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에세이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7_2> 옥산서원과 독락당 (하)스승의 정신을 세운 옥산서원
조선학자 회재 이언적 서거 스무해 뒤
경주부윤 이재민이 유림 뜻 모아 창건
2년 뒤 1574년 선조로부터 사액 받아
영남 유학의 정수 고수란히 간직한 채
흥선대원군 사원 철폐령에도 남겨져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회화나무 그늘 길
옥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마치 나무들이 지켜주는 오랜 골목 같다. 회화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굴참나무, 이팝나무···. 이름만 불러도 그늘이 젖어든다. 가지는 하늘을 덮고, 뿌리는 땅을 움켜쥐었다. 특히 회화나무는 하나같이 백 년을 훌쩍 넘긴 듯 기품을 지녔다.
회화나무는 중국에서는 출세의 상징이고, 서양에서는 학자의 나무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길상목, 행운목으로 불린다. 예로부터 양반가에서만 심을 수 있던 귀한 나무였다.
집안에 학자가 나고 부자가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궁궐이나 고택, 서원의 뜰에 이 나무가 자리를 잡았고, 나무는 집의 품격이 되었다. 또한 회화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이기도 했다. 잡귀를 막고 복을 부르기 위해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로 심었다.
옥산서원의 회화나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지 길을 걷는 일이 아니다. 학문의 기운과 삶의 지혜를 함께 지나가는 일이다. 오래전 이 길을 따라 걷던 유생들, 글을 배우러 모였던 발걸음들이 아직 나무 아래에 남아 있는 듯하다.
■정신의 집 옥산서원
옥산서원에 이르렀을 때, 역락문(亦樂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른 아침, 닫힌 문 너머로 속세와 단절된 듯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자계천 세심당에서 한참 놀고, 독락당을 사색한 후 다시 왔을 때,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햇살이 문 위 편액을 부드럽게 비췄다.
독락당과 양동마을은 2010년(한국의 역사마을)에, 옥산서원은 2019년(한국의 서원)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옥산서원은 조선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기리는 정신의 집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스무 해, 선비들이 뜻을 모아 기둥을 세웠다.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유림과 뜻을 모아 창건한 옥산서원은 단지 제향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평생 닦은 학문의 격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고, 그를 스승으로 섬기려는 이들의 간절함이었다.
사액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 년 뒤였다. 선조 임금이 옥산서원에 이름을 내려줌으로써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 후학들이 스스로 터를 닦고 예를 세워 스승을 모셨다. 회재는 사후에 그런 존경의 이름이 되었다. 부드러운 학문이 아니라 엄격한 수양, 권력의 의지가 아니라 물러남의 품격으로 자신이 걷던 길 위에 후학들을 불렀다.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도 옥산서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남은 예로부터 글이 법이 되고, 예가 삶의 뼈가 되는 땅이었다. 들판마다 선비가 있었고, 골짜기마다 책 읽는 소리가 울렸다. 학문은 벼슬을 위한 계단이 아니라, 인간 됨의 바탕이었다. 서원은 한 시대 정신의 화석이었고, 스승과 제자의 약속이었으며,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작은 세계였다.
조선의 육백여 개 서원 가운데 무려 이백여 개가 넘는 서원이 경상도 땅에 있었다. 조선시대 서원철폐령으로 폐쇄한 뒤에도 전국 오십여 서원 중 열네 곳이 영남 지역에 남았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한 지역의 기개와 정신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증거다. 그만큼 유학은 생존을 넘어 저항이었고 실천이었으며, 정신 그 자체였다. 옥산서원은 그런 영남 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서린 곳이다.
■역락문과 무변루
역락문을 들어서자마자, 곧장 무변루(無邊樓)의 뒤태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무변루는 유생들의 휴식 공간이었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편액은 조선 최고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
붉은 기둥과 녹청색의 문살, 그리고 닫힌 문들 사이로 스며드는 어둠이 조용히 말을 건다. 마치 발걸음을 멈추라는 듯,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마음에 제동을 건다. 숨이 턱 막힌다. 닫힌 문이 하도 웅장하여 위압감마저 든다.
무언가를 단호히 막아선 듯한 정면의 구성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여기에 모신 이의 정신, 그 절도를 다시 한번 가다듬고 오라는 무언의 가르침이다. 허투루 들어올 수 없다는 듯, 위엄과 침묵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래서일까. 몸보다 마음이 먼저 엎드리게 된다.
■강학 공간 구인당과 암수재, 민구재
무변루를 지나면 강학 공간이다. 강의와 토론이 오가던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정면에 구인당이 단정히 서 있다. 구인당은 회재 이언적이 쓴 글귀 ‘구인(求仁)’에서 이름을 따왔다. 구인당 좌우의 양진재(兩進齋)와 혜림재(蕙林齋)는 교수와 유사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교무실이나 연구실에 해당한다. 구인당은 1836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다시 지어졌다.
햇살이 마당을 넓게 비추고, 구인당 현판 아래가 유독 환하다. 검은 기와지붕 아래 걸린 ‘옥산서원(玉山書院)’ 현판 네 글자는 상당한 무게로 읽힌다. 앞에 서면 어느새 자세가 조심스러워진다. 단정한 기운, 절제된 구조다. 공간이 먼저 예를 요구하는 자리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머물던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암수재(巖守齋)와 민구재(敏求齋)가 서로 마주 본다. 수백 년 세월을 견딘 목재들이 몸을 낮춘 채, 정면의 구인당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이가 많은 유생은 동재에, 어린 유생은 서재에 기거했다. 유생들은 나이에 따라 위계가 있었다. 마치 학문 앞에 엎드린 제자 같고, 정신의 중심을 받드는 두 팔 같다. 좌우의 건물이 높지 않은 이유, 곧고 단정하게 뻗은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이곳이 스승을 모신 자리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옥산서원의 깊숙한 한켠, 전적들을 보관하는 경각이 조용히 문을 닫고 있다. 이곳에는 회재 이언적의 저술과 관련 기록, 유생들의 학문 흔적이 고요히 보존되어 있다. 누가 읽고 누가 필사했는지 모를 붓 자국들이 책 속에 남아, 긴 세월을 지나 지금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굳게 닫힌 제향의 공간, 사당
서원 안쪽으로 더 들어서면, 굳게 닫힌 문이 나온다.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제향의 공간이다. 이곳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리지 않는다. 사람의 말보다 침묵이 무거운 공간, 제사의 손길과 정갈한 마음으로만 닿을 수 있는 자리다. 경외감은 그 자체로 경계선이 되어, 이 공간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만든다.
사당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정신이 깃든 자리다. 담장은 높고 길게 둘러쳐져 있다. 위엄을 막연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다. 담장 안쪽은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스승을 모신 제향 공간은 그 자체가 법이었고, 침입할 수 없는 신성의 영역이었다. 담장 너머의 고요는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라, 수백 년을 지켜온 절제의 목소리다.
고요는 서원의 다른 공간들에도 번져 있다. 강당이며 재실이며 마당까지, 모두가 그 사당의 중심을 향해 기운을 모으고 있다. 바람결 하나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고, 발걸음마저 조심스럽다. 사람들은 말없이 담장 바깥에서 손을 모은다. 숨소리조차 가볍게 뱉고, 눈빛조차 가라앉는다. 신을 모시는 공간이기에 앞서, 스승을 모시는 곳이기에 그 앞에서 사람들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회재 이언적 신도비
서원의 끝자락, 신도비가 있다. 회재 이언적의 생애와 사상을 새긴 돌이다. 옥산서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묵언의 무게가 한결 선명해지는 비석이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서원은 조용히 말하고 있다. 겸손하라, 조심하라, 무릇 배운다는 것의 시작은 스스로를 낮추는 데서 비롯된다고. 옥산서원은 그 가르침을 담은 거대한 침묵의 서책이다.
서원을 나서려 돌아 나오는데, 무변루 좌우에 우뚝 선 향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백 년 세월을 품은 듯 굵고 묵직하다. 향나무는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무변루를 사이에 두고, 마치 경계라도 하듯 서 있는 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스승과 제자의 자리, 학문과 침묵의 자리를 누가 감히 어지럽힐 수 있을까.
아까부터 알 수 없는 기척이 자꾸만 목덜미를 건드리고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 발끝을 낮췄고, 숨도 조심스레 내쉬었다. 그 기척의 정체가 향나무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높고 무성한 가지 사이로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다행이다. 무례한 말도, 요란한 소리도 내지 않았으니. 안도의 숨을 쉬어낸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때조차 괜스레 허리를 굽히게 된다.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다.
향나무는 다시 고요해지고, 나는 나무를 뒤로한 채, 천천히 서원을 떠난다. 회화나무 그늘이 처음보다 한층 더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