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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숲에서 만나는 쉼

등록일 2025-09-03 18:27 게재일 2025-09-0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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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행에세이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16> 천년의숲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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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에 동그란 부레옥잠이 가득 떠 있고, 양옆으로는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선 풍경이 깊은 숲 속 통로처럼 펼쳐진다. 물과 나무가 맞닿은 이 정적인 공간은 시간이 머무는 듯한 고요를 품고 있다.

■경북 제1호 지방정원

사람을 쉬게 하는 건 그늘이다. 그늘을 내리는 건 나무다. 수많은 여름 길 위에서, 여름 땡볕 아래서 알게 되었다. 답사는 단지 보는 일이 아니다. 걷고, 멈추고, 그 안에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그 일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곳에는 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흐르고, 고요가 깃든 숲이 있었다. 천년의 숲 정원은 역시 그런 장소다. 몸이 먼저 쉬고, 마음이 따라 멈추는 곳.

천년의 숲 정원은 동남산 자락, 메타세쿼이아 숲 사이로 이어진 정원이다. 이름부터 남다르지 않은가. ‘경상북도 지방정원 천년의 숲 정원’. 2022년 6월, 경북 제1호 지방정원이 되었고, 전국에서 여섯 번째로 지정된 대형 숲 정원이다. 행정도시 한편에 마련된 인공 정원이 아닌, 오래된 숲을 따라 조성된 살아 있는 공간이다. 숲의 바람은 깊고 부드럽다. 천년의 숲 정원은 단지 나무만 드리운 장소가 아니다. 사계절을 품은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지는 사이, 숲은 계절을 전한다.

 

경북의 제1호 지방정원이자 전국 여섯 번째 대형 숲 정원
동남산 자락 32.8ha 규모… 9개 주제로 다채롭게 펼쳐져
계절을 품은 다양한 식물들이 꽃 피우고 지며 사계절 전해
바람에 실린 물소리와 아이들 웃음… 선계에 온 듯한 기분

■종합안내도로 먼저 읽는 숲

정원 입구에 설치된 종합안내도를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숲에 각각의 특색을 갖춘 작은 정원들이 마련되어 있다. 각각의 이름은 곧 정원의 성격이 되고, 성격을 읽다 보면 곧 숲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나무 아래 있으면 시간도 함께 눕는다.

천년의 숲 정원은 32.8ha 규모로, 사계절정원과 꽃보라정원, 미르정원 등 9개의 주제 정원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정원은 단순히 나무와 꽃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풍경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안내도에는 각각의 길목에 숲의 성격과 정원의 이름이 그려져 있다. 물이 흐르는 곳엔 생태연못이 있고, 숲이 깊어지는 곳엔 무궁화정원과 전통정원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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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모자를 쓴 유치원 아이들이 숲길 위 나무 그늘을 따라 줄지어 걷는다. 숲해설사와 동행하며 자연 속에서 배우는 숲속 체험학습의 한 장면이다.

■누구나 풍경이 되는 외나무다리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종이 팸플릿을 들고 천천히 걷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길은 세상의 둔탁한 길과 숲 사이를 잇는다. 입구를 지나 정원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 아치형 돌다리가 보인다. 돌다리 너머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다. 흠잡을 데 없이 쭉 뻗은 길은 시원함마저 선사한다.

작은 개울 위에 다소곳이 놓인 돌다리는 흙길과 숲 사이를 잇는 첫 번째 통로다. 바닥은 물기 없이 말랐어도 짙은 나무 그늘은 큰 위로가 된다. 무심코 건너려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트인다. 숲의 결이 단숨에 드러난다.

돌다리 아래 길게 뻗은 개울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물길은 곧고 맑다. 개울 양옆으로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들은 흐르지 않는다. 대신 하늘을 찌를 듯 자라며 시간을 쌓는다. 나무 사이사이로 햇살이 내리고, 바람은 길게 불어간다. 숲과 숲이 마주 보는 개울 어디쯤 외나무다리 하나가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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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메타세쿼이아 숲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과 나무다리는 자연이 만든 풍경화처럼 정적이고 깊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고요히 앉고, 서고, 걷고, 머무르며 한 장의 사진이 되어간다.

개울을 중심으로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것처럼. 어느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곧고 빼곡하다. 그러나 하나의 나무는 개울을 가로지르며 이쪽과 저쪽, 두 숲을 잇는다. 서 있는 나무들이 하늘과 대화한다면, 누운 나무는 땅과 물 그리고 사람을 품는다. 자신을 밟고 누구든 건너게 한다. 외나무다리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단절된 숲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개울, 나무, 외나무다리가 서로 맞물려 만든 풍경은 현실의 결을 벗어난다. 순간, 발밑의 흙도 하늘도 모두 아지랑이에 잠긴 듯 울렁거린다. 초록빛이 겹겹이 눈앞을 감싸고, 낮과 밤, 땅과 허공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몽한 감각 속, 풍경은 시각이 아닌 감각의 결로 스며든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젖어드는 몽환의 숲 말이다. 초록은 단지 색이 아닌 숨결처럼 피어오르며 현실의 감각은 서서히 멀어진다.

숲길을 걷고 있지만, 허공을 걷는 느낌처럼 가볍다. 어디선가 초록의 요정이 따라오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비현실의 기운이 일렁이고, 나무 하나가 하품하며 문득 걸어 나와 말을 걸 것 같다. 물소리는 주문처럼 흐르고, 바람은 또 다른 속 사귐처럼 들린다. 눈을 감고 뜨는 사이, 어딘가 묘하고 낯선 세계로 이어지는 문이 열릴 것 같다. 숲은 나를 부드럽게 혼몽의 가장자리로 이끈다.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외나무다리 위에 선 사람과 물 위에 비친 사람의 실루엣은 바람 따라 흐트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림자는 풍경 속 또 하나의 선이 되고, 움직임 없는 울림으로 번진다. 나는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셔터 소리조차 정적을 깨뜨릴까 조심스럽다.

바라만 보아도 머리끝까지 환하게 밝아지고 맑아진다. 숲은 그늘이 아니라 빛이다. 나무들이 햇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햇살을 이끄는 거다.

■마음 끌리는 대로 걷는 여러 개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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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 무궁화가 흐드러지게 핀 길목은 한여름의 정원을 걷는 듯 화사한 풍경을 자아낸다.

무궁화 길은 길게 이어진 절정의 무대다. 흰색, 분홍빛, 연보라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란히 나란히 나아간다. 벌들이 왕왕대며 꽃 사이를 분주히 옮겨 다닌다. 작은 날갯짓이 떨림처럼 느껴지고, 그 진동이 공기를 따라 퍼져나간다. 벌들의 왕왕거림은 흡사 어떤 언어처럼 들린다. 무궁화는 피어 가만가만하고, 벌은 피어 있는 시간의 중심을 장악한다.

꽃보라정원에는 자줏빛 에키네시아가 촘촘히 피어 있다. 중심이 짙고 가장자리가 연한 꽃잎들은 불꽃처럼 퍼지고, 정원의 숨결을 물들인다. 나비 한 마리가 꽃 위에 내려앉는다. 이 정원은 향과 빛, 그리고 고요의 흐름이 겹쳐진 꿈같은 공간이다.

사계절정원은 계절을 담은 시간의 병풍 같다. 봄의 잔잔한 화사함과 여름의 생동이 맞닿아 꿈틀댄다. 마치 계절끼리 바통을 주고받듯 색을 물려준다. 꽃들의 배열은 의도되지 않은 질서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한 걸음마다 계절이 바뀌고, 두 걸음마다 향이 바뀐다. 계절을 건너는 숲속의 작은 환상이 펼쳐지듯 아름답다.

미르정원은 작은 언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곡선은 마치 우주의 축선처럼 부드럽고 정확하다. 물길이 중심을 따라 흐르고, 바람은 둥글게 돌아 나간다. 발아래 그림자마저 곡선을 따라 흘러간다. 미르정원은 중심이 아니라 흐름에서 완성된다. 걸으면 걸을수록 안쪽으로 들어가고, 그 끝은 다시 출발점이 된다.

암석원에는 거칠고 단단한 에너지가 솟구친다. 물결처럼 배치된 암석에서 자연의 오래된 기도문이 읽힌다. 돌 사이사이로 자라는 식물들이 바위의 숨을 이어간다. 무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의 식물 정원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지고, 생명은 느리게 이어진다.

수변정원은 물을 품은 세계다. 정원 둘레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물풀과 수생식물이 서로 얽힌다. 바람은 물 위에서 한층 더 가볍게 흘러간다. 물소리는 말보다 깊고, 리듬보다 자유롭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부레옥잠은 마치 시간을 잊은 것처럼 고요하다.

왕의 정원은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수목과 포석, 그리고 조용히 선 돌 하나까지도 품위가 있다. 이곳의 침묵은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깊은 통찰처럼 다가온다. 지나가는 바람조차 자세를 낮추는 듯, 정원은 스스로의 무게로 자리를 지킨다.

천년의 미소원은 가벼운 입꼬리처럼 휘어진 오솔길을 따라 펼쳐진다. 꽃과 풀, 나무가 서로의 거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하다. 이름 덕분일까. 모든 것이 웃고 있는 듯하다. 풍경이 조용히 인사하고, 나무가 작은 농담을 건네는 듯한 느낌. 발길이 부드러워지는 정원이다.

5산 3물길은 천년의 숲 정원의 골격이다. 다섯 개의 숲 언덕과 세 개의 물길이 교차하며 숲의 숨결과 언어와 품격을 결정한다. 각각의 산은 거대한 힘차게 솟아 있고, 물은 그 사이를 잇는 실처럼 흘러간다. 직접 걸어야만 이해되는 지도 같다.

■시간과 그늘의 여운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연둣빛 옷과 모자를 쓴 작은 존재들이 나무 사이를 종종거리며 걷는다. ‘아···.’ 숲 어디에서부터 따라온 요정 같다. 바람 끝에 실린 물소리와 나뭇잎의 떨림, 아이들의 웃음이 겹쳐져 현실의 가장자리처럼 느껴진다. 빛은 공기 중에 머물고, 모든 것이 조금 떠 있는 듯한, 묘한 선계의 문턱에 서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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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하트 조형물로 이루어진 ‘LOVE YOU’ 벤치가 숲길 초입에 세워져 있어, 연인과 가족들의 포토존으로 사랑받는다. 초록 잔디와 나무숲이 배경이 되어 붉은 사랑의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숲은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건네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쉼 하나를 내어, 나를 조용히 불러 세운다. 나무 아래 흘러간 시간이 그늘이 되고, 그늘이 다시 나아갈 용기가 된다. 걷고, 바라보고, 멈춘 모든 순간이 어느새 내 안의 풍경이 된다.

천년의 숲은 단지 꽃과 나무를 품은 정원이 아니다. 이 숲에는 사람이 있고, 쉼이 있고, 오래 기억될 여운이 있다. 발걸음을 떼어 돌아 나와서도 한참 거기 남은 듯한, 그런 여운으로 숲은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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