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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개설이 이끈 천년 고도 경주의 근대화 이면엔…

등록일 2025-08-06 18:56 게재일 2025-08-0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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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13 - 1> 경주의 철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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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광장 너머로 붉은 벽돌 건물의 옛 경주역이 보인다. 1918년 준공된 역사 건물은 지금 ‘경주문화관’으로 쓰이며, 시민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근대의 길, 신작로

경주의 근대는 길 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작로(新作路), 말 그대로 새로 만든 길이다. 1909년, 대구에서 경주를 잇는 길이 처음 놓였다.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서악과 서천교, 봉황대로를 지나 도심으로 닿는, 지금의 태종로다.

1912년엔, 경주읍성이 철거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경주를 방문한 총독 데라우치의 차량이 남문을 통과하기 어렵다 하여, 남문인 징례문(徵禮門)과 함께 성벽을 함께 철거했다 한다. 조선의 체면이 단지 통행 불편의 이유로 허물어진 것이다. 같은 해 불국사까지 신작로가 새로 깔렸다.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해 경주로 들어왔다.

경부선 기차가 대구역에 도착하면, 관광객은 오츠카 자동차회사의 버스를 탔다. 1920년대부터는 경주역 앞에서 오카모토 자동차회사의 차량이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향하는 수학여행이 가능해진 건 신작로 덕분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앞서 확충된 교통망 위로 경주의 근대가 달리고 있었다.

 

1918년 11월 경주~불국사 협궤구간 개통
현재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역 들어서
1936년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교차점

인성동동 이전, 영남동해안 거점역할 맡아 


일제의 통제·침탈 도구된 철도·신작로
신라고분·마을들 가로지르고 유적 훼손
첨성대는 증기기관차 진동·매연에 노출


2021년 12월 역사속으로 사라진 경주역
문화공간 ‘경주 문화관 1918’로 재탄생

 

■쇳길, 조선을 누르다

1918년, 동해남부선과 경동선의 선로가 경주를 가로질렀다. 철로는 대구에서 경주를 지나 불국사까지 닿았다. 마을이 둘로 갈라졌다. 신라의 고분과 유적 사이를 굽어 돌긴 했지만, 유적지를 완전히 비켜 가지는 못했다. 선로가 놓였다는 건, 누군가의 땅이 잘려 나갔고, 누군가의 삶이 쫓겨났고, 누군가의 노동이 있었다는 뜻이다.

철로 개설엔 땅과 노동력, 자갈과 흙 등 많은 자원이 필요했다. 일본은 먼저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1898년 체결된 ‘경부철도합동조약’에는 기가 막힌 조항이 들어 있었다. 선로와 창고, 공작물에 필요한 토지를 조선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빌린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차관(借款)’을 제공했고, 조선은 그 빚을 등에 진 채 스스로 백성의 땅을 빼앗아 넘겨주어야 했다. 겉은 조선의 이름이었으나, 속은 일본의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강탈이었다.

평양에선 한성판윤 박의병이 토지를 평당 7전으로 일괄 매입하라 명령했다. 백성들은 반발했다. 일본 헌병이 진압에 나섰고, 지방 관리들은 기회라 여긴 듯 사기와 횡령을 일삼았다. 거간꾼들이 백성의 눈앞에 흙먼지를 흩뿌렸다. 경의선은 조선 최초로 민간의 항거가 집단적으로 터진 철도였다. 교하군에서는 수천 명의 주민이 몰려들어 강제노동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병력을 동원해 포위했다.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무임금, 저임금은 물론 중노동에 시달렸다. 욕설과 곤봉, 발길질은 허다하고, 보란 듯이 총부리를 겨눴다. 철로는 계속 계속 놓였다. 조선의 땅에 조선의 노동력으로.

 

■쇳길의 기억

1918년 11월 1일, 경주~불국사 간 협궤철도 구간이 개통되며 경주는 관광도시로서 첫 선로를 갖추었다. 철도는 대구에서 시작해 영천을 거쳐 경주 시내를 가로질러 불국사까지 이어졌다. 당시 경주역은 지금의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 선로는 현재의 태종로를 따라 팔우정을 지나 불국사 방향으로 이어졌다.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철길은 일제의 경주 관광개발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도시의 거리 위를 협궤열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고, 철로 위엔 관광객의 시선과 일본 제국의 의도가 함께 달렸다.

1935년부터 공사가 진행되면서 선로는 개량되었다. 이듬해인 1936년 경주역은 시내 서편의 성동동 일대로 이전했다. 새로 이전한 경주역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현 동해선)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경부선에서 대구로 진입한 관광객은 중앙선을 타고 경주에 닿았고, 이후 포항이나 울산·부산으로 연결되는 철도망을 이용했다. 경주역은 한때 영남 동해안권 철도교통의 중간 거점이자 환승역으로 기능했다. 이 시기를 거쳐 경주는 철도의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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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산재마을. 1910년대 개설된 초창기 신작로는 첨성대와 불과 5미터 남짓한 거리까지 근접해 있었다. 이로 인해 첨성대는 증기기관차의 진동과 매연에 노출되었다. /경주문화원 제공

 

■경주를 가로지른 쇳길

경동선 부설에 대한 경주의 명확한 기록은 거의 없다. 하지만 경주 사람들이 평화롭게 동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의 고분을 지나 마을과 논밭을 가르며 들어온 철도는 지형을 틀고, 일상의 동선을 뒤엎었을 것이다. 유적의 파괴, 삶의 단절, 사라진 집들과 옮겨진 무덤 등, 그 자리에선 경주 사람들의 절망이 울렸을 것이다.

철로는 산업의 길이 아니었다. 근대화의 선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철도는 일제의 통제와 침탈의 도구였고, 조선을 수탈하는 병참의 길이었다. 조선은 철도망을 통해 일본 본토로 연결되었고, 조선의 곡식과 광물 등 많은 자원이 실려 나갔다.

경주의 철길은 유적의 숨결마저 갈라놓았다. 1918년, 동해남부선(현 동해선)과 경동선(폐지)이 경주를 통과하며 불국사역까지 뻗었다. 신라 고분군과 마을 사이를 무자비하게 가로질렀다. 사천왕사 터 일대는 철도공사로 일부 훼손되었다. 동궁과 월지도 본래 궁궐 후원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철도와 도로망의 개설로 배후 공간과 단절되면서 고립된 형태로 남게 되었다. 1910년대 개설된 초창기 신작로는 첨성대와 불과 5미터 남짓한 거리까지 근접해 있었다. 그로 인해 첨성대는 증기기관차의 진동과 매연에 노출되었다. 문화유산 보존의 관점에서는 큰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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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경주역은 시내 서편의 성동동 일대로 이전했다. 새로 이전한 경주역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현 동해선)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경주문화원 제공 

1926년 서봉총 발굴이 이루어졌다.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諸岡秀生)는 서봉총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건설업자를 끌어들였다. 발굴 과정에서 퍼낸 흙과 자갈은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를 매립하는데 쓰였다. 이는 ‘유적 보호’라는 명분이 ‘현대화’라는 실익에 밀려났던 당시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21년, 경주 읍성 남문인 징례문과 남쪽 성벽이 헐린 일이었다. 읍성의 석재는 경주 시내 곳곳의 도로·관공서 건축에 사용되었다.

경주 읍성 중심의 행정 체제도 이때 완전히 해체되었다. 1902년 경주 우편국, 1908년 경찰서와 법원이 차례로 들어서며, 조선시대의 동헌(府衙)과 객사(東京館) 건물은 반복적인 개축과 철거, 행정기능의 변화 속에 원형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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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역 모습.

1937년, 김유신묘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철도 선로 부설 계획이 있자, 김유신의 49대 후손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국보급 유적의 정기를 훼손할 뿐 아니라, 김해 김씨 삼백만 후손의 명예를 짓밟는 행위라는 항변이었다. 최소 364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선로를 조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총독부는 “현지 지형상 선로 변경은 불가하며, 문화의 진전에 순응해달라”라고 답변했다. 이 ‘순응’이라는 단어 속에는 일방적 결정 통보만 있을 뿐, 협의와 고려는 없었다.

경주 사람들에게 신작로와 철로는 단지 근대화, 산업화의 의미만 존재했던 게 아니었다. 어른들은 조상의 머리 위로 쇳덩이가 달리니 조상이 누울 자리가 없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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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역 운행 방향.

 

■다시 경주

폐역이 된 경주역 담장 밖에 섰다. 더 이상 기차는 오지 않고, 사람의 기척도 닿지 않는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지켜온 역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플랫폼에 울려 퍼지던 휘슬 소리는 멈췄지만, 역사의 잔향은 아직 바람에 머무는 듯하다. 오랜 시간 이별과 만남, 희망과 절망이 켜켜이 스며든 불국사역은 조용히 폐허의 기억을 더듬는다.

경주는 일제가 박아 넣은 철로를 과감히 걷어냈다. 침탈의 선로 위에 놓였던 근대의 궤적은 철거되고, 잃었던 도시의 형상을 되살리려 노력 중이다. 철길은 외곽으로 옮겨졌고, 도심은 본래의 숨결을 되찾는 중이다. 발굴과 복원을 거듭하며, 경주는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폐역이 된 불국사역은 낡은 역명판 아래 풀만 그림자를 무성히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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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관 1918 내부 전시장 벽면에 전시된 작품. 여성 서예가 전성진의 개인전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담은 족자, 액자 형식의 서예 작품들이 걸려 있다.

 

도심 속 경주역도 2021년 12월 28일, 역사의 기능을 멈추었다. 구 경주역은 현재 ‘경주문화관 1918’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낡은 역사의 자리에 새로운 문화가 깃들고 있다.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 한 여성 서예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닫힌 창구 대신 펼쳐진 화선지 위로 흐르던 필획은, 멈춘 시간 위에 얹힌 또 하나의 기록이었다. 구 경주역은 이제 기차 대신 사람과 예술을 싣고, 조용한 문화의 열차가 이 도시의 기억 속을 유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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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관 1918 정문 앞에 화환이 세워져 있다. 여성 서예가 전성진의 개인전 개막을 알리는 화환들이 입구 양쪽에 놓여 있어 전시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경주의 철도는 멈춤이 아니라 이제 속도의 상징이 되었다. 2010년 개통된 KTX 경부고속철도의 중간 정차역인 신경주역은 중앙선 복선전철, 동해선 전철, 경부고속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과거 경주의 중심을 가르던 기차는 이제 외동읍 건천리 들판을 가로질러 더 멀리, 더 빠르게 질주한다.

도심에서 멀어진 열차는 더 이상 풍경을 가르지 않는다. 그러나 멈춘 자리엔 여전히 사람들이 서 있다. 닫힌 승강장 아래, 수많은 작별과 재회의 순간이 겹쳐 흐른다. 경주의 철길은 멈추지 않았다. 내일을 향해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손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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