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노포 기행] 코주부사-포항 한복판에서 수많은 학생의 명찰을 새긴 마크사②
“이육사 선생 삼륜포도원으로 직접 안내”
‘청포도’ 시상 포항 구상 결정적 증거 제시
한흑구가 회장을 맡은 ‘흐름회’ 포함해
지역 문화단체 후원자로도 지대한 역할
코주부사 한편에 오래된 작업대가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업대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쓰던 것이다. 독특한 모양에 고졸미(古拙美)가 느껴지는 것이어서 눈독을 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코주부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단면이다.
코주부사를 시작한 김대정은 어떤 사람일까. 박영준 대표에 따르면 김대정은 1915년쯤 포항에서 태어났다. 어느 학교를 다녔고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코주부사를 개업하기 전에 지금의 두꺼비약국 옆에서 ‘보리밭’이라는 다방을 운영했고, 자택은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후문 쪽에 있었다고 한다.
포항에서 발간된 어떤 문헌에도 그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한 점포의 주인에만 머무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포항의 문화예술과 체육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많이 도왔다. 다만 그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해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육사가 포항 동해면에 있던 포도농장에서 「청포도」의 시상(詩想)을 얻었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다.
그러면 육사는 「청포도」의 시상을 어디에서 떠올렸을까. 이에 대한 해답이 나온 것은 지난 1970년대 초였다.
당시 포항지역 문화단체 후원자이면서 이육사 생존 시 친교했던 심당 김대정(80년대 초 작고) 선생이 어느 날 지역의 몇몇 문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결핵 요양차 포항의 송도원에 머물던 이육사 선생이 찾아와 직접 동해면 도구리의 삼륜포도원으로 안내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육사는 이후 나에게 삼륜포도원에서 청포도의 시상을 얻었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시 초안을 잡은 것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중략)
김대정 선생이 아꼈던 후배이자 한국문인협회 포항시 지부 창립회원으로 그 자리에 동석했던 박이득(63·전 언론인) 씨의 증언이다. 수필 「보리」의 작가로 육사와 교류했던 한흑구(1979년 작고) 선생도 1973년 『시문학』지에 이육사의 청포도에 관한 문학적 배경이 영일만이라고 설명하는 짧은 수필을 발표했었다.
- 「영일만의 이육사」, 『서울신문』, 2004년 10월 7일.
“김대정은 푼돈 모아 목돈 쓴 사람” 회상
포항 로터리클럽 회장 맡으며 기부·후원
형편 어려운 학생들 위해 학비 보태기도
이육사가 다른 지역에서 「청포도」의 시상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포항에서 구상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김대정이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포항지역 문화단체 후원자’였다. 이 문화단체는 한흑구가 회장을 맡은 ‘흐름회’를 말한다. 1968년 12월에 창립된 흐름회는 문학의 밤, 백일장, 전시 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 문화예술이 성장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흐름회 회원은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한흑구(수필가), 박영달(사진작가), 김대정, 최정석(효성여대 교수), 김녹촌(아동문학가), 신상률(사업가), 김상훈(부산일보 논설위원), 최성소(조선일보 기자), 손춘익(아동문학가)이 그들이다. 김대정이 흐름회를 포함해 문화예술계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신문 기사가 있다.
포항의 흐름회를 말할 때 심당 김대정 씨를 잊을 수가 없다. 10년 동안 이 모임을 뒷받침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애호가’로 알려진 김씨는 흐름회를 뒷받침하는 이외에도 체육, 음악, 등산 등 이 지방 문화행사를 도와주고 있다. (중략) 흐름회가 10년 동안 문화사업을 해온 배경을 회원들은 “심당이 있었기 때문”으로 말하고 있을 정도다.
- 「同樂의 길-흐름會」, 제호(題號) 미상, 1977년 1월 23일.
수준급 실력으로 ‘경북럭비협회 부회장’
동생 김대호·이호진 함께한 포항MIG팀
전국대회서 여러 차례 우승컵 휩쓸기도
동생과 함께 포항 대표 럭비 선수로 활약해
흐름회 회원명부에 김대정의 직업은 ‘산악인’으로 적혀 있다. 그가 산을 어느 정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가 운영하던 코주부사가 포항에서 처음으로 등산복과 등산용품을 취급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가 동생과 함께 전국 무대에서 맹활약한 럭비 선수였고 경북럭비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6·25사변 무렵의 포항에는 유도와 축구, 럭비, 복싱 등 격렬한 운동이 바다 사나이들의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포항 럭비는 전국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었고, 김대정, 김대호 형제와 이호진 등이 가세한 당시 포항 MIG팀은 전국대회서 여러 차례 우승컵을 안았다.
- 『포항시사』, 2010년, 208쪽.
김대정의 동생 김대호는 울릉군수(1988. 6. 10.〜1989. 6. 14.)와 예천군수(1989. 6. 15.〜1991. 1. 14.)를 역임한 공직자였다. 박영준 대표는 김대호를 인물이 훤하고 체격이 좋았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박영준 대표 부부는 김대정을 ‘푼돈 모아 목돈 쓴 사람’이라고 떠올렸다. 코주부사에서 번 돈을 문화예술과 체육계에 후원한 것은 물론 포항 로터리클럽 회장을 맡으며 기부도 꽤 했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썼으니 정작 자신의 형편은 어땠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흑구와 김대정의 인연
한흑구는 김대정의 6년쯤 선배인데 두 사람의 성품은 여러 면에서 겹친다. 한흑구도 보성전문학교에 다닐 때 축구 선수로 뛸 만큼 운동을 잘했다. 미국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덩치 좋은 흑인 청년과 시비가 붙었을 때 ‘평양 박치기’로 가볍게 제압했다는 무용담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 에피소드는 일제강점기 때 소설가 이석훈이 쓴 글에도 나온다.
흑구는 (…) 미국에 평양식 헤딩(머리로 밧는 것)의 위력을 소개한 최초(?)의 人이다.
- 이석훈, 「문학풍토기-평양 편」, 『인문평론』 1940년 8월, 78쪽.
한흑구는 서울과 부산 피난 시절 문우들의 술값과 밥값은 물론 용돈까지 챙겨주었다. 오천 미군 부대에 근무할 때는 전쟁 때 초토가 된 포항에 숱한 선행을 베풀었다. 한흑구와 김대정의 행적을 볼 때 두 사람이 흐름회를 매개로 의기투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인연이라 할 수 있다. 한흑구의 서울 시절 가장 가까웠던 주붕(酒朋)이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였는데 포항에 정착한 후의 주붕은 김대정이었다.
김대정은 1978년에 코주부사를 양자처럼 여긴 박영준에게 물려주었고, 이듬해 11월 한흑구가 별세했다. 그 후로 흐름회 활동은 눈에 띄는 게 없고, 김대정이 어떻게 지냈는지도 알 수 없다. 김대정이 언제 작고했는지는 신문 기사와 증언이 엇갈린다. 앞서 언급한 『서울신문』에는 1980년대 초라고 나와 있는데 박영준 대표는 김대호가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990년대 초라고 말했다. 정황상 1990년대 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이 돕고 베풀었는데 나이 들고 병들자 찾아오는 사람이 없더군요. 포항의료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김대정의 황혼을 얘기하던 박영준 대표 부부의 표정에 잠시 그늘이 졌다.
포항 한복판에서 수많은 학생의 명찰을 새기던 코주부사. 지금은 문이 잠긴 그 노포에 아름답고도 쓸쓸한 이야기가 있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