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에세이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10_2> 황성공원 (하)
박목월노래비와 목양 오세재선생 문학비
황성공원의 숲길을 걷다 보면, 나무와 나무 사이 조용히 서 있는 비석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가 새겨진 노래비다. 시인은 이곳 경주 출신이다. 낙엽이 지는 숲길을 따라 떠도는 마음을 노래한 시는, 낯선 도시의 공원에 놓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나고 자란 고장, 경주의 흙과 바람 속에 놓여 있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구절이 돌판 위에서 바람과 함께 울리고 있다. 떠남과 고독의 정조가, 고향 땅의 숲속에서 다시 유순해진다. 시를 따라 걷는 이에게 이 비(碑)는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닌, 한 시대와 개인의 생을 가로지르는 공명의 지점이 된다.
노래비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는 목양 오세재 선생의 문학비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였던 오세재는 경주의 산수와 심성을 읊은 시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글은 당대의 문풍 속에서도 수수한 경관과 겸허한 마음을 담아내려 했고, 그 정신은 지금도 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풍월은 산에 들고 / 마음은 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목양의 문장은 산책자가 걷는 걸음보다 한 걸음 앞서 흘러간다. 유려한 글과 고요한 마음이, 오늘의 나무숲에서조차 숨결을 남긴다.
두 문인의 문학비는 단지 글을 새긴 돌덩이가 아니다. 황성공원의 나무들 사이에 숨겨진 정신의 표식이다. 자연을 노래한 시와 마음을 기른 문장이 한곳에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은, 이 공원이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사유와 성찰의 공간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걸음을 멈춘 이에게 문장은 다가오고, 마음은 비로소 조용히 가라앉는다. 한 사람의 시선과 언어가 숲에 새겨질 때, 그것은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황성공원의 문학비들은 이렇게, 계절과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침묵의 목소리로 남는다.
도시의 소음 벗어나 시민의 활력이 되고
아이들 웃음·노년의 산책 이어지는 숲
박목월 시비·최시형 동상·충혼탑 등엔
문학과 종교·역사와 사색 새겨져 있어
■충혼탑과 임란 의사 추모공원
숲을 따라 좀 더 깊숙이 들어선다. 나무들 사이로 비석 몇 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공원 중앙에 우뚝 솟은 충혼탑이 보인다. 비바람에 오래 닳은 듯한 표면은 그 자체로 세월을 증언한다.
이 탑은 이름 없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무명의 병사, 알려지지 않은 희생, 묵묵히 스러져간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자리다. 도시의 한복판에 세워진 탑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무엇이 이 땅을 지켜왔는지.
숲의 끝자락, 바람이 멈추는 방향에 이르면 임란 의사 추모공원이 있다. 아늑한 언덕 아래, 지극히 조용한 자리다. 박무의공비, 창의거병기념비, 충모탑은 안압지 길가에서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사람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지만, 묵직한 비문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다. 단지 글이 아니라, 검과 불, 흙과 땀으로 쓰인 생의 기록이다. 꽃 한 송이 없어도, 담백하게 서 있는 비(碑)들은 오히려 더 많은 말을 전한다. 거기엔 체념이 없고, 다만 끝까지 버틴 사람들의 혼이 남아 있다.
추모공원은 황성공원이 단지 녹음의 공간만이 아니라 역사의 한 페이지가 숲의 구석에 남아 있고, 우리는 그 기억의 그늘 아래를 지나고 있음을 각인시켜 주는 셈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
황성공원 서편, 실내체육관과 씨름장 사이 나무 그늘 속, 해월 최시형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1979년, 천도교 경주교구와 용담교구, 그리고 동학을 사랑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정성으로 세워졌다.
경주가 동학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현실 속에, 이 동상은 민중 속 동학의 뿌리를 되살리고자 하는 시대적 응답이었다. 최근에는 시민들과 종교단체의 노력으로 동상 옆에 해월 선생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안내문에는 도올 김용옥이 쓴 ‘해월 최시형에 관한 글’과 ‘동학과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다. 무심히 지나치던 동상의 의미가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황성공원에 세워진 해월의 동상은 단순한 기념 조형물이 아니다. 이는 동학이 추구했던 인간 존엄과 민중 주체의 사상을, 경주라는 고도 한가운데 다시 불러내는 정신의 상징이다. 천년 왕도의 북쪽 가장자리에 조용히 놓인 해월의 동상은, 존재만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고 있는가.”
박목월과 오세재의 시비가 자연과 언어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편, 해월 최시형의 동상은 인간과 삶의 무게를 품는다. 황성공원은 그렇게 문학과 종교, 역사와 사색이 교차하는 경주의 살아 있는 정신 지도 위에 서 있다.
■신라의 터에서 경주 시민의 공원으로
숲을 빠져나오며, 오래된 나무 한그루를 돌아본다. 바람 한 줄기 잎을 흔들고, 그 흔들림은 문득 마음속 어떤 결을 건드린다. 황성공원은 단지 그렇고 그런 도시공원이 아니다. 신라 귀족의 사냥터였고, 화랑들의 훈련장이었으며, 이제는 시민들의 일상이 스며든 공공의 숲으로 거듭났다.
계급과 시대, 목적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은 목적과 형상을 바꿔왔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늘과 바람, 그리고 숲에 깃든 쉼의 본질이었다.
통일신라의 북방 균형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인공의 숲은, 천 년 뒤 경주 시민들의 활력이 되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이 놀이기구 사이를 누비고, 맥문동 꽃밭 사이엔 어머니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또 노년의 고요한 산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숲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숲을 가꾼다.
도시의 소음 속으로 걸어 나오며 자꾸 마음이 거기 남는다. 숲의 그림자가 멀리까지 따라 나와 어깨 위로 길게 드리운다. 황성공원은 나무를 심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묻고 되새기는 장소다. 왕도의 북방을 지키던 인공의 숲에서, 민중의 삶을 품는 공공의 공원으로 이어져 온 길 위에서, 나는 작은 물음을 품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무심히 스쳐 가며, 다만 이름만 기억한 채 그 자리에 깃든 삶들을 외면하고 있는가. 오늘 한 이름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황성이라는 말 아래 겹겹이 쌓인 생의 결들을. 그 결이 가만히 내게 말을 건넨 하루다. 조용히, 그러나 오래 남는 말.
황성공원은 그렇게, 오늘도 하나의 시(詩)가 되어 경주 시민의 마음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