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14 - 1> 석굴암 (상)
■ 성전을 향하여
석굴암통일대종 전각은 물먹은 나무처럼 묵직하게 젖었다. 사방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운무가 피어 산등선을 기어오른다. 불국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짙은 안개가 혼령처럼 밀려와 몸을 묶고 시야를 가린다. 눅눅한 공기 사이로 사람과 건물이 사라졌다 보이곤 했다. 계단을 오르고 길을 따라 걷는다. 돌계단을 오르던 중 앞서 걷는 소녀를 보았다. 각자 혼자인 우리는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 낯설었지만 낯섦이 마냥 불편하지는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금세 길동무가 된다.
토함산 기슭, 나무 아래 석조유물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정제되지 못한 채 흙바닥에 놓인 석물은 장맛비에 젖어 눅눅한 기운을 한껏 머금었다. 감실벽석, 감실천정석, 받침석, 석상받침대,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들까지, 빗방울은 가만히 표면을 적신다. 푸른 이끼가 낀 단면엔 연꽃무늬 조각과 아치형 구조, 미완의 기둥, 얕게 새겨진 음각의 곡선이 드러나 있다. 표지판엔 쓰인 ‘용도불명’의 글자 앞에 서자 시간의 결이 혼란스러워지는 듯하다. 소녀는 조심스레 석물 사이로 들어가 돌 하나하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를 따라 석조의 결을 오래 들여다본다.
산은 잠잠했다. 소녀도 나도 말이 없었다. 미처 맞물리지 못한 돌들의 옛날을 떠올리는 것처럼.
토함산 기슭 운무에 잠긴 통일대종
석굴암 산길 따라 놓인 석조유물들
유리벽 너머 정좌한 석불의 웅장함
돌기둥의 미세한 문양·솟은 천개석
염불하는 스님 등 성스럽고 아늑해
1915년 일제의 석굴암 보존 공사 후
원형 등 훼손… 파괴에 가까운 ‘보수’
조선의 문화유산, 정복의 상징으로
■유리벽 안의 석불
우리는 묵묵히 발끝을 세우며 젖은 돌계단을 밟는다. 계단 위, 금속판에 새겨진 석굴도 앞에서 둘 다 한참을 들여다본다. 평면도와 종단면에 나누어 새겨진 선은 복잡하면서도 질서가 있다. 석실, 전실, 통로, 본존불, 감실, 궁륭의 구조까지 세밀하게 표시해 놓았다. 소녀는 금속판을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구조의 정밀함에 마음을 뺏긴 듯하다.
석굴암 전각 입구 관람 안내문은 정중하게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유리벽 너머로만 보라’는 당부다. 보존을 위한 거리의 간격, 허락된 틈으로 우리는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른 숨소리도 죽인 채 우리는, 서로 다른 눈으로 하나의 풍경을 응시한다. 누군가의 손으로 다듬어진 석불은 조명 아래 환하게 빛난다. 정좌한 석불은 숨이 막힐 듯 웅장하다. 그 앞에 앉아 염불을 외는 스님은 정중하다. 웅장한 석불과 염불 속에 어떤 경외가 인다. 숙연한 마음이 저절로 따라왔다.
석불의 눈매는 고요하다. 묵언을 수행하듯 입가엔 미묘한 미소가 번지는 듯하다. 눈꺼풀은 반쯤 감긴 듯하고, 시선은 바닥을 향해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잔잔하게 부풀어 있으며, 손끝은 법계를 상징하듯 가지런히 모아졌다. 옷자락은 어떠한가. 바람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매끄러운 주름을 이루었다. 돌의 결을 따라 흘러내린 유연한 곡선과 은은한 품격은, 바라보는 이의 숨을 조용히 멎게 한다. 홀린 것인가. 소녀는 말없이 서 있고, 이국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따라 마음도 흐르는 듯했다.
석실 내부는 낮은 숨결들이 모여 점점 근엄해지고 있다. 본존불을 둘러싼 감실에는 보살상들이 석불을 향해 각자의 위치에서 경배하고 있다. 돔을 따라 새겨진 십일면관음과 사천왕상은 조명이 스칠 때마다 부드럽거나 때로는 거친 입체로 떠오른다. 돌기둥 위의 문양은 살아 있는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결을 드러낸다. 성큼성큼 걸어와 나의 죄를 낱낱이 물을 것 같이.
천장은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솟아오른 천개석이 받치고 있다. 밀폐된 느낌보다 아늑함이 먼저 인다.
석굴암은 지금도 종교와 과학, 조형과 정신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머문다. 침묵이 감싼 석실 안에는 수백, 수천 번의 예경(禮敬)과 무언의 기도가 쌓였을 테다.
■‘보수·복원’이라는 이름
1912년 겨울,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초대 조선총독) 총독이 토함산에 올랐다. 눈 덮인 봉우리 끝에서 마주한 석굴암은 폐허에 가까웠다. 돔을 덮은 봉토는 무너져 내렸고, 감실과 주실 사이에는 균열이 깊게 퍼져 있었다. 처참했다. 조선 병탄을 정당화하려 했던 제국에게, 동양 최고의 석굴사원이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의 훼손이자 상징의 실추였을 것이다. 석굴암은 그해 총독의 명령 아래 ‘보수’라는 명분으로 완전히 해체되기 시작되었다.
1913년 여름, 설계 조사를 마친 총독부는 공사에 착수했다. 본격적인 해체가 시작되자 석굴암의 모든 부재가 완전히 분해되었다. 봉토는 벗겨졌고, 석실의 석재는 순서대로 땅 위에 내려졌다. 원형 그대로 남겨진 본존불과 천장을 꾸민 천개석 둘레를 비계와 작업 인부들이 둘러쌌다. 벽면을 가득 채운 감실의 보살상들은 모조리 떼어 땅으로 내려졌고, 판석들은 길게 늘어서 노출되었다.
해체된 석재 중 파손된 것들은 새로 다듬었다. 마모된 면은 치석했고, 균열 난 것은 덧붙였다. 그러나 떼어낸 감실의 석조들은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전실 조각 배치는 흐트러지고, 원래의 유기적 질서는 재조립 과정에서 무너졌다. 아수라상은 옹벽 안에 갇혀 있었다.
일제의 보수는 파괴에 가까웠다. 전실과 진입 공간엔 시멘트와 자갈을 섞어 옹벽을 쌓았다. 돔 전체에는 1미터가 넘는 두께의 콘크리트가 입혀졌다. 그리고 흙으로 덮고 잔디를 심었다.
1915년 9월 15일, 석굴암 보존 공사 낙성식이 열렸다. 총독부 고위 관리들과 지방 관료, 기자들이 토함산 꼭대기에 모여 성대한 개안 법회를 거행했다.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저들끼리 자축하며. 석굴암 표면은 말끔해지고, 잔디 위에 심은 나무들은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비가 스며들어,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흘렀다. 습기는 균열 사이 사이로 스며들어 곰팡이가 슬고 석태와 청태가 끼었다. 내부가 병들기 시작한 것이다.
■야욕과 훼손
1910년대 석굴암 1차 보수공사 기간 중, 총독부는 본존불 상부 천정석에 ‘日本’ 두 글자를 음각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공사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만행이 아닌가 싶다. 조선총독부의 명시적 지시나 묵인 아래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단지 나라 이름을 새긴 일이 아니었다. 제국 일본이 조선의 문화정신과 종교성 위에 자국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름을 올린 만행이었다. 조선의 역사 유물을 제 것이라 여긴 자들의 야만은 침탈의 증거였고, 정신적 훼손의 절정이었다.
일제는 다 무너져 가는 석굴암을 구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새로 단장된 석굴은 완전 해체와 재조립을 하며 제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틈과 틈을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사용해 메웠다. 어쩌면 그들에게 보수는 위장이었을 것이다. 본질은 탈취된 채, 일본의 제국성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만들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데라우치 총독은 경주 방문 시 ‘不二法門(불이법문)’ 2척 크기의 네 글자를 써주고 석굴 벽에 새기도록 명령했다. 자신의 글씨를 명작이라 칭하며 본토에서 석공까지 불러 새기도록 했다. 한나라의 성스러운 불전 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제국의 수장은, 문화유산을 하나의 낙서판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단순한 오만이 아니라,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몰지각한 행동이었다.
데라우치의 만행은 일본인의 눈에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오쿠다 고운은 석굴암 입구 바위에 새긴 데라우치의 글씨를 두고, ‘문화재를 훼손하는 몰지각한 낙서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또한 ‘天下無雙(천하무쌍)의 名山靈地(명산영지)를 장식하려는 명필’이라는 백작의 의도는 헛되었고, 글씨는 정교하지도 않았으며, 감탄은커녕 조롱을 불렀다. (김진호역, 오쿠다 고운, ‘신라구도 경주지’, 1920, 217쪽.)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불전 위에서조차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치졸한 흔적으로 남았다. 신성한 바위 위에 새긴 네 글자는 제국의 오만을 드러낸 휘호였고, 일본인조차 얼굴을 돌릴 만한 부끄러운 흔적이었다.
어디 데라우치뿐이었을까. 석굴암 관광이 시작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가 앞다투어 석굴암에 이름을 새기려 안달했다. 안상석 위에, 감실 곁에, 신중상 밑에 자신의 이름과 염원을 남겼다. 그들이 남긴 낙서는 신성의 자리에 남긴 치욕이었다.
일제는 석굴암을 다양하게 촬영했다. 그리고 공사 전과 후의 사진을 나란히 붙였다. 무너진 조선의 유산과 단장된 일본의 석굴암을 대놓고 대비시켰다. 사진 속 단장된 석굴암은 식민의 무대였고, 조선은 무능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제국의 위대함을 기념하듯 황족과 장군, 관리들은 석굴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석굴암은 곧 선전물로 가공되었다. 엽서로 만들어 관광객을 상대로 팔았다. 석굴암은 순례지가 아닌 볼거리로 전락했다. 성소가 아니라 전리품이 되었다. 조선의 불전은 상품이 되었고, 침탈의 증거로 진열되었다. 일본제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함부로 의미와 가치가 바뀌고 있었다.
*일제가 신라 문화유산에 집착한 이야기와 석굴암을 경성으로 이송하려 했던 이야기는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