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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그림자 위에 펼쳐진 시간의 겹 황리단길

등록일 2025-06-25 19:18 게재일 2025-06-2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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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행에세이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9> 황리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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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리단길. 황남동과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의 이름을 따 ‘황리단길’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약 10여 년 전이다.

■경주의 또 다른 매력 황리단길

경주라는 오래된 고도(古都) 속에서, 황리단길의 출현은 뜻밖이었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이질적인 시각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황리단길(皇理團길, Hwangridan-gil)은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과 황남동에 걸쳐 있는 좁은 도로이다. 내남사거리에서 시작해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로, 원래 ‘황남동의 경리단길’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된 이름이다. 이 거리에는 1960~70년대의 옛 주택을 개조한 상점과 한옥 구조의 카페, 식당, 사진관, 펜션, 게스트하우스가 다수 들어서 있다. 특별한 건물 양식 없이 모양을 달리한 구조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골목마다 색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매력이다.

황남동과 사정동 일대를 잇는 포석로 구간, 한때는 주민들의 통학길이자 생활 도로였던 좁은 골목이,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발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것도 외국인과 젊은이들의 발길이었다. 그렇다고 오래된 저층 주택과 상가, 한옥의 낡은 기와지붕을 허물 지도 않았다. 마을이 간직한 시간을 존중한 채, 새로운 감각이 덧씌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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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리단길의 젊은이들. 황리단길을 찾는 사람들은 단지 관광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신라 고도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장면과 여행의 멋을 찾으려는 것이다.

■불과 십 년 만에 번화가로

황남동과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의 이름을 따 ‘황리단길’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약 십여 년 전이다. 경리단길처럼 개성 있는 카페와 공방, 소규모 상점이 들어서며 황리단길 골목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고 키워왔다. 옛 동네의 골격 위에 덧입힌 젊은 감각은 도시재생이 아니라 ‘시간의 공존’이었다.

황리단길을 찾는 사람들은 단지 관광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신라 고도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장면과 여행의 멋을 찾으려는 것이다. 한복을 입고 대릉원 돌담 앞에 선 청춘의 얼굴, 경성풍 복장을 하고 셀프 사진관을 찾는 외국인 여행자의 눈빛. 이곳에서의 ‘인생샷’은 단지 기념사진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표정을 한 컷에 담아내는 또 다른 여행 방식이다. 사진은 단지 흔적이 아니라 해석이 되고, 그 해석은 또 다른 미래를 향해 가는 여정이다. 누군가는 상점에서 파는 물건을 고르고, 또 누구는 오래된 기와와 담장의 이끼를 보며 시간의 결을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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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외국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낯선 나라의 골목이 신기한 듯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골목을 살아가는 사람

골목을 살려낸 이들은 마을 주민과 또는 외지에서 들어온 현재의 골목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황리단길을 이끌어가는 상점의 주인들은 단순히 가게를 운영하는 장사치가 아니다. 오래된 상가를 자신이 추구하는 개성에 맞게 고쳐 나갔다. 구조는 살리고 내벽을 수리하여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카페, 신라 유물을 모티프로 디자인한 굿즈를 파는 소품점, 여행자들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조용한 공간을 내어주는 책방. 그들은 지역의 고유한 감성과 외지인의 시선을 균형 있게 조율하는 숨은 디자이너를 자처했다. 누군가는 경주 토박이로, 누군가는 다른 도시에서 이주한 예술가로 거리와 골목을 살아내며 또 다른 경주의 얼굴을 만든다.

황리단길은 신라와 단절된 거리가 아니다. 첨성대에서 대릉원으로, 다시 황리단길로 이어지는 도보 여정은 하나의 선이자 하나의 공간이자 연결된 시간이다. 대릉원 고분의 봉분은 여전히 침묵하지만, 주변을 걷는 이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신라의 시간은 신라에만 정체되어 있지 않고 흐르고 흘러 지금의 황리단길에 이른다.

골목마다 세워진 안내판, 상점 이름 속 ‘황남’, ‘월성’, ‘화랑’, ‘신라’ 같은 단어는 고대가 흘러온 현재의 시간임을 증명해 준다, 굿즈 속에 재해석된 천마총의 문양은 이 골목에 세워진 신라의 기억을 복원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리는 법을 알고 있을 뿐이다.

황리단길을 단순히 유행의 거리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황리단길은 유행의 장소가 아니라 감각이 축적된 공간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한때를 대표하는 유행의 흐름이 아니라, 쌓이고 엉기고 머물며 완성돼 나가는 곳이다. 한때의 유행이 골목 돌담과 건물 외벽을 스치고 지나가더라도, 매일 차를 준비하고, 빵을 굽고, 요리를 하는 손길은 변함없을 것이다.

■황리단길의 표정

낡은 기와지붕 아래 담긴 계절의 빛이 묵묵하다. 이 골목의 매력은 화려함보다 차분함에 있고, 유행의 선단에 서기보다 오래된 감각을 가만히 껴안는 데에 있다. 걸을수록 느껴지는 거리의 표정은 일회성이 아니다. 한 계절의 풍경이 다음 계절을 향해 준비하고 또 다음 해를 준비하는 것으로 일상은 시작된다.

이렇게 감각은 층층이 쌓여 거리를 만든다. 황리단길은 계절마다 표정이 달라지고, 시간마다 향기가 다르다. 봄엔 산수유와 벚꽃과 장미, 여름엔 푸를 숲 아래 땀이 밴 채 대릉원 담장과 커피잔의 얼음 소리, 가을엔 핑크뮬리와 낙엽과 어깨에 내려앉는 바람, 겨울엔 고요한 기와지붕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은 첫눈까지.

이 거리의 아름다움은 장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풍경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풍경이며, 다시 걷고 싶은 장면이다. 신라의 수도가 지금의 젊음을 품어 안고 있다는 것, 그것이 경주 황리단길의 가장 깊은 정서다. 계절마다 표정이 달라지고, 시간마다 향기가 달라지는 건 황리단길 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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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카락, 선글래스, 검은 피부에 환한 웃음의 외국인은 단순한 관광의 한국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낯선 나라를 이해하려 마음을 연다.

걷는다는 건 골목을 읽는 것

대릉원 서쪽 담장을 따라 걷는다. 낮은 돌담 너머 봉분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위로 흰 구름이 무심히 흘러간다. 초록빛 잔디밭 사이로 잔잔한 바람이 지난다. 발끝에 닿는 흙길의 부드러움, 담장 아래 핀 들꽃의 향기,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걷는다는 것은 도시의 시간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골목은 더 이상 지도의 한 줄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로 변해간다.

좁은 길 안쪽으로 접어든다. 햇살이 벽돌 담장에 부딪히고,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찻잔의 시원한 냉기가 맴돈다. 붉은 벽화와 고요한 조명, 작은 의자와 나무 선반, 그 위에 놓인 손바닥 크기의 엽서. 천마총의 문양을 새긴 엽서 한 장을 집어 든다. 신라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이 작은 종이 위에서 겹쳐진다. 마음이 먼저 머무는 풍경이다. 흙, 종이, 시간, 모든 것이 가볍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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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리단길의 한 상점.  

■불편한 것도 새로움이 되는 거리

구름이 밀려오고 바람이 강해진다. 사람들이 서둘러 골목 안으로 몸을 들이고, 한옥 처마 밑으로 모인다. 기와가 빗방울을 받기 시작하고, 붉은 벽돌마다 동그란 물방울이 맺힌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갇혔어도 사람들은 그저 행복해한다.

기와가 빗방울을 받기 시작하고, 붉은 벽돌 바닥에 동그란 물방울이 떨어져 터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웃으며 비를 피하고 또는 비를 기꺼이 맞는다. 이마저도 여행의 또 다른 경험이 되니까.

어느 도시에 서든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 땅의 질감과 정서를 온몸으로 겪는 경험은 단지 날씨에 대한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젖은 길과 흐려진 유리창, 축축하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도시의 감정은 천천히 드러난다. 이 순간이 도시를 걷는 추억이 되고 기억으로 남는다.

황리단길을 걷는 이들은 이런 평범하지 않는 이변의 순간을 통해 거리의 본모습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오래된 벽과 젊은 간판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시간을 잇는 선이 되고, 느릿하게 걷는 걸음은 현재와 과거의 결을 동시에 더듬는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장소는 잊히지 않는다. 황리단길은 그렇게 지금의 계절과 오래전의 시간 사이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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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리단길을 이끌어가는 상점의 주인들은 단순히 가게를 운영하는 장사치가 아니다. 오래된 상가를 자신이 추구하는 개성에 맞게 고쳐 나갔다.

■경주를 걷는 외국인

오늘은 유독 외국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긴 머리카락, 선글라스,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걷는 이들은 낯선 나라의 골목이 신기한 듯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때로는 외국인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한쿡 사람이에요?” 하고 물어오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그들은 아주 해맑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자국의 언어 대신 조심스레 내뱉는 서툰 한국어 몇 마디 속에, 이들이 얼마나 대한민국, 경주라는 도시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엿보게 된다.

이들은 단순한 관광의 한국이 아니라, 낯선 나라의 거리와 마음을 먼저 존중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 조심스러운 태도는 마치 오래전 신라의 문을 두드렸던 사신의 발걸음처럼, 낯섦 속의 예의를 담고 있다. 이방인조차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도시, 이것이 오늘 황리단길의 모습이다.

경주의 골목들을 오래 걸어왔고, 시장의 깊은 안쪽까지 둘러보았지만, 황리단길처럼 젊은 얼굴이 가득한 곳은 보기 드물다. 평일 오전인데도 카페마다 자리가 없고, 셀프사진관 앞에는 줄이 길다. 한복을 차려입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걷고, 혼자 여행 온 듯한 이는 가방을 어깨에 맨 채 유물 엽서를 홀로 만지작거린다. 각자의 여행이 각자의 모습으로 교차하고 있다.

경주는 여전히 유서 깊고 고요한 도시지만, 황리단길 거리만큼은 다르게 숨 쉬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행의 한 장면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단지 예쁜 가게가 아니라, 이 골목을 진심으로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수제도장 가게 안에서 열심히 인장을 새기는 손, 천마총을 닮은 디자인을 진열하는 상점 주인의 시선, 사진관에서 필름을 감는 청년의 몸짓. 이 거리의 젊음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고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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