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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를 팔기도

등록일 2025-10-29 19:30 게재일 2025-10-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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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노포 기행 시민제과-시민들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제과점②
시민제과를 대표하는 찹쌀떡.

단팥죽과 찐빵은 군것질거리가 아니라 분에 넘치는 훌륭한 식사 대용의 음식이었다. 그것을 먹는다는 자체가 그 시절에는 황홀한 사치였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거기에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이었다. 단것이 그리운 시절이었다. 팥의 효능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액귀를 쫓는다는 주술적 의미를 넘어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재료였다. 창업주는 그런 점에 주목했던 듯하다.

2대 진상득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대한광업진흥공사라는 모두의 선망을 받는 직장이었다. 선친은 가업을 이어받기를 종용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하게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아버지의 굽은 어깨, 어머니의 새벽길을 나서는 연약한 실루엣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영원히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는 법, 언젠가 귀향해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자식의 입장임을 고려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결단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인생 2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줏빛 팥죽에 하얀 새알 경단 동동
첨가하는 설탕 몇 스푼은 은혜의 음식
그시절, 군것질거리아닌 황홀한 사치

 

대학 졸업후 번듯한 직장 잡았지만
좀 더 젊었을 때 부모님 모시기로 결단
2대 진상득 대표의 인생 2부 막 올라

 

1963년 지금의 자리에 터전 잡고
포항시 1호 제과점인 ‘시민제과’ 탄생
전국제과인들 모임 결성해 정기 모임

 

국내 유명한 빵집 물론 유럽도 방문
기술·실내장식·매장 시스템 등 연구
한 시간에 100개 넘는 케이크 팔리기도

 

 

1963년에 포항시 1호 제과점이 돼

막상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제과에 대해 아무런 정보와 기술이 없었다. 먼저 매장을 바꾸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의견을 듣고 최대한 반영해 따르기로 했다. 굴러온 돌 행세를 하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자신은 경영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제품 개발 회의에 참석할 때는 가급적 발언을 삼가고 의견을 청취했다.

두 베테랑의 도움이 컸다. 현재 두 사람 중 한 분은 은퇴했고, 다른 한 분은 고문으로 내부의 자잘한 일을 처리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기숙사가 있어서 직원들이 선친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고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업무에는 무척 엄격했지만 평소에는 한없이 너그러워서 직원들이 잘 따랐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일찍 직업전선에 나선 어린 직원들에게는 학업을 병행하게 했다.

1963년에 지금의 자리로 터전을 잡았다. 포항시 1호 식품접객업소로 등록했다. 그러니까 포항시의 1호 제과점이 된 것이다. 그때 ‘시민제과’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진상득 대표는 제과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터라 관련된 책을 모조리 섭렵했다. 매장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잘 운영되는 가게를 찾아다니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열심히 받아적고 사진을 찍었다. 직접 배우기도 하고 직원을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제과인들의 모임을 결성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 것이었다. 대전의 성심당이나 군산의 이성당, 서울의 김영모과자점, 광주의 궁전제과의 주인들이 그 모임의 멤버였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빵집의 오너들이다. 지금은 모두 은퇴해 자연인으로 살고 있지만 제과산업의 발전을 위한 진정성은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열정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다고 진상득 대표는 회고했다.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업계의 모든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난상토론을 했다. 그 모임은 제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진 대표에게 살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산업현장을 방문했고 관련된 박람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관했다. 멀리 유럽의 유명한 빵집들도 방문했다. 직접 보는 만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빵 기술뿐만 아니라 실내장식. 매장 구조. 주방 시스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차곡차곡 쌓이는 경험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시민제과의 옛 모습(1981. 12).

많은 시민이 시민제과에서 행복을 누려

찹쌀떡은 참 좋은 상품이었다. 속이 보일 듯 말 듯 한 투명하고 쫀득하며 부드러운 앙금은 금세 전국적인 제품이 되었다. 높은 온도에서 갓 구워낸 단팥빵은 그 쫄깃함과 더불어 부드러운 앙금 맛으로 시민제과 최고의 제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같이 곁들이는 음료도 꾸준하게 개발했다. 우유의 시대를 지나 그 변형의 일종인 밀크셰이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각사각 씹히는 우유 알갱이와 혀에서 녹아나는 아이스크림은 최고의 디저트였다.

부단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당시만 해도 위생적인 문제로 포장지에 넣은 제품을 고객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포장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영업방식이었다. 진상득 대표는 그런 과거의 시간을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모든 제품을 출고되는 대로 판매대에 올려놓고 고객이 직접 집게로 선택하도록 영업방식을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획일화된 제품을 무의식적으로 판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감각과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제품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선택은 당신의 몫이요, 우리가 하는 최선의 노력을 당신이 결정하면 된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겸허히 수용하리라, 더 헌신하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고객들은 신선한 시도에 대해 호응해주었고, 그런 시도는 위생과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당돌하고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객들의 신뢰는 그 위험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하나하나의 제품을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넣어주는 작업과 투박하지만 은근한 멋을 풍기는 종이봉투는 금세 하나의 트랜드가 되었다. 고객들에게 최소한 나는 시민제과의 빵을 먹는다는 은근한 자부심과 맛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은연중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시민제과는 그렇게 포항을 대표하는 제과점으로 시민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수많은 가족이 시민제과의 빵과 음료로 행복을 누렸고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1981. 12).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해

시민제과 건너편에 시민극장이 있었는데 시민제과에서 만든 양갱을 극장 휴게소에서 팔았다. 양갱 역시 팥의 연장선상의 제품이다. 양갱은 화과자의 일종으로, 다른 제품들과 더불어 나름의 윤택함과 잠시나마의 활력을 제공하는 지참물이었다. 팝콘의 원조랄까, 그 당시 시간을 단축해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시대는 급변한다. 피자헛이 시민제과 앞에 화려하게 개장했다. 각종 브랜드를 내건 제과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반 가게에서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빵들로 넘쳐났다. 삼립식품이 대표적이었다. 동네 빵집도 제법 늘어났다. 당시 시민제과는 크리스마스 때면 한 시간에 100개가 넘는 케이크가 팔려나갈 정도였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때는 경찰들이 시민제과 앞에서 교통정리를 할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형 브랜드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민제과 양옆에 있는 태극당과 신화당과의 경쟁에도 힘에 부치는 판인데, 시대의 도도한 흐름인 물량과 저가 공세에는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할 만큼 했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들었다. 일의 특성상 매장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속도가 생명인데, 주어진 시간 안에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시설 혹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한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진상득 대표 역시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쫓아가기에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잠시 시민제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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