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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전국에서 재봉틀을 가장 오랫동안 돌린 사람

1953년 포항 육거리서 문 연 ‘코주부사’ 마크 ·명찰 제작 가게, 새학기땐 북새통 포항 육거리 시립중앙아트홀 옆에 코주부사라는 아담한 가게가 있다. 상호가 독특해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게 되는 곳이다. 이 가게는 명찰과 마크, 휘장 등을 만드는 마크사로 1953년에 개업했으니 원도심의 터줏대감이다. 학생들이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니던 시절, 새 학년이 시작될 때면 코주부사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명찰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 체육복과 교련복에 학교 마크를 붙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 학교 학생만 몰려도 북새통을 이룰 텐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니 그 풍경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개점휴업 상태다. 학생 명찰은 사라져버렸고 마크사의 일감도 대부분 컴퓨터로 대체되면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주부사를 지켜온 박영준 대표는 이제 고령(85세)이어서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들어졌다. 박영준 대표는 1940년 포항 신흥동에서 태어났다. 포항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강이 안 좋아 2년 동안 쉬었다가 동지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 무렵 중앙동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뒤편에 인쇄소가 있었고 그 옆에 코주부사가 있었다. 박영준의 친구가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박영준이 친구를 만나러 인쇄소에 갔다가 우연히 당시 김대정 코주부사 대표를 만났다. 손재주 좋고 똑똑했던 박영준 대표 중학생 시절 창업주 김대정 대표 만나 재봉틀 배우며 1978년 가게 이어받아 체육복·태권도복 등 다양한 품목 소화 중학생 때 처음 재봉틀 잡아 김대정 대표는 착하고 똑똑해 보이는 박영준에게 재봉틀을 다뤄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박영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처지였던 박영준은 재봉틀 다루는 일이 괜찮아 보였다. 곧이어 김 대표는 박영준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재봉틀 다루는 기술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슬하에 자녀가 없던 김 대표는 박영준을 양자처럼 여기며 일을 전수했다. 발로 밟는 재봉틀을 다룰 때는 손가락을 다치기가 예사였고 힘이 들었지만 새로운 일을 배우는 재미도 있었다. 박영준은 일을 배우며 자신에게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크사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려면 한문과 영어, 일본어도 웬만큼 알아야 하는데 박영준은 이를 빨리 습득했다. 일제 주키(JUKI) 자동 재봉틀이 들어오면서 일이 조금 쉬워졌다. 박영준 대표는 중학생 때 쓰던 주키 재봉틀을 7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다. 동지중학교를 졸업한 박영준은 동지상고와 포항수산전문대학 야간부를 다녔다. 중학교부터 전문대학까지 8년을 주경야독한 것이다. 동지상고 야간부 1년 선배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초창기 코주부사는 명찰, 마크, 휘장은 물론 체육복, 작업복, 태권도복 등 다양한 품목을 다뤘다. 박 대표는 손님들한테 “가게 이름이 왜 코주부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상호는 김대정 대표가 만들었다. 주고객인 어린 학생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당시 인기 절정의 만화였던 「코주부 삼국지」의 주인공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코주부사는 원도심의 하나뿐인 마크사였기에 일감이 몰려들었고 한창 바쁠 때는 2~3일 철야 근무를 했다. 당시는 체육복이나 작업복을 양복처럼 맞춰 입었기에 학교나 공장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1970년대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호황을 맞았다. 한때는 열 명이 넘는 직원을 두기도 했는데 일감을 소화하지 못할 때는 대구의 기술자를 부르거나 큰 공장에 주문을 넣었다. 다른 한편으로 포항에서 처음으로 등산복과 등산장비를 취급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78년에 코주부사를 물려받아 오지에서 불러도 군말 없이 달려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박영준 대표가 당시를 회상했다. “상옥, 하옥은 시내에서 먼 곳이잖아요. 그쪽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릴 때면 교사용 체육복 치수를 재러 와달라고 해요. 지금도 그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과거에는 어땠겠어요. 그 멀고 험한 길을 안 갈 수가 없었지요. 그보다 더 먼 분교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어요. 체육복이 겨우 다섯 벌 정도 필요하다고 해도 달려갔습니다. 그런 곳에 다녀오면 하루가 다 갔어요.” 김대정 대표는 1978년 코주부사를 박영준 대표에게 물려주었다. 가게를 넘겨받은 박 대표는 더 부지런히 일했다. 박 대표의 부인이 일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그때는 돈 쓸 시간도 없었어요. 돈이 들어오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집 안 장롱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곤 했지요. 대신동 해동아파트에서 살다가 해도동 동아타운으로 이사 갈 때 장롱을 옮기는데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툭 튀어나왔어요. 무언가 싶어 봉지를 뜯어보니 지폐 뭉치가 들어 있어 깜짝 놀랐지요. 곰곰이 생각하니 지폐를 넣어둔 비닐봉지 중에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더군요.” 컴퓨터 기술 변화 속 쇠락한 수작업 친구들의 사랑방 ⋯ 가게만 덩그러니 재봉틀과 함께한 70년, 추억 속으로 “몸만 괜찮다면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 지금도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 1970년대까지는 어느 분야에서든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접받았다.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많은 기술자가 사라지고 말았다. 재봉틀 기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하던 자수(刺繡)도 컴퓨터가 대신했다. 작업복이나 체육복을 만드는 기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흐름 속에 코주부사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다. 코주부사는 박 대표 친구들의 사랑방이었다. 원도심 한복판에 있기에 친구들이 오며 가며 들르기에 좋았다. 친구들이 칠순, 팔순을 넘기며 “누가 먼저 저세상에 갈 것 같냐”고 얘기를 꺼내면 “아무래도 영준이가 먼저 가지 않겠냐”고들 했다. 박 대표가 어릴 때부터 건강이 안 좋은 탓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친구들은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나고 이제는 박 대표만 남았다. “포항이 좋았던 시절을 다 지켜봤지요. 육거리에 남은 노포는 코주부사와 길 건너 로타리냉면밖에 없군요. 전국에서 재봉틀을 저처럼 오래 돌린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도 몸만 아프지 않다면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요.” 박 대표는 필자의 이름을 묻더니 재봉틀을 잡았다. 재봉틀 굉음이 울리면서 파란색 명찰에 이름이 새겨졌다. 50여 년 전, 초등학생인 필자의 명찰을 새기던 박 대표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2-03

포항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네 곳만 남아

어느 일요일 오후 1시쯤 길성관에 들렀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인데 테이블 여섯 개 중 빈 테이블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길성관은 포항 원도심의 하나뿐인 중화요리점인 데다 SNS에 맛집으로 소개되면서 장사가 잘되는 편이다. 포항 손님이 대부분이지만 주말에는 외지에서도 많이 온다. 필자가 자리를 잡은 후에도 손님이 계속 들어오며 “짜장면 됩니까”라고 물었다. 카운터를 보는 분이 “짜장면은 다 떨어졌습니다”라고 답하자 손님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사가 안 돼 빈 점포가 수두룩한 원도심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지금 길성관은 강봉기 전 대표의 동생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강봉곤 현 대표가 주방, 아들이 주방 보조, 부인이 서빙과 카운터를 맡고 있다. 길성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짜장면과 짬뽕이다. 짜장면은 6000원, 짬뽕은 7000원으로 요즘 고물가를 고려하면 ‘착한 가격’이다. 짜장면을 만드는 방법이 화교 1세대와는 달라졌다고 한다. 과거에는 돼지기름을 프라이팬에 두른 다음 돼지비계와 양파, 무말랭이, 늙은 호박 등을 넣고 볶았는데, 지금은 콩기름 식용유를 프라이팬에 두른 후 돼지고기 살코기와 양파, 생강, 마늘 등을 넣고 볶는다. 달걀지단에 버섯·양파 등 볶은 채소 넣고 말아서 튀긴 ‘겉바속촉’ 대표메뉴 짜춘결 솜씨 뛰어나 ‘생활의 달인’에 소개될 정도 강봉곤 대표 중국문화대학교서 비법 전수 길성관의 대표 메뉴 짜춘결 중화요리는 불맛이라고 한다. 짜장면도 재료를 고온에서 적당한 시간 볶아서 향을 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가정에서 짜장면을 만들기 힘든 것은 강한 불에서 재료를 볶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짬뽕도 강한 불로 가열해야 특유의 매콤한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고온에서 고춧가루를 볶아 향을 낸 다음 채소와 해물을 볶고 육수를 섞는다. 이때 채소와 해물을 볶는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 육수는 닭고기와 다시마, 돼지 뼈를 오랜 시간 끓여서 만든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정통 짬뽕의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수돗물을 끓여서 조미료로 간을 맞추면 짬뽕 흉내만 내는 것이다. 과거에 연탄불로 요리할 때는 주방장이 불을 다루기 힘들어 고생을 많이 했다. 가스불로 바뀐 뒤에야 주방장이 원하는 대로 불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면을 뽑는 방식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수타식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기계로 뽑아낸다. 드물게 수타식 짜장면을 만드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에서는 주방에 에어컨을 설치해야 한다.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해서 땀과 열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길성관의 대표 메뉴는 짜춘결이다. 짜춘결은 달걀지단에 버섯, 양파 등 볶은 채소를 넣고 말아서 튀긴 요리로 껍질은 바삭하고 고소하며 속은 부드럽다. 강봉곤 대표는 SBS의 <생활의 달인>에 소개될 정도로 이 별미를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강 대표가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중국문화대학교 음식조리학과에 다닐 때 짜춘결 비법을 전수받은 것이다. 길성관은 과거에 신선한 닭요리를 내놓기 위해 닭을 키우기도 했다. 깐풍기 같은 닭요리 주문이 들어오면 곧바로 닭을 잡아서 요리했으니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길성관은 지금도 매일 죽도시장에 가서 신선한 채소와 해물을 구입해 좋은 요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예전엔 신선한 닭요리 위해 직접 키우기도 지금도 매일 죽도시장서 채소·해물 공수 중화요리 배우려고 문 두드렸던 젊은이들 철가방부터 시작 훗날 독립해 요리점 운영 중화요리점의 문을 두드렸던 젊은이들 길성관은 과거에 손님이 많고 종업원도 여럿 있을 때는 코스 요리와 출장 요리를 했다. 지금은 손님이 줄어 종업원을 채용할 형편이 안 돼 코스와 출장 요리를 접었고 메뉴도 간소해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종업원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일 좀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중화요리점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급여를 얼마 받고 싶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사장이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받았다. 세끼를 해결하며 중화요리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가출한 청소년이 중화요리점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숙식을 해결하고 일을 배우며 내일을 도모해보자는 각오로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중화요리점을 제 발로 찾아온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철가방 배달부터 시작해 주방 보조를 거치며 차근차근 중화요리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훗날 독립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화교가 운영하는 곳에서 배워서 독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1970년대 포항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서른 곳 정도였고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열 곳도 안 되었다. 지금은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네 곳(길성관, 부산각, 동순관, 동해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고 있다. “중화요리점도 변해야 살아 남을 수 있어 신세대 맞는 새로운 메뉴 개발하려 애써" 중화요리점도 변해야 살아남아 길성관에는 중국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중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관우상, 여러 아이가 노는 장면을 그린 백자도(百子圖)가 눈길을 끈다.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는 서빙 로봇을 바라보던 강봉기 전 대표가 말을 꺼냈다. “중화요리점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옛날 메뉴만 고집하면 손님들이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둘 떨어져 나가겠지요. 그래서 신세대에 맞는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짜장면, 짬뽕, 탕수육만 익숙한 사람에게 신세대에 맞는 새로운 중화요리가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화교 3세대의 몫이 아닐까 싶다. 중앙상가에 길성관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노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시민제과(1949년 개업), 시정당(1953년 개업한 금은방), 코주부사(1953년 개업한 마크사)가 아직 간판을 달고 있을 뿐이다. 이 중에서 중앙상가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은 강봉기 전 대표뿐이다. 음식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중국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중화요리 짜장면. 오랜 세월 숱하게 삼킨 그 검은 면 속에 우리의 빛바랜 추억이 스며 있다. 그 특별한 맛을 간직한 중화요리점이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란다. 〈끝〉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30

포항제철 덕분에 전성기 열리지만 포항을 떠나는 화교들

길성관 - 부산각·중흥관, 일식집 승리식당은 그들이 즐겨 찾는 맛집 연말엔 예약 않으면 자리가 없어 ⋯ ‘쇼’ 마친 인기스타들도 애용해 부동산 소유 제한 등 한국 정부 차별 정책 지역 떠나가는 원인으로 1967년 10월 3일 포항제철 기공식이 열릴 즈음 포항제철과 관련된 기업의 많은 직원이 포항에 몰려왔다. 하지만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소와 식당은 태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포항을 대표하는 중화요리점인 길성관, 부산각, 중흥관 그리고 일식집 승리식당은 그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었다. 미쓰비시, 이토추 같은 일본 기업의 포항 파견직원들도 이 식당들의 단골손님이었다. 연말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붐볐다. 포항제철이 기공되면서 길성관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길성관 가까이에 시민극장이 있었다. 당시 시민극장에서는 쇼도 열렸는데, 남진, 나훈아, 문주란 같은 인기 스타들이 오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시민극장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인기 스타들도 가까운 길성관을 애용했다. 시민극장과 포항극장에서는 길성관에 주문을 자주 했다. 당시 극장에서는 명절 때 한꺼번에 결제하는 것이 관행이어서 길성관은 극장의 주문이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어떤 날에는 재료가 소진되었다는 핑계를 대고 주문을 받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또 하나 다른 이유가 재미있다. 극장에 배달을 보낸 배달원이 영화를 보느라고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배달이 밀린 시간에 배달원이 한가하게 영화나 보고 있는 장면을 생각하면 길성관 대표는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등으로 떠나는 화교 장사가 잘되니 돈을 많이 벌었을 테고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화교의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차별 정책 때문에 심한 속앓이를 했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부동산 소유 제한이었다. 한국 정부는 1961년 외국인토지법을 공포하고, 공공의 목적에 필요한 구역의 토지에 대해 외국인의 토지 취득을 금지 혹은 제약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한국 정부는 1962년 외국인토지법시행령을 공포하고 외국인의 토지 취득을 금지하거나 제한의 구역을 제시했다. (중략) 한국 정부는 1968년 7월 외국인토지법의 개정안을 공포하고, 거주를 목적으로 한 200평 이하의 토지와 상업용 50평 이하의 토지는 사용 신고만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해당 평수를 초과할 경우는 엄격히 규제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유가 불가능했다. - 이정희, 『화교가 없는 나라』, 동아시아, 2018, 205∼206쪽. 부동산 소유 제한은 한국 화교에게 치명적이었다. 돈을 벌어도 투자할 길이 없었고, 이는 생존기반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IMF 외환금융위기 직후인 1998년에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이 해제되어 화교도 일정 규모의 상점과 토지의 소유가 가능해졌다. 거주 자격과 출입국에 관한 규제도 화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국 정부는 1949년 11월 17일 「외국인의 입국출국과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외국인의 출입국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 법률은 화교에게 1년마다 거주 허가의 연장을 받도록 규정했지만, 1963년의 출입국관리법은 3년으로 연장했다. 화교는 출국할 때에도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새로운 출입국관리법의 규정에 따라 신고의 의무는 사라진 대신 재입국 허가를 받도록 했다. (중략) 화교에 대한 거주 허가 기간은 1995년에 5년으로 연장되고, 2002년에 영주권이 부여되면서 신고의 의무는 사라졌다. - 이정희, 앞의 책, 206쪽. 한국 정부는 화교의 경제적 영향력을 차단하는 등의 이유로 이런 정책을 시행했다. 이 상황을 견디다 못한 한국 화교는 대만을 비롯해 미국, 호주, 동남아시아로 나가야 했다.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고 하지만 한국 화교처럼 거주국에 뿌리를 내린 화교가 드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화교에 대한 편견과 법률적 제약으로 인해 한국 화교의 숫자가 2만 명 아래로 내려가 한국에서 화교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중화권의 대표적 영자지인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3일 온라인 톱으로 보도했다. - 「전 세계에서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곳은 한국뿐」, 『동아일보』, 2019년 4월 3일. 귀화를 거부하는 화교 2세대, 귀화하는 3세대 강성모의 장남 강봉기 전 길성관 대표(이하 강 대표)는 포항 화교의 역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부친이 포항 화교 1세대이고 본인은 2세대에 해당한다. 강 대표는 부산에 있는 화교학교를 다녔다. 화교학교는 서울과 부산, 대구에 있는데 강 대표는 이모가 있는 부산을 택했다. 부산 서면의 화교소학교와 초량의 화교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강 대표는 대만으로 건너가 대학교에 다녔고 군복무를 마쳤다.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왠지 대만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가친척 없는 대만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1985년에 포항으로 돌아왔다. 동생과 함께 일할 때는 동생이 요리를 하고 강 대표는 경영을 했다. 그렇다고 강 대표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부친 밑에서 요리를 배웠고 대만에 가서도 식당에서 요리하며 돈을 벌었다. 동생이 자리를 비울 때면 강 대표가 주방을 맡기도 했다. 강 대표와 같은 화교 2세대가 어느덧 70대에 이르렀다. 귀화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화교 2세대는 귀화에 소극적이다. 한국 정부의 차별 정책으로 인한 거부감 탓이다. 특히 화교의 부동산 소유를 사실상 막아버린 것은 가장 치명적이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차명으로 해도의 땅을 샀어요. 그런데 혹시라도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모르쇠로 잡아떼면 어쩌나 하고 밤잠을 못 자는 겁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다행히 그 땅을 한 기업에서 매수했고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돈을 돌려준 덕분에 걱정을 내려놓았지요. 그 후로 아버지는 차명 거래를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포항 화교도 다른 도시의 화교들처럼 상당수가 해외로 나갔고 포항에는 25가구 정도 남아 있다. “화교 2세대는 포항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 포항이 고향이지요. 해외에 나간 분들도 한 번씩 포항에 와서 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눕니다. 화교 3세대는 아무래도 2세대와는 정서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3세대는 한국으로 귀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 대표의 외동딸도, 강 대표 동생의 아들딸도 한국으로 귀화했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27

이산가족이 된 화교가 운영해온 74년 역사의 중화요리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에 먹는 짜장면은 몇 그릇이나 될까.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적게는 150만 그릇에서 많게는 700만 그릇 정도 된다. 이 통계를 보면, 사람들의 입맛이 변했다 해도 짜장면은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외식이라 할 수 있다. 지역마다 대표적인 중화요리점이 있기 마련인데 포항을 대표하는 곳은 어디일까. 길성관(吉星館)과 부산각(富山閣)을 꼽을 수 있다. 두 곳은 화교인 진가현(1915년생)과 강성모(1922년생)가 1951년 중앙상가 롯데시네마 맞은편에 개업한 동순관(同順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쟁이 한창일 때 화교가 어떻게 포항에서 중화요리점을 개업하게 되었을까. 짜장면 면발처럼 이어지는 기나긴 이야기 타래를 펼쳐본다. 동서지간인 진가현과 강성모는 우리나라와 가까운 지역인 중국 산둥(山東)반도에서 살았다. 진가현은 잡화상에서 서기를 했고 강성모는 장사를 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치열한 내전을 벌이던 1948년에 두 사람은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 온다. 내전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인천행 여객선에 몸을 실은 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두 사람처럼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아편전쟁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될 때까지 전쟁과 경제적 궁핍을 피해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는데 그 수가 1000만 명에 달했다(정성호, 『화교』, 살림, 2003, 6쪽 참조). 두 사람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화루(中華樓)에서 곁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1918년에 문을 연 중화루는 1970년대 후반까지 국내 3대 중화요리점으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중국 산둥 출신 화교 진가현·강성모씨 1948년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와 인천 중화루에서 요리 일을 처음 배워 서울 아서원 등서 전문 요리사로 성장 1951년 포항 중앙상가에 동순관 개업 지역 최초 전통 중화요리점으로 화제 1967년 동순관을 매각하고 각자 독립 강성모 ‘길성관’·진가현 ‘부산각’ 운영 세대를 이어 현재까지 전통 맛 이어가 인천, 서울, 대구를 거쳐 포항에 오다 1949년 10월 1일 두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두 사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두 사람은 일단 한국에서 삶의 뿌리를 내려야 했다. 중화루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두 사람은 서울 명동의 아서원(雅敍苑)으로 옮겨 정식 직원이 되었다. 지금의 롯데호텔 부지에 있던 아서원은 1907년에 문을 연 국내 대표 중화요리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두 사람은 또다시 전쟁의 화마를 피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전거를 구해 남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화요리점 직원이라는 신분이 피난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식당을 찾아 요리를 해주고 숙식을 제공받으며 계속 남쪽으로 향했다. 대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많은 화교를 만났다. 당시 화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국에 정착하는 사람들과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은 부산에 많이 모였다. 1950년에 부산 화교 자치구가 자치정부로 인정받았고, 영주동, 서면, 황령산 일대에 화교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진가현과 강성모는 포항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인이 있을 리 없는 포항으로 온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평양에서 살다가 서울을 거쳐 1948년 가을 포항에 정착한 문인 한흑구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감안할 때 항구도시 포항의 개방적인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일본, 만주 등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섞여 살기가 힘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 속의 ‘뉴욕’과 같았다고 당시 포항 분위기를 살폈다. - 『영남일보』, 1948년 1월. 1951년 롯데시네마 맞은편에 동순관 개업 두 사람이 포항에 도착하니 항구동에 덕성관(德成館)이라는 중화요리점이 있었다. 덕성관 주인은 포항에 정착한 화교의 원조인 셈인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두 사람은 1951년 지금 롯데시네마 맞은편에 동순관을 개업했다.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번듯한 중화요리점이었다. 서울에 있는 화교의 투자를 받아 요리사 두 명, 홀 두 명으로 시작했다. 포항에서 중화요리를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물 때여서 동순관의 개업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동순관의 단골손님으로 초대 영일군수이자 제2대 국회의원(영일군 갑구)인 최원수, 문인 한흑구가 있다. 최원수 의원은 중국에서 장기간 독립운동을 한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과 가까운 사이여서 이 총리와 중화요리를 자주 먹었고 그 덕분에 중화요리에 해박했다. 최원수 의원은 집에서 큰손님을 대접할 때 동순관 요리사를 불렀다. 한흑구도 명절에 동순관의 비싼 중국 술과 과자를 선물로 받을 정도로 ‘우수 고객’이었다. 해병대 장성과 장교들도 동순관에 자주 들렀고, 1960년대에 김종필도 해병대에 온 길에 동순관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한국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독신으로 계속 살아가기는 힘들었던 탓이다. 결혼 후 강성모의 장모 명의로 중앙상가 ABC마트 자리에 주택이 딸린 200평 규모의 건물을 매입해 동순관을 그곳으로 옮겼다. 규모가 훨씬 커졌고 종업원도 여덟 명으로 늘어났다. 길성관, 부산각, 중흥관의 역사 1967년 동순관에 큰 변화가 있었다. 동순관을 상호(商號)와 함께 왕금옥이라는 화교에게 매각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왕금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순관을 임대했으며, 지금 대도동 종합운동장 맞은편에 있는 동순관이 그 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강성모는 중앙상가 수협 건너편의 건물을 매입해 길성관을 개업했다. 길성관은 처음에 단층 건물이었는데 1972년에 2층 건물로 신축했다. 잠시 일을 내려놓았던 진가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화요리점을 운영하게 된다. 진가현의 일가 사람이 옛 아카데미극장 앞에 있던 여관을 사들여 부산각이라는 중화요리점을 개업했는데 장사가 신통치 않자 진가현이 인수한 것이다. 길성관은 강성모의 장남 강봉기(68)가 화성반점(華晟飯店)으로 상호를 바꿔서 운영하다가 동생 강봉곤(66)이 길성관으로 이름을 다시 바꿔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강봉곤의 아들 강태우(32)가 아버지 밑에서 요리 수업을 받고 있으니 3대째 이어지는 셈이다. 부산각은 진가현의 아들이 상도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부산각 간판에 ‘50년’이라 붙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1953년 중앙상가에 중흥관(中興館)이 문을 연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화교 왕문오가 주인이었는데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중흥관은 왕문오의 아들 왕수동이 이어받았고 후일 종합터미널 옆에 태원성(太苑城)으로 상호를 바꿔 2000년 초까지 운영했다. 정리하자면,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포항에서 계속 운영해온 중화요리점은 길성관과 부산각만 남아 있고, 그 역사는 올해로 74년이 된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23

지역 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 신성상회 집안사람들

신앙심이 깊었던 신성상회 김석이 대표는 일본에서 포항으로 돌아온 후 송내교회에 출석했다. 송내교회는 1925년 지금 포항제철소가 있는 곳에 세워졌는데 일본의 박해로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폐교회 되었지만 굳건하게 역경을 이겨냈다.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교회는 송내를 떠나야 했다. 집 마당에 세운 작은 교회라 이주금도 얼마 되지 않았다. 송내와 동촌의 교인들이 힘을 모아 1968년 10월 해도동 등외과의원 자리에 40평 규모의 교회를 신축했다. 이듬해에는 교회 명칭을 포항동부교회로 바꾸었다. 신앙심 깊었던 김석이 창업자 일본서 돌아온 후 송내교회에 출석 ‘포항동부교회’로 신축 명칭 변경 올해 100주년 맞기까지 큰 역할 직장생활 하던 넷째 김용문 대표 1978년 귀향 신성상회 이어받아 ‘인내가 곧 장사’ 신조… 품질·‘착한 가격’으로 소비자가 다시 찾게 김 대표 “시장 살리려면 상인들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어린이들 위한 공간 조성 등 전통시장 지속가능 대책 마련 필요 동부교회가 1984년 새로운 교회당 봉헌과 임직예배를 드릴 때 김석이 장로는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1951년 장로로 장립되어 30여 년 동안 묵묵히 교회를 뒷바라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성장을 거듭한 동부교회는 42년의 해도동 시대를 마감하고 2011년 이동에 새 교회당을 건립했다. 올해는 동부교회가 세워진 지 100주년 되는 뜻깊은 해다. 동부교회는 차분하면서 내실 있는 기념행사를 치르며 더 깊은 영성 공동체로 나아가리라는 뜻을 다졌다. 김석이의 집안사람들은 동부교회를 포함해 지역의 교회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용문 대표, 1978년에 신성상회 이어받아 김석이는 4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자녀 여덟 명 모두 대학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현재 자녀들은 대부분 은퇴했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적잖게 이바지했다. 특히 장남 김박문은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대송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고, 성균관대를 졸업한 그는 사업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등을 맡으며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포항제일교회 장로로서 제일교회가 포항을 대표하는 교회로 자리를 잡는 데에도 기여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넷째 아들 김용문 대표는 1978년에 귀향해 신성상회를 이어받았다. 김 대표는 조용한 사람이다.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다른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하나의 사건이 김 대표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가게를 물려받아 한창 사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송도에서 횟집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추석 선물로 단골손님들에게 선물한다며 30만 원가량의 물건을 주문했다. 대목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의 대량 구매는 횡재에 가까웠다. 하지만 횟집 주인이 낸 돈은 5만 원에 불과했다. 난색을 표하자 횟집 주인은 자기 가게로 나머지 돈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김 대표는 횟집으로 돈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횟집 주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10만 원만 주면서 다시 받으러 오라고 했다. 화가 났다. 김 대표는 친구들을 데리고 그 횟집에 가서 회를 먹었다. 계산서에는 25만 원이 적혀 있었다. 당시로서는 큰 금액이었다. 김 대표는 15만 원을 내고 나머지는 자신의 가게로 받으러 오라고 했다. 횟집 주인이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했다. 김 대표는 횟집 주인에게 당신은 외상이 되고 나는 왜 안 되느냐고 되물었다. 시비가 붙었다. 멱살을 잡으며 덤벼드는 주인을 헤드록으로 제압한 뒤 바닥에 패대기쳤다. 난리가 났다. 횟집 종업원이 주인을 병원으로 데려가 진단서를 끊고 관할 파출소에 신고해버렸다. 눈치를 보니 상습적인 사람이었다. 품질 좋은 제품을 ‘착한 가격’에 팔아 파출소에서 경찰이 왔다. 선친께 면목이 없었다.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선친은 남은 횟값과 치료비 등 모든 걸 지불할 테니 우선 병원에 가서 치료부터 하라며 합의를 부탁했다. 문제는 횟집 주인이 3주 진단이 났는데도 한 달이 지나도록 병원에서 퇴원하지 않고 더 많은 합의금과 위자료를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김 대표는 횟집 주인에게 사과하고 20만 원을 더 주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 일에 대해 선친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스스로 배우고 느끼라는 배려였다. 당장의 금전적인 손해도 막심했다. 돌이켜보면 문제를 만든 건 김 대표 자신이었다. 그 후로 김 대표는 화를 내지 않는다. 아침에 장사를 시작해 물건을 사간 사람이 오후에 찾아와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환불을 요구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응한다. 인내가 없으면 장사는 쉽지 않다. 그것을 떠나 인내가 곧 장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신성상회가 마냥 좋아서 물려받은 게 아니다. 속옷 가게, 그것도 80퍼센트 이상 여성 속옷을 취급하는 가게를 운영하기엔 남자로서 부담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 전문성을 확보해 여직원을 두고 판매한다면 별문제 없을 터였다. 그가 사업적으로 착안한 것은 확실한 경쟁력 확보였다. 판매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여직원과 배우자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충분한 거래처와 물건을 확보하는 일이다. 전통시장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품질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가진다. 김 대표는 그런 의구심을 편견이라고 말한다. 지금 전통시장은 이른바 메이커라는 곳에서 대부분의 물건을 공급받는다. 전문점과 전통시장에서 받는 물건의 품질은 거의 동일하거나 전통시장이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공급처가 수요에 따라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두고 공급하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품질이 높아질 수 있고 불량품의 비율도 적다는 것이다. 또한 김 대표는 ‘착한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하려고 애쓴다. 소비자는 품질이 좋은 제품을 ‘착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니 한번 신성상회를 찾으면 또다시 찾게 마련이다. 시장 상인들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대부분의 전통시장이 그렇듯 죽도시장도 예전 같지 않다. 전통시장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 대표가 10여 년 전 포항 시내 롯데마트 입점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며 고군분투한 것은 시장 상인의 의무감에 앞서 전통시장의 생존을 고민하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동안 죽도시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포항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지붕이 아케이드식으로 덮이고 가로 정비도 되었다. 하지만 주차장, 화장실 등 개선해야 할 점이 남아 있다. 김 대표는 “시장을 살리려면 상인들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면서 “한 예로 어린이들이 포항과 죽도시장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을 시장 중간중간에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장 상인들도 유튜브와 SNS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억은 각인되어도 박제(剝製)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자세는 태도에서 달라지게 되어 있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는가?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교훈은 널려 있는데 챙기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너무 빨리 그리고 멀리 가버린 존재가 되어버렸다. 환원이 아니라 재생마저 꿈꿀 수가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면, 그것은 생업 현장에서의 자기 위치의 확인뿐만 아니라 잘 살았다고, 성실했다고, 부끄럽지 않다고, 불후(不朽)는 아니더라도 뒷날 사람들의 삶을 위한 교훈 한마디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신성상회 김용문 대표는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선한 사람의 길을 택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역사의 현장인 죽도시장을 뒤로 한다. 〈끝〉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19

만물상으로 시작해 80여 년간 죽도시장과 애환을 함께해

죽도시장이 어디 만만한 시장인가. 대한민국 10대 시장으로 손꼽히는 곳이자 시장의 의미를 뛰어넘는 광장이 아닌가. 죽도시장은 경북 동해안과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이 모여드는 큰 시장이자 유통의 요충지다. 지금도 그 명성은 여전하지만 다양한 유통구조의 발달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죽도시장에 대한 포항 사람들의 애정과 자부심은 차고 넘친다. 죽도시장 없는 포항은 상상하기 어렵다. 포스코가 힘줄이라면 죽도시장은 실핏줄이다. 김용문 대표의 선친인 김석이 창업자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 배워 귀국 후 죽도시장서 만물상으로 시작 “어려울 때 도움 되는 사람이 돼야 ”강조 한국전쟁 땐‘아모레’에 물건값 돌려줘 그 인연으로 1965년 대리점 제의 받아 사훈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변수 난무하는 장터서 평생 지키며 살아 생전 25년간 펼친 장학사업도 연장선 죽도시장은 면적이 14만 8760㎡이고, 점포 수는 2500여 개에 달한다. 좌판 몇 개로 시작한 초창기를 생각한다면 문자 그대로상전벽해다. 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은 소비자가 된다. 단순히 일회용 소비자가 아니라 지속적인 구매자의 자격을 스스로 획득한다. 시장 상인들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깨끗해야 하며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장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신성상회 김용문(72) 대표는 말한다. 만물상으로 시작한 신성상회는 속옷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다. 77년의 역사가 고이 간직된 가게로 죽도시장의 역사와 오롯이 그 궤를 같이한다. 창업자 김석이, 일본에서 세탁소 견습생으로 출발 신성상회는 김용문 대표의 선친이 처음 시작했다. 선친의 존함은 김석이(1911∼1996)다. 그는 포항에서 태어나 대송국민학교를 졸었했으며, 일찍 뜻을 세워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장사를 배웠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앞날을 도모하려면 장사를 배우는 것이 최선의 방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부족한 언어 실력은 노력으로 때우면서 오기와 끈기 그리고 성실로 버텨냈다. 나가사키 우동을 꽤나 끓여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나가사키 우동은 구룡포의 모리국수와 같은 메뉴로 그날그날 얻은 남루한 재료를 몽땅 집어넣고 끓인 우동이다. 영양보다는 오로지 한 끼를 때우기 위한 최소한의 간편식이다. 그냥 잡탕국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선친이 일본에서 처음 접한 직업은 세탁소 견습생이었다. 보이지 않는 멸시와 견제, 열악한 생활환경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일에 전념했다. 고국을 등지고 이역만리를 선택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0년을 그렇게 일했다. 그 시절을 지켜본 일본인 세탁소 주인이 강력하게 추천해 본격적으로 세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경영을 시작한 것이다. 타고난 성실과 추진력으로 일에 매진한 결과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선친은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모나지 않게 어울려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선친은 몸소 보여주었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그때의 경험이 이어져 옷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고 선친은 회상하곤 했다. 그리고 겉옷을 완성하려면 속옷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고 한다. 기본을 익히고 멋과 예절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드러나는 인상은 그 모든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김 대표는 그렇게 미루어 짐작한다. 선친은 사진에서 보더라도 옷을 입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정갈함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움은 그 감각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좌판 몇 개가 내항(內港)의 늪지대인 뻘밭에 들어서면서 죽도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사람이 다니기 힘든 뻘밭이다 보니 규모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 부는 황량한 들판에서 시작된 1950년대를 지나 1969년에 죽도시장번영회가 설립되면서 죽도시장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선친은 죽도시장에서 좌판을 폈다. 좌판에는 비닐 포장지, 빚, 지압기, 옷, 바가지, ‘동동구루무’ 등이 널려 있었다. 이처럼 신성상회는 거래가 가능한 거의 모든 것을 취급하는 만물상으로 시작했다. 신성상회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아모레화장품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많은 물건 중에 화장품과 인연이 된 일이 있었다. 지금은 굴지의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이 ABC화장품이었다. 선친은 당시에 ABC화장품의 제품을 팔면서 아모레퍼시픽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다른 사람들은 피난 가기 바쁠 때 선친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큰 회사가 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라도 받은 물건값을 돌려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과 장사에 대한 예의다.” 그 길로 선친은 외상 잔금을 모두 챙겨 서울에 다녀왔다.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그 후 1965년쯤 아모레퍼시픽이의 경영이 정상화되면서 전국적으로 대리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런데 어느 날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회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한 직원이 선친을 찾아왔다. 그 직원의 말에 따르면, 서 회장이 포항에 가서 신성상회 김석이 대표를 만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 직원은 김석이 대표가 아모레화장품 대리점을 할 생각이 있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서 회장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아모레화장품 대리점을 지난 4월에 작고한 큰형님(김박문, 1938년생)이 맡아 경영했다고 한다. 큰형님은 그 대리점 외에 청하 조사리에서 친구와 식품업을 동업했는데 갑자기 부도나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고, 그 여파로 화장품 대리점을 접었다. 선친은 신성상회 안 정면에 이런 사훈을 걸어두었다. “정직하자, 친절하자. 부지런하자!”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보면 웃을 수 있는 고색창연한 사훈일 수 있겠지만 그 내용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변수가 난무하는 장터의 장사꾼으로서는 더더욱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선친은 그 사훈에서 벗어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다. 선친이 살아생전 25년 정도 이어간 장학사업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배수강 포항시장 재직(1967. 11. 15.∼1969. 8. 8.) 때 시장 건물을 불하받았다. 여담이지만, 당시 죽도시장에서 있었던 불하는 대검에서 ‘부정 불하’로 판단해 배수강 시장과 포항시 공무원, 은행 지점장 등 7명을 기소함으로써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죽도시장 부지 3909평을 감정가보다 낮게 시장번영회에 불하해 국고 손실을 끼친 혐의를 적용한 것이다. 여하튼 당시에 번듯한 가게 이름을 내걸고 제법 규모를 갖춘 매장을 내어 한자리에서 77년을 보낸 것이 신성상회의 역사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16

어머니의 정신과 해풍국수의 전통 지키고 싶어

이순화 여사는 노동을 감당하지 못할 나이에 이르면서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업장에 앉아 국수를 판매한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하지 않아 다방면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홍보대사’ 역할은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크게 되지는 않지만 필생의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인 아들이 고마웠다. 돈이 우선인가, 소멸되어가는 소중한 가치가 사장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가장 늦게 시작한 국수시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밥벌이의 지겨움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들 역시 20여 년 잘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가업을 이어받은 것이기에 정말 고마웠다. 20여 년 직장 정리하고 가업 잇는 아들 10년 간 어머니 감각 익히며 공부 매진 어머니가 지켜온 가치 훼손 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품질에만 정성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조언 따라 상표등록·최신 장비 갖추며 준비 ‘착착’ “해풍국수 먹고프면 구룡포로 오시라” 하동대 대표, 지역경제 상생 소명 전해 전통시장에서 상인연합회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순화 여사는 구룡포 전통시장의 현대화는 물론 좌판 상인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노후에 이르러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이런 노력에 아들은 그림자처럼 도움이 되고 있다. 그 많은 국수공장이 사라졌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는 이유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을까요? 젊었을 적에는 자식들을 위한 희생으로, 나중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으로 일을 그만두지 않잖아요. 그 삶이 고귀해 이 사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어머니에게 국수는 남편과 같고 친구와 같고 없는 애인과 같다는 말씀에 도저히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건강하게 천천히 하고 싶은 대로 하시길 바랄 뿐이지요.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선물해준 어머니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구룡포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게 하고 싶어 하동대 대표는 홍보의 중요함을 절감하고 있다. 알아야 면면장(免面牆)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사회정보 시스템을 활용한 홍보는 일부러 거부하고 있다. 대량생산 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2억 원가량을 투자해 최신식 장비를 설치하고 최상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언제까지 이 공장을 가동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발전 속도가 느린 사양산업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멈추지 말아야 할 의무가 그에게 있다. 해풍국수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구룡포를 방문해 해풍국수를 끓이는 점포에서 맛을 보면 좋을 테고, 그렇게 사람을 불러 모으면 구룡포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해풍국수는 직접 방문해 구입할 수 있는데 생산량을 적정하게 조절하다 보니 전화 주문을 하면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고객들은 그런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 대표는 배짱이 아니라 해풍국수를 먹고 싶으면 구룡포로 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룡포의 발전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려 그는 말했다. “인문학은 발걸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컴퓨터로 검색하고 모바일로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경지라는 말로 해석되었습니다. 와서 보고 느끼고 감동하고, 건전한 소비를 통해 지역 경제에 기여한다면, 음식만이 아니라 지역의 정서를 고스란히 느끼고, 그다음 자신의 페이지에 그걸 기록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이 확산된다면 지방 소멸이라는 말이 떠돌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여행이 관광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룡포는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오세요, 그리고 느껴 보세요. 구룡포는 국수만이 아니라 보고 느낄 것들이 정말 많으니까요. 구룡포 대게도 참 맛있는 음식입니다. 저렴한 생선회는 덤이고요. 구만리 청보리밭을 보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겁니다. 만월의 달밤에는 어쩌면 신비한 환각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10년 동안 어머니의 감각을 익혀 하 대표는 자신의 사업만 생각하지 않는다. 구룡포의 발전을 위해, 나아가서는 포항시민들과의 상생을 위해 작으나마 힘을 보태고자 한다. 물론 어머니가 우선이다. “이제 쉬셔도 되는 연세입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잠시도 일을 접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는 분입니다. 장터가 생활의 터전이기 때문이죠. 4남매 중 제가 장남입니다. 위로 두 누님은 내외가 다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요. 남동생도 있지만, 어머니의 인생을 완성하려면 제가 가업을 잇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의 후회도 없어요. 다만 더 잘하고 싶습니다.” 하동대 대표는 주어진 소임에 충실하고, 욕심은 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품질에만 신경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투자를 하고, 홍보를 강화하고, 대량생산은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경영을 하면 훨씬 사정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종 규제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싸우고 싶지 않다. 상표등록 등 다른 준비는 다 해놓았다. 대기업과 상표를 공유하며 매칭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지만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지켜온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구룡포의 바람과 햇살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때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고생되더라도 어머니의 정신을 지키고, 가업을 이어받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도 해풍국수의 전통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충분하다. 10년 동안 어머니의 감각을 익혔고, 그걸 기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부는 항상 진행형이다. 위기를 맞은 인생음식 구룡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줄었다.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길은 기본에 충실하는 것임을 그는 어머니에게 배운다. 국수가 잘 팔리는 날도 있고 파리만 날리는 날도 있다.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가만히 말씀해주셨다. 그 많던 국수공장이 다 사라져도, 가장 늦게 시작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 밥 먹고 산 일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런 생각을 하면 금세 겸손해진다, 저 간판을 보라, 우체국장이 만들어준 저 간판이 우리의 얼굴 아닌가. 저 간판의 변치 않는 쨍쨍함, 그 어떤 붓글씨 대가의 필체보다 낫고 비바람 맞고 견딘 저 나무의 결만 보아도 마른 눈물이 난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고 이 길을 선택해준 네가 더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혼잣말하듯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구룡포의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창망하다. 그 깊이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순화 여사의 마음 역시 그 깊이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 세대를 뛰어넘어 면면히 유지되는 극명한 이유다. 모든 잔치에 국수는 반드시 등장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이 인생 음식이 조금씩 소외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대량과 편리, 파격적인 저가로 밀어붙이는 음식들이 식탁을 위협한다. 그러나 라면과 빵, 인스턴트로 대체되는 음식으로 간단하게 우리 인생을 때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끝〉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12

국수를 건조하는 데에는 하늬바람이 최고

‘해풍국수’는 배합과 건조의 기술로 탄생한다. 원재료도 중요하다. 브랜드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최선의 제품을 엄선하여 쓴다. 소금도 그렇다. 물도 정제하여 쓴다. 하룻밤 묵힌 물을 쓴다. 재료를 함부로 선택하면 제품이 반항한다. 싼값을 고집하면 싼 음식이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뛰어넘어 손수하는 공정에서의 모든 노력이 국수를 완성하는 기본이 된다. 그중 바람의 영향이 크다. 밀가루를 반죽해 재래식 기계에서 면을 뽑기까지 반나절이 걸린다. 야외 건조장에서 바닷바람으로 반건조시켜 창고에 넣는다. 그렇게 숙성시키는 데 한나절 넘게 걸린다. 이를 다시 꺼내 햇살에 건조시킨다. 바람의 종류도 다양하다. 샛바람이 있다. 이는 동풍을 말한다. 하늬바람이 있다. 서풍이다. 마파람(동풍), 된바람(북풍)도 있다. 이 중에서 서풍인 하늬바람이 최고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연을 이기는 인간은 없다. 하룻밤 묵힌 정제된 물로 밀가루 반죽 바닷바람에 반건조, 창고서 한나절 숙성 자연과 정성으로 전 과정 세심하게 관리 남편 친구가 선물한 제일국수공장 간판 56년 된 간판 아래 ‘더불어 사는 삶’ 실천 본분에 충실… 전통적 국수의 맛 지켜와 2017년 구평리에 현대식 제2공장 건립 바다·솔숲 등 좋은 환경에서 제품 생산 ‘해풍국수’ 기본 바탕 품질 향상에 집중 밀가루 사기를 당하기도 국수공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경주에서 밀가루 공장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생산한 제품이 너무 많아 밀가루 500포대를 염가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국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밀가루가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500포대는 너무 많았다. 주위에 있는 일곱 군데 국수공장과 의논해 그 밀가루를 구입하기로 했다. 남편이 나섰다. 돈을 모아 경주 근화여고 뒤편의 다방에서 그 업자를 만나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고서였다. 돈을 지불하면서 차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밀가루가 있는 창고로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다리를 하나 건너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돈은 온데간데없고 맨몸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돈을 들고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이순화 여사는 애가 탔다. 그때 경주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사람을 데리러오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경찰서에 들러 신고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일로 큰 손해를 입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벌어가며 애걸복걸하면서 돈을 갚아야 했다. 한참 뒤에 다행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범인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날 상황을 지켜본 똑똑한 다방 레지가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경찰에 신고해 그 사람을 체포한 것이었다. 남편은 그 길로 경찰서로 쫓아가 범인에게 분노의 귀싸대기를 날렸다고 한다. 빼앗긴 돈 일부를 돌려받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본인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른 공장에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혁혁한 공을 세운 레지 아가씨에게도 사례금을 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오직 본분만 생각해 인터뷰 내내 ‘밀까리’라는 경상도식 발음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학교는 ‘가는’ 곳이고 핵교는 ‘댕기는’ 곳이라는 농담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다니는 곳’보다 ‘댕기는 곳’이 훨씬 정감 있고 몸에 맞는 낱말인 듯하다. ‘밀가루’든 ‘밀까리’든 본질에서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본질이 변함없으니 조금 잘나간다고 더 큰 이익을 추구하거나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이순화 여사는 바르게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 오직 본분만 생각한다. 제일국수공장에는 오래된 간판이 있다. 그 간판은 남편의 친구인 구룡포우체국장에게 개업 기념 선물로 받은 것이다. 정갈하고 산뜻한 필체의 간판은 56년째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 오랜 세월은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밀가루 사건 이후 절대 욕심을 내지 않았다. 팔리면 팔리는 대로,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국수를 끓여 식구들을 먹이고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만하면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작은 도움이라도 정성껏 나누며 살았다. 그래도 손해나는 사업은 아니라서 먹고살 만했다.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은 가게라도 있으니 괜찮지만 좌판을 하는 사람들의 형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도우며 산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순화 여사는 구룡포시장 상인연합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시장이 살아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라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희생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했다. 묵묵하다는 말이 있다. 침묵의 묵(黙), 고요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침묵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견디는 것은 수행자의 자세이기도 하지만 생활인의 삶에 더욱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구평리에 현대식 제2공장 건립 2022년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몰아닥쳤을 때 구룡포는 큰 피해를 입었다. 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다. 공장 뒷마당과 옥상에서 국수를 말리던 시절의 마지막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재래식 공정은 원래 조금은 원시적인 방법이다. 공장이 바다와 맞닿아 있어 바람이 거세거나 파도가 맹렬할 때는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국수를 몽땅 버려야 했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판자를 세우고 집에서 사용하고 남은 비료 포대를 모조리 거두어 덧대고 덧댔다. 그러나 파도의 힘은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바닷물에 젖어 못 쓰게 된 국수를 내다 버린 양이 얼마였던가. 그러나 구룡포의 바람은 맑고 투명했고 햇살은 차고 넘쳤다. 그런 환경이 정말 고마웠다. 구룡포의 도로가 개선되고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분진 등의 환경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제일국수공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일국수공장의 자연건조 방식에 위생적인 문제가 있다는 민원이 제기된 것이다. 낡은 시설도 미관상 좋지 않았다. 전통을 고집하며 고유의 방법으로 국수를 만든다는 자부심만으로 마냥 버틸 수는 없 없었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야 했다. 그것 또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었다. 국수 가게는 읍내에 그대로 두고 구룡포 구평리에 생산을 전담하는 제2공장을 2017년에 만들었다. 이 공장에는 현대식 설비를 갖추었다. 이순화 여사의 장남인 하동대(55) 대표가 제2공장 부지를 처음 방문해보니 바다가 눈앞에 있고 솔숲이 일렁거렸다. 마을보다 조금 높은 둔덕에 위치해 바람이 자유롭게 흘러다녔다. 주위에 건물이 없으니 햇살이 풍부했다. 더 나은 조건에서 더 좋은 국수를 생산할 여건이 마련되었다. 읍내의 좁은 장소에서 국수를 만드느라 물량 부족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더 품질 좋은 국수만 생산하면 되었다. 전성기의 판매량에 비하면 반토막도 안 되지만 이제는 품질에 집중할 수 있다. 하동대 대표가 행복한 이유다. 가업을 잇고 생업에 충실하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공장을 지키며 자유롭게 산책하는 삽살개 해풍이도 그 주인공의 일부다. 마당 가득 바람과 햇살이 차고 넘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09

궁핍했던 시대, 구룡포의 자연에 사람의 정성을 더한 국수

나는 몰랐다. 무지한 편견으로 살았다. 국수가 다 그런 줄 알았다. 멸치국물에다 데친 나물 몇 점, 그것은 미나리이거나 부추무침이거나 호박나물이거나 달걀지단 등등 재료들의 향긋함과 고소함. 마늘과 쪽파를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고명이면 최고인 줄 알았다. 정작 주인공인 국수의 존재는 무시했다. 무지도 이런 무지가 없었다. 앙꼬 없는 진빵을 먹고 고무줄 빠진 팬티를 입고 돌아다닌 꼴이었다. 1969년 문을 연 구룡포 제일국수공장의 창업자인 이순화(86) 여사의 가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작정 철규분식으로 향했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만 사용하는 가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쉬는 날이었다. 그 옆에 있는 삼광상회로 발을 돌려 국수를 시켰다. 자그만 양은냄비에 담긴 적당한 양의 국수가 앙증스럽다. 최소한의 부추와 양념이 올라앉아 있다. 먼저 국물을 들이킨다. 적당하게 차가운 향이 그윽하다. 스물아홉 구룡포로 시집 온 이순화 여사 생업 위해 국수공장 한 켠서 일하며 창업 전문가 2명 모셔 직접 배우며 경력 쌓아 ‘해풍국수’ 이름 건 이순화 표 국수 탄생 밀가루•소금•물로서만 만드는 수제국수 기술이 아닌 몸으로 익힌 ‘경험의 산물’ 소금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 보며 감각 키우고 새벽마다 바람부터 헤아려 기계 반죽•열풍기 건조땐 7~8시간 충분 온전한 수제 생산은 빨라도 이틀 넘겨야 날씨•바람 따라 사나흘까지 험난한 과정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면에 도전한다. 편견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혓바닥을 휘어 감는 면발의 부드러운 몸부림이 목젖까지 공격해온다. 너무 매끄러워 그냥 삼켜도 무난할 듯싶다. 쫄깃하다느니 탱탱하다는 진부한 표현은 그만두어야 한다. 제일국수공장의 국수는 그 둘을 합하고도 그윽함과 넉넉함이 넘친다는 표현을 포함해야 한다. 맑은 육수 외에는 별다른 간을 하지 않는다는 삼광상회 주인장의 말을 빌리면, 참으로 적당하게 국수에 소금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면과 육수의 절묘한 조합, 한판의 능란한 블루스를 본다. 필자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멸치국수」다. 대략 옮긴다. 웨이브가 농염하네/장작의 부추김이 은근하네/짓이겨 뭉개져도 이마에 남는 마늘 향기/희생과 흔적은 이런 것이라 일러주네/팔팔 끓는 뙤약볕 밀밭의 추억//너무 정직하게 참 착한 햇살과/결 고운 바람 차분한 뒤뜰의 풍경마저 담겨 있네//바다의 뒤통수가 보이네//마치 첫 입맞춤의 그 비릿함의 멸치국수. 이순화 여사는 스물아홉에 감포에서 구룡포로 시집왔다. 공군으로 근무하다 막 제대한 남편은 철부지였다. 식구도 많았다. 남편은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더 열심이었다. 당연히 가정사에는 소홀했다. 문득 남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친정에서는 곱게 자란 여식이었지만 시집온 이상, 뼈를 묻어야 할 가정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여사는 시장에 자리를 빌려 옹기 장사를 했다. 그때 많은 사람을 알 수 있었다.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 시장은 사람의 공간이다. 그때 구룡포시장에는 국수공장이 일곱 군데나 있었다. 옹기 장사로는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돈을 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수공장의 끄트머리에서 국수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국수를 만드는 방법도 몰랐다. 의욕은 앞섰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본이 부족했다. 그러나 사업 전망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질보다 양이라고, 고픈 배를 불리는 데 국수만 한 음식이 없었다. 구룡포답게 상품성이 없는 생선이나 지천으로 깔린 푸성귀를 넣고 끓이면 훌륭한 한 끼 저녁식사가 해결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배부르면 장땡이었다. 어부들도 먼 바다로 나가면 식사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국수였다. 밤샘 작업을 하고 새벽에 돌아온 어부들의 빈속을 채워주는 뜨끈한 식사이자 해장국으로 칼칼한 어탕만 한 것이 없었다. 맑은 소주와 붉은 어탕으로 내일을 구축하는 머나먼 삶의 설계에, 미약하나마 국수는 삶을 위한 음식이었다. 그것을 ‘모리국수’라 했다. 멸치국수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렇게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았다. 자타공인 전문가 두 분을 모시고 제품을 생산하면서 일을 배웠다. 2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국수를 생산했다. 이순화 표 국수는 밀가루와 소금과 물이 전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바람을 관찰한다. 날씨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상의 시작이다.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 걸려 감각은 경험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감각을 계발하고 유지하며 일상적으로 적용하려면 섬세해야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깨너머로 배우며 눈여겨본 노동에 성실이 더해지면서 이순화 표 국수는 ‘해풍국수’라는 이름으로 거듭 탄생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냥 국수라고 취급하면 그 차이를 모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든 국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비슷하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국수나 손으로 직접 생산하는 국수는 외형적으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의 혼이 깃든 제품은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효용성을 아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삶의 질을 고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감하는 능력은 사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기대 이상의 실용적이며 정신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문화의 힘은 누리는 것에 있다. 실용성만 따지면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다. 장삼이사의 수준에서 그냥 단순한 실용성에 머물며 만족하고 만다. 그렇게 살아도 크게 문제가 될 것도, 불편할 것도 없으며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옹호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게 되고 자리가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이순화 여사는 염도계의 존재를 모른다. 처음 일을 배울 때부터 전문가들에게 소금의 양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조금씩 물에 소금을 녹이면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감각을 키웠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면서 익힌 경험의 산물로 굳어졌다. 날씨에 따라 소금의 양이 달라진다. 추운 날씨에는 평소보다 조금 많게, 여름에는 적게 넣는다. 흐린 날씨에는 적게, 바람이 약하면 많이 넣는다. 자연건조를 고집하는 탓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기계로 반죽하고 열풍기로 건조하고 최신 기계로 절단하면 일고여덟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온전하게 수제로 생산하면 빨라도 이틀 이상이 걸린다.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 사나흘도 걸린다. 지금이야 기계로 반죽하지만 처음에는 여물통 같은 됫박에다 손수 밀가루를 치대야 했다. 그 험난한 과정을 비틀리고 굽은 손가락이 증명하고 있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05

파리 명문 요리학교에서 공부하며 시민제과의 미래를 구상

시민제과를 포항의 시그니처로서 전국적 명성을 획득한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진정하(45) 시민제과 3대 대표는 말한다.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명물을 만드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또한 거기에서 자부심을 창출하는 것, 이러한 것은 누구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일까? 진 대표는 포항시민의 참여와 성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이면에는 또 다른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 원도심의 쇠락을 걱정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시민제과의 소비자가 되어 원도심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도 진 대표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동해바다와 구룡포의 풍경을 바탕으로 죽도시장과 포스코의 야경 그리고 불빛축제 등의 행사가 시민제과로의 ‘빵지순례’로 어울어진다면 자연스러운 관광상품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파급효과가 입소문으로, SNS로 연결된다면 전국적인 브랜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포항 ‘시민제과’ 3대 대표 진정하 씨 미국의 안정된 삶 포기하고 제빵 도전 파리 명문 제과과정 수료 후 가업 계승 프랑스·일본 등 해외출장에도 많은 투자 직원 연수·세미나·품평회로 노하우 공유 시민 참여와 성원 바탕 지속적 발전 기대 포항 명물로 전국적 브랜드 만들기 ‘총력’ 프랑스, 일본 출장 다니며 식견 넓혀 빵집은 의외로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오븐 하나에도 수천만 원이 든다. 밀가루도 일본산을 수입해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춘다. 국내 밀가루도 사용하지만 각자의 제품에 적합한 맞춤형의 재료는 생산자가 직접 연구 개발하여 적용해야 한다. 이런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면 굳건한 의지와 확실한 목표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단기 매출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한 투자로 확보한 인프라는 서서히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진정하 대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소비자의 적극적인 소비를 유도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토대임을 그는 믿는다. 사람들의 입맛은 현란하고 변덕스럽기도 하다는 현실을 그는 직시하고 있다. 맛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이고 문화적인 취향까지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매장에 깔리는 음악에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기본이 완벽하면 응용은 무한대의 힘을 발휘한다고 그는 믿는다. 투자는 기술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매장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다. 진 대표는 틈나는 대로 출장을 떠난다. 일본의 각종 세미나, 품평회, 신제품 발표회 때는 거의 빠지지 않으려 한다.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 출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식견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제품 개발에 응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축적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이 동행하기도 한다. 최고의 투자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진 대표의 신념은 굳건하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연수를 제의하거나 각종 세미나에 여건이 허락하는 한 참여시키려 한다. 자체적인 품평회와 제품 개발회의도 수시로 열어 직원들의 중지를 모으려 한다. 오래 머물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것은 물론 외부에서도 많은 사람이 시민제과만의 경영 시스템과 제품 개발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업체로 만들고 싶다. 그들을 통해 시민제과의 가치를 전국에 알리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발전에 필요한 작은 밑돌이 될 수 있게 인식의 발판을 확장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젊은 기업인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것을 진 대표는 절감하고 있다. 파리의 명문 ‘에꼴 페랑디’에서 제과 과정을 수료 포항이 그리웠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길고 깊었다. 아버지의 생업을 저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아직도 젊은 패기가 남아 있어서 과감한 도전의 유혹도 느꼈다. 나의 삶을 살자고 생각했다. 돌아왔다. 텅 빈 건물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나의 뿌리가 지금 눈앞의 살아 있는 역사인데, 이것을 도무지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도전은 재미있는 일이지 억압이 아니다. 억압이라고 느낀다면 사업은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하 대표는 이른 나이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굴지의 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일한 샐러리맨이었다. 모자랄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럭저럭 살아도 부족함이 없을 삶이었다. 그러나 우연은 필연을 관통한다고 했던가. 그는 해운업 회사에서 원자재 운임 트레이드로 오랫동안 일했다. 그때 주로 맡은 업무가 밀을 비롯한 곡물의 대규모 거래였다. 그래서 그 한 부분인 밀 거래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제과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며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자못 흥미로웠다. 무엇이 되든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잘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이 어려운 일을 권하는 어른의 심중을 못 헤아릴 바는 아니었지만, 언감생심 막막하기만 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은퇴를 조금 앞당겨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과 가업을 전승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는 대대로 가업을 잇는 기업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도 진 대표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문제는 현실적인 적응 능력과 실질적인 기업 운영 능력이었다. 세상일은 용기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본인이 제과와 제빵의 전문 기술자가 아니었므로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돈 이상의 재산이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그때부터 알았다. 사람 없이 어떻게 사람의 일을 할 것인가. 평생의 친구는 도반(道伴)이라는 말을 그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하 대표는 당장 실천에 옮겼다. 2015년 프랑스 파리에 본원을 둔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서울분교에서 제빵 과정을 수료하고, 내친김에 1년 6개월이란 시간을 투자해 제빵의 본산인 프랑스로 날아갔다. 자처한 고통은 때로는 희열이 된다. 미래를 보장받을 수는 없지만, 인생의 방향은 스스로 설정할 수가 있다. 그는 파리의 명문 요리학교인 ‘에꼴 페랑디’에서 제과 과정을 수료한 후 제과 제빵의 기본기를 다지는 것은 물론 거기에 따른 디저트와 음료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수많은 책과 사진과 몇십 권의 노트가 그 시간의 고된 여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귀국해서도 전국의 유명한 제과점을 돌아다니며 견습생을 자처해 공부했다.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하고 그 끝은 성공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객 요구에 부응하려면 잠시도 멈출 수 없어 빵과 과자를 만드는 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요리나 제빵에 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고객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제과점의 삶은 전쟁의 연속이다.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고 깊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요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려면 잠시도 멈출 수가 없다. 쏟아지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흡수하는 고객들의 요구는 실로 다양하다. 그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지만 판로를 개척하고 끊임없는 연구 개발로 고객의 입맛을 이끌어간다는 자세는 필수적이다. 늘 깨어 있고 도전적이어야 한다. 이익이 적더라도 다양한 제품으로 이목을 끌어들이고 맛과 영양, 시각적 효과, 특화된 서비스, 밝고 쾌적한 매장 환경에도 신경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다만 필자는 아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 가난했던 때라 시민제과에는 잘 들르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지 편집을 맡아 사람들을 인터뷰하거나 문학회 간부들을 만날 때면 가끔씩 들러 고소한 빵과 우유를 음미하며 우쭐한 마음으로 배를 채운 기억이 있다. 그때의 냄새는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정말 아쉽고 미안한 것은, 내 첫사랑을 한 번도 시민제과에 데려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독하게 반성한다. 그러나 다시 오질 않을 날들을, 시민제과는 시민 개개인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그 넉넉한 가치를 오래 지켜줄 것이다. 그는 더 분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민제과는 시민의 것이므로. 〈끝〉 글 : 이우근(시인) 사진 : 김 훈(작가)

2025-11-02

크리스마스 때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를 팔기도

단팥죽과 찐빵은 군것질거리가 아니라 분에 넘치는 훌륭한 식사 대용의 음식이었다. 그것을 먹는다는 자체가 그 시절에는 황홀한 사치였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거기에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이었다. 단것이 그리운 시절이었다. 팥의 효능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액귀를 쫓는다는 주술적 의미를 넘어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재료였다. 창업주는 그런 점에 주목했던 듯하다. 2대 진상득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대한광업진흥공사라는 모두의 선망을 받는 직장이었다. 선친은 가업을 이어받기를 종용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하게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아버지의 굽은 어깨, 어머니의 새벽길을 나서는 연약한 실루엣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영원히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는 법, 언젠가 귀향해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자식의 입장임을 고려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결단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인생 2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동동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 그시절, 군것질거리아닌 황홀한 사치 대학 졸업후 번듯한 직장 잡았지만 좀 더 젊었을 때 부모님 모시기로 결단 2대 진상득 대표의 인생 2부 막 올라 1963년 지금의 자리에 터전 잡고 포항시 1호 제과점인 ‘시민제과’ 탄생 전국제과인들 모임 결성해 정기 모임 국내 유명한 빵집 물론 유럽도 방문 기술·실내장식·매장 시스템 등 연구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 팔리기도 1963년에 포항시 1호 제과점이 돼 막상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제과에 대해 아무런 정보와 기술이 없었다. 먼저 매장을 바꾸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해 따르기로 했다. 굴러온 돌 행세를 하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자신은 경영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제품 개발 회의에 참석할 때는 가급적 발언을 삼가고 의견을 청취했다. 두 베테랑의 도움이 컸다. 현재 두 사람 중 한 분은 은퇴했고, 다른 한 분은 고문으로 내부의 자잘한 일을 처리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기숙사가 있어서 직원들이 선친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고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업무에는 무척 엄격했지만 평소에는 한없이 너그러워서 직원들이 잘 따랐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일찍 직업전선에 나선 어린 직원들에게는 학업을 병행하게 했다. 1963년에 지금의 자리로 터전을 잡았다. 포항시 1호 식품접객업소로 등록했다. 그러니까 포항시의 1호 제과점이 된 것이다. 그때 ‘시민제과’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진상득 대표는 제과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터라 관련된 책을 모조리 섭렵했다. 매장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잘 운영되는 가게를 찾아다니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열심히 받아적고 사진을 찍었다. 직접 배우기도 하고 직원을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제과인들의 모임을 결성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 것이었다. 대전의 성심당이나 군산의 이성당, 서울의 김영모과자점, 광주의 궁전제과의 주인들이 그 모임의 멤버였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빵집의 오너들이다. 지금은 모두 은퇴해 자연인으로 살고 있지만 제과산업의 발전을 위한 진정성은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열정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다고 진상득 대표는 회고했다.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업계의 모든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난상토론을 했다. 그 모임은 제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진 대표에게 살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산업현장을 방문했고 관련된 박람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관했다. 멀리 유럽의 유명한 빵집들도 방문했다. 직접 보는 만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빵 기술뿐만 아니라 실내장식. 매장 구조. 주방 시스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차곡차곡 쌓이는 경험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많은 시민이 시민제과에서 행복을 누려 찹쌀떡은 참 좋은 상품이었다. 속이 보일 듯 말 듯 한 투명하고 쫀득하며 부드러운 앙금은 금세 전국적인 제품이 되었다. 높은 온도에서 갓 구워낸 단팥빵은 그 쫄깃함과 더불어 부드러운 앙금 맛으로 시민제과 최고의 제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같이 곁들이는 음료도 꾸준하게 개발했다. 우유의 시대를 지나 그 변형의 일종인 밀크셰이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각사각 씹히는 우유 알갱이와 혀에서 녹아나는 아이스크림은 최고의 디저트였다. 부단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당시만 해도 위생적인 문제로 포장지에 넣은 제품을 고객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포장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영업방식이었다. 진상득 대표는 그런 과거의 시간을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모든 제품을 출고되는 대로 판매대에 올려놓고 고객이 직접 집게로 선택하도록 영업방식을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획일화된 제품을 무의식적으로 판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감각과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제품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선택은 당신의 몫이요, 우리가 하는 최선의 노력을 당신이 결정하면 된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겸허히 수용하리라, 더 헌신하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고객들은 신선한 시도에 대해 호응해주었고, 그런 시도는 위생과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당돌하고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객들의 신뢰는 그 위험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하나하나의 제품을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넣어주는 작업과 투박하지만 은근한 멋을 풍기는 종이봉투는 금세 하나의 트랜드가 되었다. 고객들에게 최소한 나는 시민제과의 빵을 먹는다는 은근한 자부심과 맛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은연중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시민제과는 그렇게 포항을 대표하는 제과점으로 시민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수많은 가족이 시민제과의 빵과 음료로 행복을 누렸고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해 시민제과 건너편에 시민극장이 있었는데 시민제과에서 만든 양갱을 극장 휴게소에서 팔았다. 양갱 역시 팥의 연장선상의 제품이다. 양갱은 화과자의 일종으로, 다른 제품들과 더불어 나름의 윤택함과 잠시나마의 활력을 제공하는 지참물이었다. 팝콘의 원조랄까, 그 당시 시간을 단축해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시대는 급변한다.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했다. 각종 브랜드를 내건 제과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반 가게에서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빵들로 넘쳐났다. 삼립식품이 대표적이었다. 동네 빵집도 제법 늘어났다. 당시 시민제과는 크리스마스 때면 한 시간에 100개가 넘는 케이크가 팔려나갈 정도였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때는 경찰들이 시민제과 앞에서 교통정리를 할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형 브랜드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민제과 양옆에 있는 태극당과 신화당과의 경쟁에도 힘에 부치는 판인데, 시대의 도도한 흐름인 물량과 저가 공세에는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할 만큼 했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들었다. 일의 특성상 매장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속도가 생명인데, 주어진 시간 안에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시설 혹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한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진상득 대표 역시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쫓아가기에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잠시 시민제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9

광복 후 대흥동에서 찐빵과 단팥죽 파는 난전으로 시작

인생이란 빗속을 달리고 문고리를 잡는 것 그 이상이다. 서로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냄새를 기억하는 것 이상이다. 독일의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이별 없는 세대」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쏟아지는 비와 바람에 저항하고 비로소 도착한 목적지에서 문고리를 잡는 지난한 과정이 인생이라면, 그 과정에서 스치며 만난 많은 얼굴과 뇌리에 남아 있는 냄새는 우리의 과거를 현재로 형성시키는 중요한 장치임에 분명하다. 나는 냄새를 기억한다는 말에 주목한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아픈 기억이든 냄새에는 분명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불의 소인(消印)으로 남은 상처가 아니라 뇌의 깊은 곳에 스며든 특별한 냄새는 과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연결고리가 되어 아득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때 행복했다면 지금도 행복하다는 뜻이다. 상처는 어느덧 훈장이 되어 그 사람을 반짝이게 한다.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좋은 기억으로만 각인된다. 창업주 진석률 옹 일제강점기때 日 건너가 수없이 반복되는 차별에도 묵묵히 노력 우연한 기회에 고국에 왔을 때 광복 맞아 日서 일군 재산 없이 난전으로 다시 시작 찐빵과 단팥죽 팔며 1949년 ‘시민옥’ 개점 이후 ‘시민양과홀’, ‘시민제과’로 명맥 이어 6·25 피난 후 돌아왔을 땐 가게는 폐허로 난관 속 가게 열고 찹쌀떡으로 영역 넓혀 오늘날 시그니처 제품은 도전의 산물인셈 1949년 ‘시민옥’이라는 상호로 개점 ‘시민제과’는 이름에서부터 내공이 느껴진다. 외래어투성이의 빵집과 베이커리, 디저트 카페, 공장형 커피숍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자기완성형이면서 정체성을 잃지 않은 이름의 이 제과점은 내공만큼이나 저력을 자랑한다. ‘시민’을 이름으로 내걸 만큼 시민을 대표한다는 단단한 자존심으로 80년 가까운 세월을 더해 찬란해진 이름이다. 이런 제과점 하나쯤은 도시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민제과는 1949년에 처음 이름을 내밀었다. 창업주인 진석률 옹은 일제강점기 때 변변한 재산이 없어 일찌감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돈을 벌려고 했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는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생업을 유지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노력하면 그런대로 살 만했다고 한다. 배달과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에 몰두했다. 성실에는 이길 장사가 없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광복을 맞아 일본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일구어놓은 재산도 챙길 수가 없었다. 먹고살아야 했다. 진석률 옹은 대흥동 근처 금은방이던 신정당과 수양다방 부근에서 난전을 벌였다. 손재주가 있었던 터라 찐빵과 단팥죽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누구라도 달콤한 군것질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설탕은 중독이자 에너지였다.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하얀 찐빵과 고소하고 진한 향기가 나는 단팥죽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늘 배가 고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그만인 품목이라는 데 착안한 아이템이었다. 애초의 이름은 ‘시민옥’이었다. 방앗간을 운영했던 창업주의 경험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업종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일할 때 어깨너머로 배운 팥 제조 기술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로 시민옥은 ‘시민양과홀’로, 지금의 ‘시민제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한국전쟁 후 폐허에서 만든 찹쌀떡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지붕이 날아가 버려 폐허가 된 가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주위를 정리하고 다시 가게를 시작했다. 갖가지 난관에도 다시 빵을 만들고 단팥죽을 팔았다. 거기에 더해 찹쌀떡으로 영역을 넓혔다. 오늘날 시민제과의 시그니처 제품인 찹쌀떡은 그런 도전의 산물이었다. 앙금이 살포시 보이는 영롱한 빛깔의 찹쌀떡은 대표상품이 되었다. 입시철에는 밤새도록 일을 했다. 2대 진상득(70) 대표는 이렇게 회상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팥을 씻는 것은 내일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상품은 그 전날에 준비해야 한다. 무쇠솥이든 양은 재질의 큰 냄비이든 팥을 가득 넣어 찬찬히 끓이는 노동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디 당장 눈앞의 대가가 있으랴. 숙명과 운명의 쳇바퀴 같은 삶일지라도 지금의 생에 충실하고자 했다. 어머니의 모시 적삼에 밴 땀의 흔적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말없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좋은 음식을 만드는 일은 군것질에 불과하더라도 배부름과 더불어 문화적 감각과 정신적 포만감을 보충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실용과 실리를 생각했다고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는데, 지금 시민제과의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망라하여, 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약간의 허기를 사람들은 질병처럼 앓고 있다. 문화적이면서도 지적 호기심을 뒷받침하는, 혹은 증명할 수 없는 부의 가치를 평가받는 그 오묘한 지점에서 시민제과는 그 역할에 앞장섰다. 지금에야 흔한 상품으로 빵의 존재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먹는 것에서부터 생활의 위치가 달랐던 시절이기도 했다. 약간의 특권과 부의 과시가 존재했었다는 말이다. 식생활의 변화와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사회적 기업의 역할을 시민제과가 창출했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빵집의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맛이 미학(美學)이 될 수 있다는 그 징검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다. 밥의 존재는 여전하지만, 그 대체재로 빵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이다. 진상득 대표는 불을 조절하는 어머니의 둥근 어깨를 한시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마당을 치우고 정성을 다해 오늘의 장사를 준비하고 조심스럽게 불을 지펴 팥을 삶고 찹쌀밥을 지으며 손 모아 치성을 드리는 끝없는 간난의 여정을 잠시도 잊지 못한다. 요즘은 이스트를 사용해 간단하게 발효시키지만, 그 시절 어머니는 밀가루를 잘 반죽해 아랫목에 모셔다 놓고 이불을 두르면서 밤새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새벽마다 무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생업 전선으로 떠났던 작은 체구의 어머니를 평생 그리며 살고 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없이는 인생이란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 깊이와 넓이는 아무도 측정하지 못한다. 불 조절을 잘하는 것이 완벽한 팥을 만드는 지름길 그 한없는 정성은 추운 겨울에도 침묵의 웅변으로, 순수의 결정체인 땀방울로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정성은 자식들의 배부름이었다. 아버지의 묵묵한 헌신은 일가를 완성하는 신성한 노동이었다. 그러므로 잘살아야 한다고 어린 마음에도 꼭꼭 다잡았다고 한다. 찐빵과 단팥죽은 팔이 주원료다. 당연히 좋은 팥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된다. 물론 밀가루도 중요하다. 하루 전에 반죽해 숙성시키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 날 새벽부터 빵을 만들기 시작한다. 팥앙금을 만드는 것은 기술과 정성이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결과물이다. 좋은 팥은 짙은 붉은색을 띠는 것이 우선이며 낱알이 굵은 것, 가운데의 띠가 노르스름하면서도 흰색으로 선명해야 한다. 그리고 덕지덕지 붙은 하얀 가루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팥을 고르려면 최대한 발품을 파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어머니는 매의 눈으로 시장을 누비며 좋은 품질은 물론 적절한 가격으로 팥을 구입했다. 또한 팥은 영양분이 뛰어난 재료라서 벌레가 많은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그만큼 완벽한 식재료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선한 빛깔 좋은 팥을 물에 불려 은근한 불에 끓이고 나서 찧고는 체에 걸러 숙성과 건조를 반복하면 앙금이 탄생된다. 찐빵용의 앙금과 달리 단팥죽의 앙금은 손이 많이 간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삶은 팥을 베자루에 넣고 지렛대로 압력을 가해 고운 가루로 걸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부드럽고 고소하며 감칠맛이 입안을 감싸는 앙금이 된다. 찐빵용 앙금과 단팥죽 앙금은 다시 꾸덕꾸덕한 앙금과 맑고 곱게 정제한 앙금으로 나누어져 단팥죽의 원재료가 된다. 단순한 과정 같지만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도구도 화력(火力)도 손으로 제어해야 하므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특히 불 조절은 많은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안 되는, 순전히 누적된 시간의 산물이다. 뒤꼍에 쌓아놓은 장작과 마른 솔잎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 땔감을 활용해 불 조절을 잘하는 것이 완벽한 팥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진상득 대표는 잘 마른 나무 냄새와 마른 솔잎의 향기가 아직껏 머리에 남아 있다고 회상한다. 그것은 냄새로 각인된 원형의 추억이자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었다고 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6

“맞춤 양복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양복업자들은 대개 인물도 몸매도 좋았어요.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근무하니 다들 멋있다고 했죠. 그런데 속은 다 문드러져 있었어요. 선배들 중에 70대에 세상 떠나신 분이 많아요. 양복지(洋服地)에 워낙 먼지가 많으니까요.” 1980년대 이후 기성복 선호 경향이 뚜렷해졌다. 88올림픽 이후 국내 양복의 역사가 맞춤식에서 기성복 시대로 바뀌면서 맞춤 양복점은 쇠퇴기로 들어섰다. 한창때에는 150여 곳에 달했던 포항의 맞춤 양복점은 지금 죽도시장, 중앙동 등에 서너 곳만 남았다. 그 많던 양복 기술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권창화 재단사에 따르면, 포항 시내 양복점 절반 정도는 세탁업으로 전환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양복사는 수선을 병행하는 세탁소로 성공하기도 했고, 일부는 프랜차이즈 양복점으로 업종을 바꿨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업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맞춤 양복업 호황 대기업 뛰어들며 급변 멋진 배우 기성 양복 광고… 고객들 이탈 결정타는 IMF 사태… 업종 사라질 위기 “내 몸에 딱 맞는 옷 어디서도 찾기 어려워” 맞춤 양복을 경험한 이들 그 매력 푹 빠져 기성복과 달리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이기에 재단사로 일한 지 올해로 48년째인 권씨 첫 직장이자 지금까지 이어온 그의 인생 “값을 매길 수 없는 정성, 인정받는 날 오길” 맞춤 양복, IMF 때 결정타 맞아 권 재단사는 맞춤 양복업의 호황이 계속될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젊을 땐 술을 좀 했습니다. 해만 빠지면 친구 예닐곱이 가게 앞에서 기다렸어요. 권창화한테 가면 술 얻어먹는단 소문이 돌았거든요.” 당시 그의 가게 앞 풍경은 호황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권 재단사는 “88올림픽 이후 이삼 년은 그래도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LG패션, 반도패션 등 대기업들이 양복업계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텔레비전 광고에 멋진 배우들이 나와 기성 양복을 광고하면서 맞춤 양복 고객이 대거 빠져나갔다. 초기에는 이른바 메이커 양복이 비쌌지만, 시간이 지나자 가격이 역전되고 격차도 벌어졌다. 결정타는 1997년 IMF 사태였다. 맞춤 양복 종사자 수가 급감하면서 업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매년 발간되는 『한국직업사전』에는 1950년대부터 맞춤 양복 관련 직종이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 『한국직업사전』에는 맞춤 양복공, 의복가봉공, 맞춤 양복 견습생이 수록되어 있지만, 2000년대에는 양복 관련 직업으로 ‘양복제조원’만 수록되어 있다. 세분화한 양복 관련 직종을 모두 합쳐 부르는 말이다. 2010년에는 ‘양복사’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재단사와 봉재사가 모두 합쳐진 직종이다. 견습생 직종이 사라진 것에서 맞춤 양복의 흥망과 직업 선호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 정붓샘, 「노포의 탄생」, 『100년의 테일러, 종로양복점』, 국립민속박물관, 2014, 130쪽. 1990년대에 기성 양복이 전체 양복 소비의 80퍼센트를 차지하면서, 맞춤 양복업계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양복점 1500여 곳이 폐업하고, 업계 종사자 약 18만 명이 이탈했다. 권창화양복점도 예외가 아니어서 IMF 이후 다섯 차례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IMF 이후 구 포항역전으로 이전했다가, 2000년에는 건물주가 건물을 매각하면서 구 역전파출소 앞으로 옮겼다. 이후 중앙상가 확장으로 2002년 신흥동으로 내쫓겼다가, 2007년 구 포항전화국 앞 현 위치에 정착했다. 가게를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상패를 모두 내버렸다. 현실이 팍팍하니 한때의 영광이 부질없어 보였다. “노포가 인정받는 시절이 올 줄 알았으면 남겨둘 걸 그랬어요.” 권 재단사는 지난 20년 동안 양복업을 접을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다. 돈이 되는 업종으로 전환해보려고 가족이 나서 신시가지 유동 인구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내에게 큰 병이 찾아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기성복과의 가격경쟁 위해 ‘반맞춤’ 방식 도입 현 위치에 정착한 뒤에야 비로소 숨을 고른 권 재단사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먼저 꺼낸 카드는 고급화 전략이다. 그는 과감하게 이탈리아 명품 원단을 들여오고, 실력 있는 기술자에게 공임을 더 얹어주며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역에서 300만 원에 이르는 맞춤 양복을 구매할 만한 고객층이 두텁지 않았던 것이다. 원단 공급업체는 최소 열 벌 이상을 구입해야만 견본 책자를 제공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부담은 늘어갔다. 끝내 판매하지 못한 원단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다. 한편으로 기성복과의 가격경쟁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도 도입했다. 재단된 옷감을 전문 재봉회사에 위탁해 제작하는 MTM(Made to Measure) 방식, 즉 반맞춤 방식이다. 이지오더(easy order)라고도 불리는 방식으로 미리 정해진 디자인과 원단으로 체형별 표준 치수에 맞춰 옷을 생산한다. 가봉 과정이 생략되니 신속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권 재단사는 한국기능올림픽과 일본기능올림픽 수상 경력의 재봉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품질 좋은 양복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국산 원단 기준 120만∼150만 원대 맞춤 양복을 절반 비용에 제공할 수 있어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도 베테랑 재단사의 눈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표준 체형은 무리가 없었지만 특수 체형은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단사의 손이 일일이 닿지 않는 시스템으로는 고객이 100퍼센트 만족하는 양복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맞춤옷이란 좋은 자리를 빛내기 위해 큰맘 먹고 해 입는 옷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허투루 작업할 수 없죠. 고객이 좋은 자리에서 귀한 대접을 받도록 하는 일이니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포항의 최고령 현역 재단사 누군가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은 수없이 해온 작업이지만 여전히 신경이 곤두서는 순간의 연속이다. 미세한 주름 하나를 다듬고 고쳐 세우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원단을 재고, 자르고, 꿰매고, 다시 뜯기를 거듭하는 동안 손가락은 늘 얼얼하고 시렸다. 그렇게 50년을 매달려왔지만, 지금도 한 벌 한 벌에 온 힘을 쏟아붓는 긴장감은 변함없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찾아주는 고객들이 있어 힘들고 고된 시간을 잊게 된다. 얼마 전에는 포항 해병대 청룡회관에서 근무했던 고객이 15년 만에 연락을 했다. “이리저리 유명한 곳을 다녀봐도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찾기 어렵다”며 다시 주문을 의뢰한 것이다. 이처럼 한번 맞춤 양복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몇 가지 패턴으로 만들어지는 기성복과 달리 단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랜 단골손님들을 마주하면 그들에게도 여지없이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발견한다. 처음 발길을 했던 청년이 중년으로 접어들고 이제는 장성한 아들을 데려와서 양복을 맞춰주는 모습을 본다. 대를 이어 맞춤 양복의 품격을 입혀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더 정성을 들인다. 재단사로 일한 지 올해로 48년인 권 재단사에게 맞춤 양복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군 제대 후 첫 직업이었고 모든 걸 바쳤어요. 지금까지 먹고살아온 것도 양복 덕분이죠. 그래서 정리해야 할 나이인데도 붙잡고 있어요.” 권 재단사에게 양복은 인생 그 자체다. 양복점이 첫 직장이었고 가족을 먹여 살렸고 지금까지도 놓지 못하니 마지막 직장이 될 것이다. 권 재단사는 포항의 현직 재단사 가운데 최고령자다. 그는 돈으로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정성이라는 가치가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권창화양복점을 지킨다. 〈끝〉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22

한 집 건너 한 집이 양복점이었던 시대

1960년대 한국을 찾은 한 외국인 재단사는 “한국은 양복점의 천국”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맞춤 양복의 시대는 30여 년간 절정을 이루었다. 도심 곳곳에 맞춤 양복점이 즐비했고 포항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항은 철강도시로 변모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양복을 찾는 사람도 증가했다. 1980년대에 포항에 150여 개의 양복점이 들어섰으니 맞춤 양복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8년간 포항에서 양복점을 운영해온 권창화 재단사는 당시 지역에서 규모가 컸던 양복점으로 권창화양복점을 비롯해 대일라사, 보성라사, 동양라사, 연일라사, 강은라사, 신고사양복점 등을 꼽았다. 당시에는 ‘양복점’보다 ‘라사(羅紗)’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었다. ‘라사’는 일제강점기에는 모직과 견직물 판매점 이름으로 사용됐고, 1950~60년대에는 양복점 상호로 자리 잡았다. 양복지가 귀하던 시절, 좋은 양복점은 곧 질 좋은 원단을 갖춘 곳과 같은 의미로 통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양복점일 정도였어요. 양복협회 일을 오래 맡은 대일라사가 가장 규모가 컸고, 그다음이 우리였죠.” 60년대부터 30여 년 맞춤양복시대 절정 80년대 포항도 도심 곳곳 150여 곳 성업 ‘세일즈맨’ 둔 업계 1위 ‘대일라사’와 달리 양복대금 지불은 ‘일시불’ 원칙 고수해와 전성기 맞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엔 기능대회 메달리스트 영입 직원만 20여명 대일라사와는 계절별 축구경기 펼치기도 포항시조합 중심으로 복련 경북지부 구축 경북 동해안 양복업계 성장 함께 펼쳐와 ‘세일즈맨’을 두었던 대일라사 권창화양복점보다 10년 먼저 개업한 대일라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권 재단사가 존경하는 선배인 권의술 대일라사 대표는 포항 양복업 종사자들의 모임을 이끌며 지역 양복업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권의술 대표의 활약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복장기술협회(大韓服裝技術協會) 경북지부(지부장 유시석)는 지난 16일 포항에서 단위조합 합동이사회를 열었다. 포항시 조합장 권의술 씨(대일라사 대표)는 회의 비용을 거의 전담하면서 주문복 업계의 활성화를 촉구했으며 앞으로도 양복업에서 얻은 수익은 모두 복장인(服裝人)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 임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 「신사복기술 경기대회 집행사항 논의」, 『매일경제』, 1980년 6월 23일자. 대일라사는 포항제철에 ‘세일즈맨’을 두고 매달 350벌 이상씩 양복을 만들어냈다. 세일즈맨은 줄자와 양복지 견본 책자를 들고 회사를 직접 방문해 양복을 판매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이라 양복값을 한 번에 치르는 것이 부담스러운 월급쟁이를 위해 ‘할부 양복’이 등장하기도 했다. 제철소나 공공기관 근무자가 주요 고객이던 대일라사는 할부 판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면 권창화양복점은 일시불 원칙을 고수했다. 세일즈맨은 따로 없이 사무실 1층에 직원과 경리 등 네 명이 직접 고객을 응대했다. 단골손님 가운데 서너 번 이상 거래한 이들에게만 두 차례 분할 납부를 허용했다. 시계를 담보로 맡기는 고객도 있었는데, 미수금은 골칫거리였다. 맞춤 양복 가격은 원단값과 공임으로 나뉘었다. 가게에 비치된 양복지를 선택하면 전체 금액을 내야 했다. 당시 양복지는 귀한 선물로 여겨져, 선물 받은 원단을 가져오는 손님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공임만 받았다. 견습 재단사 수입이 7급 공무원 월급보다 많아 권 재단사가 누렇게 바랜 스프링 노트를 꺼내 보였다. ‘미수금 장부’라고 적힌 노트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옷이 맞지 않는다면서 트집을 잡으며 돈을 안 내려는 손님도 적지 않았다. 당시에는 미수금을 회수하지 못해 문을 닫는 양복점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권 재단사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못 해 부친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맞춤 양복업은 고객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한 업종이다. 고객의 요구를 제대로 이해해야 고객이 원하는 양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권 재단사는 옷을 만드는 정성만큼 고객들에게 마음을 기울였다. 일 년에 대여섯 차례 고객에게 손수 쓴 감사 카드를 월간지 『샘터』와 함께 소포로 발송했다. 결혼기념일, 생일, 첫 주문일, 설날과 추석, 큰 재난이 닥칠 때마다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맞춤 양복을 지어준다는 건 단순히 옷을 만드는 일을 넘어 고객에게 멋과 자부심을 선사하는 일이다. 몇 년 후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기성 양복업체가 유사한 고객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걸 본 권 재단사는 ‘본인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권 재단사는 그의 양복점에 “안 온 고객은 있어도 한 번만 온 고객은 없다”고 자부한다. 지역 양복업이 전성기를 맞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는 업체 간 경쟁도 치열했다. 기술자 스카우트는 흔한 일이었고, 권 재단사 역시 부산까지 가서 기능대회 메달리스트를 영입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런 기술자들은 100만 원씩 더 얹어줘야 할 만큼 몸값이 높았다. 권 재단사는 “견습 재단사 수입이 7급 공무원 월급보다 많을 정도였으니 양복 기능공은 선망의 직업이었죠”라고 회상했다. 중저가형 기성 양복이 나오면서 맞춤 양복 시대는 저물어 양복업계가 성장하면서 종사자 수도 급증했다. 기술 교류와 권익 보호를 위한 단체 활동도 활발해졌다. 1980년대 전국의 양복업 종사자들이 돈을 모아 복지회관을 짓고 매년 기능대회를 개최했다. 기술자들의 모임인 ‘대한복장기술협회(기협)’와 사업자 모임인 ‘대한복장상공조합연합회(복련)’가 대표적이었다. 포항에도 협회가 조직돼 30∼40명씩 참석하는 모임이 열렸다. 직원이 많은 양복점은 친목 활동도 벌였는데, 대일라사와 권창화양복점은 분기마다 축구대회를 열었다. “대일라사와 권창화양복점의 직원이 각각 20여 명이었어요. 두 양복점이 상금을 내걸고 계절마다 축구 경기를 했지요.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대구에서 열리는 대회에 포항팀을 만들어 참가했어요. 제일모직이 협찬하는 대회였는데, 상금도 있고 가전제품이나 양복 원단 등 상품이 많았습니다.” 지역 양복업계 종사자가 늘어나자 조직화가 이루어졌고, 경북 동해안 지역 전체로 점차 확산되었다. 1980년 복련 경북지부는 포항시조합을 중심으로 지역조합 체계를 구축했다. 당시 복련 경북지부의 활동은 경북 동해안 양복업계의 성장과 함께 포항이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대한복장상공조합연합회(大韓服裝商工組合聯合會) 경북지부는 동해안 지역구를 조직하고 단합대회를 가졌다. 동해안 지역구는 포항시조합(조합장 권의술) 산하 지역조합으로 영해, 영덕, 축산, 강구, 흥해 등지의 양복점이 조합원사가 되었다. - 「복련, 각 지부 조합에 전달」, 『매일경제』, 1980년 8월 25일자. 경북 동해안 지역 양복업 종사자들은 경쟁 관계이면서도 기술을 교류하고 정보를 나누었다. 이들은 협회 회원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단체 행동에 나서기도 하고, 기성복이 양복 시장에 진출하자 맞춤 양복업을 살리기 위해 힘을 모으기도 했다. 대량생산에 의한 중저가형 기성 양복이 시장에 진출하자 맞춤 양복 시장을 찾는 소비자가 급격하게 줄었다. 이러한 추세는 맞춤 양복점의 위축을 불러왔다. 창업 이후 성장세를 이어가던 권창화양복점 역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손님이 줄어들자 직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독립하는 기술자가 있었고 세탁업으로 진출하는 이들도 있었다.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사 간 갈등도 빚어졌다. 맞춤 양복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19

아버지의 대를 이어 양복점을 열다

1980년대 권창화양복점은 포항의 사회 초년생이 꼭 들르는 곳이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 양복은 필수품이었으니 양복점은 통과의례 같은 곳이었다. 양복점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옷 선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흔했다. 연배가 있는 이들은 권창화양복점보다 10여 년 먼저 문을 연 대일라사를 선호했다. 아버지가 전통적인 스타일을 고집하면 아들은 세련된 ‘핏’을 내세운 권창화양복점을 찾았다. 포항 신사들의 옷맵시를 책임진 양복은 권창화(73) 재단사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반세기 동안 양복을 지어온 그는 일흔을 넘는 지금도 멋스러운 감각을 유지했다. 1977년의 전통 잇는 포항 ‘권창화양복점’ 고교시절 의복 기술 배운 권창화 재단사 과거 타자기로 찍은 상표에 자부심 담아 부친 권학주씨, 일본인에 의복 기술 배워 광복 후 오천 미군부대서 군복 세탁·수선 1956년 포항 중앙상가 ‘중앙양복점’ 오픈 군 제대 후 부친의 건강 악화로 가업 이어 중앙상가서 시작 5년만에1982년 전성기 직원 20여명과 월 250~300벌 주문 소화 세련된 맞춤 핏으로 승부… 손님들 발길 포항 북구 신흥동에 위치한 권창화양복점은 전성기에 비해 규모는 줄었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작업대 한쪽에는 ‘TAILOR’S KWON CHANG HWA, SINCE 1977’을 찍던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다. 옷감 위에 직접 글자를 인쇄하는 방식인데, 지금은 잉크를 구할 수 없어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게 인쇄된 상표는 바지와 상의에 하나씩 꿰매 붙였다. 오랜 역사를 품은 상표는 재단사에게도 고객에게도 자부심이 되었다. 옷본이 그려진 재단 종이를 지그시 누르는 둥근 누름쇠는 제철소에 다니는 한 고객이 선물한 것이다. 그 누름쇠는 단추 구멍을 뚫을 때도 사용하는 것인데, 낡은 걸 보더니 회사에서 직접 만들어 가져왔다. 손때 묻은 무쇠 다리미, 무쇠로 만든 소매 다리미판, 날이 다 닳은 묵직한 가위, 누렇게 바랜 고객 명단이며 미수금 장부까지 저마다 세월의 흔적이 배었다. 권 재단사의 빈틈없는 솜씨는 부친 권학주 씨로부터 이어졌다. 경북 군위 출신으로 1920년생인 권학주 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양복사한테 양복 기술을 배웠다. 재단과 양복(서양식 남성 정장), 양장(서양식 여성 정장), 두루마기를 두루 섭렵한 의복 장인이었다. 한복과 양복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지 않은지 물으니, 1990년대까지 한복을 맞출 때 두루마기만은 양복지(洋服地)로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양복이 우리나라 복식에 적용된 예가 두루마기라는 것이다. 양복지 두루마기는 한복이 아닌 양복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양복점에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 제대 후 가업을 이어받아 권학주 씨는 광복 후에 오천 미군 부대에서 군복 세탁과 수선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1956년 포항 중앙상가 무궁화백화점 자리에 ‘중앙양복점’을 열었다. 뛰어난 기술 덕분에 주문이 몰렸다. 포항 도구리 동해면사무소 앞에 400평 저택을 지을 정도로 부를 쌓았다. 친척들에게 하숙방을 제공할 만큼 늘 북적거리는 저택에서 권 재단사는 태어났다. 부친은 솜씨만큼이나 인물이 출중했다. 주위에서 “네가 아버지만큼 생기면 영화배우도 했을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선친은 지역 유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부를 누렸으나 재산 관리를 잘 못 하여 가세가 기울고 말았다. 권 재단사는 고등학생 시절 부친 곁에서 재단 기술을 배웠지만 평생의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고령의 부친이 더 이상 가위를 잡을 수 없게 되면서 양복점의 대가 끊어질 처지가 된 것이다. 가업을 잇느냐 끊느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양복사의 길을 선택했다. 1977년 7월 7일, 권 재단사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권창화양복점’을 개업했다. 당시만 해도 주인의 이름을 내세운 양복점은 드물었다. 군 제대 후 무일푼이던 그는 형수에게 빌린 100만 원으로 중앙상가에 작은 가게를 마련했다. 선풍기 부품을 조립해서 판매하는 ‘한일정’ 옆자리였다. 권 재단사의 뛰어난 솜씨 덕에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루자 한산하던 골목은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그러자 한 골목에 양복점만 열 곳 넘게 새로 문을 열었다. 권 재단사 덕분에 상권이 살아났다며 상인회에서 감사패를 전했을 정도다. 한적한 골목에 4평짜리 점포로 시작했는데 불과 5년 만에 옆 가게와 뒤쪽 주택을 매입해 확장했다. 1982년 가게 확장을 기념해 친척들과 촬영한 흑백 사진 한 장이 현재도 가게 입구에 걸려 있다. 이 시기가 권창화양복점의 최전성기였다. 양복점 전성기 때 직원 20여 명을 고용해 한국 남성 맞춤복의 전성기는 1960년대부터 80년 중반까지로 본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양복 문화가 보편화되고 토착화한 시기다. 양복 수요가 급증하면서 권창화양복점도 성황을 이루었다. 결혼을 앞둔 손님은 예복으로 일곱 벌에서 열 벌까지 맞췄다. 신랑 양복만 계절별 정장에 코트까지 최소 네 벌이 기본이었다. “한 달에 250벌에서 300벌씩 주문을 받았습니다. 문만 열면 주문이 밀려왔으니까요.” 한창때에는 2층 건물에 직원이 20여 명이었다. 주문과 경리, 재단 보조, 상의 담당, 바지 담당, 수선 등 분업 체계가 철저했다. 맞춤 양복은 분야별 전문 기술자들이 숙련된 솜씨를 발휘해 완성되었다. 한 벌을 제작하는 데에는 재단사, 상의 재봉사, 바지 재봉사, 마무리 전문 담당 등 최소 네 명이 협업했고, 다림질 담당과 가봉사 등의 분야가 추가되었다. 맞춤복 산업은 어린 견습생이 밑바닥부터 기술을 익히는 전형적인 도제 시스템이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꼬마’는 심부름부터 시작해 가봉, 수선, 바지, 상의 담당으로 단계를 밟았다. 수선 전문가를 ‘수리공’이라 불렀는데 유일하게 월급을 받는 자리였다. 월급이 25만 원으로 당시 공무원 월급의 다섯 배였다. 기술이 쌓이면 상의나 바지 한 장당 돈을 받는 기술자가 되었다. ‘바지공’을 거쳐 ‘조끼공’, ‘상의공(上衣工)’을 지나야 전체 공정을 지휘하는 재단사가 되었다.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수리공보다 기술자를 선호한 이유는 수입 차이였다. 실력이 뛰어나면 일한 만큼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매달려야 상의 한 벌을 완성할 정도로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그러나 다른 업종에 비해 소득이 높다 보니 씀씀이도 컸다. 음주와 노름으로 봉급을 미리 당겨 쓰고, 생활비를 겨우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소공동 양복 거리에서 최신 유행 익혀 재단사의 위상은 남달랐다. ‘재단사 손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재단사가 양복점을 옮기면 단골들이 따라나섰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이나 경제인, 방송인 등 단골도 제법 있었다. 권 재단사의 솜씨를 믿고 지인들을 데리고 오는 손님도 많았다. 권 재단사의 양복점이 사랑받은 비결은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감각’이었다. 그는 해마다 서울 소공동 양복 거리를 찾아 선배 재단사들과 교류하며 최신 유행을 익혔다. 덕분에 중후한 멋과 세련된 옷 핏, 편안함을 두루 갖춘 옷으로 신뢰를 얻었다. 당시 권 재단사가 도입한 디자인은 몸의 곡선을 유연하게 드러내는 ‘콘티넨탈 룩(Continental Look)’이었다. 허리를 조이고 바지 끝을 가늘게 처리해 슬림해 보이면서도 여유 있는 품으로 편안함을 살리는 유럽형 디자인이었다. 상의에는 ‘심(interlining)’을 넣어 모양을 잡았다. ‘심’은 동물의 머리카락이나 순모를 섞어 만든 소재로 옷의 골격을 단단히 지탱해주었다. 포항 지역에는 이 기법을 구현하는 기술자가 없어 서울과 부산에서 스카우트해야 했다. 그런데 웃돈 주고 스카우트한 기술자들이 점심시간에 몰래 작업하며 기술을 숨겼다. 권 재단사가 설득해 기술 전수를 하려니, 이번엔 직원들이 자존심을 내세워 반발했다. 기술자들 사이에 자존심 경쟁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맞춤 양복은 단순한 옷이라기보다 기술자들이 한 땀 한 땀 자부심으로 공들인 결과물이다. 사람을 단정하고 당당하게 세워주는 도구이자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권 재단사가 옷을 결코 허투루 만들 수 없는 이유다.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15

포항시민의 자부심이 되는 막걸리를 만들고 싶어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천상병의 시 「막걸리」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막걸리가 “술이 아니고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했다. 또한 막걸리 한 병을 작은 잔으로 나누어 하루 종일 마신다고 했다. 이처럼 적당히 마시는 막걸리는 즐거움이 되고, 피로를 잊게 하는 노동주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끼니가 된다는 사실을 양민호 대표는 한 단골손님에게 배웠다. 어느 날 매번 양조장에 직접 와서 막걸리를 사 가던 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손님의 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음식을 삼키지 못했는데, 유독 양 대표네 막걸리는 잘 드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손님의 인사가 양 대표의 심금을 울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막걸리를 허투루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양 대표는 술인 동시에 영양이 풍부한 발효식품인 막걸리를 좀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연구와 개선을 거듭하여 2017년에 경상도 지역 양조장으로는 최초로 HACCP(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 인증을 획득했다. 동해명주 3대 대표가 된 지 불과 1년 만의 성과였다. HACCP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가장 높은 수준 인증제로, 식품 원재료 생산부터 소비자가 섭취하기 전까지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적 위해 요소가 혼입되거나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위생 관리 시스템이다. 체계적인 공정과 위생 관리로 안전한 막걸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막걸리가 끼니가 된다”는 손님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쓴맛·단맛·감칠맛·톡 쏘는 맛·새콤함 五味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 외국 술에선 찾아보기 힘든 고유한 맛 전통 잇는 젊은 양조인들의 현재 화두는 ‘프리미엄’ 최근 포항의 회와 어울리는 맑은 약주 개발에 몰두 양민호 대표, 2017년 경상도 최초 HACCP인증 획득 동해명주 3대 대표 맡은지 불과 1년 만에 이룬 성과 아일랜드 국가브랜드 ‘기넥스 맥주 양조장’ 최종 모델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로 만들어 관광명소화” 포부 막걸리는 ‘오미(五味)의 예술’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술은 백약의 장(長)이고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이고 과음도 마찬가지다. 술도가에서 태어나 술을 생활처럼 접하며 살아온 양 대표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양조장에서 부모님을 도우며 막걸리를 배워서인지 술에 대한 기억도 남다르다. “옛날 주입기는 자동으로 멈추지 않아 병에서 술이 흘러넘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우유 같아서 바가지로 받아 맛을 보곤 했습니다.” 양 대표에게 막걸리는 목이 마르면 떠 마시는 발효음료와 비슷했다. 조기교육 덕에 음주를 호기심이나 모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수학여행지 숙소에서 선생님 몰래 술을 마시는 일탈을 해본 적도 없다. ‘술은 편한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즐기며 마시는 것’이라는 철학을 일찍부터 세웠기 때문이다. 술을 즐기는 또 하나의 비결은 ‘페어링(pairing)’이다. 그날의 기분과 상대방 그리고 음식과의 조화가 중요하다. 양 대표는 “술은 음식과 함께할 때 비로소 제맛을 낸다”고 강조한다. 술과 음식의 조화는 술 자체뿐 아니라 음식의 풍미까지 좌우한다. ‘적게 마셔도 제대로 즐기자’는 요즘 술 문화 흐름과도 상통한다. 양민호 대표는 상황에 따라 술을 달리한다. 깊은 대화에는 소주, 더운 날에는 맥주, 가벼운 분위기에는 와인 그리고 출출하거나 마음이 허할 때는 막걸리를 찾는다. 막걸리는 종류에 따라 음식도 달라진다. 구수한 밀막걸리는 매운 음식에, 알코올 풍미를 강한 동동주는 기름진 전과 잘 맞는다. 당도를 낮춘 가벼운 쌀막걸리는 해산물과 어울린다. 막걸리는 ‘오미(五味)의 예술’이라 불린다. 알코올의 쓴맛, 당분의 단맛, 발효에서 비롯한 감칠맛, 탄산의 톡 쏘는 맛, 유산균이 남기는 새콤함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를 낸다. 외국 술에서는 찾기 힘든, 한국만의 고유한 맛이다. 양 대표는 “첫 잔이 맛있는 술보다 음식과 오래 잘 어울리는 술이 좋은 술”이라고 말한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마셔도 쉽게 취하지는 않지만, “25도 소주 7병도 거뜬했다”는 부친의 주량에는 미치지 못한다며 웃었다. 포항의 신선한 회와 어울리는 약주 개발에 몰두 물론 술 앞에서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 번은 과음으로 관능검사(미각,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을 이용해 식품의 특성을 평가하는 방법)를 놓쳐서 원료 하나를 빠트린 채 5000병을 용기에 넣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결국 직원 일곱 명이 달라붙어 병을 다시 따야 했고, “5초면 될 일을 하루 종일 다시 하며 뼈저리게 후회했다”고 말했다.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도 배울 것은 늘 있는 법이다. 현재 막걸리 시장의 화두는 ‘프리미엄’이다. 젊은 양조인들이 전통 제조법을 익혀 새로운 맛을 내고, 도시 소비자들이 이를 즐긴다. 이제 막걸리는 ‘막 걸러 만든 술’이 아니라 ‘신선하게 걸러낸 술’로 인식되는 시대다. 신선하게 걸러낸 막걸리는 양조장에서 떠난 뒤에도 쉼 없이 살아 움직인다. 출시 직후에는 달콤함이 강하지만, 보름이 지나면 산미가 돌고 한 달이 되면 입맛을 돋우는 시큼한 맛이 완성된다. 양 대표가 즐겨 찾는 시점은 출시 후 20일 무렵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계절마다 달라지는 옛 막걸리 맛이 오히려 그리울 때가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누룩 냄새가 강하고 과발효로 맛이 일정치 않았지만, 계절마다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균일한 맛이 보장되지만, 특별한 맛을 우연히 만나는 멋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러한 아쉬움은 ‘옛 막걸리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자전거에 말통을 싣고 배달하던 시절의 맛을 복원해 출시하기에 이른다. 양 대표는 전국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양조장이니 바닷바람이 술맛의 깊이를 더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포항의 신선한 회와 어울리는 맑은 약주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양 대표의 이름을 건 제품이다. 6개월의 숙성 과정을 거치지만, 만족스럽지 않으면 과감히 버린다. 지금까지 버린 술만 10여 톤에 이른다. 무언가에 이름을 걸었다는 건 막중한 책임감을 의미한다. 하기야 막걸리에 인생을 걸기로 작정한 사람이니 이름을 거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양조장을 관광명소로 키우고 싶어 양민호 대표가 막걸리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한 건 해병대 복무 시절이었다. 우연히 참석한 장성들의 술자리에서 “포항에서 제일 좋은 막걸리”라는 찬사를 들었고, 그 순간 습관처럼 빚던 술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허물없는 시간을 만든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양 대표는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해서도 장거리를 통학하며 양조장 일을 도왔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막걸리에 인생을 건 한길을 걷고 있다. 양 대표가 그리는 최종 모델은 아일랜드의 기넥스 맥주 양조장이다. 아일랜드를 맥주의 나라로 만든 곳으로, 여행자들의 필수코스다. 기넥스 맥주 양조장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국가 브랜드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양 대표는 포항시민의 자부심이 되는 막걸리를 만들고 싶다. 포항시문화관광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양조장을 관광명소로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난 8월에는 도구해수욕장에서 막걸리 축제를 열었고,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담은 프리미엄 막걸리도 준비하고 있다. 양 대표는 “막걸리는 한민족의 애환이 담긴 술”이라며, “전통을 계승하는 사명은 있지만, 옛 방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밝힌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막걸리 연구가 필요하며, 이는 전통주 계승자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지역에서 내공을 다지면 반드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양 대표는 관광과 문화,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접목해 포항의 막걸리를 새로운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나아가 세계 시장에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포항에서 빚은 막걸리가 머지않아 세계인의 술잔을 채울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끝〉 글 : 배은정(소설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12

탁주의 공급구역 제한이 풀리면서 날개를 달아

동해명주의 역사는 1955년 도구양조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양조장은 읍면동 단위로 대개 하나씩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 양조장 대단위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역 단위로 양조장이 통합되었다. 포항의 경우 12개 동이 합쳐져 합동 양조장이 탄생했다. 이 시기 양조장 주인은 지역에서 대표적인 부자로 통했다. 1970년대만 해도 포항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막걸리 소비 도시였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전국 1인당 막걸리 소비량이 38리터였는데, 포항은 105ℓ나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 비하면 10배 가까이 되었다. 아래 『매일경제』 기사를 보자. 1970년대 손꼽히는 막걸리 소비도시로 전국 1인당 소비량 38ℓ, 포항은 105ℓ나 70년 역사 이어온 ‘동해양주’가 산 증인 1992년 지역 최초 100% 쌀막걸리 출시 2000년 들어 ‘포항의 제1 양조장’ 급성장 양수길 대표 전국 최초 합동 양조장 제쳐 포항TP•포스텍 공동 개발 ‘영일만 친구’ 과메기와 함께 포항시 공동브랜드 등극 포항 쌀 최다 사용, 업계 1위 기업에 올라 2011년 양조공장 현대화… 새 도약 전기 발효탱크 술 온도 관리 자동화시스템 전환 양조 품질•생산 효율성 동시에 향상 계기 국세청에 의하면 1970년 한 해 동안 막걸리의 국내 총소비량은 122만 6800㎘로, 맥주 소비량보다 13배 이상을 앞지르고 있다. 막걸리의 1인당 평균 소비량은 38.6ℓ로, 서울은 이보다 훨씬 적은 11.5ℓ로 나타났다. 막걸리의 소비량은 지역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인다. 각 도별로 보면 경북이 52.9ℓ로 가장 높고 제주도가 7.3ℓ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지역별로 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신 지역은 경북 김천시로 1인당 106ℓ를 마셨고, 다음이 경북 포항으로 105ℓ를 마셨다. 가장 적게 마신 경북 안동은 3.2ℓ를 마셨다. - 「막걸리 소비 여전히 수위 맥주보다 13배 많은 22만 ㎘」, 『매일경제』 1971년 5월 3일자. 양민호 대표는 70년 역사의 동해명주 자체가 산증인이 아니겠냐고 자부했다. “포항은 복합적인 도시잖아요. 농업과 어업 그리고 공업까지 고루 갖춰진 데가 많지 않은데, 거기에 해병대도 있고요. 전국적으로 양조장이 존속되는 지역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70년 역사의 동해양주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포항은 양조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1992년 포항 최초로 100% 쌀막걸리 출시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동해명주의 역사는 바로 지역 양조사가 된다. 동해명주에서 가장 오래된 막걸리는 밀막걸리다.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자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쌀막걸리가 우세한 지금은 밀막걸리를 포기한 양조장이 많지만, 동해명주는 꾸준히 전통을 지켜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밀 누룩이 아닌 쌀누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이야 쌀이든 밀이든 원하는 대로 고르면 되지만, 선호하는 막걸리를 고를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막걸리의 재료 선택은 정부의 방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66년 막걸리 제조에 쌀이 금지된 뒤, 1977년 대풍이 들어 일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가격이 비싸고 맛이 싱거워 반응이 좋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서민층에 각광을 받으며 되살아난 막걸리의 인기가 갈수록 떨어진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포항세무서가 집계한 주세 징수 실적에서 나타난 쌀막걸리 출고량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쌀막걸리가 처음 선을 보였던 1977년 12월엔 210만 리터가 출고돼 이에 부과된 주세가 1228만 원이었던 것이 지난 1월엔 162만 ℓ에 주세가 1009만 원으로 크게 줄었고, 지난달에는 117만 ℓ에 주세가 731만 원밖에 안 돼, 두 달 만에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쌀막걸리에 대한 외면은 소비성향이 높은 도시보다 농촌이 더욱 심하다. 포항주조협회에 따르면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로 술을 빚었을 때는, 농민들이 쌀 한 되를 가지고 막걸리 3~4되를 바꾸어 마실 수 있었으나 요즘은 맛도 떨어진 데다 2~3되밖에 바꿀 수 없어 거의 소주를 즐겨 마신다는 것이다. - 「전국실태-포항」, 『동아일보』 1978년 3월 25일자. 1979년 다시 쌀이 부족해지면서 쌀막걸리 제조가 중단되었고,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허용되었다. 당시 동해양조장은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했다. 1991년에 낡은 목조 양조장을 철거하고 시멘트 건물로 공장을 신축했다. 이듬해 포항 최초로 100% 쌀막걸리를 출시하며 쌀막걸리 시장에 신속하게 진입했다. 연구와 개발을 이어온 덕분에 규제가 풀리자마자 출시했고,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내연산 보경사 앞 식당 거리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합동 양조장을 이긴 전국 최초의 개인 양조장 2대 양수길 대표는 양조장을 ‘도구’에서 ‘동해’로 이름을 바꾸고 면 단위를 대표하는 양조장으로 키웠다. 그랬던 양조장이 2000년 들어 포항 제1의 양조장으로 급성장한다. 정부의 ‘막걸리 공급구역 제한 해제’ 덕분이다. 막걸리의 공급구역을 제한하던 시기에는 다른 양조장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낙후된 주류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막걸리의 공급구역 제한제도가 폐지되었다. 양조장의 선택에 따라 전국 어디든 막걸리를 유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전국의 양조장이 경쟁하게 되는 상황이 되자 많은 양조장이 문을 닫았지만, 동해명주는 오히려 이 시기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양민호 대표는 “구역제에 막혀 판로가 답답하던 시장이 뚫리기 시작하니 날개를 단 셈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양조장 구역제 시절에 포항에서 5위 남짓한 양조장이 자율화되자 2위에 오르더니 합동 양조장을 제치기에 이르렀다. 양 대표는 “합동 양조장을 이긴 전국 최초의 개인 양조장”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동해명주의 성장은 도전과 연구의 결과였다. 포항테크노파크와 포항공대의 공동 연구로 개발한 ‘영일만 친구’가 그것이다. 가수 최백호가 부른 노래를 막걸리 이름으로 붙인 것으로, 막걸리와 우뭇가사리의 조합이 눈길을 끌었다. 포항 과메기가 전국 브랜드가 되고 겨울 술안주로 각광받으며 포항시 공동 브랜드가 되었다. 100퍼센트 포항 쌀로 만들었다는 점도 주목을 끌었다. 이로써 동해명주는 전국에서 포항 쌀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업으로 등극했고, 포항 시장에서 업계 1위로 올랐다. ‘영일만 친구’는 여전히 동해명주의 효자 품목으로 “전국의 민관 협업으로 만들어진 막걸리 중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 지속된 막걸리”로 평가받는다. 발효실과 숙성실을 원격으로 관리 ‘영일만 친구’의 선전은 그즈음 불어닥친 막걸리 열풍과도 맞아떨어졌다. 2008년부터 막걸리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금융 위기로 저렴한 술이 소비되는 풍조, 웰빙 열풍, 문화 전반의 복고풍 영향, 일본에서의 막걸리 인기 등 복합 요인이 작용했다. 동해명주는 2011년에 또 한 번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양조 공장의 확장과 현대화를 목적으로 2층 규모의 공장 건물을 신축했다. 2층에는 원료 처리실과 발효실이 있고, 1층은 제성실과 병입실, 창고가 자리한다. 이때 발효 탱크의 술 온도 관리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발효조의 온도 센서 패널을 디지털로 바꾸고, 원격 시스템을 연동해 온도를 제어했다. 막걸리 양조 작업이 고되어 일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고안한 방안이다. 외부에서도 휴대전화로 발효실과 숙성실을 원격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작업 관리의 부담을 줄인 것은 물론, 양조 품질과 생산 효율성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글 : 배은정(소설가) / 사 진 : 김 훈(작가)

2025-10-01

전국에서 파도소리와 가장 가까운 양조장

포항 도심에서 동해안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탁 트인 바다 마을이 나타난다. 영일만의 넓은 품에 안긴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 이곳에 70년을 이어온 양조장이 자리한다. 연오랑세오녀의 설화가 깃든 땅, 근대 한의학의 한 축을 이룬 석곡 이규준(1855∼1923)의 정신이 깃든 곳에 터를 다진 동해명주다. 손님을 맞으러 나온 양민호 대표는 유서 깊은 노포의 이미지와 다르게 40대의 젊은이다. 전국 수백 개의 양조장을 이끄는 이들 중에서 젊은 축에 속한다. 나이는 젊지만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를 돕기 시작해 일반사원에서 공장장을 거쳐 대표 자리에 올랐으니 보통 내공은 아닐 터이다. 동해명주의 도로명인 일월로 51-1번지에는 건물 두 동이 있다. 70년 된 전통 양조장에 증류실을 마련해 증류주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막걸리 생산은 2011년에 신축된 양조장에서 전담하고 있다. 막걸리 양조장 외벽에 설치된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술 항아리에서 잔으로 한 줄기 술이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양 대표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미관상 고민거리이던 도시가스 배관이 취기에 올라서 보니 술 줄기로 변해있더란다. 그야말로 ‘술기운이 만든 작품’인 셈이다. 양 대표는 양조장의 핵심 시설인 발효실부터 안내했다. ‘양조장의 주방’이라 불리는 발효실은 양조장의 중심축으로 술의 성패를 좌우하기에 신성시되는 공간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여름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인데도 발효실 안은 서늘함이 감돌았다. 내부에는 1톤 용량의 스테인리스 탱크 35기가 자리했는데, 각각 냉각관을 통한 온도 조절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1t 탱크에서 생산되는 막걸리는 무려 2000여 병이다. 전통을 잇되 자동화 설비를 꾸준히 도입한 결과다. “지금이야 세월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장독대에 선풍기를 틀어 온도를 내렸습니다. 지금처럼 무덥지 않아서 장독대 하나에 선풍기를 집중적으로 틀어주면 20도까지 떨어졌지요.” 선풍기도 없던 시절에는 지하수를 흘려 온도를 낮추고, 겨울에는 연탄불을 피워 발효 조건을 맞추었다. 양 대표는 장독이라 온도 관리가 수월했다고 말했다. 장독이 숨을 쉬면서 스스로 온도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장독에서 술을 익히는 게 낫지 않냐고 묻자 양 대표가 손사래를 쳤다. 대형 장독대 세척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란다. 가슴 높이의 항아리를 기울여 세제 없이 오직 손힘으로만 닦아야 하는 것이다. 또 항아리를 운반하려면 핸들을 돌리듯 굴려서 움직여야 했기에 파손될 위험도 컸다. 포항 도구에 70년 이어온 ‘양조장’ 자리해 1955년 서영수 대표의 ‘도구양조장’ 시작 2대 양수길 대표 인수 ‘동해양조장’ 명명 3대 양민호 대표 다섯 살부터 아버지 도와 일반사원서 공장장 거쳐 대표 자리 올라 전국 확장 의지 담아 사명을 ‘동해명주’로 매일 새벽 마당에 술을 뿌리며 기도 올려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 막걸리 한 잔의 여운, 정성과 철학의 결실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양민호 대표가 망사로 된 뚜껑을 열어서 탱크 안을 보여주었다. 발효된 쌀알이 표면에 떠 있고, 알코올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냄새는 시큼하기보다 구수한 쪽에 가까웠다. 보글거리며 올라오는 기포는 생명력을 알리는 듯했다.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이 양조장을 찾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독립영화가 있었다. 감독이 직접 막걸리 제조법을 배우다 아이디어를 얻은 <막걸리가 알려줄 거야>(2024)인데, 발효 과정에서 생긴 기포를 일종의 ‘신호’로 해석한 설정이 독특했다. 영화처럼 신비한 기운을 가진 막걸리가 “톡톡……, 톡톡톡……” 로또 번호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메시지를 전할지 모르니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반면, 양 대표는 슬쩍 보더니 냄새로 술의 상태를 판단했다. 발효실에서 40년 가까이 있다 보니 후각으로 도수와 산미 정도를 감지할 수 있단다. 도수를 0.5도 단위까지 알아낼 수 있다니 실로 대단한 능력이다. 양 대표는 마치 알코올 도수 측정기가 눈앞에 있는 듯 현재 도수는 약 14.5도이고, 하루만 더 발효시키면 출고할 수 있다고 했다. 1톤 탱크의 3분의 1은 쌀이 차지한다. 뜨거운 증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밥을 섞어주고 뒤집어준 고두밥이다. 쌀을 찌고 나면 균사를 고두밥에 뿌려 손으로 비벼주는 작업이 이어진다. 발효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양 대표의 표현대로 “쌀에서 꽃이 핀다.” 막걸리의 모든 공정에 정성이 들어가지만, 특히나 발효만큼은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기술만으로 맛을 낸다면 대기업 제품이 가장 맛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다. 동해명주의 뿌리는 도구양조장 효모가 제대로 활성화되어 고두밥 분해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발효 지점은 알코올도수 15도다. 반면에 발효가 덜 된 상태, 즉 ‘미주(未酒)’ 단계에서는 구수한 맛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무에서 충분히 숙성된 과일이 풍부한 맛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걸리도 탱크 안에서 충분히 발효될 때 가장 좋은 맛을 낸다. 맛의 품질과 생산 수율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수많은 시도 끝에 도출한 최적의 조건이다. 목표치에 도달하면 물을 섞어 도수를 약 6도 수준으로 조정한다. 물을 더해 원하는 도수를 맞추는 방식은 위스키나 맥주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막걸리는 청주를 걸러내고 남은 침전물이었지만, 지금은 원주(原酒) 그대로 사용한다. ‘대충 막 걸러낸 술’이라는 막걸리의 어원은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막 갓 빚어낸 술’이라는 해석이 현대의 막걸리를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 동해명주의 역사는 1955년 ‘도구양조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대 서영수 대표가 운영하던 양조장을 1985년에 2대 양수길 대표가 인수해 ‘동해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도구리를 넘어 동해면 전역을 대표하는 양조장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였다. 2016년, 양민호 대표가 대를 이어 취임하면서 브랜드 이름은 ‘동해명주’가 되었다. 전국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양 대표의 부친인 고(故) 양수길 대표는 포항시 연일읍 태생이다. 그는 떡방앗간을 처분하고 도구양조장을 인수하면서 포항시 도구리로 터전을 옮겼다. 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양조장을 인수했지만, 재정적 기반이 부족한 터라 가내수공업 형태로 가족 모두가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양민호 대표는 한옥 2층 살림집 아래 1층 양조장에서 성장했다. 아침에 문을 열면 곧장 양조장이었고,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막걸리 상자 앞에 앉아 고사리손으로 비닐 마개를 씌우며 일을 도왔다. 당시 막걸리 병마개는 밀봉을 위해 비닐을 사용했다. 비닐 100개가 한 세트였는데 하나씩 벗겨내 병에 꽂고 열로 지져 수축시키는 방식이었다. 양 대표는 스스로의 성장을 ‘병뚜껑을 닫을 수 있는 높이’로 체감했다. 처음엔 2단만 겨우 가능했지만, 어느새 3단, 4단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키가 크는 걸 알았다. 매일 새벽 마당에 술 뿌리고 기도 올려 막걸리 냄새에 취해 살았다고 회고하는 양 대표. 어린 시절에는 ‘술도가’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맥주와 소주에 비해 막걸리가 상대적으로 덜 대우받던 때였다. 고등학생이 되니 그제야 친구들도 하나둘씩 양조장이 마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에 누룩 냄새가 배어 빠지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놀려도 막걸리집 아들로서 자부심이 있었죠. 한 톨의 쌀이 밥이 되고 막걸리가 되는 과정이 어린 제게는 신비로웠습니다.” 고(故) 양수길 대표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평소 “남은 1등, 나는 2등”이라는 말을 자주 했으며, 이는 배려와 책임의 철학을 보여준다. 겨울이면 쪽잠으로 버티며 서너 시간마다 밤새도록 연탄불을 확인했다. 세심하게 술을 지켰던 집념은 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보이셨죠. 너부터 챙기지 말고 장독을 더 들여다보고 수억의 생명체를 먼저 챙기라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1941년생 아버지가 45세에 인수한 양조장에서 같은 나이가 된 1981년생 아들이 전통의 맛을 지키고 있다. 양민호 대표는 매일 새벽 발효실에 들어가기 전 마당에 술을 뿌리며 기도를 올린다.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술에도 정성이 깃든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양조장은 전통과 경험, 기술과 철학이 맞닿는 지점이라는 그의 말은, 양조장이 술을 빚는 공간을 넘어선다는 의미다. 한 잔의 막걸리에 담긴 오랜 여운은 이 같은 정성과 철학의 결실이다. 글 = 배은정 소설가·사진 = 김훈 작가

2025-09-28

장인의 자존심, 열쇠점을 지키는 힘

열쇠업이 전성기였던 1990년대, 포항에는 열쇠집이 70여 곳 있었다. 지금은 열쇠를 복사하려면 수소문해야 할 정도로 줄었다. 그러나 죽도열쇠 김건식 대표는 ‘사라질 산업’이라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열쇠 제작은 기술입니다. 로봇은 사람의 손 기술을 이기지 못해요. 도어록이 보편화되어도 열쇠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의 출장 범위는 아파트와 상가를 넘어 은행, 선박, 군부대, 교도소까지 다양하다. 해병대 출장도 예사다. “군대도 문이 있고 열쇠가 있거든요.” 문이 있는 곳이라면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전성기던 1990년도 중반 부도 겪었지만 기술 하나 믿고 가업 지켜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 신념으로 날마다 새 기술 정진 직접 개발한 디지털 도어록 전국 100여 군데 대리점서 1만개 판매 사양사업이라는 말에 고개 저으며 오늘도 ‘죽도 열쇠’ 역사 써내려가 열쇠 기술자의 하루는 종종 긴박한 구조 현장이 된다. 한여름 차 안에 갇힌 아이를 구한 적도 있고, 현관을 따고 들어가 쓰러진 노인의 목숨을 살린 적도 있다. 119구급대가 활동하지 않던 시절이라 급한 상황에서는 열쇠공이 곧 구조대였다. 반대로 어두운 순간을 마주하기도 했다. 경찰과 함께 들어간 집에서 자살 현장을 목격하거나, 부부싸움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예전엔 손님이 발을 동동 구르면 무조건 달려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먼저 상황을 살펴요. 자칫하면 큰일 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지만 자칫 나쁜 일에 휩쓸리기도 한다. 김 대표는 ‘문을 따는 기술’이 곧 ‘신뢰의 문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요즘은 집주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경찰을 대동하지 않으면 거절한다. 대화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단다. 구체적인 내용은 ‘영업 비밀’이라면서, “은연중에 실수하도록 유도하면, 본인 집인지 아닌지는 몇 마디만 해봐도 나온다”고 했다. 오래 일하다 보니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부도 맞고 큰 시련 겪어 김건식 대표의 성실함은 주위에서 정평이 나 있다. 성실함은 신뢰로 이어졌다. 출장 중에 만난 장모가 딸을 소개할 정도였다. “장모님이 제가 못생겼어도 편하게 해줄 거라며 아내를 설득했죠.” 지금도 장모는 든든한 사위 편이다. 아내 역시 든든한 지원군이다. 집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는 그를 위해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부엌에서 매 끼니를 정성껏 챙긴다. 김 대표의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남의 문을 척척 열어주는 열쇠 기술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먹통인 시절도 있었다. 1990년도 중반, 한창 잘나가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다. 열쇠 도매상을 비롯해 주차장, 세차장, 식당 등 이곳저곳으로 확장해나가던 사업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사람을 지나치게 믿은 탓에 보증 문제가 터진 것이다. 그때 이미 아버지와 방송에 출연하며 이름이 알려져 도망가기도 숨기도 싫었다. 빚더미에 앉은 그는 좋아하던 술을 끊고 오직 빚 갚는 데 매달렸다. “30억 빚을 지고 나니 돈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은 잃었지만 인생 공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건강마저 무너졌지만, 그는 기술 하나를 믿고 다시 일어섰다. “어려운 시기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기술이 있는데 왜 못 살아, 하고 오기가 생기더군요.” 결국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다시 열쇠 앞에 섰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 그는 어머니에게 가게를 팔아 빚을 갚자고 졸랐다. 흔들리지 않고 가게를 지킨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눈물로 버티던 어머니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디지털 도어록 기술 연구에 매진 이후 그는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그가 일을 대하는 원칙은 단순하다.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 열쇠는 정밀 기술이기에 작은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공부하고,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익힌다. 김 대표 스스로 다른 곳보다 비싼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쌓아온 기술 값’이 더해지니 당연하단다. 열쇠 일은 완벽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정밀도를 높이고 오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된다. 디지털이 보편화된 오늘날, 열쇠업은 사양산업일까. 많은 종사자가 열쇠업이 사양사업이라며 떠났지만 김 대표는 오히려 디지털 도어록 기술 연구에 매진했다. 실제로 수요가 많아지면서 설치나 수리 문의가 증가했다. 문제가 생기면 제작사보다 설치 기사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 김 대표는 애초에 고장이 안 나게 만들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예 ‘열쇠 기술자가 만든 도어록’을 직접 개발했다. 회원들과 힘을 합쳐 브랜드를 만들고, 3년간 무상 교환을 내세웠다. 현재 전국 100여 군데 대리점을 통해 판매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만여 개를 판매했지만 AS 요청은 극히 적어 품질이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장인의 자존심을 건 결과다. 김 대표는 디지털 도어록도 완벽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전히 보조 열쇠와 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어록은 사실 보안 수준이 열쇠보다 약해요. 드릴 하나면 뚫리죠.” 그러니 요즘은 디지털 도어록이 마모되면 교체하고, 보조 열쇠를 덧붙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열쇠 자체가 복잡하게 진화 중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열쇠 전문가인 김 대표는 도어록과 자물쇠 중 무엇을 선호할까? 그는 도어록을 쓰지만 무심결에 문을 열어놓고 다닐 때가 많다며 웃는다. 예전에는 낮에는 열어두고 밤에만 문을 걸어 잠갔다. 열쇠를 우체통이나 담장 위에 올려두는 일도 흔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문화였다. 자물쇠 추가 설치를 원하는 고객을 만나도 불필요한 곳이 더러 있단다. 불안하니까 설치해달라고 하지만 사실 시대가 달라졌다. CCTV가 보편화되면서 20년 전과 비교해 도둑 범죄가 확연히 줄었기 때문이다. 열쇠업에 타격을 준 건 디지털 도어록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CCTV일지 모른다. “세상 모든 자물쇠를 열어야 직성 풀려” 생각해보면 열쇠업은 사람들의 불안이 만들어낸 직종이다. 열쇠 기술자의 일은 결국 그 불안을 덜어주고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출근은 아침 8시, 퇴근은 대중없다. 열쇠 하는 사람 두 명이 와서 못 따고 헤매는 걸 김 대표가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한 적이 있다. 그럴 때는 보람이 크다. 하루 수십 건의 출장, 밤까지 이어지는 일과. 몸이 고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는 말한다. “노는 게 더 아픕니다. 옛 어른들 말씀 하나 틀린 거 없어요.” 그에게는 취미가 따로 없다. 젊어서는 당구나 골프를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계를 만지며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딸과 사위가 퇴직하고 가업을 잇겠다고 약속했다. 구순이 넘은 노모도 여전히 정정하고, 10년 넘게 함께하는 제자가 있어서 든든하다. 죽도열쇠가 지켜온 장인정신은 어느덧 76년이 넘어섰다. 벽면에 걸린 수천 개의 열쇠부터 최신의 각종 전자키까지 세월에 따라 자물쇠도 변해왔다. 변치 않은 것은 언제든 달려가 닫힌 문을 열어주는 열쇠공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모든 자물쇠를 열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김건식 대표의 말처럼, 죽도열쇠의 역사는 지금도 힘차게 이어지고 있다. <끝>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24

타고난 열쇠공, 열쇠점의 대를 잇다

포항시 북구 죽도동 칠성천길 64번지에는 76년 된 죽도열쇠 2호점이 있다. 김건식(61) 대표는 2008년 어머니와 함께 꾸리던 사업장에서 독립해 지금의 점포를 열었다. 3층 건물 규모에 각종 열쇠와 자물쇠 보유량, 처리하는 업무량을 감안하면 사실상 본점이나 다름없다. 점포에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메운 수천 개의 열쇠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출장 중인 김건식 대표 대신 손님을 맞은 이는 그와 사제 관계로 인연을 맺은 직원이었다. 벽을 빼곡히 채운 열쇠 위치를 다 기억하느냐고 묻자 “신기하게도 사장님은 다 기억하세요”라고 대답했다. 대충 세어도 2000개가 넘는 열쇠였다. 폐에 총알 박힌 채 평생 전쟁 후유증 겪던 부친 김흥준 대표는 소문난 열쇠 장인 직접 연장 만들어 쓸 만큼 손재주 좋고 지역 은행의 금고 작업 대부분을 도맡아 기계없던 시절 줄질로 하나하나 복사해 손으로 만들던 열쇠는 장난감이자 일상 리어카 타고 아버지 따라다니던 소년의 76년 역사 2호점 벽면엔 수천 개의 열쇠 1990년~ 2000년대 초반 열쇠업 전성기 동료들과 한국열쇠협회 창립에 참여 지난해 ‘국민 재산 보호’ 전국지부 결성 1997년 포항 열쇠인들 ‘긴급 봉사대’ 발족 김건식 대표를 다시 만난 건 7년 만이었다. 2018년, 경상북도 노포기업으로 선정되었을 때, 방송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여전히 자신감의 열쇠라도 쥔 듯 당당하고 거침없었다. 변함없는 또 하나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이었다. 당시에도 녹화 도중 손님 전화를 받아 제작진을 당황하게 했는데, 이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루 평균 50∼60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그 절반은 출장으로 이어진다. 김 대표는 “가끔 전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지만 고객의 문의는 성심껏 답해야죠”라고 말했다. 포항 문덕동에 사는 한 고객의 전화였는데,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요청이었다. 김 대표는 현관문의 사용 연한과 잠금장치 종류를 꼼꼼히 확인한 뒤 방문 일정을 잡았다. 걸려오는 전화 내용은 다양하다. 자동차 키가 말썽을 부린다거나 비디오폰, 도어록 고장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잠긴 문을 열어달라거나 열쇠 복사 문의도 꾸준하다. “포항 열쇠는 아버지가 키워” 고객의 의뢰 내용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여름과 겨울에는 자동문 고장이 잦고, 이사철에는 도어록 교체나 열쇠 복사, 스마트키 설치 문의가 늘어난다. 자동차 키 문제만큼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접수된다. 김 대표는 아버지를 도우며 자연스럽게 열쇠 일을 배웠다. 꼬마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출근했던 그는, 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하교 후에 곧장 난전으로 향해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는 좌판에 열쇠를 늘어놓고 수리도 겸했다.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면 제가 뒤에서 밀었어요. 대부분은 리어카에 타고 왔지만.” 김 대표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웃으며 회상했다.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모든 작업은 수작업이었다. 줄과 줄톱으로 하나하나 열쇠를 다듬어 복사했다. 본격적으로 복사 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으로 기억했다. 줄질로 열쇠를 만들던 시절부터, 열쇠는 그의 장난감이자 일상이었다. 고인이 된 부친 김흥준 대표는 소문난 열쇠 장인이었다. 직접 연장을 만들어 쓸 만큼 손재주가 뛰어났고, 지역 은행의 금고 작업은 대부분 도맡았다. “포항 열쇠는 우리 아버지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대표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어릴 적부터 이웃들은 그에게 “네 아버지처럼 살아라”고 말했다. 부친의 솜씨는 경북 동해안 전역에 알려져 울진까지 출장 요청이 이어졌다. 김 대표도 아버지를 따라다니곤 했다. 한 번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구룡포를 향했는데, 막 지은 여관에 도착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버스와 땀 흘리며 일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교통 여건이 열악했던 당시에는 출장을 다녀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1985년에 첫 자동차를 마련해 기동력을 높였다. 거금 500만 원을 들인 프라이드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열쇠업의 전성기 부친은 전쟁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겪었다. 총알이 폐에 박힌 채 살아야 했고, 요양을 위해 제주도로 옮겨갔다. 제주에서도 열쇠공 제자를 둘 만큼 열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부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가업은 김건식 대표가 이어받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열쇠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김 대표는 동료들과 한국열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90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창립총회는 언론에 ‘이색 모임’으로 보도되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중소기업회관 2층에서 ‘열쇠인’들의 이색적인 모임이 열렸다. 열쇠 수리 판매 제작 등의 종사자 500여 명은 이날 한자리에 모여 ‘한국열쇠협회’의 실질적인 창립총회인 서울지부 결성식을 가졌다. “지난해 잇따라 은행 금고가 털리고 거액의 현금을 실은 수송차량이 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열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지난해 7월 동료 열쇠인 10여 명은 함께 모여 협회 설립의 뜻을 모으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전국지부 조직 결성에 착수했다. 협회 측은 전국에 단독 점포를 개설한 열쇠업자는 1만여 명이며 노점-행상과 철물점 구두수선 등의 겸업을 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4만∼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 「국민 재산-생명보호 거창한 주장 이색 ‘한국열쇠협’ 창립」, 『조선일보』 1990년 4월 27일자. 김 대표는 “80년대 후반부터 동료 열쇠인들이 모여 협회 창립을 의논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열쇠협회 경북도지부 이사직을 역임하며 지역 열쇠업 발전과 전문열쇠기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과 정보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때는 국산 자물쇠 열 개가 미제 하나를 못 당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내 기술이 형편없었어요.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요.” 김 대표는 국내 기술 발전 과정을 몸소 체험한 세대다. 포항 지역 열쇠인들은 1997년 ‘긴급 출동 봉사대’를 발족하기도 했다. 당시 열쇠를 이용한 범죄와 화재를 비롯한 각종 재난과 응급 상황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사고 예방과 대처에 앞장서기 위한 취지였다. 양로원이나 보호시설을 대상으로 한 봉사활동, 119와 협력한 긴급 출동이 대표적이었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회원사에서 각종 문고리와 열쇠, 자물쇠를 기부받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본격적인 활동으로 이어가진 못했다. 세대를 이어온 성실함과 책임감 2000년대 들어 열쇠업은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튼튼한 수동열쇠는 여전히 인기지만 새롭게 전자열쇠가 등장하면서 다양해졌다. 특히 자동차 열쇠가 판도를 변화시켰다. 2004년 이후 자동차에 도입된 ‘이모빌라이저(immobilizer․ 열쇠마다 고유 암호를 부여하고 자동차에서 나오는 신호와 일치해야 시동이 걸리는 방식)’가 한 예다. 도난 방지에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간혹 차가 잠겨버려 차 주인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외부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고액의 비용을 치르고 견인 차량을 불러야 했다. 혼쭐이 난 차 주인들이 열쇠 복사를 부탁했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전에는 눈대중해서 감각에 의존해 수가공으로 열쇠를 복사했다면, 이제는 고도로 복잡한 셈법이 필요했다. 전자칩이 내장된 자동차 키는 고도의 장비와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새로운 게 계속 나오니까 늘 긴장하고 연구해야 해요.” 김 대표는 틈만 나면 자물쇠를 들여다보고 연구에 몰두한다. 김 대표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죽도열쇠에 전화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문을 열어주는 기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열리지 않는 자물쇠도 풀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쌓인 결과다. 세대를 이어온 장인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열쇠’를 넘어 ‘신뢰’를 열어낸 것이다. 글 : 배은정 소설가 사 진 : 김 훈 작가

2025-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