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13 - 1> 경주의 철길 (상)
불국사역은 한옥 지붕을 인 채 웅크리고 있다. 오래된 절집처럼 인기척 끊긴 역사(驛舍) 곳곳엔 적요만 가득하다. 역사 마당에 들어서니 나무 아래, 목줄을 맨 개가 낮잠에 깊이 빠져 있다. 인기척을 느꼈을까. 이따금 꼬리만 흔들 뿐 눈을 뜨거나 짖지는 않는다.
역사 곳곳에 ‘출입금지’ 문구가 색이 바랜 채 붙어 있다. 역사 문은 굳게 닫혔고, 자물쇠는 ‘폐역’답게 오래된 ‘정지’를 각인시킨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나는 밖에 발목이 잡힌 채 너머를 생각한다.
역사 뒤 플랫폼으로 향하는 곳에도 철문이 가로막는다. 단절을 알려주듯 풀만 무성히 자란다. 선로를 덮은 잡초는 저들 세상인 양 빼곡히 자라 어깨를 맞대고 있다. 바람이 불면 사라진 열차의 기척에 응답이라도 하듯 한 방향으로 몸을 흔든다.
플랫폼을 따라 줄지어 선 가이즈까 향나무가 먼저 눈에 든다. 불국사역 영업 개시를 기념해 5~10년 된 나무를 심었다는 명찰을 매달아 두었다. 백 년 넘은 나무들은 폐역을 그대로 지키고 섰다. 한때 역에 울려 퍼지던 기적 소리와 사람들의 북적이던 모습을 회상하며, 나무는 여름을 견고하게 버티며 늙어가는 듯하다.
불국사역은 1918년 영업을 시작해, 1936년 지금의 역사로 단장되었다. 오랜 세월 경주 남쪽을 오가는 통로였던 불국사역은 2021년 12월 28일, 중앙선 이설과 함께 마지막 열차를 보내며 문을 닫았다. 한 세기를 넘긴 시간이었다.
언젠가 나는 뜯겨 나가는 경주 철길 위를 따라 걸었던 적이 있다. 도시를 가르고 숲을 가르며 달려 나간 철로 위에 100년의 시간이 더께더께 쌓여있었다. 경주를 지나는 선로는 단순히 기차가 지나던 길이 아니었다. 유적을 딛고 놓인 철로의 시작은 처음부터 강제였고, 위협이었다.
중앙선 이설과 함께 한 세기 넘긴 시간을 마무리한 불국사역, 이젠 적막함만
대한제국의 의지서 시작된 한반도 철도… 일제 침략으로 수탈 역사로 점철
선로는 수탈 수단에 그치지 않고 유적 훼손 … 식민 권력 상징적 행위 분석도
■한반도 철도 시작은 대한제국
한반도의 철도는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경인선(1899), 경부선(1905), 경의선(1906) 모두 대한제국 시기(1897~1910)에 개통되었다. 초기 부설권은 미국과 프랑스 자본에 맡겨졌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고종을 찾아 미국 공사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가 경복궁으로 들어섰다. 그해 봄, 모스는 두 개의 권리를 손에 쥐었다. 하나는 한양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길, 하나는 평안 북녘의 금맥이었다.
조선이 외국에 내준 첫 특허였다. 고종은 서양 열강과의 협상을 통해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일본은 외교력과 군사적 압박으로 부설권을 강탈해 갔다. 대한제국은 1904년 ‘서북철도국’을 설립해 독자적 철도망 구축에 나섰으나, 러일전쟁을 틈탄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자체 철도계획과 건설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더라도 근대화의 길은 이어졌을 것이다. 철도는 침략의 선물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그려낸 근대의 선로였다.
조선 땅 곳곳에 낯선 쇳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철로는 시작부터 조선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 철로를 깔기 전부터, 일제는 먼저 조선을 위협하여 침묵하게 만들었다. 1904년 제정된 ‘대한시설강령’은 철도와 통신망의 장악을 식민 지배의 핵심으로 규정했다. 거기엔 ‘철도 사업은 한국을 경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어 발표된 ‘군용 전선 및 군용 철도 보호에 관한 군령’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군용철도에 손해를 끼치면 사형, 가해자를 숨겨도 사형, 대신 고발하면 20원을 포상한다’는 조항이었다. ‘사형’, 누구도 선로에 대해 거스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법령 아래에, 철길 공사는 선포였고, 명령이었다.
일제는 1909년 지금의 단둥인 안동과 봉천(선양) 등 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1911년 압록강 철교를 완성한 뒤, 이를 경의선과 연결해 압록강을 건너 대륙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 흐름의 중간에 경주의 선로가 놓였다. 한반도 남쪽인 부산에서 북쪽 신의주까지 곧장 치고 갈 수 있는 철길이 완성된 것이다. ‘경동선’, 침략의 쇠줄이 한반도 땅 위로 뻗어갈 때 경주도 그 길 위에 얹힌 셈이었다.
■경주의 철길
경주 철길은 1918년, 동해남부선의 일부로 개통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동해안 지역에 매장된 철, 구리, 석탄 등 지하자원을 효율적으로 반출하기 위해 동해남부선을 기획했다. 경주~포항 구간은 자원 수송의 핵심 통로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직할의 철도국을 통해 경주 중심부를 관통하는 철도를 설계했다. 일본인 기술자의 설계와 일본 군 감독하에 조선인 강제 동원된 노동자의 손으로 철길을 밀어붙였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노동자들은 저임금 혹은 무임금에 가까운 조건으로 강제로 끌려왔다. 철도는 경주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월성동·사정동·노서동 일대를 절단했다.
문제는 선로가 단지 수탈을 위한 운송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학계에서는 동해남부선의 경주 구간이 의도적으로 사천왕사 터 중심부를 관통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라는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민족의 정기를 훼손하고 정신적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식민 권력의 상징적 행위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사천왕사 터를 비롯해 능지탑 터, 옥산사 터, 대릉원 주변 고분군 등 신라 유적이 선로 공사로 훼손되었다. 당시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굴착과 침목 설치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과 절터가 파괴되었다.
더욱이 철로는 경주의 고대 도심을 두 개로 나누며, 도시 공간을 단절시키는 물리적 경계가 되었다. 철길 서편은 대부분 주거지와 농촌지역으로 남았고, 동편은 문화유산 중심의 관광지로 재편되었다. 교량이 없던 시기에는 철도를 건너는 것조차 쉽지 않아 일상의 이동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어디 이뿐이랴. 일제는 철로를 통해 불국사·석굴암 등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포항항을 거쳐 일본 본토로 반출했다. 불경, 불상, 금속공예품, 건축 부재 등이 포함되었으며, 대부분은 공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채 밀반출되었다. 일본의 박물관이나 사찰에 지금도 남아 있는 몇몇 유물들이 증명하고 있다.
■경주역, 불국사역 개통, ‘기차’를 처음 본 경주 사람들
1918년 11월 1일, 쇠붙이가 땅을 울렸다. 경주 사람들은 들녘을 지나 역 앞으로 몰려들었다. 포항과 불국사로 이어지는 경동선 개통일이었다. 기차는 짐승도, 마차도 아닌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화통에서 연기를 뿜어내자, 바퀴는 쇠를 긁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굴렀고, 증기엔진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지를 울렸다.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는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고된 노역으로 쌓인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자신들이 깔았던 선로 위로 저토록 위압적인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정에 젖었다. 처음 보는 문물 앞에 신기함과 놀람과 두려움이 뒤엉켰을 것이다.
기차 위에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감격과 경외가 아닌, 어딘지 모를 위협과 복종의 기운이 먼저 주눅 들게 했을 것이다.
쇳소리는 경주의 너른 고요를 깨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말 없는 정적 속에서 기차가 뿌리고 간 연기 냄새를 맡으며 처음으로, 자신들의 마을이 외부의 어떤 거대한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철길은 단순한 교통의 선이 아닌, 도시의 심장부를 가르는 긴 흉터처럼 긋고 지나갔다.
■철로 개설과 문화유산
경주에 철길을 내는 건, 유적 파손을 전제하는 일이었다. 경주는 천년 신라의 도읍이었고, 땅속 깊이 무수한 유구가 잠들어 있었다. 도로를 내고 건물을 세울 때도, 굴착의 깊이가 역사에 닿는 일이 빈번했다. 철도처럼 직선화와 효율을 중시하는 인프라가 도입되었을 때, 지하에 숨겨진 문화유산이 손상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 경주는 그런 피해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도시였다.
동궁과 월지 동북쪽, 발굴지는 한때 철도가 지나던 곳이었다. 동해남부선이기도 했던 이 구간에서, 신라시대 수세식 화장실 구조가 확인된 바 있다. 이 유구는 2000년대 이후 확인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 당시 이미 훼손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주의 철로는 유독 기이하게 굽이치며 놓였다. 일제는 철길을 동궁과 월지의 ‘앞’이 아닌 ‘뒤’로 굽혀 놓으며 시각적 유적 훼손을 피하려 했겠지만, 잠든 유구까지 고려하지는 못했다. 경주는 철도가 어느 쪽으로 지나가든, 흔들리고 깎이고 파였다.
직선을 생명처럼 여기는 기찻길이 경주에서만큼은 예외를 드러낸다. 동궁과 월지 앞에서 급격히 휘어진 선로는 불국사역으로 향하며 두 번 더 꺾인다. 한 번은 사천왕사 터와 신문왕릉 사이에서, 다시 한번은 성덕왕릉 부근에서다. 이 꺾임은 단순한 기술적 곡선으로 보기 어렵다. 아마도 국도와 나란히 지나며, 최소한의 물리적 파괴를 피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본다.
일제는 철도 부설 과정에서 때로 유적을 피했고, 때로는 관통했다. 사천왕사 터 중심을 가로지른 선로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선택도 있었고, 동궁과 월지처럼 두 번이나 급격한 방향 전환을 감수하며 피해 간 구간도 있었다. 일제가 유산을 전적으로 아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전면적으로 파괴하려 했다고도 단정할 수 없는 대목이다.
*‘천년 고도(故都) 경주의 근대화와 철길’ 이야기는 (하)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