋진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손병락 설비담당 포스코 명장은 △포항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졸업△올해의 포스코인(2004년)△철의 날 철강기능인(2010년)△포스코 명장(2015년)△대한민국우수숙련기술인(2016년)△경북도 최고장인(2016년)△철의 날 동탑 산업훈장(2020년)△포스코 상무 신규 선임(2023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10-20

소외된 이웃들의 굴곡진 삶을 품어내

그래서 동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인데, 그 가난한 이웃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살이입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많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자리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포항 운하는 복원되었어도 물길과 함께 사람들의 삶이 복원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죽도 어시장과 섬안들, 칠성강의 판타지를 다루었지요. 표지 그림이 재미있고 독특합니다. 웹툰 작가가 그렸는데 판매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한 권의 책을 내는 과정에는 못다 한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40권이 넘는 책을 낸 김일광 작가한테는 수많은 사연이 있을 터이고, 그 사연을 엮어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바다』부터 『말더듬이 원식이』, 『엄마의 바다』, 『귀신고래』 등 작가의 주요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선생님의 첫 번째 동화집 『아버지의 바다』는 “열아홉 편의 그만그만한 길이와 그만그만한 가슴의 이야기들로 엮어진 동화집”이라고 임길택 시인은 말했지요. 김일광(이하 김) : 여기서 ‘그만그만하다’는 말은 진실한 삶에 깃든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시장통으로, 바다로, 산으로, 들길로 다니며 만난 많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래서 동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인데, 그 가난한 이웃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살이입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많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자리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 『아, 여우다』의 주인공은 몸도 약하고 덩치도 작아서 동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외톨이입니다. 혹시 선생님의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요? 김 :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으나 어릴 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없어요. 몸이 약해서 혼자 놀 때가 많았지요. 그러면 혼자 놀았던 이야기도 좋다고 해서 쓰게 된 이야기입니다. 집 주위 뱀 이야기, 눈밭의 여우 이야기, 상념이 많았던 외로운 아이의 이야기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만큼 그 심심한 시간에 나는 활자 속으로 빠져들어 그들과 어울렸다. 책 읽기는 몸을 부딪칠 염려도 없고, 달리기처럼 꼴찌에 대한 창피함도 없었다. 책 읽기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놀이였다. - 『호미곶 가는 길』, 단비, 44쪽, 2019. 이 : 많은 작품 중에 아픈 손가락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2010년 봄봄출판사에서 나온 『아기염소 별이』 라는 작품인데, 납북 어민들의 후손 이야기를 다루었어요. 군사정부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조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간첩으로 핍박을 받고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지요. 그림이 아쉬워서 그림 작업을 다시 해서 개정판을 냈습니다. 이 : 책을 통해 만난 독자와의 인연이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는지요? 김 : 2007년 봄봄출판사에서 『순둥이』라는 동화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개 이야기인데, 태어난 새끼들을 하나씩 분양해 보내는 이야기가 담겼어요. 2010년에 개정판이 나왔지요. 볼로냐상을 받은 김재홍 화가가 포항에 와서 모델이 된 개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책이 나오고 몇 년 후 서울 답십리에 산다는 어떤 할머니가 어렵게 연락처를 수소문했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순둥이』를 읽고 우울증을 극복했다고요.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세 아이를 양육한 분이더군요. 당시 대문 바깥은 이리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밀림처럼 캄캄했다고 회상하며 그 험한 세월을 견디고 아이들을 출가시키고 나니 우울증이 왔다고 해요. 그런데 동화 속 강아지처럼 다시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자신을 일으켰다고 했어요. 그 할머니는 동화가 자신을 치유했으니 후속작을 써달라고 했는데 쓰지 못했지요. 내 동화가 누군가를 치유했다는 사실을 독자와 공유할 수 있어서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이 : 선생님은 일찍부터 소외된 이웃과 다문화 가정의 이야기에 주목해왔습니다. 김 : 『물새처럼』(우리교육, 2004)은 다문화 가정 이야기 세 편을 싣고 있는데, 이오덕 선생이 제 원고를 갖고 있다가 발간을 해주셨습니다. 『외로운 지미』(현암사, 2004)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이야기고요. 『따뜻한 손』(낮은산, 2006)은 한 버스 운전기사의 하루를 통해 약하고 보잘것없는 생명을 사랑하며 사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원제목은 ‘겨울밤 이야기’였는데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꾸면서 표지 그림도 바뀌게 되었어요. 그림을 그린 유동훈 화가는 인천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데, 판화도 잘하는 분입니다. 이 : 『말더듬이 원식이』는 30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김 :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모여서 우리교육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었지요. 김명수 시인이 원고를 보내달라고 해서 서광출판사에 보내고 남은 원고를 수정해 보냈어요. 『말더듬이 원식이』는 기존의 동화와 성격이 다릅니다. 일하는 사람들, 일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노동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동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조금은 무거운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지요. 이 : 『교실에서 사라진 악어』(우리나비, 2016)는 표지 그림이 기발해 보입니다. 선생님이 내신 기존 책들과는 이미지가 다르군요. 김 : 포항 운하는 복원되었어도 물길과 함께 사람들의 삶이 복원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죽도 어시장과 섬안들, 칠성강의 판타지를 다루었지요. 표지 그림이 재미있고 독특합니다. 웹툰 작가가 그렸는데 판매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이 : 선생님의 작품은 거의 우리 지역의 사람들과 자연,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 : 『산에서 피는 꽃』(통큰세상, 2014)은 수도산이 배경이고, 『아주 특별한 돌, 석탄』(교원, 2015)은 잠자리가 독수리만 하던 오래된 과거의 환상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산』(봄봄출판사, 2016)은 내연산 옆 샘재 지역을 배경으로 가족이 길을 잃었다가 다시 뭉치게 되는 이야기고요. 『울고 있는 숲』(단비, 2020)도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몸짓과 소리를 나누어보자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 : 구룡포 해녀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김 : 《포항문학》 편집장이었던 권선희 시인은 구룡포에 살고 있어서 그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어요. 어느 날 권선희 시인이 구룡포 강사리의 해녀 할머니를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할머니를 만나러 두부 두 판과 소주를 사 들고 경로당을 찾았습니다. 할머니 풍채가 건장했어요.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결혼했는데 소박을 맞고 강사리 어부를 만나 결혼했다더군요. 전처소생 넷과 자신이 낳은 자식 넷까지 모두 여덟 명을 키우며 살아온 할머니의 일생이 기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뼈대로 쓴 작품이 『엄마의 바다』(우리교육, 2008)입니다. 이 : 선생님의 인생 책이라면 동화 『귀신고래』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 그렇지요. 권선희 시인이 포경선 용운호의 선장이었던 김준기 옹의 구술을 기록한 녹취문을 《포항문학》 23호(2003)에 실었어요. 이 녹취문을 토대로 쓴 작품이 『귀신고래』(내인생의책, 2008)입니다. 2021년에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 : 『귀신고래』에 실린 그림이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작업실 ‘서경와’에 있는 원화 작품들도 인상적입니다. 김 : 『귀신고래』에 실린 그림은 연필로 그린 세밀화가 백미입니다. 장호 화백이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데리고 와서 호미곶의 풍광을 보고 느끼며 그린 작품이지요. 대전 한밭도서관, 포항 포은중앙도서관,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원화 전시회가 열렸어요. 동화책의 원화를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더군요. 이후 장호 화백이 연필화의 아쉬움이 남았던지 『아! 여우다』의 삽화를 유화로 그렸습니다. 『귀신고래』의 그림을 그릴 때는 유화 물감을 감당할 형편이 안 되었거든요. 이 : 동화책은 서사도 중요하지만 그림이 주는 효과도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바다』에 실린 강요배 화가의 그림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김 : 제주도 그림으로 유명한 민중화가 강요배는 처가가 포항 오천이에요. 포항문협 회장을 역임한 최부식 시인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이 많습니다. 강요배 화가가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을 때 제 동화책을 최 시인이 갖고 가서 이야기를 잘한 덕분에 제주의 달이라는 대작을 최 시인이 사들였지요. 이 때문에 제주도가 술렁거렸다고 하더군요. 그림은 훗날 제주도 미술관에서 인수했습니다. 『어머니의 바다』를 그려준 화가가 『조선의 마지막 군마』의 표지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어요. 책을 통한 화가들과의 인연이 소중합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김일광은… 1952년 12월 포항 남구 섬안에서 태어나 포항고등학교와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창주문학상 동화부문을 수상했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었다. 4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바다’를 비롯해 동화와 청소년소설 등을 40여 권 발간했다. ‘귀신고래’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강치야, 독도 강치야’는 영어로 번역됐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과 ‘포항시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애린문화상(2018)과 경상북도 문화상(2014), MBC삼일문화대상(2008) 등을 수상했다.

2024-10-20

주한미군 지원사업 확대… 변화하는 성주로 ‘삶의 질 UP’

지난 2023년 6월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성주군 초전면에 위치한 사드기지에 의해 성주군 내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이 당초 1개면(선남면)에서 1개읍·4개면(성주읍, 선남면, 벽진면, 초전면, 월항면)으로 확대·변경됐다. 이에 성주군은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에 대한 발전종합계획을 변경했다. 총 13개 사업에 대한 사업비 4475억원을 확보해 사드 배치로 인해 상처받은 지역민심 회복을 위한 변화를 진행 중인 것이다. 변경된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 발전종합계획에는 좁고 노후화된 도로 보수 및 신설, 부족한 복지 시설 조성, 상·하수도 확충사업 등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에 포함된 읍·면민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업이 포함돼 있다. 성주군은 향후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사업의 방향을 같이 만들며 낙후된 지역을 개선해 나갈 예정이다. 아래 그 구체적 계획을 요약한다. □ 초전면과 벽진면, 도시재생사업 추진 성주군은 성주읍 시가지에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총 4년간 도시재생 뉴딜사업 1단계 사업인 창의문화센터 건립과 스마트 보행환경개선사업, 성주시장 활성화사업 등을 추진해왔다. 창의문화센터는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문화생활과 여가 시간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자 성주읍 도심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2021년부터 시행중인 2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건강문화캠퍼스, 성주어울림복합타운, 별의별 문화마당이 조성돼 11월 준공식을 앞두고 있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성주읍 중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으며,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을 통해 초전면과 벽진면에 각각 3·4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해 면 중심지를 개선해나갈 계획이다. 초전면에 추진 중인 3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총사업비 272억원을 확보해 어울림 복합타운·경관정비사업·역량강화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회 회의 및 주민 현장포럼, 선진지 견학 등으로 주민들과 지속적인 협의 중이라는 게 성주군의 설명. 행정기능 강화와 주변 상권 활성화를 위한 어울림 복합타운 건립을 통해 초전면의 랜드마크가 조성될 예정이며, 경관정비사업을 통해 주민 삶의 질 향상에 큰 역할을 할 예정이다. 4단계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벽진면에 추진될 예정이다. 2023년 9월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발전종합계획 변경 확정으로 총 사업비 200억원을 확보했다. 건강힐링센터·파크골프장조성·경관정비사업·도로선형개량사업·역량강화사업이 그 예산으로 추진된다. 발전협의회 회의를 통해 사업계획도 협의 중이다. 주민 여가활동과 건강증진을 위한 건강힐링센터를 건립하고, 오랜 숙원사업인 도로선형개량사업으로 주행차량 안전을 확보하며, 경관정비사업으로는 주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게 된다. □ 온세대 플랫폼으로 모든 세대의 어울림 지향 성주읍 성산리 일원에 추진 중인 온세대 플랫폼 조성사업은 노인·장애인 등 취약세대를 위한 여가·교육·건강 및 일자리 복합거점공간 조성 사업이다. 총사업비 471억원을 확보했으며, 해당 사업비는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사업 및 지방소멸대응기금, 자활기금 등으로 조성된다. 온세대플랫폼이 위치할 사업지 주변에는 종합사회복지관과 국민체육센터, 청소년 문화의 집이 자리하고 있어 모든 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종합복지타운이 조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성주군에 없는 볼링장도 온세대플랫폼 내에 입주할 예정이다. 취약세대의 사회활동 지원과 일자리 창출 등 주민 삶의 질 향상뿐 아니라, 지역민의 정주여건과 문화·복지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소성리 휴빌리지 조성사업도 주목된다. 사드기지 배치로 인해 상처받고 분열된 초전면 소성리 지역의 민심 회복과 힐링·치유가 목적인 사업이다. 2024년부터 연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며, 총사업비는 150억원이다. 해당 사업은 주민숙원사업·주민역략강화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들과의 지속적인 소통 및 선진지견학·마을 조직화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주민들과 함께 협의해 진행하고 있다. 현재 일부 주민숙원사업 및 주민역량강화 사업이 진행 중에 있고,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사업이기에 침체된 농촌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주민의 정주여건 개선으로 주민 만족도 역시 높일 전망이다. □ 성신원 정비사업 등 주민체감 중심사업으로 진행 성신원 정비사업은 초전면 용봉3리 일원에 시행 예정인 사업이다. 축산업을 주로 하는 마을인 용봉3리는 악취와 수질 오염으로 주변 주민들과의 갈등뿐 아니라 삶의 질도 문제가 되고 있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총사업비 490억원을 확보했다. 2025년 설계 및 보상을 시작으로 2029년까지 5년에 걸쳐 추진될 예정이다. 축사와 빈집 등 유해시설 정비 및 생태공원 조성으로 사업이 구성돼 있다. 생태공원 내에는 잔디·분수광장과 휴양쉼터, 성신원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디에모의 집 등이 위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쾌적한 생활환경 조성과 인근 관광자원과 연계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외에도 농어촌도로 204호선(초전~벽진간) 도로 건설 150억원, 사드기지 진입 우회도로 개설 300억원, 지방도 905호선(성주~김천간) 4차로 확장 2100억원, 한개마을 저잣거리 전시 및 체험장 건립사업 42억원, 한개마을 저잣거리 조성사업 60억원, 소성리 휴빌리지 상·하수도 시설 확충사업 200억원, 월항 장산마을 하수도 정비사업 100억원까지 총 4475억원의 사업비로 13개의 사업이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지원사업으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해당 사업들은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방향성을 찾아 나가고 있다. 이런 소통을 통해 많은 주민들이 그 긍정적인 변화를 실질적으로 체감하며, 또 이 과정이 주민간 소통 활성화와 연대 강화도 이끌어 낼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추진 중인 사업에 관해 이병환 성주군수는 “사드 배치 과정에서 상처받고 고통받았던 군민들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군민과 함께 변화의 방향성을 찾아가며 지역에 생기를 불어 넣어 다양한 세대가 그 변화를 체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4-10-20

도리마을·운곡서원·불국사… ‘울긋불긋’ 가을여행 떠나요

유난히 더웠던 폭염이 소리없이 물러나고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풍경으로 단연 단풍이 꼽힌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면서 본격적인 ‘단풍 여행’이 시작됐다. 산림청이 예상한 국내 단풍 절정은 오는 28~31일이다. 지역별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지역에서 예년보다 단풍 절정이 늦을 전망이다. 지난 6∼8월의 평균기온이 지난 10년(2009∼2023년) 평균보다 1.3도 정도 상승한 것이 주된 원인이다. 국내 대표적인 단풍 여행지로 경주를 빼놓을 수 없다. 신라천년 고도 경주에는 지천이 고적지와 사적지로 국내외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우리나라 관광 1번지이다. 경주는 사적지마다 고목이 울창한 단풍 명소이다. 경주에서 아름다운 단풍의 정취에 취해 보자. □ 경북산림환경연구원 연구원을 지나는 도로인 통일로를 기준으로 서쪽 영역과 동쪽 영역이 있는데 서쪽 영역에는 연구원 본관과 피크닉 쉼터, 숲 산책로 등이 자리한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동쪽 영역이다.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다양한 수목과 화초를 식재해 관리하면서 이를 일반에 공개하던 곳이었는데 이곳이 ‘천년 숲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입구로 들어서면 체험 정원과 가든 센터가 먼저 보이고, 이어서 테마가 있는 소정원과 숲길, 신라의 역사가 녹아든 쉼터 등을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 그중 포토스팟으로 유명한 외나무다리는 습지원, 일명 거울숲에서 찾을 수 있다. 가을에 특히 아름다운 포인트를 꼽으라면 메타세쿼이아 숲길과 마로니에라고도 부르는 칠엽수 숲길이다. □ 서면 도리마을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던 이곳이 어느덧 경주 가을 대표 명소가 됐다. 묘목 용도로 나무를 밀도 있게 식재한 덕에 은행나무가 양 옆으로 퍼지지 않고 마치 자작나무처럼 위로 쭉 뻗은 늘씬한 모양으로 자랐다. 그래서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외국의 어느 숲에 와 있는 듯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때 이곳의 풍경은 환상 그 자체다. 절정 시기를 살짝 지나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땅 위에 샛노란 양탄자가 깔린 모습 또한 절세비경이다. □ 통일전 은행나무길 이곳은 소담한 연못과 정자 화랑정이 있다. 또 갖가지 수목으로 아름답게 조경을 해 여유롭게 산책하며 둘러보기 좋다.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통일전과 함께 은행나무 길도 꼭 감상해야 할 주요 포인트이다.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통일전 앞으로 쭉 뻗은 약 2㎞의 도로 양옆 은행나무가 아름답게 물들어 걷고 싶은 길, 드라이브하고 싶은 도로로 만들어 준다. □ 무장봉 억새군락 함월산, 운제산과 이웃하고 있는 무장봉은 억새 장관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이 일대는 1970년대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장이었다. 목장이 문을 닫으면서 초지에 억새가 자생하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624m의 산 정상부까지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장관이지만, 땀 흘린 뒤에 얻는 절경은 100% 이상의 만족으로 돌아온다. 탐방 안내소에서 정상의 억새군락까지 다녀오는 데 넉넉하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계획하면 무리 없다. 올라가는 길에 삼국통일 후 문무왕이 무기를 묻었다고 전하는 무장사의 터가 있고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니 함께 들러서 가자. □ 운곡서원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과 조선시대 참판을 지낸 권산해, 군수 권덕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이곳의 가을 포토스팟은 서원 바깥에 있다. 서원 바깥 영역에 유연정이라는 별도의 정자가 있는데 그 앞에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400년에 달하는 거대한 은행나무로 나무줄기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가지에 샛노란 은행잎이 춤을 춘다. 은행나무와 정자 유연정을 함께 담으면 황홀한 풍광을 남길 수 있다. □ 불국사 신라 경덕왕 때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때에 완성한 사찰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의 우수한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보여 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불국사와 다보탑,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등 국보가 가득하니 구석구석 찬찬히 불국사를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불국사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불국사에 방문해 보는 것이다. 불국사 가람 외부와 내부의 정원에는 단풍나무가 많이 식재돼 있다. 새빨갛게 물드는 단풍과 세계문화유산을 함께 담아 보자. □ 계림 계림은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으로 불렸는데, 닭과 관련된 김알지의 탄생 설화 때문에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리게 됐다. 이 천년의 숲에는 물푸레나무, 홰나무, 단풍나무 등 수령 지긋한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특히 아름다움을 더한다. 숲 사이로 산책로가 내어져 있어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서 사색의 가을 산책을 즐기기 좋다. □ 용담정 최제우 선생이 포교를 하고 용담유사를 쓴 정자로 정자와 함께 수도원 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용담정과 멀지 않은 곳에 최제우 유허비가 있고 그 자리에 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니 함께 둘러보기 좋다. 이 일대는 동학의 발상지로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념관 건립이 완공돼 새롭게 문을 열기도 했다. 의미 깊은 동학 성지 용담정은 경주의 숨은 가을 명소이다. 용담정의 정문을 지나 정자인 용담정까지 오르는 길은 감탄을 자아내는 숲길이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곳곳에 있어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 포석정 경주 서남산 기슭에 포석정지가 있다.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놀이 ‘유상곡수연’을 위한 석조 기물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물은 구불구불 타원형의 물길을 따라 술잔을 움직인다. 신라인들의 풍류와 우수한 예술성을 동시에 보여 주는 유적이다. 이곳 포석정은 가을철이 되면 사진작가들의 인기 출사지로 변신한다. 유상곡수유적 주변으로 나이 지긋한 단풍나무가 소담한 숲을 이룬다. 깊은 가을에 들러서 포석정의 만추를 꼭 경험해 보자. /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4-10-17

한 남자를 사랑한 자매 슬픈 사연 간직… ‘자매의 화신’ 별칭

청춘 남녀의 사랑은 무엇일까? 활활 타오르는 불같기도 하고 때로는 차가운 얼음 같기도 하여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드나들면서 이성을 마비시키곤 한다. 음식처럼 매콤달콤하여 그 맛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고 짜서 멀리 도망치기도 한다. 도무지 그 한계랄까, 크기와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다. 느낌만 있고 형체도 냄새도 소리도 없는 것이 귀한 하나뿐인 목숨줄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신출귀몰하고 변화무상하다. 극과 극을 오가면서 하늘처럼 넓고 바다만큼 포용력이 있는가 하면 바늘처럼 좁고 손톱만큼도 이해력이 없기도 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하니 사랑을 누군가는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달콤한 솜사탕이라 하지 않았나 싶다. 인기 속에 방영되었던 모 방송국의 일일연속극 ‘우아한 모녀’를 즐겨 시청했다. 내용은 한 청년을 사랑하는 두 자매의 슬픈 이야기이다. 동생이 약혼까지 한 청년을 어릴 적 유괴당한 언니가 나타나면서 파혼이 되고 그로 인한 자매간의 갈등을 다룬 연속극이다. 한 남자를 두고 자매가 서로 사랑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벌어지는 미움과 증오의 사랑싸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긴장감과 함께 전개되는 드라마에 분노하기도 하고 애를 태우면서 다음 회를 기다리면서 문득 천연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된 경주 오류리 등나무 노거수 가 떠올랐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527번지에 있는 등나무는 자매의 화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청춘남녀의 슬픈 사랑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특히 드라마 속 자매 같은 갈등을 겪는 사람이라면 오류리 등나무를 탐방해 보면 어떨까. 2002년 생육 상태를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등나무 나이 300살, 키 17m, 몸 둘레 1.5m, 앉은 자리 폭이 20.4m로 되었다. 나이 300살이라 추정된다고 하였으나 콩과 식물이면서 덩굴식물인 등나무는 일반 수목처럼 수령, 키, 수관 폭을 적시할 수 없는 모듈 생물체이다. 키란 것도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간 높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 나무가 고사하면 바로 땅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수관 폭 역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주 오류리 천연기념물 등나무 아래를 들어갔을 때 어둡고 깊은 숲속 같은 느낌을 받아 놀랐다. 슬픈 사랑을 간직한 자매의 화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애도의 마음을 가졌다. 전설대로 오류리의 등나무는 천년을 훌쩍 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청년을 연모한 자매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한 죽음이 갈등의 한 축인 등나무로 환생하였다니 아이러니하다. 칡도 등나무와 마찬가지로 콩과 식물로 덩굴나무이다. 지지대가 없으면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없다. 서로 타고 올라가는 방향이 달라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뒤얽히어 도저히 풀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된다. 갈등(葛藤)이란 말은 칡의 갈(葛)과 등나무의 등(藤)을 합쳐서 만든 말이다. 칡과 등나무는 갈등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다. 칡의 뿌리는 식용으로 어린잎과 꽃은 약용으로 사용한다. 이에 못지않게 등나무 마찬가지로 꽃은 향기롭고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자주색 나비 모양의 꽃송이는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공원이나 정원에 칡은 볼 수 없지만, 등나무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등나무의 짙은 그늘과 자주색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에 반해 마을 계곡에 자라는 등나무 두 그루를 채취해 와 정원에 심었다. 지금까지 10여 년 넘게 반려목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여름에는 녹음과 시원한 그늘을 해가 거듭될수록 더 많은 선물을 받고 있다. 먼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류리 등나무의 슬픈 전설은 “옛날 서라벌 현곡에 한 농부가 홍화(紅花), 청화(靑花)라는 예쁜 두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사이좋은 두 자매는 지난해 추석날 젊은 낭도들의 말 달리는 경기장에 갔다. 그곳에서 많은 젊은이 중 특히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한 청년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자매는 속마음을 숨기고 혼자만 사랑을 키워 갔다. 당시 전쟁터로 나가는 애인에게 처녀들은 꽃다발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전쟁터로 나가는 짝사랑하는 청년에게 두 자매가 함께 ‘잘 다녀오세요!’라고 외치며 꽃다발을 던졌다. 서라벌 처녀들은 애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용사들에게 용기를 돋우어 주기 위해서 꽃다발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로부터 두 자매가 서로 같은 청년을 사랑함을 알고 심한 갈등에 빠졌다. 다정하고 착한 자매였기에,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청년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에 두 자매는 함께 울었다. 남의 눈을 피해 자매는 언제나 같이 놀던 연못가에서 하늘을 원망했다. 그 청년이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두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에 두 자매의 영혼이 등나무로 환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슬픈 사연을 간직한 자매의 화신 등나무는 사랑의 묘약으로 둔갑했다. ‘등나무의 꽃잎을 말려서 신혼부부의 베개 속에 넣어두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진다.’라고 하거나 ‘사랑이 식어버린 부부들이 잎을 삶아 먹으면 사랑이 되살아난다.’라고 하는 이런저런 믿지 못할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이란 역시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가 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거나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끈을 놓는가 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끝을 붙잡고 있다.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상반되는 말과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면 사랑이란 청춘남녀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가 아닐까 싶다. 사랑은 청춘남녀에게 국한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에 최고 존엄의 가치이다. 따라서 철학과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서도 사랑은 영원한 주제이다. 사랑이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인가, 지고지순한 최고 존엄의 가치인가 오늘도 사랑에 웃고 울며, 기쁨과 슬픔에 희비가 엇갈린다. 2024 대한민국 산림박람회 제23회 산의 날 기념식 ▷일시: 10월 18일~21일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장소: 경주 엑스포 대공원(천마 광장, 선덕 광장) ▷주최·주관: 산림청, 경북도, 경주시 ▷주제: 모두가 누리는, 가치 있고 건강한 숲 ▷포레스트 빌리지: 기관 홍보부스, 관람객 휴게 쉼터, 숲속 마을 연상케 하는 특별한 공간 구성 ▷참여기관: 도·광역시. 한국산림문학회(이사장 김선길),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사장 심상택),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교장 윤정란) 외 6개교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4-10-16

이오덕, 손춘익을 만나며 동화를 쓰게 돼

김일광 작가는 2019년에 산문집 ‘호미곶 가는 길’(단비)을 내면서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다.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쌓이고 쌓여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다. 늘 그리운 인연들과 앞으로 만날 새로운 인연들에게 이 글을 전하고 싶다.”(작가의 말) 그렇다면 김일광 작가를 문학의 세계로 이끈 인연은 누구이며, 작가는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희정(이하 이) : 지역 원로인 박이득 선생의 동화책 출판기념회가 지난 8월에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 동화책 발간을 추진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일광(이하 김) : 1981년에 창간된 ‘포항문학’에 박이득 선생이 동화를 발표했습니다. 그 동화를 43년 만에 책으로 낸 겁니다. 포항은 원래 아동문학의 뿌리가 깊은 곳인데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박이득 선생은 그 1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서가 남지 않으면 후대에는 잊히기 마련이지요. 작품에서 몇 군데를 수정하고 내용을 줄여 포항의 동화 전문출판사에서 발간했어요. 박이득 선생의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될 듯하군요. 올해 ‘포항문학’ 51호 발간을 앞두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 선생님은 소설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셨는데, 동화를 쓰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김 : 이오덕, 손춘익 두 분과의 인연입니다. 이오덕 선생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 동화를 쓰면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갖게 된다며 적극 추천했지요. 이오덕 선생이 주도한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무크지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창작보다 운동으로 기울어진 경향이 강했지요. 아동문학 무크지 ‘우리들이 뽑은 대장’, ‘지붕 없는 가게’ 등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이오덕 선생님과의 인연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김: 1982년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심사를 맡았던 이오덕 선생이 저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주었어요. 2년 뒤 1984년에 ‘훈이의 손’으로 창주문학상을 받았고,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됩니다.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은 이오덕 선생은 과천으로 거주지를 옮기셨고, 대구·경북의 아동문학은 권정생 선생이 이끄셨지요. 이오덕 선생이 제 작품을 창작과비평사에 보냈는데 1990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 책이 ‘아버지의 바다’입니다. 사람보다 작품이 먼저 서울로 걸음을 해야 한다던 선생의 말씀대로 시골내기였던 저보다 작품이 먼저 인정받게 되었지요. 이오덕 선생이 디딤돌을 놓아준 겁니다. 이 : 포항의 문학을 얘기할 때 한흑구 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한흑구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을 텐데 어떤 분이셨는지요? 김 : 인편으로 저를 부르시곤 했는데 항상 죽도시장에 있는 튀김집에 계셨어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식육점에서 간이나 천엽을 사 오게 해서 먹이셨죠. 평양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이광수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셨어요. 1960∼70년대 중앙 문단과 이어진 유일한 연결고리가 한흑구 선생이었고, 선생 덕분에 포항 문화예술의 격이 높아졌지요. 한흑구 선생을 정점으로 ‘흐름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지역 문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선생은 누구를 흉보거나 싸운 적이 없었어요. 유신 시절에 한 후배 문인이 ‘이 참혹한 땅에서’라는 프린트판 시집을 냈을 때 다른 문인들이 “제목이 왜 그렇노”라며 나무랐지만, 선생만은 “왜 제목 탓을 하는가. 세상을 탓해야지…”라며 다독이셨죠. 포항 문인들은 여전히 그분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 한흑구가 작성한 ‘흐름회’ 결성 취지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향토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다음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난 1968년 12월에 첫출발한 ‘흐름회’. 이름마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인생은 그림자같이 흘러간다”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 연유한 것이며, 동해바다도 흐르고, 형산강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해서 항상 흘러서 새롭게 살고, 새롭게 성장하라는 뜻에서 문화예술인 5명이 주동이 되어 만든 모임. 예술을 애호하고 창작하는 사람끼리 오붓하게 모여서 표면에 나타내기보다 조용하게 숨어서 상호 연마하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실질적인 일을 해나가려 하는 ‘흐름회’ 회원들. 이 : 포항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손춘익 선생과의 일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 : 그렇지요. 2000년에 손춘익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함께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개풍약국 앞에서 만나 죽도시장으로 가 술잔을 기울였어요. 여름이면 구룡포 난전에 가서 고래고기를 놓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요. 구룡포는 포항 시내보다 2∼3도 기온이 낮아서 시원했어요. 1958년 박경용, 1966년 손춘익의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중앙 문단에 진출하는 문인들이 생겨났지요. 당시 박이득 선생은 문학에 뜻을 둔 시인이나 교사, 동화작가 등과 ‘청포도 문학동인’을 결성합니다. 이에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조직과 체계적인 운영이 필요해지면서 1968년 흐름회가 결성되고, 1979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가 만들어집니다. 이 : 선생님은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장을 맡는 등 포항문인협회에서 많은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김 : 성홍근 동지고등학교 교장과의 인연으로 포항문인협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1985년 전국소년체전이 포항에서 열리면서 ‘포항문학’에 포항의 역사를 정리한 원고가 특집으로 실립니다. 그때 시 예산을 지원받으면서 ‘포항문학’의 격이 한층 높아졌지요. 그에 따라 회원 관리도 본격적으로 하고 제대로 된 문학인을 육성하자는 뜻에서 편집팀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회원 대부분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이기도 했고, 작품 경향이나 회원 성향이 민족작가회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이 시기는 노동운동이 활발해 ‘포항문학’ 8호에 노동운동을 특집으로 좌담과 관련 작품이 실렸습니다. ‘포항문학’ 10호까지 고은, 김지하, 이호철, 염무웅, 신경림 등의 글이 실렸고, 포항문인협회의 움직임이 주목받는 힘든 고비를 거쳤지요. 이 : 포항문인협회에서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습니까? 김 : 1998년 포항문인협회 주관으로 수도산에 재생 이명석 선생의 문화공덕비를 세웠습니다. 재생 이명석 선생이 작사하고 장남 이진우 국회의원이 작곡한 ‘옛 포항시민의 노래’가 이 공덕비에 새겨 있지요. 이진우 의원은 법학 전공자인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이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할 때 ‘시민의 노래’를 공모해서 새로 만들었는데 작품성이 떨어집니다. 그 밖에 한흑구 문학비, 청포도 시비, 노계 박인로 시비, 손춘익 문학비 등이 포항문인협회와 포항시의 어려운 조율 과정을 거쳐 세워졌습니다. /대담·정리 : 이희정(시인) 사진 : 김훈(작가)

2024-10-16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神母이자, 女山神은 중국 황제의 딸?

경주의 선도산은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이라는 신라 불교예술의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유적과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되는 왕의 유택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더불어 신라 건국 신화와 관련된 ‘성스러운 어머니’의 스토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건국 신화’란 한 나라를 만든 시조의 이야기 또는, 왕조가 시발점이 된 설화를 지칭한다. 풀어 쓰면 국가를 세우게 되는 계기와 그 이후의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가 바로 건국 신화다. 인류사에서 유래가 드물게 1000년 가까이 존속되며, 찬란한 문화예술 전통을 이어간 신라왕조의 장구한 역사. 당연지사 그에 걸맞은 ‘드라마틱한 건국 신화’가 없을 리 없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을 포함한 고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신화를 옛이야기 스타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라벌(신라)에는 6개의 촌락이 있었다. 이를 ‘육부촌’이라 불렀다. 각 촌락에는 촌장이 있어 크고 작은 마을 일을 결정했다. 6촌장들은 화백회의를 열어 민주적 만장일치제를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진행했다. 기원전 69년. 화백회의에선 왕을 추대해 백성들이 보다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여섯 촌락의 촌장들이 서라벌 남산에 올랐고, 거기서 내려다본 한 우물가에서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했다. 우물가에 머물던 흰 말이 하늘로 올라간 후 주변을 살피니 커다한 알 하나가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나왔는데, 몸에서 빛이 나고, 짐승들도 아이를 경배하듯 고개를 숙였다. 여섯 마을 촌장들은 박혁거세라 아이의 이름을 짓고 왕으로 모셨다. 알에서 나온 아이는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 거서간(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고대 건국 신화 속 성스러운 여성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는 건국 신화가 가지는 특징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선 ‘건국의 영웅’을 낳아 기른 ‘성스러운 어머니’가 언급된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신모(神母·신의 영역에 있는 어머니)는 물론 멀리 고조선시대 신모까지. 이런 설명이다. “건국 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 건국 신화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들이 있어 왔다. 이중 신모(神母)는 건국 영웅을 낳고 그들을 기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 내지는 건설하기 위해 떠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시조의 조력자로 나온다. 이와 같은 신모로는 고조선의 웅녀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가 있다. 그리고 이들 신모는 죽은 후 국가제의의 대상이기도 했다.” 까마득한 옛날 한 나라가 세워지는 데는 탁월한 힘과 빼어난 지략을 갖춘 영웅의 스토리가 필요했다. 고대국가의 ‘건국 주도자’는 대부분이 남성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당수 설화나 전설이 그렇듯 건국 신화에도 여성은 반드시 등장한다. 신라라고 예외일 수 없다. 바로 그 여성이 ‘선도산 신모’와 ‘알영’ 등이다. 그렇다면 알영은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펼쳐 본다. “박혁거세가 왕이 된 후 어느 날이다. 서라벌의 알영 우물가에 닭의 형상을 한 용이 나타난다. 그 신비한 짐승의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으니 그녀가 바로 알영이다. 미모가 빼어났고, 피부는 백옥처럼 맑았다. 하지만, 흉측하게도 인간의 입술이 아닌 닭의 부리가 달려있었다.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북쪽 냇가로 데려가 깨끗하게 몸을 씻기니 마침내 닭의 부리가 떨어졌다. 이 여자아이가 자라 열세 살이 되자 박혁거세가 아내로 삼았다. 서라벌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과 더불어 왕비가 된 알영까지 성인(聖人)으로 받들며 기뻐했다.” ◆신라의 첫 번째 왕 박혁거세를 낳은 사람은… 신라 건국 신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고대왕국 서라벌의 첫 번째 통치자 박혁거세다. 한양대 고운기 교수는 그의 책 ‘인물한국사’에서 박혁거세에 관해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어진 사제 의선의 지도를 받아 성장해 우리나라 고대왕권국가의 문을 여는 신라를 세웠다”고 쓴다. 이는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그는 어진 왕이었으며 지혜로운 왕이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인 서기 3년, 혁거세는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에 몸만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는 것 역시 고 교수의 설명이다. 박혁거세의 아내는 앞서 쓴 것처럼 ‘닭의 부리를 가지고 태어난 여성’ 알영. 그렇다면 신라를 태동시킨 ‘지혜롭고 어진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백마가 머물다 떠난 서라벌 어느 우물가에 놓인 알에서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사람이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에 기반한 신라 건국 신화의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 “선도산 신모(仙桃山神母)·선도 성모(仙桃聖母)라고 불리는 전설 속 인물은 중국 황실의 딸로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렀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솔개를 놓아 보내자 선도산으로 날아가 멈추므로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아 지선(地仙)이 됐다.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이상하고 신령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녀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반드시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을 낳았을 것이다.” ◆선도산 신모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사람이 알을 낳았다는 것 자체가 합리성과 이성을 갖춘 21세기 사람들의 과학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라의 건국 신화는 자그마치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 과장과 허구가 배제될 수 없다.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직접 본 바 없으니,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의 어머니(선도산 신모)’는 풍문과 설화, 고문헌의 짤막한 기록에서만 그 모습을 희미하게 드러낸다. 그러니, 그녀의 삶과 죽음, 행적 역시 기록자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하나의 의미망 안에 포획하기가 어려운 걸 넘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등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고운기의 ‘인물한국사’로 돌아간다. “고려 예종 11년(1116년). 김부식이 송나라 조정에 갔다. 일행을 접대하는 송나라 사람 왕보(王9EFC)가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을 보여주며 ‘옛날 어느 제왕의 딸이 바다 건너 진한에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초상화’라고 말했다. 일연의 ‘삼국유사’ 감통편은 선도산 신모 이야기로 시작된다.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서 살았다. 신선이 되어 집을 짓고 지낸 곳이 서연산(西鳶山)이었다. 그 신모가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했다.” 이상이 두 고문헌의 기록을 풀어 쓴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선도산 신모를 둘러싼 비밀이 명쾌하게 풀렸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