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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홀로 사색의 뿌리를 내린 집 독락당

■자계천을 따라 흐르는 정신 햇살이 아침을 채운다. 기와가 반짝이고, 소슬한 바람이 담장을 넘는다. 자계천을 감싼 산그늘이 물러가고, 이른 아침 찬란한 빛이 골짜기마다 스며든다. 옥산서원 기개 높은 역락문과 담장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서원의 위엄은 잠시 미뤄두고 곧장 계곡으로 내려선다. 바위가 넓게 펼쳐지고 물은 돌에 부딪히며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너른 바위 전체를 ‘세심대(洗心臺)’라 부른다. 바위는 수천 번의 물결을 맞아낸 듯 반들거리지만, 여전히 층층을 이루며 기개를 자랑한다. 물은 흘러내리며 작은 폭포를 만들고, 그 아래엔 둥그런 용소가 된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세속의 소음을 밀어낸 듯 일정한 소리가 시끄럽지 않다. 백색소음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회재 이언적은 벼슬을 내려놓고 자계골로 들어와 일대를 다니며 뜻을 품은 장소마다 이름을 붙였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한 선비의 생각이 머문 자리이기도 하다. 흐르는 물에 마음을 헹구듯 이언적은 바위 앞에서, 흐르는 물 앞에서 생각을 다듬고 뜻을 새겼을 것이다. 세상의 시끄러움을 지우고, 내면의 고요 속에서 독락(獨樂) 하였을 것이다. ■홀로 즐기는 독락(獨樂)의 길 이른 시각,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발을 얹는다. 나무 그림자는 아직 길지 않다. 고요한 숲길에 몸을 들이며 독락당을 향한다. 계곡을 이웃하여 크고 작은 밭이 펼쳐지고, 밭을 일구는 촌로들이 하나둘 나와 흙을 뒤집는다. 손끝으로 흙을 문지르고 씨앗을 뿌리고, 괭이질이 한창이다. 이른 봄의 기척이 땅 위로 번진다. 군데군데 마른 잎이 깔린 길, 수런거림은 없고 혼자 걷는 객의 발소리만 또렷하다. 길은 계곡을 따라 가늘게 이어진다. 홀로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그만이다. ■계곡 너머 자연에 은거한 집 옥산서원에서 자계천을 따라 약 1km 오르면, 물길 너머 기와를 인 집이 보인다. 자연에 조용히 스민 집이다. 계곡을 향해 공간을 틔워 놓은 집, 바람과 물소리가 지천으로 드나드는 풍경은 굳이 붓을 들지 않아도 이미 수묵의 정취를 머금는다. 자계천을 가운데 두고 바라만 보아도 독락에 이른 듯하다. 경주 동쪽, 옥산서원의 안쪽 자옥산 아래 독락당이 있다. 물 흐르고 숲이 드리운 자계골 한켠에 앉힌 집은, 조선 중기 대학자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한 공간이다. 1530년, 중종 치세 혼란 속에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세속의 소란을 뒤로하고 이곳에서 삶을 다듬었다. 그리고 7년 뒤, 다시 조정에 불려 나가기까지 골짜기에서 고요한 시간을 쌓았다. 회재의 낙향은 도피가 아니었다. 유교적 이상을 품은 그에게 현실 정치는 번번이 좌절을 안겼다. 무너지는 정의, 흔들리는 조정 속에서 끝내 마음 둘 자리를 잃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묵향을 피우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사유를 다졌다. 독락당은 그렇게 한 사람의 상처와 성찰, 그리고 사상의 근거지가 되었다. 침묵을 선택한 삶이었지만, 그 침묵은 조선 성리학의 깊은 물줄기로 이어졌다. 자계천을 건너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행랑채가 먼저 마당을 막아선다.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처럼 조심스러워진다. 외부를 환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대로 돌아 나갈까 싶다가도 다시 조심스레 발을 들인다. 두 번째 좁은 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내부로 들어설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더 좁아지지만 사색은 더 깊어진다. 마치 문을 통과하며 스스로 마음을 비워야만 본심을 만날 수 있는 집 같다. 독락당은 땅 위에 낮게 눕듯 지어져 있다. 기단은 낮고 처마는 겸손하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듯, 겹겹이, 첩첩이 모여있다. 맞배와 팔작이 뒤엉키듯 얹힌 지붕이며, 권위와 격식을 따르기보다는 사람의 삶에 맞추려 한 집의 형식은, 집을 지은 이의 마음이 모인 구조인 듯하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의 학문과 철학이 집약된 공간이자, 인간적 고뇌와 성찰이 담긴 곳이다. 그러니 선생의 삶이자 숨결인 공간인 셈이다. 집 구조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이 집이 자연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리되었다고는 하나 닫히지 않았고, 닫히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다. 독락당은 외부를 밀어내고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호흡으로 세상과 숨을 맞춘다. ■계정과 양진암 사랑채 안마당 건너 작은 정자가 있다. ‘계정(溪亭)’은 이 집의 진심이 머무는 곳이다. 정자인 듯 방인 듯, 속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계곡을 한껏 들어 앉힌 작은 세계다. 퇴계 이황이 써준 ‘양진암(養眞庵)’은 인근 정혜사 주지 스님이 절집처럼 묵었다는 사랑채다. 한석봉 썼다는 ‘계정’ 현판은 바람이 드나드는 마루의 이름이 되었다. 마루 끝에 서서 내다보는 바위와 물, 허공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은 나를 잠시 인간이 아닌 바람 한 줄로 허공 위에 띄워놓는다. 개울 건너에서 바라보면, 독락당은 계곡 위에 잠시 걸터앉은 풍경 같다. 세속에서 물러나 삶을 가다듬고자 했던 한 선비의 정신이, 지금도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고 있음이다. 풍경에 젖어 넋을 놓을 무렵, 단정한 음성이 들린다. “이른 시각인데, 혼자 오셨습니까.” 돌아보니 한 어른이 미소를 지으며 서 계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른은 잠시 눈빛을 맞추고는 “이렇게 이른 시각에 오는 분은 드뭅니다. 독락당을 보여주기엔 참 귀하고 고마운 걸음이네요.” 하신다. 어른은 회재 이언적의 이야기며, 이 골짜기로 들어와 세속의 시끄러움을 등지고 살았던 이야기, 그가 물소리와 바람결에서 사유를 키웠다는 말을 차분히 건넨다. 마루에 앉아 개울을 바라보면 회재가 왜 이곳을 택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며, 스스로를 낮추는 사랑채의 품격과 계정에 얹힌 퇴계의 마음도 전한다. 마치 먼 길을 돌아와 스승의 집을 찾은 제자에게 건네는 깊은 마음의 인사 같다. 계정은 집의 끝, 마루의 끝, 사유의 끝에 놓여 있다. 바위와 물, 나무와 기둥이 어우러진 작은 공간은 거창한 의미를 걸치지 않아도 온전히 완성된 세계다.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사계절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집은 스스로를 열어두었다. 바람이 찾아와 벽을 쓰다듬고, 물소리가 문턱을 넘는다. 혼자 있어도 외로움이 아닌 고독으로, 기다림이 아닌 반김으로 충만해진다. 계정은 방이면서도 정자이고, 몸을 누이는 안락의 처소이면서도 마음을 바로 세우고 다잡는 교육의 자리다. 외부에서 보면 언뜻 허공에 뜬 듯, 바위 위에 잠시 얹힌 허허로운 마음 같으나 직접 집에 들어보면 생각은 곧 달라진다. ■어서각과 사당 집 안 깊숙한 곳엔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임금이 내린 어필을 보관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권위가 아니라 경외의 상징이며, 회재의 학문이 시대를 건넜다는 증표다. 어서각 옆으로는 사당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제향의 공간은 제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격식을 따르되, 자랑하지 않는 선비의 태도 그대로다. 마당 한켠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긴 세월 동안 이 집을 지켜온 살아 있는 문장처럼, 줄기마다 고요한 기품이 서려 있다. 자줏빛 목단도 우아하게 피어 있다. 절정을 막 넘어선 꽃은 한껏 넓게 퍼진 꽃잎을 바람에 내리는 중이다. 깊고 짙은 빛은 처마 끝의 부드러운 곡선과 맞닿으며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뭣하나 한순간도 경박하지 않고, 지나치지도 않다. 북쪽 담장 아래엔 좁은 쪽문이 있다. 이 문은 오직 정혜사 주지 스님만이 오갔다. 스님과 회재는 오랜 시간 사상적 동반자였다. 유학과 불교, 학문과 수행, 글과 깨달음이 두 사람 사이에서 교차했다. 회재는 때로 정혜사에 기거하며 글을 썼고, 스님은 이 집에 들어 고요히 차를 마셨다. 계정의 마루도, 어서각의 문살도, 주엽나무의 그림자도 회재의 마음과 말씀과 걸음을 기억한다. 이 집은 그저 오래된 고택이 아니다. 정신의 집이다. 사상의 길잡이였던 한 인간이 자기 삶을 오롯이 내려놓은 자리다. 그래서 독락당은 여전히 말이 없고, 그래서 더 많은 말을 건넨다. ‘군자가 홀로 즐긴다 함은 속세의 즐거움을 좇지 않고, 학문과 도를 닦으며 그 자체로 기쁨을 얻는 것이다.’ 회재의 말씀이 스친다. 그는 진정한 즐거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완성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깨우친 어른이었다.

2025-05-21

용장골에서 시작된 판타지 신화

■ 자연을 품은 탑, 침묵을 품은 시간 숨을 고르며 숲의 끝자락을 막 빠져나오려는 찰나, 시야를 가르며 새하얀 탑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이다. 진달래의 분홍빛과 나무숲의 초록빛에 취해갈 무렵, 능선 끝에 우뚝 선 탑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다. 석탑은 용장골에서 가장 높은 벼랑 끝, 아찔한 암반을 기단 삼아 곧게 서 있다. 바람과 구름이 먼저 다녀가는 곳. 탑은 누군가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일부인 듯 하다. 기단을 따로 놓지 않고 자연 암반 위에 그대로 올렸으니, 산이 탑이고 탑이 산을 이루는 셈이다. 어쩌면 이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경전이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탑의 몸체에는 어떤 문자나 장식도 없다. 밋밋한 여백, 그 자체로 완결된 탑이다. 기단도, 몸체도, 옥개석도 어디 하나 군더더기 없다. 비록 도굴과 파손은 겪었으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때 복원되었지만, 탑은 사람의 손이 아닌 바람과 햇살이 다듬은 듯 자연스럽다. 석탑의 뒤편으로는 고위산과 용장골, 은적골의 능선이 물결치듯 흘러간다. 앞으로는 경주의 드넓은 들판과 형산강이 펼쳐진다. 탁 트인 시야 속에서 모든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곳에 서면,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듯하다. 탑은 천 년 전의 바람과 오늘의 햇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을 다 품는다. 탑은 오랫동안 보아 왔을 것이다. 들판이 농지로, 마을로, 도시로 변해가는 과정을. 전쟁과 평화, 황폐와 풍요를 말하지 않지만, 탑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 와 절을 하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간다. 탑 앞에 선다는 것은 단지 돌 앞에 서는 일이 아니다. 무언의 정신과 믿음, 역사의 침묵,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의 흔적 앞에 서는 일이다. 보물 제186호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벌판·형산강 바라보이는 벼랑 끝 문자·장식 하나 없이 그 자체가 완결판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삼단 좌대 위에 앉은 머리 없는 부처상 보는 이의 마음으로 부처의 얼굴 완성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병풍처럼 펼쳐진 화강암에 새긴 불상 1924년 조선총독부 복원 기록 남겨져 ■석조여래좌상의 불두는 어디에 조금 내려오니 공중에 떠 있는 부처의 등이 보인다. 보물 제187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다. 3단 좌대 위에 웅장하게 앉아 있는 부처는 머리가 없다. 그러나 불두의 부재는 공허함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서쪽을 향한 부처는 가슴으로 바람을 안는다. 가볍게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은 조각의 정밀함을 넘어 바람의 결을 담아낸다. 옷고름은 마치 방금 묶은 듯 단정하며, 매무새가 살아 있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이라도 풀어질 듯 가볍다. 그러나 그 가벼움 속에는 수백 년의 무게가 깃들어 있다. ‘삼국유사’는 이 부처에 관한 전설을 전한다. 경덕왕 시절, 용장사의 주지였던 대현이 매일 탑을 돌며 염불하자, 석불의 얼굴도 함께 따라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여래좌상을 미륵불로 보기도 한다. 석불의 목덜미에는 내리친 듯한 흔적이 있다. 불두의 상실이 우연이 아님을 말해준다. 어떤 이는 일제강점기의 만행으로, 또 어떤 이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여파로 보기도 한다. 시대는 늘 신을 두려워했고, 동시에 제거하려 했다. 머리가 없다는 것은 곧 표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은 단지 눈, 코, 입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보는 이의 마음이 부처의 얼굴을 완성한다. 내가 슬플 때 부처도 슬퍼 보이고, 내가 웃을 때 부처도 웃는다. 어쩌면 얼굴은 잃었지만 더 많은 얼굴을 품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부처는 누구보다 많은 사람과 마주해온 존재일 것이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마애불 손으로 그린 불심 석불 뒤, 병풍처럼 펼쳐진 암벽에는 보물 제913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여래의 형상은 암벽에서 살짝 도드라져 ‘앉아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느슨한 경계 속에서도 풍겨 나오는 기운은 오히려 단단하고 고고하다. 옷자락엔 잔잔한 주름이 물결치고, 가사의 선은 여울처럼 흘러내린다. 화강암의 자연스러운 무늬와 가사의 결이 겹치며, 언뜻 호랑이 무늬처럼 보인다. 금방 잠에서 깬 듯한 두 뺨과 통통한 입술, 긴 귀와 오뚝한 코는 아이 얼굴처럼 해맑다. 마애여래좌상의 손은 마주 보는 나의 손 높이에 있다. 어쩌면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닐까. 나도 모르게 부처의 손에 내 손을 올려본다. 따뜻하다. 부처의 손은 이미 수많은 손을 받아들였고, 그 온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이름 모를 기도자들, 이 길을 지나며 눈물 흘리는 누군가의 마음이 손 위에 얹혔을 것이다. 마애여래불이 새겨진 바위 한켠에는 명문이 남아 있다. ‘三層石塔 大正 十一年(삼층석탑 대정 11년), 三層佛塔 大正 十二年(삼층불탑 대정 12년), 小石毾 殘部 大正 十三年 春 再建(소석탑잔부 대정 13년 춘 재건)’. 삼층석탑은 대정 11년(1922), 삼층불탑은 대정 12년(1923) 도굴로 무너진 상태였지만, 부재를 모아 대정 13년(1924) 봄에 다시 쌓았다는 내용이다. 식민의 그늘 아래 조선총독부가 남긴 복원 기록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약탈과 파괴의 시대, 그들의 손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는 것 자체가 역설로 읽힌다. ■바람으로 기억되는 용장사터 용장사터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람이 고요하게 골짜기를 훑고 지나간다. 사찰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기도하는 땅’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다. 깊은 골짜기에 법등을 밝히던 용장사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까마득한 빈터만 남아 객을 부르고 있을까. 눈을 감으면 법당의 기둥이 우뚝 서고, 그 앞에 부처가 놓여 있던 풍경이 되살아난다. 석불좌상과 마애여래, 그리고 삼층석탑은 능선을 따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용장사는 더 이상 절이 아니라, 기억이고 기원이다. 석불과 석탑은 신라의 믿음을 보여주는 유물이자, 오늘날 나의 믿음이 머무는 상징이다. 사람은 떠났지만 부처는 남았고, 지금도 바람을 타고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신앙이든 사유든, 이 땅은 여전히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것은 말 없는 위로이며, 손대지 않은 정의다. 문득 새가 되고 싶다. 날개를 퍼덕여 금오봉과 고위봉을 훨훨 날아다니고, 능선을 따라 부처들의 얼굴을 한 번씩 어루만지고 싶다. 머리 없는 석불의 목에 잠시 앉아 사라진 얼굴이 되어보고, 마애여래좌상의 손바닥에 앉아 한 송이 꽃이 되어보고 싶다. 삼층석탑의 지붕 위에 내려앉아 천 년을 바라보다, 끝내는 탑이 되어 세월을 지키고 싶다. 다 사라지지 않아도 좋다. 다 남지 않아도 괜찮다. 없는 것은 가고, 남은 것은 그저 남는 대로 머물렀으면 한다. 꾸밈없이, 스스로의 자리에서. ■금오신화, 숨어서 쓴 이야기 용장사, ‘갑술삼월일용장사(甲戌三月日 茸長寺)’라 새겨진 기와 한 조각이 발굴되며, 오래도록 잊혔던 절의 이름이 다시 불렸다. 깊은 골짜기에 불을 밝히고 마음을 모으던 사찰이다. 신라의 유가종 종조 대현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라 전하나,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홀로 남은 석축과 탑의 부재들이, 사람 없는 절의 시간을 묵묵히 감싸고 있다. 조선 초, 세상이 무너졌을 때 김시습은 책을 불살랐다.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성통곡하며 벼슬길을 끊고 속세와 등졌다. 유유자적 떠돌던 시습은 마침내 이 골짜기에 이르러 은둔한다. 용장골, 시습은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현실과 전설, 인간과 신령이 겹쳐 흐르는 이야기다. 문장은 골짜기 바위처럼 무심했고, 계곡물처럼 끊임없었다. 세조가 그를 데려가려 했으나, 그는 몸을 감췄다. 김시습은 골짜기마다 미친 척 희희낙락하다가, 결국엔 산기슭 꽃 한 송이, 바람 한 점에도 슬퍼하며 북향화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서성였을 벼랑에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그를 대신한다. 상상해 본다. 바위 벼랑 아래 작은 암자 하나, 그 속에 몸을 누인 김시습. 바람이 문을 두드리면 “뉘시오? 그저 시나 한 수 읊고 가시오” 하고 웃을 것 같은 키 작은 탁발승. 용장사는 무너졌지만, 김시습의 발자취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요요하고 적적한 풍경 속에 남은 것은 오히려 더 깊다. 사라진 절보다도, 살았던 이의 숨결이 더 생생하다. 진짜 절은 바위와 물과 바람 사이가 아니었을까. ■시(詩)가 흐르는 용장계곡 용장계곡에는 물소리와 함께 과거가 흐른다. 설잠교를 건너 바위에 걸터 앉는다. 햇볕은 사위어가고, 저무는 빛이 계곡물에 부서진다. 흐르는 물소리 위로 매월당의 시가 흐른다. 시간은 이 골짜기에서만큼은 직선이 아니다. 굽이치며 지난 것을 끌어안고, 다가오는 것을 품는다. 용장골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 마음속에 깃들고, 나는 그 속에서 또 한 줄의 시를 읊는다.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감회 김시습 용장산 골짜기가 아주 고요해서 사람의 왕래를 볼 수 없구나 가랑비가 시냇가 대나무를 일깨우고 저녁 바람이 들판의 매화를 감싸는구나 집안의 작은 창도 잠에 빠져 있고 마른 가래나무도 여전히 회색을 띠고 있네 초가 처마 쪽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마당 꽃밭에 꽃이 지고 또, 피는구나 설잠교를 건너니 길이 순하고 연하다. 물소리, 바람 소리 벗하며 한가로이 걷기에 더없이 좋다. 물가에도 진달래가 한창이다. 정신이 어질하다. 과거의 그림자를 따라 걷던 나의 발걸음이, 드디어 현재라는 빛 속으로 스며든다.

2025-05-14

신라 왕조 영산 ‘남산’, 발끝마다 오랜 사유가 몸을 적신다

■영산, 응축된 세계 경주 남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신라인들이 품었던 한 시대의 삶이 응축된 무대다. 신라의 궁궐 월성 남녘에 우뚝 솟은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축과도 같다. 두 봉우리 사이에는 깊게 패인 마흔 개의 골짜기가 흐른다. 신라인들은 산 곳곳에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함께 새겨 넣었다. 그래서인지 남산을 걷다 보면 발끝마다 스미는 오래된 사유가 몸을 적시고, 산 위를 흐르는 바람조차 천 년 전 숨결처럼 스며든다. 남산은 곧 신라 왕조의 영산이자, 불교적 우주의 상징이었다. 곳곳에 신라인의 손길로 빚어진 석불과 석탑들이 무심한 듯 고요히 서 있다. 불상과 탑의 얼굴과 몸짓에서 당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과 종교적 열망이 읽힌다. 신라인들은 돌 위에 신의 세계를 새겨 넣었고, 그 돌들은 다시금 영원을 갈망한 신라인의 마음을 오늘의 우리에게 전한다. 남산은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전 인류가 공통으로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수해야 할 세계적 가치를 지닌 까닭이다. 자연과 인간의 정신이 서로 겹치고 어우러진, 보편적 가치를 담은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남산은 어느 골짜기로 오르든 신라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골짜기는 용장골이다. 길이만도 3㎞에 이른다. 신라시대 용장사(茸長寺)가 있었기 때문에 ‘용장골’이라 불리고, 아직도 탑이 있어 ‘탑상골’로도 불린다. 발길 닿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다. 이 골짜기만 해도 용장사 외에 스무 곳이 넘는 절터가 산재해 있다. 불교가 융성하던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서라벌을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이라 표현했다. 절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일렬로 늘어서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불교가 국가의 정신을 이루던 시대였다. ■삼릉, 진달래 아래 깨어나는 왕들의 능 사월 초순, 그간 다른 골짜기로 금오봉에 올랐으나 오늘은 삼릉솔숲 길로 들어선다. 이른 아침, 솔향과 꽃 향이 객을 맞는다. 굽이진 산자락마다 무리 지어 핀 진달래가 소박한 인사를 건넨다. 하늘 높이 곧게 뻗은 소나무는 연분홍 진달래와 조화를 이루며,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균형을 보여준다. 솔숲 사이로 봄볕이 쏟아져 내린다. 빛은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솔잎과 진달래 꽃잎 위에 내려앉아 더욱 눈부신 환영을 그려낸다. 빛의 무늬에는 천 년 전 신라인들의 이상과 꿈이 얼비친다. 솔숲 길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풍경은 세 왕의 무덤이 자아내는 능선의 유연한 곡선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과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능이다. 봉우리처럼 완만하게 흘러내린 곡선은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완전함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삼릉은 신라의 오래된 흔적이면서도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잃지 않는다. 능의 곡선은 살아 있는 자의 눈길을 머물게 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린다. 바람이 불면 마치 왕들의 혼백이 잠시 깨어나 솔숲을 거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삼릉은 죽음의 장소이기보다는 삶을 노래하는 찬가처럼 천 년을 이어왔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한참 머물다 왕들의 혼백을 만나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고 싶지만 갈 길이 높고 멀다. 왕들의 능을 뒤로하고, 남산 더 깊숙이 몸을 들인다. ■중생을 기다리는 부처 불두 없는 석조여래좌상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커다란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바위의 윗부분을 쪼아내어 조각한 보살상은 남산 유적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정적을 품고 있다. 가슴에 손을 모으고 정병을 든 관음은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헉헉대며 오르는 중생들을 향해 머금은 미소는 위로도 계시도 아닌, 존재 자체로 전하는 평온이다. 그 앞에 서면 문득 깨닫는다. 이곳은 신라의 산이지만,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산이라는 것을. 세상은 누구에게나 위태롭다. 그러나 그 위태로움을 견디며 한 발 한 발 오르는 일이 곧 삶이라는걸, 바위 위의 부처는 아무 말 없이 가르치고 있다. 침묵 속에서 전하는 가르침은 요란하지 않아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길을 오른다. 길은 가파르고 숨은 거칠다. 땅만 보며 걷는다. 위를 올려다볼 겨를조차 없다. 등에는 땀이 배고, 다리는 뻐근하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남산의 길은, 그 자체로 수행이다. ■침묵의 기도, 선각육존불 앞에서 얼마쯤 더 올랐을까. 바위가 겹겹이 둘린 산기슭 아래, 기도하는 두 여승이 보인다. 바위 면에 새겨진 불상 앞에 합장한 여승은 미동조차 없다. 햇살마저 숨을 죽인 듯한 이 장면은, 봄날 남산에서 마주한 가장 신성한 풍경이다. 나도 흉내 내듯 손을 모은다. 순간, 시간은 멈추고 공간은 열린다. 거룩함 속에서 나 또한 작아지고 맑아진다. 두 바위 면에 새겨진 선각육존불과 마주한다. 불상들은 통일신라 시대의 숨결이 남은 선각 마애불로, 음각의 얇은 선으로만 조각되었다. 조각이라기보다 그림에 가깝다. 거친 바위 위에 그어낸 선들이 부처의 얼굴과 손, 그리고 자비를 품은 보살의 형상을 이룬다. 칼끝으로 긋듯 새긴 선 하나하나가 천 년의 사유처럼 느껴진다. 육존불은 좌우의 바위 면에 나뉘어 있다. 한쪽에는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이 앉아 있고, 다른 한쪽에도 마찬가지로 삼존상이 자리한다. 모두 부드러운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정갈한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배치는 절도의 미학을 보여준다. 수천 번 비바람을 맞았을 암벽 위에 아직도 선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바람에 깎이고 빛에 씻겨도 사라지지 않은 선 하나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것. 그것은 단지 조형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기도와 사유가 돌 속에 새겨진 증거다. ■석조여래좌상, 시간을 견딘 자태 여승들이 앞서 걷는다. 단정하고 고요한 발길이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길을 따라 조용히 돌계단을 밟고 오르는 모습이 마치 오래된 의식처럼 느껴진다. 급함이 없다. 조용하고 단단한 걸음이 시간의 결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나도 말없이 뒤를 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드니 누군가 내려다본다. 남산삼릉계석조여래좌상이다. 삼릉길에서 마주했던 부처들과는 다르다. 몸의 윤곽이 온전하고, 둥근 광배와 단단한 대좌까지 완전한 형상을 갖추고 있다. 긴 세월을 버텨낸 돌의 표면에는 조금의 균열도 없이 고요한 품격이 스며 있다. 견딘 시간만큼 더욱 단단해진 부처의 자태 앞에, 나도 모르게 손을 모은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부처가 왜 놓였는지 알 것 같다. 탑도 절도 사라졌지만, 석불은 홀로 남아 바람과 계절과 사람을 품는다. 상처 없이 남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견뎌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의 미소는 더욱 단단하고 따뜻하다. ““어디서 오셨어요? 보살님” 대구에서 왔다고 하자, 이른 시간인데 부지런도 하다며 웃는다. 말씨는 단정하고 온화하고, 목소리는 바람처럼 부드럽다. 인사는 바람처럼 시작되어 바람처럼 스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설처럼, 우리는 억겁의 전생을 돌아 이렇게 스치고 흩어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승들은 여기서 내려간다고 했고, 나는 용장사터까지 간다고 하니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길을 달리했다. 짧은 인사에 모든 작별의 정중함이 담겨 있었다. ■금오봉, 신화의 경계에 서다 상선암을 지나며, 돌마다 스며든 부처의 흔적을 하나씩 지나쳐 왔다. 바위에 기대어 선 불상은 바람을 맞고, 앉은 보살은 진달래 꽃잎을 품은 채 산허리를 내려다본다. 부처들을 만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금오봉이다. 바람이 분다. 맑고 높다. 서라벌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오래전 왕들이 다스렸던 땅. 그 역사의 기운이 바람에 묻어온다. 햇살은 찬란하고, 꽃잎은 빛난다. 진달래는 금오봉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언 땅을 뚫고 피어난 꽃은 연약한 듯하지만 불굴의 생을 품고 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은 삶의 순간들이고, 그 길을 걷는 나 또한 어느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길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다. 한 시대의 정신을 따라 걷는 일이며, 꽃잎처럼 흩어진 기억과 만나는 여정이다. 여기서부터는 능선을 걸어 조금씩 하행에 이른다. 곧 용장사터에 이를 것이다. 발밑에 깔린 진달래 꽃길을 밟으며 문득 김시습이 떠오른다. 시습은 금오산실에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세속과 이상,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썼다. 지금 이 길 또한 현실과 전설이 겹쳐 흐른다. 나는 어느 봄의 산길 위에서, 신라의 혼백들과 눈을 맞추며 오래된 신화 속을 걷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산과 꽃과 이야기가 뒤섞인 이 길 위에서, 나는 걷는 이가 아닌 ‘살아 있는 한편의 서사’가 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 작가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과 용장사 이야기는 <하> 편에 이어집니다.

2025-05-07

호기심 많고 기품과 절도 넘치는 동경이… 본능은 사냥개

■살갑지만 본능은 사냥개의 후예 동경이를 마주한 순간이 선명하다. 녀석들과 처음 만난 곳은 경주개 동경이보존협회 개방형 마당 한가운데다. 공격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혹여 달려들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짧은 꼬리·선한 눈망울·예민한 후각 순하지만 단단한 내면의 전통 사냥개 잘 짖지않고 차분해 ‘바보 개’라 불려 ‘천연기념물’ 경주시 대표 토종개로 신라시대 역사 함께한 충직한 성품 현재 약 530마리 지역 곳곳서 보호 희고 까만 털이 햇살에 반짝인다. 나를 보자 녀석들이 일제히 달려온다. 낯을 가릴 거라는 말,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댈 거라는 상상은 무의미하다. 녀석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알아보듯 주저 없이 달려왔고, ‘물지 않을 거야’라는 무언의 눈빛을 건넨다. 믿음이 생긴 걸까. 나도 모르게 몸을 낮추어 손을 먼저 내민다. 그런데 동경이는 내게 코를 먼저 들이민다. 씰룩씰룩 냄새를 맡더니 잔뜩 긴장한 내게 혀를 쑤욱 내민다. 순식간에 내 얼굴을 핥은 거다. 미끄덩하고 축축한 녀석의 침이 얼굴에 묻었다. ‘앗!’ 그러나 따뜻하다. 살아있는 날것의 따뜻함이다. 녀석은 사진을 찍으려는 나를 방해할 만큼 격한 반가움을 표현한다. 짧디짧은 꼬리를 힘껏 흔들며 말이다. 꼬리가 까딱까딱 움직일 때마다 환한 감정 하나가 함께 전해지는 듯하다. 동경이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잘 짖지도 않는다. 과거에는 이런 성격 때문에 ‘바보 개’라 불리기도 했다. 낯선 사람에게 경계하다가도 금세 마음을 여니, 순하다는 이유로 얕잡아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동경이만의 품성이자 장점이다. 무던하고 착한 성정은 수천 년 이어진 특별한 유산이다. 하지만 동경이의 태생은 어디까지나 사냥개다. 순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내는 제법 단단하다. 짧은 꼬리와 선한 눈망울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뛰어난 후각과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사냥개의 피가 흐른다. 사냥감으로 인식되면 순한 태도는 단박에 돌변한다. 새끼 때는 겁 없이 성견에게 덤비다 다치기도 한다. 개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배를 뒤집는 항복의 제스처’를 잘 하지 않는다. 우열을 가리는 싸움은 치열하지만, 반면 서열이 정해지면 더는 다투지 않는 깔끔한 성격이기도 하다. 동경이는 단지 ‘순한 개’, ‘희귀한 개’만이 아니다. 유순함과 야성, 귀여움과 기품을 함께 품은 매력적인 개다. 내가 만난 동경이는 온순함 그 자체다. 손을 내밀자 머리를 비비고, 엉덩이를 들이밀며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이윽고 나의 무릎에 턱을 얹고는 조용히 눈을 감기도 하고, 때론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라도 듣겠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주인을 따라 죽은 동경이 조선 성종 때 의로운 동경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신 이승소(李承召)의 문집 ‘삼탄집(三灘集)’에는 ‘의구(義狗)’ 동경이에 관한 전설이 실려 있다. 지금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험한 고갯마루 길가에는 쌍분(雙墳)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주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곁을 지키다 생을 다한 개의 무덤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경주, 곧 동경의 한 아전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개와 함께 한양으로 길을 나섰다. 고개를 넘고 산을 지나는 고된 여정 끝에, 주인은 연풍 고개에서 병을 얻어 숨졌다. 곁을 따르던 개는 주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홀로 경주 집으로 달려갔다. 개다 밤낮으로 짖자 이상함을 느낀 아들이 개를 따라나섰고, 연풍 고개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도 주인 곁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경주로 모시지 못하고, 개와 함께 고갯마루에 나란히 묻었다. 그 두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의구총(義狗塚)’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경주의 신화전설집성’에는 “동경견(東京犬)은 꼬리가 없는 개로, 됭경견, 됭견, 댕견이라 불리는 경주 토종개다. 이 개는 충직하고 용맹하며 영리하기로 유명하다.”라고 기록했다. 누군가는 개의 ‘충성’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학습과 훈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에서 생긴 교감과 본능 말이다. ■기품 있는 개, 절도 있는 애교 기품 있는 개다. 꼬리가 거의 없는 녀석들이지만, 그 짧은 꼬리뼈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한없이 사랑스럽다. 경주 개 동경이는 2012년 11월 6일,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의 시견(市犬)이기도 하다. 현재 경주시 전역에서 약 530마리 정도가 혈통을 유지하며 관리되고 있다. 생후 60일이 지나면 절차에 따라 일반인에게도 분양이 가능하다. 저들끼리만 있을 때는 뛰고 구르며 그야말로 천진난만 자체다. 마치 통제성을 잃어버린 천방지축 어린아이들 같다. 운동장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가도, 이따금 가만히 멈춰 서로의 냄새를 맡거나 서로를 탐닉한다. 그러다가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저들만의 세계를 뒤로하고 와르르 달려온다. 이럴 땐 속이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경이는 본디 그런 개다. 사양관리팀의 정하원 팀장과 이영솔 주임은 말하자면 이 개들의 가족이자 벗이다. 정 팀장과 이주임이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난만하게 놀던 동경이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나 좀 봐줘요’하며 몸을 낮추며 꼬리를 흔든다. 혹은 날뛰면, 혹은 얼굴을 들이대며 갖은 애교를 부린다. 자신을 보듬어주는 사람에게 한껏 잘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이 다 보인다. 하지만 녀석들의 애교가 마냥 무질서하고 방정맞은 건 아니다. “이리와.” “악수” “앉아.” 기다려.” “엎드려.” “안돼!” 이영솔 주임의 짧은 명령에 놀랍도록 절도 있는 자세를 취한다. 몸은 꼿꼿이 하고, 행동은 절제하며, 사람과 눈빛을 맞추는 모습에서 묘한 질서와 위엄마저 느껴진다. 행정팀 이정원 팀장과 정승락 주임, 이혜인 주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관리인을 넘어 동경이들을 위한 세심한 벗이자 부모인 셈이다. ■짧은 꼬리 너머, 살아 있는 신라의 혼 누군가는 개에게서 ‘품격’을 논한다는 걸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경이는 다르다. 귀한 대접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 개체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기품과 절도가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조심스럽게 한다. 스스로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한 몸짓, 그런 개를 아끼며 길들이는 동경이보존회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더욱 품격을 더한다. 한때 동경이에게 행해진 시대의 상처는 크다. 그러나 동경이의 등줄기에는 천 년을 넘어서는 시간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동경이는 살아남은 신라의 영혼이며, 수많은 생명이 감내해 낸 민족의 고통과 희망이 깃든 존재의 살아있음이다. 신라를 살고 경주로 건너온 개, 왕가의 삶과 민가의 생을 본능으로 기억하는 개, 죽어서도 토우가 되어 주인을 따라간 충직한 벗. 동경이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문화다. 이 땅의 숨결과 그 땅을 거닐며 살아온 민족의 이야기를 천진난만한 눈빛 속에서 마주한다. 녀석들의 눈빛에는 수백 년의 지혜와 고통이, 그리고 민족의 부활을 향한 끊임없는 의지가 담겨 있다. 어떤 개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주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다, 동경이는. *취재에 협조해 주신 경주개 동경이보존협회 직원들께 감사드린다.

2025-04-30

천년기념물 경주개 동경이를 아시나요?

요란한 짖음이 일제히 터져 나온다. 차에서 내리기도 전인데, 수백 마리 개들이 낯선 방문을 먼저 감지했다. 성난 파도처럼 일대가 술렁인다. 벨을 누르자 약속된 방문을 기다린 듯,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린다. ‘천연기념물 보존’이라는 말에 걸맞게 경비가 철저하다. 하지만 문이 열렸다고 해서 함부로 걸어갈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사방에 깔려 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제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현실이다. 수백 개의 눈, 그리고 날 선 경계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갇혀 있다고는 하나 이 날뛰는 짖음 앞에 감히 어떤 용기가 작동할까. 조선후기 문헌에 ‘장자구’ ‘녹미구’ 언급 현종 ‘동경잡기’에 ‘東京狗’ 명칭 첫 등장 단순한 애완견 넘어 문화적 아이콘으로 신라 토우에도 동물 중 가장 많이 등장 이름 ‘동경이’엔 경주의 역사 흔적 뚜렷 “일본 신사 수호신 고마이누와 닮았다” 일제 강점기 도살로 개체수 급격히 감소 온갖 고난 딛고 신라 1000년 전통 계승 여간한 담력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앞발을 일으켜 세워 두 발로 서서 철망을 박차듯 밀어대는 녀석, 목줄이 팽팽해질 만큼 허공을 향해 몸을 튕기는 녀석,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송곳니까지 내보이는 녀석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짖음, 극대화된 공포는 결국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그러다 한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살아 있는 눈빛이 반들거린다. 녀석의 검은 눈동자 속에 잔뜩 겁에 질린 내가 서 있다. 이 모진 위협 속에서도 나는 진심을 전하느라 최선을 다한다. 녀석이 먼저 내 눈빛을 읽은 걸까. 으르렁대면서도 짜리몽땅한 꼬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짖음은 경계가 아니라, 요란한 반김으로 읽힌다. 마음을 읽는 데 내가 녀석보다 한발 늦은 걸까. 드디어 녀석의 선한 기운이 읽힌다. 경계하고 짖고, 낯선 이를 의심하는 성질은 녀석들의 본능이다. 마치 “누구십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보존회 전체가 개들의 마을 같다. 보존회 건물 안은 녀석들만의 치열한 공동체로 느껴진다. 낯선 인기척과 얼굴, 냄새와 음성, 신고식도 없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나를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 짖고, 두드리고, 날뛰며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내게 확실히 각인시킨 셈이다. ■역사에 기록된 토종개 ‘동경이(東京狗)’의 존재는 고문헌 곳곳에 드러난다.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의자왕 20년)이다. “사비성 서쪽에서 들사슴처럼 생긴 개가 사비강 둑 위에서 궁궐을 향해 짖자, 궁 안의 개들도 따라 짖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백제가 멸망했다.” 여기서 ‘들사슴 모양의 개’는 짧은 꼬리와 민첩한 체형을 가진 신라의 토종개를 지칭한 것이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동경이에 관한 묘사가 있다. 그는 “경주의 개는 꼬리가 없으며, 노루 새끼를 닮아 장자구(獐子狗)라 하고, 사슴 꼬리를 닮아 녹미구(鹿尾狗)라고 한다” 고 기록했다. 동경이의 생김새를 언급한 것이다. ‘동경구(東京狗)’, 즉 ‘경주의 개’라는 명칭이 명확히 등장하는 기록은 1669년, 조선 현종 10년에 경주 부윤 민주면이 편찬한 『동경잡기(東京雜記)』다. 그는 경주 여인들이 북쪽 기운이 허한 것을 보완하고자 머리를 뒤로 틀어 올렸다는 ‘북계(北髻)’ 풍습을 기록하며, 짧은 꼬리를 가진 개 역시 “북방의 기운이 허한 탓에 생긴 것이라 하여 동경구(東京狗)라 불렸다”고 전한다. 개의 특징을 단순히 외양으로 설명하지 않고, 지역의 자연환경과 풍속, 음양오행 사상까지 연관 지어 놓았다. 실학자 이익 또한 1760년 무렵에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짧은 꼬리를 가진 개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1778년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이학규의 『물명유해(物名類解)』, 그리고 근대기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도 ‘노루꼬리 개’, ‘무미견(無尾犬)’, ‘동경 개’ 등의 기록을 남겼다. 짧은 꼬리를 지닌 동경이는, 단순한 지역의 애완견을 넘어 신라와 조선의 사상과 환경, 인간의 감성에까지 기록되어 살아남은 문화적 존재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신라 무덤 속 꼬리 짧은 토우 5~6세기 사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陶偶)들 중 꼬리 짧은 개가 있다. 흙으로 빚은 개는 생생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짧은 꼬리를 치켜들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려는 찰나의 몸짓이다. 얼굴의 선과 눈매, 귀의 방향과 자세까지도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토우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은 개다. 그중 꼬리가 없거나 몹시 짧은 개는 멧돼지와 맞서 싸우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경이가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닌, 맹수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짐승을 대적해 사람을 지키는 용맹스런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동경이는 신라인의 삶 깊숙이 존재하던 ‘생활견’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는 종종 무덤에 함께 묻히거나, 토우로 만들어져 묻혔다. 죽음의 문턱 너머까지 사람과 함께하던 삶의 동반자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려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 개는 이미 사람과 한집에서 숨을 쉬고, 고단한 노동과 험한 길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무덤 속에서조차 그들과 헤어지지 않았다. ■이름에 깃든 역사, 댕견 한국에는 여섯 종류의 토종개가 있다. 삽살개, 진돗개, 풍산개, 불개, 제주개, 그리고 댕견이다. 댕견은 꼬리가 짧은 경주 토종개 ‘동경이(東京狗)’다. 동경이는 ‘경주에서 왔다’는 단순한 지리적 표기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고려 이후의 역사와, 경주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의 정서가 함께 담겨 있다. ‘동경(東京)’이란 명칭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새 수도 개경의 동쪽에 자리한 경주를 행정적으로 부르던 표현이다. ‘동쪽의 도읍’. 그래서 경주에서 태어난 이 짧은 꼬리의 개는 ‘동경의 개’, 곧 ‘동경이’, 또는 ‘동경견’이라 불렸다. 그러나 문헌보다 더 오래된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남아 있다. 지역 어르신들은 이 개를 ‘동경이’보다는 ‘댕견’, ‘댕갱이’, 혹은 ‘땡갱이’라고 부른다. 툭툭 뱉어지는 이 구수한 방언은 경주의 골목과 마을에서 오랫동안 불린 소리다. 지금이야 ‘경주개’로 통칭되지만, 댕견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경주 어른들의 입에 붙어 있다. 댕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짧은 꼬리다. 보통 개의 꼬리뼈는 여러 마디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개는 아예 꼬리뼈 자체가 없거나, 많아야 두어 마디 남짓이다. 그래서인지 꼬리 대신 다리와 목, 후각이 유난히 발달했다. 짧고 단단한 몸에 유연한 근육이 붙어 민첩하다. 특히 후각이 매우 예민해 멧돼지 같은 야생 짐승을 추격하거나 유인하는 사냥개로서 탁월했다. 흥미로운 건 성격이다. 다른 토종견들이 낯선 이를 경계하고 잘 짖는 데 비해, 댕견은 조용하고 살갑다. 경계보다 관찰이 먼저고, 공격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주인을 향해서는 절대적인 복종심을 보이면서도, 타인에게는 똘망한 눈빛으로 먼저 마음을 건넨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짧은 꼬리를 흔들며. ■일제강점기, 씨가 마른 댕견 동경이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 언제 봤다고 해맑게 달려든다. 낯선 이에게도 주저 없이 다가가 애정을 구하는 녀석과 마주하면, 누구라도 경계를 허물게 된다. 그렇게 한 생명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랑스러운 개도 수난의 시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민중들이 뿌리째 흔들리던 그때, 사람의 언어와 문화, 심지어 마당을 지키던 개 한 마리조차 제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동경이에게도 피로 쓰인 절멸의 시간이었다. 일본은 전시 동원령 아래 사람을 마구잡이로 징집했으며, 가축뿐만 아니라 개도 도살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경이 역시 급격히 사라졌다. 동경이가 일본 신사의 수호신인 ‘고마이누(高麗犬, こまいぬ)’와 닮았다는 이유로 도살되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고마이누는 일본 신사의 입구를 지키며 악귀를 막는 신수(神獸)다. 꼬리가 거의 없고, 눈빛이 단단하며, 용맹한 동경이의 모습이 고마이누와 흡사하다는 것이 일본인의 불쾌감을 샀고, 결국 동경이를 없애려는 시도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역설적이게도 ‘신성함’이라는 이유가 학살의 명분이 되었다니 큰 모순이다.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이 식민 지배하고 있는 하찮은 조선 땅을 돌아다니는 흔한 짐승이라는 것에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이 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일제강점기 동경이는 실제로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꼬리가 없다는 이유로 ‘병신개’, ‘재수 없는 개’라며 천대받았다. 어느 날부터 울타리 안에서 개가 사라졌고, 짖던 소리도 줄었다. ‘씨가 말랐다.’ 그건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니었다. 경주의 역사와 신라의 감성, 사람의 삶을 묵묵히 지켜온 동반자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동경이의 절멸은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경주와 신라의 감성, 그 땅의 문화까지 지우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 종(種)을 지우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동경이는 일부 민가의 마당에서, 산기슭의 움막에서 조용히 새끼를 낳고 생명을 이어갔다. 주인의 손에서 숨어 지내고, 아이들과 뒹굴며 그 억센 세월을 버텨냈다. 그렇게 기적처럼 이어진 생명은 지금도 경주의 마을 어귀를 거닐고, 신라의 시간을 품은 채 단단하게 살아가고 있다. <下> 편에는 주인을 따라 죽은 경주개 동경이 전설이 이어집니다.

2025-04-22

“벚꽃으로 출렁이는 4월의 경주서 고요와 여유를 만끽하자”

□ 경주 보문관광단지의 봄 4월, 경주는 벚꽃으로 출렁인다. 겨우내 검게 웅크렸던 나무들은 어느새 화색이 돌고, 햇살을 양껏 머금은 가지마다 수억만 송이 꽃을 매단다. 꽃들은 한꺼번에 피어오르며 화르르, 화르르 사람을 부른다. 마치 봄의 사절단처럼 성대한 잔치가 벌어진다. 꽃잔치는 찬란하고 아름답다. 즐겁고 기쁘다. 여기서만은 누구든 주인공이 된다. 흐드러진 벚나무 아래에 서면, 평범한 사람도 하루쯤은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되며, 왕과 왕비가 되는 착각에 빠진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 아닌가. 꽃이 어우러진 찰나만큼은 나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 사방이 꽃이다. 길과 길, 동산과 동산, 집과 집 사이를 이어주는 길목마다 눈이 시릴 정도의 꽃무더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꽃이 핀 풍경 사이로 사람들이 걸어간다. 꽃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꽃 속에 묻힌다. 그렇게 모든 게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보문호를 따라 끝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진다. 호수 위로 부서지는 햇살, 그 위를 유영하는 꽃잎들, 그리고 고요히 물결치는 호수, 그 위로 떨어지는 빛의 눈부심마저도 모두 한 편의 에세이가 되고 시(詩)가 된다. 보문호는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10여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사방 242만 평의 드넓은 곳에 조성된 관광단지는 호수를 가운데 두고 별천지의 세상을 갖추었다. 호텔과 콘도, 골프장, 놀이시설, 그리고 고즈넉한 산책로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자리를 잡았다. 보문호를 따라 걷는다. 반나절쯤 족히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눈길 닿는 곳마다 꽃이요, 귀 기울이는 곳마다 새소리다. 벚꽃이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눈부시도록 아름답다는 말, 아마 벚꽃 흐드러지는 보문호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사방으로 물든 벚꽃 아래에서 많은 사람이 삶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누릴 것이다. 찬란함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바쁜 일상 중에 잠시 눈을 들었을 때, 바로 곁에 피어 있는 벚꽃 한 송이처럼 가까이 있다.   사방 242만 평의 드넓은 관광단지 호텔과 콘도•골프장•놀이시설 등 모든 것이 조화로운 별천지 세상 그 가운데 자리잡은 호수 ‘보문호’ 호수 중심으로 장막을 두른 벚나무 바람 불면 기다렸다는 듯 꽃잎 흩날려 눈발처럼 온 세상 감싸는 몽환의 풍경 모두 한 편의 에세이와 詩로 변모 □ 물결처럼 흐르는 보문호의 벚꽃 보문호는 1년 365일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벚꽃이 터지는 4월 초부터는 많은 인파가 몰린다. 보문호를 중심으로 장엄하게 장막을 두른 벚나무에 꽃이 핀다. 갈라지고 만나는 길이 마치 천상의 길처럼 변모한다. 밋밋하던 길도 벚꽃을 덧입으면 영화 속 장면이 된다. 종일 걸어도 싫증 나지 않는 길이다. 꽃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꽃잎처럼 나부끼며, 보문호 물결 위에 내려앉은 꽃잎처럼 나도 느릿하게 떠다닌다. 바람이 불면 기다렸다는 듯 꽃잎이 한꺼번에 흩날린다. 눈발처럼, 꿈결처럼, 온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는 몽환의 풍경이 펼쳐진다. 끝없는 산책로를 따라 벚꽃 터널이 쉼 없이 펼쳐진다. 손을 뻗으면 어느새 손바닥엔 꽃잎이 내려앉는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꽃잎을 쫓는다. 연인과 연인은 손을 맞잡고, 젊은 부부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 중년 부부는 보폭을 맞추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걷는다. 모두 느릿한 걸음으로 봄의 한 자락을 붙드느라 여념이 없다. 벚꽃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찬란한 제빛을 누구에게든 아낌없이 내준다. 4월의 보문단지는 시간을 멈추게 한다.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찰나가 아닌, 영원처럼 각인시킨다. 화려함보다는 고요와 여유를, 빠른 속도보다는 깊이 스며듦을 선사한다. 경주의 봄은 유적만큼이나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다. 천 년이 흘렀고, 수억 년의 시간을 향해 흘러가는 도시 경주. 눈여겨보지 않던 구석까지, 잊고 지나친 골목까지도 봄이 깃든다. □ 연간 천만의 사람이 찾는 경주의 관광(觀光) 경주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시간의 깊이와 결을 품은 도시다. 사방이 유적지이고, 골목 구석구석에도, 산야에도 역사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누구나 경주를 찾고 싶어 한다. 경주에서는 단순한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며, 밋밋한 것이 결코 밋밋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경주에서만큼은 ‘관광’이라는 단어도 예사롭지 않다.  觀國之光 利用賓于王(관국지광 이용빈우왕) : 나라의 빛을 보는 것은 왕에게 손님 대접을 받게 되니 이로울 것이다.  觀國之光 尙賓也(관국지광 상빈야) : 나라가 빛남을 손님으로 숭상받을 것이다.    ‘관광(觀光)’이라는 말은 주나라 『역경(易經)』의 ‘풍지관괘(風地觀卦)’에서 비롯되었다. ‘보다’라는 뜻의 ‘관(觀)’과, ‘빛나다, 아름답다, 자랑스럽다’는 뜻의 ‘광(光)’이 합쳐진 단어다. 다른 지방이나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과 풍습, 문물을 자세히 보고 그 빛남을 감상하는 일이며, 단순한 구경이 아닌 ‘나라의 큰 덕을 보고 느끼는 일’이 본래의 뜻이다. 일본에서는 ‘보다’의 뜻으로 ‘観光(관광)’을 쓰고, 중국은 ‘관광(观光)’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만, ‘여행하다’라는 의미의 ‘旅游(여유)’를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자세히 보다’는 뜻을 가진 ‘觀光(관광)’을 쓴다. 우리나라의 ‘관광’에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깊이 보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경주는 그런 의미에서 진짜 관광의 도시다. 단순히 구경하는 도시가 아니라, ‘나라의 덕과 아름다움을 자세히 보는’ 본래의 의미를 알고 다녀야 하는 곳이다. 언어는 삶에서 나온다. 그러니 언어는 삶을 닮고, 또 담는다. 그리고 시대를 기억한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는 ‘관광’이라는 말 또한 그렇다. 명소를 찾고, 맛집을 검색하고, 숙박과 항공권을 예약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 ‘관광’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한 시대의 그림자가 스며 있다. 우리말에는 원래 ‘관광’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대신 ‘유람’, ‘탐승’, ‘순례’와 같은 말을 썼다. ‘유람’은 자연과 경치를 즐기며 여유 있게 거니는 일이고, ‘탐승’은 배움을 위한 여정이며, ‘순례’는 믿음과 마음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다. 그 어떤 말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발길보다 마음이 먼저였고, 경치를 즐기는 눈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사유가 깃들어 있었다.  ‘관광’이라는 단어가 우리 삶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본에서 사용하던 ‘観光(かんこう, 간코우)’라는 말이 우리 삶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보다(観)’와 ‘빛나다(光)’. 얼핏 생각하면 고상하고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이 말이 뿌리내린 방식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일제는 식민국 조선의 풍경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했다. 경복궁의 근정전은 관광지로 개조되었고, 조선의 사찰은 일본인의 ‘여행 코스’가 되었다. ‘관광’은 조선을 통제하고 소비하는 방식 중 하나였으며, 조선은 ‘관광’이라는 말로 누군가의 시선에 따라 전시된 풍경이 되었고, 누군가의 궁금증과 즐거움을 충족하기 위한 배경에 불과했다. 그러니 ‘관광’이라는 말은 여가의 단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배의 언어, 소비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관광’이라는 말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득, ‘관광’이라는 말보다 우리가 다시 ‘유람’, ‘순례’, ‘탐승’ 같은 말을 되살린다면, 풍경을 보는 눈과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 제37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를 준비하는 경주 2025년, 경주는 특별한 해다. 제37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보문관광단지에서 열린다. 경주는 이제 세계의 담론을 품는 장소가 된다. 올해는 불국사‧석굴암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30주년이자, 보문관광단지 지정 50주년이 되는 해다. 경주의 찬란한 역사와 오늘의 시간이 겹쳐 세계로 뻗어 가는 해이기도 하다. 천 년을 건너온 돌담 끝에 미래를 향한 발자국이 찍힌다. 경주는 한때 폐허의 도시였다. 찬란한 유산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누리고 돌볼 여유는 없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를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로 만들겠다는 다소 거창한 꿈을 꿨고, 1974년 보문관광단지 개발 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이후 1979년 4월, ‘대한민국 제1호 관광단지’라는 이름을 달고 사람들에게 문을 열었다. 보문단지의 모든 풍경은 이방인의 눈에 경주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줄 것이다. 이제 세계가 경주를 바라본다. 오래전, 일제는 경주를 ‘관광’이라는 이름 아래 파헤쳤지만, 이제 경주는 경주의 언어와 경주의 감성으로 경주를 말한다. 그야말로 오롯이 경주의 시간이다. 보문관광단지는 단지 관광의 장소를 넘어서, 시간을 품은 곳이 되었다. 하루의 기억이 쌓이고, 한 세기의 변화가 겹쳐지는 경주. 경주는 다음 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봄날 벚꽃이 흩날리는 보문호로 천 년의 속삭임이 다시 스며들고 있다.

2025-04-16

봉분 없는 서봉총… 잃어버린 역사와 아픔의 흔적

□ 황금 유물이 쏟아진 대릉원 고분들 신라 고분이 펼쳐진 대릉원 일대는 무한한 이야기의 터다. 대릉원 일대는 신라 왕경이 펼쳐졌던 주 무대였다. 그러기에 죽은 후에도 쉬이 떠나지 못했다. 대릉원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죽은 자의 터가 산 자를 불러들이는 부활의 땅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른 봄, 대릉원의 아침은 눈부시다. 나는 이른 시각부터 대릉원을 바삐 오가며 무엇을 찾고 있었다. “어데 찾능교?” 잔디밭에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햇볕을 쬐는 세 어른 중 한 어른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걸 예상하며 스치듯 말했다. “서봉총이요.” 어른이 답했다. “구스타~프!” 나는 놀라 어른을 바라봤다. “여~ 아잉교~” 어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여~ 뒤에.” 어른이 다시 등 뒤 잔디밭을 가리켰다. 그제야 이 휑한 곳이 봉분 없는 서봉총이라는 걸 알았다. □ 고분을 헐어 흙과 자갈을 쓰다 일제강점기 경주의 고분은 파면 팔수록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경주에 고분 발굴팀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일제는 고분에 집착했다. 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까지 50여 기의 고분에 손을 댔다. 이번엔 웅장한 고분(서봉총)이었다. 고분 발굴 책임자 고이즈미 아키오와 조선총독박물관 경주분관 관장 대리직을 맡고 있던 모로가 히사오는 고분 발굴에 건설업자를 끌어들였다. 자금을 후원받는 대신 고분의 흙과 자갈을 파 쓰게 했다. 당시 경주역 기관차 차고 신축·확장 공사에 많은 흙이 필요했으므로 발굴과 건설 모두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중장비에 의해 흙과 자갈이 제거되고, 목관 내부가 순식간에 드러났다. □ 세 번째 신라 금관, 서봉총금관(瑞鳳塚金冠, 보물 제339호) 발굴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이 무렵,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 제6대 국왕), 황태자 부부가 일본에 와 있었다. 고고학을 공부한 황태자는 동양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 일제는 자신들이 식민 지배하는 조선과 경주를 소개하고 방문을 권했다. 황태자의 환심을 사 스웨덴과 우호를 다질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또한 자국의 고고학적 수준을 세계에 알릴 기회이기도 했다. 황태자가 서봉총 발굴 현장에 도착하자 일제는 직접 발굴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황태자에 의해 금제 허리띠와 드림장식, 금관이 나왔다. 일제는 한술 더 떠 무덤 이름을 스웨덴의 이름을 따 ‘서전관’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 스웨덴을 한자식으로 ‘서전(瑞典)’이라고 했다. 황태자는 정중히 거절했다. 신라 왕의 무덤에 서양의 이름을 붙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금관에 장식된 새 세 마리가 있으니 ‘봉황총(鳳凰塚)’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일제는 이미 봉황대가 있어 스웨덴의 한자식 표기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황태자가 발굴한 금관에 봉황이 있으니 ‘봉(鳳)’ 자를 따 서봉총(瑞鳳塚) 이라 했다. □ 금관 모독 사건 -황금 유물로 치장한 평양 기생 차릉파가 신라 제57대 왕이라고. 서봉총의 발굴 책임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공(功)을 인정받아 1935년 평양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서봉총의 유물을 평양에서도 전시할 것을 요청했다. 전시를 마치고 일본 고관대작들과 연회를 열었다. 술에 취한 고이즈미는 서봉총 유물을 여자에게 씌우고자 했다. 사진을 찍어 나중에 책에 쓰겠다고 했지만, 일종의 과시욕이 발동했던 것이었다. 고이즈미는 연회에 동원된 5명의 기생 중 한 명을 지목했다. 22살 평양 기성권번(기생양성소) 출신 차릉파(車綾波)였다. 금관은 물론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와 금제 드리개, 금제 목걸이, 금귀걸이, 금팔찌, 금반지에 이르기까지 차릉파가 몸에 걸친 순금 유물의 무게는 무려 2관 800돈(10.5㎏)에 달했다. 일본 고관대작들은 황금 관을 쓴 차릉파를 가운데 두고 마구 웃고 희롱했다. 역대 3명의 여왕이 있던 신라, 술에 취한 그들은 신라 마지막 왕(경순왕, 제56대) 이후 천년 만에 부활한 57대 여왕이 차릉파라며 농락했다. 다음날, 연회에 참석했던 고이즈미와 일본 고관대작들은 신라 왕의 혼이 서린 국보급 유물을 가지고 논 것에 대해 입단속했다. 그러나 금관을 쓰고 갖은 유물을 몸에 걸친 차릉파의 사진이 평양 시내에 나돌면서 9개월 만에 언론 기사화되었다. 국보급 유물을 기생의 액세서리로 전락시킨 사건이었다. 스웨덴 황태자를 모셔 기획 쇼까지 해가며 발굴한 유물에 먹칠을 한 셈이었다. 천인공노할 짓거리에 조선 사람들은 물론 일본인의 분노도 치솟았다. 그러나 차릉파는 ‘왕관을 쓴 기생’이라는 별칭으로 오히려 유명해졌다. 고이즈미 관장은 총독부로부터 재발 방지를 위한 견책성 시말서만 썼을 뿐, 평양박물관장직은 유지되었다. □ 고분 사이에 살았어 여든넷, 나이를 언급하는 어른은 평생 경주를 떠나본 적 없다고 했다. 고분과 고분 사이에 사람이 살았다. “요기, 바로 요, 요 젙에(여기 곁에) 우리 집이 있었어.”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고분은 죽은 사람을 묻은 무덤이 아닌 뒤란, 마당 앞에 있는 하나의 언덕이나 구릉처럼 인식되던 때였다. 서봉총을 바라보는 어른의 얼굴에 아득한 세월이 묻어났다. “어릴 적엔 여기서 뛰놀았어. 저 우에도(위에) 올라가고” 어른이 봉황대를 가리켰다. “그때는 고물상들이 많이 돌아 댕깄어. 기와 조각 같은 걸 갖다주면 돈을 줬어.”. “한 10만 원씩 줬어요. 그때 돈으로도 꽤 큰 돈이었어요. 그러니 아들부터 어른까지 뭐라도 더 주우러 다녔지.” “그게 문화재인지도 몰랐어. 못 먹고 없이 살 때라 문화재 생각할 겨를이 어딨노. 그런 거 볼 줄도 몰랐다.” 어른들의 기억 속에서 경주의 과거가 조각조각 살아났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기억의 편린이 되살아나 이어지는 듯했다. “뒷산 어디 가면 그릇이 그치럼(그렇게) 많이 나왔어. 고물쟁이한테 이야기하니 며칠 뒤 트럭을 끌고 와서 싹 다 파갔어. 싹 다.” 어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 속에는 씁쓸한 기억이 묻어 있었다. 오래전 경주의 고분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무덤 속 유물들이 조용히 사라졌다. 봉분도 없는 서봉총을 바라본다. 켜켜이 쌓였을 수많은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낯선 객과의 대화를 잇다 말고 어른은 한참 허공을 바라본다. 어쩌면 어른들에게 고분은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닿아 있는 잃어버린 공간인지도 모른다. 서봉총을 둘러보며 단순한 유적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와 마주했다. 신라 왕족의 찬란한 황금문화가 깃든 곳이자, 일제강점기 일본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닿았던 곳. 문화재 약탈의 중심이 되었던 경주의 처참한 역사가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봄날의 대릉원에서 어른들의 기억을 통해 또 다른 경주의 상처를 들었다. 뒷산 어딘가에서 사라졌을 그릇들, 기와 조각을 모아 고물상에 팔던 아이들, 그리고 서봉총 앞에서 지나간 시간을 바라보던 84세의 어른까지. 수탈의 흔적은 단순히 유물의 행방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깊이 새겨져 있었다. 서봉총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터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곳에서, 나는 묵묵히 서봉총을 바라본다.

2025-04-09

시간을 거슬러 올라 신라의 황금빛 ‘금관’ 과 마주하다

□ 신라의 빛 금관 경주의 대지에는 봄기운과 신라의 향기가 함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저 멀리 무덤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그곳엔 신라의 왕들이 누워 있고, 나는 신라의 왕들이 걸었고, 지금의 경주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을 따라 우리들의 빛을 만나러 간다. ‘금관’, 떨림이 일었다. 과연, 천 년의 시간을 넘어 그 찬란한 빛은 오늘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황금빛 시간의 조각을 만나기 위해 신라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립경주박물관 어둑한 전시실, 차분한 어둠 한가운데 금관이 빛나고 있다. 유리관 속 금관은 마치 천년의 시간이 그대로 걸어 나온 듯하다. 시간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신비로운 빛. 신라 왕들은 왜 이토록 화려한 금관을 머리에 썼을까. 권력의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하늘과 신에게 가닿고자 하는 염원의 상징이었을까? 금관의 가지는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뻗었고, 가지 끝에 달린 푸른 곡옥(曲玉)은 신라 사람들이 꿈꾸던 영원의 세계를 담은 듯 푸르다. 죽어서도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을까. 죽어서도 나라를 다스리며, 하늘과 신에게 기원하고자 했을까. 황금으로 빚은 금관은 태양이 녹아내린 듯 강렬하다. 그러면서도 섬세하다. 빛을 머금은 금판 위에 새겨진 작은 무늬들은 마치 신라의 바람과 빛과 아지랑이와 물결을 담아낸 듯 일렁인다. 신라인들은 금으로 태양을, 옥으로 생명을 표현했다고 한다. 흔들리는 곡옥은 풀처럼 흔들리고, 금관을 둘러싼 장식은 별처럼 반짝인다.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금관은 단순한 치장의 장신구가 아닌 하늘과 땅, 생명과 죽음, 온 우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성한 상징물이었으리라. 신라 금관은 현재까지 모두 6개가 발굴되었다. 1921년 집터 수리 중 나온 최초의 금관총금관을 시작으로 금방울이 장식된 금령총금관, 그리고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서봉총금관, 셋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천마총금관과 황남대총금관은 1970년대 초, 우리 고고학 기술로 세상에 나온 금관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1972년쯤 도굴범들이 교동의 폐고분을 도굴하여 숨기고 있던 것을 되찾은 교동금관이다. 이중 금령총금관과 황남대총금관은 중앙박물관 소장이고 나머지는 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럼, 금관은 어디서 어떻게 발굴되어 현재의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걸까. 천천히 금관이 세상에 나온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 노서동 집터 공사 중 나온 첫 금관 -금관총 금관(金冠塚 金冠, 국보 제87호)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 중심가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파란빛을 띠는 게 아주 고급스러웠다. 지나던 일본 순사 미야케 요산(三宅與三·삼택여삼)이 눈여겨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봉황대 아래 언덕을 가리켰다. 미야케는 다급히 그곳으로 갔다. 인근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朴文煥)이 주막 뒤뜰을 넓히고 돋우느라 언덕의 흙을 파다 쓰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심상치 않은 파편들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미야케는 박문환에게 더는 흙을 파지 못하게 하고 곧바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경주경찰서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경찰서장 이와미 히사미쓰(岩見久光·암견구광)는 바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 직원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제록앙웅)에게 연락했다. 둘은 곧바로 현장을 둘러보았다. 둘은 지독한 유물 수집가로 현장에서 심상치 않은 촉을 느꼈다. 규정상 현장을 보존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와미와 모로가는 모든 절차를 무시했다. 그리고 경주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경주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도리문재)와 경주보통학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대판금태랑)를 불렀다. 그리고 넷이 직접 연장을 들고 현장으로 갔다. 그리고 발굴에 들어갔다. 모로가와 와타리가 직접 채굴하고 경찰서장 이와미와 경주보통학교장 오사카가 채굴 상황을 기록하고 발굴된 것의 분류와 정리를 맡았다. 매장 주체부가 드러났다. 모로가의 눈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금관이었다. 가슴이 벅찼다. 막 드러난 신라능묘의 황금관을 눈앞에 두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꿈같았다. 뒤이어 비취색 곡옥과 금사슬, 금허리띠, 금귀걸이 등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유리그릇 편과 구슬목걸이 등 매우 귀중한 유물도 뒤를 이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경주 군수 박광렬(朴光烈)이 다급히 현장을 찾았다. 파헤쳐진 능묘는 처참했다. 피장자가 묻힌 곳까지 마구 연장질을 해댄 현장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조상숭배를 금과 옥조로 여기며 살아왔거늘 조선의 정신을 뿌리째 흔드는 야만적인 행태에 치가 떨렸다. 군수는 상부에 보고하여 지시와 절차에 따라 진행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선인인 경주 군수의 말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보고 선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수를 철저히 따돌렸다. 군수는 이를 두고 볼 수만 없어 경상북도지사에게 긴급 보고했다. 도지사는 도청 직원을 급히 파견하는 동시에 조선총독부에도 긴급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이와미와 모로가의 막무가내 행실보다 모두 한발 늦었다. 발굴은 2~3일 만에 비전문가들에 의해 졸속으로 끝이 났다. 경주경찰서장이 법령에 따라 경무총장을 거쳐 조선총독에게 즉시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모두 무시하고 연장부터 들이대 무단 채굴한 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현장 보존은 더더욱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모로가는 마치 모든 권한을 쥔 것처럼 주도했다. 뒤늦게 총독부에서 정식 파견된 일본인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매원말치)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소천현부)는 절차와 방법을 무시한 난폭한 수습에 적잖은 불쾌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신라 금관 최초 발굴’이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전대미문의 특종감을 찾았으니, 일제의 입장에선 대만족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환호했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세계 유일한 낯선 형태의 금관을 두고 일제는 자신들의 세기적 최고의 고고학 성과물로 자랑했다. 세계의 이목이 일본이 식민 지배하고 있는 조선, 조선의 경주라는 도시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에 쏠렸다. 금관의 출현은 식민 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에게도 뜨거운 관심사였다. 모로가는 흡족했다. 금관은 자신의 촉이 이루어낸 최고의 성과물이었으니까. 일제의 야욕은 경주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을 향했다. 그들의 목적은 학술적 조사와 가치에 중심을 둔 게 아닌, 오로지 묻혀 있을 부장품에만 쏠려 있었다. 많은 전리품과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한 보물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 식리총과 금령총을 열어라 -금령총금관(金鈴塚金冠, 보물 제338호) 한번 재미를 본 모로가의 고분에 대한 야욕은 더 커졌다. 1924년 4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齋藤實·재등실, 제3·5대 조선총독)이 조선 남부 시찰차 경주로 왔다. 모로가는 사이토 총독과 봉황대에 올랐다. 그리고 남쪽을 바라보며 섰다. 봉토가 많이 손상된 고분 2기가 보였다. 옹기종기 들어찬 민가 사이의 고분은 미관에도 좋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못 이기고 이미 많이 파괴된 고분을 두고 모로가는 넌지시 발굴의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1923년 9월, 일본 본토 관동대지진으로 자금 사정이 좋지 않던 조선총독부는 소극적이었다. 모로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로가의 집요한 계책에 총독이 그리하라 일렀다. 이는 총독이 사적 자금을 내어 허락한 것이었다. 또 다시 고분들은 마구 파헤쳐졌다. 총독이 허락한 발굴이라는 명분 아래 모로가는 기세등등했다. 1924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위원이자 현장 책임자인 우메하라 스에지와 고이즈미 등이 인부들을 대동해 노동동의 고분(식리총(飾履塚), 금령총(金鈴塚)) 2기를 파기 시작했다. 원형이 크게 손상된 고분이었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 번째 금관이 나온 것이다. 금관엔 금방울(金鈴·금령)이 달려 있었다. 금령총금관(金鈴塚金冠, 보물 제338호)으로 이름 붙였다. 다른 한 곳에서는 장례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신발인 금동식리(金銅飾履)가 나왔다. 어디 이뿐인가. 금제관드리개·가는고리금귀걸이·유리구슬목걸이·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은팔찌·철제고리자루큰칼 등도 함께 쏟아졌다. 금관이 작은 걸로 봐서 어린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곳에서 이처럼 많은 황금이 쏟아진 것이다. 자신의 예측이 적중하자 모로가는 환호를 질렀다. 짜릿했다. 황금 유물에 심취한 모로가는 점점 경주에서 절대적인 문화 권력자가 되고 있었다. 한편 경주에는 일본인들이 들끓었다. 모로가 외에도 관학자를 비롯하여 황금이 쏟아진다는 소문을 듣고 자칭 고고학자라며 떠들고 다니는 아마추어 유물 수집꾼들이 득실댔다. 금관의 출현으로 경주는 유명세를 탔지만, 반면 도굴범들이 들끓는 도시가 된 것도 사실이다. *스웨덴 황태자가 참여한 ‘서봉총’ 이야기와 ‘신라금관 모독’ 등의 이야기는 ‘신라금관’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2025-04-02

봄이 걸어오며 반기는 백석 산수유꽃 향연

□ 흰 돌이 많았다는 경주 백석마을을 아시나요 산수유가 봄보다 먼저 내려앉는 마을이 있다. 이 꽃 저 꽃 벌들이 바삐 쏘다니는 동안 마을엔 모처럼 화색이 돌고 인기척도 함께 든다. 봄이 온 게다. 어디서들 알고 찾아온 것인지 객지 사람들의 발길이 종일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사람들은 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듯하다. 경주역에서 차로 5분 남짓 달리면 백석마을에 이른다. 경주역과 지척인데도 백석마을엔 폐가와 빈집이 많다. 한때는 8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전부 객지로 나가고 밤에 불이 켜지는 집은 겨우 3~5채뿐이라고 한다. 풍경은 오래된 기억 속 한 장면처럼 낯설고도 아늑하다. 낮에는 봄볕 아래 노란 산수유꽃이 흔들리고, 밤이면 불이 켜지는 집이 손에 꼽힐 만큼 적다. 정적이 내려앉은 마을, 하지만 봄이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을은 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숨을 쉰다. 겨우내 굳게 닫혔던 빈집마다 문이 열리고, 객지로 나가 살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온다. 그리고 밭고랑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 삽질 소리, 농기계 소리가 마을을 울린다. 묵은 땅이 뒤집히고, 굳은 마음도 풀린다. 저들끼리 핀 산수유 꽃도 사람 구경을 즐긴다. 건천읍 화천 3리 백석길 16, 백석마을에 이른다. 흰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단석산 자락 아래, 신라 장군 김유신이 이곳을 지나다가 냇가에 꽃이 많은 걸 보고 ‘꽃내’라고 부르다가 ‘화천(花川)’으로 불렀다. 약 350년 전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살았는데, 개척 당시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해서 ‘백석(白石)’으로도 부른다는 마을 어른의 이야기다. □ 봄이면 사람보다 산수유꽃이 먼저 드는 마을 모처럼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마을 군데군데가 노랗다. 꽃들은 무더기무더기 피어 저들끼리 즐거웁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겨울 기운이 강해 바람이 시리더니 며칠 새 봄기운이 완연하다. 꽃은 꽃망울 여는 걸 저들끼리 터득했나 보다. 절정이다. 꽃들은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해진다. 바람이 불면 새파란 하늘에서 하늘거리는 모습은 별처럼 영롱하다. 마을 어귀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저들 편한 대로 가지를 뻗어 꽃을 피웠다. 주인을 기다리는 나무, 혹은 기다림 그 자체가 나무가 된 것처럼 말이다. 마을 초입에 서 있는 수령 300년을 자랑하는 신목 앞에도 산수유는 가지를 뻗었다. 아직 채 봄을 맞지 못했는지 잎사귀 하나 돋우지 않은 신목에게 노란 산수유꽃이 해맑은 아이처럼 찬란한 봄 인사를 건넨다. 한낮의 햇살이 산수유꽃을 투과하며 그림자는 더 길고 짙게 마을로 내려앉는다. 마을 구석구석, 걷다 보면 어느새 꽃 속에 파묻힌다. 돌담이 살아있는 마을이다. 그 사이로 산수유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사람 손길이 미친 산수유는 표가 난다. 꽃이 많고 색깔도 선명하다. 그러나 저절로 무시로 난 것들은 가지만 무성할 뿐 꽃이 적다. □ 한때는 자식들 공부시킨 든든한 밑천 봄이 오면 백석마을은 노랗게 물든다. 아니 햇빛을 머금어 찬란한 금빛으로 빛난다. 마른 가지 끝에 작은 꽃망울들이 터지기 시작하면, 마을은 하루가 다르게 환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꽃잎은 마치 비단을 두른 듯하다. 산기슭을 따라 여기서 저기서 산수유꽃들이 마을을 감싼다. 봄은 그렇게 산수유꽃과 함께 마을에 스며든다. 마을을 찾은 이들의 마음에도 한 줄 따뜻한 빛을 남긴다. 꽃잎 하나하나, 오랜 세월을 품은 듯 기품마저 느껴진다. “옛날부터 유명했어. 저 위쪽 산만디(산기슭) 거기서부터 여기, 질까(길가)까지 전부 노랬어.” 열아홉에 시집와 예순하고도 네 해를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최순자(84세) 어른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는 꽃이 고븐 지도(고운지도) 몰랐어. 그냥 다 일로만 보였으니까.” 산수유는 매화가 필 무렵 함께 피었다. 빠르면 2월 중순께 눈을 덮어쓰고도 샛노란 꽃을 피워냈다. 며칠 만에 일찍 저버리는 매화에 비해 산수유는 봄 동안 지천을 꽃등(燈)으로 밝혔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새파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단풍이 물드는 10월엔 산수유 열매가 빨갛게 익어갔다. 새빨간 보석같이 빛났다. 이 또한 꽃 못지않게 장관을 이뤘다. 11월엔 터질 듯 통통하게 물이 올라 반짝거렸다. 그리고 서리가 내리면 쪼글쪼글 마르기 시작했다. “생 거를 따서 소쿠리에 담아 며칠 골긴다(시들게 한다). 아니면 첨부터 서리를 마차가(맞게 해서) 몰캉한 걸 따던가.” 육질이 홍시처럼 몰캉해지면 씨앗 빼는 게 훨씬 수월하다. 생육에서 씨앗을 뺄 수 없어 터득해 낸 지혜다. “그걸 이빨로 하나하나 깠어. 열매 하나하나 낱낱이 입에 물고 이빨로 깨물어 씨앗을 발라내는데, 애들 학교 갔다 오면 전부 매달렸어. 산수유 농사를 많이 하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일거리를 대주기도 했어.” 최순자 어른과 함께 서 있던 일흔넷 공진국 어른이 말을 잇는다. “한 깡통에 이백 원인가 쳐줬어. 한 깡통이 한 되, 그러니까 껍데기로만 한 근 600g이 나오는데 200원 쳐줬어요. 많이 까는 사람은 하루 꼬빡 6근씩 까냈어요.” 이빨로 까면 이빨이 닳았다. 그래서 산수유 철이 되면 미리 손톱을 길렀다. 손톱도 닳았다. 그래도 돈 생각하면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학교 등록금이 한 삼천 원 했을 때니까, 한 보름 까면 삼천 원, 등록금은 나오는기라. 그러이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까는기라. 훗날 까는 기계가 나왔는데 품질이 입으로, 손으로 까는 것만 못해요.” 돈이 됐다. 삼 남매, 사 남매, 많은 집은 오 남매, 육 남매 전부 산수유를 해서 공부를 시켰다. 그렇게 떠난 자식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은 점점 조용해졌다. 빈집이 늘고, 폐가가 생겼다. 하지만 산수유나무들은 여전히 피고 산수유를 붉혔다. □ 귀한 한약재, 산수유 산수유는 예부터 귀한 약재로 쓰였다. 한방에서는 산수유를 ‘구기자, 오미자와 함께 세 가지 보약 열매’라 칭했다. 신맛이 강하지만 몸을 따뜻하게 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효능이 있어, 술을 담그거나 끓여 차로 마셨다. 이 마을에서도 가을이면 산수유 열매를 말려 두고, 겨울을 나기 위한 차를 만들곤 했다. ‘본초강목’에는 오래 먹으면 몸에 힘이 붙고 눈이 밝아지며, 뇌골통과 이명(耳鳴)을 치료하고, 오래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는 유기산이 풍부하고 비타민과 미네랄, 항산화 성분이 있어 면역력을 증가시키는 것과 동시에 속을 따뜻하게 하고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산수유 열매는 백석마을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열매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삶의 일부였고, 계절의 순환 속에서 이어지는 유산이기도 했다. □ 도처로 팔려나간 백석마을 산수유 KTX 경주역 위쪽부터 백석마을까지 전부 노란 산수유 군락이었다. 논두렁 돌무더기에도 집 마당, 뒤란에도 그랬다. 그때에 비해 나무는 턱없이 줄었다. “경지정리 한다고 뽑아내기도 했지만, 관광단지 조성한다고 관상목으로도 엄청 사 갔어요. 대구나 서울 경기도 전국 조경업자들이 나무 사러 엄청 왔어요. 이른 봄에 꽃 하나 없고 황량하니 볼 게 없는데 산수유는 일찍 노랗게 꽃이 피고 보기 좋거든. 어디 노랗기만 하나. 여름에 조롱조롱 열린 열매가 보기 좋고, 가을 되면 빨가이 이쁘거든. 그러이 호텔 뜰이고 관광지마다 한 나무씩, 두 나무씩 가져가 심은기라.” 꽃 향이 온 마을로 번진다. 밭과 마당, 때로는 빈집이나 폐가 구석구석까지 파고든다. 오래된 집들이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다 폭삭 주저앉았다. 인적이 끊긴 마을에 꽃이 피자 낯선 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이 아름답고 갸륵한 풍경을 이야기하며 최순자 어른도 공진국 어른도 꽃처럼 환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처음 걸었던 신목 앞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나는 오래전부터 백석마을 기억하는 일부인 양 정겨웁다. 아마도 봄을 알리는 산수유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알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건가보다. 백석마을은 봄이 가장 먼저 걸어오는 길목인지도 모르겠다. 노란 산수유 꽃 속에서 잠시나마 따뜻한 봄기운을 품는다.

2025-03-26

삼라만상으로 스며드는 불음, 서라벌을 깨우다

‘마침내 신종이 완성되니 그 모양은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고, 소리는 용의 울음과 같았다. 위로는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지고 아래로는 지옥에까지 스며드니 … 소리를 들은 사람은 복을 받을지어다.’ -성덕대왕신종 명문 중에서- □ 범종 소리 ‘둥~ 둥~ 둥~’, 사람들이 홀린 듯 한곳을 바라본다. 장중한 소리다. 맑은 음이다. 무념의 세계로 들어가듯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국적과 종교를 굳이 따지지 않고 그저 거룩한 마음으로 소리 앞에 서 있다. 막히지 않는 여음이다. 1200년을 살았다는 육중한 쇳덩이가 뿜어내는 소리다. 속인의 마음을 흔드는 소리다. 법계에 두루 임하여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을 밝히며 축생의 고통을 떨치고, 지옥을 무너뜨리며 모든 중생을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소리다. 어떠한 절정도 없이 삼라만상으로 장엄하게 스며드는 불음(佛音)이다. 여운은 또 다른 여운과 이어져 끝내는 저 멀고 아득한 피안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 봉덕사와 성덕대왕신종 높이 3.75m, 지름 2.27m, 무게 18.9톤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국보 제29호)은 법구사물(法具四物) 중 하나인 범종(梵鍾)으로 원래 ‘봉덕사종’으로 만들어졌다. ‘삼국유사’에 봉덕사는 성덕왕이 태종대왕을 위해 706년에 창건했다는 것과 효성왕(孝成王, 제34대 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복을 위해 738년에 세웠다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봉덕사종은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함께 한국 최고의 범종으로 꼽힌다. 성덕대왕신종 주조는 왕명에 따른 거사였다. 경덕왕(景德王, 제35대 왕)이 부왕 성덕왕(聖德王, 제33대 왕)의 공덕을 기리고,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게 했다. 그러나 경덕왕은 살아있는 동안 종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경덕왕이 죽고 8살의 어린 혜공왕(惠恭王, 제36대 왕)이 즉위 7년(771년) 되던 해에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 어찌 됐건, 종은 경덕왕이 부친을 위해 시주한 황동 12만 근으로 주조했기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 하여 종의 몸체에 이같이 돋을새김해 놓았다. □ 고단했던 여정 771년 주조된 성덕대왕신종은 조선기 들어 고난을 겪는다. 1424년(세종 6) 때 ‘전국 각 사찰에 있는 종을 거두어 다른 용도로 주성하라’는 명이 내려진다. 이때 경주 촌로가 신종만은 녹이지 말고 보전해 달라며 죽음 각오하고 상소를 올린다. 세종은 촌로에게 지필묵을 하사하고 ‘경상도 경주 봉덕사와 개성 유후사 연복사의 큰 종은 헐지 말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후 홍수로 북천이 범람하여 북천가에 있던 봉덕사가 폐사된다. 수풀에 버려지다시피 한 신종을 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애석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절은 망해 모래와 자갈에 묻히고/ 이 물건은 잡초 덤불에 맡겨졌네/ 주나라 돌 북과 같이/ 아이들은 두드리고 소는 뿔을 가는구나/ 매월당시집 권12 ‘유금오록’ 봉덕사종 중에서 1460년(세조 5)에 이르러 풀숲에 있던 종을 수습해 영묘사로 옮긴다. 그리고 50여 년 후인 1507년(중종 2)쯤 ‘경주부윤 예춘년이 종을 봉황대 옆으로 옮긴다. ‘동경잡기’에 군사를 모을 때나 성문을 여닫을 때 종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지은 ‘종각중수기’에는 타종의 회수와 관리 규정을 기록해 놓았다. 밤에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인정(人定)에 28번, 통행금지가 풀리는 파루(罷漏)인 새벽 4시에 33번을 쳤다. 이밖에 도성 안에 화재가 나거나, 큰일을 알릴 때 종을 쳤다. 신종은 400여 동안 관종(官鐘)으로서 봉황대를 지켰다. 그러다 1915년 5월,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인 옛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 종각으로 이봉한다. 하지만, 하나의 유물처럼 전시·관람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듯 타종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7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기까지 무려 네 차례나 자리를 옮기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이제 종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2003년 개천절을 마지막으로 녹음된 소리로 대신한다. □ 육중한 종, 어떻게 이봉했나?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15년 봉황대 옆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경주고적보존회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인 옛 경주박물관으로 옮기는 모습이다. 사진 속 조선인은 삿갓, 갓, 패랭이를 쓴 남성과 치마를 입은 여인과 아이들이다. 모두 흰옷을 입었다. 오른쪽 여섯 명은 일본인이다. 순사와 감독자 및 관련 사람들과 하수인으로 보인다. 일본인은 모자를 쓰고 양장이나 제복을 입어 다소 위엄 있는 모습이다. 일본인은 감독자이고 조선인은 지렛대와 동아줄을 잡은 걸 보면 인부일 것이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이었다. 종을 옮길 때 사용한 건 다름 아닌 통나무와 동아줄이다. 인부들은 흙길에 둥근 통나무를 침목처럼 깔았다. 종의 몸체 아랫부분에 동아줄을 둘러 묶고 줄을 나무 틀에 감았다. 그리고 연자를 돌려 종을 당겼다. 종을 통나무 위에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쪽을 쳐들어야 하는데, 자칫하면 무게가 반대로 쏠려 넘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까스로 종을 통나무 위에 올렸다. 장정들의 함성과 함께 종은 조금씩 통나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통나무를 옮겨가며 밀고 당기기를 1달, 드디어 보존회에 도착했다. 봉황대 종각에서 보존회(현 경주문화원)까지 약 400m의 거리, 그리 먼 거리가 아닌 듯해도 18.9t의 쇳덩이를 변변한 장비도 없이 옮기자면 무척 고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존회로 옮긴 신종은 60년 후인 1975년 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아이를 공양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의 또 다른 이름은 ‘에밀레종’이다. 어머니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슬픈 소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종을 만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자, 아이를 넣었더니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나 신라의 전설이 망라된 ‘동경잡기’ 어디에도 이런 이야기는 없다. ‘鐘(종)’, 한자를 보면 쇠 ‘金(금)’과 아이 ‘童(동)’이 합쳐진 글자다. 종을 만들 때 인(P)을 넣으면 주조성이 좋아져 종소리가 맑아진다고 한다. 인은 사람의 뼈에 많은 성분이다. 포항산업과학기술연구원에서 성덕대왕신종의 성분을 검사했으나 인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종에는 없는 0.2%의 유황이 검출되었다. 종이 1,200년 넘는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유황 성분일 것으로 본다. 그럼, 종을 만들 때 아이를 공양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이를 공양해 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중국에도 전해진다. 중국 베이징의 오래된 종을 모아놓은 고종박물관에는 이런 그림이 있다. 커다란 종을 만드는데 소리가 잘 나지 않자, 아이를 바치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던 아이가 이글거리는 쇳물을 보자 발버둥을 쳤다. 아이 둘을 쇳물에 넣었는데 급히 넣다가 신발이 밖으로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종을 완성하여 타종하니 ‘신 달라’는 소리가 났다는 이야기의 그림이다. □ 아름다운 문양 성덕대왕신종은 형태와 무늬, 주조기법, 소리에 이르기까지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세계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종의 꼭대기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과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龍9215)가 있다. 음통은 한국 범종에만 있는 독특한 구조다. 용뉴의 용머리 조각은 제왕적 위엄을 나타낸다. 종신 위쪽에는 네모난 띠 모양의 연곽(蓮廓)이 있고, 연곽 내부에 연꽃 봉오리를 규칙적으로 새긴 연뢰(蓮857E)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에는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 두 개를, 그 사이에 네 구의 비천(飛天)을, 그리고 마주 보는 비천 사이에 명문을 새겼다. 종신의 상단과 하단에는 넝쿨무늬 띠를 새겼다. 연꽃 위에 무릎을 꿇은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은 돌출되게 새겼다. 서로 마주 보는 두 쌍이 모두 명문을 향하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에 눈코입이 없어도 존경의 눈빛과 경건한 언어를 짐작게 한다. 향로를 받쳐 든 두 손에는 부처의 높은 덕을 찬양하는 듯 거룩함이 묻어난다. 천의(天衣)와 영락(瓔珞)은 유연하게 하늘을 향하고 덩굴풀이 꼬여 뻗어가는 당초(唐草) 모양의 구름은 하늘거리며 피어오른다. 가인의 자태처럼 보드라운 선의 흐름에 아득한 속살거림마저 묻어난다. 당목이 종신을 때리는 2개의 절제된 연꽃무늬 당좌(撞座) 역시 크고 선이 활달해 대담한 인상을 준다. 비천상 가운데 명문이 있다. 총 1037자로 왕의 지시를 받고 한림랑 김필해가 종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과 제작 시기, 제작 이유, 종의 의미, 주조에 참여한 여덟 명의 이름과 관직, 기술자 네 명의 직책과 이름을 기록했다. 종의 바닥엔 울림통을 파 놓았다. 울림통은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맥놀이 현상을 만든다. ‘둥~’ 소리는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가 어디에 머무는가. 가히 측량키도 어려운 깊이와 무게로 다가오는 여운, ‘둥~’ 웅장한 타격음과 함께 대지를 밀치듯 하늘을 울리듯 뻗어간다. 어떠한 매듭도 없이 그저 천지로 뻗어간다.

2025-03-19

초겨울에 다시 만나는 선도산과 서악동 고분군

언제나처럼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의 속도처럼 빨랐다. 취재를 위한 현장 답사 차원에서 처음으로 경주 선도산과 서악 일대를 돌아본 건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다. 올해 7~8월은 유난스러운 폭염이 사람들을 괴롭혔다.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를 때면 목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숨결은 거칠어졌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대왕국 신라의 시작을 알린 박혁거세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비밀스러운 여성 ‘선도산 성모’를 모시고 있다는 성모사(聖母祠) 처마 아래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차가운 얼음물을 들이켰던 기억이 선명하다. 서악마을 곳곳에 자리한 왕들의 무덤을 살필 땐 그곳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들을 떠올렸다. 무열왕,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1400여 년 전을 살았던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려면 큰 상상력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뜨거운 바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저물 무렵 석양이 유난히 붉었다. 세상사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또한 끝이 있다. 선도산과 서악마을, 서악동 고분군, 백제인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믿었던 충남 청양의 칠갑산까지 두루 돌아봤던 여정의 끝이 이제야 보인다. 최근에 찾아간 서악의 산과 왕릉 주변엔 늦가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11월 말이었으니 그럴만했다. 바람은 차가워졌고, 짙푸른 녹음은 갈색으로 변했다. 2시간 가까운 긴 산책에도 땀이 흐르지 않았다. 쉽지 않은 취재와 기사 작성이었지만 보람과 감동이 없지 않았다. ‘4개월 동안 내가 보고 느낀 건 무엇이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문화와 예술을 귀하게 여겼던 천년왕국 신라의 유물을 직접 보고, 선도산 성모의 설화와 전설 속에 담긴 은유와 상징을 파악하려 애쓰고, 줄줄이 늘어선 신라 통치자들의 유택에 관한 논문을 읽었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발견한 선도산의 3가지 보물을 다시 한 번 요약하는 것으로 짧지 않았던 여정을 마무리하려 한다. ◆ 여전히 아우라 내뿜는 마애여래삼존불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혹은,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으로 불리는 불상은 무열왕 통치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사학자들은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이 조성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내놓고 있지만, 연대를 알려주는 사료가 없어 불상이 깎아 세워진 시기를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다. 지금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지만 부처상과 보살상이 내뿜는 아우라(aura·예술품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는 흘러버린 1천 년 이상의 시간과는 무관하게 빛난다. ‘두산백과’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현재 모습을 그려내듯 설명하고 있다. 이런 문장이다. “본존(本尊) 높이 6.85m, 왼쪽 협시보살(脇侍菩薩) 높이 4.05m, 오른쪽 협시보살 높이 4.05m다. 선도산 정상의 커다란 바위에 본존을 조각하고, 양 협시보살은 다른 돌로 된 삼존불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많이 파손되었으나 고졸(古拙)한 미소가 남아 있고, 목은 길지만 삼도(三道)는 잘 보이지 않으며, 어깨는 넓고 크나 움츠린 것 같아 군위(軍威)의 삼존석굴 본존불과 같은 형태다. 한쪽 어깨에 걸친 법의(法衣)는 묵직하게 보인다…(후략)” 부처의 양쪽을 보좌하듯 서있는 2개의 보살상은 파손의 정도가 비교적 덜하다. 그래서일까? 거기서 “신라인의 미소를 봤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 남성적인 힘을 풍긴다”는 건 ‘위키백과’의 부연이다. 경주를 비롯한 한국 곳곳엔 돌을 깎아 만든 불상이 드물지 않다. 그 가운데서도 빼어난 미적 감각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다. 이 평가에 관해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 서악동 고분군에 김유신 무덤이? 사적 제142호인 서악동 고분군은 경주 시내 한복판에서 관광객들을 맞는 대릉원과는 또 다른 고적함과 조용함으로 여행자들에게 다가온다. 서악마을 초입에 자리한 무열왕릉은 웅장하고 거대하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열왕 김춘추를 모르지 않는다. ‘삼한일통의 토대를 닦았다’고 이야기되는 무열왕은 영화와 TV 속 역사드라마 등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김춘추의 업적과 위상에 어울리는 대형 고분이다. 무열왕릉을 뒤로 하고 선도산 자락으로 발길을 옮기면 적지 않은 수의 고분을 볼 수 있다. 비석이 없어 매장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기 어렵지만, 학계에선 이 무덤들을 왕릉으로 추정한다.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등이 깨어나지 못할 영원한 잠에 들어있다고 여겨지는 서악동 고분군의 주인들에 관한 ‘나무위키’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여기엔 무열왕 이상으로 지명도가 높은 신라 장군 김유신이 등장한다. “서악동 고분군과 김유신묘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는데, 바로 배총(陪51A2·큰 무덤 옆에 딸린 작은 무덤) 중 하나가 김유신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김유신묘는 난간석이 설치된 무덤으로 왕릉급의 장식으로 형성돼 있다. 난간석의 변화 등을 추론할 때 지금의 김유신묘는 김유신의 무덤이 아니라 신라 왕들 가운데 한 명의 무덤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서악동 고분군 아래 2기의 배총 가운데 하나가 실제 김유신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이미 1351년 전에 사망한 김유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아볼 방법이 있을까?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할 듯하다. 그러나, 이런저런 논란과는 별개로 선도산 아래 서악동 고분군에 잠든 이들이 7세기 신라의 최고 권력자들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 2100여 년 전 신라의 시작을 알린 선도산 성모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태동해 935년까지 지속된 우리 땅 고대왕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는 “진한 6부, 혹은 사로 6촌이 자신들을 다스려 줄 임금을 원하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내려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맞이해 거서간(임금)으로 세웠다”고 쓰고 있다. 신라의 출발에 관한 서술이다. 박혁거세를 신라의 첫 번째 통치자로 보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동의한다. 그의 탄생에 관해선 각기 다른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이와 관련한 고문헌의 기록을 아래 옮긴다.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강림한 말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화를 전하면서도 한편으로 선도 산신(山神) 설화를 함께 기술해두었다. 선도성모 설화(仙桃聖母 說話) 또는 사소부인 설화, 파소부인 설화는 신라의 건국자 박혁거세의 생모가 바다를 건너가 박혁거세를 낳은 후, 경주 선도산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다. 역사책에서 선도 성모의 이름은 파소 혹은, 사소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선도 산신(파소·사소)이 바로 바로 선도산 성모다. ‘한국민속문학사전’에 의하면 선도산 성모는 신라의 시조모로 알려졌기에 신라 건국 시기에 출현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접한 성모 숭봉(崇奉)의 일을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이 최초의 자료라고 한다. 역사 서적 속에 등장하는 선도산 성모는 2100여 년 전 인물이다. 타임머신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누구도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명확하게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신라의 시작과 함께 이야기되는 박혁거세와 밀접한 관계로 기록된 선도산 성모는 앞으로도 신라 역사의 주요한 연구대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끝

2024-12-10

전쟁의 공포 속 신라 백성의 마음 위로해준 ‘염화미소’

불국정토(佛國淨土) 혹은, 서방정토(西方淨土)가 되고자 했던 신라엔 돌과 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부지기수였다. 이 사실에는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석굴암은 직사각형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돼 있다. 360여 개의 돌로 천장을 만들어낸 기법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 빼어남이 빠지지 않는다. 석굴암 본존불(本尊佛·가장 높은 지위의 부처)과 십일면관음보살상, 사천왕상 등은 능수능란한 석조 기법과 사실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표현, 화려함과 미려함에서 21세기 석물조각 기법을 훌쩍 뛰어넘는 신라 석공들의 기예를 보여준다. 경주 남산의 미륵곡 마애여래좌상(彌勒谷 磨崖如來坐像) 또한 신라 사람들의 탁월한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불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다. ‘위키백과’는 “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불상”으로 미륵곡 마애여래좌상을 평가한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는 상투 형태로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는 묘사는 이 불상이 지닌 사실감과 핍진함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시대 만들어진 불상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한 시절에 들어선 왕릉이 즐비한 서악 일대를 굽어보며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어떤 위상과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과 4.53m의 관음보살상 영남대학교 한국학과 이창국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에선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논문은 아래와 같은 서술로 시작된다. “경주 시가지 서쪽에는 서천(형산강)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 서천 너머에 무열왕릉과 경주 서악동 고분군이 자리한 선도산(해발 380m)이 있다. 선도산에는 신라 왕릉과 고분을 비롯하여 ‘서형산성(西兄山城)’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 ‘성모사(聖母祠)’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있다. 그리고 아미타삼존상이 이 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 쓰인 ‘아미타삼존상’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대 신라는 물론, 현대 경주에서도 기이한 설화와 신성함이 숨 쉬는 지역으로 지목되는 선도산 일대의 형상을 설명한 이창국의 논문은 마애여래삼존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높이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좌측에 높이 4.53m의 관음보살상, 우측에 현재 높이 4.56m의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이중 본존불은 자연 암벽인 안산암에 조각된 마애불이고, 좌우측의 협시보살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별도의 독립된 입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현재 코의 일부와 입과 턱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바닥에는 별석의 화강암대가 있다. 대좌는 복판의 복련석 5매로 구성되어 있으나, 우협시상 측면에 본존불의 대좌로 추정되는 석재편들이 있어 현재의 대좌는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차례 찾아 그 지역을 꼼꼼히 돌아본 경주 서악마을(선도산 일대)엔 무열왕릉을 비롯해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법흥왕릉 등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지호지간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자면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 정상 부근에 우뚝 서서 부처를 숭배하고, 불가(佛家)의 이념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신라의 지배자들이 묻힌 능(陵)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신라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낼 대상물의 필요성 이런 외형적인 모습을 갖춘 마애여래삼존불이 선도산에 자리한 것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엔 “신라의 지배층들은 민심 이반에 대처하고, 삼국통일전쟁에 따른 신라인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강구했을 것”이란 문장이 나온다. 6~7세기는 신라가 백제·고구려·당나라와 영토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다투던 시기다. 피와 살점이 튀고, 언제 생명을 잃을 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신라의 지배층은 백성을 하나로 묶어낼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을 터. 그랬기에 “불교적 대안으로 아미타신앙을 유행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미타신앙의 대상물로, 신라인들의 마음을 위로할 존재물로 삼존불을 조성했을 것”이란 게 논문을 쓴 이창국의 추론이다. 살아있을 때 덕을 쌓고 선행을 베푼다면 죽어서 부처가 다스리는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삼국통일 즈음 전쟁 시기에 신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그런 믿음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던 게 아닐지. 계속 경주 서악마을엔 어떤 이야기가…선도산 성모 설화 스며있는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공간 지금의 경주 서악마을은 ‘황금의 고대왕국’으로 불리는 신라의 시작을 알린 선도산 성모의 신비로운 설화가 스며있고, 미학적인 측면에서의 완성도가 그 어느 석불보다 뛰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또한, 신라를 통치한 여러 왕의 유택(幽宅)들까지 줄지어 늘어선 지역이니 서악마을은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공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한국관광공사는 경주 서악마을 고분군(古墳群·다수의 고분이 집중된 곳)의 가치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려주고 있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뒤편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1964년 8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곳 고분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봉토 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를 알 수는 없으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왕릉으로 추측한다.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왕의 무덤과 신라인들이 ‘성스러운 어머니’로 추종했던 여성의 신화, 여기에 거대한 석불의 비밀스러움까지 깃든 서악마을은 그간 유물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지역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24년 3월 출간된 ‘서악마을 이야기’엔 이런 노력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담겨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선도산 아래 서악마을이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쏟은 15년간의 땀방울을 보여준다. 그랬기에 경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문화유산 주변의 경관과 마을을 대상으로 삼은 선도적 노력과 풍성한 활용 사례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간 서악마을은 삼층석탑 주변에 작약과 구절초를 심어 지역민과 관광객을 위한 축제를 열었고, 인근 서원과 서당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가 어우러지는 각종 행사도 다수 기획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신라 왕릉 여러 기가 선도산에 자리한 이유는 서남으로 뻗은 능선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설에 더해 경주 서악마을을 ‘고대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조성할 수 있었던 건 신라의 문화와 예술을 역사적 단절 없이 오늘에 이어가고 싶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꽃피는 계절엔 자연이 선물하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고, 울울창창 나무들 푸른 여름엔 우리 땅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눈 내리는 겨울이면 낭만과 서정 속에서 즐거이 서성일 수 있는 경주 서악마을. 이런 공간을 가졌다는 건 비단 경주 사람들만의 행운이 아닌 우리 모두의 즐거움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2-03

이차돈의 순교… 불교 공인으로 재탄생한 신라

“잘려진 목에서 하얀 피가 솟고, 처형되던 날 서라벌 하늘에선 꽃비가 쏟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시절 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이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을 위해 쓰러진 그날 이후 신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으로 재탄생한다. 불교가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가 된 것이다.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도입은 비교적 늦었다. 토속 신앙을 받드는 백성들이 많았고, 권력층 역시 부처가 설파한 도리가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하여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게 이유다. 하지만, 막상 불교가 국교 수준으로 숭배 받게 되자 신라는 빠른 속도로 대형 사찰을 건설하고, 절에서 생활하는 불자들을 귀하게 대접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책 등에 의하면 ‘신라는 불교 도입에 대한 반대가 심해 아도 화상(삼국시대 경북 일대에서 활동한 승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뒤늦게 국가가 불교를 공인’한다.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공인 이후로 신라의 불교 신봉은 삼국 중에서 가장 열성적이었고, 불교를 국가 운영원리로 채택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신라 불교의 전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민승(民僧)이 들어와 공식 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한 것이 고구려·백제 불교와의 차이점이다.” ◆호국적 성격이 강했던 삼국시대 신라 불교 이차돈의 죽음이 촉발시킨 ‘불교의 국교화’ 이전에도 불교를 신라에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없지 않았다. 각종 고문헌과 전래 기록상에는 신라 제13대 미추왕 2년(263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의 신라 불교는 나라와 왕실을 수호한다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이 강했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단합시켰다. 대표적인 사례로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황룡사 9층탑 건립, 사천왕사(四天王寺) 건립 등이 있으며, 특히 화랑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불교정신으로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지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위키백과’의 설명이 이 사실을 부연한다. 법흥왕 통치 시절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에선 금속, 목재, 석재로 만들어진 수천, 수만의 불상이 탄생한다. ‘숭배의 대상’을 형상화 하는 작업이었다. 왕을 포함한 신라의 지배층이 이런 작업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유사한 형태를 띠며 국가가 주도한 불교 프로젝트는 6세기 이후 신라가 멸망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지속됐다는 게 대다수 사학자들의 이견 없는 주장이다. 6세기에 조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또한 ‘불교 전파의 어려움-이차돈의 죽음-불교의 국가 공인-급속하게 진행된 거대 불사(佛事)-불교왕국으로 전이(轉移)된 신라’라는 공식 속에서 세워졌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영남대학교 한국학과 이창국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은 선도산 아미타삼존상(마애여래삼존불)의 현재 모습을 서술하면서 시작된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삼존상은 현재 높이 5.81m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좌측에 현재 높이 4.53m의 관음 보살상, 우측에 현재 높이 4.56m의 대세지보살상이 있다. 이중 본존불은 자연 암벽인 안산암에 조각된 마애불이고, 좌우측의 협시보살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별도의 독립된 입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현재 코의 일부와 입 및 턱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파손됐으며, 바닥에는 별석의 화강암 대좌가 있다.” 이창국의 논문은 불상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세밀하게 관찰해 “본존불에는 표면 곳곳에 원형 구멍이 있는데, 실제 청동못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과 “좌우 협시상 조성 당시에는 머리부터 신체, 대좌와 발을 조각한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무열왕 통치 기간에 깎아 세웠을 것이라 유추하고, 또 다른 사학자들은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 김법민 재위 시절에 조성된 게 아닌가라고 짐작한다. 세 개의 불상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이제 세상에 남아있지 않으니, 어떤 추론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든 거대 불사는 당시의 신라사회 분위기로 봤을 때 ‘호국(護國)’이라는 목적의식에 아래에서 이뤄졌음이 분명할 듯하다. 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의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역시 논문의 맺음말을 아래처럼 끝내고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전쟁의 참가자뿐만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심리적 안정과 전쟁에 대한 의지를 결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문무왕은 민심 이반에 대처하고 왕권의 안정화를 추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계속) 선도산 성모, 혹은 서술산 성모 200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이다. 기원전 57년. 현재의 경주를 포함한 영남 일대에 하나의 고대왕국이 형성된다. 훗날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삼한을 통합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사라진 935년까지 ‘황금의 제국’ 또는, ‘빛나는 불교왕국’으로 한국사에 이름을 남긴 신라. 그 신라의 첫 번째 왕으로 기록된 이는 박혁거세.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와 때놓을 수 없는 ‘설화 속 인물’이 바로 선도산 성모다. ‘삼국사기’ 등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에 의하면 선도산 성모는 선도성모(仙桃聖母), 서술성모(西述聖母) 등으로도 불렸다. 한국 신화에서는 선도산의 성모로, ‘삼국유사’에선 신라의 시조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생모로 지목된 여성. 사소부인(娑蘇夫人), 서술산 성모 역시 선도산 성모를 칭한 다른 이름으로 추측된다.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윤혜신의 논문 ‘서술산 여신 신화와 선도산 여신 신화의 서사 윤곽과 구비문학적 면모’는 이 여성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래 그 내용을 인용한다. “서술산에 여신이 있었다. 서술산 여신은 솔개를 따라 산에 이르렀고 이곳을 집으로 삼았다. 서술산 여신이 박혁거세를 낳았다. 서술산 여신이 계룡으로 현신하여 알영을 낳았다.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해 붉은색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었다. 그걸 남편에게 주니 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해 신이한 영험을 알았다. 서술산 여신은 나라를 지켰고, 신령한 이적(異跡·신비롭고 기이한 일)을 많이 행했다. 서술산 여신은 나라가 생긴 이래로 나랏제사를 받았다. 제54대 경명왕의 매를 여신이 찾아주었다. 서술산 여신은 안흥사의 불전을 수리하도록 도왔다.…(후략)” 자그마치 1000년 가까이 지속되며 사회시스템·문화양식·예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뒤를 이은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 영향을 미친 신라였기에 그 시작에 관한 궁금증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노력이 오랜 시간 지속됐다. 오늘날도 관련된 연구서와 학술논문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과정 가운데 앞서 말한 윤혜신의 논문은 선도산 성모를 ‘성스러운 처녀’로 설명한다. 이런 대목이다. “고대의 여신에게 처녀성이라는 용어는 생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자질, 주관적 상태, 심리적인 태도에 관련돼 있는 정신적 자질로 남성과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남성에 의존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여신은 남성 위주의 질서로 재편되기 전의 사회에서 발견된다.” 몇몇 사람들은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다는데, 그렇다면 선도산 성모가 알을 낳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다. 거기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선도산 성모의 이야기는 사실의 잣대가 아닌 고대 설화의 특성인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2-01

왕릉 굽어보는 부처… 서방정토 꿈꾸던 신라인들의 성지

40대 초반 시절이다. 보름쯤 이란을 여행했다. 지금처럼 이스라엘과 군사적으로 극단적 대립을 하던 시기가 아니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인도 ‘이슬람 공화국’ 이란을 돌아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지(城地)로 불리는 야즈드(Yazd)는 이란 중부에 자리한 사막도시다. 사흘을 거기 머물며 적지 않은 이란 사람들과 만났고, 하루는 시간을 내서 석조건물과 꺼지지 않는 불을 보존한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란 곳을 찾아갔다. 기원전 2000년경에 생겨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다. 이란 동부 지역을 활동 근거지로 삼았던 그는 이미지와 상징으로의 ‘불’을 숭상했다. 이 종교를 배화교(拜火敎·신격화된 불을 숭배하는 신앙)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지금의 이란은 이슬람교를 축으로 하는 신정일치국가에 가깝다. 그렇기에 한때 페르시아를 상징하기도 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다. 하지만, 특정 종교의 성지로서 가지는 무게감은 여전해 보였다. ‘성지’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지역을 뜻한다.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사전적 의미 파악을 위해 자료를 찾아보면 이런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종교의 발상지나 종교사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난 장소를 성지로 지정한다. 해당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민간에서 전승되는 경우도 있다. 다수의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성지로 여기는 곳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예루살렘이다. 그곳은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 3가지 유력종교의 성지다. 사실 유대교의 성지는 대부분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도 성지로 인정된다.” ◆ 신라인들이 ‘성지’라 여겼던 지역은… 이란의 야즈드가 조로아스터교의 성지고, 예루살렘이 유대교를 포함한 3개 종교의 성지라면 경주 서악과 선도산 일대는 ‘신라 불교의 성지’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불교가 국교의 위치로 격상됐던 법흥왕 이후 신라의 지배자들은 나라를 서방정토(西方淨土·부처가 다스리는 불화 없는 땅)로 만들고자 했다. 어떤 왕도 예외가 없었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운 무열왕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삼존불과 불교신앙의 수호자로 역할했던 신라 왕들의 무덤 다수가 서악과 선도산에 있다. 거기에 더해 그곳엔 신라의 최초 통치자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불리는 선도산 성모의 설화까지 떠돈다. 동국대학교 사학과 최연식 교수의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성지로서의 선도산에 관한 요약 설명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은 경주평야 입구의 중요한 지역으로 신라시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경주의 서악(西岳)으로 크게 중시되었다. 이곳에는 법흥왕과 진흥왕, 진지왕, 무열왕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왕릉들을 비롯해 다수의 상층 귀족들의 고분이 만들어졌고, 산 정상 근처에는 대형 아미타 삼존불상이 왕릉을 바라보고 서 있다.” 기자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악과 선도산을 찾을 때면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어떤 묘한 기운에 휩싸이곤 했다. 아마도 짧지 않은 시간 그 일대에 관한 연구서와 관련 논문들을 눈여겨 읽었던 탓이었을 게다. 때론 보잘것없는 지식이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모종의 기운’과 ‘상상력’은 앞서 언급한 이란의 사막도시 야즈드를 여행했던 당시에도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시나고그(synagogue)’로 불리는 유대교 회당과 조로아스터교 사원, 이슬람 사원 모두가 비교적 원형을 갖춘 채 남아있었고, 흙으로 지어진 전통 페르시아 가옥들도 보존돼 있는 지극히 ‘성지스러운 풍경’ 속에서 지냈던 까닭이었다. 경주 서악과 이란 야즈드가 마찬가지다. 두 지역은 사람들에게 고고학적 상상력을 펼치게 하고, 종교가 가진 엄숙함을 체험하게 해준다. ◆ 고려시대에도 신성함을 인정받았던 곳 앞에서 말한 논문 ‘선도산의 신성함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 역시 선도산이 비단 신라시대만이 아니라, 왕조가 바뀐 고려 때도 그 존엄성을 인정받은 지역이라고 쓰고 있다. 이런 서술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시조를 낳은 존재이자 유력한 산신이라고 하는 선도산 성모에 관한 전승(傳承·문화, 풍속, 제도 등을 이어받아 계승함)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 전승 등은 선도산이 신라시대 이래 경주의 주요한 신앙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동쪽 입구의 토함산과 함께 경주를 수호하는 양대 신성(神聖)으로 중요하게 제사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후략)” 신라 태동기의 경주 서악을 떠올려본다. ‘성스러운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이 신이(神異)한 술법을 행하고, 신령스런 기운을 간직한 구름이 산을 에워싼 풍경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6~7세기엔 바로 거기서 마애여래삼존불을 깎아 세우는 거대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생명을 다한 왕들이 극락정토(極樂淨土)로 갈 것임을 믿으며 고단한 몸을 눕혔다. 이런 곳이 성지가 아니면 어디가 성지겠는가? (계속) ‘서악’에 누운 신라의 왕들 얼핏 봐도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무덤은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다소 과장하면 작은 산처럼 솟은 거대한 봉분의 크기가 그렇고, 깔끔하게 단장된 묘역 풍광이 그러하다. 게다가 핏줄로 연결된 이들의 유택(幽宅)임을 증명하듯 줄지어 자리했다. 사람들이 ‘서악동 고분군’이라 칭하는 신라시대 무덤들은 왕이나 최고 권력자의 능(陵)으로 추정된다.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이것들은 선도산 정상 부근에 꼿꼿이 서서 1400년 세월을 이겨낸 마애여래삼존불,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태동시킨 선도산 성모의 전설과 함께 경주 서악(선도산 일대)을 ‘참으로 서악답게’ 보이게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는 6세기 이전까지는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대릉원 등에 왕의 묘역을 조성했다. 이후 6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왕릉이 서악 일대에 축조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서악동 고분군은 신라 중고기 왕들의 묘역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1963년 8월 29일 사적 제142호로 지정됐고, 지정 당시 ‘서악리 고분군’으로 불리던 것이 2011년에 서악동 고분군으로 명칭 변경됐다. 지난여름부터 가을이 깊어져 찬바람이 부는 11월 중순까지 여러 차례 서악동과 선도산을 찾았다. 취재를 위해서였다. 방문이 거듭될수록 그곳 고분에 묻힌 이들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다를 뿐, 1400여 년 전 신라의 왕들이나 기자나 결국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유한하고 미미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그런 날은 무덤 사이를 거니는 산책 시간이 길어지곤 했다. 그렇다면 서악동 고분군엔 누가 묻혀 있을까? 어떤 이들이 영욕(榮辱)이 반복되는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잠에 들어있을까. 이 의문에 ‘나무위키’가 답을 들려줬다. “역사고고학적으로는 무열왕을 비롯해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등의 무덤으로 서악동이 거론된다.…(중략) 조선시대에 비정돼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이 실제 진흥왕과 진지왕의 능이 아니라 서악동 고분군의 대형분이 진흥왕릉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은 왜 나왔을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이름 높은 통치자다. 그런데, 서악동 고분군에서 진흥왕릉으로 지목된 능은 그 규모와 주변 장식이 작고 소박하다. 그런 이유로 “남긴 업적과 위상에 맞지 않게 너무나 초라한 무덤”이라는 의구심이 떠돌았고, 실제 진흥왕의 유택은 봉분의 크기가 비교적 큰 고분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논란이 있었던 것. 하지만, 이러한 논란과는 무관하게 선도산 아래 너른 평지에 만들어져 있는 서악동 고분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엄정한 진리를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또 다른 선도산의 보물’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26

웅녀·유화·허황후… 그녀들의 신비한 역할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있고, 사진이라는 구체화된 증거가 남는 시대의 역사는 왜곡될 가능성이 낮고, 미루어 추측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오래된 문헌과 낡은 고서(古書)에 짤막하고 은유적으로 남은 기록을 찾아내고 연구해 그 비밀을 푸는 행위다. 자료가 피상적이고 부족하면 실체를 밝히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고대국가의 태동과 그것에 얽힌 각종 설화나 전설을 들여다보면 ‘아득하다’는 느낌 앞에 서게 된다. 사학자건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건 마찬가지다. “건국신화는 초현실적·초자연적인 내용을 전함과 동시에 국가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 역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있다”고 말한 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채미하 강사다. 채 강사의 논문 ‘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는 선도산 성모와 동일한 의미의 ‘선도산 신모’를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성모’는 누구였을까? 오랜 옛날 시작된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역사 속 성모(=신모)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죽음 이후엔 어떤 방식으로 추모됐는지를 추적하고 있는 채미하의 논문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한국 고대 각국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시조의 어머니와 시조의 비는 신모였다. 우선 시조의 어머니, 시조모로는 고조선 건국신화에 보이는 웅녀가 있다. 웅녀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곰이었으나 신의 아들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어 환웅의 시험을 통과한 후 사람이 되었고, 또 아이를 낳기를 간절히 원하여 인간으로 변한 환웅과의 결합을 통해 단군을 낳았다.” 채미하는 우리 땅 고대국가의 대표적인 신모로 고조선의 웅녀, 고구려의 유화, 백제의 소서노, 신라의 선도산 신모와 알영, 금관가야의 허왕후, 대가야의 정견모주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화는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의 어머니다. 아들이 나라를 세운 후에는 여신(女神)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유화의 경우처럼 국가를 태동시킨 성모라면 사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허왕후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비(妃)이자 김해 허씨의 시조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됐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인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는 것이 ‘두산백과’의 설명. 유사한 맥락에서 이야기되는 정견모주는 또 어떤 관련 설화를 지니고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펼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된다.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 등장하는 가야 산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찬자가 인용한 ‘석이정전’ 즉, 승려 이정의 전기에 등장하는 것. ‘석이정전’은 신라 때 최치원이 지었다고 전한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가야 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게 감응돼 대가야와 금관국의 왕을 낳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순응전’ 즉, 승려 순응의 전기도 인용돼 있는데, 그에 따르면 대가야의 월광태자가 정견의 10대손이라고 한다.”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에 가까웠던 설화 속 성모들 앞서의 설명이나 인용처럼 고대국가의 태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神)에 필적하는 능력과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유화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계 왕들에 의해 부여신(神)으로 숭배받기도 했고, 허왕후는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가야에 불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한다.‘한국 고대 신모(神母)와 국가제의(國家祭儀)-유화와 선도산 신모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신모는 시조모와 시조비로 대별’된다. 둘 가운데 시조모는 천신과 혼인한 웅녀, 유화, 정견모주가 있다. 배우자 없이 아들을 낳은 선도산 성모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 논문은 “시조비로는 알영과 허왕후가 있으며, 소서노는 시조모이자 시조비이기도 했다”고 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건국신화를 보면 신모 중 시조모는 시조를 낳고 양육하고는 건국 이후에는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신모가 한국 고대 건국신화에서 소외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유화는 시기에 따라 변화되는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시비·시아하백녀하백녀 유화로 나오며, 그 성격도 수신적 성격뿐만 아니라 신모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선도산 신모 역시 6촌장 세력과 연합하면서 신모로 자리매김했고 신라 중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나라를 통치할 아들을 낳거나, 최고 권력자의 아내가 된 여성.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석이정전’ 속에는 고대국가의 태동과 형성에 관여한 그녀들의 신비스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의 비밀이 온전히 풀릴 날이 언제일지 궁금한 게 비단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계속) 신라 첫 임금 박혁거세와 선도산 성모 신라 사람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를 떠도는 설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성모(聖母)가 살았던 곳이 선도산’이란 게 아닐까. 박혁거세는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으로도 불린다. 무슨 뜻일까? ‘거서간’은 진한 시대의 명칭으로 왕이나 귀인을 부르는 칭호다. 이와 관련 일연의 ‘삼국유사’는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고 쓴다. 그렇기에 여기서 ‘사소부인’으로 지칭되는 사람을 ‘선도산 성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건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은 구체적 증거가 없거나 부족한 ‘신화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두 사람이 어떤 방식이건 모종의 형태로 결부돼 이야기되고, 논의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고문헌에선 박혁거세의 출생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삼국유사’를 다시 펼쳐본다. 이런 서술이 등장한다. “혁거세는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도무지 질서가 없다.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고 의논했다. 그때 알천 언덕에서 멀지 않은 양산(楊山) 기슭에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이 나정(蘿井)이란 우물 곁에 가보니 하얀 말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가 하늘로 날아갔다. 거기엔 자줏빛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는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요약해 정리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이 난생설화(卵生說話)와 더불어 신라의 첫 임금이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함께 언급한다. “박혁거세는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있다. 사소부인은 선도산 성모와 같은 여신이다.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곳은 서형산(西兄山) 혹은, 선도산(仙桃山)이라 불리는 산이다.” 까마득한 2000여 년 전 고대왕국의 출발과 관련된 설화이니 현대의 시각과 인식에선 그저 허무맹랑한 풍문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게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 이야기다. 그러니, 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건 당연할 터. 하지만, 대부분의 고문헌이 기록하고 있는 박헉거세의 탄생설화는 “아기였지만 몸에서 광채가 나고, 그 아기를 본 짐승들이 몰려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는 등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이처럼 특별했던 아기, 즉 신라의 최초 통치자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을까? 선도산 성모가 낳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들려줄 사람은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24

‘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진 영적이고 신령한 땅

가을 하늘 아래 서있는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너른 벌판 아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을 내려다보고 선 마애여래삼존불, 고대왕국 신라 첫 번째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성모(聖母)의 설화, 성스러운 기운이 서렸다는 땅 서악(西岳)…. 이 모두는 선도산(仙桃山)이란 키워드와 연결되는 것들이다. 조용한 늦가을 오후. 한낮에 찾은 선도산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길게 엎드려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얼핏 보기엔 경주의 여느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른바 ‘서악’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역사학계가 주목한 곳이다. 민족사학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이기백(1924~2004)은 삼한일통(삼국통일) 이전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다는 지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74년의 일이다. “신라에는 통일전쟁 전에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오악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서쪽의 선도산, 남쪽의 남산(南山), 북쪽의 북악(北岳), 중앙의 부악(釜岳)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전쟁을 치른 뒤에는 오악도 국토의 사지(四至)에 있는 산들로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이때의 오악은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鷄龍山),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북쪽의 태백산(太白山), 중앙의 부악이다. 이는 각 방위에 따라 국토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그 지역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제압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고 한다.” ◆‘명당 중 명당’으로 여겨졌을 경주의 서악 앞서의 언급처럼 서악은 신라 오악 중 하나로 선도산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세상이 오래 기억해주길 원한다. 민의가 반영되는 선거가 아닌 타고나는 혈통으로 왕위를 이어갔던 고대엔 이런 열망이 더 컸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나 어마어마한 규모로 축조된 중국 서안의 진시황릉은 그런 열망이 낳은 유적이 아닐까. 합리와 이성보다는 하늘의 뜻과 임금의 의지로 지배되던 고대엔 이른바 ‘명당(明堂) 중 명당’이 죽은 왕의 유택(幽宅) 자리로 선택됐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분명 서악을 명당이라 믿었을 터. 1964년 여름 사적 제142호로 지정된 경주 서악동 고분군(慶州 西岳洞 古墳群)은 통일신라시대 즈음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선도산 초입에 커다랗게 모습을 드러낸 무열왕릉의 뒤편 언덕에 자리한 네 개 봉분을 지칭하는 서악동 고분군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 고분들은 경주 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서악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상), 7세기 신라 불교 조각과 아미타신앙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논문 역시 서악과 선도산이 가진 지리적·역사적 위상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불상(마애여래삼존불)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해 서악 동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 같이 조성돼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 ◆마애여래삼존불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대부분이 알다시피 신라는 부정할 수 없는 불교왕국이었다. 법흥왕 이후 국교(國敎) 수준으로 귀하게 대접받았던 신라 불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불교신앙을 아미타신앙이라 한다. 그렇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뭘까? 불화와 번뇌가 없는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부처다. 앞서 말한 최미경의 논문엔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해 조성 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는 서술이 나온다. 여기에서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이유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논문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이러한 대규모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 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최미경을 포함한 적지 않은 사학자들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무열왕 김춘추, 또는 문무왕 김법민 재위 시절에 바위에 새겨졌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신라 사람들이 영험이 깃든 성스러운 땅이라 믿었던 서악, 조금 더 좁혀 말하자면 선도산은 그런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가 행해지기에 모자람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추정된다. 영적이고 신령한 땅, 마애여래삼존불이 세워지기에 안성맞춤인 산, 신라를 태동시킨 여성의 신화….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 역시 이 지역이 가진 신비스러움에 관해 짤막하게 서술한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 불구내왕이라고도 하는 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현인(賢人)을 잉태해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 것인가…(후략)” ◆마애여래삼존불은 수나라 시대 양식 영향 받아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마애여래삼존불의 양식을 “본존은 고부조임에도 볼륨감이 없어 전체가 하나의 원통형 기둥처럼 보이며 세부 표현을 생략해 간결하다. 이런 간결함, 양감 없는 체구, 부드러운 조형은 북제불(北齊佛)과 유사하나 적절한 신체 비율과 당당한 체구는 수대(隋代·수나라 시대)의 양식”이라고 보고 있다. 더불어 “통견의 법의는 굵은 선을 한 줄 새기고 그 아래 얕은 선을 번갈아 넣는 새김을 반복해 조각의 단조로움을 피했다. 몸에 밀착된 얇은 옷주름이 대칭으로 내려오는 것은 북제 불상의 특징이지만 장대한 신체는 오히려 수대 불상에 가까운 것으로, 본존은 북제불을 원류로 하면서도 보다 진전된 수대 양식을 받고 있다”고 쓴다. 7세기 중반 무렵. 번창 일로에 있던 불교왕국 신라는 당시 최고의 석조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동원해 부처와 보살의 형상을 선도산 정상 부근에 새겼을 것이다. 그것들이 장구한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신라를 신라답게, 경주를 경주답게’ 보이게 하는 보물로 존재하고 있다.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19

선도산이 간직한 최고 유물은 ‘마애여래삼존불’ 아닐까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무너지고, 파괴되고, 시간에 깎여나간 것들이 멀쩡하고, 번듯하고, 번쩍거리는 것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로 폐허와 상실을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20년 전쯤이다. 인도를 여행했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 낡은 버스와 연착을 거듭하는 기차를 갈아타며 인도 남부 내륙 깊숙이 자리한 도시 ‘함피(Hampi)’를 찾아갔다. 아주 오래 전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수도였던 함피는 힌두왕국과 이슬람제국이 번갈아가며 지배한 지역. 예나 지금이나 서로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자주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함피도 다르지 않았다. 힌두왕국이 번성할 때 이슬람 세력은 웅크렸다. 힌두교도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을 탄압하고, 그들의 종교가 발붙일 수 없도록 억눌렀다. 이슬람 세력은 ‘우리가 권력을 얻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힌두교도의 통치가 끝났을 때 등장한 새로운 지배자는 이슬람제국이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힌두교와 힌두교도에 대한 가혹한 핍박이 시작됐다. 힌두교를 신봉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고, 힌두교가 섬기는 갖가지 신(神)의 형상은 모조리 목이 날아갔다. 이슬람교도의 보복이었다. 파괴된 함피의 신전과 조형물은 지금까지도 온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도시 곳곳에 무너진 유적들이 보인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함피를 ‘아름다운 폐허’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서진 유적과 유물은 부서진 유적과 유물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터. 그래서다. 1986년 유네스코는 폐허의 함피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세월과 세파도 온전히 파괴하지 못한 선도산의 불상들 올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취재를 위해 여러 차례 경주 선도산을 찾았다. 선도산이 간직한 최고의 유물은 누가 뭐래도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닐까? 처음으로 그 불상을 봤을 때 20년 전 인도 함피에서의 기억이 소환됐다. 시간에 깎여나가고, 세월에 풍화되며 잊힐 수도 있었던 신라의 석불(石佛)은 21세기인 오늘도 실체로 우리들 앞에 존재하고 있다. ‘경이(驚異)’는 이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닐지.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는 바로 이 마애여래삼존불이 무열왕 시기에 만들어졌다 추정하며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이란 논문을 쓴다. 논문에 쓰인 ‘아미타삼존불입상’은 마애여래삼존불을 지칭한다. 같은 불상을 이야기하는 것. 그 논문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외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왕경 경주 서편에 위치한 선도산(仙桃山)의 정상에는 높이 6m가 넘는 마애불이 조성돼 있다. 우뚝 솟은 안산암 암벽 위에 환조에 가까울 정도의 고부조로 새겨진 불상은 현재 얼굴과 몸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간직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상의 현존 높이는 5.81m이지만 얼굴이 온전히 남아 있다고 가정하고 복원한 높이는 6.4m 남짓이다. 불상의 좌우에는 각각 높이 4.49m와 4.56m의 보살상이 서있는데, 두 상은 안산암이 아니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 NBA 농구팀. 그들 가운데 최장신 선수보다 2배 이상 큰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가운데 불상. 법흥왕 이후 신라의 국교로 역할했던 불교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만들어졌을 7세기 당시 그 불상의 미려함과 섬세함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왕이나 최상층 귀족의 명령에 의해 신라 최고의 석공(石工)이 조각했을 터이니. ◆‘아미타삼존’을 표현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가운데 가장 큰 불상은 마모와 훼손이 심하다. 반면 양쪽에 선 두 보살상은 파괴의 정도가 덜하다. 그래서, 여전히 은은한 미소와 부드러운 곡선을 확인할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위의 논문은 이 보살상에 관해 서술하며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을 언급한다. 아미타삼존은 아미타불을 중앙에, 그 좌측에 관음, 우측에 세지(勢至)의 양 보살을 안치한 삼존을 말한다. 다시 한 번 논문을 인용해보자.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역시 부분적으로 마모됐으나 불상보다는 보존상태가 양호해 상호와 복식, 지물, 장신구 등 중요한 세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불상의 왼편, 즉 좌협시보살상의 보관에는 화불(化佛·부처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일)이 남아 있어, 세 구의 상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하는 아미타삼존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그마치 1400~1500여 년 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신라 석공은 우뚝한 불상 하나와 보살상 두 개를 힘겹게 만들어 왕릉을 굽어보게 했다. 바위를 깎고 다듬는 지난하고 긴 작업이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희미하게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유적과 유물엔 만든 이들의 피땀이 깊게 배어있을 터. 이는 신라와 백제가 다르지 않고, 동양과 서양이 동일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바라볼 때면 그걸 깎아 세운 신라 석공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계속) 서산과 태안에도 마애여래삼존불이… 불교는 꽤 오랜 시간 우리 땅을 지배한 종교이자 통치이념이었다. 신라와 백제가 그러했고, 고려 또한 사찰과 그 안에서 수도하는 불승(佛僧)을 귀하게 대접했다. 한국에서 ‘명산’이라 불리는 곳엔 대부분 큰 사찰이 있고, 불당과 인근 바위에선 수많은 불상과 보살을 만날 수 있다. 그 형태와 예술적 완성도는 각기 다르지만. 그러니, 한때 ‘불교왕국’이라 불렸던 신라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는 경주에 불상과 보살상이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도 그런 차원에서 보고 해석해야 존재 이유가 선명해진다. 마애여래(磨崖如來)란 ‘바위에 새겨 넣은 부처의 형상’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삼존불(三尊佛)은 뭘까? 어렵지 않은 한자이니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하다. ‘3개의 존엄한 부처’라는 뜻이 아닌가. 비단 옛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만이 아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불교는 한 시대의 통치이념이자 많은 백성들이 믿었던 종교였다. 그런 까닭에 경주 이외의 다른 지역에도 ‘마애여래삼존불’이라 불리는 불상이 존재한다. ‘위키백과’가 “백제 후기 중국 및 고구려와의 해상 교통을 통한 불교문물 수용의 요지였던 서산에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중앙에 여래 입상의 거구(巨軀)를 양각(陽刻)하고 여래의 오른쪽에 보살 입상을, 왼쪽에 반가사유형 보살좌상을 배치했다. 삼존에 나타난 고졸(古拙)한 미소는 백제 불상의 특이상(特異相)으로 지적된다”라고 설명하는 건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이다. 가야산 적벽에 부조(浮彫)된 이 불상은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귀한 유물. 1959년 4월 보원사지 유물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됐고, 이후 국보고적보존위원회가 국보로 지정했다. 충청남도 태안 동문리의 마애여래삼존불은 백화산 바위에 새겨져있다. 이 불상은 신라와 함께 패권을 다퉜던 또 다른 고대왕국 백제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마애여래삼존불보다 더 빨리 조각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불에 관해서 ‘나무위키’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마애불 가운데서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로 판단되며, 그 형식에서도 아주 특수한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삼존불은 크게 묘사된 석가모니와 같은 본존불의 좌우로 보살이 보좌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 마애여래삼존불은 중앙에 위치한 작은 보살의 좌우로 중앙 보살보다 큰 여래입상이 있는 대단히 특이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현재까지 발견된 마애불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것이다.”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불 역시 경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바람과 파도에 깎여 본래의 형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라인이 만든 것이건, 백제인이 조각한 것이건 1500~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치 있는 유물이란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1-12

황산벌 5000 결사대는 떼죽음을 맞았고…

우뚝 선 부처와 보살이 장엄함을 보여주는 마애여래삼존불과 줄줄이 늘어선 왕릉, 여기에 국가의 시작을 알린 성모(聖母)의 전설이 떠도는 선도산. 신라는 56명의 왕이 통치하며 992년간 지속된 강력한 고대 왕조였다. 하지만 백일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어쩔 수 없는 순리. 말기에 들어서며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이 다스렸으나, 지역에선 반란 세력들이 들끓었다. 중앙집권 정치의 힘을 잃고 있었던 신라. 이윽고 918년엔 궁예를 무너뜨린 왕건(王建)이 후백제와 비교해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신라의 마지막 집권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이름을 지우게 된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백제에 비해 신라의 멸망은 피비린내가 덜했다. 왕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새로운 실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반면 백제의 멸망 과정은 참혹했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맞서겠다고 황산벌로 나섰던 5천명의 결사대가 떼죽음을 맞았고, 이후 백제 수도로 쳐들어온 나당 연합군에 백성들은 혼비백산했다. ◆지는 해처럼 사라진 고대 왕국 백제는... 백제의 멸망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 등에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이를 요약해 옮기면 아래와 같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660년 6월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을 무사히 통과했고,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에 상륙했다. 의자왕은 계백을 출전시켰다. 하지만, 결사대 5000명은 황산벌전투에서 전멸했다. 이후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무너뜨리고…(후략)” 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인 의자왕은 무력했다.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 지척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왕자 중 한 명인 태(泰)가 끝까지 사비성을 사수하고자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남은 군대에선 이탈자가 속출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왕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한때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백제는 그렇게 지는 해의 형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자리했다. 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칠갑산 일대는 백제의 사라짐을 통곡하며 그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고자 했던 세칭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나당 연합군의 횡포로 촉발된 백제부흥운동 그렇다면 백제부흥운동을 촉발시킨 매개체는 무엇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들려주는 해답은 이렇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 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했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했다. 백제부흥군의 주요 인물로는 정무·지수신·흑치상지·복신·도침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또한 길었다. 그래서일까? 10월 중하순에 찾아간 청양 칠갑산엔 드문드문 물들어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보였을 뿐, 제대로 된 단풍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칠갑산의 초입과 등산로를 제법 오랜 시간 거닐었다. 한때는 신라와 고구려 못지않은 힘과 세력을 과시하며 일본으로까지 이른바 ‘문화 수출’을 했던 예술지향의 백제 왕조. 하지만, 사라짐의 순간은 찰나처럼 덧없고 짧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깨진 사발의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몰락한 국가를 재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백제부흥운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흥운동 초기 백제의 복신은 두량윤성 전투에서 신라군을 압도하기도 했고, 661년 가을엔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일본에서 돌아와 왕에 오르며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부흥군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고, 주요 수뇌부가 암살되기도 한다.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부로부터의 불화와 같은 편끼리의 암투, 나당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 풍왕의 고구려 도피, 신라군에 의한 주류성과 임존성의 함락…. 백제부흥운동의 짧았던 3년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직까지 백제의 서러운 멸망사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내려오는 길에 본 칠갑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유독 핏빛으로 붉었다. (계속) 토기가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전시물. 절제되고 간결한 백제토기 고구려·신라 등과 비교하면 기종 다양장식성 강하지 않고 실용적인 면 선호 ‘백제부흥운동의 본산’으로 불리는 청양군. 그곳에 건립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 가장 주목되는 건 토기다. 흙으로 만들어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던 그릇과 병은 1천 년 전 먼 옛 시대 백제인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용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엔 백제의 토기가 출토된 지역을 아기자기하게 복원해놓은 전시 공간이 있고, 흥미로운 형상을 지닌 여러 가지 토기를 모아 선보이고 있다. 박물관을 찾는 학생들이 토기 제작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전시물도 확인 가능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백제 토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백제 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기종이 확인된다. 장식성이 강하지 않고 단순하며 색조, 유려한 선 등을 통해 볼 때 백제인들이 보다 절제되고 간결함을 추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성기부터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 토기가 고분 부장용 토기보다 풍부하게 발견됨으로써 실용적인 면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찾아 살펴본 백제의 토기는 위의 설명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많지 않은 소박함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가에서 봤던 그릇이나 항아리처럼 투박했지만 단아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 거기에 더해 연꽃무늬 수막새, 오수전무늬 벽돌, 귀면전, 암막새, 토제직구호처럼 신라와는 구별되는 백제만의 향기가 담긴 여러 생활용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인상적인 체험으로 다가왔다. 패망한 왕국 백제를 다시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지금의 청양 지역엔 청남면 왕진리 가마터, 장평면 관현리 가마터, 정산면 학암리 가마터, 목면 본의리 가마터 등에서 다양한 기와, 와당(瓦當), 토기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것들은 현재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다수 전시돼 있다. ‘고고학사전’에 따르면 ‘백제 토기는 백제라는 특정 정치체의 시공적(時空的) 영역 안에서 제작·사용되었던 것으로 여타 토기와 식별할 수 있는 일정한 양식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토기군’을 지칭한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와 특정 토기의 양식이 가진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일정 양식 토기의 성립이 반드시 국가의 형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정치적 긴장 상황이 매우 증대되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고구려나 신라 모두 그 시공적 영역 내에서 식별할 수 있는 토기양식이 등장하고 있어 이 무렵 국가와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 토기의 형성은 곧 백제라는 국가 형성의 한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청양군을 찾게 된다면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생활물품 가운데 하나였던 토기를 통해 백제의 실체와 그림자를 살펴보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1-05

“웅진·사비 탈환” 기치 내건 백제 부흥군의 최전방 요새

신라에 선도산이 있었다면, 백제엔 칠갑산이 있었다. 무열왕과 진흥왕 등 여러 명 신라 왕의 유택이 자리했고, 역사적 의미는 물론, 미학적 완결성까지 빼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래를 굽어보며, 신라의 태동을 알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선도산 성모(聖母)의 설화가 떠도는 곳이 선도산 일대다. 신라, 고구려와 함께 이 땅에서 명멸했던 고대왕국 중 하나인 백제에도 선도산에 필적하는 성스러운 산이 없을 까닭이 없다. 백제 또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한때 한반도의 절반 가까이를 통치했던 국가였으니. 백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왜 칠갑산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칠갑산이 있는 충청남도 청양을 향했다. 포항에서 KTX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대전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청양군까지. 청양 시내에서 장곡사와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등이 있는 칠갑산 입구까지는 하루에 6번 운행한다는 시내버스를 이용했다. ◆칠갑산은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 사실 칠갑산에 얽힌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수 주병선의 노래는 귀에 익숙하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하는 유행가다. 산간을 태워 힘겹게 농사를 지었던 화전민의 애달픈 삶이 담긴 가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졌다. 애잔한 곡조로. 하지만, 이번 취재는 노랫말 속 칠갑산이 아닌 백제 역사 속에 스며든 칠갑산의 정체성과 그림자를 찾아가는 길. 먼저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칠갑산에 관한 짤막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이다. “칠갑산(七甲山)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산이다. 1973년 3월 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칠(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칠갑산(七甲山)이라 경칭해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충청남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이 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다.” 백제 도읍지의 주된 산이며, 나라에서 직접 제사를 올린 산. 거기에 세상 만물이 생겨난 공간으로 여겨 이름을 지은 칠갑산은 멸망한 나라를 되살리려 한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백제부흥운동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660년부터 663년까지 왕족과 병사 등이 중심이 돼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을 뜻한다. 청양 시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칠갑산 초입에 도착해 먼 곳을 바라봤다. 가까이 완만한 능선 너머 웅장한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1400여 년 전 국가를 잃은 백제의 왕과 귀족, 백성들의 슬픈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백제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660년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는 육로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여 만 군사는 바닷길을 통해 각각 백제를 공격해 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으로 쳐들어오자, 백제 의자왕(641∼660)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피난하고, 제2왕자 태(泰)가 남아 사비성을 고수했으나 전사자 1만여 명을 내고 패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흑치상지·도침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661년 1월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고, 백제부흥운동을 꾀하였다.” 여기까지가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과정과 백제인의 부활 의지를 요약한 것이다. 위의 과정을 거쳐 백제는 70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다가 온전히 사라졌다. ◆청양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지역 공주대학교 이효원의 논문 ‘청양 지역 백제부흥운동 연구’는 각종 고고학 자료를 검토해 현재의 청양군 일대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한 부흥운동의 본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발호 당시 두시원악이라는 이름으로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청양 지역은 부흥운동의 핵심적인 활동이 웅진·사비 지역의 탈환이라는 기치 아래 진행되는 동안 최전선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열기현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는 점에서, 고량부리현과 사시량현은 임존성의 배후성이 되면서도 한티·대치 같은 육로나 무한천·지천 같은 수로를 통해 전장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로 쓰인다는 점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선도산이 한 고대왕국의 시작을 알리고, 전성기가 어떠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백제의 칠갑산은 침몰하는 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또 다른 고대왕국을 되살리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가뭇없이 흘러버린 기나긴 세월. 칠갑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했다. 웅진·사비시대 배후도시였던 청양지역 출토 유물 전시 청양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은 청양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버스를 이용해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전시실과 각종 문화체험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거기에 더해 한때 한국 금 생산량의 70% 이상을 채굴한 청양군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금광체험관 등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관광공사는 다음과 같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소개하고 있다. “백제시대 토기를 굽는 가마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졌다. 1500년 전 백제 가마터, 청기와, 최익현 유배도, 공자상 탁본, 황금복 거북이와 같은 5대 명품과 금광체험관, 농경문화체험관, 1960년대 추억의 옛거리 전시관, 한상돈 기념관, 유상옥 기증실, 정승공원으로 구성돼있는 박물관이다. 주말에는 토기 만들기, 나만의 컵 만들기, 백제의복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족 계통의 온조 집단이 현재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다. 웅진과 사비는 백제의 수도였던 도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청양역사실엔 웅진과 사비 시대 왕도 인접 지역인 청양에서 발굴된 도성 내 건축물인 궁궐, 사찰, 관공서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토기 등이 다수 전시돼 눈길을 끈다. “백제의 문화가 가장 화려하고 왕성했던 웅진·사비 시기의 수도 배후 도시로서 도성의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왕실과 수도에 거주하는 이들의 사용한 토기 등을 생산해 공급한 장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던 곳이 청양군”이라는 부연도 이어진다. 이외에도 백제문화체험박물관 특별기획 전시실에선 등짐을 지고 조선 팔도를 오갔던 보부상의 유래와 흔적을 살펴볼 수 있고, 과거 1960~70년대 우리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공간과도 만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눌 소재로 그저 그만이다. 농경문화전시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왕국의 하나인 백제의 역사가 궁금한 여행자라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의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글·사진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10-29

통일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 이끈 무열왕

먼저 아주 먼 나라 이야기 한 토막. 현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불리는 탈레반이 통치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그곳 바미안주(州)에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부처의 형상이 있었다. 이름하여 ‘바미안 석불’. 그 바위 불상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누가 폭탄을 터뜨려 파괴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같다. 불상을 포함한 바미안 석굴사원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의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절벽 양쪽 끝자락에 커다란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서쪽 불상은 높이 55m, 동쪽에 자리한 불상도 38m 높이로 크기부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통상은 서쪽 불상이 대중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았다. 각종 서적과 신문 기사에 의하면 바미안 불상은 아프가니스탄이 불교 문화권이었던 6세기에 만들어졌다. 그리스 조형미술에 영향 받은 간다라 양식의 불상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등장한다. 이는 유서 깊은 불교 유산이라는 의미. 그런데, 2001년 바로 이 바미안 석불이 먼지로 사라진다.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것이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통치하게 된 탈레반은 이슬람 교리를 이유로 ‘형상을 가진 우상의 숭배’를 일체 금지한다. 부처의 모습을 한 석상도 이 교조적 정책을 피해가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지의 대부분이 로켓포에 의해 형체도 없이 파괴됐다. KBS를 포함한 한국의 방송사는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의 포격으로 부서지는 장면을 TV 화면으로 가감 없이 보여줬다. 비단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류의 공동자산이라 할 유물이 역사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에 경악했다. 아직도 우리들 기억 속에 선명하다. ◆서라벌 서악의 불상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무열왕릉과 진흥왕릉 등 여러 기의 왕릉이 산재했고, 선도산 성모라는 신라의 태동을 알린 여신의 설화가 전하는 경주 선도산엔 신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유물이 우뚝 서 있다. 마애여래삼존불 혹은, 아미타삼존불입상 등으로 불리는 돌에 새긴 부처의 형상이다. 이와 관련된 문화재청의 요약된 설명을 읽어보자.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서있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이 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취재를 위해 3~4차례 찾아간 경주 서악 선도산 일대. 마애여래삼존불의 미학적 완성도는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크기는 작지만 섬세함과 치밀한 바위 조각 기술은 신라 석공들의 빼어난 솜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흑백사진 한 장도 눈길을 끌었다.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에 촬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엔 아미타여래입상 앞에 선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보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진 속 사내는 현실 바깥 피안(彼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화재청은 이 사진 속 석불들이 아름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입상의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 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진 특징과 미학적 완성도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불입상)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던 시기의 불상 조각으로 본존불은 높이 7m, 관음보살상은 높이 4.55m, 대세지보살은 높이 4.62m로 파악되고 있다. 크기와 규모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미안 석불에 밀리지만, 예술성 측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 이 불상은 특징이 적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까지 섞여 있다. 아래는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의 논문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의 한 대목이다.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마애여래삼존불)은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며 특별한 존상이다. 우선 본존과 협시(夾侍·좌우의 보살상)를 안산암과 화강암이라는 서로 다른 석재로 조각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주목했듯 이처럼 別石(별석·각기 다른 돌)으로 삼존을 구성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다. 더욱이 본존을 이루는 안산암은 경도가 높아 가공하기 어려우며, 상의 현재 상태에서도 확인되듯 쉽게 균열이 생겨 불상 제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석재다.” 본존불만이 아니다. 옆에 선 보살상은 재료가 된 석재가 인근에서 발견되지 않기에 ‘대체 어디에서 돌을 가져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산 정상부까지 무거운 석재를 옮겼을까’라는 의문을 부른다. 이에 관해 위의 논문은 이런 부연을 덧붙이고 있다. “보살상을 이루는 화강암은 한반도에서 석불을 제작한 이래 꾸준히 사용한 석재로, 신라에서도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이전부터 화강암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선도산 일대에서는 화강암이 전혀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두 보살상은 다른 곳에서 채석해 온 돌로 만든 것이다. 해발 약 390m에 달하는 선도산 정상까지 화강암 석재를 옮겨와 높이 4.5m에 달하는 보살상 두 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의 제작에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이 수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애여래삼존불, 누가 무슨 이유로 세운 것인지… 그렇다면 이 세 불상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일까? 이 의문에 ‘나무위키’는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 매우 흡사하다”고 간략하게 답한다.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걸 알고 싶다면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논문은 7세기 전반과 650년 전후, 그리고 661~663년 등 그간 다양한 의견이 제시돼온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시기를 능묘의 조영과 관련하여 쓴 글이다. 논문의 국문초록(國文抄錄)을 아래 인용한다. “불상의 지리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산의 정상에 6m가 넘는 대불을 조성할 당위성이 가장 높은 시기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시기, 즉 무열왕 재위기(654~661)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선도산이 6세기 전반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기 왕의 능역으로 사용되었지만, 7세기 전반에는 왕릉의 입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그러나 654년 김춘추의 즉위 이후 다시금 왕의 능역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생전에 수릉을 축조하는 관례와 문흥대왕으로 추존된 김용춘의 묘를 이장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선도산을 다시 능역으로 선택한 것을 무열왕대로 추정했으며, 산의 정상에 그 아래 왕릉들을 조망하는 방향으로 대형의 아미타상을 세운 것 역시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았다…(후략)” 만약 이런 추정에 힘이 실린다면 무열왕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동시에 통일을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를 이끈 왕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높이는 셈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