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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마술 향한 정열만은 쉽게 꺼지지 않았죠”

탁자가 저절로 공중을 떠다니고, 입에서 뿜어내는 불길이 어두운 거리를 환하게 밝힌다. 때론 손바닥에 올려놓은 동전이 중력을 거스르며 공중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마술공연이 펼쳐지는 현장 분위기는 언제나 흥겹다.포항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 무대와 영일대해수욕장 거리에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마술사로 살아가는 한인황(36) 씨.열서너 살 무렵 마술에 매료된 인황 씨는 삼십대 중반이 됐음에도 여전히 ‘꿈꾸는 소년’이다. 곤궁과 힘겨움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후회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인간은 꿈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늙는다고 한다. 그러니, 꿈을 버리지 않은 ‘거리의 마술사 한인황’은 아직도 새파란 청춘이다. 볕 좋은 4월의 봄날 오후.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그를 만나 마술사의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에 대해 들었다.-마술사는 특이하고 드문 직업이다. 언제부터 마술에 관심이 있었던 건가.△‘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학교 때 친하던 급우와 장난처럼 TV에서 본 마술을 따라하곤 했다. 별것 아닌데도 마술을 보여주면 친구들이 웃으며 좋아하는 게 흥미로웠다. 그게 계기가 돼 스무 살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술을 배우고 싶어졌다. 함께 마술에 관심을 가졌던 급우 역시 계속 마술사의 길을 가고 싶었던지, 군대를 마치고 다시 만났을 땐 제법 실력이 좋아져있었다. 대구의 마술학원에서 2년간 본격적으로 여러 테크닉을 보고 익혔다고 했다. 그게 부러웠다. 스물서너 살 무렵부터 친구와 함께 부산과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크루즈선에서 마술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종의 직업이 된 것이다. 유람선에 오른 관광객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게 재밌고 보람 있었다. 돌아보면 참으로 즐거운 시절이었다.-잘 몰랐던 사실인데, 마술을 배우는 학교나 학원이 있는 모양이다.△그렇다. 내 경우도 20대 중반에 마술을 가르치는 학과가 있는 동부산대학교에서 짧게 공부했다. 아쉽게도 졸업은 하지 못했다. 취미나 여가 활동으로 마술을 배우는 사람도 적지 않고, 마술 기법 등을 알려주는 학원도 있다. 하지만 내 경우는 크고 작은 공연을 통해 마술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학교나 학원보다는 현장에서, 거리에서 배운 게 더 많았다.-TV나 인터넷 동영상 등에서 많은 마술사들을 만나게 된다. 당신이 좋아하거나 영향 받은 마술사는 누구인가.△내 경우엔 거대한 빌딩이나 건축물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게 만드는 큰 스케일의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보다는 비둘기와 촛불을 소재로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마술을 보여주는 랜스 버튼의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 아마도 내 취향과 성정에 맞아서 그런 것 같다.-마술사로 활동한 곳이 다양할 것 같은데.△앞서 말했듯 처음 시작한 곳은 한국과 일본을 왕복하던 크루즈선이었다. 그걸 그만둔 후에는 경북 구미에서 친구와 마술학원을 운영했다. 그게 20대 중반 무렵이다. 마술학원에선 사회성이 좋지 못하고, 남들 앞에 서면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적극성을 길러주려 노력했다. 사실 마술을 배우면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즐거워진다.‘마술학원에서 뭘 배울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던 부모들도 막상 자신의 자녀가 표정이 밝아지고, 자신감을 얻으면 기뻐하며 나를 격려해줬다. 그런 게 마술학원이 가진 힘이다. 충북 청주에서 잠시 생활하며 카페에서 마술쇼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그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방과 후 마술수업도 준비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마술사의 길을 계속 걸으려면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텐데.△물론 쉽지 않았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생활인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나를 어머니와 친척들이 많이 걱정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땐 외숙부가 자신의 사업체로 나를 불러 2년가량 일을 시키기도 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마술에 가있으니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매형의 소개로 포항의 한 회사에서 몇 년간 사무직원으로도 일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마음속 정열을 누르지 못해 방황했다. 회사원이 아닌 마술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결국은 30대 초반에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거리에서 마술공연을 시작했다. 모두가 그렇지만 나 역시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거리 마술공연가’의 삶은 어떤 것인가.△지금까지 10년 이상 마술을 해왔다. 그런데, 마술사에게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과 크리스마스가 낀 12월이 성수기라면 나머지는 비수기라고 볼 수 있다. 마술사에겐 비수기가 너무 길다.(웃음) 그래서 고민 끝에 나온 대책이 무대 공연과는 또 다른 거리 마술공연이었다.거리에서의 공연이 시작된 건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야외무대다. 지금은 거기서 공연을 하려면 허가를 얻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4년 전에는 누구나 ‘거리의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대구에서 온 어떤 ‘거리 예술가’가 풍선쇼와 불쇼로 관객을 유혹하는 걸 본 후에 ‘나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커졌다.-거리 공연만의 매력이 있을 것 같다. 또한 어려움도 있을 텐데.△특정 공간에서 내 마술을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자유롭게 연습하고, 스스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관객들과 만나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해줄 수 있다는 게 좋다. 처음 거리에 섰을 땐 부끄럽고 어색했다. 관객이 10명 이하인 경우도 흔했다. 마술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이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는 ‘자발적 관람료’도 처음엔 3천 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게 나중엔 20만~30만 원으로 늘어났으니 나름의 노력은 다했다고 자부한다.힘든 점은 혼자서 모든 걸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리에 서서 마술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를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 거리 공연의 노하우를 익히기 위해 ‘거리 공연의 메카’로 불리는 부산의 해운대해수욕장을 아마 50번 이상은 방문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마술사로 살면서 느끼는 즐거움은.△잠깐이지만 사람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준다는 게 보람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또한 답답했던 내 가슴도 시원스럽게 트였다. 물론 돈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만족감을 돈과 바꿀 수 있을까?-반대로 마술사로 살며 서글펐던 순간은.△다른 사람들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내게도 있다. 앞으로 얼마 동안 마술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떠올려보면 막막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에게나 어려움과 고난은 있다. 나는 아직도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라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잊을 수 없는 관객이 있는지.△거리 마술공연이 끝난 후 5만 원을 ‘자발적 관람료’로 준 주부가 있었다. 아이들이 날 자기네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할 만큼 마술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아들과 딸이 공연을 보며 느낀 행복감을 내게 돌려준 게 아닐까? 어떤 할머니가 마술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것도 기억난다. 왜 울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도 궁금하다. 아마도 아주 오래 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막극장에서 마술공연을 보던 어린 날이 떠올라서가 아닐까라고 짐작할 뿐이다.-당신에게 마술이란.△포기할 수 없는 꿈이고, 내 삶의 전부다. 다른 곳에서 무엇을 해도 공연무대가 떠올랐고, 회사원으로 살 때도 애타게 그리워했던 게 바로 마술사의 삶이었다.-‘코로나19’로 인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어떤 심정인지.△많은 ‘거리 공연가’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니 어떤 공연도 열릴 수가 없다. 하지만 비극에도 끝은 있는 법이니 다시 관객들과 만날 날을 준비 중이다. 그땐 깜짝 놀랄만한 마술로 바이러스에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로해줘야 하지 않겠나.-마술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진심으로 마술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부지런히 연습해서 ‘부산 국제 매직 페스티벌’과 ‘피즘(FISM·마술사들의 올림픽)’ 등 마술대회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잠깐이지만 사람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준다는 게 보람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또한 답답했던 내 가슴도 시원스럽게 트였다. 물론 돈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만족감을 돈과 바꿀 수 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08

“영덕은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현실 바깥에서 나는 고향과 매일 만난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는 “성인은 세상 어떤 곳도 고향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현재 서있는 곳이 태어난 곳만큼이나 귀한 자리이니, 거기서 세상과 인간을 위한 양심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뜻일 터.하지만 모두가 빅토르 위고처럼 살 수는 없는 일. 보통의 인간들에게 고향이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공간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성훈(50)의 고향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르른 바다와 산’을 품에 안은 영덕.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40년을 살고 있지만, 권성훈에게 영덕 병곡면은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애틋한 마을이다. 언젠가는 돌아가 자신의 마지막 문학적 정열을 쏟아붓고 싶은.고향 떠나 도착한 낯선 도시에서 처음 본 연탄을 신기해하던 열 살 아이가 타향에서도 그늘 없이 자라 대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영덕 사람’ 권성훈 이야기다. 그를 만나 ‘몸의 고향’ 영덕과 ‘마음의 고향’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계획과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더불어 들을 수 있었다.-현재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있다. 교양학부에선 문학을, 국문학과와 문예창작 전공 학생들에겐 현대 시론과 시평론을 강의한다. 지난해 우리 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한류문화대학원이 생겼는데, 거기선 시조 창작과 현대 시조론을 강의 중이다.-‘코로나19 사태’로 개강이 늦어지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동영상 강의로 인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어려움이 적지 않다는데.△대면 수업이 아닌 비대면 수업을 동영상 강의로 3주째 진행하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달리 말하면 ‘인간학’이다. 기본적으로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문학을 매개로 인간의 삶을 서로 교환해야 하는데,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강의 동영상을 교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면서 방송통신대와 사이버대학 교수님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 빨리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할 날만을 고대하고 있다.-최근에 낸 책은 뭔지. 그리고, 상을 받기 위해 문학을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문학 관련 수상 이력도 궁금하다.△지난해 세 번째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를 냈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창작기금으로 출간됐다. 운 좋게도 세종우수도서로 선정됐고, 2020년 ‘작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집’으로도 선택됐다. 감사한 일이다. 그간 펴낸 책은 연구서와 시론, 평론집 등을 합해 10권쯤 된다. 젊은 작가상, 한국예술작가상, 열린시학상, 인산시조평론상 등을 받았던 것도 행복한 기억이다.-현재 쓰고 있는 책은.△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문학치료’였다. 문학치료 이론에 적용되는 정신분석을 테마로 한국 현대시인 중 이상, 김수영, 박남철 등을 분석하고 있다. 그들 시 세계를 무의식의 소산으로 보고 정신분석화 하는 작업 중이다.-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얼마나 산 것이고, 잊을 수 없는 그곳에서의 추억은.△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열 살이 되던 해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했다. 산과 바다, 꽃과 비를 좋아하는데 그것들이 내가 어렸을 때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초등학교 1학년 봄날의 기억인데, 갑자기 천둥이 치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산에 묶어둔 소를 찾아 같이 내려오는데, 천둥소리에 무서워하는 나를 안타깝게 돌아보던 늙은 소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마치 엄마의 눈빛 같았다.-중고교 시절엔 ‘문학소년’이었나. 영향 받은 작가와 작품이 있는가.△중학교 다닐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집이 가난해 서점에서 책을 사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던 기억이 난다. 토요일 방과 후 책을 대출해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 닥치는 대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딱히 영향을 받은 작가는 없지만, 있다면 불특정 다수의 책 모두가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자 친구였다.-수원에 정착할 무렵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파편 같은 게 있는지.△형제들과 트럭 짐칸에 타고 부모님을 따라 수원으로 왔다. 저녁에 어머님이 연탄을 피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장작을 때며 살다가 검정색 연탄이 하얗게 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돌아보면 웃음 나오는 추억이다.-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한다는데,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나이를 좀 더 먹으면 영덕에 내려가 고향을 배경으로 한 연작시를 쓰고 싶다. 영덕은 내 작품에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이 느껴진다. 상상의 두레로 언어의 물을 퍼 올리며, 현실 바깥에서지만 나는 고향과 매일 만나고 있다.-시와 시조, 평론까지 문학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인간에게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혹은, 변함이 없다는 뜻이 담긴 것 같다. 작품을 쓰면서는 항상 어떠한 형식과 구성이 더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창작뿐만 아니라 연구에도 몰두하는 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통해 창작의 질을 높이고, 창작을 통해 연구의 장을 열어갈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 바람은 시조의 활성화를 위해 연구와 평론을 좀 더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다.-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나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의미 없듯, 나 혼자 존재하는 세계 역시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은 같이 존재하고 함께 있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나를 있게 한 중요한 삶의 동력이다. ‘나의 길’을 가는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고향 영덕을 소재로 작품을 쓴 적이 있는지.△어릴 때 고향 바다를 두고 슬퍼하며 수원으로 이사했던 내 모습을 형상화한 게 있다. 아래 소개하는 ‘폐차’라는 시다.다음 생애 좋은 곳에서 태어나라십 년 살다 바다에 묻은 그 애도 그랬다울음소리 수리도 않은 채 도로를 넘나들며녹슨 바람에 이는 사월 파도를 태우는밤은 밤을 열면서 떠돌아다녔다.-인간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고향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곳이 아닐까 싶다.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향 또한 시간을 돌릴 수 없으니, 예전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추상적 질문이다. 실용적 학문이 아닌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예술의 효용성은 필요와 불필요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다. 느끼는 사람의 것이며, 감동을 받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용하다고 느껴질 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실용적 학문이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할 때 ‘예술적인 어떤 것’이 우리 곁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대구·경북에 어떤 위로를 전하고 싶은지.△“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간은 함께 살아남은 자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고향을 지켜온 힘이 재건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 과정에선 분리되거나 분열된 나와 너가 없고, 우리만 있을 뿐이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열 살 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한 번도 영덕의 푸른 산과 맑은 바다를 잊은 적이 없다. 신문과 방송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신음하는 대구·경북’이 거론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무쪼록 지혜와 힘을 모아 경북인의 위대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대구·경북에게…“‘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간은 함께 살아남은 자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고향을 지켜온 힘이 재건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 과정에선 분리되거나 분열된 나와 너가 없고, 우리만 있을 뿐이다.”

2020-04-01

“사람의 情 나누는 기쁨 함께 합니다”

자영업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다. 비단 대구·경북만이 아니라 전국이 마찬가지다. 당장 우리 주위만 둘러봐도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짧으면 5~6개월, 길다고 해도 1~2년 사이에 간판을 바꾸는 소규모 식당과 카페가 부지기수다.상황이 이러하니 포항 죽도시장 골목길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카페 ‘죽도소년’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1층과 2층을 합쳐 20명을 수용하기 힘든 작은 찻집이지만, 각종 SNS에서 확인 가능한 죽도소년의 인기는 어떤 ‘핫 플레이스’보다 뜨겁다.주말이면 고풍스런 한복집 등 최소 20~30년 이상 된 노포(老鋪) 사이에 돌올하게 들어선 젊은 감각의 카페로 경북과 부산은 물론, 멀리 강원도와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온다. 이 정도면 자영업으로 이룬 ‘작은 성공’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최근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손님이 많이 줄었지만, 바이러스의 난동은 언젠가는 끝이 날 터. 죽도소년을 운영하는 김희준(45)씨는 “상황을 마냥 비극적으로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얼핏 봐도 1천 권은 넘어 보이는 책과 수백 장의 음반으로 채워진 ‘카페 죽도소년’을 찾아 김희준 씨를 만났다.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완연한 봄의 향기 속에서 카페 운영의 노하우와 어머니뻘의 전통시장 상인들과 불화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 카페를 차리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묻고 그에 관한 답을 들었다.◇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찾으려 노력해야30대 시절 김희준 씨는 학원 운영자였다. 포항 북구에서 시작한 학원은 경영 성과도 좋았다. 김씨가 대표인 2개 학원의 수강생이 400명 넘던 시절도 있었다.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매너리즘에 빠졌고, 그때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사실 학원을 할 때도 틈틈이 인테리어 관련 일을 했고, 커피 공부도 틈틈이 시작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런 고민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이 포항 중앙상가 골목의 폐가를 수리해 만든 ‘카페 1944’였다. 대학에서 전공한 경영학과 마케팅이 카페 운영 초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예술과 문화에 포커스를 맞춘 ‘스토리 마케팅 기법’이 카페가 쉽게 자리를 잡게 했다.입구 시멘트 바닥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과 고양이 가면을 쓰고 커피와 주스를 가져다주는 카페의 주인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을 탔다.지저분했던 주변 벽에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김씨는 ‘친절하고 재밌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셀 수 없이 많은 카페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성 가진 아이템이 필수다. 이전 카페가 고양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해졌다면, 옮겨온 이곳 죽도소년에선 화려한 색감의 두건을 쓰고, 멜빵 달린 옷을 입은 나 스스로를 가게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결국은 아이디어 싸움인 것이다.”마케팅과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자영업자에게 더 중요한 건 성실함이다. 김씨는 자신이 일하는 주위 공간을 따스하고 정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고, 먼저 나서 빗자루를 들었다. 여기에 ‘골목길 미술전’과 ‘작은 콘서트’ 등 문화행사까지 열었다.중앙상가에서 죽도시장으로 카페를 옮겨오면서도 이런 태도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한복가게를 리모델링해 죽도소년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주위 사람들이 김씨의 부지런하고 정직한 성정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죽도시장 어르신들과 잘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죽도소년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 수십 년 이상 그곳에 터를 잡고 장사를 해온 어르신들이다.청춘의 대부분을 가게에 바친 그들은 죽도시장을 제 몸처럼 여긴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일으키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젊은 김희준 씨가 나이 지긋한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무엇보다 가장 열심히 하는 건 인사다. 내 가게 앞만이 아니라 주변 청소도 하고 있다. 근처 상인들이 커피를 주문하면 반값에 배달까지 해준다. 3년가량 이렇게 지내다보니 친해진 분들이 적지 않다. 카페를 찾는 관광객을 어르신이 안내해 올 때도 있다.(웃음)”사실 죽도소년 근처엔 ‘젊은 상인’이 별로 없다. 부모의 가게를 이어받아 하는 사람들이 소수 있을 뿐이다.김씨는 청년 자영업자가 전통시장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없는 이유를 오래된 시장 특유의 보수성과 폐쇄성이 아닌, 중장년층 위주로 구성된 상권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 생선·채소가게 등은 일의 특성상 해가 뜨기 전 새벽부터 가게로 나와야 하는 게 청년들 입장에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사람들이 찾아오는 카페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재론의 여지없이 카페 운영은 장사다. 그렇기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익 창출은 기본 중 기본이다. 사업의 특성상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않으면 언제라도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는 게 카페 운영이다.진입장벽이 비교적 낮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카페를 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아 오래 운영되는 카페는 드문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김희준 씨는 ‘예비 카페 창업자들’에게 이런 조언을 들려줬다.“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나면 금방 주위에 비슷한 유형의 카페가 우후죽순 생기는 걸 여러 번 봤다. 파이의 크기는 한정돼 있는데 나눠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겠는가? 철저한 사전 준비와 조사, 획기적인 아이디어, 여기에 열정을 바치겠다는 각오 없이 카페 문을 연다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창업 과정보다 더 어려운 건 카페의 지속적 운영이다. 죽도소년의 경우엔 ‘단골’이 카페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정을 주고받은 단골들은 김씨와 가족 이상의 유대관계를 형성했다.20대 젊은 손님들에게 ‘키다리 아저씨’이자 인생의 선배 역할을 하고 있는 김희준 씨는 “우리 카페는 단골들이 만들어가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죽도소년에선 아기자기한 소품과 그림을 다수 만날 수 있는데, 그것들 대부분은 단골이 선물하거나 그려준 것들이라고.2년 전엔 김씨의 카페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단골손님들의 ‘스몰 웨딩’이 죽도소년에서 진행됐다.전통시장의 작은 가게에서 결혼식이 열린 건 아마 시장이 생기고 처음이었을 것이다. 손님에게서 카페 운영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는 게 죽도소년 주인의 마음가짐이라면, 자신들이 아끼는 공간에서 사람간의 정을 나누는 건 죽도소년 단골 모두의 기쁨이 되고 있다.◇활력과 웃음 넘치는 전통시장을 위해짧지 않은 기간 지속된 불황에 ‘바이러스 창궐’이라는 악재까지 겹친 전통시장의 한숨이 갈수록 깊어지는 요즘이다. 죽도시장도 다를 수 없다.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지만, 아직은 제대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게 상인들의 하소연.김희준 씨를 포함한 젊은 자영업자들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통시장을 활성화시킬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낮과는 전혀 다른 밤 시간대 전통시장의 매력을 관광객에게 소개하는 ‘죽도시장 야간 투어 프로그램’과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시작해 포항운하와 죽도시장을 걸으며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걷기 코스의 개발’ 등은 김씨가 고민해온 전통시장 살리기 방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이 아이디어의 현실화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희망의 출구’를 찾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어르신과 청년 상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활로를 찾으려 동분서주하는 죽도시장. 그 미래가 환하게 밝은 봄의 꽃길 같기를 기대한다.셀 수 없이 많은 카페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성 가진 아이템이 필수다. 이전 카페가 고양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해졌다면, 옮겨온 이곳 죽도소년에선 화려한 색감의 두건을 쓰고, 멜빵 달린 옷을 입은 나 스스로를 가게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결국은 아이디어 싸움인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25

“문학은 스스로 개척하는 자기만의 영토 ”

예술가가 세상에 개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희망과 꿈을 설파함으로써 고통과 좌절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것.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이 그랬다. 그렇다면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뭘까? 있는 그대로의 세상, 즉 불평등하고 불합리하며 때로는 처참하기까지 한 현실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 그 방식을 통해 인간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위의 전제를 놓고 보자면 소설가 백가흠(46)은 후자에 포함되는 사람이 분명하다.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를 시작으로 ‘힌트는 도련님’ ‘사십사(四十四)’ ‘나프탈렌’ ‘향’ 등의 작품을 써온 백가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습한 터널 같은 세상사와 인간사를 서술 혹은, 묘사해왔다. 축소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담담한 문장으로.“현대인의 극단적 정신세계와 병적 불화를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3년 전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대구에 왔다. 고향도 아니고, 오래 생활한 서울도 아닌 ‘아직은 낯선 도시’에서 삶과 문학의 뿌리를 새롭게 내리고 있는 것.향후 백가흠의 소설이 걸어갈 길과 대구에서의 생활이 궁금했다.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무차별적인 공습을 받은 대구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탓에 인터뷰는 몇 차례의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됐다. 대면 인터뷰는 ‘코로나19’가 물러가는 날 술잔을 앞에 놓고 하자는 약속을 하면서.-2001년 데뷔했으니 올해로 등단 20년차다.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소설에 관심이 있던 때와 쓰기 시작한 때는 달랐다. 소설이 가장 재미있었던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물론 공부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집에 책이 꽤 많았는데, 사춘기 시절 야한 호기심이 발동해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떤 밤에는 소설가 오정희도 걸리고, 황석영도 읽게 되는 밤이 생겨났다. ‘이게 뭐지?’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스스로 재밌고 즐겁게 읽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것을 막연히 깨달았다. 어찌어찌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는데, 뭘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대학 다닐 때는 주로 시를 썼다.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고, 복학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데뷔했다. 그래서 습작기는 데뷔하고부터라는 게 맞을 것 같다. 물론, 여느 젊은 작가들처럼 힘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재밌고 지치지 않았는데, 너무 가난했다. 그걸 견디는 것과 자존심 때문에 좀 많이 힘들었다.-좋아했거나 영향 받았던 작가는 누구인가.△몇 년에 한 번은 꼭 다시 읽는 작가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좋아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의 작품도 즐겨 읽었다. 그들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 이전에 느꼈던 감정이 잘 떠오르지 않고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게 매력이지 싶다. 한국에선 1970년대 작가들을 거론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윤흥길의 초기 소설이 압권이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대구로 온 시기는 언제인지. 또 오게 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햇수로 3년째가 지나고 있다. 특별한 동기는 없고 대구가 그냥 좋았다. 심리적으로 워낙 멀게 느껴져 외국 같은 느낌(?)이 들었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가장 매력적이었다.-재직 중인 계명대 문예창작과와 경험한 대구의 분위기는.△한마디로 말하면 감동적이다. ‘사람들이 친절하고 따뜻하며 예의바르고 얌전하다’라는 게 내가 받은 첫인상이고 그 감정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타인에게 피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얌전한 문예창작과 학생들은 처음 본다. 수업 시간에도 서로에게 말이 조심스럽고 예의바르다. 그게 단점으로 읽힐 때도 물론 있다. 하지만 멀리 보면 글을 쓰는 데 있어 큰 미덕이라고 믿는다.-학생들을 위한 당신만의 특별한 강의법이 있다면.△나는 친절한 선생이 되고 싶다. 좋은 문학 선생은 학생의 말과 글을 학생들 입장에서 들어주는 것이라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나는 내 글을 쓰고, 학생들은 각자의 글을 쓴다. 내가 가진 생각이나, 좋다고 생각하는 글의 방향을 학생들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결국 문학은 스스로 개척하는 자기만의 영토 아니겠는가.-친하게 교류하는 대구·경북의 작가는 누구인가.△아직까지 교류가 활발하진 않다. 다행스럽게도 데뷔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문학평론가 손정수와 김영찬이 학교에 함께 재직하고 있다. 그들과는 생활을 같이 하고 있는 기분이다. 대구·경북 작가 중에서는 장옥관(시인)이 가장 친하다. 송재학(시인)의 작업실에 놀러가서 음악을 들은 적도 있다.-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갈 계명대 학생 중 기억에 남는 이들은.△작년에 ‘소설 비평가’ 두 명이 나왔다. 세계일보와 창비(문예지)로 대학원 학생들이 데뷔를 했다. 젊은 시절 내가 다녔던 학교에선 30년간 등단한 친구들이 100명에 이르지만 비평가는 두 명 뿐이다. 그래서 조금 놀랐다. 계명대학교 학생들의 문학적 수준이 굉장히 높다. 물론 이들 외에도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꽤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듯하다. 어쨌든 비평가가 나왔으니 시간이 지나면 소설가와 시인도 나올 것이다. 경험상 소설이 먼저고 시는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소설을 쓰는 시간 외엔 뭘 하는지.△나는 일정한 패턴을 좋아하는 편이다. 월요일 저녁에는 테니스를 치고, 일주일에 세 번은 체육관에 간다. 주로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술을 마신다. 음악은 작정하고 일주일에 서너 시간 듣고,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은 항상 틀어놓는다. 취미라고 하면 글쎄, 살림이 아닐까?(웃음)? 혼자 산 지 오래 돼 음식 만들고 청소하는 것을 좋아한다.-출간한 책이 여러 권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한 권을 선택한다면.△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픈 손가락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다. 어렵고 힘들게 썼는데 문단과 독자의 평가나 판매가 가장 더딘 작품이 애착이 간다. 장편 ‘향’(문학과지성사)이 그렇다. 7년을 준비했던 소설이다. 그 책을 읽으면 소설에 대한 내 젊은 날의 패기와 부리부리 했던 감성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대구·경북을 소재나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있는가.△공간은 소설에서 상징(알레고리)이다. 그래서 대구가 주인공인 소설은 없다. 물론 잘 몰랐기 때문이다. 배경으로 쓴 것은 두어 편 있다. 내 고향은 전북 익산인데, 이제 대구로 근원을 옮겨오는 중이다. 물론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게 ‘문학적 말년’이 할애된다면 그 주인공은 이곳이 될 게 분명하다.-지금 대구는 ‘코로나19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다.△그것으로부터 슬기롭게 벗어나고 있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진행되지 않아 감사한 일이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 조심스럽게 일상을 찾는 연습을 하고 있다. 텅 비었던 거리에도 조금씩 사람이 늘어간다. 모두가 힘든 시기니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때다.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또 과감하게 일상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우문이다. 현답을 부탁한다. 소설은 뭐고, 소설가는 뭔가.△소설은 뒤통수다. 소설가는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 걷는 사람이다.-올해 출간과 집필 계획은.△곧 5년 6개월 만에 소설집이 출간된다. 첫 책을 낸 출판사에서다. 수록된 소설의 절반 정도는 대구에서 썼다. 대구와 경북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두 편 있다. 3월부터는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주제로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다.-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더불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반드시 어떻게 돼야겠다는 목적을 가져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성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인상으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 문학은 함께 걷는 여정을 나누는 일이다. 동료와 선후배 작가들이 그려내는 한국 문학의 수준과 위상은 세계적이라 자부한다. 바람이 있다면 한국 소설을 많이 사랑해주고, 책도 좀 사줬으면 좋겠다.문학은 함께 걷는 여정을 나누는 일이다.소설은 뒤통수고, 소설가는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 걷는 사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18

시민이 하나될 축제 제대로 만들어 내야죠

음식이 육체를 살찌운다면, 문화와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키를 키운다.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축제와 공연을 즐기는 게 아닐까.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항에서 열리는 3가지 대표적 축제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신재민(38) 포항문화재단 축제운영팀장의 역할은 막중하다. 신 팀장은 지난 4년간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좋지 않다. 축제와 공연은 참여자들이 합심해 만들어가는 것인데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기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악질 바이러스’가 물러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시 관객들이 하나 될 축제를 선보여야 하기 때문이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민들을 위해 땀과 정성을 쏟고 있는 신재민 팀장을 만나 ‘포항의 축제’와 ‘지속돼야 할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82년 신탄진 출생이다. 2000년대 초 한동대에 입학하면서 포항과 인연을 맺었다. 공연영상, 언론정보, 경영학을 공부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축제운영팀장으로 일하며 포항국제불빛축제,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을 기획·운영 중이다.-공연기획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언제인가.△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공연기획학회’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들어가 영어 뮤지컬 공연 스태프로 참여했다. 그게 현재 내 모습의 시작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연기획학회장이 됐고,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소소한 일상’을 무대에 올렸다.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조명과 영상을 외부 업체 맡기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대학생활이 ‘불꽃처럼’ 바쁘고 뜨거웠다.-‘미추’라는 유명 극단에서도 일을 했는데.△2009년 들어가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온라인 홍보와 공연장 운영 담당을 맡은 기획실 막내로 일했다. 연출가 손진책과 김성녀 등에게서 어떤 자세로 인생과 예술을 바라봐야 하는지 배웠다. 마당놀이 ‘이춘풍 난봉기’ 공연이 떠오른다. 40회 공연에 2만 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관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몸으로 익힌 순간이었다. 어르신 관객이 건네준 엿 한 가락의 맛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미국에선 라디오방송 PD를 했다고 들었다.△‘영어에 대한 장벽을 깨보자’는 현실적인 이유로 미국 한인라디오 방송국에 1년간 다녀왔다. 교양·예능 프로그램 제작과 진행을 했다. 그때 라디오라는 매체의 매력에 빠졌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조수미, 송해, 시애틀 상·하원의원 등과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잊을 수 없는 일은 가수 정훈희를 만난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 ‘꽃밭에서’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다.-GS칼텍스재단과 정동극장 경주사업소 등도 거쳤는데.△운 좋게도 대기업 재단에서 지역사회 공헌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아트센터 홍보 담당자로 일할 수 있었다. 극장의 구조와 운영까지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다. 지금도 지역 아트센터 중 우수 사례로 꼽히는 ‘여수문화예술공원 GS칼텍스 예울마루’에서 일한 기억은 소중한 경험이다.많은 전문가들이 “지역 아트센터는 관광형 상설공연 있어야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동극장 경주사업소는 양질의 관광형 상설공연을 진행한 곳이다. 거기서 세월호, 메르스, 경주 지진까지를 겪으며 관광형 상설공연의 명과 암을 체험할 수 있었다. 축제 기획, 해외 공연, 티켓 판매, 예술교육까지 다양한 부분을 경험한 것이 업무적 자산이 돼주고 있다.-참여한 공연 중 잊을 수 없는 공연은 뭔가.△2017년 이란 테헤란에서 진행한 넌버벌 퍼포먼스(대사 없이 몸짓만으로 진행하는 예술행위) ‘바실라’다. 이란에서의 공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출발 한 달 전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해 연습 장소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종교적 이유로 여성 무용수가 무대에 설 수도 없었다. 이란은 계좌이체와 카드 결제가 불가능해 대관료 입금에도 문제가 있었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공연장을 찾아 기립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는 이란 관객들을 보며 준비 과정의 고통을 다 잊었다. 무용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던 이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포항문화재단으로는 언제 왔는지.△4년 전 봄이다. 14회 포항국제불빛축제가 펼쳐지기 100일 전에 입사했다. 포항문화재단 축제운영팀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축제 브랜딩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한국의 축제는 대부분 이름만 다를 뿐 콘텐츠는 획일화 돼 있다. 지속적인 브랜딩에 대한 시도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 이유로 상당수의 지자체 축제가 유사하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시민들과 어우러지는 즐거운 경험을 쌓고 싶어 포항으로 왔다.-당신이 맡고 있는 포항의 축제는 어떤 것들인가.△포항국제불빛축제,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을 우리 팀이 진행한다. 불빛축제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테마로 포항의 자부심을 담은 축제다. 대형 마리오네트(관절 인형)를 내세운 퍼레이드와 한국 최대 규모의 불꽃 연출을 만날 수 있다. 스틸아트페스티벌은 산업자원인 철에 예술의 따스한 감성을 담아낸 순수예술제다. 스틸아트 작품들과 통합예술교육 프로그램, 스틸 크루즈 투어 등으로 내실 있게 진행할 예정이다. 한민족해맞이축전 역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호미곶에서 펼쳐질 감동의 한마당이 될 것이라 믿는다.-포항으로 와서 일하며 기억에 남은 순간은.△이곳으로 오면서 눈물이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공황장애의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일했던 걸 잊을 수 없다. 지난해 불빛축제 때 ‘돌아가신 할머니와 하늘나라로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불꽃쇼를 만들어 달라’는 한 시민의 사연을 전해 들었다. 약을 먹어가며 축제장을 지켰는데, 마지막 순간 불꽃이 터질 때 나 또한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슬픈 불꽃은 처음이었다.-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와 공연이 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문제가 해소되면 포항에선 어떤 공연이 열리게 되나.△올해는 포항문화재단 구성원 모두가 고생해 많은 것들을 준비했다. 불빛축제도 그렇고, 스틸아트페스티벌도 그렇다. 해외의 새로운 빛 콘텐츠를 가져오기 위해 자비로 프랑스도 다녀왔다. 루마니아, 프랑스 등 해외 빛 아티스트와 연결돼 그들이 포항에 오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참여가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와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묵묵히 축제를 준비 중이다.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불빛축제가 시작되면 영일대해수욕장을 낭만의 공간으로 바꿀 것이며, 우리가 잘 아는 게임 속 한 장면이 불꽃으로 연출되는 순간도 준비해뒀다. 현대음악과 빛, 그리고 기술이 접목된 프로그램과 포항 스틸아트의 진면목을 보여줄 프로그램도 선보인다. 시민들이 소중한 사람과 더불어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다.-조금은 추상적 질문이다. 인간에게 ‘공연예술’이 필요한 이유는.△문화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채워주며, 나와 주변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바쁜 일상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진실한 감정을 찾아낼 수 있다.내가 문화 관련 일을 하는 이유는 두 딸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축제 준비를 하다보면 딸들과 보낼 시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아빠가 준비하고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는 아이들에게도 소중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공연기획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내가 저기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심장이 뛰는 직업을 가지려면 자기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시간과 돈을 투자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포항은 내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준 도시다. 지금까지 행복한 일을 하며 가족도 부양하고 있으니 행운이 아닌가. 이젠 내가 받은 행복과 행운을 포항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공연기획자를 꿈꾸는 후배들이여!‘ 내가 저기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심장이 뛰는 직업을 가지려면 자기 일에 대한긍지와 자부심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시간과 돈을 투자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20-03-11

“청춘들이여! 생존 이데올로기 그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고민해보시라”

반세기 전 들었던 포항 옥계계곡의 물소리를 여전히 기억하는 시인이 있다. 10대 중반 고향을 떠난 그는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생활하며 영민한 문사(文士)이자 가슴 뜨거운 사회운동가로 성장했다.제주 4·3항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집 ‘한라산’, 빼어난 성장소설 ‘양철북’, 미려한 문장으로 축조한 사찰기행문 ‘피었으므로 진다’ 등을 출간한 이산하(60). 그는 작가인 동시에 민주·인권 관련 시민단체에서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얼마 전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유럽의 강제수용소로 취재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역사 속에서 인간이 입은 상처들이 내 핏줄처럼 보여 하나하나 쓰다듬어주고 싶다”고 말하는 이산하를 만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에겐 ‘시인의 어법’이 있으니 가급적 답변은 그의 말투를 그대로 옮긴다.-경상북도 영일(현 포항 북구)에서 태어났다. 유년은 어떻게 기억되는가.△‘전국 오지기행’이란 책에 소개될 만큼 깊은 산골이 고향인데, 해발 930m의 내연산 옥계계곡으로 유명한 죽장면이다. 거기서 크다가 중학교 1학년 끝 무렵 눈 오는 날 이사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을 뻔했던 트라우마와 중학교 국어선생님이 칠판에 써놓고 낭독한 ‘종달새’라는 시가 떠오른다.어릴 때 할머니가 달걀 하나를 앞에 두고 잡아보라고 했는데, 아무리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손을 뻗어도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세계, 그 삶의 비의가 내 문학적 화두가 아닐까 싶다.-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나 계기는 뭔지.△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가니 친구도 없고 할 수 있는 놀이와 놀이공간도 없어 우연히 도서관에 들렀다. 그런데 거기가 혼자 놀기에 너무 좋았고, 책 속엔 친구들도 너무 많았다. 매일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며 시공간을 넘어 낯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 갈 형편이 아니라 아예 도서관 서고에 틀어박혀 문학과 사상, 철학 관련 책들을 탐식했다.어느 날 선생님이 시 한 편을 써오라고 해서 ‘시 같은 것(?)’을 썼는데 그게 부산의 한 신문에 실린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뒤로도 여기저기 문학상에 응모했는데 다 당선됐다. 내 시시한 작품이 뽑힐 정도면 전국에 글 쓰는 학생들이 몇 십 명밖에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느 시상식장에서 교수인 심사위원이 “당선자는 대학 등록금 면제”라고 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글을 잘 쓰면 대학도 공짜로 다닐 수 있단 걸 알았다. 그때부터 사생결단으로 써서 전국 대학 문예공모전에 응모했다. 운이 좋았던지 모두 당선됐고, 원하는 대학을 골라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다.-고교 시절엔 시인 안도현과 ‘한국 고교 문단’을 양분했다고 들었다.△안도현은 서로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이었다. 1978년 ‘학원문학상’에도 같이 당선됐다. “안도현이 이상백(본명)과 한 판 붙자고 한다”는 이야길 여러 차례 들었는데 한 번도 ‘맞짱’을 뜬 적은 없다. 당시 소년문사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였던 경희대 고교생 현상문예는 3학년만 응모가 가능했다. 2학년이었던 안도현은 응모 자격이 없었다. 내가 3학년일 때 그 상을 받았고, 이듬해엔 안도현이 수상했다.(웃음)-당신이 쓴 소설 ‘양철북’을 보면 한때 ‘떠도는 승려’를 꿈꾸었던 것 같은데.△고교 시절 외할머니가 주지스님으로 있던 경산의 암자에 들어가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어느 날 만행 중인 젊은 스님이 들렀는데, 마치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 나오는 파계승 지산스님과 비슷했다. 그 스님과 섬진강을 따라 송광사 불일암까지 흘러갔고, 거기서 법정스님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었다.여러 절을 보고 많은 스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평생 머리를 깎을만한 ‘결정적 사건’은 없었다. 불교는 내게 돌 위로 흐르는 강물 같은 사상이었다.-‘예민한 시인’이 학생운동과 사회 변혁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뭔가.△어느 날 글을 쓰는데 문득 200자 원고지가 200평 토지로 보이고, 볼펜이 곡괭이로 보였다. 토지는 강의실 창문 너머 있었으니 당연히 땅을 갈아엎고 개간해서 씨를 뿌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억압당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걸 느끼지 못하던 아픈 시절이었다.-오래 교류해온 대구·경북의 문인은 누군지.△소설가 박덕규, 김완준 시인 안도현, 박기영, 백무산, 장정일 그리고 문학평론가로는 ‘김수영 전집’을 낸 이영준 교수 등이다. 자주는 못 보지만 그들의 문장을 통해 저물녘 긴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숨결을 느낀다.-당신의 책 ‘피었으므로 진다’는 사찰기행문이다. 돌아본 경북의 사찰 중 인상적이었던 곳은.△영천 은해사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많다. 대웅전과 보화루를 비롯해 조실스님 거처의 시흘방장, 백흥암의 6폭 주련, 그리고 지금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불광각의 불광(佛光) 등이 모두 추사의 작품이다. 이 글들은 추사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60대 중반에 쓴 것들이다. 획 하나마다 가파른 숨결이 녹아 있을 텐데, 그게 어떻게 녹아서 보이지 않는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걸 보러 갔다.그 가운데 ‘불광’이란 편액에 대한 일화도 유혹이었다. 추사로부터 불(佛) 자의 한 획이 유독 아래로 길게 뻗은 글씨를 받은 주지스님이 목판에 새기다가 그 획이 너무 길다고 뚝 잘라버리고 새겼다. 얼마 후 은해사에 우연히 들른 추사가 그것을 보자 현판을 떼어내 불태워버렸다. 이 일화를 통해 난 법당의 부처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손가락 하나가 길면 잘라도 좋겠느냐”고….앞으로 꼭 가보고 싶은 절은 오어사이고, 추천하고 싶은 절은 청도 운문사다. 새벽 예불이 장엄하다고 들었다.-세계 2차대전 때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곳을 두루 돌아봤다. 무엇을 느꼈나.△2년 전 ‘다크투어(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로 독일 베를린 작센하우젠, 바이마르 부헨발트, 뮌헨 다하우, 폴란드 아우슈비츠, 체코 프라하 테레진, 오스트리아 린츠 마우트하우젠 등 많은 나치의 강제수용소들을 혼자 답사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지점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어느 누구든 한계상황에 처하면 단지 1%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다.-시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유독 ‘역사’와 ‘상처’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지.△모든 생명은 상처를 갖고 있고 그 상처 속에 모든 무늬가 들어 있다. 어느 상처이든 그 무늬가 내 핏줄처럼 보여 하나씩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상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역사다. 그게 나의 기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상처는 넓이가 아니라 깊이가 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 말을 두어 번 반복해 읽다보면 무슨 뜻인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최근 발표하는 작품들은 ‘이야기 시’의 형태다. 이런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앞서 얘기했듯 세상과 인간이 지닌 상처의 무늬를 따라가는 것이다. 부사와 형용사 같은 수사학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다. 잎이 많으면 꽃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 유골 발굴현장에 가는데 여기저기 흩어진 뼈들을 모아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하다보면 꼭 마지막에 뼈 하나씩이 부족했다. 시도 그처럼 마지막에 꼭 뼈 하나가 부족하다. 그래서 모든 시는 미완성이 아닐까.-문학소년, 시인, 사회운동가, 여행자 등으로 살아왔다. 앞으론 어떤 삶을 살아갈 것 같은가.△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 더 먹는 건 나도 처음이라 아주 당혹스럽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더욱 그렇다. 다만 그동안 게을러 과작이었던 시집을 몇 권 더 내는 게 작은 바람이다. 지금은 21년 만에 낼 새로운 시집을 정리하고 있다.-젊음을 버거워하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아무도 자의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자의에 의해 태어난 것처럼 너무 ‘생존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병들고 썩은 이유는 ‘좌우 이데올로기’보다도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이 앞에서는 면죄부처럼 모든 것이 용서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이 면죄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은 숨어있는 괴물이고 ‘기생충’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생존 이데올로기 너머에 뭐가 있는지 고민하는 건 청춘들의 책무 중 하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04

“나눔의 ‘선한 영향력’ 널리 전하고파”

자본주의사회라는 정글에서 많은 돈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쉽지 않은 건 ‘돈을 가치 있게 쓰는 것’ 아닐까?1983년 포항에서 맨손으로 조그만 식당을 시작한 사람이 있다. 처음엔 작은 규모의 경로잔치를 동네 어르신들께 열어줬다. 사업이 커가면서는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보험료를 대신 내주고, 형편 어려운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쾌척했다. 소외계층과 다문화가정의 부부들에겐 결혼식을 열어주고, 효자와 효부에겐 상을 줬다. 청솔밭 이지곤 회장 이야기다.청솔밭이 최근 세대교체를 했다. 대표가 바뀐 것. 기부와 선행이라는 사회 공헌 활동을 꾸준히 진행해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솔밭 경영을 맡게 된 이경하 대표를 만났다. 아래는 이 신임대표가 들려준 ‘지나온 20년과 앞으로의 20년’에 관한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75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을 이곳에서 살았고 학생 때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석·박사 과정에선 경영을 전공했다.-사회복지와 경영학을 전공한 이유가 있는지.△부모님이 37년 전에 조그만 식당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 주는 걸 보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을 일상처럼 봐왔다. 나 역시 작으나마 세상에 무언가를 나눠주고 싶었다. 사회복지는 그래서 공부하게 됐다.이후엔 ‘내가 만약 돈이 많다면 도움의 크기도 더 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경영에 관심이 생겼다. 어릴 땐 식당을 하며 고생하는 부모님 모습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거나 연구할 때 항상 나를 곁에 뒀다. 자연스레 경영 수업이 된 것 같다.지역사회, 직원들과 함께 더불어 성장하고 싶다고 말하는 청솔밭 이경하 대표.-청솔밭은 뭘 하는 업체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운영하고 있는가.△1983년 아버지가 갈비집을 열었다. 그걸 시작으로 한정식집을 거쳐 1993년 청솔밭뷔페를 창업했다. 그게 포항 최초의 뷔페라고 알고 있다. 2000년부터 웨딩사업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하면 외식사업과 웨딩사업을 하는 업체다. 현재 티파니웨딩과 더 원 뷔페를 운영 중이다.아버지는 ‘나눔’과 ‘더불어’의 정신을 자주 이야기한다. 또한 ‘항상 먼저, 항상 새롭게’라는 혁신의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그것과 함께 직원들, 거래처, 지역사회와의 믿음을 지켜가야 한다고 말했다.-얼마 전부터 청솔밭 경영을 맡게 됐다. 아버지가 들려준 당부는.△지난달 20일에 대표 이·취임식을 진행했다. 말에 앞서 항상 실천으로 보여주시던 아버지였다. IMF 등 경제 불황 때도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을 걷는 모습, 시련이 닥쳐도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밀고 나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나 또한 ‘왜 안 되는가,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태도를 잃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초심을 지키는 것 아니겠는가.-아버지에 이어 대표를 맡고 보니 어떤가.△청솔밭 직원은 일용직을 포함해 100명이 넘는다. 아버지가 그동안 해왔던 일들의 의미를 그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돌아봤다. 20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다가올 20년을 준비한다는 의미다. 앞서 아버지가 해온 일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지역사회와의 협조, 직원들과의 화합을 통해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가겠다.-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 다문화가정을 위해 무료 결혼식을 여러 차례 올려줬다.△예전에 식당을 할 때는 경로당 등에서 소박한 잔치를 열곤 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아버지는 사업으로 얻은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다짐을 오래전부터 했었다. 웨딩사업을 시작하면서 매년 4월 무료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하객들에겐 식사도 대접한다. 신혼여행지도 아버지와 내가 미리 답사하곤 했다.결혼식 이후에도 연락하며 잘 살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를 묻고 있다. 현재까지 약 200쌍의 부부가 티파니웨딩에서 무료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대표로 있는 동안은 이런 전통을 이어갈 생각이다.-사단법인 ‘효 실천회’도 창립한 것으로 안다.△2013년에 만들어졌다. 효자·효녀·효부가 드물어진 세상이니 효의 이념을 실천하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포항 지역에서 학생들에게 인성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1년에 2번쯤 해당 분야 강사를 초청해 학생들에게 효 관련 강의를 들려준다. 때마다 200명 이상의 아이들이 모이고 있으니 성공적이라고 본다. 강의 후에는 자신의 감상을 적어 보내오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어려운 가정에 건강보험료를 대납해주고, 장학금도 기부하는 것으로 안다. 세속적인 질문이지만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건강보험료 대납은 2006년부터 해왔다. 처음엔 1년에 600만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매년 12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돈이 없어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다.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지원 대상자를 선정하고 있어 우리는 누가 혜택을 받는지 모른다.다만, 몇 해 전 울릉도 주민 중 한 분이 치료를 받은 후 어렵사리 연락처를 알아내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그때는 우리가 그분에게 더 고마웠다. 장학금의 경우엔 2016년부터 매년 12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형편 어려운 학생들이 꿈을 키워 가는데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한다.-여러 가지 사회 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이유나 계기가 있었는지.△앞서 말했듯 아버지는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누구보다 없는 사람의 고통과 힘겨움을 잘 안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경제적 그늘 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는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걸 좋아한다. 그런 모습이 존경스럽다. 그 연장선에서 나 역시 지역사회, 협력업체, 직원들과의 약속을 꼭 지키려한다. 내가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그들과의 신뢰 관계를 깨지 않을 것이다.-웨딩사업과 외식사업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어려움은.△청솔밭은 단순히 결혼식만 올리는 장소가 아닌 문화공간으로 발전하려 노력해왔다. 포항의 결혼문화를 선도해왔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다. 여기선 결혼식, 돌잔치, 칠순 잔치 등이 열린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늙을 때까지 기념할만한 즐거운 일들 대부분이 이 공간에서 연출된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웃어주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다.다문화가정의 부부들을 오래 봐왔다. 예전에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들이 상당 부분 해소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2명의 아들에겐 어떤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는지.△별다른 건 없다. 그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남과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한다.(웃음) 나부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애들도 자연스레 거기서 뭔가를 배우지 않겠는가. 내가 부모님을 보며 지금의 내 생각과 태도를 정립했듯이.-청솔밭의 올해 경영 목표와 향후 청사진은.△대표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거창한 목표와 먼 미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최근 열린 ‘비전 선포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역사회의 경기가 어려워지면 우리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를 힘 모아 이겨내면 더 큰 기회가 오고, 그 기회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고.아버지가 닦아온 지난 20년을 발판으로 앞으로 20년 동안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청솔밭을 운영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양심을 지키면서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더 많은 사회 공헌 활동을 하면서 포항과 더불어 성장하고 싶다.아버지는 ‘ 나눔’ 과 ‘ 더불어’ 의정신을 자주 이야기한다.또한 ‘ 항상 먼저, 항상 새롭게’ 라는 혁신의 마음가짐을 강조한다.그것과 함께 직원들, 거래처,지역사회와의 믿음을 지켜가야한다고 말했다.말에 앞서 항상 실천으로 보여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초심을 지켜내야 하지 않겠나/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26

“이야기 속에서 자유 느껴 서사의 힘 무엇보다 중요”

문학평론가, 출판사 휴먼&북스 대표, 교수, 한국 문단 최고 낚시꾼, 국악 연구자, 인터넷신문 문화 에디터…. 작가 하응백(59)은 활동 영역이 누구보다 넓은 사람이다.기자가 20년 가까이 지켜본 하응백은 ‘할 말 외에는 침묵을 지키는 과묵한 경상도 사내’였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말 ‘남중(南中)’이란 제목의 책을 써 ‘소설가’라는 또 다른 이름표 하나를 더 얻었다. 모두가 말하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언의 통로를 찾지 못하거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어 세상에 내놓기를 포기했던 ‘내 자신의 이야기’를 3부작 연작소설로 만들어낸 것이다.평생을 자유로운 ‘바람’처럼 살아온 아버지, 한국 현대사의 쓰라린 비극을 온몸으로 앓아온 어머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삶까지를 숨김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하응백.지난 주말 하응백에게 만남을 청했다. ‘시간을 뺏기고 손해를 보더라도 점잖은 표정을 잃지 않는 사람’인 그가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아래는 그날 오고간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최근 연작 소설 ‘남중’을 출간해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은 작가 하응백.-대구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면.△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다. 그 후 서울에서 40년을 살았지만 내 정체성은 대구 사람이라는 거다. 불볕더위에 서울 사람들이 난리를 치면 대구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이까짓 더위야 대프리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대구에서의 추억은 차근차근 육화돼 앞으로 작품으로 나올 것 같다. 소설 ‘남중’의 주 무대도 대구 서문시장, 대명동, 봉덕동, 달성동이다.-대건고등학교 문예반이었다. 문학의 길로 들어선 이유가 있는지.△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고등학교 때 선배들이 서클 가입을 권유했을 때 내가 갈 곳은 문예반밖에 없었다. 문학, 특히 소설은 개인사를 객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의 가족사적인 핸디캡은 소설에서는 썩 훌륭한 소재가 된다. 그런 것을 이론적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소설과 같은 이야기 속에서 자유를 느꼈다. 내가 갈 곳은 문학밖에 없었다.-대구에서 보낸 문학소년 시절은 어땠나.△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도광의 시인이다. 수업 때 문학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와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이야기를 주로 했다. 서정주의 시를 읊어주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손창섭과 김승옥의 소설에 매료되기도 했다.-1980년대 경희대 국문과를 다녔다. 쟁쟁한 선후배와 동기들이 있었을 텐데, 기억에 남는 동창은.△박덕규, 류시화, 김형경, 하재봉, 이문재, 이혜경 등 좋은 선배들이 많았다. 동기 중에선 시인 이산하와 친했다. 작고한 포항 출신의 박남철 선배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열정으로 꿈틀대고 있었지만,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그런 막막함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술을 많이 마셨다. 대학원 진학 후 만난 조태일 시인도 기억나는 분이다.-대구·경북 사람이 가지는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조금은 어리석다는 거다. 어리석어서 손해를 봐도 친구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간다. 그런 어리석음이 좋다. 그게 대구·경북 사람만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친구들이 그렇다. 또 하나는 체면을 중시하고 점잖은 편이다. 서울처럼 전통사회가 해체돼 재편되었다기보다는 전통사회의 뿌리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1991년 등단해 문학평론가가 됐다. 평론가의 삶은 어떤 건가.△문학평론가의 좋은 점은 직업적으로 책을 읽고 평을 쓴다는 거다. 그러면서 많은 시인과 작가들의 내면을 만날 수 있다. 결국 삶이란 타자와의 어울림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이데, 그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평론가는 멋진 직업이다. 시인 황동규, 소설가 김주영, 김원일, 성석제, 김연수 등을 만났고 우정을 나누며 살고 있는 것도 행운이다.-18년째 출판사를 운영 중이다. 책은 무엇이고,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출판사를 차린 이유는 교수를 그만 두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할 수 있을만한 직업이 출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책을 만든다’는 구호를 믿지 않는다. 책이 정보를 전달하고, 정서적 위안을 주고, 사고의 깊이를 더하는 기능을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이 전지전능한 건 아니다. 안 읽어도 되는 책이 훨씬 많다. 다만 좋은 책은 효율적이고 압축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게 해서, 어떤 식으로든 삶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최근 ‘남중’을 내고 ‘소설가’라는 새로운 명찰을 달았다.△고교 때부터 쓰려고 했던 소설이다. 게으름과 삶의 분주함으로 계속 늦추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더 늦춰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남중’은 내용도 그렇지만 형식을 많이 고민한 작품이다. 요즘과 같이 영상과 이미지의 전달이 쾌속으로 이뤄지는 시대에 맞는 소설 양식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남중’을 쓰며 서사의 힘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묘사를 없애고 스토리만으로 뼈대를 세운 소설이되, 독자들에게 스피디하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선후배 작가들의 평가는.△발문을 쓴 성석제는 좋다고 했고, 인터뷰를 한 작가 조용호가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했다. 몇몇 선배 작가들에겐 칭찬을 들었다. 소설가 전상국은 “묘사가 없으면서도 잘 읽히는 소설의 전범”이라 평했고, 김주영 선생은 “단숨에 읽었어, 좀 쓰네”라는 말을 전해왔다.-독자들은 ‘남중’을 어떻게 읽었다고 하던가.△‘일단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다’는 평이 많았고, 그게 가장 기분 좋은 반응이었다. 소설이 영상매체와 경쟁해 살아남으려면 독자들을 단숨에 붙잡아야 한다. 지금은 볼 게 너무 많은 시대다. 영화 ‘기생충’도 봐야 하고 유튜브도 봐야 하고, 텔레비전도 봐야 한다. SNS도 해야 한다. 소설이 어떻게 그것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일단 잡으면 소설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20~30대 젊은층에게 주목받지 못한 건 아쉽다.소설 ‘남중’엔 저자의 내밀한 가족사가 가감 없이 담겼다.-앞으로도 대구·경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쓸 계획이 있는지.△내 작품의 상당 부분은 그곳을 배경으로 할 수밖에 없다. 잘 아는 곳이고, 가장 편한 곳이기 때문이다. ‘뻥’을 쳐도 잘 아는 곳에서 치는 게 좋지 않겠는가.-자타공인 ‘문단 낚시광’이다. 낚시엔 어떤 매력이 있나.△낚시는 치열하다. 물고기의 죽음이 나의 즐거움이 되는 이율배반적인 게 낚시다. 죽음에 희열을 느낀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열심히 몰두한다는 거다. 낚시하는 동안엔 사색하고 구상하는 뇌를 쉬게 한다. 내 경우 주로 선상 낚시를 하는데, 볼락이나 열기 낚시의 경우 소변도 참아야 할 정도로 바쁘다. 그때는 이성적 사고를 하는 나의 한쪽 뇌가 휴식하는 시간이다.-경북 동해안의 ‘늦겨울 낚시 포인트’ 한 곳을 소개해준다면.△포항 신항만이나 양포 쪽으로 나가면, 열기나 볼락을 많이 잡을 수 있다. 만약 내가 포항에 산다면 이 시기엔 아무 일도 못할 거다. 낚시해야 하니까. 바다가 곁에 있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올해 계획은.△국악에 관한 책을 한 권 낸다. 집필을 거의 마쳤다. 제목은 ‘인문학으로 읽는 국악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국악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국악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덤으로 인문학 공부도 된다. 경북 동해, 즉 울진·영덕·포항·경주를 배경으로 하는 한문학사도 정리 중이다. 영덕 괴시리에서 출생한 이색(李穡)의 작품을 위시해 많은 문학 작품들, 특히 한시가 경북 동해안에서 탄생했다. 물론 이따금 낚시도 다니며 동해의 물고기와 만날 예정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19

“시간이 흘러가도 변치않는 보석처럼 ‘나눔의 마음’도 지켜내며 살래요”

보통의 남자들처럼 ‘보석’에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가던 서울 남자와 어릴 때부터 ‘보석’의 매력의 빠져 대학에서도 보석 감정을 전공한 대구 출신의 여자가 만났다. ‘보석과 귀금속의 메카’로 불리는 종로3가에서였다.첫 만남에서 여자는 남자가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남자 역시 상냥한 태도와 배려가 담긴 여자의 말투에 호감을 가졌다. 동시에 여자가 매료된 보석에 대한 관심까지 생겼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여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보석감정사인 아내에게 애정을 느낀 남편은 직업까지 보석세공사로 바꾼다. 포항시 북구에서 보석가게 다이아를 운영하는 육종성(45)-이효미(42) 부부 이야기다.사람이 사람에게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런 감정에 이르기까지 매개체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종성 씨와 효미 씨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둘 사이를 이어준 가장 중요한 매개체 중 하나가 보석이었다는 것.입춘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보석처럼 예쁘게 살아가는 부부를 만났다. 그날 오간 흥미롭고 가슴 훈훈한 이야기를 아래 옮긴다.◇보석감정사 아내‘보석감정사’가 대충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으나, 보통 사람들에겐 아직 생소하다.광학 계기나 화학 용액을 이용해 보석의 가치와 진위 여부를 평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보석감정사다.그들은 보석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결함과 특성을 찾아내고, 보석의 표면과 내부를 검사한다. 더불어 보석 가격까지 측정하는 보석감정사는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20대 초반부터 보석 감정과 판매 일을 해온 이효미 씨는 보석감정사 자격증 외에 미국에서도 통용되는 ‘보석가치평가사’ 라이선스도 가지고 있다. 벌써 경력이 20년이 넘는다.포항을 포함한 경북 지역에서 보석감정사가 상주하는 귀금속 가게는 극히 드물다. 효미 씨가 가진 2개의 자격증은 판매하는 보석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고, 손님들이 이들 부부의 가게를 믿고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인터뷰 중에 가게를 찾은 한 손님은 효미 씨의 웃는 얼굴과 사람 대하는 자세를 보고는 “선량하고 친절하다”고 칭찬했다.효미 씨는 “보석감정사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감정하고 판매한 반지나 목걸이를 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만족감을 표시하는 손님을 볼 때”라고 답했다.사실 그렇다. 좋은 보석감정사가 되고 싶다면 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가장 귀중한 순간에 선물로 역할 하는 게 보석이니까. 약혼식과 결혼식, 결혼기념일과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 입학과 졸업을 축하하며 건네지는 보석들. 그 가격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그것들 모두는 주고받는 이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보석감정사는 보석은 물론, 그걸 주고받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려 함께 기뻐하며 감동하는 사람이 아닐지.◇보석세공사 남편아내에 대한 믿음이 보석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 육종성 씨는 결혼 전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보석세공사’로 직업을 바꿨다.보석세공사는 처음 캐냈을 땐 투박하고 거친 자연 상태의 광물을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는 일을 한다.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진주 등 5대 보석은 물론,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이 제대로 된 가치를 보여줄 수 있도록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게 바로 보석세공이다.그들의 일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오랜 시간 숙련된 보석세공사의 세밀함과 정교함은 어떤 기계도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종성 씨 역시 아내와 비슷한 심성을 지녔다. “내 만족보다는 손님이 만족하는 세공이 이뤄졌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종성 씨의 말을 듣다보니 보석세공이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작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장 다루기 힘든 보석은 뭔가”라는 물음에 “비싸기도 하지만, 지구에서 제일 단단한 광물이기에 쉽게 세공하기 힘든 다이아몬드”라고 답한 종성 씨에게 “그럼 가장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보석은 뭔가”라고 연이어 물었다.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보석은 대부분 아끼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 서로를 향한 연인들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어떤 보석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내가 세공하는 모든 보석이 가격과는 무관하게 똑같이 소중하다.”◇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지겹지 않아부부는 포항에 별다른 연고가 없다. 그럼에도 7년 전 포항으로 이주했고 가게를 시작했다. 두 딸도 여기서 자라 초등학교에 다닌다. 포항으로 온 이유를 물었다. 효미 씨의 답변은 심플했다.“오래 전에 포항을 여행했다. 음식도 맛있고 바다 풍경도 너무 예뻤다. 언젠가는 와서 살아보고 싶은 도시였다. 그래서 이사를 결정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고, 살다보니 더 정이 들었다.”종성 씨와 효미 씨의 결혼 생활은 올해로 11년째다. 다른 부부들은 아침에 헤어졌다가(?) 밤에 다시 만나거나, 주말부부의 경우라면 일주일에 한 번 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게와 집에서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낸다. 농담처럼 물었다.“지겹지 않은가?”서로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웃던 부부가 입을 모아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 통해서 좋았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 그러니 지겨울 까닭이 없지 않겠나.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같이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보석전문가인 이들 부부에 따르면 ‘보석에도 유행이 있다’고 한다. 초록빛 보석의 대세가 지나가면 붉은 보석이 선호되기도 하고, 크고 묵직한 보석에 열광하는 시기가 있다면 작고 앙증맞은 보석이 인기를 모을 때도 있다.그런데, 종성 씨와 효미 씨가 상대에게 가진 신뢰와 애정은 유행을 타지 않는 보석처럼 한결같아 보였다.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기자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두 딸과 함께 하는 봉사 활동 즐거워오랜 시간 보석을 곁에 두고 살아온 부부이니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인간에게 보석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고민하지 않고 종성 씨가 답했다.“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효미 씨가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얼마 전 결혼 20주년을 맞은 남편이 1천만원이 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려고 가게에 온 적이 있다. 그 손님은 반지를 통해 아내에게 ‘처음 당신을 만나 사랑하게 됐을 때의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준비한 선물이라면 10만원짜리 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믿는다. 보석의 가격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를 향한 애정 아니겠는가.”마지막으로 ‘또 다른 보석’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부모에게 자식이란 같은 무게의 금이나 다이아몬드와도 바꿀 수 없는 세상 가장 귀한 보석이다. 종성 씨와 효미 씨 역시 분명 딸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터.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재산보다 귀한 ‘나눔의 마음’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쉬는 날이면 딸들과 무료 급식소 배식 봉사, 환경 정화 활동 등을 함께 하고, 양로원에 가서 외로운 할아버지·할머니의 말벗이 돼주기도 한다. 아이들도 그 시간을 좋아한다. 애들이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커갔으면 좋겠다.”종성 씨가 꺼내든 가족사진을 본 순간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포항에는 보석을 매개체로 만나 보석 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착한 부부가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12

“경험과 학문적 연구 토대로 모두를 위한 발전방안 찾을 터”

모두가 인정하는 세칭 일류대학에서 사회학과 외교학을 공부했다. 미국 유학에선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2차례에 걸쳐 서울대가 주는 우수논문상과 학술상을 받았다. 한국국방연구원 실장을 지냈고, 통일부와 외교부의 정책자문위원 역할도 한다. 이 정도 스펙과 경력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오만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마주 앉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깍듯한 예의가 몸에 밴 사람. 기자가 한동대학교 박원곤(52) 교수를 접한 첫 느낌이었다.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교수’로 역할하며, 방송 출연과 기고를 통해선 그간 연구해온 외교-국방-안보 관련 지식을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는 박 교수.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갖춘 학자인 그에게 스승으로서의 삶과 방송 출연 중 에피소드 등을 물었다. 더불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태도, 향후 국제 질서의 재편 방향도 질문했다. 아래 그 내용을 요약한다.-포털사이트 등에서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국제지역학 교수로 소개되고 있다. ‘국제지역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인가.△국제학, 국제정치학, 정치학을 아우르는 영역이다. 우리 학교의 경우 거기에 영어도 포함돼 있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 대부분은 정치학과 국제정치학 전공자다. 다른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2008년 이후 임용된 교수들은 모두 영어 강의가 가능하다. 한동대 강의 중 영어로 진행되는 게 40% 이상이다. 학생들도 전공과목 중 4개는 반드시 영어로 듣도록 돼 있다.-한동대로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지역적 연고가 있는지.△아니다. 난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한동대를 처음 알게 된 건 미국 유학시절인 1994년이다. 시카고에서 열린 ‘전미 유학생 수련회’에서 김영길(한동대 1대 총장·1939~2019) 선생을 만났다. 그의 열정적이고 진실한 특강에 감명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7년쯤 포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많은 학생과 포항시민들을 만났을 텐데.△본적은 경남 김해고, 아버지는 부산 사람이다. 영남은 내게 익숙한 곳이다. 포항의 경우엔 임용 후 처음 왔지만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오래 생활했던 서울보다 좋은 점이 더 많다. 복잡한 대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공기도 좋고 바다도 가깝고, 삶의 질이 더 높아진 느낌이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가 친절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서울에 가면 갑갑하다.(웃음)-재직 중인 한동대는 어떤 대학인가.△‘학생 중심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로 오기 전 국방연구원에서 18년간 일했기에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한동대는 입학생들이 전공을 정하지 않고 들어온다. 그들이 1년 동안 자신의 원하는 강의를 듣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한다. 자율과 자기 결정권이 존중되는 것이다.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다른 대학이 있지만, 우리 학교의 경우엔 성적순으로 인기 있는 과에 몰리는 현상이 적다. 만약 그렇더라도 교수를 충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한다. 한 해 신입생이 700명 정도인 소수정예 시스템이라 가능했다. 지난 20년간의 실적이 이 시스템이 성공적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떤지.△우리는 ‘학생과 교수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모든 교수가 학기가 시작될 때면 학생 30여 명과 하나의 팀을 이룬다. 일종의 ‘담임 제도’ 같은 것이다. 팀원이 된 학생들과 1년간 동고동락한다. 크고 작은 활동을 함께 하며 고민을 공유한다. 그런 까닭에 편안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학생의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주는 아버지 같은 교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 생활 훈련’이 4년 내내 지속되기에 한동대 졸업생이 사회에 나가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팀워크가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조직원들과 불화 없이 어울리는 화합의 마음이 아닐까.-한동대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교수 중 한 명이다. 방송 출연과 신문 칼럼 기고에 적극적인 이유가 있는지.△방송 출연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건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일할 때다. 한미동맹과 북한문제 등 통일-외교-안보가 나의 연구 분야다. 이것들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한동대에 오기 전부터 정책보고서를 써왔고, 김영삼 정권 시기부터 정부와도 밀접하게 소통했다. 그러다 보니 언론 매체와 자연스레 연결이 됐다. 기자들이 당면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가 아는 정보와 지식을 제공했다. 방송 출연과 신문 기고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내가 의도하거나 먼저 나서서 TV에 나가려고 한 것은 아니다.(웃음)-공중파, 케이블방송, 종합편성채널 등 다양한 방송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면.△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 다른데 내 경우엔 생방송이 잘 맞는다.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하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녹화방송이 더 어렵다. 한 호흡으로 쭉 이어지는 생방송이 좋다.에피소드라면…. 2018년과 2019년엔 ‘북미-남북 문제’와 관련해 자주 방송에 출연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도 YTN 생방송에 출연 중이었다. 그런데 방송 중에 회담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전에 준비된 시나리오도 없이 즉각적 판단에 따라 회담이 깨진 이유와 향후 전망을 예측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25년 이상 공부해온 주제이니 당혹스럽진 않았다.-세간엔 언론 노출이 잦은 교수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학기 중엔 주말에만 서울에 간다. 주중에는 내내 포항에 있다. 내 본업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지 방송 출연이 아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 있다. 전공 분야를 다루는 대담 프로그램과 토론 프로그램에만 출연한다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대립하는 국내 정치에 관해선 논평하지 않는다. 이는 방송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하나를 덧붙이자면 방송과 신문 기고를 포함한 나의 활동은 내가 가르치는 학문의 영역과도 많은 부분 겹친다. 그렇기에 방송된 토론 프로그램을 강의 중에 활용해 학생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경우도 흔하다.-올해 한미 관계, 남북 관계 등은 어떻게 전망하는지.△한마디로 예측하기가 몹시 어렵다. 세계 질서 자체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향후 30년 이상 넘어서야 할 힘겨운 문제가 연이어 발생할 것이다. 한-미, 한-중, 남-북, 미-북, 한-일 관계 등에서 세계의 변화와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극단적으로 갈라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태도다. ‘국제 정치’라는 영역엔 정답이 없다. 항상 여러 가지 견해와 주장이 충돌한다. 이를 조율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토론이 필요한데, 아직 한국엔 그런 분위기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했다. 진보-보수간 갈등 해결을 위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의 견해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뭔가.△우리 학교의 모토가 ‘공부해서 남 주자’다. 이는 자기 이익만 취하지 않고 남을 섬기는 게 목표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 의견을 경청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는 자기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당신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가 어떤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고 보는지.△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전공 영역인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한국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앞으로도 고민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한 비난이 있더라도,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나와 더불어 타인을 위한 발전 방안을 찾아가는 게 소박하지만 바람직한 ‘지식인의 사회 참여’ 방식이 아닐까.-올 한 해 계획과 향후 학자로서의 궁극적 목표는.△작년부터 시작한 미-중 관계 연구를 지속할 예정이다. 미국 대선과 한국 총선이 있는 올해는 어느 시기보다 역동적일 게 분명하다. 이미 관련 논문 2편을 발표했다. 중장기적인 계획은 1953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0년 냉전이 해체될 때까지의 과정을 깊이 있게 연구해보고 싶다. 냉전사(冷戰史·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역사)는 나의 세부 전공이기도 하니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05

“푸르른 바다 곁에서 치유받으며 살고 있어요”

소년은 언제나 ‘지금 이곳’ 아닌 ‘또 다른 곳’을 꿈꿨다. 10~20대 시절엔 밤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이 땅 남쪽 끝을 향해 가거나,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바람처럼 서쪽으로 달리곤 했다. 그 소년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서른둘에 공무원이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북의 여러 등대를 떠돌며 드넓은 바다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항로표지관리원 김현길 씨다.한 달간의 독도등대 근무를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온 그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기자는 김씨를 기다리며 초등학교 음악 수업시간에 목청껏 부르곤 했던 ‘등대지기’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로 시작해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이란 구절로 끝나는 노래, 이상스레 우리들 마음을 아프게 울리는 그 노래를.-먼저 궁금한 것 하나 묻고 싶다. ‘등대지기’의 정식 명칭은 뭔가.△‘~지기’라는 말이 직업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엔 등대관리원 혹은, 항로표지관리원이라 부른다.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나는 해양수산부 포항지방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에서 독도항로표지관리소 운영·관리를 맡고 있는 팀원 중 한 명이다.-항로표지관리원을 시작한 시기와 현재 나이는.△53세다. 1999년 등대 지키는 일을 시작했다. 올해로 21년째다.-어릴 때부터 바다가 좋고, 외로움을 잘 견디는 사람이었나. 항로표지관리원이 된 이유가 궁금하다.△그렇지 않다. 일을 시작하기 전엔 등대에 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직업훈련원을 수료하고, 정비업체 등에서 일했다. 한 친구가 우연히 권유해 항로표지관리원 시험에 응시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어찌 보면 운명 같기도 하다.-등대를 지키기 전엔 어떤 청년시절을 보냈는지.△10대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다. 20대에도 기차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낯선 곳에서 텐트를 치고 자다가 불심검문에 걸리기도 했고…. 짧지만 사찰에서 행자 생활도 해봤다. 내겐 역마살이 있다. 1999년 독도에 설치된 등대가 무인등대에서 유인등대로 바뀌며 인력 충원이 필요했다. 그해 나를 포함해 7명이 항로표지관리원이 됐다. 32세 때다.-유인등대와 무인등대의 차이는 뭔가.△쉽게 말하면 등대에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통상 2년에 한 번쯤 근무지가 바뀐다. 경북에는 5개의 유인등대가 있다. 독도, 울릉도(도동등대와 태하등대) 울진 죽변, 포항 호미곶 등이다. 이 다섯 군데의 등대를 순환 형태로 돌아가며 근무한다. 각각의 등대에서는 3교대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다만 독도등대의 경우엔 ‘2개 팀·1개월 근무·1개월 휴무 시스템’이다. 1개 팀은 3명이고, 1명이 주간 근무, 2명이 야간 근무를 맡는다. 경북 전체에서 등대를 지키는 사람들은 대략 25명 정도라고 알고 있다. 무인등대는 280개쯤 된다.-항로표지관리원의 주된 임무는 어떤 것인지.△선박의 항해를 돕기 위해 등대와 부표를 관리한다. 관련 해상 시설을 점검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땐 이를 해결하기도 한다. 예전엔 등대의 역할이 ‘어선과 어부 보호’에 방점이 찍혀있었으나, 요즘은 국가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독특한 직업이다. 힘겨운 점과 보람의 순간이 동시에 있었을 듯한데.△두 아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게 가장 안타깝다. 이젠 대학생이 된 자식들이 어릴 때 곁에서 돌봐주지 못했다. 예전 독도등대에 근무할 땐 겨울이면 50~60일간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착하게 자라준 애들에게 고맙다. 보람이라면…. 독도등대에서 일본 순시선을 볼 때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억지 부려도 우리 영해를 쉽게 침범하지는 못한다. 대한민국의 동쪽 끝을 지키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독도등대에서 근무한 세월이 만만찮을 것 같다.△8년이다. 울릉도에선 4년쯤 있었다. 독도와 울릉도 근무를 합치면 12년가량 된다. 독도 근무를 꽤 오래 한 셈인데, 그건 독도와 나의 궁합이 잘 맞아서가 아닐까.(웃음)-독도등대에선 고독을 느끼지 않는가? 독도에 대한 애증이 있을 텐데.△처음 갔을 땐 낯설고 답답했다. 하루 종일 볼 거라곤 바다밖에 없으니까. 들리는 건 갈매기 소리뿐이고. 눈을 떠도 바다, 심지어는 감아도 바다가 보였을 정도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진과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고 이후론 답답함이 많은 부분 사라졌다. 독도 관련 사진을 모아 크고 작은 전시회를 30여 차례 열었고, 지난해엔 시집도 한 권 출간했다.-독도에 상주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가.△서도엔 독도관리사무소 직원 2명과 독도 주민 김신열 씨와 김씨의 사위가 산다. 동도의 경우엔 독도경비대와 항로표지관리원 등 30명 조금 넘는 인원이 생활하고 있다.-항로표지관리원으로 일하면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2000년대 초반 독도 관련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녀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고 둘의 유골을 독도에 뿌렸다. 이후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의 그림자를 본 독도경비대원들이 적지 않았다. 갑자기 삽살개가 짖어대던 날, 나도 그들의 그림자를 봤다.(웃음)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태하등대의 아름다움이다. 사진작가들 상당수가 한국 최고의 촬영 장소로 꼽는 게 태하등대 주변이다. 특히 일출과 일몰 때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경이 근사하다.-‘나도 등대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하려고 한다면 택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고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도 이 일을 시작하면서 애국심이 커졌다. 그걸 소명감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바다를 떠돌며 살아왔다. 후회는 없나? 만족스런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지.△가정적으론 곁을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지 못해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나쁜 삶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울릉도나 독도까지 10시간 넘게 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근무 여건도 좋아졌다. 누군가는 ‘당신이 등대를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웃음) 틀린 말이 아니다. 난 갇혀 있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니까.-마지막 질문이다. 항로표지관리원이란 세상에 어떤 도움을 주는 사람인가.△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내가 푸르른 바다 곁에서 치유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김현길 씨는 2001년 필름 카메라로 독도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누구에게 배우거나, 정식 교육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 번 가보기도 힘든 독도의 절경을 담아낸 김씨의 사진은 차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장비를 바꾼 뒤엔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독도의 모습을 더 많이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정부와 지자체는 영토 주권의 문제이기에 “독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독도를 주제로 한 사진전에 보다 많은 관람객이 찾아주기를 김씨는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이 절실하다.포항은 울릉도와 독도를 향해 가는 출발점이다. ‘독도 사진 상설전시관’이 생긴다면 시의 이미지와 위상을 동시에 높일 수 있지 않을까?사진과 더불어 글쓰기로 독도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고 있는 김현길 씨의 시 ‘독도 예찬’을 소개한다. 소박하고 소탈한 문장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흔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29

“인생길 내리막 고비서 영지버섯이 날 살렸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젊은 법학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낯선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는 법조인이 아닌 사업가가 됐다. 30~40대엔 탄탄한 중소기업을 이끌며 거칠 것 없는 삶을 살았다.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친구도 많았다.그러나 세상 모든 인간들에겐 부침(浮沈)이 있는 법. 쉰 살 무렵. 그는 사람과 돈을 한꺼번에 잃었다. 하강하는 롤러코스터처럼 사업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때 떠올린 것이 ‘고향’과 ‘귀농’이란 단어.칠곡군 기산면에서 엄지영지버섯을 운영하는 오순기(56) 대표는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법관을 꿈꾸던 20대 청년에서, 잘 나가던 건축·설비업자,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영지버섯과 함께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는 사람.지난 주말. 귀농을 통해 또 다른 성공을 이뤄낸 오순기 대표를 만나 그가 헤쳐 온 풍파와 세파에 관해 들었다. 아래 흥미로웠던 그 이야기들을 정리한다.-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64년 칠곡에서 태어났다. 현재 영지버섯 재배와 관련 제품 생산을 7년째 하고 있다. 영지버섯은 잘 키우는 것 이상으로 판로 개척과 유통망 확보 등이 중요하다. 영지버섯의 효능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최근의 트렌드를 잘 반영해내지 못해 다른 건강식품에 비해 조금 밀리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청년시절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고 들었다. 지금 모습과는 전혀 다른 꿈을 꾼 것인데.△내 또래들이 진학할 땐 남학생들이라면 대부분 법대나 상경대, 정치외교학과 등을 지망했다. 시골은 특히 그랬다. 법대에 가면 다양한 진로가 있으리라 보고 선택하게 됐다. 경북대 법대에서 공부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나도 3학년 때쯤 사법시험 준비를 했다. 한 3~4년 공부를 해보면서 깨달았다. 사법시험은 나와는 맞지 않았다. 난 하루에 14~15시간씩 집중해 공부만 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가 못 된다.(웃음)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 빨리 접었다.-그럼 이후엔 어떤 일을 한 것인가.△군대를 다녀온 후 졸업을 하고 친척 형님과 건축·설비업을 시작했다. 저온 창고와 관련 시설을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가 ‘콜드 체인 시스템’이 한국에 정착된 시기다. 요즘엔 백화점이나 마트의 식품을 대부분 냉장 보관한다. 당시는 그런 체계가 아직 없었다. 농협이 운영하는 연쇄점이 현대화되면서 우리 사업과 연결이 됐다. 귀농해 영지버섯 재배를 시작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했으니 제법 오래 했다.-사업은 잘 됐는지.△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무리하게 투자를 하다가 돈도 잃고 사람도 잃었다.-귀농을 결심한 이유나 계기는 뭔가.△진행하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2013년쯤 귀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이미 나이가 오십에 가까운 시점이라, 다시 뭔가를 시작할 것 같으면 먼 미래를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 만난 ‘효자’가 영지버섯이다.-귀농지로 칠곡을 선택한 이유와 초창기 어려웠던 점은.△칠곡이 고향이다. 아는 사람도 많고, 대도시와 가까워 입지도 괜찮았다. 문제는 귀농하던 때 금전적으로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사업 자금이 별로 없었다. 또 키울 작물의 선택이나 재배 노하우 등을 조언·교육받는 게 쉽지 않았다. 요즘 같은 체계적인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없던 시기였으니까.나이 든 사람보다는 청년들에게 귀농을 권하고 싶다.젊은 사람이 농촌과 조화롭게 매치된다면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농촌 창업 프로그램과 소상공인 창업 프로그램 등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도시보다 풍요로운 삶을 농촌에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처음부터 영지버섯을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귀농한 것인지.△버섯을 재배하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내가 사업을 했던 분야와 연관시켜 봐도 단순 원예나 전통 작물보다는 시설 재배의 경제적 전망과 미래가 밝을 듯했다. 그때부터 어떤 버섯을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며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표고버섯, 상황버섯, 영지버섯 등을 놓고 적합성과 합리성을 검토했다. 표고버섯은 제시간에 수확하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약점으로 느껴졌다. 또 다른 약용 버섯은 시설 관리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영지버섯을 선택한 건 수확 시기가 비교적 자유롭고, 관리 비용이 적절하며, 수익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영지는 실온 재배에 통상 3년 기준 4회 가량 수확이 가능하다. 결정한 이후엔 영지버섯 재배에 최적화된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했다.-영지버섯 재배만이 아니라 가공과 유통에도 뛰어들었는데.△영지버섯 농가는 전국에 70여 개쯤 된다. 전체 생산량은 20t 정도다. 비싼 버섯이다. 건조한 버섯의 경우 1kg에 5만~6만 원이다. 그럼에도 면역력 향상과 혈행 개선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판매는 잘 되는 편이다. 영지의 약효는 ‘동의보감’ 등의 의서에도 잘 나타나 있으니까. 특히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영지버섯을 매우 신뢰한다.영지버섯은 99%가 재배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자연산은 거의 없다. 중국산 영지는 생산량도 많고 가격도 싸지만,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시장에선 깨끗한 지하수를 이용해 키우기에 오염 가능성이 없는 한국 영지버섯을 최고로 쳐준다.-해외 진출까지는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가.△칠곡군에 중장년층을 위한 창업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그걸 통해 베트남 호치민에 가게 됐고, 거기서 한국식품 도매상을 크게 운영하는 분을 만나 베트남 진출을 도모할 수 있었다. 칠곡군의 도움이 적지 않았고, 개인적인 노력도 기울였다.홍삼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영지버섯도 베트남에서 유통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현지 반응은 아주 좋은 편이다.-서울 등 대도시에서 영지 가공제품이 잘 팔린다고 들었다.△영지버섯과 현미를 가공해 만든 ‘누룽다욧’이 인기다. 영지버섯이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을 떨어뜨려 다이어트에 효과를 보인다는 농촌진흥청 연구 결과를 접한 후 아이디어를 냈다. 영지와 곡물을 이용해 먹기 편하게 만든 제품이다. 출시한지 3년 됐는데 지금까지 4만~5만 상자 정도 판매했다.-요즘 법조인 친구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이젠 그 친구들이 날 부러워한다.(웃음) 우리 세대쯤이면 다들 퇴직을 앞둔 나이 아닌가. 그런데 난 앞으로도 할 일이 많고, 새롭게 시작할 사업 아이템도 무궁무진하다. 내가 귀농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다.-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할 게 있다면.△나이 든 사람보다는 청년들에게 귀농을 권하고 싶다. 젊은 사람이 농촌과 조화롭게 매치된다면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정부 지원 프로그램도 많은 부분 청년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농촌 창업 프로그램과 소상공인 창업 프로그램 등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도시보다 풍요로운 삶을 농촌에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현재 개발 중인 영지버섯 가공품이 있는지.△영지버섯과 꿀의 혼합물을 동결 건조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꿀 자체만으로는 수출하기가 쉽지 않다. 관련 규제도 많다. 하지만 영지와 결합시켜 분말 형태로 만든다면 포장도 쉽고, 무게도 가볍게 할 수 있다. 수출 역시 용이해진다. 더불어 영지버섯만이 아닌 다른 약용 식품과도 결합이 가능하다. 분말식품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도 소비자에게 저항감이 별로 없다. ‘영지·꿀가루’는 상품화 과정을 거쳐 곧 시장에 선보일 계획이다.더불어 영지버섯과 토종닭을 함께 이용한 삼계탕도 내놓을 예정이다. 인삼이나 녹두, 능이버섯이 아닌 영지가 들어간 삼계탕은 아직 보편화가 덜 됐다. 이에 착안한 것이다. 국내 판매와 ‘농가 맛집’으로의 납품, 나아가 베트남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으로의 수출도 추진하고 싶다. 영지버섯 가격은 한국보다 베트남이 2배 이상 비싸다. 그만큼 한국산 영지를 높이 평가한다. 그곳 상류층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당신이 세우고 있는 장기적 계획은 무엇인가.△지금은 ‘6차 산업(1·2·3차 산업을 복합해 부가가치를 극대화한 산업) 시대’다. 이제 농촌도 용·복합산업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 단순히 농사짓는 것만으론 ‘농가소득 5천만 원 시대’에 안착하기 어렵다. 가공도 하고, 유통도 하고, 수출도 해야 한다. 그래야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도 단순한 금전 보조가 아닌 6차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엔 그렇게 바뀌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가속도가 붙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22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 아이들과 함께 배워갑니다”

4년간 8천만 달러(약 928억 원). 연봉으로 환산하면 232억 원. 7년간 1억3천만 달러(약 1천508억 원). 연봉으로 따지면 215억 원.어지간한 중소기업 한 해 순수익을 넘어서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야구선수 류현진과 추신수가 벌어들이는 돈. 사실 처음부터 돈만 보고 야구를 시작하는 선수는 없다. ‘내 아들을 억만장자로 만들어야지’라는 결심으로 자식에게 운동을 시키는 부모 역시 없거나 극히 드물다. 두 선수의 오늘은 어릴 때부터 흘린 고통스런 피땀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대체 어떤 매력이 학생들을 야구로 끌어들이는 걸까? 궁금했다. 2020년 현재 포항시엔 초등학교 야구팀이 하나밖에 없다. 남구 양학천로에 자리한 대해초등학교(교장 박근호)가 바로 그곳. 고교 때까지 육상선수로 활약한 박 교장의 적극적 관심과 후원, 지난해 말 부임한 야구부 정기문 감독의 가르침 아래 ‘또 다른 류현진과 추신수’로 커가고 있는 어린 학생들. 야구라는 스포츠에 어떤 매혹의 포인트가 숨겨진 것인지 알고 싶었다.바람이 찼던 지난주 목요일(9일) 대해초등학교를 찾았다. 야구부 아이들은 추운 날씨에도 훈련에 열심이었다. 박근호 교장의 안내로 정기문 감독을 만나 야구부 운영의 보람과 어려움, 야구인으로서의 꿈과 바람, 지역사회에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루 들었다. 아래 그날 오간 대화를 가감 없이 옮긴다.-나이와 출신지, 경력 등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83년생이다. 초·중·고교 모두 대구에서 졸업했다. 스무 살 때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대구 내당초등학교에서 2~3년 있다가 수창초등학교로 옮겼다. 거기서 10년 가까이 감독을 하다가 야구부가 학교 사정으로 해체돼 포항으로 오게 됐다. 돌아보니 청춘의 대부분을 학생들과 운동하며 보냈다.-대해초등학교를 새로운 출발지로 선택한 이유는 뭔가.△수창초등학교 야구부가 해체되면서 대구상고 코치를 제의받았다. 그런데 오래 전 잠시 코치를 한 대해초등학교에 대한 애정이 컸다. 야구계 선배의 “힘든 상황이지만 네가 와서 좀 도와 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여러 문제로 머리가 아파 쉬려고 했으나, 내가 필요한 곳이 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대구상고 출신이다. 모교의 코치직 제의를 거절하고 포항으로 오게 된 미안함도 있다. 그러니 포항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자 한다. 게다가 대해초등학교 야구부는 전통 있는 좋은 팀이기도 하고.-포항에서의 생활은 어떤가.△만족한다. 하지만 선수를 구해 팀을 구성하는 건 너무 어렵다. 발로 뛰고, 선후배와 학부모님들의 도움으로 하나둘씩 학생들을 모으고 있다. 교장 선생님이 야구부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3년간 경상북도와 포항교육청을 설득해 올해는 적지 않은 예산을 확보했고, 운동장에 인조 잔디를 깔 수 있게 됐다.-포항 전체를 통틀어 초등학교 야구부가 1개라고 들었다. 이처럼 줄어들게 된 이유는 뭔가.△포항에는 65개 초등학교가 있다. 그런데 야구부가 있는 학교는 대해초교가 유일하다. 인구가 줄어든 것 등의 문제도 있지만, 학교가 운동부 운영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도 있다. 운동부 관리에 문제가 생기면 신문이나 TV에 비판적으로 보도가 되고, 학교 운영자로선 이런 게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으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단언컨대 우리 학교는 그런 문제가 없다.(웃음)-포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야구부 숫자는.△중학교는 포항중학교와 포항제철중학교 2군데다. 고등학교는 포항제철고 야구부가 있다. 경북 전체를 보자면 초등학교 야구부가 우리 학교를 포함해 3곳이다. 경주와 구미에 각각 한 팀씩 운영되고 있다. 예전엔 문경에도 초등학교 야구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다른 지역에서도 학교 야구팀을 창단하려고 애는 쓰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학생들이 야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무언가.△아직 나이가 많지 않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서 송구스럽지만,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재미있는 동시에 힘들 때도 있고, 웃는 시간이 있다면 울어야 할 순간도 적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야구에 인생이 담겼다.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면서, 나도 그들에게 인생을 배우고 있다. 내 아들에게도 야구를 권하고 싶다. 단체 생활과 꾸준한 체력 훈련을 통해 협동심과 희생정신을 기를 수 있고, 팀을 위한 자기희생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으니까. 모든 운동에 있어 팀이란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다. 선수들 개개인이 한 덩어리로 뭉쳐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동료애를 몸으로 느낄 수 있기에 야구는 작은 세계다. 요즘 아이들이 이기적이라고 하는데, 야구는 그런 이기심을 넘어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올해 대해초교 선수 9명이 졸업한다. 선수가 더 필요할 것 같은데.△지인들, 도와주는 부모님들, 야구계 선후배들을 접촉해 어렵게 부원들을 모으고 있다. 도움 주신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야구에 관심 있는 아이들의 부모님에게 연락하고, 그분들을 만나고, 설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아이들은 생활환경이 바뀌고 정든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기에 전학을 두려워하는데, 막상 우리 학교로 옮겨오면 씩씩하고 즐겁게 생활한다. 나를 포함한 선생님들 모두가 권위의식을 버리고 그런 따뜻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당신도 한때는 지도자가 아닌 학생이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야구 스승’은 누구인가.△대구상고 다닐 때 코치였던 이윤효 선생님이다. 키는 작지만 스케일이 크고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학생들을 혼내는 분이 아닌데 아직도 감독님 앞에 서면 떨린다. 존경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내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부상으로 야구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절망했을 때 지도자의 길로 안내한 분이기도 하기에 잊을 수 없다. 이 감독님은 야구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성실과 긍정의 태도를 가르쳤다.-‘아이에게 야구와 축구 등을 시키려면 많은 돈이 든다’는 선입견이 학부형들 사이에 있다.△음…. 이런 질문을 드려 보고 싶다. 공부나 미술·음악을 시키기 위해 학원을 보내려면 한 달에 얼마나 들까. 듣기로 초등학생의 경우도 50만~60만 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울이 아닌 지방 초등학교 야구부의 경우 그 정도로 보면 된다. 상급학교 진학을 하면 더 들겠지만, 어린 시절 아이의 꿈을 위해 투자하기에 아주 부담스런 비용은 아니지 않을까?-최근 각종 언론에 학교 스포츠에 관한 비리가 적지 않게 보도됐다. 어떤 생각이 드는지.△안타깝고 답답하다. 나를 포함한 학교 스포츠 지도자들이 자기가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하고, 가르치고자 했을 때의 초심을 잊지 않는 게 그러한 비리를 없애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류현진이나 추신수 등은 많은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모든 야구선수가 그렇지는 못하다. 그들은 전체 야구선수의 0.01%나 될까? 돈 외에 어떤 매력이 야구에 있는 건가.△그라운드에 섰을 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백수천 야구팬들의 환호성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과 고통스러웠던 훈련의 시간은 그때 모두 보상된다. 그런 뿌듯한 감정은 돈으로 계산될 수 없다. 사실 대부분의 야구선수들은 돈보다는 팬들의 작은 선물, 따스한 격려에 더 큰 보람과 명예로움을 느낀다.-올해 당신의 계획은 뭔가.△33년의 전통을 가진 대해초등학교 야구부의 명맥을 탄탄하게 이어가고 싶다. 지난해 말 감독으로 이 학교에 왔다. 곧 울산과 김해 등지에서도 야구부 학생들이 전학을 올 것이다. 그들과 기존의 아이들을 잘 융화시켜가겠다. 그게 학교가 원하는 내 역할이기도 하고. 야구계 선후배들이 포항의 초등학교로 간다고 하니 걱정을 해줬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 내게는 작지만 버릴 수 없는 꿈이 있다. 아직 젊으니까 노력하면 이곳 포항 대해초등학교가 꿈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교장 선생님, 학부모님들과 함께 야구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기본기를 가르치는 동시에, 그들이 예의 바른 청소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학교 체육 활성화를 통해 아이들의 정신과 육체가 고르게 성장할 수 있으려면 지방자치단체와 교육 관련 단체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뜻있는 기업들도 커가는 아이들의 미래와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을 후원한다는 차원에서 우호적인 시선으로 지켜봐줬으면 좋겠다. 포항시는 사회인 야구가 활성화된 지역이다. 그분들이 포항에 하나 남은 초등학교 야구부에서 미래를 위해 땀 흘리는 어린 후배들에게 보다 많은 애정을 가져줬으면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15

“돈이란, 의미있는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작은 역사’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가장 유효한 방식이 인터뷰. 하여 누군가를 만나 그의 내밀하고 세세한 사연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그걸 문장으로 옮긴다는 건 힘겹지만 즐거운 작업이다. 2020년 본지는 경상북도 각처에서 ‘작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러한 인터뷰의 축적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역사를 넘어 경북의 역사를 직관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라 믿는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질책을 기대한다.   청송 심씨(靑松 沈氏) 심처대의 집안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9대를 이어간 ‘만석꾼’이었다. 단순히 만석꾼이라 하면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전통 도량형에 따르면 쌀 만 석은 1천440t이다. 이 정도 양의 벼농사를 지으려면 최소 800000평의 땅이 필요하다. 서울 여의도 면적 3분의1에 해당하는 무시무시한 넓이.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만석꾼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을 통틀어 40명이 되지 않았다. 상위 0.000001%의 부자인 셈이다. 이제 대충이나마 감이 오실지 모르겠다.예전에 청송과 안동을 비롯한 영남 북부에선 이런 말이 떠돌았다.“날아가는 새라면 모를까, 청송에서 남북 100리를 가면서 심부자댁 땅을 밟지 않을 방법은 없다.”세상엔 고약한 부자도 적지 않다. 집에 10kg이 넘는 금괴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 여러 개, 수억 원의 현금을 숨기고 살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 위장이혼을 하고, 가주(家主)의 무덤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경영권을 두고 재벌 남매와 모자가 다투는 경우를 신문 지상이나 TV 화면을 통해 보는 게 요즘 세태다.◇청송에서 살던 어떤 ‘양심적 부자’ 이야기그렇다면 청송 심부자 집안 사람들은 어땠을까? 아래 문헌을 통해 드러난 몇몇 기록을 잠시 소개한다.고종 31년(1894)을 전후해 나라에선 “이제부터 은화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칙령을 내린다.만석꾼이었던 심호택이 짊어져야 할 납세의 의무는 엄청났고 또한 무거웠다.그러나 꼼수를 쓰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가졌던 논과 밭을 상당 부분 팔아 은화를 마련했다. 의성에서 청송으로 은화를 운반하는 행렬이 족히 3~4k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내야 할 세금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었다.‘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경상도도 마찬가지. 이때 청송 일대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눈을 피해 알게 모르게 가장 많은 군자금을 의병에게 전달한 게 심호택이었다는 걸 부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심호택은 신상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을 한국인이 갚자는 국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심호택의 아들과 손자였던 상원과 운섭은 1945년 해방 이후 자신이 소유한 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지식인의 최고 가치는 앙가주망(engagement)이고, 부자들의 최종 지향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돼야 하지 않을까?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에 보여준 청송 심씨 일가의 행위는 앙가주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동시에 실천한 희귀한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석꾼 집안의 11대 주손(胄孫)을 만나다진눈깨비가 가늘게 흩날리던 지난 6일 오후. 심호택의 호를 따 지은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松韶古宅)에서 심호택의 증손자이자 심운섭의 외아들인 재오(65)씨를 만났다.만석꾼 집안의 마지막 시절을 지켜보며 성장한 그는 속된 말로 하면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다.딸만 내리 넷을 낳았던 아버지가 쉰 살을 넘겨 본 아들. 집안의 사랑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심운섭은 자식에게 엄격했다. 아들의 잘못 앞에서는 회초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말수가 적고 엄했던 아버지는 심재오 씨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세상을 떴다. 적지 않은 땅과 건물, 현금과 송소고택의 보물급 골동품이 스무 살이 채 안 된 재오 씨 앞으로 남겨졌다.거칠 것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받는 월급은 아내 용돈으로 내주고, 자신은 물려받은 돈을 헐어 사람들에게 인심을 썼다.친척과 친구들이 찾아와 “나 너무 힘들고 어렵다. 좀 도와줘”라고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못했다. 세상의 어두움과 어려움을 보지 못하고 귀하게 자란 만석꾼의 자손. 하지만 부자의 삶이라고 부침(浮沈)과 굴곡이 없을까.심재오 씨가 서른아홉 살이던 때. 친구의 대출 보증과 기울어버린 사업 탓에 130여 필지 100만 평이 넘는 땅과 서울 대치동 아파트, 귀한 골동품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100억 원대의 자산이 닥쳐온 풍파로 인해 허공에서 흩어졌다.그렇게 생의 낭떠러지에 몰렸는데도 곁을 지켜준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스물넷에 재오 씨 집으로 온 아내는 100세 시할머니를 2년, 칠순의 시어머니를 20년간 모시고 살았다.그런데 이 말을 전하면서도 심재오 씨는 담담했다. 조부와 부친이 그랬다더니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건 청송 심씨의 가풍(家風)인 것인가? 조금은 세속적이지만 이렇게 물었다.“그렇게 힘든 시절도 있었군요…. 속되지만 여쭐게요. 지금도 부자이십니까?”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간명한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왔다.“마음이 부자지요.”이 말을 들려주는 심재오 씨의 얼굴은 회갑을 훌쩍 넘긴 나이답지 않게 너무나 순수하고 맑았다. 자신의 귀염둥이 여섯 살 손자를 자랑할 때처럼.◇“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면…”심재오 씨와의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을 넘겨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 핵심만을 아래 옮겨본다.-증조부 심호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부친과 조부는 원체 말씀이 없는 분들이었다. 그랬기에 증조부에 관한 세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자랐다. 자화자찬을 경계하는 어른들이기도 했다. 의병 봉기 때 군자금을 지원했다는 것과 국채보상운동 청송·영양 지부장이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관련 자료와 집안 어르신들의 전언을 통해 알게 됐다.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운 건 ‘항상 행동을 조심해 남에게 욕을 듣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인간살이와 세상살이의 기본이었다.”-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부 부자들의 일탈을 어떻게 보는지.△“부자가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악의적인 방식으로 세금을 피해가고, 도덕과 윤리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아무리 돈이 넘쳐나도 철학이 부재한다면 그 돈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자식들을 키우면서는 어떤 말을 들려줬는지 궁금하다.△“우리 집안 가훈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소하게 살며, 선현들의 책 속에서 진리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지키기엔 너무 힘들지 않겠나?(웃음) 그래서 나는 보다 현실적이고 쉽게 이런 말을 딸과 아들에게 하곤 했다. ‘남들 보기에 부끄럽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만석꾼의 자손에게 묻는 질문이다.(웃음) 돈은 뭔가?△“내가 철학자도 아닌데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글쎄… 돈이 뭘까? 도구가 아닐까싶다.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이 꿈을 펼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의미 있고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 허세와 과시의 수단은 결코 아니라는 것.”21세기. 돈은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선 혹은,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초등학생조차 앞뒤 맥락 없이 “장래 희망이 부자”라고 말하는 시대.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기가 힘든 현실이다.존경받을 만한 부자를 선조로 둔 심재오 씨의 ‘돈에 관한 생각’을 들으며 기자 역시 상념이 늘었다. 99칸 송소고택 기와를 때리는 비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홍성식기자

202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