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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봉사는 도움 받는 사람보다 도움 주는 사람이 더 행복”

‘에너지와 신명이 넘치는 사람’.포항제철공고 김명훈(58·사진) 동창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든 생각이다. 덩치는 크지 않지만 김 회장의 목소리와 행동에서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온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일 터.중학교 때까지는 고향인 충청북도 제천에서, 고교 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절은 경상북도 포항에서, 20대 중반부터는 전라남도 광양에서, 50대를 넘어서면서는 광양과 포항을 무시로 오가며 살고 있는 김명훈 회장.그는 잘라 말한다. “어디서건 지역감정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없다.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서 최선을 다해 생활한다면 그런 걸 느낄 시간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김 회장은 젊었던 시절은 물론 요즘도 이런저런 모임이 있거나, 운동을 할 때면 포항제철공고 교가를 큰 소리로 부르곤 한다. 충청도 사람이, 경상도 고등학교 교가를, 전라도에서 부르는 보기 드문 풍경을 연출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사람이 바로 김명훈 회장이다. 그만큼 자신이 졸업한 학교와 동문수학한 동창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깊다.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급 간부를 맡으며 형성된 책임감과 리더십은 30대 초반 광양주식회사에 들어가면서 제대로 발휘된다.1998년. 그가 다니기 시작한 광양주식회사의 기계 부문 매출액은 겨우 500만 원. 2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같은 회사의 매출액이 290억 원으로 상승했다. 대리에서 과장과 부장, 상무를 거쳐 지금은 대표이사가 된 김명훈 회장.그는 더불어 고생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직원들에게 “잘 되건 못 되건 남에게 기대거나 책임을 미루지 말고, 자기 몫의 희망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김 회장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왔기에 가능한 조언이 아닐까?넉넉하지 않았던 경제적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는 나눔과 봉사에도 관심을 가지지 시작했다.지난해 ‘포철공고 행복나눔 봉사단’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은 김명훈 회장은 이전에도 태인장학회와 모교인 포철공고에 장학금을 흔쾌히 내놓고, ‘희망의 집짓기’와 포스코 공급사·협력사의 ‘기업시민프렌즈 봉사단’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왔다.포철공고에 입학한 후에야 바다를 처음 봤고, 바닷가 마을에 사는 고교 동창의 집에서 먹었던 문어의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는 김 회장과 지난 21일 만났다. 그의 삶과 생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1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는 김 회장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인해 더없이 유쾌했다.아래 그날 오간 이야기를 정리해 옮긴다. 영일대해수욕장 정화 활동에 나선 포철공고 행복나눔 봉사단. -고향은 어디이고 포항에는 언제 왔나.△1966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1982년 고교에 진학하면서 포항에 왔다. 당시는 전국 각 지역에서 포철공고로 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기숙사에는 나처럼 꿈을 품고 서울과 강원도, 전라도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다.-포철공고에서의 추억은.△충청북도엔 바다가 없다. 포항에 와서 처음 바다를 봤다. 동창 중 한 명이 포항 송라 출신인데, 그 친구 동네로 놀러가서 맛본 문어가 기가 막혔다.-학창 시절은 어땠고, 졸업 후에는 어디 취직했는지.△고등학교 땐 학생회 간부도 하며 즐겁게 지냈다. 졸업 후엔 포항제철에 입사했다. 1985년 한 해는 포항에서 보냈고, 이후엔 광양제철소로 옮겼다. 광양에 제철소가 만들어질 무렵이었는데, 거기로 갈 사람을 뽑는다기에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어 지원했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살아봤으니 전라도에서 생활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광양에서의 생활은 어땠나.△1986년부터 9년 정도 광양제철소에서 근무했다. 낯선 곳이지만 재밌게 지냈다.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볼링 동호회와 모터사이클 동호회 등을 만들어 그곳 사람들과 어울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교성은 좋았다.(웃음)-큰 회사를 그만두고 비교적 작은 회사인 광양주식회사에 들어간 이유는.△역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다. 광양제철소를 그만두고는 잠깐 지역 정보신문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금 등이 쉽지 않았다. 그때 퇴직금을 다 까먹었다. 하지만, 귀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광양주식회사에 들어간 건 30대 중반이었다. -입사 후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은.△포항제철에 다닐 때부터 격의 없이 교류하는 친구와 선후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직장생활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공부한 기계 관련 업체인 광양주식회사에서 미래를 설계하려 했다. 입사하면서 기계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총무 업무부터 계약, 납품, 트럭 운전까지 1인4역을 맡았다. 첫해엔 매출액이 500만 원이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몸담은 일터를 키워나가는 보람이 더 컸으니까. 지금은 매출액이 290억 원 정도 된다. 그런 도전과 성취의 과정에서 과장과 부장, 상무 등을 거쳐 대표이사가 됐다. 현재 회사의 상시 근무 인원은 70명쯤 된다.-일하면서 항상 마음에 담아두는 원칙은.△신뢰와 품질이다. 1만 원짜리 물건을 팔 때도 그렇고, 1억 원짜리 물품을 거래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드는 제품이 바로 내 얼굴이다.-어려운 시절의 기억도 있을 텐데.△서른 살 땐 아내가 내 생일에 미역국 끓여줄 돈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 했다. 자기 몫의 희망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오랜 기간 봉사활동을 이어온 것으로 안다.△젊을 땐 돈이 없어 하고 싶어도 봉사활동을 할 수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광양 포철공고 동문회를 주축으로 봉사단을 만들었다. 그게 2007년쯤이다. 봉사활동을 하게 되면서 세상엔 나보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이 많다는 걸 실감으로 깨달았다.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게 봉사라고 생각한다. 그게 동창들이나 친구들에게 ‘야, 우린 그래도 밥은 먹고사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라고 말하는 이유다.-봉사활동을 해오며 기억에 남는 사람은.△2014년쯤에 광양에 사는 ‘국악 3남매’를 후원했다. 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 동창회 행사 등에 매번 초대하고, 독도에 가서 진행한 수궁가 완창공연도 지켜봤다. 그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한 걸 보면 보람을 느낀다. -포철공고 동창회장으로서의 향후 계획은.△작년에 ‘포철공고 행복나눔 봉사단’을 만들었다. 장학회가 동문 가족과 후배들을 위한 것이라면 봉사단은 나눔의 영역을 지역사회 전체로 확장한 것이니 의미가 작지 않다고 본다. 이익의 사회적 환원을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광양과 포항의 동창들이 서로가 거주하는 지역을 오가며 교차 봉사활동을 하게 된 것도 즐거움이 될 것이다. 지난해엔 ‘코로나19 사태’로 진행하지 못했던 동창 체육대회도 다시 크게 열었다. 포철공고를 포함한 포항 지역 고등학교 동창회 사이의 교류 활성화에도 노력할 생각이다.-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인생은 짧다. 그러니, 감동과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나. 이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후배는 물론, 친구들도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감동과 울림이 있는 삶을 지향했으면 한다. 더 큰 가치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 인간만의 특권이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02-27

“파리올림픽서 꼭 금메달… ‘경북 유도’ 자부심 높이세울 것”

운동선수에게 올림픽 출전이란 개인적 영광인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국가의 이름을 드높이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선수들이 각자의 종목에서 ‘올림픽 출전’이란 목표를 가지고 오랜 세월 피땀을 흘린다.여기 안타깝게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유도인이 있다. 현재 경북체육회 유도팀을 맡아 지도하고 있는 김정훈(43) 감독.김 감독은 현역 시절인 2004년과 2008년 아테네올림픽과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아쉽게도 두 번 모두 2위. 한 국가에서 단 한 사람만 출전할 수 있는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했다.그러나, ‘운동선수를 그만둔 이후에도 인간의 삶은 남는다’고 믿었던 김 감독은 좌절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성실한 유도 지도자로 성장하고 있는 것.올 여름엔 프랑스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김정훈 감독이 가르치고 있는 경북체육회 소속 허미미(22), 김지수(24) 선수는 파리올림픽에 한국 유도 대표로 출전할 가능성이 높다. 김 감독은 제자들과 함께 빛나는 성과를 얻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지난 15일 “30년 넘게 유도를 해오며 인간이 갖춰야 할 예의와 성숙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길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김 감독을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아래는 그가 들려준 유도와 삶에 관한 이야기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고향과 나이는.△1981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떻게 유도를 시작하게 됐는지.△중학교 때까지 김천에서 생활했다. 그 시기엔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도의 인기가 높았다. 유도복을 입고 국제대회 시상대에 오르는 선수들을 TV에서 보곤 했으니까. 나도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기에 자연스레 동네에 있는 유도체육관을 찾았다. 그게 초등학교 4학년 때다.-고교 시절은 포항에서 보낸 것으로 안다.△당시 김천엔 유도부가 운영되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포항 동지고등학교가 유도 명문으로 알려져 있던 때고, 감독님이 찾아와 입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유도를 잘하는 동문 선후배들도 적지 않았다. 동지고에 입학하면서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중고교 시절 추억은.△내가 중학생이었을 땐 김천만이 아니라 대구경북 전체에 유도 붐이 일었다. 지역마다 유도체육관이 적지 않았다. 그즈음 한국 유도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도 따고 그랬으니까. 김천 출신 유도선수인 최민호, 동지고 후배이자 고향 후배인 김재범 선수 등과 함께 운동하며 서로를 격려하던 기억이 난다.-운동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방황은 없었는지.△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의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게 유도밖에 없었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본 적이 별로 없다. 대회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얻었을 땐 마음이 떠났다가도 돌아보면 다시 유도로 돌아와 있었다.-학창 시절을 보내며 아쉬웠던 건 뭔가.△운동이 위주였으니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고, 운동부 선후배와 동료 외에는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나이가 어렸으니 주말마다 제법 먼 길인 포항과 김천을 오가는 게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대회에 나가 입상하게 되면 그런 힘겨움은 잊고 다시 운동에 매진했다.-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생활한 것은 언제부터인지.△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은 내려놓고 은퇴를 생각할 무렵에도 도민체전과 전국체전 등에는 참가했다. 그때 지도자의 역할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고향에 내려왔고, 2016년부터 경북체육회 유도팀을 맡았다. 이듬해엔 국가대표 코치도 겸임하게 됐는데, 두 팀을 오가며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한 것 같다. 팔렘방 아시안게임과 도쿄올림픽 국가대표 코치로 현지를 다녀온 기억도 떠오른다. -선수와 지도자 생활 중 어떤 게 더 어렵나.△선수 때는 한 사람 몫의 역할만 하면 된다. 하지만,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자신보다는 가르치는 선수들을 중심에 놓고 생활해야 한다. 잘하는 선수는 자만하지 않도록, 못하는 선수는 절망하지 않도록 다독이고 격려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 아닐까. 선수를 위해 희생하는 게 지도자의 길이라고 본다. 그래서 쉽지 않다.-제자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조언은.△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처음 세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고 말해준다. 스포츠의 세계는 치열한 경쟁이다. 거기서 이겨야 주목받고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선수생활이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했더라도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면 실망할 필요 없다고 가르치려 한다.-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몇몇 대회에선 상위권에 오르며 메달도 땄지만, 오래 준비하고 기다렸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제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감독이 됐으니 내가 가르치는 선수들이 그 아쉬움을 풀어줄 것으로 믿는다.-현재 주목하는 제자는 누구인가.△가르치는 선수들 모두에게 애정이 간다. 그중 경북체육회 유도팀 허미미 선수는 고등학생 때부터 주목해 보고 우리 팀으로 데려온 터라 관심이 조금 더 간다. 허 선수는 재일교포 3세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일 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허 선수를 우리 팀에 입단시켰고, 그 과정에서 ‘한국·일본 입국시 2주 격리’ 등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한국 국적을 취득해 여러 국제대회에 출전하며 좋은 성적을 얻고 있기에 유도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란 것이 알려져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다. 더불어 우리 팀 김지수 선수도 주목받을 만하다. 두 선수가 파리올림픽에 나가게 된다면 여러분들의 뜨거운 응원을 부탁한다. -유도가 가진 매력은 무엇인지.△예의를 중시하는 운동이다.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엄정하다. 인간 상호간 지켜야 할 위계질서와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는 운동이기에 어린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당신에게 유도란 무엇인가.△인생의 전부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유도 선수 출신인 아내와 결혼했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나도 유도를 하겠다’고 한다면.△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다. 지금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웃음). 엄마와 아빠 영향인지 딸도 유도를 좋아한다. 하지만, 꼭 유도선수가 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낯설고 새로운 땅으로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한다면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식들이 스스로를 믿고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커가기를 바랄 뿐이다. -올해 계획은.△함께 고생한 선수들이 파리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국민들에게 기쁨을 선물했으면 한다. 비단 유도선수만이 아닌,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 전부가 선전했으면 좋겠다.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 선수들 모두가 올림픽 때만이라도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으면 한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살아오는 내내 유도는 내게 적지 않은 기쁨과 성취를 맛보게 해줬다. 그러니, 앞으로도 유도의 저변 확대를 위한 일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02-20

‘태권도 챌린지’ 통해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돕는다

‘2030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 세계박람회(EXPO)는 인류의 산업·과학기술의 발전 성과를 알리고, 개최국의 역량을 과시하는 장으로 경제·문화올림픽으로도 불리는 국제적인 행사다.우리나라는 현재 이 세계박람회의 부산 유치를 위해 각계각층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행사 개최가 가져올 긍정적인 경제 파급효과를 염두에 둔 주요 기업의 총수들은 물론, 정치권과 문화예술계에서도 힘을 보태고 있는 형국.여기에 한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를 통해 세계박람회의 부산 유치를 염원하는 이들도 가세했다. 그 중심에 국기원 이지성(59·태권도 8단) 이론교수가 있다.이 교수는 국기원 남승현 시범단장과 힘을 합쳐 ‘태권도 챌린지’를 기획했다. 서울과 경북을 포함한 한국의 50여 개 지역에서 태권도 시범단과 지역민들이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힘찬 발차기를 진행하는 것이다.“내 인생의 전부인 태권도가 세계박람회 유치에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하는 이지성 교수가 태권도와 함께한 시간은 자그마치 52년. 삶의 거의 대부분을 태권도와 함께 살아온 셈이다.“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매개체로 나라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고, 불황의 그늘에서 경제적 돌파구를 찾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고 말하는 이 교수가 어떤 경로를 통해 태권도와 만났고, 태권도가 세상에 미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왔는지 궁금했다.얼마 전 청와대와 국기원에서의 태권도 챌린지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향 포항을 찾은 이지성 교수를 지난 일요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아래는 그날 오고간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나이와 출생지는.△1964년 포항 오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교사였고 지금 여든여덟이신 아버지도 거기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위로 누나가 있고 아래 여동생이 있다.-처음 태권도를 접한 시기는 언제인가.△대여섯 살 때다. 포항 동빈동에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태권도장이 있었다. 그때는 몸이 많이 약했다. 건강을 되찾고 체력을 기른다는 단순한 이유로 어머니 등에 업혀 도장을 찾았는데, 지금까지 50년 넘게 태권도와 인연을 이어오게 됐다.-대학과 대학원에선 체육교육을 전공했다.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중학교 시절에 서울로 갔다. 그 학교에 태권도부가 있어 거기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때도 초등학교 때처럼 몸이 많이 아파 선수 생활이 힘들었다. 이를 걱정하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태권도를 좋아하니, 선수가 아니라면 지도자가 되라’고 권유했고, 그게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로 진학한 이유가 됐다. 지금은 국기원 이론교수로 ‘지도자를 가르치는 지도자’가 됐으니, 꿈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웃음) -포항시체육회와 경상북도체육회에서도 일했다고 들었다.△미국에서 유학하고, 거기서 태권도장도 운영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지속적으로 태권도 관련 단체에서 일했다. 나이를 먹으니 연로하신 부친이 계신 고향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50대 중반에 포항으로 와서 포항시체육회에 몸담았다. 이전엔 포항시체육회가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내가 근무할 때 18억 원의 예산을 받을 수 있었던 게 보람 있고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더불어 포항 만인당의 효율적인 리모델링과 한마음체육관 건립에도 힘을 쏟았던 시기다. -포항시체육회에서 일하던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면.△구미에게 뺏겼던 도민체전 우승기를 포항으로 가져온 일이다. -미국에서도 태권도장을 운영한 것으로 안다. 미국에서 태권도의 위상은.△미국인들이 태권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직접 배우는 아이들 중심이라면 미국은 가족이 중심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평생 즐길 수 있는 생활스포츠로 태권도를 인식하고 있다. 가족 사이의 화합에 태권도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태권도를 통해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태권도의 가장 큰 매력은 뭔가.△‘수련(修鍊)’이다. 태권도는 다른 사람을 제압하는 싸움기술이 아니다. 수련은 누구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다스림으로써 스스로를 이기는 것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태권도에서는 수련의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몸과 더불어 정신까지 함께 성장시킬 수 있는 게 태권도다.-아이들을 위한 태권도 관련 책을 준비 중이라던데.△한국만이 아닌 세계의 많은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는데 그들에게 읽힐만한 책이 거의 없다는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태권도 전집을 기획해 집필 중이다. 현재 1차로 10권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총 40권을 만들 예정이다. 이번에 나오는 것은 역사 이야기를 담은 태권도 동화다. 향후 알기 쉽게 풀어쓴 태권도 교본과 태권도로 국위를 선양한 위인들의 이야기 등이 연이어 출간될 것이다. -판화가로도 활동 중이라 들었다.△어릴 때부터 태권도 만큼이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미대를 가고 싶을 정도였다. 태권도와 미술을 겹합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판화를 해보기로 했다. 나무에 형상을 조각한다는 건 태권도의 주요 개념인 수련과 유사한 행위다. 게다가 판화는 보급하기가 편해 작품을 아이들에게 선물하기도 좋았다. 판화를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엔 경주 미술대전에서 입선도 했다. 태권도와 미술은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접목시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행복하다. -판화의 주요 소재는 무엇이고, 왜 그 소재를 사용하는지.△거의 100%가 태권도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걸 소재로 삼는 게 보통의 미술가들 아닐까? 내게는 태권도가 인생의 전부였다.-‘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기원하는 태권도 챌린지를 진행 중인데.△세계박람회는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큰 행사다. 경제적 파급 효과와 나라의 이름을 높이는데 좋은 영향을 미칠 이런 행사를 우리나라 부산에서 개최했으면 하는 건 나만의 바람이 아닌 전 국민의 희망사항 아니겠는가. 그것에 태권도인들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태권도가 매개체가 돼 세계박람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물론,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힘을 모았으면 한다. -태권도 챌린지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태권도와 지방자치단체가 힘을 합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각 도시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 빼어난 경관을 가진 곳에서 태권도가 가진 매력을 선보이고, 그걸 영상에 담아 대중들에게 배포하게 된다. 가장 먼저 태권도의 헤드 쿼터(Headquarter)라 할 국기원과 청와대에서 태권도 챌린지가 진행됐고, 당연히 경북 지역의 명소도 곧 찾아갈 것이다. 향후 50여 곳에서 태권도 챌린지가 진행될 예정이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태권도 선수들의 근사하고 화려한 시범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부탁한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오는 10월엔 충청남도 금산에서 국제무예올림피아드가 열린다. 이 역시 주목할 만한 국제행사다. 여기서 한국총괄위원장이란 역할을 맡게 됐으니, 최선을 다해 행사 성공에 보탬이 되려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6-13

“재능 기부로 국내외 후배 파티셰 양성 글로벌 베이커리 컨설팅업체 만들 터”

“포항시민 전체가 두 번씩 먹을 양은 팔았을 걸요.”대체 이처럼 크게 히트 친 상품이 뭘까? 궁금증이 일어날 만하다. 한스드림베이커리 한상백(52) 대표가 만든 갈릭바게트(바게트 사이에 마늘 소스를 넣은 빵)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포항의 인구를 50만 명으로 잡으면 지금까지 대략 100만 개의 갈릭바게트를 만들어 판매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빵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하는 한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꿈과 스케일이 남들보다 컸던 사람.교육자였던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10년째 병상에 누워있던 1980년대 후반. 기울어진 집안을 돕기 위해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려던 아들 한상백을 아버지가 극구 말렸다.“너는 꼭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돼야 한다”는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 한 대표는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입학 후 한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부친의 안타까운 죽음과 적성에 맞지 않는 학교생활. 방황이 시작됐다. 싸움도 하고 사고도 쳤다. 그런 질풍노도의 시기에 ‘고교생 한상백’을 구한 게 바로 빵이다.제빵 일을 하던 형의 권유로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에 입학한 것. 1988년 일이다. 그해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열여덟 살이던 한 대표가 올림픽을 취재하러 온 전 세계 기자들이 먹을 빵을 진열하는 일을 했다. 아직은 빵을 만들지 못하던 때였으니 허드렛일을 맡은 것이다. 그때 조그만 빵 하나가 인종과 나이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선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그로부터 35년의 시간이 흘렀다. 빵을 통해 존재를 전이시킨 한상백 대표는 지금도 빵과 첫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여전히 빵 안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가는 모험이 즐겁고 흥미롭다고 말한다.지금은 파티셰(Patissier)라고 불리는 ‘제빵사’의 영역을 넘어 한국만이 아닌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강연자로 살고 있는 한 대표. 그는 빵을 매개체로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한다.앞으로 10년 후엔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 ‘글로벌 베이커리 컨설팅업체’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한상백 대표를 지난 월요일 만났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빵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고향은 어디이고 어린 시절은 어디서 보냈나.△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른 살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20대 때 3년은 일본에서 제빵 기술을 배웠다. 포항에 정착한 건 30대 후반쯤이다.-처음 빵과 인연을 맺게 된 시기는.△아버지가 오래 편찮으셔서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다. 상업고교를 가려 했는데 군인이 되길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문계 고등학교로 갔다. 근데,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슬픔과 상실감에 방황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큰형이 ‘빵 만드는 일을 해보라’고 권유해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가게 됐다.-제빵 일을 하며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인가.△어릴 때부터 가난했기에 여유로운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지간히 어려운 건 어렵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만든 빵을 맛보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을 보는 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즐겁다. -빵을 만들며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제빵 일을 한 게 햇수로 36년째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빵에 관한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빵이 가진 매력을 알려주고 싶다.-권위 있는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여러 차례라던데.△2011년 중국 광저우에서 국제 제빵월드컵이 열렸다. 거기서 아시아권 1등을 했다. 빵 분야에선 나라를 대표한 것이었으니, 마치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태극기를 보고 애국가를 들으면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웃음).-잊을 수 없는 포항에서의 기억도 있을 텐데.△포항제철고에 아는 교사가 있다. 그분 제자의 아버지가 간경화에 걸렸다. 수술비 3천만 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빵을 만들어 수익금 300만 원을 지원했다. 지인도 뜻을 보태라며 100만 원을 보내왔다. 포항 지역사회 커뮤니티가 이 소식을 알고는 모자라는 수술비를 모금했고. 15년 전쯤 일이다. 따스한 마음들이 모였지만, 아쉽게도 그분은 수술을 며칠 앞두고 돌아가셨다. 중국집 요리사였는데, 죽기 얼마 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들고 내게 찾아와 고맙다며 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주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국내, 해외 가리지 않고 나를 필요로 하는 강연회나 교육 현장이 있으면 가려고 노력한다. 내가 사회로부터 많은 걸 받았으니 그걸 돌려주는 일종의 재능 기부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빵을 만들기 위한 연구에도 시간이 많이 사용된다.-‘재능 기부’라는 말이 인상적인데.△방황했던 어린 시절 빵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 수 있었다. 후배들도 자신의 길을 찾기 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세상으로부터 내가 받은 걸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 -30년 넘게 빵을 만들었다. 아직도 빵을 만드는 게 어렵나.△자신이 하는 일을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프로가 아니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빵 만들기다. 시대에 따라 바뀌는 소비자의 취향과 요구에 맞추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 역시 아직 완전한 빵을 만들지 못한다.-당신에게 빵은 어떤 의미인가.△내 인생을 바꾼 존재다. 빵을 통해 세상을 넓게 보는 시야를 가지게 됐다. 전 세계 빵 요리사들과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후배들을 도울 수 있게 됐다.-어떤 인간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고 싶은지.△현재 내 직업은 제빵사인 동시에 강연자다. 빵을 매개체로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으로 개입해 그들의 성장시키고 싶은 게 내 꿈이다. 갈등하고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싶다. -계획하고 있는 앞날의 청사진은.△국내와 해외에 많은 후배들을 양성해 글로벌 베이커리 컨설팅업체를 설립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어가 필수다. 나는 지금도 빵을 만들면서 유튜브 등을 통해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예순 살이 넘으면 파티셰가 아닌 ‘글로벌 CEO’의 삶을 살고자 한다.-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내가 10대 때는 곁에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종일 식당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자식에게 따스한 관심을 보여주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조그만 난관 앞에서도 쉽게 좌절한다. 그런 상황이 되면 부모가 앞장서 ‘힘들면 그만둬’라고 하는데, 난 그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어려움 없이 성장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자식을 나약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부모가 먼저 나약함을 버려야 한다.사진=이용선기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4-18

“포항, 나만의 ‘보물창고’이자 내 문학의 영감을 주는 재료”

최근 ‘독특한’ 책 한 권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품집에 수록된 8편의 소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포항을 소재로 삼고 있는 ‘어룡이 놀던 자리’. 사진이는 전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일종의 ‘사건’처럼 느껴졌다.책을 펴들었다. 소재는 ‘포항’으로 단일하지만, 수록된 개별 작품에서 읽히는 메시지는 각기 달랐다.‘디어 마이 엉클’에서는 한국전쟁이 야기한 비극의 그림자가, ‘관목(貫目)’에선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아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이, ‘불꽃 지다’로 가면 비루한 상황에서도 놓칠 수 없는 인간의 순정한 마음이 기자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섰다.책을 엮어 세상에 내놓은 김도일(49)은 마흔 즈음에 소설 쓰기를 시작한 늦깎이. 흥미롭게도 세상 사람들에게 작가로서의 존재를 알린 첫 소설도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포항을 ‘씨줄’ 삼아 묵직하고 깊이 있는 역사의식과 인간 본질 탐구를 자신의 문학 속에 빠른 속도로 축적하고 있는 김도일. 제대로 된 그물을 짜기 위해선 튼튼한 씨줄과 날줄 모두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책에서 무시로 감지되는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한 노력’과 지속적 ‘인간 본질 탐구’는 김 작가가 손에 든 ‘날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술가에게 늦은 출발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마지막에 가닿을 목적지니까. 소설가와 시인, 화가와 작곡가는 단거리 육상선수가 아닌 마라토너(Marathoner) 같은 존재.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해병대 장교 출신으로 듬직한 몸피와 호방한 목소리를 가진 김도일은 막 출발선을 떠나 5km 지점쯤을 통과하고 있는 마라톤 선수, 아니 소설가다.지난 주말 오후. 환한 봄빛 아래 푸른 파도 일렁이는 영일대해수욕장 한 카페에서 김도일을 만났다.무슨 이유로 포항을 문학의 주요 소재로 선택했는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뭔지,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쓰고 싶은지 조목조목 물었다. 그의 답변은 소설 속 문장을 닮아 따뜻하고 명쾌했다. -태어난 곳과 유년을 보낸 지역은.△1974년 경북 영덕에서 과수원집 막내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마치고 포항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후 계속 포항에서 살고 있다.-학창시절엔 어떤 아이였나.△열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같은 시기에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슬펐지만 내 슬픔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남매끼리 보듬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결속 같은 것이 생겼다. 원래 성격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외향적이어야만 했다. 학우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됐다.-대학에선 뭘 공부했고, 어떻게 보냈는지.△경찰이 되고 싶어 행정학과에 지원했다. 1학년 때 학교 신문사에 들어갔다. 대학 생활 전부를 거기에 바쳤다. 학사장교 지원도 학보사 활동을 보장받으면서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996년 광주 5·18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대학생 기자 대표로 두 피고인 뒤에 자리해 재판을 볼 수 있었다. 취재한 것을 전국 대학신문에 보내고, 혼자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기억이 있다.-해병대 장교로 예편했다고 들었다.△1997년 임관해 2003년 대위로 전역했으니 6년을 해병대에 있었다. 낙하산 강하, 헬기 레펠, 사격, 전술훈련은 즐거웠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군인임을 자각하고 군인으로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보람도 있었다. 그런데… 사단 전 병력이 일주일간 골프장에서 토끼풀을 뽑은 적이 있다. 사령관이 골프 치러 오기 전까지 끝내야 하는 임무였다. 작업은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라운딩 하던 민간인이 우리를 보며 흘리던 웃음이 아직 기억난다. 해병으로서, 장교로서 자괴감이 들었다. 그게 전역을 결심한 이유다.-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나.△10년 전 마흔에 첫 소설을 썼다. 건강했던 몸이 병원을 자주 찾게 되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처음에는 에세이를 필사했다. 그러다가 시를 베끼게 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가 소설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소설을 썼는데, 안 흔들리고는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군대 장교’와 ‘소설가’라는 두 존재는 쉽게 매치가 어려운데.△오히려 군대 경험이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의 균형을 맞추는데 도움이 됐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인간이 극한 환경에서 어떻게 단순화 되는지, 폭압적인 권력에 굴복하고 인간이 그 일부가 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군인을 천직으로 알고 국가와 임무에 헌신하는 선후배 장교들 앞에서 부끄러워진 적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황석영과 현기영도 해병대 출신이다.-왜 ‘포항’이라는 소재에 천착하는가.△내가 사는 곳이 이야기가 풍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소설을 쓰기 전부터 가졌다. 그러던 중 첫 작품 응모를 ‘포항 소재 문학상’에 했는데 입상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명감 같은 게 생겼다. 소설 소재를 찾다보니 묻혀 있기엔 아까운 포항 관련 역사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나만의 보물창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억지로 끼워 맞춰 어색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포항을 소재로 이야기를 쓰려 한다. 자료를 찾고 공부하는 자체가 너무 재밌다. -첫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받아들었을 때 기분은.△기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른 감정이 몰려와 당황스러웠다. 그냥 멍했다. 내 안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빠져나간 듯 허탈감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 여파가 몸에 영향을 미쳐 몸살을 지독하게 앓았다. ‘이제 어떡하지?’라는 불안감도 있었고 내 이야기가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슬퍼 눈물도 조금 흘렸다. 한 일주일 후에야 겨우 기뻐할 수 있었다.-책에 수록된 것들 중 한 작품만 독자들에게 권한다면.△표제작이다. 개발시대 포항의 이면을 압축해 담았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지형, 마을에 대한 향수와 어쩔 수 없이 실향민이 돼야 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썼다. ‘어룡이 놀던 자리’는 포항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소설 속 공간에 살았던 분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때 보람을 느꼈다.-앞으로도 ‘포항’이 당신 소설의 주요한 소재인가.△매우 중요하지만 유일한 소재는 아니다. 내가 특징을 가장 잘 이해하고 능숙하게 다를 수 있는 재료가 포항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포항이라는 소재에 맞지 않는데 억지로 끼워 넣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는 다른 소재를 찾겠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포항에서 나오는 재료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신에게 소설이란 어떤 의미인지.△계속 길을 찾아 헤매고 끊임없이 흔들리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나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소설 다음으로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평범한 일상이다. 소설 또한 이 범주에 들어간다. 아침에 인사하고 헤어진 이를 무사한 모습으로 저녁에 다시 마주하는 것, 따뜻한 물로 씻은 후 밝은 등 아래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 내일의 노동을 위해 낡은 침대에 몸을 누이는 것, 이 모든 일상이 내겐 귀하다.-작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소설을 쓰고 있으면 좋겠다. 외국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것에도 도전하고 싶다. 10년 후면 직장에서도 정년이 다 돼 갈 텐데 소설과 번역을 번갈아 한다면 퇴직 후의 삶이 재밌을 것 같다. 이를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을 생각이다.-준비하고 있는 다음 작품은 뭔가.△일제강점기 구룡포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해방 후 일본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동포와 함께 다뤄보고자 한다. 이들의 상황은 정반대지만 양쪽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다. 현재 자료조사 중인데 이 단계에서부터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그리고, 언젠가는 경북 동해안 일대의 근대를 배경으로 최소 3권 이상 되는 분량의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풀어내고 싶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4-11

유기농 마스크팩·대체육 오랜 노력 끝에 만들었죠

견인불발(堅忍不拔)과 기호지세(騎虎之勢).여성 사업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농업회사 하이청 박해성(57) 대표를 만나며 떠올린 이 두 사자성어(四字成語)는 예기치 않은 불행과 그 불행을 넘어서려는 그녀의 노력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서울에서 태어나 별다른 부침(浮沈) 없이 살아온 박 대표는 20대 후반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남편의 치료를 위해 경상북도를 처음으로 찾았다. 일정 기간이 지나자 부군의 병이 호전되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고난이 박 대표를 찾아왔다. 자기가 여성 암에 걸린 것.낯선 포항에서 문구점과 레스토랑, 임대업 등을 하던 그녀는 “자연이 병을 치료해줄 수 있다”는 말에 기대 생전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그런데, 이것 봐라. 육체적으로 힘든 농사일이 가슴과 자궁 안으로 번져가던 암세포의 증식을 거짓말처럼 막아냈다. 그때 든 생각이 있었다.‘흙을 만지며 사는 게 앞으로의 내 삶이 될 수도 있겠구나.’결심은 바로 실행으로 이어졌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으로 들어가 땅을 사고 거기에 깨와 감자, 무 등을 심기 시작한 것.마흔을 넘겨 늦깎이 농사꾼이 된 박 대표는 자신을 치료해준 고마운 땅이니 농약 없이 유기농으로 농작물을 가꾸게 된다. 처음엔 실패와 고생이 없을 수 없었다.새벽 5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에 열중했지만, 수확량은 다른 농지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당연지사 거기서 이익이 나올 수도 없었다.그러나,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법.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땀과 눈물을 쏟아 부은 땅은 얼마 전부터 박해성 대표에게 ‘은혜’를 갚기 시작했다.하이청이 공력을 쏟아 부어 만든 식물성 콜라겐이 함유된 ‘금화규 마스크 팩’은 포항의 대형 뷰티센터 이용자들에게 호평 받았고, 21세기형 환경 친화제품이라 할 대체육 ‘도시새댁 돌미역 네모땡’은 꼼꼼하고 까다로운 평가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 롯데마트와 롯데백화점에 입점하게 된 것.사실 이전에도 박 대표의 회사는 작지 않은 사업성과를 올린 바 있다. 하이청은 포항에서 미국으로 처음 무를 수출했고, 저 멀리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도 시래기를 수출하는 저력을 보여줬다.17년 전 치유가 힘든 암을 앓았던 조그만 여성이 고통과 절망에 굴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배경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앞서 언급한 견인불발은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굳센 의지’를, 기호지세는 ‘달려온 길을 더 정열적으로 뛰어가는 힘’을 의미한다.지난주 목요일 오후. 본사 편집국에서 박해성 대표를 만났다. 다음은 넘쳐나는 에너지가 주위 사방을 압도하는 그녀와 기자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서울에서 포항으로 온 시기와 이주 이유는.△1995년이다. 남편이 아팠다. 경주에 사는 맹인 치료사를 찾아왔다. 금방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 머물렀다. 지인이 문구용품을 납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포항에 정착하게 됐다.-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한 계기는.△2006년쯤이다. 가슴에 암이 생겼다. 적지 않은 이들이 ‘암에 걸리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나. 나 역시 비슷한 심경이었다. 처음엔 암에 좋다는 와송(瓦松·돌나물과의 여러해살이풀)을 키웠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암이 호전됐다. 자궁에 생긴 혹도 사라졌다. 아마도 흙이 주는 에너지 덕분 아니었을까.-무를 재배해 해외 수출도 했다던데.△농업회사법인을 만들어 미국과 캐나다로 무차와 무말랭이, 시래기 등을 보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방식으로 키워낸 농작물이었다. 환자인 내가 먹어도 안심할 수 있는 무와 깨, 감자를 키우고 싶었다. 또한, 기계면에서 함께 농사짓는 동네 어르신들의 판로도 열어주려 했다. -농약 없이 농사짓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맞다. 새벽부터 나와 하루 종일 잡초를 뽑는 것보다 간단하게 제초제 한 번 치는 게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내 병을 치유해준 땅을 위해서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7~8년가량 되니 땅도 ‘농약 없는 농사’에 적응하는 것 같다. 이제 내가 사는 동네에도 유기농을 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사실 이런 게 생활 속 환경보호의 실천 아닐까.-하이청이 생산한 유기농 작물로 만든 상품은 어떤 게 있나.△최근엔 금화규에서 추출한 식물성 콜라겐으로 마스크 팩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금화규는 천연 에스트로겐이 함유돼 염증과 노화를 막아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이미 포항에서 운영되는 뷰티센터 인디자인페이스의 다수 고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본격적인 마케팅과 판로 확장을 위해 얼마 전엔 ‘인디자인페이스 유니’라는 별도 법인도 만들었다. -고기 없이 고기 맛을 내는 대체육도 개발했다고 들었다.△알다시피 소, 돼지, 양을 키우려면 수질 오염과 메탄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를 걱정해야 한다. 대체육 생산은 건강은 물론, 환경보호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새로운 사업이다. 하이청은 기존 대체육과 전혀 다른 식감을 가진 제품을 만들었다. 직접 농사지은 유기농 무와 청정 바다에서 해녀가 채취한 포항 돌미역을 접목시킨 결과다. 여기에 자연산 해조류에서 추출한 ‘아미노산 복합체’를 더했더니 맛 또한 좋아졌다. 곧 롯데마트와 롯데백화점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소비자의 직접 평가를 받는 일만 남았다.-사업의 다각화와 확장도 생각하고 있는지.△우리가 만든 시래기를 맛보고 격려해준 미국과 두바이 교민들을 잊을 수 없다. 만드는 사람의 수고를 가장 잘 아는 건 소비자다. 그러니, 먹는 걸 생산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정직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는 차(茶)로 마실 수도 있고, 가루로 만들어 수프에 장식용으로 뿌리는 것도 가능한 시래기 가공품이 완성 단계에 있다. 앞으로는 유럽 수출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 -변하지 않고 지켜갈 사업의 원칙이 있다면.△이익만 생각한다면 오래 가지 못한다. 좋은 차와 커다란 집만으로는 완전한 행복을 만들 수 없다.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봉사하는 삶을 지향하고자 한다. 평생 힘든 육체노동을 한 탓에 허리가 굽은 동네 할머니들을 보며 내가 기계면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만약 크게 성공한다면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뭘 할 생각인가.△운전을 못하는 노인이 시골에서 병원에 다니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 종일 진료실에서 기다렸다가 짧은 시간 물리치료를 받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료 셔틀버스 운행은 그분들을 돕는 방법 중 하나다. 농사를 하며 생긴 질병을 치료할 땐 지원도 해주고 싶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더 큰 그림을 그려보자면, 농촌 노인을 위한 전문병원도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덧붙이고 싶은 말이 남았는지.△농사를 통해 암을 이겨내고, 유기농 농산물 수출과 마스크 팩, 대체육 생산으로 작지 않은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성실한 농사꾼으로, 이웃과 더불어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남들은 ‘뭐 하러 그렇게 바쁘게 사냐’ ‘왜 힘들게 자꾸 새로운 사업을 벌이느냐’고 하는데, 그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우리 공장엔 동네 어르신들이 자주 놀러 온다. 농사일로 일생을 보낸 그분들이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드는데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3-28

“포항 넘어 서울·경기도 술과 당당하게 경쟁하고파”

대학을 졸업하고 화학 회사에 다니던 30대 초중반 청년 셋이 의기투합 사업을 시작했다. 막걸리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비즈니스의 시작은 비참함(?)에 가까웠다.대형 마트를 찾아가 “저희가 만든 술입니다. 여기서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막걸리를 가져와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바쁘니까 나가주세요”라며 문전박대 당한 것만 수십 차례.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상황은 180도 변했다. 홀대 받던 청년들의 막걸리는 모내기와 벼 베기로 바쁜 농번기엔 하루 6천 병이 팔린다. 연매출 12억 원, 직원도 한둘씩 늘어 9명이 됐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주조장(酒造場)으로 변모한 것이다.어떤 마트 경영자는 13년 전 자신이 쫓아낸 청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먼저 인사하며 깍듯한 태도로 반긴다. 유쾌하고 즐거운 ‘창업 성공기’가 아닐 수 없다.‘옹해야’라 이름 붙인 탁주를 필두로 7종류의 막걸리를 생산하는 청슬전통도가 정광욱(47) 대표는 어려웠던 사업 초기를 떠올리며 “지금은 다 웃음을 부르는 추억”이라 말했다.“술은 그걸 만드는 사람과 닮는다”는 믿음을 가진 정 대표는 지적장애 3급 장애인을 흔쾌히 직원으로 받아들여 9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또한, “인간미를 잃지 않는 직장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품 넉넉한 사업가이기도 하다.그가 올 3월 초순 막걸리에 이어 증류식 소주 3종을 만들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30년 이상 ‘청탁불문·두주불사(淸濁不問 斗酒不辭)’로 살아온 기자로선 오크통과 항아리에 숙성시킨 3종류 술맛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 일.유대인 율법학자들은 ‘탈무드’에서 “사람을 원숭이와 돼지로 만들어버린다”며 술을 평가절하 했다.하지만, 미국의 시인 제임스 더글러스 모리슨(James Douglas Morrison)은 정반대의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술은 인간의 넋을 본질적 자리로 돌려놓는 영혼재귀(靈魂再歸)의 수단”이라 상찬한 것. 어떤 게 옳은 말일까?귓가를 간질이며 불어오는 봄바람이 낮술 한잔을 간절하게 만들던 지난 16일. 포항시 북구 기북면에 자리한 청슬전통도가를 찾아 정 대표와 만났다.그는 갓 출시된 ‘따끈따끈한’ 영일만 소주, 문덕 헬로우부대 소주, 새록새로 소주를 각각 1병씩 들고 호탕하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태어난 곳과 유년을 보낸 지역은 어딘가.△1976년 포항 죽천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중·고교를 모두 포항에서 다녔다. 한동대에선 국제정치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다.-막걸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이력이다.△대학 졸업 후 잠시 정치판을 기웃거렸고, 화학 회사를 몇 년 다니기도 했다. 헌데, 그것들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함께 회사를 다니던 친구 둘에게 “술 만드는 회사를 만들어보자”고 제의했다. 그게 서른네 살 때다. 학생 때도 암벽과 빙벽을 오르는 모험과 도전을 즐겼다. 그런 기질이 안정적 직장생활보다는 망하든 흥하든 화끈하게 승부를 볼 수 있는 사업쪽으로 나를 이끈 듯하다.-처음부터 당신이 만든 막걸리가 잘 팔리진 않았을 텐데.△그랬다. 막걸리를 취급하는 마트와 소매점에서 구박을 당한 적도 많았다. 모든 게 처음이니 술을 만드는 것도, 파는 것도 서툴렀다. 여러 가지 난관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내가 만든 막걸리이니 내가 직접 팔아보자’며 2011년엔 전통주점 ‘옹해야’를 열기도 했다. 다 지난 이야기다. 주조장과 주점 모두 꾸준히 이름을 알려 오늘도 성장 중이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이젠 포항에선 없어서 못 파는 인기 있는 막걸리가 됐다.(웃음) -얼마 전엔 증류식 소주를 만들었다고 들었다.△포항시, 문덕·해도동 상가협의회와 협력해 3가지 종류의 증류식 숙성소주를 지난 3월 초 출시했다. ‘문덕 헬로우부대 소주’는 오크통에 숙성시키고, ‘영일만 소주’와 ‘새록새로 소주’는 항아리에 60일간 숙성한다. 3종의 소주는 숙성 방식과 누룩 함량을 달리해 기성세대(영일만 소주)와 군인들(문덕 헬로우부대 소주), MZ세대(새록새로 소주)의 각기 다른 입맛에 맞추고자 노력했다.-예나 지금이나 술을 빚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한데.△술의 원료인 효모(酵母)는 온도에 굉장히 민감하다. 온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술을 망친다. 특히 여름에 그렇다. 13년을 해왔지만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결국 좋은 술을 만드는 핵심 키워드는 ‘온도 관리’다.-술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은.△우리 주조장에서 빚은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다. “하루의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 “잠시나마 슬픔을 잊게 해줬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나도 덩달아 기쁘다.‘청슬도가’라는 주조장 이름이 독특하다. 정광욱 대표는 시(詩)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신경림, 정호승, 안도현의 시집을 읽으며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맑은 소리가 나는 거문고’라는 뜻의 청슬(淸瑟)에선 술 향기가 아닌 문학의 향기가 느껴졌다.한국의 주조장은 대를 이어 운영되는 곳이 흔하다. 대부분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노하우가 담긴 술을 만든다는 이야기. 그러나, 정 대표는 주조장 창업 1세대다. 백지에 스스로 그림을 그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도전정신을 자극했다.“다른 주조장은 전통을 이어가기에 주조법이 변화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것과 다르게 나는 효모도 다양하게 써보고, 숙성 용기도 바꿔가며 여러 실험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그 ‘실패의 힘’으로 나만의 스타일을 찾게 됐다.” -단답형 질문이다. 최고의 주도(酒道)는 뭐라 생각하는지.△취하면 대부분이 자기 말만 하려 한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주도가 아닐까. -어떤 마음가짐으로 술을 빚나.△‘만드는 자의 고통이 클수록 마시는 자의 즐거움은 커진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시장에 선보인 증류식 소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처음 만드는 증류주라 ‘여과 공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최대 주류회사에서 수십 년간 연구원으로 일한 후배의 아버지가 그걸 명쾌하게 해결해줬다. 여과 과정만이 아닌 정제와 숙성법도 조언했다. 내겐 잊지 못할 은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우리 주조장 증류식 숙성소주를 맛본 사람들이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깨끗하다”는 의견을 전해줬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자신감으로 또 어떤 도전을 할 것인가.△포항을 넘어 서울·경기 지역으로 진출하고 싶다. 막걸리는 유통기간이 짧고 유통망도 대기업에 비해 잘 구축돼 있지 않아 타 지역 술과 경쟁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소주는 다르다. 청슬전통도가가 빚은 증류식 소주는 서울과 경기도 어떤 주조장에서 만들어지는 술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한다. 공평한 시장 상황만 주어진다면 맛과 품질에서 당당하게 겨뤄보고 싶다.-청슬도가가 어떤 주조장으로 기억됐으면 하는지.△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회사, 인간미가 느껴지는 직장을 만들고자 한다.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술에는 만드는 사람의 성품이 담긴다는 걸 믿는다. 술로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술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언젠가 내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어 저도 술을 빚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기쁘게 “그래. 좋은 결정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3-21

“지금도, 앞으로도 붓을 들고 살아갈 겁니다”

“초등학교 때 처음 서예를 시작했고, 이후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캘리그라피에 이르렀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글씨에 대한 애정을 간직해,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한 작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캘리그라퍼 이현정(40)씨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하지만,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예술가 혹은, 작가로서 바람직한 태도다. 모든 문화·예술적 작업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되는 법이니까.이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졸라 서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글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계속됐고, 중고교 시절엔 자신의 작품을 공모전에 부지런히 보냈다. 대학에선 디자인을 전공했다. 현재는 서예에 더해 캘리그라피 작업을 진행하며, 영남대학과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람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치고 있다.서예(書藝)는 ‘붓으로 글씨를 쓰는 예술’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보다 조금 생소한 단어인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뭘까?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그린 문자라는 뜻으로 기계적인 표현이 아닌 손으로 쓴 아름답고 개성 있는 글자체’를 지칭한다. 여기에 보다 상세한 설명을 더한다면 “의미 전달 수단이라는 문자의 본뜻을 떠나 유연하고 동적인 선, 글자의 독특한 번짐, 스쳐가는 효과, 여백의 균형미 등 순수 조형의 관점에서 보는 글씨”라고 할 수 있다.캘리그라퍼(Calligrapher)는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는 사람이니, 이현정 작가는 서예가인 동시에 캘리그라퍼다. 거기에 더해 그림 작업과 강의까지 겸하고 있으니 항상 시간에 쫓기는 바쁜 사람이기도 하다.“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고난 천재성보다 멈추지 않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작가는 자신부터가 노력파다. 마흔이라는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에 이미 ‘글꽃이 필 때까지’(2015년) ‘그곳에 따뜻함이 있다’(2017년) ‘서양연화-글씨가 빛나는 순간’(2020년)으로 명명된 캘리그라피 개인전을 세 차례나 열었고, 포항시 서예대전 초대작가가 되기도 했다.포항 산림조함 ‘숲마을’ CI와 BI를 제작하고, 영일대해수욕장 장미원 상호 글씨를 쓰고, 포항 국제불빛축제 타이틀 손 글씨를 쓴 것도 이현정 작가.이처럼 스스로 선택해 뛰어든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 분주히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 이현정’을 지난주 화요일 포항 환호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아래는 그날 이 작가와 기자가 주고받은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출생지와 유년을 보낸 곳은 어딘가.△1983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구미와 대구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던 때를 제외하면 쭉 포항에서 살아왔다.-어린 시절부터 글씨와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는지.△초등학교 때 서예를 접했다. 친구가 서예학원에 다니는 걸 보고 “나도 가겠다”며 부모님을 졸랐다. 어떤 대단한 결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서예 하는 모습이 너무 근사해 보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내성적인 학생이었는데, 글씨건 그림이건 혼자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시간이 좋았다.-대학에선 뭘 공부했나.△디자인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땐 포토샵과 일러스트 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 결과물을 대학 공모전에 출품해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상을 받은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당신이 정의하는 캘리그라피는.△붓을 들었을 때 느끼는 감성을 글씨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봄이면 봄이란 단어 속에 봄 내음이 스며든 글씨를 쓰고, 여름이면 글씨로 더위를 표현하는 거다. 캘리그라피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한국에서 캘리그라피 작업이 본격화된 시기는 언제쯤인가.△개념이 구체화된 건 아직 30년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캘리그라피의 시작은 서예로 보면 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붓으로 글씨를 써온 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캘리그라피로 진화했다고 보면 무방하다. 우리가 붓으로 주로 작업한다면 외국은 펜이나 만년필로 작업을 한다. 내가 한글로 작업하듯 외국 작가들은 각기 다른 그들의 언어로 작품을 만든다. 그렇게 디자인화 된 문자가 캘리그라피다. -당신이 캘리그라퍼로 활동한 건 언제부터인지.△대학 다닐 때 각종 포스터를 접하면서 독창적인 글씨에 매료됐다. 글씨가 광고나 디자인에 접목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걸 보며 캘리그라퍼를 꿈꿨다. 내 경우엔 일찍 시작한 서예에서 모색과 진화 과정을 거쳐 캘리그라퍼에 이르렀다고 봐도 좋다.-예쁜 글씨, 매력적인 글씨를 쓰는 노하우가 있나.△연습밖에 다른 길이 없다. 서예를 배우면 다양한 서체를 만들 수 있으니 캘리그라피 작업에 도움이 된다. 부지런히 많이 쓰고, 오랜 시간 다듬어야 붓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그래야 글씨건 그림이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나 또한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작업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기억에 남는 전시회는.△‘코로나19 사태’가 심각했던 2020년에 3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 전시회를 통해 내가 지향할 수 있는 방향이 다양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고, 활동 영역도 포항만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넓혀가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다.-캘리그라피 작업이 매력적인 이유는 뭔가.△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붓끝이 만들어내는 글씨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글씨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도 매력적이다.-영향 받거나 존경하는 작가가 있다면.△내게 서예를 가르친 솔뫼 정현식 선생님이다. 15년 가까이 그분에게 글씨와 글씨 쓰는 사람의 태도를 배우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서체와 감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틀을 깨는 도전의식과 멈추지 않고 노력하는 자세도 정 선생님에게 배웠다.-작업 시간 외에는 뭘 하며 지내나.△캘리그라피를 포함해 다양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장에 간다. 어떤 전시장이건 그곳에선 영감을 받을 수 있고, 지금 생산되는 작품들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캘리그라피를 가르치기도 하는데.△6년 전부터 영남대에서 캘리그라피와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내 작업실에서도 10여 명의 사람들과 수업을 진행 중이다. 수강생은 직장인도 있고 주부도 있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해 공모전에 출품을 하기도 하고, 회원전도 개최한다. 서로가 서로의 작품을 보며 자극 받을 수 있기에 가르치고 배우는 게 즐겁다.-어떤 캘리그라피를 지향하는지.△요즘엔 이미지와 컬러에만 치중한 작품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캘리그라피보다는 글씨라는 단단한 기본 개념을 가지고, 나만의 스타일로 흔들림 없이 작업하고 싶다는 게 나의 바람이다.-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계속 붓을 들고 살아가려 한다. 나의 색채와 감성을 만들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할 각오가 돼있다. 캘리그라피만이 아닌 회화에도 도전하고 싶다. 물론, 출발점이 된 서예에도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을 이어간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꾸준하고 성실하게 오래 작업한 작가로 기억될 수 있을 듯하다. /홍성식기자

2023-03-14

“일흔이 되니 아버지의 삶 이해하게 됐어요”

먼저 흥미로운 질문 하나. 다음에 열거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김상국 전 세종대 체육학과 교수, 이치호 전 건국대 축산식품생명공학과 교수, 곽병휴 전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 정두환 경주대 관광외국어학부 교수.하나로 묶이지 않는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고, 서울과 부산, 경주까지 각자 다른 지역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이력이 있는 이 4명의 학자 모두는 1950년대 초중반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당시엔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고현1리, 현재는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1리로 불리는 곳이 바로 이들의 고향.청하면 고현1리는 1950~1960년대에도 80호 남짓의 조그만 마을이었고, 한국의 어느 시골마을 할 것 없이 갈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현재는 채 50여 호가 되지 않는 소읍이다.그럼에도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시절을 허위허위 통과해온 그 작은 동네에서 또래 대학교수가 4명이나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궁금했다. 이와 관련해 김상국 전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내 고향에선 일찍 벼농사를 시작했다. 당시 가장 귀했던 게 쌀이다. 지금 세대들에겐 믿기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1950년대엔 쌀이 곧 돈이었다. 우리 마을 어머니들은 자신은 굶더라도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조금씩 모아 그걸로 자식들의 학용품을 사주고, 학비를 댔다. 난 그런 모습을 직접 보며 자랐다.”그렇다면 그 마을이 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벼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토대는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여기엔 김 전 교수의 아버지 김두수(金斗洙)씨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그 역시 고현1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두수 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지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으로 고향마을에 농업용 저수지를 만들고, 마을길을 넓히고,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는 일에 앞장섰다.넓혀진 길과 넉넉한 농업용수, 여기에 사방사업(沙防事業·황폐지를 복구하거나 산이 붕괴되는 걸 막기 위해 식물을 심는 일)으로 태풍과 홍수 걱정을 덜었으니 인근 마을들에 앞서 안심하고 쌀을 재배하고 수확할 수 있었던 것.2023년 봄이 목전으로 다가온 지난 주. 고향을 찾아온 김상국 전 교수와 함께 따스하고 평화로운 풍광을 지닌 청하면 고현1리를 찾았다.그날 김 전 교수는 자신이 채 열 살도 되기 전 세상을 떠난 선친과 일흔이 돼서야 그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포항 시내에서 30여 분 차를 달려 도착한 고현1리. 마을 입구엔 김두수 씨의 행적을 기록한 ‘공적비’가 서있었다. 1969년 만들어진 이 비석에 적힌 글귀를 해석해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공(公·김두수)은 甲寅年(호랑이의 해)에 종찬(金鐘贊)의 아들로 태어나 甲辰年(용의 해)에 생을 마쳤다. 그는 총명해 배움에 힘쓰고 부모에 효도했다. 농사를 짓는 일에 본보기를 보이며,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니, 고장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그는 사방조림사업과 재방을 튼튼히 하고. 고현리 농업창고 건설과 농수로 개설은 물론, 농로 개설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사업의 추진을 위해 관계당국에 건의는 물론, 솔선 실천해 향토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다. 그가 먼저 주창했던 일들이 열매를 맺었으니, 우리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한 조각돌에 새겨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공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다.’ -오늘 아버지의 공적비를 다시 보는 마음이 어떤지.△선친은 내가 열 살이 되기 전 돌아가셨다. 난 5남매의 막내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아버지가 마을과 공동체를 위해 애쓰던 모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학생 시절엔 돈이 넉넉하지 않아 고생도 했다. 그땐 ‘아버지는 왜 자식들을 위해 돈을 모아두지 않았을까’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버지의 삶은 공동체를 위한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친은 고향마을 사람들이 공적비를 세워줄 정도로 신망이 높았던 사람인데.△민의원 선거에 나간 것도 개인의 영달보다는 지역의 현안 사업을 효과적으로 돕겠다는 마음에서 출마를 결심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계몽소설을 읽고 그 분위기에 경도된 분이셨다. 문맹이 적지 않았던 시절에 관공서의 문서를 읽고 해석할 줄 알았으니, 동네 사람들의 힘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진심을 알아준 고향 사람들이 고맙다.-이치호, 곽병휴, 정두환 교수 모두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연관된 추억이 있는가.△나이 차이가 조금씩 나지만 어릴 때 모습이 왜 생각나지 않겠는가. 모두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던 게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경우엔 해병대에서 고생했던 경험이 나머지 삶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김 전 교수와 천천히 돌아본 청하면 고현1리는 그야말로 조용하고 호젓한 시골이었다. 나지막한 산과 제법 너른 들판이 마을을 품에 안은 형상이 안정감을 주는 풍경. 길을 가다 75년간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김 전 교수의 동네 형을 만났다.그 주민 역시 김상국 전 교수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르신과 함께 산에 나무를 심고,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동네 길을 넓히던 일이 엊그제 같다”며 “마을 위에 고현저수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김두수 어르신의 노력이 컸다”고 회상했다. 이와 관련해 김 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내 아버지는 고향 발전을 위해 헌신한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공적비에 새겨진 내용이 우리 동네의 이야기와 자랑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엔 한국 농촌 근대사의 단면이 담겨있기에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이 아닐까.” -오랜 시간 대학 강단에 섰다. 후학들에게 강조해서 말한 게 있다면.△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며 대학을 마쳤다.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간 게 1982년이다. 학비가 모자라 뉴욕에서 택시 운전까지 하며 컬럼비아대학에서 스포츠교육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떠난 지 10년만인 1992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세종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정년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정확히 알게 되면 미래를 효과적으로 설계할 수 있으니, 자신의 참된 자아를 알아가라’고 가르쳤다. 참된 자아를 깨닫기 위해선 반성적 사고와 독서가 기본이다.-나이가 들어 고향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몸은 떨어져 있지만 우리 마을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제도 고향에 간다고 생각하니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고향은 어머니가 날 반기며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모습을 기억나게 하는 공간이다.-일흔이 됐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 같은지.△선각자였다. 자신이 사는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이타적인 행위를 했으니까. 그런 모습이 존경스럽고 앞으로도 같은 마음일 것 같다. 늦었지만 이제야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귀향할 생각은 없는지.△유년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니 왜 오고 싶지 않겠나? 잊을 수 없는 고향의 공기와 분위기를 느끼며 작은 봉사 활동이나마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마을 사람들이 선친을 위해 세운 공적비와 1958년 자신의 아버지가 수십 차례 관공서를 오가는 수고 끝에 만들어진 고현저수지까지 둘러보고 포항 시내로 돌아오는 길. 굳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사자성어를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노학자의 얼굴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앞서 언급한 이치호, 곽병휴, 정두환 교수 역시 그들의 고향 청하면 고현1리를 돌아본다면 똑같은 표정과 심경이지 않았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3-07

“오래도록 나만의 색깔 담긴 사진 찍고 싶어”

새벽 4시에 홀로 카메라를 들고 구미 원평동 재개발 지역에 들어섰다. 한 번 사라지면 다시는 옛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는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아 사라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런 ‘예술적 필요성’을 건설사 관계자와 경비원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철거와 신축이 계속되는 도시의 재개발 현장은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다. 안전을 위한 감시와 예기치 않은 사고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다.오래전부터 원평동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진행 중인 사진작가 김은정씨가 카메라를 들어 딱 한 번 셔터를 누르자 저 멀리서 재개발 업체 관계자가 달려나와 촬영을 가로막았다.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와 신분증까지 뺏긴 적도 있어요.”원평동에는 조그만 교회가 있다. 철거를 위해 인근을 철책으로 막았지만, 예배를 하려는 신도들을 위해 조그만 쪽문을 만들어뒀다. 거기서도 촬영을 시도했으나 그것 또한 제지당했다. 상황이 이처럼 어려웠지만, 김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업을 위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흑백사진에 담긴 ‘원평동 시리즈’는 이런 우여곡절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고, 그 동네를 카메라에 담는 작업은 5년째 이어지고 있다.김은정 작가가 허물어져 가는 ‘원평동에서의 사진 찍기’에 이처럼 에너지를 쏟는 이유는 뭘까? 2021년 ‘원평동…ing’ 전시회에서 김 작가는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구미의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리다 도심 상권의 변화에 밀려 변두리로 존재했던 원평동. 재개발 사업으로 낡은 구시가지는 초고층 아파트로 변모 중이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아이들이 뛰놀고 대가족이 한 집에서 모여 살던 정겨움은 추억이 되었다. 진정한 다큐멘터리는 삶이 녹아있는 기록이고 희망이 돼야 한다. 사진은 시간을 담는 예술이며 우연의 산물이다. 시간의 흐름 속 어느 한순간을 포착해 동결해 놓으며 과거를 상상만으로 소유하는 것이 사진의 매력이다.”김 작가는 마흔을 넘겨서야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한 늦깎이지만, 자신의 일을 대하는 태도와 사진을 향한 믿음은 여느 청년 작가들 못지않다.2019년부터 2022년까지 ‘사진 바다 기획전-멈출 수 없는 그리움’을 필두로 포항갤러리와 구미 드림큐브에서의 ‘원평동…ing’ 전시, ‘사진의 섬 송도 외부작가 전시’ ‘포항 산책 기획전’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대한민국 국제 포토 페스티벌 형형색색(形形色色) 수상자전(展)’ 등의 단체전에도 참여한 바 있는 김은정 작가.“사진이란 빛과 어둠이 만나 내 눈을 이끄는 순간, 외부 세계인 피사체와 내부 세계인 정신이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라 말하는 김 작가를 지난 18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있는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아래 옮긴다. -태어난 곳과 생활한 지역은.△통도사가 가까운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업 관계로 이주한 아버지를 따라 구미에 정착했다. 스물셋에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아 서른여섯 살에 구미1대학에 입학해 미용·보건을 전공했다. 만학도였으니 열심히 공부했고, 이후 경일대로 편입했으며, 대구한의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사진과는 무관해 보이는 이력인데.△맞다. 정규 교육과정으로 사진을 공부하지는 못했다. 중고교 시절엔 그림을 좋아했다. 크고 작은 상도 몇 번 받았다. 사진과는 무관하게 살았는데, 10여 년 전쯤 구미의 한 화실을 다니며 풍경 스케치를 위해 카메라를 구입하게 됐다. 그게 계기가 돼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작업을 지속하면서 애정도 커져 갔다.-사진과 그림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내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그림보다는 천재성이 덜 필요하다고 느껴서다. 사진은 감각과 더불어 성실성이 요구된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겐 한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진은 일단 카메라를 들면 쉽게 그만두는 사람이 드물다.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성실함이 더해진다면 발전 가능성이 높은 예술 장르가 바로 사진이다.-그렇게 시작된 사진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관심 가졌던 주제나 소재는.△낡고 허물어진 것들에게 마음이 간다. ‘원평동 시리즈’도 그래서 시작했다.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구미 원평동 일대는 낙후된 지역이었는데, 쪽방이 있던 그곳에 41층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철거됐거나 철거가 예정된 지역을 촬영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재개발 관계자는 물론, 거주하는 사람들도 민감하고 예민한 상태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 때마다 항상 조심스럽다. -어떤 사진을 지향하는지.△내가 찍는 사진에 사람 사는 냄새와 따뜻함이 담겼으면 좋겠다. 동네 아이들의 웃음, 그 아이들의 친구로 살아가는 개와 고양이, 좁은 골목 사이에서 무언가를 나누며 사는 이웃들을 기록하고 싶다.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흔적들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흑백사진이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주로 흑백으로 작업한다. -영향을 받았거나 닮고 싶은 사진작가는 누구인가.△서울 중림동 골목 안 풍경을 30여 년간 촬영한 김기찬 씨다. 어릴 적 향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골목 안 사람들의 애환, 소박한 우리네 일상의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데, 지금 내가 하는 작업과의 연관성이 있어 더욱 좋아하게 됐다. -‘좋은 사진’을 찍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사진엔 자신만의 개성이 담겨야 한다. 달력에 인쇄된 사진처럼 천편일률적인 게 아닌 자기의 정신세계가 오롯이 표현된 사진이라면 단 한 장이라도 가치가 있다. 미학적 표현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려면 철학과 인문학 관련 책도 많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도 관심을 가진 주제를 보다 깊이 알아가기 위해 서점에 자주 가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구입한다.-향후 예정된 전시회가 있는지.△오는 4월 7일부터 14일까지 ‘기획초대전 No Rules’이 미국 뉴저지에서 막을 올린다. 같은 달에 서울 강호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린다. ‘대구 비엔날레 5인 기획전’도 준비하고 있다.-어떤 사진작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는지.△성실하게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간 다큐멘터리 작가로 남고 싶다. ‘원평동 시리즈’ 작업을 하며 쫓겨나기도 했고, 달려드는 모기에게 수없이 물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흔적과 함께 고요함과 공포가 남는다. 밤에 혼자 사진을 찍다보면 무서울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이 작업을 묵묵히 해낼 각오가 돼있다. 과거를 포착해 그걸 영원으로 남기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난다. 내가 더 나이 들었을 때 원평동에서의 작업이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사라진 것들의 향수를 불러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2-21

“은행원의 행복보다 과메기 식당 주인의 행복 택했죠”

어느 지역이건 그 도시를 떠올리면 동시에 연상 작용으로 이어지는 음식 하나쯤은 있다.흑산도는 홍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독특한 발효법으로 숙성시킨 ‘삭힌 홍어’는 이제 호남만이 아닌 전국의 미식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경기도 이천은 좋은 쌀로 기억되는 고장이다. 잘 차려낸 ‘이천 쌀밥’ 한 상은 관광객들의 미소를 불러낸다.포항이라고 흑산도 홍어와 이천 쌀밥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특별한 먹을거리가 없을까. 당연지사 있다. 겨울철에 한국인이 맛보는 과메기의 8할은 포항 구룡포 일대에서 만들어진다.적절하게 건조된 꽁치를 미역과 김, 손질한 파·고추·마늘 등과 함께 먹는 과메기는 큼직한 대게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겨울 진미(珍味)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이강수산 호미곶과메기 이강훈(50) 대표는 30대 중반부터 50대에 이른 오늘까지 17년의 시간을 과메기와 함께 울고 웃어온 사람이다.“우리 가게를 찾아 내가 준비한 과메기에 술 한잔 마시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손님을 볼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는 이 대표는 젊은 시절엔 은행에 다녔다.지난주 화요일. 죽도동 호미곶과메기를 찾아 은행원으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강훈 대표와 만났다.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73년 포항 오거리, 바로 이 근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중·고교도 포항에서 다녔다. 호미곶과메기가 있는 동네는 내 유년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다.-은행원에서 과메기 식당 주인으로 직업을 바꾼 계기가 있었나.△2006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17년째 들어섰다. 은행원으로 일할 땐 여유로운 삶을 동경했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는 낮엔 은행에 나가고, 밤에만 과메기를 팔았는데 식당 이름이 알려지고 잘 되니까 둘 모두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른넷에 은행을 나와 본격적으로 가게에 매달렸다.-과메기 판매만이 아닌 건조와 숙성도 직접 하는지.△그렇지는 않고 단골 거래처가 있다. 한 살 아래 후배가 16~17년째 덕장을 운영 중이다. 둘 사이가 친밀하기에 과메기의 건조와 숙성 전 과정을 머리 맞대고 의논했다. 그런 적극적인 소통이 우리 가게 과메기의 품질을 높여온 것 같다. -포항 구룡포에서 만들어지는 과메기가 맛있는 이유는.△바람과 건조 조건이 생선 말리기에 적합해서 그렇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과메기를 만들어온 지역의 노하우가 더해지니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게 아닐까? 사실 나도 어릴 때부터 과메기를 좋아했다. 손님과 더불어 내 입에도 더 맛있는 과메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웃음)이른바 ‘과메기 제철’은 11월과 12월이다. 불어오는 동해의 차가운 바람과 구룡포의 맑은 공기가 건조·숙성된 꽁치의 맛을 극대화시키는 시기인 것. 그 기간에 맞춰 호미곶과메기는 10월 중순 가게를 열어 이듬해 2월 말까지 영업한다.포항 사람들은 1년을 기다려온 탓에 11월 초순부터 과메기를 맛보러 이 대표의 식당을 찾는다. 전국으로 보내지는 택배의 양과 관광객 손님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건 12월부터라고 한다.지난 3년, 그러니까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졌을 때는 택배 주문이 많았다. 올해는 어떨까?이 대표에 따르면 “택배량도 줄고, 가게의 손님도 조금 줄었다”고 한다. 어째서 그럴까. “코로나19가 바꾼 생활 패턴이 밤 10시 이후엔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 듯하다”는 게 이강훈 대표의 생각이다.-물가 상승이 가파르다. 가게 운영에 어려움은 없는지.△원재료 가격과 할복(割腹·꽁치의 배를 가르는 작업)하는 할머니들의 인건비, 유류비, 전기세, 난방비 등이 모두 올랐다. 가게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었다면 직원을 더 고용해야 했을 테고, 지금의 가격으로 과메기를 판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몇 해 전엔 청어과메기가 인기였는데.△그랬다. 5년 전쯤엔 나도 청어과메기를 팔았다. 하지만, 덕장과 식당을 유지할 정도로 많은 양이 팔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꽁치과메기가 대세다. 비율로 보자면 꽁치가 95라면 청어는 5 정도다. ‘통마리’라고 꽁치를 할복하지 않고 통째 말린 것을 찾는 손님도 있는데, 그건 날씨가 예전처럼 춥지 않고, 건조되기 전에 부패하는 경우가 흔해 판매가 어렵다.-과메기를 만들던 옛날 풍경이 기억나는지.△30~40년 전엔 과메기가 포항 서민들의 겨울 군입거리였다. 어르신들에겐 값싼 안주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죽도시장에서 덜 마른 꽁치나 청어를 사와 짚으로 엮어 부엌에서 건조시키던 모습이 생생하다.-포항에 과메기를 파는 식당은 얼마나 되나.△최소 200개는 넘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과메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전문적으로 과메기만을 판매하는 가게도 많이 생겼다. -손님이 오면 “잘라드릴까요? 찢어드릴까요?”라고 묻던데.△가위로 자른 과메기와 손으로 찢은 과메기는 식감이 다르다. 예전에 어머니가 신문지 위에 과메기를 놓고 쭉쭉 찢던 걸 기억하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우리 가게에선 찢어달라는 분들이 훨씬 많다.-맛있는 과메기는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지는가.△‘속도’와 ‘습도’가 중요하다. 꽁치의 배를 가를 때도 그렇고, 건조된 과메기의 껍질을 벗길 때도 빠른 속도로 해야 한다. 숙련된 할머니는 1~2초에 꽁치 한 마리 배를 가르고 내장을 빼낸다. ‘생활의 달인’급이다. 가능하면 손에서 머무는 시간이 짧아야 한다. 거기에 더해 과메기 만들기는 습도 조절이 관건이다. 과하게 습기에 노출되면 과메기에서 비린내가 난다. 그런 이유로 생산과 판매 모든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게 속도와 습도다. 노력 없이 그저 얻어지는 성장과 발전은 없다. 과메기 전문식당도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 호미곶과메기가 ‘포항 맛집’ 중 하나로 자리 잡기까지 이 대표는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과메기를 찍어 먹기에 최적화된 초장의 완성을 위해 고추장과 식초 한 드럼통쯤을 버렸다.과메기가 구룡포 덕장을 출발해 가게로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도 습도를 맞추기 위해 냉장 트럭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최상의 식감을 지키고자 가능하면 과메기 껍질은 손님이 주문한 후에 벗긴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호미곶과메기는 1년에 5개월만 운영한다. 가게를 여는 10월부터 2월까지는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방문객과 주문량이 많으면 하루에 말린 꽁치 1~2천 마리를 파는 날도 있으니 휴일 또한 없다.그렇다고 나머지 3월부터 9월까지는 편하게 쉬느냐? 그렇지 않다. 그 기간엔 다른 식당의 영업 전략도 배우고, 더 맛있는 과메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스템을 고민하는 게 이강훈 대표의 일상이다.포항 사람들에게 과메기는 일종의 소울 푸드(Soul Food)다. 결혼해서 미국에 사는 딸이 임신을 해 친정인 포항으로 돌아왔다. 입덧이 심해 고생하는 딸이 과메기만은 잘 먹기에 사흘이 멀다 하고 호미곶과메기를 찾았다는 한 어머니를 이 대표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마지막으로 물었다. “은행을 그만둔 걸 후회한 적은 없나?” 잔잔한 웃음 끝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안정적인 직장생활도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가게 과메기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손님들을 보는 게 더 좋다. 앞으로도 행복한 과메기 식당 주인으로 살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2-14

연서(戀書)를 띄우는 마음으로 출간한 ‘포항 5부작’

몇몇 사람들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한다.현대도시는 태어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인간의 유소년 시절 ‘기억’과 ‘그리움’은 대부분 고향과 연관돼 있다. 이는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않을 터.지지난해 시작해 최근까지 포항과 관련된 책 5권의 기획·출간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이 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내 고향 포항’에 대한 애정을 무시로 드러내는 김도형(55)씨다.경희대 국문과에서 공부했고, 출판 편집자 이력이 있는 그는 재작년 하반기부터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포항의 해양문화’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1권과 2권, ‘포항-빛, 물, 철이 빚어낸 천일야화의 땅’이 출간되는 과정을 주도했다.‘포항 5부작’으로 불러도 재론의 여지없는 이 책들은 김도형 씨의 고향 사랑이 지역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기록 욕구로 진화한 사례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좋은 책을 만들어냄으로써 포항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그는 “출간은 여러 사람과 공동으로 작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사진, 그림과 함께 포항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시간을 쪼개 자신의 고향이 지닌 진면목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으니, 그는 이제 ‘지역학 연구자’로 중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지난 토요일 오후. 짙푸른 포항의 겨울 바다가 배경으로 출렁이는 조그만 카페에서 김도형 씨를 만났다. 아래 그날 오간 대화를 요약해 옮긴다. -포항에서 보낸 유년은 어땠나.△중앙초등학교(지금의 북구청사)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초등학생 시절 남빈동 가구상 거리에 살았던 기억은 점점이 남아 있다. 집 근처에 제일교회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 죽도시장이 있었다. 붉은 벽돌에 푸른 담쟁이가 드리워진 고색창연한 예배당과 시끌벅적한 장터는 너무나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이를테면 나는 성(聖)과 속(俗)의 한가운데서 유년을 보냈던 셈이다. 당시 수레를 끌고 가던 말들의 모습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포항역에서 짐을 실은 마차가 동빈내항 쪽으로 이동했는데, “따가닥 따가닥” 하는 말발굽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포항 사람들만의 기질이 있다면.△학생이고 어른이고 간에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분명한 것 같다.-고향을 떠나 있을 때 가장 그리웠던 풍경은.△어릴 때부터 동빈내항과 영일만을 보고 살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바다를 못 보니 갑갑했다. 그 때문에 잠시 향수병을 겪었던 것 같다. 청년 시절 고속버스를 타고 해도동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면 환여동 집까지 걸어갔다. 해도동에서 죽도시장, 동빈내항, 영일대해수욕장을 거쳐 환여동까지. 아마 본능적으로 그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기억 속에 남은 학창시절 스승은 누구인가.△소설가 조해일 선생이 대학 은사다. 석사 과정 때 연구실에서 선생의 삶과 문학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학부 시절은 어수선했고, 석사 시절은 선생의 말씀을 듣는 게 공부의 거의 전부였다. 내게 기대를 하셨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스럽다.-포항으로 돌아온 건 언제이고, 귀향의 이유는.△1999년 예담출판사 편집장을 맡았다. 그해 5월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출간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같은 해 여름 포항에 일자리가 생겨 귀향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생겨 미련 없이 고향으로 왔다. 2000년엔 포항에 있으면서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의 출간 작업을 했다. 다행히 그 책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년 시절 본 포항과 지금의 포항은 뭐가 변했고, 어떤 게 여전한지.△큰 변화라면 원도심은 쇠락했고, 부도심은 급격하게 팽창한 것이다. 원도심의 쇠락은 한국 도시의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안타깝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친구들로부터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 정도로 도시 모습이 급변했다. 영일만 풍경도 많이 바뀌었지만 바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바다가 그대로 있어줘 너무 고맙다. -얼마 전 ‘포항-빛, 물, 철이 빚어낸 천일야화의 땅’을 출간했는데.△아름다운 자연과 흥미로운 역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이 포항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그걸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이 쉽고 편안하게 포항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책을 고민했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내가 포항을 공부하며 쓴 노트이자, 포항에 보내는 연애편지다.-출간 과정을 간략히 요약한다면.△취재와 집필에 일 년 이상 걸렸다. 이런 작업은 좋은 자료를 얼마나 섭렵하는가에 성패가 달렸다.다행히 근래 포항과 관련된 좋은 자료들이 꽤 나왔다. 포항지역학연구회에서 포항지역학총서를 열 권 만들었고, 김진홍 선생이 1935년 발간된 ‘포항지(浦項誌)’에 주해(註解)를 붙인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을 냈다. 이런 책들이 집필 과정에 도움이 됐다.내가 쓴 책엔 144장의 사진이 실렸다. 한마디 불평 없이 까다로운 촬영 부탁을 들어준 사진작가 김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작가 김진호도 귀한 자료사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독자와 지인들의 반응은.△“포항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리하고 알리는 작업이 필요한데 좋은 방안이 없겠냐”는 질문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선후배들은 “선물하기 좋은 책”이라는 말로 격려했다. 솔직히 이 책은 포항 시민들에게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구상했다.-포항을 찾는 여행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은.△호미곶에 있는 구만리 보리밭이다. 해 질 녘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영일만 너머 비학산 일몰을 바라본 후, 밤바다에 맑고 투명한 빛을 뿌리는 등대를 찾아보길 권한다. 더불어 1948년에 서울 생활을 접고 포항으로 온 한흑구 선생의 삶과 문학을 살펴봤으면 한다. 한 선생은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다. 생전에 수필집 ‘동해산문’과 ‘인생산문’을 냈는데, 곧 이 책이 복간된다. 어쩌다 보니 내가 편집을 맡았다. 깊이 있는 철학적 수필집이니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한다.-단답형 질문이다. 당신에게 포항이란.△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은, 천일야화의 땅이다. -향후 다루고 싶은 포항 관련 주제는.△포항은 204km의 해안선을 접하고 있는 해양도시다. 그런 까닭에 바다와 얽혀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 때문에 ‘포항의 해양문화’를 냈다. 앞으로도 해양 관련 이야기를 발굴해 정리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뜻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2023년 계획은.△3월까지 한흑구 선생의 수필집 편집을 마무리하고,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3’도 내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한흑구 선생은 “포항은 한국 속의 뉴욕 같았다”고 말했다. 일본, 만주 등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살았기에 섞여 살기가 힘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개방성에 매력을 느껴 1979년 작고할 때까지 포항에서 살지 않았나 싶다. 바다와 개방성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포항이 가진 매력을 잘 살려 나가면 더 멋있는 도시가 되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김훈

2023-01-31

“여행이 좋아 여행자들의 친구로 살고 있죠”

기자가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라고 불리는 숙박업소에서 처음 묵어본 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였다. 2011년이다. 10개월쯤 아시아와 유럽의 20여 개 나라를 떠돌며 다양한 형태의 게스트하우스를 경험했다. 그 이전까진 여행을 떠나면 호텔 혹은, 모텔이나 여관에서 잠을 청하는 게 보통이었는데.태국 방콕의 조그만 게스트하우스.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스무 살 청년은 맥주 한두 병이 준 취기에 신이 나서 당시 마흔 살이던 기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숙부와 조카뻘의 여행자가 그렇게 너나들이로 어울리는 모습은 한국에서라면 보기 힘들었을 터.동유럽 몬테네그로에선 스위스와 덴마크,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온 청년들과 서툰 영어로 밤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밤의 설렘과 즐거움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그곳 역시 2만 원 남짓의 돈으로 하루를 묵었던 깔끔한 게스트하우스였다.포항시 북구 삼호로에 자리한 영일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박기철·조지우(55) 부부 역시 20대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많은 국가를 여행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떠돌아다닌 동갑내기 부부는 인생에 있어 ‘여행’이란 단어가 가지는 힘과 매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고 편안한 만남이 시작됐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지난 2015년 9월 포항으로 이주해 슈퍼마켓과 모텔로 운영되던 건물을 리모델링 해 영일대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한 지도 벌써 8년째 접어들었다. 짧지 않은 세월이다.그간 적지 않은 외국인과 한국인 여행자들이 영일대 게스트하우스를 찾았고, 두 사람은 질풍노도의 시절을 지나며 고민을 안고 포항으로 여행 온 젊은이들에게 삶의 경험을 조근조근 들려주는 ‘선배 여행자’로 자리를 잡았다.지난주 화요일 저녁. 동해와 인근 산이 가진 매력에 빠져 ‘즐거운 포항 사람’으로 살고 있는 박기철, 조지우 대표를 만나 게스트하우스 주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아래 그날 오간 이야기들을 옮긴다. -포항에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우리 둘 다 여행을 좋아한다. 한국 곳곳을 적지 않게 여행했다. 포항에 처음 왔을 때 사실 좀 놀랐다. 다른 도시들도 바다가 아름답거나, 산이 선사하는 풍경이 감동적이긴 했다. 그런데, 포항은 이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바다와 산을 동시에 여행할 수 있는 곳이 포항이다. 그런 매력 때문에 이곳으로 와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세상엔 여러 사업이 있다. 그중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택했는데.△외국으로 여행을 다녀보면 여러 편의시설과 장점을 갖춘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헌데, 한국의 경우엔 아직도 호텔과 모텔이 대부분이다. 포항도 외국인들이 마음 놓고 저렴하게 머물 숙박업소가 드물다. 우리의 여행 경험을 살려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색다른 경험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다녀본 나라 중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딘가.△우리가 여행할 땐 터키라고 불렸던 튀르키예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고대부터 존재한 국가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가 좋았고,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 무엇보다 그곳 사람들이 친절했다. 여행을 자주 다녀보면 알게 된다. 낯선 곳에선 현지인의 작은 친절도 감동스럽다.-게스트하우스를 열기 전엔 어떤 일을 했나? 그리고, 지금 삶의 만족도는 어떤지.△(박기철) 증권회사에 다녔다. 주식을 사고팔며 고객들의 자산을 관리했다. 20대 후반부터 10년쯤 그 일을 했다. 예전에 미국에서 발행된 어떤 신문에서 ‘증권사 직원은 공항 관제사와 함께 가장 스트레스가 큰 직업’이라는 대목을 읽었다. 공감하는 이야기였다. 그 시절엔 너무 바빠 좋아하는 여행을 다닐 시간도 없었다. 수입은 비교할 수 없이 적어졌지만, 여행자의 편안함과 치유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으로 사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웃음) 그렇다고 사람이 하는 일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당연지사 게스트하우스 운영도 그렇다.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숙소 주인의 손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청소부터 건물 관리와 보수, 여기에 다양한 국적을 지닌 여행자들의 소소한 불편을 모두 해결해줘야 하니 개인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보람이 더 크다는 것이 박 대표와 조 대표의 공통된 부연이다.“사실 젊은 친구들은 생의 전환점에 서서 고민을 안고 여행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여행자들을 만나면 인생 선배로서, 먼저 청년시절을 경험한 형이나 언니로서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준다. 우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눈 청년들이 ‘덕분에 좋은 시간 보내고 갑니다’ ‘편안히 잘 쉬었어요. 꼭 다시 올게요’라는 인사를 전할 때가 게스트하우스 운영자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꽤 오랜 시간 게스트하우스를 했다.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는지.△3~4년 전 태풍이 포항을 덮쳤다. 그때 숙소에 묵었던 손님과 함께 모래주머니를 쌓고, 폭우에 대비하는 등 함께 땀 흘려 일했다. 만약 모텔이었다면 주인이 손님에게 그런 요구나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게 게스트하우스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니겠나? 지금도 그 손님과는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독일인 아내와 갈등을 겪던 30대 손님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일도 기억 속에 남았다.-포항에 온 여행자들에게 추천하는 관광지와 음식은.△사계절 다른 매력을 뽐내는 내연산 보경사의 경관이 좋다고 권한다. 다른 지역에선 보기 힘든 물회와 막회도 꼭 먹어보라고 한다. 동빈내항과 영일대해수욕장, 죽도시장을 잇는 운하길도 걸어보라고 하고 싶다. 그곳은 포항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는 곳이다.-다른 숙소와 비교되는 게스트하우스만의 장점은 뭘까.△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살아온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싶다. 여행자들이 어울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대리체험 할 수 있는 게 게스트하우스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싱가포르, 대만 여행자와 독일, 프랑스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데 아시아와 유럽 젊은이들이 친구가 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여행자들끼리 교류하고 소통하고 친구가 되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기자가 경험한 유럽의 게스트하우스는 ‘커먼 룸’이라 불리는 일종의 공유 거실에서 젊은 여행자들의 만남이 이뤄졌다.영일대 게스트하우스 1층엔 그런 역할을 하는 카페 ‘인 더(In the)’가 있다.향이 좋은 원두커피와 박기철 대표가 직접 구워내는 튀르키예 스타일의 피자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포도주와 맥주도 인근 주점보다 싸게 판매한다.그 외에도 영일대 게스트하우스 옥상엔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고, 2층엔 단체 손님들이 간단한 요리를 해서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부엌 겸 거실이 있다.세미나실과 노래방으로 두루 이용 가능한 지하 공간도 여행자들에게 인기다.장기간의 ‘코로나19 사태’로 여행자가 대폭 줄었던 시절에도 “많건 적건 손님들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했다”고 말하는 박기철·조지우 부부.“좋은 기억을 담아가는 여행자들의 공간으로 10년, 20년 영일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싶다”는 둘에게 2023년 희망과 계획을 물었다. 돌아온 답변이 따스하고 정겨웠다.“요즘 젊은이들이 여러 고민과 힘겨움 속에서 산다는 걸 알고 있다. 여행은 그런 시간을 이겨내는 힘을 준다. ‘돈은 없지만,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될’ 청년들을 우리 게스트하우스에 초대해 며칠만이라도 행복한 여행자로 살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1-10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가치를 안다면… 당신은 ‘좋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눈빛과 표정이 티 없이 맑은 사람’. 포항 흥해에서 마을활동가로 일하는 김명준(49)씨를 처음 만났을 때 든 느낌이었다. 서른아홉에 포항으로 온 김씨는 현재 사회복지사와 마을활동가 역할을 병행하고 있다.마을활동가란 자신의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곳의 미래 발전 방안을 고민하는 사람.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며 구체적 개선 방식을 공부하고, 전파하고, 실행하는 게 마을활동가다.‘도시재생’도 마을활동가가 맡은 역할 중 하나.‘인구 증가와 산업기술 발달로 이미 만들어진 도시 환경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돼 가는 걸 막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이 도시재생의 사전적 의미.외형과 내면이 균형을 이루는 바람직한 ‘재생의 방법’을 고민하며, 자신의 생활 기반인 흥해의 긍정적 변화를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는 마을활동가 김명준을 지난주 수요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김씨는 마을활동가와 협동조합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을 편안한 말투로 들려줬다. 아래 그의 꿈과 희망, 오늘의 삶과 내일의 계획을 소개한다.-출생지와 출신 학교, 전공은.△대구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경기도에서 자랐다. 대학은 안동과 경산에서 다녔다. 보건학을 공부하다가 공대로 옮겼고, 대학원 전공은 사회복지학을 선택했다. 2010년 포항으로 왔다. 경북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게 되면서다. 30대 후반에 포항과 인연을 맺게 됐다.-지금 하고 있는 일은 뭔가.△중앙엘림복지재단에서 사회복지 일과 흥해에서 마을활동가 일을 하고 있다.-‘흥해 특별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다. 어떤 단체인지.△2017년 포항 지진 이후 생겼다. 포항시에서 지진 등 재해를 담당하는 부서가 도시산업안전과인데 거기서 방재와 도시재생 등의 업무를 맡는다고 알고 있다. 현재 포항시청에서 공무원들이 파견돼 흥해행정복지센터에 자리 잡고 지진 피해 복구 등 지역이 처한 어려움을 돕고 있다.-‘마을활동가’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지진 이전부터 마을활동가는 존재했다. 주민을 위해 일하고픈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웃과 소통하며 공동체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거주하는 마을의 복지 향상과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일한다. 급료는 받고 있지만 최저 시급 수준이다.자부심과 열정이 없다면 하기 힘든 일이다. 내 경우도 사회복지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대부분을 마을활동가로 동분서주한다. 휴일에도 일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힘들기보다는 보람 있다.-흥해는 포항 지진 당시 큰 피해를 입었다. 지금 상황은.△거기서 삶을 이어온 주민 중 상당수가 집이 부서지는 등의 크고 작은 피해를 겪었다. 그간 정부와 지자체에서 피해 주민 주거 안정 등 복구를 위해 노력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흥해를 떠났다. 남아 있는 주민들의 삶도 녹록지 않다.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정신적인 고통과 상처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 없지 않다. 마을활동가로 일하는 여섯 사람 중 한 분도 아직 약을 복용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흥해는 아직 지진이 준 생채기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도시재생을 위해 만든 ‘흥해 특별도시재생대학’은 어떤 일을 하는지.△특별재난지역 선포로 국토부에서 예산이 지원됐다. 그것으로 흥해의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됐다. 특별도시재생대학은 특별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 마련한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도시재생 과정의 방법과 필요성을 교육하고, 사업 수행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발굴해 해결해나가는 방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또한, 도시재생과 관련된 기획서를 작성하는 방법도 가르친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초급과 중급 과정에 20명 정도가 수강하고 있다.-흥해에서의 도시재생은 어떤 방법이 돼야 할까.△도시의 중심지역이 신시가지로 옮겨가는 경우 구도심은 소외된다. 그 소외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환경을 개선하는 도시재생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흥해의 경우엔 지진 피해 보상 등과 함께 예전의 활력 넘치던 지역으로 돌아가기 위한 다양한 방면의 노력들이 함께 진행돼야 진정한 의미의 도시재생이 되지 않을까.-‘건빵제작소’라는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고 들었다.△‘건강한 빵 제작소’라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지난해 경북 협동조합 창업자금으로 설립됐다. 마을활동가 3명과 함께 공모사업에 기획서를 내면서 그 출발을 알렸다. 흥해의 특산물인 시금치와 딸기 등을 이용해 좋은 빵을 만들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을 주민들에게도 나눠준다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다.사실 작년까지는 상황이 어려웠다. 하지만, 올해 다시 주민공모사업에 선정됐으니 철저하게 준비해 본래 목적한 사업을 현실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반기면 실무 작업이 진행될 듯하다.-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관심 때문인가.△중고교 시절까지는 문학소년이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암송해 칭찬을 받기도 했다.(웃음) 사실 보건학과 공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한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선 실용적 학문을 공부했다. 그런데, 대학원에선 사회복지를 전공했으니, 결국 내가 좋아하던 분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현재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은.△마을활동가에 중점을 찍고 있다. 매주 목요일 도시농업 전문가 과정을 공부 중이다. 협동조합과 마을기업에 관해서도 좀 더 깊이 있는 고민을 하고 싶다. 내가 꿈꾸는 건 장애인과 노인 등 소외계층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자생공동체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룰 기회를 흥해에서 잡은 것이라 생각한다.-바람직한 도시재생 방안은 뭔가.△외형적 재건과 문화·예술적 향유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선 제대로 된 길로 가기 어렵다. 도시재생에 관심을 가진 기업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가야 한다.-진정한 의미의 ‘좋은 마을’이란 뭘까.△그곳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의 긍정적 가치를 알아가면서, 거기서 함께 살아갈 다음 세대를 마음 놓고 길러낼 수 있는 곳이 아닐까.-마을활동가로서 추구하는 가치는.△성별과 사회적 지위, 세대를 뛰어넘어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이 존중받기 위해선 먼저 남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구나 각자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가 있고 나름의 세계관이 있다. 그게 다를지라도 언젠가는 하나의 길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마을활동가와 협동조합 일을 하며 순수해진 것 같다.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성과와 실적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적(詩的)으로 말하자면 이제야 보는 꽃의 아름다움이 아닌 기르는 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다고 할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끝

2021-05-26

“예술과 사회를 연결해 주는 조그만 역할이 제가 갈 길이죠”

문화와 예술이 세상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최미경 씨.그간 취재를 위해 여러 차례 포항 꿈틀로를 찾았다. 그곳에선 적지 않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고, 열정과 젊음을 바쳐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포항시 중앙동 옛 아카데미 극장과 중앙파출소 일대에선 지난 2016년부터 ‘문화도시 조성사업’이 진행됐고, 회화, 공예, 음악, 공연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 다수가 거기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른바 꿈틀로의 탄생이었다.청포도 다방은 ‘꿈틀로의 문화사랑방’이라 불러도 무방한 곳이다. 2019년 봄부터 2년 동안 청도포 다방을 운영하며 북 콘서트와 그림 전시회, 인문학 강좌 등을 열어온 문화예술 기획자 최미경 씨는 훌쩍 큰 키에 환한 웃음이 인상적인 사람이다.얼마 전 청포도 다방 운영을 끝낸 최씨가 최근 새로운 작업실을 열었다. ‘예술인보호구역’이라고 했다. 이 역시 꿈틀로에 자리 잡은 문화 공간.시원시원한 어법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친절함으로 포항 문화예술계의 마당발 노릇을 기꺼이 해내고 있는 최미경 씨를 만나 그간 진행한 문화 행사와 향후 계획 중인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문화와 예술을 통해 작지만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선물하고 싶다”는 최씨의 꿈과 희망을 아래 옮긴다.-출생지와 전공은.△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에선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현재는 홍익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다.-문학소녀의 과정을 거친 것인가.△초등학교 6학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김소월의 시집을 선물 받았다. ‘초혼’이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만난 시(詩)고, 생애 첫 번째 시집이다. ‘슬퍼서 좋았다’라는 말 말고는 당시 느낌을 설명할 길이 없다. 가슴 아릿한 슬픔이 좋았다.-포항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남편의 직장이 포항으로 결정됐다. 그때 부산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포항으로 이주했다.-포항의 ‘문화 사랑방’인 청포도 다방을 운영했다. 어떤 곳인가.△1950년대 사진작가 박영달 씨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던 곳이다. 이후 10년간 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며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장소였다. 포항시가 문화도시 사업을 진행하며 예술인들을 모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고민을 했고, 그 결과 청포도 다방이 2018년 리뉴얼되면서 꿈틀로에 터를 잡게 된 것으로 안다.-청포도 다방 운영을 한 기간과 운영을 결심한 이유는.△2019년 3월부터 2021년 3월까지였다. 2018년 포은중앙도서관 상주작가로 있었다. 계약기간이 2019년 5월 종료되면서 거처를 고민하던 차에 청포도 다방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운영을 결정했다. 지역 작가들의 새 책을 소개하며 북 콘서트를 여는 ‘언니네 책다방’, 지역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청포도 미술관’, 인근 주민들이 참여하는 ‘수다와 담론 사이-미담소담’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었기에 걱정 속에서도 마음을 굳혔다.-청포도 다방에서 진행한 문화행사 중 기억에 남는 것은.△매달 셋째 주 목요일 진행했던 언니네 책다방이다. 2019년 5월부터 2021년 3월까지 모두 15회 행사를 열었다. 김일광, 김동헌, 서숙희, 고영민, 김만수, 허용호 등 시인과 소설가, 수필가, 아동문학가 등 다양한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들의 작품을 시민들과 함께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청포도 다방 운영이 끝난 후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언니네 책다방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문화기획사 ‘스토리 랩 숨비’에서 언니네 책다방을 이어갈 수 있게끔 후원을 해줬다. 그 덕분에 행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4월에 차영호 시인에 이어 5월에는 김일광 작가의 청소년 소설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을 놓고 지역민들과의 만남을 이어간다.-청포도 다방의 ‘문화기획자’로 생활한 기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이전의 최미경을 돌아보면 출간했던 책 말고는 문화예술과 딱히 연결된 선이 없었다. 하지만 청포도 다방을 운영하며 문화소통 창구의 역할을 하게 된 후엔 내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아졌다. 그 수식어들이 불분명했던 내 예술적 가치관을 뚜렷하게 만들어줬다. 청포도 다방은 내가 인간적·문화적 성장을 꿈꿀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현재는 뭘 하며 지내고 있는지.△지난 3월 청포도 다방 운영이 마무리 될 무렵 꿈틀로 입주작가로 선정됐다. 새로 시작한 작업실 명칭은 ‘예술인보호구역’이다. 조금 거창하지만 ‘찾아온 예술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보호하자’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예술인보호구역은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청포도 다방에 있으면서 많은 예술가를 만났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예술인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예술활동 증명이 특히 그랬다. 지난 몇 해 동안 20여 명 예술인들의 예술활동 증명을 도왔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예술인창작지원금도 소개해 줬다.한국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지역 문화재단 등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공모가 시작되면 이를 분야별로 매칭해 연결해주고 그와 관련해 조언을 한다. 더불어 지역 작가들과 함께 예술사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올해 당신이 기획하는 문화·예술·교육 사업은.△크게 2가지다. 첫째는 경북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남성 은퇴자들을 위한 ‘우아한 0교시’다. 오는 6월부터 포항의 남성 은퇴자들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게 된다, 두 번째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주관하는 ‘물·흙·나무 그림책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예술인 5명과 함께 9월부터 명도학교로 들어가게 됐다. 이런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은 예술가와 일반인들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도 예술인들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획을 계속해서 진행할 예정이다.-그 외에는 어떤 작업들을 해나갈 것인지.△포항의 근현대사를 인물을 통해 재조명하는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이를 위해 경북 여성계에 큰 영향을 끼친 김경희 여사를 인터뷰 해 그분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포항문화재단 상주공연 단체로 선정된 벨라미치문화예술연구소 정하해 대표와의 인연으로 칸타타 시나리오 작업도 맡게 됐다. 도시재생 마을공동체 역량강화사업인 ‘철이 끓는 시간’과 관련해서는 포항의 주물공장과 동빈내항 철공소, 그리고 남빈동의 철물점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향후 진행될 프로젝트는.△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포항 화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루트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는 예술인들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구체적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나온 기획이다.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좀 더 쉽게 만나고 구입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드는 건 문화성숙도를 높이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또 하나가 있는데, 포항의 역사적 공간을 창조적 시선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그 프로젝트가 구체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1년 후에도, 아니 10년 후에도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술의 가치와 효용성을 알리는 조그만 역할을 하고 싶다. 그게 내 길인 것 같다.-도움을 주고받는 예술가들에게 한마디.△‘내가 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 때마다 위로해주고, 자극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때문에 포항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나도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인간이 되고자 오늘도 예술과 사회를 연결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 중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5-19

흥가락에 시름 풀어 놓으니 우울과 열등감은 저만치에…

여기 포항 흥해읍 너른 들판에서 신명나게 노래하며 춤추는 사람이 있다.10대 때부터 30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우울증과 열등의식의 어두운 터널을 걸었던 그녀는 국악을 만나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포항흥해농요보존회 박현미(57) 회장은 국악을 배우는 궁극적 목적이 뭐냐는 물음에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녀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다.흥해읍은 옛날부터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모내기와 벼 베기 등 농사일의 힘겨움과 시름을 ‘노래 한 가락’으로 위로하던 우리 선조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는 흥해농요의 전승 기반을 무너뜨렸다.그것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박현미 회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몇 해 전 포항 지진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노래로 치료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만든 게 포항흥해농요보존회.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단체가 만들어지는데 도움을 줬다.지난주 본사 편집국에서 박현미 회장을 만나 흥해농요의 매력, 국악과 함께 해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향은 어디인지.△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났다. 결혼도 옆 동네 사는 첫사랑과 했다. 시댁과 친정이 겨우 3분 거리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창녕에서 졸업했다. 대학은 대구에서 다녔고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임용고시를 거쳐 병설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했다. 7급 공무원 생활을 10년쯤 한 것이다.-소녀 시절부터 춤과 노래에 관심이 있었나.△아버지가 교사였다. 아버지가 재직한 학교에 다녔으니 조금은 특별한 대우도 받았다. 예능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땐 창녕군에서 열린 무용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간 적도 있다. 운동회나 소풍 때면 응원단장 역할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중학교 후반부턴 우울한 아이로 변했다. 존재감도 없었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외출도 잘 하지 않을 정도였다. 우울증과 열등감은 오래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지속됐으니까. 국악을 배우면서부터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포항과 처음 인연을 맺은 시기는.△30대 초반 시절이다. 남편이 경남 창원에서 일하다가 포항공대 직원으로 오게 됐다. 그때 유치원 교사를 그만뒀다. 안정적인 공무원이었지만, 내 삶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식구 많은 집의 맏며느리로 고생하며 살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봤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열등의식과 우울증은 그때까지 나를 따라다녔다.-국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뭔가.△국악을 접한 것은 30년쯤 됐다. 흥해복지센터에서 민요 강사도 오래 했다. 포항으로 이주하면서 영남대 국악과에 들어갔다. 우울한 일상에서 탈출한 것도 그 시기다. 열등감과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국악의 많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배우고 익혔다. 민요도 부르고, 북과 장구도 치고, 판소리도 공부했다.포항에 와서 처음 장구를 쳤을 때를 잊지 못한다. 마음속에 어둡게 웅크리고 있던 묵은 찌꺼기가 내려갔고, 스트레스가 단숨에 풀렸다. ‘이게 내 길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즈음 포스코 문화센터 민요 강사도 시작했다. 40대 늦은 나이에 대학에서 어렵게 국악 석사 과정을 마친 것도 내 안의 우울을 온전히 떨쳐내기 위해서였다.-흥해농요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지.△2017년 포항에 큰 지진이 났다.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소리를 통해 지진이 사람들에게 준 고통에서 벗어나보자’는 것이었다. 2018년에 흥해읍을 찾아가 읍장을 만났다. 그때 내게는 홍해농요를 연구하고 채록한 박창원(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선생과 권태룡(한국아이국악협회장) 선생이 모아 엮은 자료가 있었다. 그것들이 흥해농요의 대중화와 흥해농요보존회를 창립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농요의 수집과 기록 과정은 어떤 방식인가.△일단 농요를 부르는 분이 살아있는 게 가장 좋다. 그들을 만나 노래를 듣고 그걸 문자로 기록하고 녹음으로 남긴다. 앞서 언급한 박창원 소장과 권태룡 회장이 해온 게 그런 일이다. 그것이 흥해농요의 실체 보존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노래를 배우고 있는 김선이 어르신은 흥해농요를 젊을 때부터 불러온 분이다. 그분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하다. 흥해 허수아비 축제에서 많은 이들이 농요를 함께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흥해농요가 가진 매력은.△우리 지역, 즉 포항의 소리라는 것이다. 서울과 경기 지방의 노래, 호남의 노래는 그것들만의 특징이 있다. 흥해농요도 마찬가지다. 이곳 사투리로 이곳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흥해농요다. 그런 특성이 있기에 부르면 입에 착착 감긴다.(웃음)-흥해농요를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데.△맞다. 지금도 나는 배우는 학생인 동시에 선생이기도 하다. 흥해엔 흥해농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다. 앞으로도 이들에 의해 흥해농요는 그 맥을 이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 국악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흥해농요가 무형문화재가 되면 좋을 것’이라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30년 이상 소리꾼으로 살아오며 다른 지역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 흥해농요라는 ‘나의 노래’가 생겼기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낀다.-흥해농요 관련 공연도 많이 열었을 듯하다.△보존회가 생기고 3년 동안 공연을 자주 했다. 경창대회, 현장 재현행사 등 소규모 공연은 말할 것도 없고, 큰 도로를 막고 100여 명이 함께 농요를 부르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즐겨 보는 공중파방송 프로그램에도 흥해농요가 소개됐다. 부르면 스스로 신명이 나는 게 농요다. 누군가가 ‘10년 세월이 걸릴 홍해농요 홍보를 3년 안에 해냈다’고 칭찬했다. 모두가 농요를 아껴준 여러분들 덕택이다. 그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잊을 수 없는 기억은.△흥해농요를 듣고 있던 한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젊은 당신이 내가 어릴 때 듣고 부르던 농요를 어떻게 아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할머니는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농요는 농사일을 하는 곳에서 불러야 제맛이 나는 노래다. 그걸 재현하기 위해 흥해에 조그만 논도 샀다. 그곳이 ‘흥해농요 체험장’ 역할을 하고 있다.-당신에게 흥해농요는 어떤 의미인가.△포항에 와서 국악인이 됐다. 포항의 소리와 문화예술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흥해농요는 경기민요, 남도소리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우리나라 동부민요다. 50대 중반에 발견한 보석이 바로 흥해농요 아닐까. 이전에 내가 불렀던 노래들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앞으로의 계획은.△30년간 사람들에게 국악을 가르쳤다. 악기도 개인적으로 구입해 모두가 연주해볼 수 있도록 했다. 국악대중화에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흥해농요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면 좋겠고, 그것을 넘어 국가 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관심 가진 분들과 여러 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국악을 만나기 전에는 내 자신이 싫었다. 우울증과 열등의식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준 게 바로 국악이고 흥해농요다.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포기한 게 이제는 후회되지 않는다. 국악과 흥해농요가 내게 구세주가 돼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소리를 들으며 환하게 웃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결국 국악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5-05

관심·관찰·관계… 피사체의 온도를 설정하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의 기록으로 남기는 게 사진 아닐까? 고교 시절 빠져든 사진의 매력을 잊지 못해 회갑을 맞은 올해까지 사진과 함께 울고 웃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사진작가 김훈 씨.그는 사진을 ‘또 하나의 언어’라고 말한다. 소설가가 소설이란 언어로, 화가가 그림이란 언어로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면 사진가는 사진이란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이라고 김훈은 믿고 있다.오는 30일 예천군청 갤러리에서 열릴 기획초대전 ‘관찰자의 독백’을 앞두고 있는 김훈을 지난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날 그는 ‘사진’과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고향은 어디이고, 사진을 공부한 과정은.△1961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포항MBC에서 일하는 누나가 있던 포항으로 왔다. 고교 때 사진을 시작하긴 했다. 본격적으로 사진 공부를 한 것은 30대가 넘어서다. 경주와 대구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사진에 대한 얕은 인식을 공부하는 과정 중에 극복할 수 있었다. 진지하게 사진을 고민하는 내게 조언과 도움을 준 선생님들이 적지 않았다. 20대엔 사진과 무관한 회사에 다녔고, 신문사에서 광고 일도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사진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사진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고등학교 입학한 후 특별활동 부서로 방송반을 택했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학생들이 겪게 되는 학교 행사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걸 내가 맡았다. 흑백사진으로 우리들의 고교 시절을 찍었다. 물리와 화학을 담당하던 방송반 지도교사에게 현상과 인화를 배웠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그간 사진 작업을 하며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2005년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국제사진살롱에 작품을 냈다. 23개 나라 사진작가들이 참가했는데, 내 작품이 흑백 부문에서 골드 메달을 받았다. 포항 오천의 돼지우리에 갇힌 개 3마리를 찍어 포항 월포의 빨랫줄에 걸린 물고기 몇 마리를 포착한 사진과 합성했다. 그걸 만들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여러 구도로 나열해보고, 배치해보고 그랬다. 어느 순간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잊지 못할 작품이고, 스스로도 좋아하는 사진이다.-자신이 보기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은.△풍경과 인물 사진을 두루 찍어왔다. 작업을 하다보면 일종의 흐름이 있고 어느 순간 마음과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 포항에 35년쯤 살다보니까 애정이 없을 수 없다. 포항 풍경에 대한 기록이자, 산업사회의 변천을 담은 ‘풍경주식회사’의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다. 평론가들도 ‘풍경’과 ‘주식회사’라는 이질적인 단어가 결합된 사진들을 무척 흥미로워했다.-사진이란 대체 뭔가.△‘또 하나의 언어’가 아닐까. 글과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듯 사진도 인간의 내부 심리를 표현하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강하면서도 약하고, 약하면서도 강하다. 다른 언어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게 사진이다. 사진가들은 그 언어로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좋은 사진을 찍는 방법을 조언한다면.△‘3관’이 중요하다. 제대로 된 사진을 찍기 위해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어지는 ‘관찰’ 역시 중요하다. 사진이 완성되면 그것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게 3관이다. 유형이건 무형이건 피사체의 온도를 설정하는 건 사진가의 몫이다. 사진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단순한 일상의 기록에서도 사진은 시작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다면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최고의 사진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1924~2019)를 좋아한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다. 원래는 패션 사진 등을 찍었는데, 1950년대 구겐하임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을 주제로 2만8천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의 작품은 기존의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난 사진들이다. 사진이라는 도구로 우월성과 선진성을 자랑하던 미국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평론가들이 “악의를 가진 반미주의자”라고 혹평했고, 미국에서는 출판이 거부됐다. 하지만, 냉소적인 산업사회의 그늘과 어두움을 드러낸 그의 작품은 젊은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긍정적 재평가도 이뤄졌다. 통상적 관념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사진이란 ‘또 하나의 언어’가 아닐까. 글과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듯 사진도 인간의 내부 심리를 표현하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강하면서도 약하고, 약하면서도 강하다. 다른 언어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게 사진이다. 사진가들은 그 언어로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흑백사진엔 어떤 매력이 있나.△사진을 시작할 때 처음 접한 게 흑백이다. 한국인의 정서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은 먹으로 농담을 표현해 컬러사진 이상의 강렬함을 표현했다. 흑백사진은 은은한 맛이 있다. 또한 두고 볼수록 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지금까지의 전시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2015년 포항시설관리공단의 지원으로 개인전 ‘또 하나의 인연’을 열었다. 6년 이상 베트남을 여러 차례 오가며 그곳 사람들과 풍경을 흑백사진으로 남겼다. 베트남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를 담아낸 전시회였기에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당신이 사진의 주요한 소재로 삼는 건 뭔가.△시작할 땐 주로 자연을 작품에 담았다. 이후 사진을 전공하게 되면서 소재와 주제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을 고심했다. 내 경우 풍경으로 시작했고, 인물로 갔다가 이후엔 시대상을 사진 속에 담고자 했다. 표현 기법을 생각하면서는 문화재와 유적에 천착하기도 했다. 하나의 소재나 주제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한다. 2000년은 디지털사진의 역사가 시작된 해다. 이후 촬영 방식이 다양화되고 장르간의 경계도 무너졌다. 아날로그 시대보다 표현 방법이 다채로워졌다. 한지에 사진을 출력하는 최근 내 스타일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면 된다.-사진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후배들에 한마디.△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을 쉽게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럴 때는 책을 읽고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라. 그게 매너리즘에서 탈출하는 길이다. 사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예전의 사진 수업이 작품을 찍는 실기 위주였다면 지금은 인문학과 예술사, 디자인 공부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항상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게 좋은 사진을 얻는 비결이다.-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해보고 싶은지.△포항에서 오래 살았다. 제2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생활해온 포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 50만 인구가 모여 사는 이곳의 변화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려 한다. 이 작업이 훗날 포항이란 도시의 역사 자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어떤 인간, 어떤 사진작가로 기억되길 원하나.△곧 열리는 예천에서의 전시회가 12번째 개인전이다. 인간애를 가지고 사진을 대했던 작가로 남고 싶다. 피사체를 접하다보면 유형이건 무형이건, 생명이 있건 없건 거기에 사진가의 인식이 담기게 된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따뜻한 세상을 보여준 작가, 언제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인간으로 살려고 노력 중이다.-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코로나19 사태’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작업이 침체되고 있으며 전시회를 해도 관객들이 적다. 작품 발표의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꾸준히 작업을 이어감으로써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4-28

“천년 세월을 지켜온 경주, 국민 모두를 안아주는 마음의 고향이죠”

때로는 소탈하고 어느 순간엔 호방했다. 웃음이 선량해 보여서 더욱 좋았다. 신라문화원 진병길(57) 원장은 숨김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다.30년 가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와서일까? 표정에 그늘이나 구김이 없는 소년 같았다.스물아홉 살 청년 진병길이 불교문화운동을 향한 꿈을 품고 몸담게 된 신라문화원. 이 단체는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단순한 문화재 관람에 그치지 않고, 문화재 속에 숨어있는 가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또한, 문화 콘텐츠 개발을 통해 경주가 한국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써왔다.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문화 수혜 격차를 줄이고 모두가 균형 있게 생활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 역시 신라문화원의 지향점이다.신라문화원이 기획해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한 ‘신라 달빛기행’과 ‘추억의 경주 수학여행’은 어디에나 있는 어둠·달빛·추억이라는 무형자산을 경주만의 방법으로 창의성 담아 연출해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5년 안동문화지킴이와 더불어 ‘문화재 지킴이 운동’을 시작한 신라문화원은 ‘1단체 1문화재 가꾸기 운동’을 펼쳤고, 2010년부터는 ‘신라문화원 문화재돌봄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진병길 원장은 한국문화재돌봄협회 회장이기도 하다. 2016년 경주 지진 때는 회원들과 함께 훼손된 문화재 복구에 힘을 쏟았다.현재 신라문화원이 애정을 기울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서악마을 가꾸기 사업’이다.주변 문화재 정비는 물론, 철 따라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도 심었다. 여기에 마을 경관 개선사업과 환경 정비까지.지난 3월엔 무열왕릉 옆에 휴게공간 ‘서악25번가’도 열었다. 이처럼 새 단장을 마친 서악마을에선 주민음악회 등이 열리고 있다.그간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자체, 지역민, 시민문화단체, 경주를 아끼는 외부인 모두가 힘을 모아 ‘다시 찾는 경주 만들기’에 앞장서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신라문화원.진 원장은 “지속적인 사업으로 지역민의 일자리 만들기에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희망 또한 밝힌 바 있다.천년고도 신라의 문화재와 경주 사람들 속에서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을 하며 ‘행복한 문화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진병길 원장을 지난주 목요일 서악마을에서 만났다.아래는 그날 오간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고향은 어디이고, 유년 시절의 기억은.△1964년 경주 산내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경주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천포로 이사를 하고 나서야 전깃불도 보고, 텔레비전도 보고, 기차도 봤다. 초중고교를 경주에서 졸업했고, 대학도 경주 동국대 국사학과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었고, 불교 유적이 많은 역사도시 경주가 좋았다.-신라문화원 원장이다. 어떤 단체고, 언제 설립됐나.△1993년에 만들어졌다. 내가 주도해 만든 단체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불교학생회장을 맡았다. 졸업 이후에도 불교문화운동을 하고 싶었다. 내가 공부한 국사학과는 답사를 자주 다닌다. 거기서 만난 문화유적들이 내 감수성과 미래의 꿈을 자극한 것 같다. 불교문화운동의 핵심은 ‘설득’이라고 생각한다. 신라문화원은 경주의 문화유적을 사람들과 보다 가깝게 만들고, 문화재를 알리고 보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다보니 벌써 2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신라문화원에서 일하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은.△한국문화재돌봄협회 회장 일도 함께 하고 있다. 경주 지진이 났을 때 전국에서 많은 회원들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기꺼이 경주로 와 문화재 피해 복구와 보수에 함께 땀 흘린 시간은 누가 뭐래도 감동적이었다. 특히 많은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황리단길 가옥들의 기와 보수 작업을 한 8주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포항에서 지진이 났을 때는 신라문화원 직원들이 포항 인근에 배치돼 단 4시간 만에 문화재 피해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문화재청과 신문사와 방송사 등에 전달했다. 최소 며칠이 걸릴 일을 짧은 시간에 해낸 걸 보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그런 차원에서 문화재돌봄협회는 ‘문화재 119’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기억에 남는 작업이 또 있는지.△20여 년 전에 경주 남산 지도와 경주 문화유적 전도를 만들었다. 지리학자 송재중 씨가 조사한 것을 토대로 제작했다. 남산 등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돈이 되지 않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이라고 믿는다. 젊었던 시절이라 발로 뛰며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웃음)-한국문화재돌봄협회 회장을 3번 연임했다.△전국 23개 단체가 모인 조직이다. 2011년 복권기금을 재원으로 발족됐다. 올해로 5년째 이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엔 10주년 기념행사를 서울 여의도에서 진행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물론, 문화재 관리와 보호에 관심을 가진 국회의원 여러 명이 참석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문화재돌봄협회는 가성비가 높은 단체”라는 축사를 한 게 인상적이었다. 평상시엔 ‘예방적 관리기법’을 통해 각종 문화재를 보호하고 관리한다. 지진 같은 비상상황이 오면 앞서 말했듯 피해 조사와 복구 등 문화재 관련 119의 역할을 하게 된다. 회원은 800여 명, 관리하는 문화재는 8천600여 점이다.-오랜 시간 경주와 함께 했다. 어떤 매력이 있는 도시인가.△고대왕국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도시 전체를 박물관이라 불러도 좋은 곳이다. 문화재의 응용이 얼마든지 가능한 공간이기도 하다. 황리단길도 주변에 문화재가 있었기에 더 크게 주목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조가 물려준 문화재를 관광자원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시민들이 긍정적 마음으로 참여해준다면 발전 가능성이 큰 도시다.-경주를 찾는 여행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은.△경주 남산도 좋고, 불국사도 좋고, 감은사지도 좋다. 어느 한 곳만 말하기엔 경주의 매력이 너무 크다. 꼭 한 곳만을 추천해야 한다면 서악마을을 권해주고 싶다. 지금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선도산이 자리한 서악마을은 5개의 왕릉과 미학적 가치가 뛰어난 불상, 사액서원인 서악서원, 도봉서당 등이 있는 경주의 보물 같은 곳이다. 1시간 정도 천천히 돌아보면 제대로 된 경주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재와 유적,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힐링과 명상의 공간으로 서악마을을 변모시키고 싶다. 현재도 주민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경주는 도시 전체를 박물관이라 불러도 좋은 곳이다. 문화재의 응용이 얼마든지 가능한 공간이기도 하다. 선조가 물려준 문화재를 관광자원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시민들이 긍정적 마음으로 참여해준다면 발전 가능성이 큰 도시다.-젊은 관광객들이 경주를 찾게 할 방법은.△황리단길의 성공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민간이 먼저 나서 관광 인프라를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뜻 있는 몇몇 사람의 열정은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주춧돌이 될 수 있다. 서악마을도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찾고 싶은 공간이 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기업들의 지원과 도움이 더해진다면 젊은 관광객은 물론, 가족 단위 여행객과 어르신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경주를 찾게 될 것이다.-마지막 질문이다. 경주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우리 국민 모두가 따스하게 안길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아닐까?(웃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4-21

“내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 속 편백나무 숲이 될 수 있다면…”

‘아버지는 소금 산이다. 아버지의 삶은 소금과 같은 것이었다. 쓴맛, 신맛, 단맛을 더욱 더 돋우고 스스로는 짜디짠 존재가 되어야한다. 아버지의 일생은 아버지라는 단단한 고체에서 액체 상태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용해의 삶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이며 아버지다움이다.’재론의 여지없이 잘 조탁된 좋은 문장이다. 군더더기가 없고 따뜻하다. 누가 썼을까? 처음엔 오랜 세월 작가로 활동해온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의외였다. 위의 글귀를 쓴 사람은 문학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회사에서 33년 이상 근무하다가 최근에 정년퇴직한 차성환(60) 씨. 놀라웠다. 아마추어 수준의 문장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소박하게 출간된 수필 모음집에서 차씨의 글을 발견한 이후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이력을 찾아봤다.이미 재생백일장, 대구 매일신문 글짓기 대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 등에서 필력을 검증받은 ‘숨은 문장가’였음이 어렵지 않게 확인됐다.의문을 풀기 위해 길게 망설일 것 없이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대답 역시 그의 문장처럼 간명하고 명징했다.“그렇지 않아도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다. 인터뷰를 제의해줘서 고맙다.”차성환 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학업을 마치고 포항으로 와서 오랜 세월 한 직장에서 한 우물을 팠다. 모두가 알다시피 샐러리맨의 일상이란 얼마나 분주한가.그렇지만 바쁜 와중에도 언제나 ‘기록하는 것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문학청년의 마음으로 문장을 수련해온 차씨.중·고교 시절엔 밴드 ‘산울림’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며 가수를 꿈꾸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자녀들의 존경과 아내의 신뢰를 받는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았으며,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임무에서 해방된 지금은 “하고 싶었던 외침, 내뱉고 싶었던 소리, 그리고 삶의 여러 에피소드를 글로 써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하는 차성환 씨다.아래는 그가 자신의 삶과 글에 관해 털어놓은 숨김없는 소탈한 이야기다.-33년 넘는 세월 동안 한 직장을 다녔다. 포스코를 직장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는지.△부산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다가 작은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다. 포항은 작은 도시이지만, 포스코는 분명 글로벌 기업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포스코라는 브랜드와 함께 내 삶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재직 시 잊을 수 없는 추억은.△홍보팀장으로 있을 때 도시 재생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목적으로 시작한 ‘세탁소커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직장생활 중 내가 가진 역량 그 이상의 열정을 바친 귀하고 소중한 작품이다. 30년 넘은 세탁소를 지역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시킨 게 세탁소커피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과 내가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 언제나 가보고 싶은 공간이다.-문학과는 무관해 보이는 직장에서 글쓰기를 지속한 이유는.△기록과 남김의 습관이 있다. 기억의 한계를 알기에 무엇이든 기록해 남겨둔다. 자동차, 침대, 거실, 화장실 등 내 주변 곳곳에 조그만 수첩과 볼펜이 있다. 후배와 출장 갔을 때의 일, 아이들 키우며 겪은 기억과 추억, 아내와의 여행 등 모든 것들을 기록해 남긴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국 어느 순간 한 문장, 한 단락의 글이 된다.-직장인으로 살아온 시간은 어떤 자부심과 상처를 남겼나.△남편다움, 아버지다움을 실천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가족들 앞에서는 당당함을, 스스로에게는 자존감을 키워준 곳이 직장이다. 하지만 때론 조직의 누군가에게 잡혀 있다는 허탈감과 억울함도 있었다. 진실과 정의마저도 가족을 핑계로 외면해야 했던 마음의 상처는 지금도 흉터로 남아있다-정년퇴직 후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설렘과 두려움이다. 계획은 언제나 미래의 시간과 가상의 현실일 뿐이다. 계획은 계획이다. 스스로 계획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거창함보다는 사소함의 일상을 즐기고 있다. 동네 골목길, 가보지 못한 조그만 카페 탐방 등 규칙적이어야 했던 일상에선 할 수 없었던 ‘내 마음대로의 시간 여행’을 해보는 게 흥미롭다. 이를 통해 직장인일 땐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는 중이다.-글을 써서 많은 상을 받았다. 기억에 남는 상은.△나는 글쓰기 공부의 한 방편으로 백일장을 꼽는다. 제시된 주제어로 2~3시간 만에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는 긴장감과 설렘이 나를 매료시킨다. 2015년 재생백일장 대상과 2016년과 2017년 2년 연속으로 산문 부문 장원을 수상한 대구 매일신문 공모전 수상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다시 태어난다면 작가와 직장인 삶 중 어떤 걸 택할 것인지.△둘 모두다. 직장인은 가정의 버팀목이다. 작가는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공감과 감동, 그리고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꼭 하나만 선택하라면 작가다. 조직의 누군가를 위한 거짓과 위선의 부끄러운 대가를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내 문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편백나무 숲 같은 편안함을 줄 것 같다는 환상이 늘 나를 깨어있게 한다.-살아오며 자식들에겐 어떤 조언을 했나.△건강을 강조했다. 도시와 문명의 발달로 우리의 삶은 자연과 점점 멀어져 간다. 이런 환경에 더 많이 노출될 아이들이다. 생각도 못한 새로운 질병들이 생겨난다. 건강하지 못하면 꿈과 희망도 그저 꿈과 희망으로만 끝난다. 가능한 자연과 태초의 방식으로 건강함을 잃지 말라고 가르쳤다. 건강한 몸과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자식들이 나보다 더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 그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 아닐까.-당신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기록이고 남김이다. 사진이 시각적 기록이고 남김이라면, 글쓰기는 시청각의 기록이고 남김이다. 단어 하나만으로도 시간과 공간, 소리까지 느낄 수 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아버지가 쓰는 육아일기로 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글쓰기는 나와 누군가의 기록이며 남김이다. 기록과 남김은 추억과 회상의 도구로 기억되고 남겨질 것이다. 문학은 이러한 기록과 남김에 정갈함과 고급스러움이 더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기록과 남김이 나만의 것이라면, 문학은 나의 것이며 또한 모두의 것이다.-‘인간 차성환’이 그려갈 미래는.△가장으로서가 아닌 가정과 가족의 일원으로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조금은 얕아지고 얇아진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것들 역시 기록과 남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언제나 나이와 환경에 맞는 ‘다움’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할아버지다움, 시아버지다움, 장인다움의 삶을. 지금까지의 남편과 아버지다움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좋은 사람을 찾기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주자. 후회는 내가 지금 만들어 가고 있는 내 미래의 아픔이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지만 기록에는 게으름이 있다’. 직장생활 하던 시절 강의나 교육 중에 자주 쓴 말이다. 직장인으로 33년 8개월을 보냈다. 거기서 남겨진 기록들을 문학적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하고 싶었던 외침, 내뱉고 싶었던 소리, 그리고 여러 에피소드를 내 글을 읽는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꿈이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4-14

두번의 암과 심장질환… 절망 이겨낸 최고의 명약은 의지와 운동

담낭암, 대장암, 다섯 군데나 막힌 관상동맥…. 한 가지만으로도 쉽게 극복될 수 없는 심각한 병들이다. 6~7년 사이에 이어진 3번의 큰 수술. 경북교육포럼 이해우 대표의 중년은 생사가 걸린 ‘위기’, 그 자체였다.포항과 경주, 서울의 병원을 오가며 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를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절망 속으로 숨거나 찾아온 병에 항복하지 않았다. 투병의 와중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미국 대학의 객원교수로 가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이해우의 이력은 독특하다. 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모자란 시간을 쪼개 교육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공부했고,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경북대와 위덕대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쳤다. 지금도 그는 경주 동국대에서 정열적인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여기에 몇 년 전부터 당뇨와 척추협착증 치료를 위해 시작한 운동에도 열정을 쏟아 지난해엔 ‘장보고기 전국 조정대회’ 실내 조정 60대 이상 부문에서 우승하기도 했다.며칠 전 본사 편집국에서 만난 이 대표에게선 ‘병마의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혈색이 좋았고, 인터뷰 내내 환한 웃음을 보여줬다. 아래는 의지와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은 그가 들려준 이야기다.-32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지냈다. 교대를 선택한 이유는.△내가 어릴 땐 꿈이란 게 없었다. 형제는 많고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다. 겨우 깨끗한 운동화 신고, 쌀밥 먹는 게 꿈이었다. 죽도시장에 있는 과자공장에 취직하고 싶어 하기도 했다. 고교를 마치고 대학을 가게 됐을 때쯤 ‘요즘 아이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지’가 궁금했다. 그 아이들이 꿈을 키우고 이루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초등학교 교사는 어떤 매력이 있는 직업인가.△언제나 아이들의 순수함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른들은 어떤 형태로든 때가 묻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아이들은 동심을 가졌기에 순수할 수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더 많다. 살아가면서 삶의 중심을 잡는데도 교사 생활이 큰 도움이 됐다.-초등학생만이 아니라 대학생들도 가르쳤다. 어떤 때 보람을 느끼나.△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보람이다. 제자들이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걸 보면 힘이 난다. 동국대 간호학과 제자가 서울대병원에 취직해서 감사의 전화를 해왔을 때, 경북대 제자가 임용고시에 합격해 ‘선생님 덕택에 저도 교사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는 인사를 전했을 땐 내 일처럼 기뻤다.-교직 생활 중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면.△1980년대이니 내가 30대 시절이다. 구룡포에서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을 맡았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던 아이가 있었다. 부모님이 바빠서 신경을 써주지 못하니 많이 힘들어했다. 그 아이를 불러 ‘앞으로는 나를 아버지로 생각해라. 넌 내 아들이다’라고 격려했다. 이후 아이의 생활 태도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했던 기억이 난다. 사랑을 주면 아이는 변한다. 3년간 빠지지 않고 스승의 날이 되면 신문지에 싼 양말 한 켤레를 선물하던 아이였다. 전근을 가면서 헤어졌는데, 지금은 50대가 됐을 그 제자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교직 생활 중 암을 포함해 여러 번 심각한 병을 앓았는데.△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담낭암, 대장암 수술을 해야 했고, 관상 동맥이 막히는 질환도 앓았다. 담낭에 문제가 생긴 건 1998년쯤이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통에 시달렸다. 경주와 포항의 병원을 찾았고 수술을 했다. 수술 이후 담낭 조직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 암이라고 했다. 담낭암은 간도 함께 절제해야 했기에 서울에서 다시 한 번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가 박사 학위 논문을 쓰던 때였다. 입원하러 간 사람이 논문 관련 자료를 잔뜩 챙겨온 걸 보고 의사와 간호사가 놀라던 모습이 생생하다.-담낭암 치료 이후에도 다시 병마가 찾아왔다고 들었다.△‘목표로 세운 일을 꼭 끝내고 싶다’는 의지가 담낭암을 극복하게 해줬다. 어려움 끝에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학위 취득 직후에 쓰러졌다. 관상동맥이 다섯 군데나 막혔다는 진단이 나왔다. 다시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잘라낸 내 팔뚝의 동맥을 심장 동맥에 이식하는 대수술이었다. 그때는 미국 한 대학에 연구계획서를 보내고 객원교수로 초청을 받았던 시기다. 미국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극은 1년쯤 뒤에 또 다시 닥쳐왔다. 대장에서 암 덩어리가 발견된 것이다. 6~7년 사이에 목숨이 오가는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으니 평탄한 인생은 아니었다.-세 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큰 병에 걸리면 심리적으로 굉장히 위축된다. ‘열심히 살아온 내게 왜 이런 몹쓸 병이 찾아왔을까’란 비탄에 빠져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한 번도 아니고 연속 세 번이었으니, 나 또한 그런 심정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그걸 이겨내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내가 환자인 걸 잊고 살겠다. 내게는 병을 극복할 의지가 있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의지를 가다듬고, 희망을 지켜가겠다는 마음가짐이 건강을 회복시켜준 것이라 믿는다.-의지, 희망과 함께 건강을 찾게 해준 또 다른 비결이 있다면.△당뇨가 있고, 척추협착증으로 허리도 많이 아팠다. 그걸 치료하고자 혼자서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좀체 좋아지지 않았다. 3년 전쯤 ‘운동 치료전문가’를 만나 그가 권유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실내 조정도 그때 배웠다. 힘이 들어가지 않던 허리에 근육이 붙었고, 제법 높은 산도 오르는 게 어렵지 않아졌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으로 지난해엔 상까지 받았으니 앞으로도 운동은 계속할 생각이다. 몸이 좋아지니 정신적으로도 활력이 느껴진다.(웃음)-지금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조언을 부탁한다.△생명을 걸어야 하는 수술 과정을 겪으면 의욕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앉는다면 정말로 끝이다. 억지로라도 자신이 병에서 회복된 후 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 아프기 전보다 더 긍정적인 사고로, 더욱 힘 있게 생활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자신의 병을 잊어버릴 수 있는 큰 꿈이 생기면 인간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삶의 좌우명은.△젊을 때부터 ‘마중’이란 말을 좋아했다. 그 단어 속엔 기다림, 반가움, 더불어 가는 동행이란 뜻이 있다고 믿었다. ‘마중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다. 후배 교사들에게도 ‘마중물 교육’을 자주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꿈을 마중하고,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고, 제자들이 사회의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지금도 바란다. 그건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이기도 할 것이다.-요즘의 일상은 어떠한가.△경주 동국대에서 교육행정과 교육경영 강의도 하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다닌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나눠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다보니 나이가 일흔에 가까웠는데도 출강하는 학교에서 우수 교원으로 선정돼 상도 받았다.(웃음) 앞으로도 병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즐거운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려 한다.-향후 ‘인간 이해우’가 열어갈 미래는.△2~3년 전부터 맑은 소리에 매료돼 대금 연주를 배우고 있다. 지금은 남들 앞에 나설만한 실력이 아니지만, 더 열심히 연습해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며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찾아가 노인들 앞에서 연주를 해주고 싶다. 나도 적지 않은 나이다. 늙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할 것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작은 도움이라도 남에게 주는 사람’으로 남은 생을 살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